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동맹 vs. 민주동맹, 승자는?
[이충렬 칼럼] 일본의 공습으로 드러난 친일동맹
2019.08.26 09:11:24
1. 일본의 공습으로 드러난 친일동맹
지난 7월 초 일본 정부가 느닷없이 한국 반도체기업에 필수적인 3가지 소재를 수출관리품목으로 지정하고, 한달 뒤에는 한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하는 경제적 '진주만 공습작전'을 전격 단행했다.
한국 대중은 즉각 반응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라는 7년전쟁의 기억과 백년전 36년간의 식민지통치를 경험했기에 '또 일본이!'라는 본능적 판단하에 거국·거족적인 대항운동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다. '일본제품을 사지 않는다', '일본에 가지 않는다' 그리고 이 사달에 대한 책임을 묻기위해 'No Abe'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
정부는 상대적으로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대응하고 있다. 이번의 사태를 맞이하여 우리 산업의 구조적 문제점을 직시하고 이를 극복하는 방안, 그리고 동아시아 안보구조에서 한국의 독자적 영향력을 강화하여 일본의 견제를 뚫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기독교보수세력, 그리고 일부의 식민지근대화론자 등의 반응이었다. 기습공격을 한 일본을 비판하기보다 기습당한 '문재인 정부'를 비난하거나, '일본에 무조건 사죄하라'는 주장에서 '이제 우리는 망했다'는 논조까지 등장하고 있다.
즉 일본 극우세력이 한 수를 놓자마자 한국의 친일세력이 공조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필자는 이 현상을 접하면서 비로소 한가지 사실을 확연히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동아시아에 '친일동맹'이라는 정치적 흐름이 깊숙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시야가 한국의 여야대결에 머물러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지난 백년간 일본이 축적해온 거대한 네트워크가 작동하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동시에 한국의 대응을 거시적으로 분석하고 대응할 때, '문재인정부'라는 분석틀로 한정해서 이해해서도 안된다. 현재의 '촛불정부'와 '시민사회'를 '민주동맹'이라는 개념틀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친일동맹과 민주동맹의 역사적 기원과 뿌리 그리고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할 때 이번의 '일본공습'을 더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2. 친일동맹의 역사적 뿌리
1592년 임진왜란을 앞두고 조선의 조정은 두 의견으로 나뉘었다. '일본이 침략할 것이다.' '아니다 침략할 능력이 없다.' 이때는 정세판단을 둘러싼 논쟁이었다. 물론 그 기저에는 당파적 이해관계가 놓여있었다. 아직 조선 내부에 친일파는 없었다.
그런데 1876년 개항이후 사정이 달라졌다. 초기 김옥균을 위시한 개화파들은 일본에 기대를 걸었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배신당했고, 일본은 군국주의로 치달으며 조선을 강제로 병탄했다. 그리고 그들은 36년간의 지배통치를 통해 경제적 수탈에 그치지않고, 조선민족의 영혼과 정신조차 뺏으려 하였다. 이것은 유럽열강의 식민지배와 전혀 다른 유형이었다. 내선일체라는 기치하에, 조선의 말과 글을 금지하여 조선인을 일본사회 내의 '천민계급화'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이로 인해 조선인 중에는 자발적으로 일본에 충성하고 심지어 더 일본인화한 사람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1945년 일본의 패배로 태평양전쟁이 끝나자 한반도의 일본군과 일본인들은 황급히 본국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것이 적산가옥만은 아니었다. '방대한 규모의 친일파'를 남긴 것이었다. 불행한 것은 이들 친일파가 대한민국 정부수립에서 주도권을 쥔 것이었다.
이승만정부는 이승만이라는 독립운동가와 친일세력의 합작품이었다. 내용적으로 친일파가 정권의 요직을 장악했지만 대외적으로는 반일을 내세웠다. 그런데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5.16군사쿠데타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 5.16 쿠데타의 주도세력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일본제국 군대의 하급무사출신'이었다. 일본 육사와 만주군사학교 출신들 그리고 일제하 헌병과 경찰, 문관에 복무한 출신들이 한국사회의 헤게모니를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박정희라는 권력의 정점을 중심으로 친일파들은 결집하였고, 또 이 구심점을 통해 일본의 극우세력과 긴밀한 네트워크를 재건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아이덴티티는 '비록 조선인 출신이지만 일본인보다도 더 일본적인 사무라이정신'을 소유한 제국군인이었다. 일본을 근대화시킨 메이지유신을 이룩한 사무라이에 대한 존경심과 태평양전쟁을 밀어부친 일제군국주의자들에 대한 깊은 흠모가 박정희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것이다.
독립운동가 장준하의 회고록을 보면, 해방직후 무장해제된 일본군 잔당이었던 박정희를 만난 장면이 나온다. 박정희에게 갑작스런 질문을 던지자 '유창한 일본어'로 잘못했다는 말을 해서 장준하가 핀잔을 주었다는 대목이다. 박정희의 재임시절, 청와대에서 일본사무라이 드라마를 즐기거나 일본군 장교복을 입고 일본도를 차는 것을 즐겨했다는 것도 비밀이 아니다.
사무라이로서 박정희의 집념을 엿볼 수 있는 것이 '10월유신'이다. '조국근대화'라는 국가 제일의 어젠다를 헌정중단의 쿠데타로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그는 그것을 자신이 진심으로 흠모하는 메이지유신을 본떠 '10월유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국경제가 국제분업체계에 접목되는 과정은 일본의 하청기지로서 시작하였다. 한국경제는 세계 모든 국가에서 땀흘려 번 돈을 일본에 갖다 바치는 무역구조를 수십년째 지속해왔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이명박-박근혜정부로 이어지는 동안 한국의 친일파들은 더욱 내밀해지고 더욱 강고해졌다. 그 결정적인 계기의 하나가 '뉴라이트'의 등장이다.
뉴라이트 이전에 '친일동맹'은 정치적으로 '기시 노부스케', 이토추상사의 '세지마 류조' 등 극우파들의 조종을 받았다. 경제적으로는 한일 분업체계속에서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그런데 '뉴라이트운동'은 일본을 동아시아의 지배세력으로 숭상하는 '이데올로기'로 볼 수 있다.
대동아공영권의 부활을 꿈꾸는 일본 극우세력은 1990년대부터 적극적으로 조직을 확장하고 국제적으로 영향력을 확장하였다. 여기에 부응한 세력이 한국의 민주화운동세력 중 일부였다. 주사파나 PD파 중에서 급진적인 전망이 무산되자 이들중 일부는 일본 극우에 붙어서 한국에 나팔수 역할을 자청했다. '자학사관'이니 '식민지근대화론'이니 하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일본의 극우파는 한국의 친일파를 이념적으로 묶어내기에 이른다. 이쯤되면 '피는 물보다 진하다'가 아니라 '친일이념이 민족보다 우선이다'라고 보아도 틀림이 없다. 여기서 형성된 것이 이른바 21세기의 새로운 '친일동맹'이다. 오늘날 남한사회에서 친일파들이 보이는 언술이나 태도가 이런 맥락에서 보면 잘 이해가 된다.
3. 민주동맹의 역사적 뿌리
김대중정부, 노무현정부, 문재인정부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민주정부라는 공통점으로 엮여있다. 오랜 민주화운동의 산물로써 탄생한 정권이다. 그런데 남한의 민주화운동세력은 스스로를 부르는 용어가 통일되어 있지않다. 민주세력, 민주개혁세력, 민주진보세력, 또는 개혁진보세력 등 사람마다 다양하게 부른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집권세력인 ANC(아프리카 민족회의)처럼 하나의 정당이 민주화운동세력을 대표하는 것도 아니다. 민주당이 있고 정의당이 있고, 참여연대와 민주노총 등 다양한 층위의 세력들이 각자 도생하고 있다.
필자는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군벌정권에 대한 '민주동맹의 투쟁사'로 본다. 오늘날의 민주정부의 근원을 찾아보면 그 기원이 '1971년의 대통령선거'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김대중과 김영삼의 반박정희 투쟁이 시작되고 10월유신 이후 민주회복운동(당시에는 이렇게 불렀다)이 본격화되면서 오늘날의 민주화운동으로 발전했다.
1971년부터 1987년에 걸치는 영웅적인 민주화투쟁은 결국 6월항쟁의 승리를 끌어냈다. 이 주체를 '민주동맹'이라고 보는 이유는 김대중이 대표한 호남과 김영삼이 대표한 PK지역 그리고 대학생을 비롯한 지식인활동가들의 3각동맹으로 이루어낸 투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21세기가 된 오늘까지도 '친일동맹'과 '민주동맹'의 전투가 현재진행중인 이유는 일제잔재와 군부독재의 잔재를 청산못하고 지연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민주동맹 상층부의 분열과 지도력 부진에도 기인한 바가 크고, 또 다른 면에서는 남한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친일동맹'의 뿌리와 파워가 막강하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4. 민주동맹 VS 친일동맹의 대혈투
일본의 이번 기습전은 한국의 미래에 타격을 가하기 위한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한국의 부상을 견제하고, 산업적으로는 새로운 4차산업혁명으로의 진군을 가로막고 안보적으로는 한국을 한미일 삼각축에서 밀어내려는 것이다. 일본 계산으로는 미국에 철저히 숙이면서, 한국을 밀어내면 미국과 중국사이에서 한국은 미아가 될 것으로 보는 것이다. 또 한국을 국제분업체계에서 고립시키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친일동맹'은 이 일본의 구도를 앞장서 관철하는 나팔수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이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민주동맹이 이때까지 보인 최대의 맹점은 상층부의 분열과 토대의 빈약함이다. 자신의 이념과 가치를 확고히 통일시켜내지 못하고 정치권에서 생존을 중심으로 살다보니 상층부는 지난 30여년 끊임없이 분열해왔다. 그 당연한 결과로서 정당은 대중정당을 지향하지만, 대중적 토대는 매우 약하다. 그나마 노무현 대통령의 사후 최근 10년간 IT기술이 접목되면서 정치적 대중의 토대가 조금씩 강화되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결정적 전기는 촛불혁명으로 나왔다. 밑으로부터의 대중투쟁에 떠밀려 진행되어온 민주동맹은 이제 한국사회가 민주혁명의 동력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확실히 자각하게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문재인정부'는 자신을 '촛불정부'로 명명하였다. 촛불혁명의 가장 큰 성과는 '시민사회'의 성숙이다. 그야말로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화된 힘'이 한국사회에 출현한 것이다.
촛불혁명으로 성숙해진 '시민사회'를 '민주동맹'이 어떻게 접목하는 지에 따라 '촛불정부'의 승패도 결정될 것이다. 동시에 '친일동맹'을 극복할 에너지도 확보될 것이다. 이번 일본과의 대결에서 선방하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 내부의 '친일동맹'을 철저히 솎아내야 할 것이다. 21세기 대명천지에 대동아공영권을 다시 꿈꾸는 일본극우의 음모를 보기좋게 깨트리자!
"일본인은 극우의 망망대해에 살고 있다"
[프레시안 books] <일본 '우익'의 현대사>
2019.08.25 13:51:46
1950년 10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을 11개월 앞두고 연합군최고사령부(GHQ)는 일본 전범들에 가한 공직 추방 조치를 해제한다. 전후 세계에 들불처럼 번지는 공산주의 대항을 위해 이들의 관료적 실력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1951년 2월 8일, 점령군의 감시를 피해 흩어졌던 우익들이 '조국방위간담회'를 열고, 이 회의는 이후 '대일본애국단체연합·시국대책협의회'로 이름을 바꾼다. 일본 우익이 부활하기 시작했다.
조국방위간담회개 개최된 같은 해, 일본 전후 가장 유명했던 우익 활동가 아카오 빈이 대일본애국당을 창당한다. 젊은 시절 사회주의에 기울었던(상당수 일본 우익이 청년기 사회주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훗날 국가사회주의자로 전향했다.
아카오는 지금의 일본 우익과는 결이 조금 다른 인물이었다. 그는 투철한 반공주의자였다. 전후 일본이 미국의 우산 아래에 들어가자, 그가 주로 겨냥한 적은 일교조(일본교직원조합)였다. 아이들에게 공산주의 사상을 가르친다는 이유였다. 한국 극우 세력이 전교조를 주요 적으로 타깃팅한 것과 같다. 주요 목적이 반공이었기에, 같은 반공 국가인 한국과는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도 아카오는 주장했다. 독도 영유권 분쟁이 일어났을 때 그가 남긴 말은 유명하다. "그딴 섬은 폭파시켜버리면 돼." 미국 주도의 동맹 체제에서 공산주의를 막는 것이 그의 가장 큰 목적이었다. 한국 극우와 결이 비슷하다.
아카오 사상이 한국 극우와 조금 다른 지점이 있다. 그는 1951년 대일본애국당 창당 때부터 개헌을 요구했다. 전쟁 직후부터 일본 극우의 핵심 목표는 개헌이었다.
<일본 '우익'의 현대사>(야스다 고이치 지음, 이재우 옮김, 오월의봄 펴냄)는 한일 갈등이 첨예한 이 시기, 현대 일본을 주도하는 일본 우익을 뿌리부터 파헤치는 책이다. 저자는 지난 2012년 출간돼 한국에서도 주목받은 논픽션 <거리로 나온 넷우익>(김현욱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한국 발매는 2013년)에서 당시 일본의 문제적 사회현상이었던 넷우익을 파헤친 데서 한발 나가, 이번에는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일본 극우 사상사의 핵심 인물을 재조명하고, 연관 인물들과 인터뷰해 방대한 극우 계보를 정리했다.
굳이 '방대하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까닭은, 일본 극우가 하나의 사상으로 똘똘 뭉친 집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일본 극우를 크게 여섯 갈래로 나눈다. 시대 흐름에 따라 이들 계보가 뭉치고 흩어지면서 현대 일본 극우의 극단적 모습이 서서히 갖춰지는 모습을 좇는 독서 경험은 매우 흥미롭다.
예를 들어 대일본애국당과 같은 해 출범한 협화당(協和黨, 교와토)은 일본 재군비 반대, 전쟁 포기, 엄정한 중립 국가를 지향한다. 반공 구호조차 외치지 않는다. 이 당의 뿌리가 이시와라 간지가 조직한 전전 우익단체 동아연맹이기 때문이다. 만주침공(만주사변)을 주도한 인물로 알려진 이시와라 간지는 아시아 각국이 우호적으로 연대해 미국과의 '인류 최종전'에 대비해야 한다는 사상을 가졌던 인물이다. 전후 일부 리버럴 중에도 (무력으로, 인위적으로 만든 국가에서 평화 사상을 논한다는 모순을 무시하고) 그의 오족협화(五族協和) 사상에 심취한 이가 있었다. 한국에는 최영의로 알려진 가라테 고수 오야마 마스다쓰의 스승으로 재일민단 단장을 지내기도 한 조영주도 그의 제자다.
다른 극단에는 대일본애국단체연합시국대책협의회 일부 구성원으로 대표되는 극단적 천황 주체 사상자도 있다. 이들은 간단히 말해 현 일본 지배 체제 자체를 부인한다. 천황이 절대권력을 쥐고 다스리는 아래 만민이 평등하게 존재한다는, 일제 강점기 그 모습으로 일본이 돌아가야 한다고 외치는 이들이다. 책에 묘사된 이들의 회의에서 나오는 발언은 독자를 실소케 한다. "폐하께 뭔가를 바란다는 것은 신민의 분수를 넘는 행위입니다." "(절대권력자인 천황에게 뭔가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무엄하므로) 우익씩이나 되는 자가 자기 폐하를 야스쿠니로 데려가는 행위를 허용할 수 있겠습니까?" 독일 극우의 핵심으로 꼽히는 독일을 위한 대안(AfD) 일부 인사의 경우 히틀러의 제3제국 자체를 부정하고 비스마르크 집권기인 통일 독일(제2제국)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상을 가진 이가 있는데, 그와 비슷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이들은 북유럽 극우 일부와도 상통하는 모습을 보인다. 북유럽 일부 극우주의자는 기독교 세계관이 통일한 현대 유럽 자체를 적대한다. 노르딕 신화 시대의 재현을 이상향으로 삼는다(한국에도 이 같은 극우가 있다고 봐야할 듯하다. 환단고기 등을 추종하는 이들이 사회 곳곳에 있다.).

▲ 일본의 패전일이자 한국의 광복절인 지난 15일 일본 도쿄(東京)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서 극우들이 전범기인 욱일기(旭日旗)를 들고 선 모습. ⓒ연합뉴스
단연 한국 독자의 관심을 끄는 부분은 4장 '신우익의 탄생'과 5장 '종교 우파와 일본회의'다. 아베 정권의 핵심 지지층인 현대 우익이 이들 장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1960년 우파 대학생 조직 일본학생회의(JASCO, 자스코)가 출범한다. 1967년 와세다대학에 재학 중이던 야마우라 요시히사가 의장이 된 후부터 자스코는 친미, 반공으로 대표되던 기존 일본 우익 사상과 결별을 선언한다. 자스코는 얄타회담(Y)으로 인해 미소 패권 체제가 확립되고, 포츠담회담(P)으로 인해 일본이 미국의 하부 동맹국으로 떨어졌다고 규정하고 이 'YP 체제' 극복을 목표로 내건다. 같은 60년대, 일본학생동맹(일학동), 전국학생자치체연락협의회(전국학협) 등 우파 학생 조직이 연달아 등장한다. '신우익'이 탄생한 순간이다. 특히 전국학협 출신 상당수가 현 일본 극우의 대표 조직인 일본회의로 들어갔다. 이들은 대체로 반 YP 체제, 점령 헌법 타도(개헌), 반일교조 등의 구호를 목표로 내걸었다. 마치 한국의 학생운동세력이 이후 민주 세력의 중심으로 성장하듯, 일본에서도 격동의 60년대를 보낸 우파 대학생들이 극우의 핵심이 된다. 이들은 넷우익이 인터넷 시대 새로운 주류가 될 때까지 일본 우익의 핵심이 되었다.
학생운동 시대가 퇴조하고 1970년대가 열린다. 일본청년협의회가 이 해 조직된다. 1930년 탄생한 신흥종교 생장의 집이 이 조직의 모태다. 이 조직은 1974년 일본을 지키는 모임으로 이름을 바꾼다. 일본을 지키는 모임의 핵심 멤버는 전부 종교(신토) 관계자들이었다. 1981년 출범한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와 합친다. 1997년, 그 유명한 일본회의가 탄생한다. 이들은 전후 체제 자체를 부정한다. 전후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이 같은 사고는 2000년대 들어 일본 길거리를 혐오로 뒤덮은 이른바 넷우익에게까지 이어진다.
학생운동의 퇴조와 함께 우파 학생운동도 힘을 잃자, 생장의 집은 일본 우익의 핵심으로 떠오르게 된다. 생장의 집 출신의 정치가와 운동가들이 현대 극우 움직임을 주도한다. 일본회의의 중심에 종교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까닭이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 논란에서 보듯, 지금도 천황제, 신토는 일본 극우주의의 정수다.
이들의 대중운동은 결실을 하나하나 맺어간다. 대표적인 사례가 원호법제화다. 원호법제화운동의 성공 후 탄생한 일본회의는 개헌, '교육 정상화', 자주방위 등 핵심 3대 안건을 일본 사회에 요구하고 나섰다. 그 결과는 우리가 익히 아는 바다. 새역모 등으로 대표되는 퇴행과 군국주의 사상이 오늘날 일본 사회에 깊숙이 자리하게 됐다. 저자는 넷우익이 판치던 시절과 달리, 오늘날 일본 길거리에서 과거처럼 조선인 등 외국인을 혐오하는 집회를 자주 볼 수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제 우파가 너무나 당연한 주류가 되어버려서, 그런 모임 자체가 필요 없어졌다고 말이다.
오늘날 일본회의는 회원 4만여 명 규모다. 일본 전국 47개 도도부현 본부 외에도 243개 지부를 두고 있다. 일본회의를 지원하는 국회의원 조직 '일본회의 국회의원 간담회(회장 후루야 게이지 중의원)'가 존재하고, 이 모임 소속 국회의원은 280명에 이른다. 아베 수상이 간담회 특별고문이고, 현 아베 내각의 각료 대부분이 이 모임 멤버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길거리에 머물렀던 일본 극우는 아베 내각 들어 정권과 한 몸이 됐다.
아베 내각이 주도하는 개헌 목표는 '전쟁 가능한 국가'로 일본을 바꾸는 것 정도라고 알기 쉽다. 일본회의의 요구는 한발 나간다. '천황 폐하께서 일본국을 대표하는 원수임을 명기'하는 것도 이들의 개헌 목표다. 국기국가법 제정운동, 외국인의 지방 참정권 반대운동, 교육기본법 제정운동 등 이들의 모든 극우적 백래시의 핵심 목표는 천황 국가로의 회귀와 민주주의 반대다.
지난해 2월 23일, 도쿄도 지요다구의 조선총련 중앙본부에서 5발의 총성이 울린다. 현행범으로 56세 우익 활동가와 46세 전직 폭력단원이 체포된다. 이 활동가의 딸은 한국 누리꾼에게도 어느 정도 얼굴이 알려져 있다. 2013년 오사카 쓰루하시에서 재일조선인을 겨냥해 "난징대학살이 아니라, 쓰루하시대학살을 실행하자"고 목소리를 높인 여중생이 주인공이다. 일본회의로 대표되는 극우조직과 넷우익이 결합하면서, 일본은 점차 더 극우로의 질주를 가속화한다. 저자는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사회의 극우화다. 우리는 우익의 망망대해에서 살고 있다." 아베 정권의 핵심 지지층은, 생각 이상으로 위험할 지도 모른다. 여러 의미로 위험한 시대를 지나가고 있다. 한일 갈등이 고조화하는 시기, 이웃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읽어볼 만한 책이다.

▲ <일본 '우익'의 현대사>(야스다 고이치 지음, 이재우 옮김) ⓒ오월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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