내 인생의 멘토

시골의사가 던진 부메랑

일취월장7 2011. 10. 20. 16:42

시골의사가 던진 부메랑
[37호] 2011년 10월 10일 (월) 20:05:43 김완 info@ilemonde.com

‘시골의사’라는 그의 사회적 포지션은 기묘하다. 물론 ‘시골’과 ‘의사’가 조합되지 말란 법은 없다(오히려 조합되지 않으면 더 큰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는 2011년의 한국 사회다. ‘전 국토의 도시화’라는 표현으론 부족한, 모든 게 서울로 향하는 것을 넘어 이젠 지역마저 서울 중에서도 강남을 표방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다. 어디 그뿐인가. 한국 사회에서 직업 선택 문제는 단지 경제적 여건이 결정되고 생활수준을 비롯한 사회적 지위가 매겨지는 것을 넘어서는 일종의 사회적 제례와 같다. 이르면 출산 이전부터, 아무리 늦어도 유아기에는 시작되는 거대한 사교육의 행렬은 종국에는 특정한 몇몇 직업을 갖는 것을 목표로 늘어서 있다. 의사는 바로 그 몇몇 특정한 직업을 대표하는 명사다.

그래서 시골의사란 표현은 2011년의 한국 사회를 향한 신성모독처럼 들린다. 더군다나 그 시골의사는 정년이 보장된다는 이유만으로 범국민적으로 공무원의 꿈이 장려되는 사회에서, 실패한 청춘들의 ‘멘토’를 자처한다. 이 기묘한 조어의 이해할 수 없는 행위는, 그의 동료인 안철수를 사회적 현상으로 만들어내며 걷잡을 수 없는 에너지로 한국 사회를 엄습하고 있다.

실패한 청춘들의 ‘멘토’ 자처

   
▲ 박경철, <시골의사 박경철의 자기혁명>
<시골의사 박경철의 자기혁명>(리더스북 펴냄)은 분류가 애매한 책이다. 에세이 형식의 자기계발서인 이 책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성공을 부정하는 듯한 뉘앙스에서 동시에 세상의 거의 모든 것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박경철은 청춘의 멘토를 표방하면서 실천하는 비판가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때로 자신의 독서력에 자부심을 뽐내는 지성인의 면모와 청소년 문제에 궁상맞을 정도로 몰입된 다정한 선배의 모습을 보인다. 박경철의 종횡무진은 그가 표방한 ‘시골의사’라는 조어만큼이나 기묘하다. 종합적으로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들이 청춘이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데, 그가 상정하는 청춘이 일체의 화학적 요소를 배제한, 지나칠 정도로 정밀하게 생물학적인 청춘만을 의미해서 생물학적 청춘을 벗어난 이들이 읽기는 다소 민망할 정도다.

박경철은 “우리 헌법에는 신자유주의적 질서에 반대하고, 경제력 남용과 분배의 왜곡이 일어나지 않도록 적절히 개입해야 한다”는 헌법상 경제 민주화 조항(제119조 2항)을 강조하며 “시장만능주의가 미래를 어둡게 한다”고 규정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꿈을 이룰 수 없는 가장 큰 걸림돌이 자신의 노력 부족이 아니라 사회구조적 문제와 환경, 여건 등이라고 생각”하는 청춘들을 질타한다. 그래서 그는 ‘창의의 시대에 스펙 쌓기는 낡은 관습’이라고 역설하면서도 “청춘은 특권이고, 실패는 경험이 되고 기회는 늘 손에 닿는 거리에 있다”는 진부한 결론을 피해가지 못한다.

물론 청년을 향한 충고가 ‘올 오어 너싱’(All or Nothing·전부 아니면 전무)의 성격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박경철의 이중고를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박경철은 우상화된 성공이 성공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모든 성공한 사람들이 지닌 습속과 버릇의 문제, 그의 표현을 빌리면 ‘에티튜드’(Attitude)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자기혁명’이란 거창한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책의 결정적 한계를 보여준다. 시골의사 박경철은 분명 이중적 포지션이고, 이중성의 지점에서 박경철이 말하는 ‘혁명’이란 우리가 개념적·관념적으로 연상하는 혁명이 아닌 그저 ‘좋은 사람이 되자’는 수준의 낭만적 덕담을 다소 철학적 설명에 빗대 사회·경제적으로 번안한 것에 불과하다. 상식이 부재한, 그래서 그 상황을 뒤엎는 것을 혁명이라고 이해하는 사회에서 박경철은 ‘혁명’이란 제목을 단 책을 내며 버젓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상식만 얘기하는 셈이다.

성공 따위? 문제는 애티튜드?

그래서인지 이 책에는 그가 청년들과 논쟁한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대체로 사람들은 멘토를 자처한 그의 공감 능력에 만족한 듯 보인다. 하지만 논쟁을 거치지 않은 그 만족은 성공한 이력을 가진 박경철을 바라보며, 도저히 그런 성공을 누릴 가망성이 없는 청춘들이, 차마 그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그저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 감읍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흡사 용이 되기를 꿈꾸지만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이미 문헌의 것이 된 상황에서, 개천에서 난 용이 분명한 어떤 이가 개천에서만 용이 나는 것은 아니라는 걸 논리적으로 설명해주기에 발휘되는 ‘도취적 공감’과 같다.

이는 일종의 ‘쾌락의 평등주의’라고 볼 수도 있다. 그도 행복하지만 너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자신의 행복으로 증명하는 방식이다. 박경철의 이런 얘기는, 그와 나 사이에 놓인 근본적 불평등의 문제에 대해 둔감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위험한 전략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무언가 이루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 최선을 다하는 삶 그 자체가 중요”하며 “하필 행운의 여신이 나만 피해갈 리 없고, 하필 불행의 여신이 내 발목만 잡을 리도 없다”는 선문답스럽지만 동시에 지극히 상투적이고, 노골적으로 젊음의 아드레날린을 자극하는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박경철의 이런 모습은 자기계발서가 가진 미덕이자 동시에 악덕일 수도 있다. 부단한 노력을 통해 과정의 밀도를 쌓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삶의 주인이 된다는 얘기는 ‘공자님이 가라사대’를 할 때부터 있은 전형적인 어른들의 논리를 답습하는 것일 뿐이다. 박경철의 주장은 세련돼 보이지만 결국, 청소년이야말로 미래의 주역이라 칭하면서도 정작 청소년들의 오늘에 관심을 갖는 것은 불손한 일로 치부하는 ‘꼰대’들의 논리와 닮아 있다.

결정적으로 논쟁과 노동이 없다

물론 다른 의사들이 종합병원 과장을 꿈꾸거나 서울 강남에 개원하는 걸 목표로 열심히 에스테틱(Aesthetic) 클리닉을 운영한 것에 비하면, 박경철의 지난 시간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시골의사라는 사회적 포지션을 점하고 그가 누리는 사회적 권위 역시 이제 만만치 않은 것이 되었다. 그는 ‘의사가 나 같은 잉여의 삶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준다’는 공감 능력을 넘어 직접 그들의 삶에 개입할 수 있을 정도의 영향력을 갖춘 명사가 되었다. 그 능력으로 인기 작가의 반열에 올랐고, 어쩌면 차기 대선에서 친구를 대통령으로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이 더 중요한지 모른다. 박경철과 그의 친구 안철수가 보기 드문 ‘어 퓨 굿맨’(A few good man)인 점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곧 새로운 리더십을 입증한다고 볼 순 없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멘토가 아니라 논쟁이고, 혁명의 주체는 자기계발 프로젝트의 수행자가 아니라 언제나 생존을 위해 노동하는 사람들이다. 박경철은 기존 자기계발 담론이 간과한 신자유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을 간과하지 않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역시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 담론의 유행에 몸을 싣고 있다는 점은 불길하다. 이는 그가 시골과 의사라는 두 개의 지표를 동시에 선취하고 있다는 점과 묘하게 닮았다. 현실을 적당히 수렴하며 미래를 얘기하는 이중 플레이와 다름없다.

10명의 박경철, 100명의 박경철이 존재한다면 분명 세상은 점점 좋은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다. 하지만 2011년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그런 상상은 사치스럽다. 박경철의 해법이 당장에 시트콤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에 나오는 고시생 백진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백진희는 자기혁명이 되지 않아 고시원 월세조차 마련하지 못하는 것일까? “냉소적인 표정과 선연한 눈빛을 주체하지 못하는”(6쪽) 어떤 청춘에게 자기혁명을 강요하는 박경철의 주문은 또 얼마나 잔인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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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완
<미디어스> 기자. ‘문화연대’ 활동가를 거쳐 매체비평지 <미디어스>에서 기자를 하고 있다. <안철수 밀어서 잠금해제>(메디치 발간 예정)를 공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