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칼럼

'경제 성과' 조바심 강요하는 '경제 정치'는 이제 그만 - 왜 재벌개혁인가?

일취월장7 2019. 6. 24. 09:50

'경제 성과' 조바심 강요하는 '경제 정치'는 이제 그만

[서리풀 논평] 성과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2019.06.24 08:59:24


청와대 정책실장과 경제수석이 갑자기 바뀌었다. 주류 언론의 피상적 관심은 참 한결같다. 이번에도 바꾼 이유나 배경을 두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소설을 썼지만, 우리의 관심은 좀 다르다.  

언론과 비슷하게 인상 비평부터 하자면, 정권이 조바심을 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전임 정책실장 임기가 8개월을 넘지 못했다고 하니 분명 정상 상황은 아니다. 정교한 계획이었다면 이러지 않았을 터, 갑자기 판단을 바꿀 다른 이유가 있겠는가. 무언가 급했기 때문이다.

사정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경제정책의 브랜드인 소득주도성장은 반대 진영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일자리도 성과라 할 만한 것이 변변치 않다. 경제 성과를 대신하던 남북문제도 지지부진, 내년 총선에 대비해야 한다는 정권 내의 압박도 심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정권의 사정일 뿐, 우리 사회 또는 '대한민국'이라는 정치공동체 차원에서는 평가를 다르게 할 수밖에 없다. 사회적 관점은 딱 하나, 그리고 늘 같다. 구성원들의 삶이 골고루 나아지고 행복해질 것인지 하는 것이다. 지금 정권은 이런 관점에서 할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정권이 탄생한 경과와 이유가 그러니, 우리는 이 정권에 '초심'이라는 것이 있었다고 믿는다. 게다가 주권자로부터 권력을 위탁받은 것으로 치면 이번만큼 민의에 충실해야 할 정권이 없다. 길게 말할 여유는 없으니, 그 '초심'과 민의를 토대로 책임을 다시 정비할 것을 권고한다.

사실, 이 '논평'을 통해서도 여러 차례 비슷한 주장을 폈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그만큼 우리의 '권력'이 약하다는 의미이리라. 이번에도 다시 가다듬고 할 일을 하자고 말하는 것이 무슨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되풀이하는 것은, 정권의 안위가 아니라 바로 우리, 시민과 인민(시민권이 없는 사람을 포함하여)의 더 나은 삶을 위해 그 전환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경제정책의 목표를 재조정하라. 소득주도성장이니 일자리니, 또는 혁신성장과 공정경제가 다 무슨 소용이랴. 정책실장과 경제수석을 바꿔서 무슨 무리를 할지 걱정이 앞선다. 악마는 '체감할 수 있는 성과를 내라'라는 데 있다. 무슨 성과를 어떤 방법으로 내겠다는 것인가? 

삼척동자라도 아는 일은 이 모든 성과가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년 총선 때까지 소득 불평등이 줄고 자영자의 살림이 나아지며 일자리가 늘어날 묘수가 있는가? 게다가 한 가지도 아니고 한꺼번에. 필시 무리가 따르고 이상한 개입이 있게 마련이다. 온 나라를 다시 공사판으로 만들지 않기를 바란다.  

세계적 차원에서 경제 환경이 달라졌고, 한국 경제의 체질을 바꿔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 지가 20년이 넘었다. 그 사이에 뭐가 얼마나 달라졌는가? 관료와 언론과 교수들은 20년째 아무런 대안 없이 시장 논리와 규제 완화를 주문처럼 외고 있지 않지만, 정권의 역할은 그 차원의 (근거도 의미도 없는) 정책 대안을 내는 일이 아니다. 

공동체의 백년대계를 생각하면, 왜 쾌도난마(快刀亂麻)의 해결책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가? 경제구조를 개혁해야 하면, 예를 들어 자영자의 비중을 줄이되 연착륙이 필요하면, 왜 그 계획을 말하고 사회적 동의를 끌어내려 하지 않는가?  

지금 방식으로(아주 전통적인!) 괜찮은 일자리를 늘릴 수 있을까? OO형 일자리로 몇 군데는 성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그냥 사례에 지나지 않을 뿐 '국가적'으로는 다르다. 국가는 구조적이면 동시에 추세적이다. 

20년째 해온 말 그대로 '구조개혁'이 필요하면, 필요한 것은 경제정책이 아니라 '경제정치'다. 진즉 해야 했을 말, 옛날식의 경제성장은 불가능하며 양극화와 불평등을 줄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정책목표임을, 이제라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같으면 '폭탄 돌리기'가 따로 없다. 다음 정권, 다음 정부, 10년 뒤, 아직 이해도가 낮아서. 모두 면피의 말과 행동뿐이다. 그도 아니면 익숙한 옛날 처방만 되풀이한다. 더 자유로운 시장, 더 완화해야 하는 규제. 대안은 오로지 한 가지 더 자유로운 시장뿐이다.

누가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첫발을 뗄 것인가? 지금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으니, 경제정치가 해야 할 일이다. 결론을 내지 않아도 좋으니, 토론과 논쟁으로 사회적 학습과정을 거치는 것이라도 해야 한다.  


다음으로, 사회정책은 또 어떻게 할 참인가? 예상하건대, 앞으로도 교육, 주거, 보육, 의료, 돌봄 등의 사회정책은 경제에 휘둘려 옴짝달싹하지 못할 것이다. 그게 바로 과거 패러다임, 그러나 어쩌랴, 그걸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으니. 

누구나 저출산(저출생)과 고령화를 말하지만, 그 누구도 책임질 생각이 없다. 10년도 지나지 않아 대학교육의 토대가 전부 달라진다는데, 다들 참으로 한가하다. 응급인 노인 빈곤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돌봄 '난민'이 속출할 것이 뻔한데, 무슨 대책이라도 있는 것인지.

이런 이야기만 꺼내면 재정 문제가 바로 튀어나온다. 이야기를 꺼내다 말고 한가하게 국가부채 퍼센트 기준을 논하는 것이 현재 상황이다. 연금은 또 어떤가? 더 내고 덜 받는 것이 맞는 이야기면 사람들이 이해하고 동의해야 그렇게 될 것이 아닌가?

이 또한 기가 막힌 정책 아이디어가 아니라 평범한 시민이 이해하고 동의하는 '사회정치'가 필요하다. 정부 부채든 증세든, 보험료 인상이든 돌봄 책임을 지역사회로 떠넘기는 것이든, 이해, 설득, 논쟁, 경쟁, 동의의 과정이 있어야 가능하다. '사회정책'의 대조어, '사회정치'가 해야 할 일이다.  

경제든 사회든, 지금의 정책과 정치 구조로는 다른 누구도 이 역할을 대신할 수 없다. 먼저 나서야 할 곳은 개인이 아닌 정치 구조로서의 '대통령'이다. 사실상 정권과도 동의어인 이 '제도'야말로 장기적인 국가 의제를 내고 토론을 유도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다.

정책실장과 경제수석을 교체한 것이 대통령'제(制)'의 경제정치와 사회정치를 회복하는 신호이기를 바란다. 다시 말하지만, 누구나 체감할 수 있는 단기성과를 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조바심이 날수록 먼 길을 생각해야 한다. 약 2년 전 '논평'에서 '치매국가책임제'를 두고 한 말이지만, 다른 과제도 비슷하리라 생각한다.(☞ 관련 기사 : "치매안심센터, '반동의 레토릭' 될까 두렵다") 

"단기성과를 개혁의 동력이나 마중물이라고 강변하지 말라. 돌봄 부담, 건강과 삶의 질, 형평성 같은 것이 진짜 성과라면, 사람들은 곧 저절로 깨닫고 알게 된다. 그런 성과가 나타나서 좋아진 현실이 더 중요하다. 현실이 나아지지 않으면 개혁의 동력도 없다!

지금은 '장기', '종합' 계획과 촘촘한 디자인이 더 급하다. 지역사회와 시설, 의료와 복지, 가족 돌봄과 사회적 돌봄, 예방-치료-재활을 촘촘하게 잊는 연결망. 어떻게 만들고 연결할지, 역할을 어떻게 나누고 합할지, 틀과 내용, 흐름을 정교하게 구성(재구성)해야 한다.

누가 할 것인지도 소홀할 수 없다. 개혁의 진짜 동력은 시민들의 이해와 정치적 지지가 아닌가? 지금 우리의 정치 수준은 '장기'를 바랄 수 없다거나, 그래서 '치매국가관리제'의 성과가 나는데 긴 시간이 걸리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정치적 의지만 분명하면, 시민의 정치적 효능감은 장기 구상과 종합 계획을 보고 논의하는 것에서도 충족될 수 있다. 

이해와 동의, 그리고 통로로서의 참여야말로 정치의 본령임을 강조한다. 허시만의 처방도 다르지 않다. 반동과 그 레토릭에 대응하는 방법은, 그리하여 개혁을 밀고 가는 동력은 "민주주의 친화적인 논의"에서 나온다."     



왜 재벌개혁인가?

[좋은나라 이슈페이퍼] 재벌개혁의 필요성과 구체적 정책 대안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2년이 지났지만, 대선 때 공약한 재벌개혁은 거의 이뤄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작년 8월에 들어와 정부는 인터넷전문은행특례법 제정을 통해 은산분리를 완화하는 물꼬를 텄고, 차등의결권 주식 도입과 상속증여세법 개정 등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가 과연 재벌개혁의 의지가 있는지에 대한 회의와 함께, 노골적인 친재벌정책으로 방향을 튼 것은 아니냐는 우려를 자아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문재인 정부의 갈지자 행보는 재벌개혁이 현 시점에서 왜 필요한지에 대한 이해의 부족과 개혁추진에 대한 정치적 부담이라는 이해타산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이글에서는 재벌개혁의 필요성과 구체적 정책 대안에 대해 논의하고, 재벌개혁 실행을 위한 방안도 제시한다. (필자)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2년이 지났지만, 대선 때 공약한 재벌개혁은 거의 이뤄지고 있지 않다. 집권 1년차에 적폐청산과 한반도를 둘러싼 급박했던 외교적 과제에 정부의 역량이 집중되었을 거라는 이해 하에서, 작년 6월 지방선거 이후에는 본격적인 재벌개혁에 나설 것이라는 기대도 높았다. 정부 역시 이런 평가와 기대를 이해하고 있는 듯 했다. 공정거래위원장을 중심으로 하는 범정부 경제민주화TF를 꾸려서, 작년 9월 정기국회 때 재벌개혁과 관련된 입법 패키지를 내놓았다. 그러나 재벌개혁의 핵심인 공정거래법 전부개정안은 공정거래위원회가 스스로 밝힌 내부거래를 통한 사익편취, 지주회사제도의 오남용, 공익법인을 통한 지배력 확대와 같은 문제점들을 해결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정부는 또한 작년 말까지 '금융그룹의 감독에 관한 법률(가칭)'을 입법 발의하기로 했으나, 이 약속 역시 지키지 않았다. 금융위원회는 금융그룹 통합감독 모범규준을 작년 7월부터 시범 운영하고 있는데, 모범규준은 금융그룹의 건전성 관리를 강화하기 위해서 자본적정성, 내부거래 및 위험집중 등 그룹위험의 유형 및 평가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모범규준은 집중위험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아, 사실상 무용지물로 전락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금융그룹의 감독에 관한 법률(가칭)'의 제정을 계기로 오히려 삼성재벌의 염원인 중간금융지주회사 제도의 도입을 추진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황제경영을 방지하기 위한 상법개정안에서 제시된 집중투표제나 감사위원 분리 선출의 실효성도 여전히 의문이다. 예를 들어, 포스코는 이미 집중투표제를 도입하고 있으나, 독립적인 사외이사 선출에 별 도움이 못되고 있다. 재벌의 경제력집중이 심각한 현 상황에서 감사위원이 분리 선출된다고 하더라도 총수일가의 사익편취를 방지하기에는 역부족일 수 있다. 실효성에 의문이 있는 집중투표제나 감사위원 분리 선출은 포함된 반면에, '자사주의 마법'을 방지하기 위한 방안은 정부의 상법 개정안에 아예 빠져 있는 실정이다.

작년 7월 30일에는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에서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의결했다. 그러나 의결권 행사 위임장 대결과 주주제안이라는 적극적 주주권 행사는 기금운용위원회가 의결할 경우에만 시행하고, 의결권행사 결정 내용에 대한 공시 내용과 범위는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에서 결정하기로 하는 제한적 도입이었다. 더욱이 올해 3월 하순에 이른바 주총시즌에서 국민연금은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이 무색할 만큼 예년과 다름없이 의결권을 행사함으로써 주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방기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결국 이대로라면 국민연금운용의 투명성과 독립성 그리고 수탁자의무 준수를 기대하기 어렵다.

재벌개혁에 뚜렷한 진척이 없는 가운데, 오히려 작년 8월에 들어와 정부는 인터넷전문은행특례법 제정을 통해 은산분리를 완화하는 물꼬를 텄고, 차등의결권 주식 도입과 상속증여세법 개정 등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가 과연 재벌개혁의 의지가 있는지에 대한 회의와 함께, 노골적인 친재벌정책으로 방향을 튼 것은 아니냐는 우려를 자아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문재인 정부의 갈지자 행보는 재벌개혁이 현 시점에서 왜 필요한지에 대한 이해의 부족과 개혁추진에 대한 정치적 부담이라는 이해타산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이하에서는 재벌개혁의 필요성과 구체적 방안에 대해 논의함으로써, 재벌개혁 없이는 문재인 정부가 성공하기 어려운 이유를 살펴보기로 한다. 


ⓒ프레시안(최형락)



재벌이 왜 문제인가? 

재벌문제는 황제경영과 총수일가의 사익편취라는 기업 거버넌스의 문제 그리고 경제력집중의 폐해로 대별할 수 있다. 황제경영의 폐해는 무자격한 총수일가의 경영참여나 갑질 문제로 불거지고 있으며, 총수일가의 사익편취는 계열사 간 내부거래, 계열사 간 인수합병, 총수일가인 임원의 과도한 겸임과 보수 등을 이용해 이뤄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기업 거버넌스의 문제는 기업집단의 규모와 상관없이 발생한다. 이에 반해 경제력집중의 폐해는 대규모기업집단에서 발생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경제력집중을 달리 표현하자면, 특정인이나 특정 집단이 경제적 가용자원의 상당부분을 실질적으로 통제함으로써 민주적 통제를 벗어난 경제권력이 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력집중의 문제를 가장 먼저 제기한 것은 20세기 초 미국의 진보적 운동(Progressive Movement)이었는데, 진보적 운동은 경제력집중(보다 엄밀히 표현하자면, 경제력의 존재(existence of economic power))을 한마디로 게이트 기퍼(gatekeeper)가 존재하는 상황이라고 표현했다.  

따라서 경제력집중이 해소되지 않으면 다원주의에 기초한 정치적 민주주의도 경제적 시장경제도 작동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런 진보적 운동의 생각은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이라는 금권트러스트(Money Trust)의 해체와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을 거처 미국 재벌의 해체로 구체화되었다.  

그런데 진보적 운동이 우려했던 경제력집중의 문제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극명하게 발생하고 있다.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사장이었던 장충기의 문자들이 국정농단사건 수사 과정에서 언론을 통해 알려졌는데, 이 들 문자는 삼성재벌이 실제로 우리사회의 경제권력이 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경제력집중의 폐해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형해화라는 근본적인 문제점 외에도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첫째, 경제력집중이 우려되는 기업집단의 도산은 경제위기로 전이되는 이른바 시스템 리스크가 발생할 수 있다. 둘째, 경제력집중은 결국 시장의 경쟁을 말살하게 되어 경제의 혁신과 역동성을 앗아간다는 점이다.
사실 한국 경제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문제의 핵심은 제조업의 위기라고 할 수 있는데, 재벌대기업 중심의 전속거래 하청구조는 제조업 중간재 부문에서 공정한 경쟁의 실종과 이로 인해 제조업의 고도화를 가로막아 제조업 위기를 야기하고 있다. 경제가 성장하면 장치산업 중심의 제조업들은 가격 경쟁력을 잃게 된다. 물적 자본 중심의 장치산업에서 경쟁력의 원천은 궁극적으로 숙련노동력의 임금경쟁력에 있는데, 경제가 성장해가면서 임금이 인상되고 후발 개도국이 추격해 오면 숙련노동력의 임금경쟁력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한국 등의 신흥 제조업 강국의 도전에 직면해, 1990년대 이후에 일본, 독일, 북유럽의 국내 산업구조는 기술경쟁력이 있는 인적자본 중심의 부품 소재 산업과 특수재 산업 위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국 등의 신흥국의 도전에 직면한 현재 한국 제조업은 장치산업 중심구조에서 고부가가치 중간재나 특수재 산업으로의 진화가 단절되고 있다.

공정한 경쟁의 기회가 없을 때 생산성 향상과 혁신이 일어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는 과거 미국에서도 있었다. 1960년대까지 미국의 자동차산업은 GM, 포드, 크라이슬러 3사가 담합 구조를 유지했는데, 이런 담합 구조 하에서 부품을 공급하는 협력기업들도 전속 계약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담합과 전속계약 체제로 인해 1960년대 미국 자동차산업에서 혁신이 사라지게 되었고, 1970년대 일본의 자동차가 미국에 들어오면서 미국 자동차 회사들이 위기를 맞게 되었다.  

재벌대기업 중심의 하청 구조에서 기술탈취가 만연한 것은 이미 상식이 되었다. 하청구조에서 기술탈취가 만연하며, 중간재 산업에서 혁신의 유인이 제거된다. 경쟁의 기회가 봉쇄되기 어렵고 또 동시에 기술탈취가 어려운 B2C (Business to Consumer) 분야에서는 우리 경우에도 혁신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잘 나가는 신생 혁신기업들로 인터넷 관련업체와 화장품업체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B2C 업종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대표적인 내부거래와 하청 산업인 B2B (Business to Business) 분야에서는 혁신이 거의 일어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단가 후려치기는 최종재를 생산하는 재벌 대기업에게도 결국은 독이 되고 있다. 기술탈취와 더불어 재벌대기업은 하청기업들에게 단가 후려치기로 자신의 가격경쟁력을 담보할 수 있게 되고, 따라서 스스로 혁신할 유인을 잃고 있다. 기술탈취와 단가후려치기는 나아가 중소기업의 저생산성과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 양극화의 원인이 되고 있다.

제조업 혁신과 역동성의 상실은 취약한 재벌의 도산과 경제위기로 이어질 개연성이 높다. 경제위기는 사회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살아남는 재벌 중심으로 경제력집중을 심화시키는 악순화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 사실 1997년 경제위기의 경험이 이런 추론을 뒷받침하는 실증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력집중 심화→경제위기 발생→사회양극화와 경제력집중의 심화’라는 악순환이 반복되면 한국은 이른바 중남미형 싸이클에 빠질 수 있다.

재벌개혁을 위한 제언 

그렇다면 재벌개혁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논의했듯이, 재벌문제는 황제경영과 총수일가의 사익편취라는 기업 거버넌스의 문제 그리고 경제력집중의 폐해로 대별할 수 있다.  

먼저, 총수일가의 황제경영이나 사익편취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비지배주주의 주주권을 강화해 비지배주주가 직접적으로 총수일가를 견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총수일가인 이사와 임원의 보수 및 겸직, 계열사 간의 M&A, 일정규모 이상의 내부거래에 대해 비지배주주의 다수의 동의(MoM Majority of Minority)를 받도록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이 MoM 규칙은 상법에 도입하거나 거래소 상장규칙에 반영할 수 있다.

인도에서는 일정규모 이상의 내부거래에 대해 상장규칙과 상법으로, 이스라엘에서는 총수일가로서 임원의 보수에 대해 상법에서 MoM 규칙을 두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의지만 있다면, 입법이 필요하지 않은 거래소 상장규칙 제정을 통해 재벌 총수일가의 사익편취 행위를 실효적으로 규제할 수 있다. 

재벌의 경제력집중 해소를 위해서는, 계열사(출자계열사)에게서 출자 받은 계열사(피출자계열사)는 다른 계열사에 출자를 금지(출자를 2층 구조로 제한)하되 100% 출자는 적용 제외하는 출자규제를 도입해 볼만 하다. 이 경우에 지주회사규제, 순환출자 규제를 별도로 둘 필요도 없고, 따라서 규제 회피도 불가능하고 비대칭 규제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다. 한편 출자계열사에게는, 현행 지주회사 규제에서처럼, 부채비율 규제를 부과할 필요가 있다.

또한 3층 구조를 예외적으로 허용할 경우에, 손자회사(피출자회사의 피출자회사)의 사업 영역을 제한하고 이사의 1/2 이상을 MoM 규칙으로 선출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출자규제는 5대 재벌,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공시대상기업집단 순으로 순차적으로 적용함으로써 정책의 수용성을 높일 수 있다.  

은산분리 원칙은 확고히 지키되, 주요 금융회사(그룹)와 주요 실물회사(그룹)를 동시에 지배하는 것을 금지하는 구조적 금산분리와 그 외의 복합금융그룹에게는 통합감독 체계를 적용하는 방안도 필요하다. 주요 회사(그룹)에 대한 정의는 이스라엘의 개혁 사례를 참고해 국내 실정에 맞게 조정할 수 있다. 

한편 공익법인과 금융보험사의 보유 계열사 주식에 대해 의결권을 순차적으로 제한해 3년 안에 예외 없이 전면 금지해야 한다. 또한 자사주를 소각하지 않고 처분할 경우에 신주발행절차를 준용하고, 회사가 분할이나 분할 합병할 경우에 자사주에 분할신주 배정을 금지하는 상법 개정이 필요하다. 

재벌개혁은 시행령과 지침, 그리고 규정의 개정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성과를 낼 수 있다. 그러나 온전한 개혁은 입법 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를 위해서는 내년 총선 이전에 제2의 촛불시민운동과 같은 개혁연대를 통해 구체적인 재벌개혁 방안을 제시하고, 이 개혁방안에 대해 국회의원 후보자 개개인의 지지 여부를 묻고 유권자들에게 이런 정보를 제공하는 유권자 운동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정칙적인 개혁 연대가 형성될 수 있고, 이런 정치세력이 재벌개혁의 입법화를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