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문화, 예술

혁명에서 개벽으로 - 데이터를 가진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

일취월장7 2019. 8. 15. 12:42

혁명에서 개벽으로

[기고] 다시 여는 글


여기저기에서 "촛불혁명 이후로 달라진 게 별로 없다"는 말을 듣곤 한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아마도 촛불이 개벽이 아니라 혁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혁명이 일회적 사건이라면 개벽은 일상의 연속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불매운동'이 과거와 달리 일상화가 되고 있다면, 그것은 개벽적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리라. 마찬가지로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이 25년 뒤에 3.1독립운동으로까지 이어졌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닌 개벽을 지향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운동이 오늘날의 촛불혁명으로 이어졌다면, 그 운동은 실패한 혁명이 아니라 지속적 개벽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에 전개되고 있는 '탈일'(脫日)운동은 일본으로부터 기술적으로, 경제적으로 독립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지 결코 일본과 담을 쌓거나 일본을 지배하겠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脫亞)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결국 일본은 아시아를 벗어나는 것을 넘어서 아시아를 지배하는 길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반면에 동학의 개벽은 철학적 탈아(脫亞)를 추구하였다. '하늘'이라는 자신의 언어로 '하늘한다'(天道)는 자신의 철학을 시도해 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편협한 국수주의나 이기적인 자기중심주의(各自爲心)에 빠진 것도 아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기 안의 보편적인 하늘을 발견해서, 그 하늘을 실천하는 삶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탈아(脫我)라고 할 수 있다.   

일본 근대가 추구한 탈아입구는 중국 대신에 서구라고 하는 또 다른 질서로의 편입이었다는 점에서 태생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새로운 세계관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세계관에 기대는(有待)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궁극적으로 벗어난(脫)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정으로 벗어나려면 ‘탈아입구’에서 ‘탈아출구’(脫亞出歐)로까지 나아갔어야 했다. 그리고 이때의 ‘탈’도 침탈을 위한 ‘탈’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와 독립을 위한 ‘탈’이 되었어야 했다. 그런 탈아입구적 근대화의 한계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일본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가한 남 얘기가 아니다. 해방 이후에 우리의 사상적 지형도가 개벽에서 개화로 넘어간 것은 일본의 탈아입구적 근대화를 따라갔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서구라는 또 다른 중국에의 정신적 종속이었다. 그리고 그 예속성은 근대화의 후발주자이니만큼, 그리고 식민지지배까지 겪은 나라이니만큼, 일본보다도 훨씬 더 심각했다. <개벽파선언>의 첫머리가 ‘디톡스’(해독)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지난 촛불혁명과 최근의 탈일운동은 이제 우리가 진정으로 입구(入歐)에서 출구(出歐)로까지 나아가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는 역사적 신호일 것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서구적 근대화로부터의 탈출”이고 “한국적 근대화로의 재진입”이다. 동학 식으로 말하면 ‘다시 개벽’인 셈이다. 외국 문헌만 많이 인용하면 논문으로 인정받던 시대, 외국에서 인정받아야 국내에서 알아주는 풍토. 이런 20세기적 문화는 모두 서구적 근대화의 잔재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당사자인 자신들에게는 좋을지 몰라도 그들의 수업이나 지도를 받는 학생들에게는 세뇌나 곤욕에 다름 아니다. 나는 이런 교육을 받고 자란 개화세대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선언을 기획하고 제안한 이병한 선생이야말로 학계의 진정한 “개벽의 일꾼”이다. 그 연배에서 그 만큼 개벽의 의지가 확고한 학자를 본 적이 없다.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비전과 실천까지 겸비하고 있다. 이 선언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개벽하러 가는 길”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설령 그 짐이 버겁고 그 길이 멀지라도 말이다(任重道遠).  

개벽학당의 자리타가 “개벽의 길을 떠나려 하니 울고 싶어졌다”고 했는데, 그러면 울면서 하면 되지 않을까? “독립운동은 못 했어도 불매운동은 한다”는 게 요즘 젊은이들의 구호이던데,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매일같이 울었을 것이다. 그 짐이 너무 무겁고 그 길이 너무 험난한데, 그것을 대신해 줄 사람도 없고 그것을 피해갈 수도 없었기 때문이리라. 개벽이 힘들면 울면서 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개벽파선언>도 이병한 선생과 둘이서 ‘공공’ 했듯이, '삼일독립선언문'도 33인이 같이 낭독하고 전 국민이 함께 동참했듯이, 같이 하면 울어도 즐겁고 덜 힘든 법이다. 그것이 “한(恨)을 넘어선 한(天)의 경지”일 것이다.

2019년 8월 13일 새별 조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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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망가지고 법은 사라졌다"

[넷플릭스 세계여행] 데이터를 가진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
2019.08.15 10:39:04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졌다. 자유와 평등이 구석에 내몰리고, 공포와 혐오가 '핵인싸’가 되었다. 희생양 찾기에 몰두하는 정치적 포퓰리즘은 비틀거리는 민주주의의 턱에 카운터펀치를 날린다. 테러리즘과 실업에 대한 공포를 키우면서 이슬람과 난민과 여성에 대한 혐오를 일상화 한다. 거대 기업의 이익을 지키고 키우기 위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는다. 자유를 전면에 내세운 현대 자본주의 경향은 약육강식의 질서를 강조하며 평등을 비효율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평등 없는 자유는 동물의 왕국이 된다. 특히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우파 포퓰리즘은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하는 선동으로 가득하다. 트럼프는 재선 전략으로 ‘인종주의’를 전면에 내걸었고, 아베는 한국에 대한 경제전쟁으로 국가주의를 강화한다.

민주주의는 '보편적 개인'의 기반 위에 성장했다. 전혀 다른 개인에게 1인1표의 주권을 동등하게 부여함으로써 민주주의 제도가 정착했다. 물론 현재의 민주주의에 도달하기까지 많은 투쟁이 있었다. 노예 해방과 흑인 참정권 운동, 여성 참정권 운동이 대표적인 사례다. 우리도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기 위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피를 흘렸다. 이후 민주주의는 투표권의 동등함을 넘어 평등권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보편적 복지가 확대되고 여성,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의 권리가 신장됐다. 그렇게 민주주의는 비뚤게 갈지언정 결국 앞으로 전진할 것이라는 희망을 주었다.  

하지만 캐롤 캐드월레어(Carole Cadwalladr) <가디언> 기자의 지적처럼 "민주주의는 망가지고 법은 사라졌다". 민주주의 붕괴를 이끈 핵심에 기술혁명이 있다. 우리는 기술혁명의 미래에 대해 많은 논쟁을 해 왔다. 낙관론도 있었고 비관론도 있었다. 지난 7월 24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다큐멘터리 <거대한 해킹(The Great Hack)>(카림 아메르·지한 누자임 감독, 2019)을 보면, 우리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전 세계에 23억 명을 거느린 페이스북이 민주주의를 송두리째 파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경고한다. 그들이 보유한 천문학적인 개인정보는 선거에서 치명적인 무기가 된다. 방황하는 유권자를 심리적으로 조종해 선거 결과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표의 등가성으로 설계된 민주주의가 내용적으로 붕괴되는 결과가 초래된다.

< 거대한 해킹>은 페이스북 개인정보 8700만 건을 이용해 영국의 EU(유럽연합) 탈퇴 여부를 묻는 브렉시트 투표와 트럼프 대선 캠페인에 관여한 선거캠페인 회사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Cambridge Analytica:CA)'의 이야기를 다룬다. CA 직원이던 크리스토퍼 와일리와 브리트니 카이저의 내부고발로 촉발된 전대미문의 '데이터 스캔들'을 전면적으로 다뤄 선댄스 영화제 등 많은 영화제에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해킹은 다른 사람, 혹은 기관의 컴퓨터 정보를 훔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거대한 해킹'은 빅데이터를 이용해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고 이들의 심리를 조종해 선거 결과를 조작한다는 의미다. 실제로 이 영화는 CA가 페이스북에 올라온 수천만 명의 개인정보를 이용해 어떤 방식으로 브렉시트 투표와 미국 대통령선거에 개입했는지 추적한다.  

▲ 다큐멘터리 <거대한 해킹(The Great Hack)>(카림 아메르·지한 누자임 감독, 2019) 포스터.


미국 케임브리지대학의 데이터 과학자 알렉산드르 코간은 '당신의 디지털 생활(This Is Your Digital Life)'이라는 성격 퀴즈 앱을 페이스북에 장착한다. 물론 이 연구엔 페이스북의 승인이 있었다. 이 앱을 통해 약 30만 명의 페이스북 사용자 성격을 파악한다. 그리고 30만 명의 친구, 친구의 친구 정보를 무작위로 수집해 CA에 팔아넘긴다. 흔히 우리가 페이스북에서 150개의 '좋아요'를 누르면 그 사람을 배우자보다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다고 한다. 정치 성향, 성적 취향, 소비 패턴, 동선 등 상상을 초월하는 개인정보를 취합할 수 있는 것이다.

CA는 미국 공화당의 '큰손'이자 헤지펀드의 거물로 알려진 로버트 머서가 설립한 회사다. 이들은 이 정보들을 이용해 브렉시트와 미국 선거, 나아가 인도, 브라질 선거에도 개입했다. 미국 대선에서는 공화당 후보였던 테드 크루즈에게 정보가 제공되었고, 트럼프가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되자 트럼프 캠프와 본격적으로 결합했다.  

미국 대통령 선거는 우리나라와 달리 각 주에 배정된 538명의 대의원을 선출하는 방식으로 치러진다. 각 주의 대표성을 보장하기 위해 승자독식의 투표제도를 선택하고 있다. 가령 캘리포니아에 55명의 대의원이 있고, 여기서 민주당이 이긴다면 득표율과 상관없이 민주당 후보가 55명의 대의원을 독식하는 제도다. 이런 방식으로 각 주의 대표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대선에서 전국 득표율에서는 힐러리가 앞섰지만, 대의원을 더 많이 확보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므로 미국 대선에서는 민주당이 강세인 블루 스테이트와 공화당이 강세인 레드 스테이트가 아니라, 스윙 스테이트(경합주)의 결과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최대 경합주인 오하이오주에서 이긴 사람이 당선된다는 법칙이 있을 정도다. 즉 오하이오, 플로리다, 펜실베니아 같은 주요 경합주에서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유권자의 개인정보를 알 수 있다면, 그리고 이들의 심리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면 선거 결과를 완전히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CA는 미국 대선을 이기는데 경합주 유권자 7만 명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섬뜩한 이야기다. 그들이 페이스북을 통해 유권자들이 생각하는 힐러리의 약점을 분석했다면 그 효과는 더욱 클 것이다. 실제로 트럼프 캠프는 힐러리를 '부정직한 힐러리(CROOCKED HILLARY)'라고 표현했고, 이를 부동층 유권자들에게 지속적으로 노출했다. 단어에 들어 있는 두 개의 'OO'에는 수갑을 그려 넣었다. 악마적 컨설턴트 로저 스톤이 이끈 집회 슬로건은 "힐러리를 감옥으로!"였다. 오바마 캠프에서 일한 경력 때문에 CA에 스카우트된 내부고발자 브리트니 카이저는 힐러리의 이메일 스캔들 폭로 전 러시아에 가서 줄리언 어산지를 만난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이메일 스캔들로 '부정직한' 이미지를 극대화했던 셈이다.  

빅데이터와 가짜 뉴스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건 이제 새로운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드루킹의 네이버 댓글조작 사건이 큰 파장을 일으켰다. 문제는 이 같은 현상이 더욱 심해질 것이라는 데 있다. 민주주의의 위기를 넘어 민주주의가 '사라질' 위험에 처한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엘빈 토플러의 말을 차용하자면, 기술은 100마일의 속도로 가는데 법은 1마일의 속도로 움직인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가 불법이고 어디까지가 합법인지조차 파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2012년 선거 캠페인을 뜨겁게 달궜던 오바마의 빅데이터 선거와 페이스북 개인정보를 악용한 트럼프 캠페인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어떻게 다른 것인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온갖 협박 속에서 이 사건을 집중적으로 폭로한 캐롤 캐드월레어 기자다. 캐롤은 영국의 에부 베일에서 행한 TED 강연에서 "물줄기는 기술 플랫폼을 따라 흐르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거의 없다"고 고백한다. 천문학적인 불법 정치자금이 법적 한도를 넘어 페이스북과 유튜브, 구글에 사용되고 있지만 해당 회사가 그것을 공개하지 않으면 확인할 길조차 없다는 것이다. 선거 비용 한도를 정한 법은 무용지물이 된다. 기업들은 법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존재한다. 거기서 민주주의를 쥐락펴락한다. 캐롤은 페이스북 창업자이자 CEO인 마크 주커버그를 향해 말한다. "당신이 사람들을 연결하기 위해 시작했던 바로 그 기술이 사람들을 가장 적대적으로 갈라놓는 무기가 되었다." 브렉시트는 민주주의가 붕괴한 사건이고 마크 주커버그는 이 사건의 범인이라는 것이다.

마크 저커버그는 이에 대해 사과했다. "제 실수입니다. 죄송합니다. 페이스북을 시작한 사람도 저이고, 운영한 사람도 저이므로, 페이스북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책임은 저에게 있습니다(It was my mistake, and I'm sorry. I started Facebook, I run it, and I'm responsible for what happens here)." 하지만 페이스북은 여전히 승승장구하고 있다. 기업들은 '데이터를 가진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명제를 결코 스스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무작정 보장된 제도가 아니다. 불평등이 촉발한 공포와 혐오의 시대엔 더욱 그렇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지금 역시 싸우지 않으면 지킬 수 없는 제도다. 특히 개인정보의 수집과 활용에 관한, 그리고 전혀 다른 차원의 빅데이터 활용에 대한 기업의 책임을 법률로 강제하는 것은 우리가 누려야 할 최소한의 민주주의를 위해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