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칼럼

경제전쟁이란 블랙홀, 노동자 소외를 경계한다

일취월장7 2019. 7. 22. 10:24

경제전쟁이란 블랙홀, 노동자 소외를 경계한다

[서리풀 논평] 모든 논의와 정책, '기-승-전-일본' 되다
2019.07.22 08:22:11

한국에서 일본 문제는 민감하다. 이 문제만큼은 '애국주의'인가 '세계시민주의'인가를 논쟁할 겨를도 없이 사회와 개인에 영향을 미치는, 그런 점에서 실재하는 현실이다. 마음과 감정도 어떤 변화를 부르는 힘이 있다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

이 문제의 근원과 이유, 경과, 해결 방법은 달리 다루어야 할 일이니 더 들어가지 않는다. 우리의 일차 관심은 일본이 경제를 무기로 삼았다는 데 있다. 어떤 이가 표현한 대로 '경제 전쟁'을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무기와 전쟁은 본래부터 경제였지만(군산복합체라는 말!), 이제 경제가 그 자체로 무기가 되었다.  

그 경제란 어떤 경제인가? 왜 애꿎은 반도체를 물고 늘어지나, 이렇게 묻는 것은 소용이 없을 뿐 아니라 그런 경제 메커니즘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 수요공급의 법칙과 생산자의 경쟁 논리가 끼어들 틈은 없다. 

이번 사태를 두고 얻어야 할 역설적 교훈은 경제가 지극히 정치적이라는 사실이 아닌가 한다. 군수산업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이번에는 경제가 무기가 되는 바람에 경제를 활용하는 정치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에 대한 대응도 불가피하게 마찬가지다. '일본 상품을 사지 말자'는 운동도 결국 경제를 통해 정치에 영향을 미치자는 것, 그 경제 또한 정치적 경제를 벗어나지 못한다.  



정치적 경제는 돌고 돌아 경제적 정치로 이어진다. 자주, 때로는 무심코 쓰는 '정치경제'라는 말은 정치와 경제를 합쳤다기보다는 정치적 경제와 경제적 정치를 의미하는 것일 터, 사실 이렇게 나누기도 힘들 정도로 경제와 정치는 한 몸이다. 일본이 촉발한 이 시끄러운 분란이야말로 이런 정치경제의 전형이라 할 수 있겠다.  

시작도 그렇다. 근원은 밀어두자고 했지만, 오늘 이 사태도 모든 것의 '경제화'에서 출발했다고 본다. 식민지배, 성노예와 착취, 강제징용과 강제노동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것. 보상과 배상은 책임의 한 가지 방식에 지나지 않지만, 어느새 모든 책임을 '일원화'하고야 말았다. 우리가 '그것으로 어느 정도 되었다'라고 말하면, 일본발 경제적 정치가 성공한 셈이다.

새삼 확인해야 할 관점의 문제. 하필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아서 기분이 나쁜 것이 아니다. 다른 어느 나라도 아닌 바로 일본이 성노예화와 강제징용의 책임자라 해서 마음이 분한 것이 아니다. 식민지배와 억압, 성노예화, 강제노동은 반인륜적이고 반인권적 범죄다.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중국, 그 어떤 나라가 했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처벌과 책임도 이에 맞추어야 한다. 

한일 경제전쟁의 정치경제는 복잡하고 다면적이나 지금 우리의 관심은 일종의 2차 효과, 국내 정치가 노골적으로 국내 경제를 동원하는 일이다. 이에 뒤질까 경제가 정치를 동원하는 것도 마찬가지. 청와대의 수석비서관이 계속해서 '전쟁'을 말하고 '이적'과 '친일'을 동원하는 것은 '통치' 목적의 노골적 정치 행위라고 치자.(☞ 관련 기사 : 7월 18일 자 <경향신문> '조국 "대한민국은 '경제전쟁' 중애국이냐 이적이냐"') 이번 기회에 모든 숙원사업을 해결하자는 국가권력과 경제권력의 경제화한 정치는 더 교묘하다.

"대표적 조치는 일본 수출 규제로 타격을 입은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부품 업종에 대한 특별연장근로 허용이다. (중략) 신속한 기술개발이 필요한 핵심 R&D 과제의 경우 예비타당성조사가 면제된다."(☞ 관련 기사 : 7월 9일 자 <매일경제> '다급한 정부, 극일대책 총동원…R&D 예타·세액공제까지 푼다') 

제목부터 지극히 정치적이다. '극일대책 총동원'이라니, 이에 반대하면 '친일'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일본의 소재 수출 제한과 연장근로 허용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묻고 싶다. 예비타당성조사는 또 무슨 관계가 있는가. 기업과 자본의 숙원사업을 해결하려는 정치적 경제와 그래도 뭔가 대책을 내놨다고 하고 싶은 경제적 정치의 합작이다.

"업계에서는 세계 자동차 시장 위축과 중국 시장 판매 부진, 일본산 부품 수급 차질 가능성 등이 겹친 상황에서 노조가 파업에 나서면 치명상을 입을 우려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관련 기사 : 7월 19일 자 <한국경제> '이 와중에파업 깃발 든 현대車 노조')

여기도 정치적 제목이 붙었다. '이 와중에'. 이제 모든 노동자의 요구는 그것이 아무리 정당해도 친일과 반애국이 될 판이다. 곧 전쟁의 은유까지 동원될까 무섭다. 세계시장이라는 전장(戰場)에서, 기업이 애국 전사면, 내 몫을 요구하는 노동자는 뭐가 되는가.

경제전쟁과 극일 프레임을 활용(또는 편승)하려는 움직임까지 거세다. '기-승-전-일본'의 정서와 분위기가 급조한 논리 끝에는 급기야 전기료 감면과 세제 혜택 요구가 등장한다. 조만간 애국 마케팅이 나오지 말란 법이 없다.  

"업계에서는 폴리실리콘 등 태양광 산업에 대한 전기료 감면이나 각종 세제 혜택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최근 일본의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관련 수출 규제에서 보듯이 핵심 소재와 관련한 높은 해외 의존도는 언제든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관련 기사 : 7월 20일 자 <서울경제> '소재산업 강화한다지만 폴리실리콘값은 반토막')

장담한다. 이번 사태가 조금만 더 지속하면 모든 논의와 정책은 '기-승-전-일본'이 굳어질 것이다. 일본의 수출 규제는 경제전쟁이 되고, 그리하여 '이 와중'은 소득·불평등·일자리·혁신성장·규제완화 등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리라 예상한다.

그 토대는 진작부터 튼튼했으니, 어떤 이는 이번을 기회로 여길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예. 지난 4월에 식약처장이 국회에서 답변한 내용이다. 지금이라면 어떻게 말했을까?

"이러한 진료를 일본에서는 다 오픈을 하고 허용을 해 주고 있어서 1년에 1만 명 정도가 일본에 이런 줄기세포시술을 하러 원정을 가고 있습니다. 그거는 국익의 낭비이기도 하고, 우리나라 첨단바이오의약품의 신약개발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이런 시행착오가 다소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계속 전진해서 할 수 있어야"(☞ 관련 기사 : 7월 10일 자 <오마이뉴스> '"일본 본받으라"며 정부 압박국민이 위태롭다')  

기왕 전쟁의 은유가 동원되었으니, 이렇게 묻자. 이 전쟁의 진정한 승자와 패자는 누구일 것인가? 전쟁의 부담은 누가 지고 전과는 누가 가질 것인가? 모든 전쟁은 '총동원체제'를 주장하고 요구하며 강제하지만, 삼성과 평범한 시민은 부담, 피해, 전공, 결과의 모든 것이 다르다. 여행도 바꾸고 맥주와 과자까지 피하는 '애국 시민'에게 이 전쟁은 어떤 전쟁이고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혹시 부담은 사회화하고 편익은 사유화하지나 않을지 걱정스럽다.

직접적인 답이 되지는 않을 것 같으나, 다음과 같은 월러스타인의 말에서 교훈을 찾고자 한다. 조슈아 코언과 마사 누스바움이 편집한 책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오인영 옮김, 삼인 펴냄)에 포함된 글에서 따왔다.  

"교육적으로 필요한 것은, 우리가 세계 시민이라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한 세계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음을 배우는 것이다. 또 공평무사하고 세계적으로 되는 것과 자신의 협소한 이익을 옹호하는 것은 서로 대립되는 태도가 아니라 복잡한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는 태도임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 각자가 "불평등한 세계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부분에서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 같다.  



돈은 편리한 매개인가, 자기증식적 악마인가

[다른백년 칼럼] 제 3섹타 경제론 <17> 인간중심의 금융시스템을 위하여
2019.07.21 10:35:02

"돈으로 표현된 수입은 늘었지만 마음을 열어줄 인간관계는 줄어들고, 쇼윈도에는 온갖 상품으로 가득 찼지만 방황하는 영혼은 텅 빈 시대"

어느 무명씨의 노래 구절을 조금 바꾸어 적다가 돈과 상품이 우리들 삶의 모든 것을 대체해버린 오늘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면서, 종이와 숫자로 표현된 돈이 만물을 움직이는 불멸의 힘이요 세상을 움직이는 전지전능한 존재로 내 삶을 포위하고 있음을 절감한다.

솔직히 돈의 기능 또는 금융에 대해서는 필자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공부를 해보려고 몇 가지 서적을 읽어보지만 결론은 점점 더 모르겠다는 느낌만 강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융이라는 주제를 선택하여 알지도 못하는 글을 쓰려는 것은 인간 존재의 존엄성과 다양성을 숫자라는 획일적 척도로 환원해 버린 돈이라는 요물이 우리의 일상 구석 모든 것에 영향을 크게 미치고 있어 '제 3섹타 경제론' 글의 취지와 완성도를 위해서도 피해갈 수 없는 숙명적 주제로 다가온 탓이다.  

모두가 절감하듯이, 돈 또는 금융은 두 가지의 극단적인 얼굴을 동시적으로 가지고 있다. 셰익스피어 소설 <베니스 상인>에 등장하는 샤일록의 칼날처럼 인정사정없이 채무자의 살점을 베어내려는 악마적 근성을 지닌 동시에, 삶의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매개 수단이면서 더 나은 기회와 희망을 제공하는 수호천사적 미소를 함께 지니고 있다. 또한 개인적인 삶을 넘어서 금융의 제도를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역사 속에서 수많은 국가들과 제국의 흥망성쇠가 결정되어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도 1997년 외환 금융의 위기를 겪으면서 국제 금융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절절히 체험한 바 있다. 더구나 10년 뒤에 터진 2008년 '리만 브라더스 파산'으로 시작된 월가 중심의 금융위기는 전 세계 경제에 메가톤급 충격을 가했으며 그 후유증과 여진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아직도 위기를 벗어날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현대 금융은 재산권과 계약권이 신탁이라는 이름으로 이종교배를 통해 나타난 착종이라고 설명하면서 <금융과 회사의 본질>(개마고원 펴냄)이라는 책을 저술한 서강대 김종철 교수는 인류역사에서 화폐가 상업 거래의 주요한 교환수단으로 전면에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첫째가 약탈적 전쟁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둘째는 권력자가 백성들에게 세금 쉽게 거둬들이고 갚아야 할 채무를 용이하게 청산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김 교수에 의하면, 이러한 약탈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 형성된 은행의 화폐발행권은 금융적 자원의 배분을 왜곡하고 주기적으로 경제 위기를 초래하는 치명적인 부작용을 지니게 된다고 한다. 상기에 언급한 한국의 IMF사태 및 월가의 금융 위기는 자본의 자기이익 실현과정에서 누적된 위기를 폭력적으로 처리하는 과정이었다고 파악하면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시스템에 내재되어 있는 순환적 금융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세금으로 부실채권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해결하면서, 금융 위기의 부담을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공동으로 짊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즉 국민의 세금으로 부실채권을 사주는 행위는 채권자가 투자에 대해 마땅히 감수해야 할 위험손실을 국민전체가 대신 떠안고 세금으로 보전해 줌으로써 채권자에게 과분한 특혜를 주는 조치인데도 채권자의 재산권적 권리를 최우선으로 삼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를 유일한 해결의 대책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IMF 외환 위기의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힘없고 가난한 이들이 피눈물을 흘렸는지를 생생히 체험하였다. 더구나 탐욕적인 국제 거대 자본이 당시 부패하고 부실했던 한국경제의 약점을 파고들어 위기를 조장하고 서민들에게 철저한 희생을 강요하면서 IMF사태 이후 수년간에 대한민국의 1년 치 GDP 총액을 상회하는 국부가 해외로 유출되었다고 추정한다.

되풀이하지만, 우리는 채권과 재산의 배타적인 권리를 무조건적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이를 정치적 법적으로 과잉보호하는 시대에 살면서,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자본의 자기 이익추구 과정에서 실현된 성과물을 특혜적 소수가 사유화하는 반면에 내재적으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금융위기와 손실을 힘없는 시민에게 부담하는 방식으로 해결해온 것을 마치 정답인 듯 묵인하여 왔다. 

그러나 돈과 금융이 중심인 자본주의 시대 이전에 신용을 중심으로 운용되었던 인류의 오랜 역사를 살펴보면 채권자의 권리에 앞서 공동체적 규범이 우선하였고, 백성들의 소비성 부채를 주기적으로 탕감하거나(메소포타미아 및 유대문화), 이자 수취를 금지하는(중세유럽과 이슬람) 등으로 힘없고 가난한 채무자들을 보호하였다고 한다. 한마디로 1997년 IMF사태나 2008년 월가의 금융위기는 인류의 기나긴 역사에 비추어 보면 탐욕적 금융 중심의 자본제에서나 일어나는 매우 예외적이고 반인간적 '폭력' 사건인 셈이다.

소비에트 붕괴 이후 미국의 단일패권적 상황에서 달러를 기축통화로 삼는 신자유주의의 수탈적 금융 메커니즘이 세계적 규모로 어떻게 작동해 왔는지에 대하여 2013~2017년간 미국자유언론재단의 회장을 역임했던 피터 필립스 교수는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1000억 달러이상 재산을 소유한 36명의 초대형 거부들과 2400명 정도의 수십억불 수준 부자들로 이루어진 소위 전 세계 상위 0.1퍼센트는 자신들의 잉여 자본을 골드만삭스(Goldman Sacks)나 제이피모건(J.P Morgen Chase) 같은 투자 관리 업체들에게 맡긴다. 1조 달러 이상 규모를 다루는 투자 관리사들 중 상위 17개 업체가 2017년 한 해 동안 41.1조 달러를 주물렀다.  

이들 업체들은 상호 투자로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이들 업체를 운영하는 199명의 책임자들이 세계 자본이 어디에 또 어떻게 투자될지 결정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가장 큰 난제는 안전한 투자처보다 대기 자본이 훨씬 많다는 것이며, 그렇기에 이들은 위험성 높은 투기성 투자, 전쟁 비용 상승, 공적 영역의 민영화, 정권교체 등을 통한 투자 기회 확대를 위해 압력을 가하고 있다. 

자본을 움직이는 전 세계적 권력 엘리트들 199명의 책임자 중 60%는 미국 출신이며, 나머지 인원들은 20여 개의 자본주의 국가 출신들이다. 권력 엘리트들 그리고 이들과 함께하는 1%의 소수가 국제 정책 기구들과 정부에서 요직을 맡고 있다. 이들은 IMF 세계 무역기구 세계은행 국제결제은행 연준위 G-7 그리고 G-20 국가들의 자문역을 맡고 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세계 경제 포럼에도 단골로 나타나는 이들이다 (중략). 

자주성과 독립성을 가진 국민국가라는 개념은 그간 전통적인 자유 자본주의 경제에서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세계화라는 현상은 자본주의로 하여금 한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 계속적이고 초국가적인 자본 성장을 강요해왔다. 2008년의 금융위기는 세계 금융 시스템의 이러한 강요가 파생한 사건이었다. 이러한 위협들은 국민국가 주권의 포기를 종용하고 새로운 초국가적 자본의 보호를 위한 세계적 제국주의 체계의 형성을 촉진했다."

위에 기술한 관점에서 돈과 금융이 지닌 현재적 문제점을 다시 요약하면, 상업화 이후 자본의 자기증식 메커니즘이 자산가들의 탐욕과 결합하여 인간의 삶을 전일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했다는 점과 소비에트 붕괴 이후 미국의 패권주의가 전 세계를 지배하는 조건에서 신자유주의를 수용하면서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이름으로 세계화를 강요하는 동시에 대부분 국가들에게 있어 경제 운용 주요 성과를 월가로 상징되는 금융 시장의 조작을 통하여 소수의 자산가들을 위한 지대적 이익으로 전환시키는 것에 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 위에 본 글의 부제처럼 금융을 탐욕적 악마라는 속성에서 해방시켜 우리의 삶을 도와주는 편리한 매체와 수단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답답한 아마추어 수준에서 자문자답적 상상을 담아본다. 

제6장 '한국역사 속의 향촌운동'에서 우리 역사에서 있었던 상호부조적인 향약운동과 계라는 신용활동에 대해 언급하였듯이, 유럽의 역사를 살펴보면, 중세 시기에는 교회가 해당 지역장원의 영토를 상당 부분 소유하고 있으면서 농노들에 대한 영주와 대지주의 일방적 전횡을 견제하는 한편, 당시 나름대로 사회안전망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자면 교회가 소속된 봉건 장원 내의 어렵고 궁핍한 거주민들을 위하여 구휼기관을 운영하였는데 재정을 담당했던 수도원 수입의 대략 5~10%를 이에 할당하였고, 상황에 따라서는 심지어 수입의 30-50% 수준까지 지역민을 위하여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다.

도시들이 형성되고 상업이 활달해지면서 앞에 언급한 샤일록의 예처럼 유대인들이 고율 이자로 사채업을 시작하자, 이를 견제하고자 수도원이 중심이 되어 대부은행 역할을 하는 'Monte Di Pieta(모성애적 금융기구)'를 개설하였는데 어렵고 궁핍한 거주민들에게 필요한 자금을 가능한 무이자로 빌려주었다고 한다. 물론 수도원에서 필요한 비용을 대부분 부담하였지만 뜻을 같이하는 신자들이 후원으로 힘을 보태기도 하였다.

지속적인 관리에 필요한 비용의 수수료 정도는 공제하였지만 무이자 수준으로 빌려주는 배경에는 첫째 예수님의 이웃사랑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함이었고, 둘째 살아가는데 부족한 물자를 보충해 줌으로써 인간의 고귀함을 유지하고자 했으며 더 나가서는 어려운 거주민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공유하면서 성속일체(聖俗一體)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고자 하는 공동체적 성격이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전승의 경험은 현대에 와서 다양한 사회적 금융의 이름으로 재현되고 있다. 가치를 지향하고 관계를 중시하며 사회적 변혁이라는 목표를 지닌 사회적 금융은 가난한 서민들을 지원하기 위한 마이크로 대부기관, 조합원 간 상부상조를 위한 협동조합형 상호금융, 사회적 경제영역에 있는 사업조직을 지원하기 위한 사회투자기금, 특히 미국에서 발달한 지역 내 개발과 순환을 위한 지역금융과 개발지원 기관, 최근 경기도에서 도입하여 활성화가 되고 있는 지역화폐, 다수의 참여를 통해서 시민자본과 후원을 조직하는 클라우드와 P2P 금융 등 형태로 형성되고 있다.  

이에 더하여 재무적 성과와 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면서 다양한 성격이 혼재되어 나타나는 사회책임투자(SRI)와 사회성과연계채권(SIB) 등 전문가가 아니면 용어 자체를 이해하기 쉽지 않은 수많은 형태의 사회적 금융기법들이 등장하고 있다.

한국 역시 중앙부처 단위에서 사회적 금융의 전개에 대한 상황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미래지향적 정책을 준비하고 있으며, 서울시 등 앞서가는 광역단위의 지방정부 역시 투자기금과 지역화폐 등 다양한 실험과 지원의 노력을 한층 기울이고 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정책의 내용이나 실행 규모를 들여다보면, 겨우 수십억 내지 수백억의 영세한 수준에 머물러 마치 동네 구멍가게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사회적 금융의 영역이 발생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어 일단은 조심스레 성공의 사례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실무적 관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자본의 탐욕과 무법적 관행이 도도히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현재의 거대한 시장금융 시스템을 고려한다면 동네 소매상 수준인 사회적 금융의 대응은 현실과는 동떨어져서 그저 자기만족적이며 장식적 수준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예컨대 사회적 기업이든 협동조합이든 기금을 통한 지원 규모의 한도액을 5000만 원에서 1억 원 수준으로 묶어둔다면 현재 한국경제 현실적 조건에서 이들 사회적 조직이 이루고자 사업을 실제 성공적으로 일구어낼 가능성이 지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다. 지원의 한도를 최대 10억 원 규모로 확대하고 설령 이들이 실패하더라도 회수 불가한 지원금을 대위변제를 통해 미래를 위한 투자금으로 수용해야 한다. 미래에 가장 바람직한 소유 형식인 협동조합을 활성화시키려면 이들을 지원할 별도의 철저하게 독립된 사업평가조직과 신용보증기금을 설립하되 조 단위의 자본을 기금으로 투입해야 한다. 물길이 흐르면 자연히 생명이 살아난다. 확언하건대 미래의 무궁한 일자리가 여기에서 생겨난다. 

환경이라는 주제로 비유하자면, 지난 수십 년간 소위 일상적 사업규모(BAU, Business as Usual)을 기준으로 탄소와 쓰레기 배출량을 점차적으로 줄이는 노력을 진행하여 왔으나 그 결과 현재 직면하고 있는 지구의 기후변화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미국의 그린뉴딜 정책이나 영국의 멸종 저항(Extinction Rebellion) 운동에서 보듯이 BAU 수준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해당 산업의 과감한 조업 정지와 폐쇄를 결정하지 않고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금융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탐욕과 초과 수익을 추구하는 기존 금융의 제도와 관행과 무관하게, 가치와 관계와 변혁을 평가기준으로 삼는 사회적 금융의 시스템을 과감하게 대규모로 도입할 때만이 새로운 질서가 기존 관행의 구심력을 탈피하여 독자적인 질량과 동력을 형성하며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미국에서 논의가 시작된 현대화폐이론(MMT, 정부는 필요하다면 제한 없이 화폐를 공급할 수 있다는 이론)를 사회적 경제 분야의 활성화를 위해 우선 실험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검토해볼 만하다.  

미국의 군사적 패권과 월가 중심의 금융권력이 세계를 지배하는 현존의 시대에 경제주권이라는 국가적 주제로 시야로 돌려보자. 한국의 금융 및 자본시장은 1997년 IMF사태 이후, 거대한 외국자본에 포획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산업은행과 우리은행을 제외한 대부분의 대형 민간은행 주식의 대부분을 외국인들이 소유하고 있어 금융당국의 정책과 결정이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으며, 자본시장 역시 양질의 수익을 내는 재벌과 대기업 주식의 절반을 외국인 투자자들이 사들이고 있는 형편이다. 절반이라고 하나 실제 경영권 방어를 위해 국내 과점주주들이 소유한 주식은 시장에서 매매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사실상 자본시장은 외국투자자들의 절대적 영향권에 들어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

최근 언론지상에서 보도가 되었듯이 한미 FTA 협상 과정에서 소위 투자자-국가소송제도(ISDS)를 수용하면서 2019년 현재 9조 원 이상의 소송이 진행되거나 검토 중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간 전문가들이 경고를 무시한 채, 친미파 관료들에게 포위당해 결정한 한국 정부의 실책으로 자기 발등을 찍은 셈이다. ISDS의 문제점은 단순히 위에 걸린 소송의 액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향후 한국정부가 주권적 경제정책을 시행할 때마다 이를 의식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욱 큰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정부는 지난 시절 1%의 부자를 위한 잘못된 관행에서 벗어나 99% 일반 시민을 위해 과감하고 용기 있게 정책의 전환을 결정할 수 있어야만 한다. 예를 들자면, 금융산업의 주주 자격을 엄격히 규정하고 외국인 지분을 제한한다거나, 자본시장에 들어오는 외국인 투자의 단타적 차익 실현 행태가 가져올 혼란을 막기 위해 국제적 연대를 통한 토빈세를 적용하거나 증권 당국에 투자액의 10% 이상 예치를 강제하는 방식 등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금융 위기가 닥치면 대마불사의 논리로 우선적으로 은행과 재벌기업을 구제하고 지원할 것이 아니라, 이들을 가차 없이 국유 또는 공공기업으로 전환하고 대신에 생존의 위기에 처한 서민들에 대한 직접적 지원을 대대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2007년 월가의 위기 당시 미국 행정부는 리먼브라더스 뿐만 아니라 골드만삭스와 제이피모건 등에 자금 지원을 거부하고 국유화를 하든가 또는 폐쇄시켜야 옳았다.  

이러한 제안에 대해 변혁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일시적 혼란과 어려움을 구실로 내세워 비난하겠지만, 위에 언급하였듯이 트럼프식 이기적 패권주의와 금융자본의 탐욕에 맞서 99% 시민들을 위한 주권적 사회경제 정책의 전개를 위해서는 단기적인 불황과 고통을 감내하고 기회적인 자본가들의 고의적 저항에 담대하게 맞서야 한다.

예컨대 신용등급이 낮아 일반 은행을 이용할 수 없는 젊은 세대와 빈민층을 위해 미소금융 등 서민지원 창구가 형식적으로 도입되었으나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며, 이들 대부분은 처해진 처지의 긴박성 때문에 사채업을 양성한 대부업이란 사금융 시장의 고율이자에 의존하여 죽지 못해 살아가는 현대판 노예적 삶을 영위하고 있다. 더구나 사금융 대부분 자금이 일본과 연계된 폭력조직들이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채무변제를 강압하는 횡포가 이들의 삶을 더욱 궁지로 몰아놓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파산 지경의 시민들을 사금융의 횡포에서 벗어나게 하는 특단의 구제금융을 대규모로 확장하고 개인파산의 신고 절차와 해지 과정을 실효적으로 재구성하여 사회적으로 재결합할 기회와 주기적으로 신용의 부활이 가능한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  

미래를 향한 변혁적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현존의 한국 정치시스템으로는 불가하다. 우리 미래를 가로막는 것은 시간당 1만 원이라는 최저임금제가 아니라 무능과 무책임을 노출하는 정치의 제도와 행태이다. 앞 장에서 관료제를 비판하며 시민들의 비판 참여 통제 그리고 주요한 결정 과정의 직접 참여를 주장하였듯이, 현재의 정치를 바꾸어내기 위해서는 비례성이 100% 강화된 선거법의 개정, 정책 정당으로 전환을 위해 개별 국회의원의 특권 제한과 보좌진들의 정책역량으로 이동 배치, 정당 내부의 민주화와 개방경선 방식의 공천제 등과 더불어, 직접민주주의를 채택하여 헌법과 법률 개정이 국민발의과 국민투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과정이 도입되어야 하며, 현재와 같이 국회가 아무 기능을 못하는 비상 상황에서는 당연히 국민들이 국회해산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시민들의 통제가 가능한 정치(필자는 이를 '민치' 또는 '시민권력'이라고 칭한다)를 전제로 하여 자본의 자기증식 기제와 자산가의 탐욕에 의해 작동되는 금융시스템을 차단하여야 비로소 시민들에게 생활의 편익과 미래에 희망을 제공하는 도우미로서 새로운 금융이 정착될 수 있을 것이다. 핵심적으로 화폐발권력을 가진 중앙은행 및 파수꾼 역할을 담당하는 금융감독 당국의 성격과 정책 내용이 소수 자본가 이해중심에서 벗어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중소기업과 서민들을 위한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마땅하다. 

미래금융의 모습을 제안하고 그려낼 역량과 경험이 필자에게 없는 탓에 글을 준비하는 과정에 읽은 서적 하나를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예일대학 출신의 천재로 불리는 찰스 아이젠스타인의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정준형 옮김, 김영삼 펴냄)이라는 책으로 그가 쓴 서문을 필자가 이해하는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본다.

"예수가 성전에서 환전상을 몰아냈던 것처럼 더럽고 불경하다고 여기는 돈을 신성한 것으로 만들려면 대대적인 돈의 혁명, 돈에 대한 본질적인 변혁이 필요하다.

우주를 움직이는 법칙에 신성(神性)이 내재되어 있듯이 인간도 이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돈이 인간 사회를 둘러싼 불멸의 힘이요 보이지 않는 전지전능의 손으로 등장하면서 추상적 존재로 우리의 삶을 감싸던 신성을 대체하였다.  

인간에 내재된 신성은 자연과 타자를 하나로 잇는 관계성을 찾아가 가면서 회복되며, 관계 속에 존재하는 통일성에 이르는 과정이자 각 존재의 고유성과 특별함을 드러내는 관문이기도 하다. 현대에 들어와 돈과 상품화는 인간을 표준화된 사물 그리고 획일화된 상품으로 전락시키면서 모든 관계로부터 고립시켰다.  

그러나 돈의 원래 목적은 사람들이 좀 더 풍요롭게 살 수 있도록 필요와 선물을 서로 이어주는 것이었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선물이라는 표현의 상징으로 탄생한 돈의 원래 기능을 회복시켜야 한다."  

아이젠스타인은 그의 또 다른 저서 (국내 미출판)에서 인간이란 존재의 탄생과 진화적 역사와 공동체적 현존을 모두 축복된 선물이라고 기술한다. 이에 반하여 현대에서 이루어지는 거래는 돈이라는 매개를 통하여 인간관계에 비인격적이고 비대칭적 조건을 부여하면서 이해적(배타적) 제로섬의 원칙을 작동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 돈이 탄생한 역사적 배경인 선물의 관행은 유대적 관계와 순환을 통하여 필요한 사람에게서 멈추고 소비되는 것이었다. 노동의 산물 – 유대적 관계 – 선물방식의 순환 – 필요에 의한 소비 – 공동체적 축복과 지속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인류가 현재 부족함이 없는 풍요의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양극화와 빈곤이라는 역설에 봉착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근대 경제학 이래 개인을 자연과 타인과 분리 고립시키고 합리적(이기적)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로 규정하면서 이러한 인식 위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이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활동의 토대가 되는 금융시스템에 무한한 성장의 신화와 자기증식적 이자개념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른백년'의 기획 칼럼에 '유기체 사상'을 연재하는 박헌권 변호사는 서구의 잘못된 존재론(ontology)이 이야기하는 실체라는 것은, 첫째 존재론적으로 타자와 내재적 상호작용이 전혀 없는 독립된 존재를, 둘째 고정불변의 단일한 속성을 지닌 존재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실체라는 것은 구조적으로 타자와 독립되어 있어 상호의존적 생성을 거부하고 독존을 고집하기에 존재방식은 약자인 타자에 대한 약탈과 착취에 의해 얻는 에너지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강자는 약자를 에너지로만 파악하기에 존재들의 구조는 수직적 지배 복종의 약탈적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  

결국 실체론에 따르면, 인류의 역사는 계속하여 자신을 잉여를 축적함으로써 양적으로 팽창하는 제국주의를 따를 수밖에 없으며, 이데아와 현상, 신과 피조물, 주체인 인간과 대상인 자연처럼 실체론에 입각한 서구는 오늘날까지 계서적 약탈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설파한다. 

아이젠스타인 역시 성장과 증식을 추구하는 배경에는 모든 것이 분리되고 고립된 단자적 존재라는 잘못된 서양철학적 흐름이 있으며, 이러한 인식 속에서는 일상에 전혀 부족함이 없어도 이유 없는 결핍을 느끼고 끝없는 탐욕을 지니면서 결국은 중국 고사에 나오는 '괴철'(무한대의 식욕으로 결국은 자신의 팔다리와 몸체마저 먹어 치운 후 머리만 덩그러니 남는 존재)로 추락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성장만을 추구하는 현재의 경제와 자기증식의 이자를 강요하는 금융시스템에 빗대는 끔찍한 우화이며 인류 미래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더 나가서, 그는 이자증식의 개념이 인간의 창의력과 노동에서 낳은 부를 경제적 지대라는 형태로 돈을 가진 자에게 돌아가게 하는 약탈행위의 현재진행적 원인이며 이러한 범죄 행위를 계속 추진하는 엔진의 역할을 수행하는 동시에 지구를 파괴하는 공범자라고 규정한다.

공동체와 자연으로부터의 단절의 결과는 허구적 결핍과 영혼의 빈곤함으로 귀결되지만, 본래적 인간이라는 존재는 관계 그 자체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이젠스타인은 양적 성장만을 추구하는 경제 운용을 중단하고 신성이 내재한 인간 삶의 본래적 가치를 중시하는 인식의 전환 위에 축복, 관계, 유대 그리고 선물적 순환을 통하여 망가진 공동체와 자연 생태를 회복해 가는 신성한 경제론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는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Monte di Pieta의 사례처럼 무(無)이자 내지는 부(負)이자의 금융시스템과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줄어드는 소멸 화폐를 도입하여 축적과 증식을 억제하고 필요에 따른 경제활동의 현재적 교환과 순환을 촉진하면 비로소 돈이 삶의 목표가 아닌 삶을 풍요롭게 도와주는 수단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고 설명하면서, 동시에 타임뱅크를 포함하여 구체적 생활 속에서 만나는 이웃과 인격적 거래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다양한 지역화폐 방식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필자 자신도 꽤나 진보적이라고 자부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위에 기술한 아이젠스타인의 해석과 제안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의 맹랑한 주장에 대해 해당 분야 전문가들의 반론과 대안을 학수고대하면서 금융이라는 난제에 대한 미숙한 글을 맺고자 한다.

추가 : 돈은 인간이 만든 역사 사회 문화 규범 그리고 타자와 관계를 나타내는 상징이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비록 편이성과 임의적 보안성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벌써 투기와 탈세와 부패의 온상으로 변질된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의 등장과 이미 공신력을 상실한 IT 민간기업의 온라인 화폐명 'Libra'라는 음흉한 기획은 가당치 않다. 신뢰와 인격을 기반으로 하는 결제와 교환의 수단을 투기와 사업 수익의 대상으로 삼으려 하다니!

사회적 신뢰 합의 규범 그리고 이에 따른 책임의 강제성을 동반한 공적기구, 예컨대 시민권력에 의해 통제가 가능한 적법한 은행 및 관계적 필요에 의해 해당된 공적 영역에서 발행되는 e-Money가 미래적 대안이다. 예건데 Libra가 성공적으로 도입되려면 페이스북의 소유와 경영이 철저하게 시민권력이라는 공동체적인 통제하에서 이루어진다는 전제를 반드시 만족시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