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밑을 파 보고 싶다
[김시덕의 직업적 책읽기] 김상운의 <국보를 캐는 사람들 - 발굴로 읽는 역사>
2019.06.08 13:40:48
연구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이 책은 땅속에서 옛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확인하고 그들이 남긴 유물을 보존하는 고고학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말하자면 '한국 고고학자 열전'이다.
외국에는 이런 고고학자의 이야기를 엮은 책이 많이 나와 있다. 한국어로 번역된 이런 종류의 책 가운데에서는 C.W. 세람 <낭만적인 고고학 산책>(대원사 펴냄, 2002)과 메릴린 존슨 <폐허에 살다 - 발굴해서 역사를 찾는 고고학자들 이야기>(책과함께 펴냄, 2016)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한국인이 쓴 이런 류의 책으로는 고고학자 조유전 선생의 <발굴 이야기 - 왕의 무덤에서 쓰레기장까지 한국 고고학 발굴의 여정>(대원사 펴냄, 1996)을 인상적으로 읽은 기억이 있다. 하지만 조유전 선생의 책은 어디까지나 고고학자 본인이 자신과 주변인의 발굴 경험과 발굴된 유적・유물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이번에 서평을 쓰는 김상운 선생의 <국보를 캐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문화재 및 학술 전문기자로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고고학계 바깥에서 쓴 고고학자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나 같은 일반 독자에게도 더 공감되고 와 닿는 부분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경상북도 고령군 지산동 고분군을 발굴한 김세기 선생에 대한 묘사를 보자.
그의 첫인상은 다분히 수더분했다. 수많은 학자를 인터뷰해봤지만 그처럼 먹물 냄새를 풍기지 않는 스타일은 본 적이 없다. 그는 청년 시절 생활이 어려워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한동안 수원시청에서 말단 공무원으로 일했다. 스스로 생활비를 벌면서 군대를 마치느라 동갑내기보다 6년 늦게 대학에 들어갔다. ... 농고를 다니면서 측량 기술을 익힌 덕에 그는 발굴 현장에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 ... 그는 대구한의대 교수로 부임한 이후에도 2002년까지 지산동 고분군 발굴 현장을 지켰다. 고고학자 한 명이 특정한 유적을 20년 넘게 지속적으로 발굴한 사레는 국내에서는 매우 드물다. (323~324쪽)
김세기 선생과 같은 경력은 학술 순수주의가 강한 한국 학계 일반에서는 무시당하나 심지어는 경계의 대상이 되는 경우까지 있다. 하지만 현직 기자인 저자에게는 이런 김세기 선생의 삶과 활동이 더욱 세상에 알려질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인 듯하다. 많은 독자들도 이러한 판단에 공감하리라 믿는다.
이렇듯 <국보를 캐는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유적을 발굴해서 유물을 찾아내고 역사를 만들어내고 있는 사람들의 삶과 행적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연구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이 책이 말하는 가장 근본적인 메시지가 이것이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숱한 컬러 사진들 가운데 가장 가치있는 것은, 이제껏 수많은 교과서와 교양서에 사진으로 실린 유적과 유물을 실제로 발굴한 고고학자들의 모습이 찍힌 수많은 사진들이다.
한반도를 이해하려면 전 세계를 두루 알아야 한다
이 책은 땅속에서 옛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확인하고 그들이 남긴 유물을 보존하는 고고학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말하자면 '한국 고고학자 열전'이다.
외국에는 이런 고고학자의 이야기를 엮은 책이 많이 나와 있다. 한국어로 번역된 이런 종류의 책 가운데에서는 C.W. 세람 <낭만적인 고고학 산책>(대원사 펴냄, 2002)과 메릴린 존슨 <폐허에 살다 - 발굴해서 역사를 찾는 고고학자들 이야기>(책과함께 펴냄, 2016)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한국인이 쓴 이런 류의 책으로는 고고학자 조유전 선생의 <발굴 이야기 - 왕의 무덤에서 쓰레기장까지 한국 고고학 발굴의 여정>(대원사 펴냄, 1996)을 인상적으로 읽은 기억이 있다. 하지만 조유전 선생의 책은 어디까지나 고고학자 본인이 자신과 주변인의 발굴 경험과 발굴된 유적・유물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이번에 서평을 쓰는 김상운 선생의 <국보를 캐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문화재 및 학술 전문기자로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고고학계 바깥에서 쓴 고고학자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나 같은 일반 독자에게도 더 공감되고 와 닿는 부분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경상북도 고령군 지산동 고분군을 발굴한 김세기 선생에 대한 묘사를 보자.
그의 첫인상은 다분히 수더분했다. 수많은 학자를 인터뷰해봤지만 그처럼 먹물 냄새를 풍기지 않는 스타일은 본 적이 없다. 그는 청년 시절 생활이 어려워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한동안 수원시청에서 말단 공무원으로 일했다. 스스로 생활비를 벌면서 군대를 마치느라 동갑내기보다 6년 늦게 대학에 들어갔다. ... 농고를 다니면서 측량 기술을 익힌 덕에 그는 발굴 현장에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 ... 그는 대구한의대 교수로 부임한 이후에도 2002년까지 지산동 고분군 발굴 현장을 지켰다. 고고학자 한 명이 특정한 유적을 20년 넘게 지속적으로 발굴한 사레는 국내에서는 매우 드물다. (323~324쪽)
김세기 선생과 같은 경력은 학술 순수주의가 강한 한국 학계 일반에서는 무시당하나 심지어는 경계의 대상이 되는 경우까지 있다. 하지만 현직 기자인 저자에게는 이런 김세기 선생의 삶과 활동이 더욱 세상에 알려질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인 듯하다. 많은 독자들도 이러한 판단에 공감하리라 믿는다.
이렇듯 <국보를 캐는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유적을 발굴해서 유물을 찾아내고 역사를 만들어내고 있는 사람들의 삶과 행적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연구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이 책이 말하는 가장 근본적인 메시지가 이것이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숱한 컬러 사진들 가운데 가장 가치있는 것은, 이제껏 수많은 교과서와 교양서에 사진으로 실린 유적과 유물을 실제로 발굴한 고고학자들의 모습이 찍힌 수많은 사진들이다.
한반도를 이해하려면 전 세계를 두루 알아야 한다

▲ <국보를 캐는 사람들 - 발굴로 읽는 역사>(김상운 지음, 글항아리 펴냄) ⓒ글항아리
백제의 수도가 오늘날의 서울 강남에 있던 시절의 왕궁이던 몽촌토성을 발굴한 박순발 선생의 경우는 1988년 11월~1989년 2월 사이의 혹한기에 박물관 바닥에 스티로폼을 깔고 생활하면서, 몽촌토성에서 발굴된 토기 조각 수천 개를 일일이 맞추는 작업을 해나갔다. 1988년 12월에 발굴보고서를 제출해야 하는 행정적인 압력, 그리고 "기초 블록도 못 만들면서 고담준론만 벌이는"(214쪽) 당시 고고학계의 분위기에 눌리지 않고 3년에 걸쳐 발굴, 복원, 보고서 제출까지 완료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확인된 몽촌토성 출토 도기는 몽촌토성과 중국 강남 지역 사이에 이루어진 원거리 무역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또한 고대 한반도 예술의 최고봉이라고 할 유명한 백제금동대향로가 남북조 시대에 중국에서 수입되었을 것이라는 일각의 주장에 맞서, 그는 백제의 향로와 비슷한 실물 자료가 중국에서 발굴되지 않았음을 밝혀내기도 했다. 이는 모두 한반도를 이해하기 위해 전세계를 두루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학계에서는 보기 드문 이런 신념을 지니고 있다 보니 박순발 선생은 "한국 학계에서 튀는 연구자로 정평이 나 있다"(216쪽)고 한다. 하지만 그가 튀는 게 아니라, 그런 폭넓은 시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국 학계가 세계 학계의 기준에서 튀는 것이다. 이런 부분에 대해 김상운 선생은 기자의 눈으로 날카롭게 논평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한국 고고학계에서 젊은 연구자가 스승들의 선행연구와 다른 시각을 제시하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안정적인 교수 자리를 구해야 하는 소장학자일수록 더 그렇다. 학계에서 '건방 떤다'는 식으로 찍히면 제아무리 실력이 출중해도 선배 교수들이 참여하는 교수 임용 면접을 통과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한 현직 역사학과 교수는 "정년이 보장되는 신임 교수가 한번 들어오면 그와 적어도 20년을 같이 일해야 하는데 사회성 없고 모난 성격이면 무척 피곤해진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결국 튀는 연구보다는 통설을 어느 정도 수용하면서 동료 교수들과 융합할 수 있는 '무난한' 연구자가 한국의 대학교수로 임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였다. (216쪽)
무난한 연구자가 교수가 되고 눈에 띄는 연구자는 배척받는 학계의 분위기는, 비단 학계뿐 아니라 21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 구석구석에서 비슷한 사례를 숱하게 찾을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학계 바깥에 있는 지인들이나 시민 강의에서 만나는 시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그들이 "학계는 바깥 사회와는 달리 공명정대할 것이다"라는 기대감을 품고 있음을 확인하고 답변이 궁해질 때가 있다. 학계 역시 이 사회의 일부이며, 학계의 분위기와 결과물 역시 이 사회에 속한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인간 사회와 분리되어 있는 아름답고 공평한 학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학문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외국에서 진심으로 배운다
김상운 선생이 '고고학자 열전'이라고 할 이런 책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2015년에 중국 랴오닝성의 홍산문화박물관에 갔을 때였다고 한다. 그곳의 전시관에는 홍산문화를 발굴한 수많은 고고학자들의 사진과 기록이 먼저 전시되어 있었고, 유물 소개는 그 뒤에 시작되고 있었다. 유적과 유물은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수천 년의 시간을 초월해서 우리에게 곧장 전해진 게 아니라, 고고학자 한 사람 한 사람이 한여름의 땡볕과 한겨울의 찬바람을 무릅쓰고 땅을 파서 일일이 찾아낸 것임을 현대의 중화인민공화국 시민들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전시를 보고 나서 김상운 선생은 한국 고고학자들의 이야기를 발굴해서 한국 시민들에게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다.
마오쩌둥이 문화혁명 당시 저지른 숱한 오류 가운데에서도, 홍위병들이 중화인민공화국 곳곳의 유적과 유물을 대량으로 파괴하게 한 것은 인류 차원의 큰 손실이었다. 그런 손실을 겪은 뒤에 중화인민공화국 시민들은 유적과 유물을 소중히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유적과 유물을 발굴하고 보존하는 고고학 관련자들에 대한 존중의 마음을 품게 되었다.
20세기 후반의 현대 한국 시기에도 한국 시민들은 수많은 유적과 유물을 파괴했다. 한성 백제 시절의 고분 200여개와 삼성동 토성이 1970~1980년대 서울 강남 개발 때 사라졌고, 서울 사람이 천여 년간 묻힌 은평구 이말산의 공동묘지에서 발굴된 5000여개의 무덤이 진관 신도시를 만들면서 사라졌으며, 2003년에 울산 대곡댐 수몰 예정지구에서 발굴된 신라 무덤 1100여 기가 물 아래 잠겨버렸다.
이 책에는 세종 행정중심복합도시를 만들다가 발견된 나성리의 백제 지방도시 유적 이야기가 나온다. 로마 제국의 지방도시였던 폼페이의 유적이 수십 년 동안 발굴되고 보존되어 로마 제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처럼, 나성리 백제 도시 유적도 그렇게 찬찬히 발굴될 필요가 있었지만 세종시 개발로 인해 사라졌다. 당시 발굴을 맡은 이홍종 교수는, 허가받은 발굴 범위에서 50미터만 더 나아갔으면 백제시대에 배를 대던 선착장 유적이 나왔을 것 같다며 아쉬워한다.
신도시를 만들고 아파트를 만드는 것은 당연히 중요하다. 하지만 현대 한국 시민들은 신도시와 아파트를 가치 판단의 첫 번째 기준이자 유일한 기준으로 삼고 있다. 그 기준을 적용하는 데 방해가 되는 유적과 유물과 마을을 가차없이 밀어내고는 자신들이 사는 지역을 역사가 없는 황무지로 만든 뒤, 한반도에 유적과 유물이 많지 않은 것을 중국・일본의 침략과 육이오 전쟁 때문이라며 남 탓을 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 시민은 문화혁명 당시의 야만적 파괴 행위를 반성하는 중화인민공화국 시민들의 자세를 진심으로 배워야 한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귀 기울이기, 그리고 기대
다른 나라의 좋은 것을 진심으로 배우듯이, 다른 분야에서 공부한 사람이 내 분야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낼 수 있다는 사실도 진심으로 받아들여서 큰 성과를 거둔 사례가 이 책에는 많이 소개되어 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학제간 연구', '융합', '통섭'이다.
"오랫동안 정통 고고학자들이 관심을 두지 않은"(140~141쪽) 건축공학적인 지식을 장착한 김동현 선생이 경주 황룡사지의 목탑 터 심초석(목탑을 지탱하는 중앙 기둥의 주춧돌)을 들어 올리자고 주장한 결과 놀라운 발견을 한 사례, 지질학자·식물생리학자 등 자연과학 연구자들이 중심이 되어 연천 전곡읍 전곡리 구석기 유적을 연구한 사례, 신석기 시대의 도토리 저장 구덩이 위치를 통해서 신석기 시대의 해안선 위치를 연구한 지리학자 황상일 선생의 사례 등이 이 책에는 소개되어 있다.
마지막 사례는 특히 흥미로운데,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바닷물로 도토리의 떫은 맛을 없애기 위해 바닷물이 드나드는 바닷가에 저장 구덩이를 팠기 때문에 당시의 해안선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 영역은 자기가 가장 잘 알기 때문에 남의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는 자세, 나아가 자기 영역에 다른 영역 사람이 관심을 보이면 히스테릭하게 반응하던 사람들이 득세하던 시절이 끝나고 있음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어, 나는 앞으로 다가올 한국 사회의 미래에 좀 더 희망을 품게 되었다.
이 책은 희망과 더불어 기대도 품게 해주었다. 익산 왕궁면 왕궁리 유적의 경우가 그렇다. 미륵사지로 유명한 곳은 백제의 마지막 왕궁이 조성된 곳이다. 아직 이 곳에서는 왕궁 부근에 반드시 있는 관청들의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 지역을 발굴한 최맹식 선생을 비롯한 관련 학자들은 이 일대에서 백제의 행정 기록이 목간(기록이 남겨진 나뭇각)형태로 발굴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고려시대에 개성·평양과 함께 남경이라 불리는 중요한 도시였던 서울에서는 아직 고려시대의 흔적이 거의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학계에서는 청와대와 경복궁 자리에 고려시대 남경의 흔적이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나는 고 노무현 대통령이 행정수도를 옮기려 했을 때, 그렇게 해서 청와대가 옮겨가고 나면 그 지역을 발굴해서 고려시대 남경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에 행정수도 이전 계획을 지지했다.
물론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한동안 통일되지 않으리라 예상되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북쪽 끝인 서울에서 중심인 세종으로 수도를 옮기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아무튼 익산 왕궁면 왕궁리 유적의 주인공인 백제와 서울 사대문 안 남경 유적의 주인공인 고려 모두 역사 기록이 참 부족한 나라들이다. 제발 작은 기록이라도 땅속에서 나와주면 좋겠다는 바람과 기대를 품으며 <국보를 캐는 사람들>을 덮었다.
또한 고대 한반도 예술의 최고봉이라고 할 유명한 백제금동대향로가 남북조 시대에 중국에서 수입되었을 것이라는 일각의 주장에 맞서, 그는 백제의 향로와 비슷한 실물 자료가 중국에서 발굴되지 않았음을 밝혀내기도 했다. 이는 모두 한반도를 이해하기 위해 전세계를 두루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학계에서는 보기 드문 이런 신념을 지니고 있다 보니 박순발 선생은 "한국 학계에서 튀는 연구자로 정평이 나 있다"(216쪽)고 한다. 하지만 그가 튀는 게 아니라, 그런 폭넓은 시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국 학계가 세계 학계의 기준에서 튀는 것이다. 이런 부분에 대해 김상운 선생은 기자의 눈으로 날카롭게 논평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한국 고고학계에서 젊은 연구자가 스승들의 선행연구와 다른 시각을 제시하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안정적인 교수 자리를 구해야 하는 소장학자일수록 더 그렇다. 학계에서 '건방 떤다'는 식으로 찍히면 제아무리 실력이 출중해도 선배 교수들이 참여하는 교수 임용 면접을 통과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한 현직 역사학과 교수는 "정년이 보장되는 신임 교수가 한번 들어오면 그와 적어도 20년을 같이 일해야 하는데 사회성 없고 모난 성격이면 무척 피곤해진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결국 튀는 연구보다는 통설을 어느 정도 수용하면서 동료 교수들과 융합할 수 있는 '무난한' 연구자가 한국의 대학교수로 임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였다. (216쪽)
무난한 연구자가 교수가 되고 눈에 띄는 연구자는 배척받는 학계의 분위기는, 비단 학계뿐 아니라 21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 구석구석에서 비슷한 사례를 숱하게 찾을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학계 바깥에 있는 지인들이나 시민 강의에서 만나는 시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그들이 "학계는 바깥 사회와는 달리 공명정대할 것이다"라는 기대감을 품고 있음을 확인하고 답변이 궁해질 때가 있다. 학계 역시 이 사회의 일부이며, 학계의 분위기와 결과물 역시 이 사회에 속한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인간 사회와 분리되어 있는 아름답고 공평한 학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학문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외국에서 진심으로 배운다
김상운 선생이 '고고학자 열전'이라고 할 이런 책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2015년에 중국 랴오닝성의 홍산문화박물관에 갔을 때였다고 한다. 그곳의 전시관에는 홍산문화를 발굴한 수많은 고고학자들의 사진과 기록이 먼저 전시되어 있었고, 유물 소개는 그 뒤에 시작되고 있었다. 유적과 유물은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수천 년의 시간을 초월해서 우리에게 곧장 전해진 게 아니라, 고고학자 한 사람 한 사람이 한여름의 땡볕과 한겨울의 찬바람을 무릅쓰고 땅을 파서 일일이 찾아낸 것임을 현대의 중화인민공화국 시민들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전시를 보고 나서 김상운 선생은 한국 고고학자들의 이야기를 발굴해서 한국 시민들에게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다.
마오쩌둥이 문화혁명 당시 저지른 숱한 오류 가운데에서도, 홍위병들이 중화인민공화국 곳곳의 유적과 유물을 대량으로 파괴하게 한 것은 인류 차원의 큰 손실이었다. 그런 손실을 겪은 뒤에 중화인민공화국 시민들은 유적과 유물을 소중히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유적과 유물을 발굴하고 보존하는 고고학 관련자들에 대한 존중의 마음을 품게 되었다.
20세기 후반의 현대 한국 시기에도 한국 시민들은 수많은 유적과 유물을 파괴했다. 한성 백제 시절의 고분 200여개와 삼성동 토성이 1970~1980년대 서울 강남 개발 때 사라졌고, 서울 사람이 천여 년간 묻힌 은평구 이말산의 공동묘지에서 발굴된 5000여개의 무덤이 진관 신도시를 만들면서 사라졌으며, 2003년에 울산 대곡댐 수몰 예정지구에서 발굴된 신라 무덤 1100여 기가 물 아래 잠겨버렸다.
이 책에는 세종 행정중심복합도시를 만들다가 발견된 나성리의 백제 지방도시 유적 이야기가 나온다. 로마 제국의 지방도시였던 폼페이의 유적이 수십 년 동안 발굴되고 보존되어 로마 제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처럼, 나성리 백제 도시 유적도 그렇게 찬찬히 발굴될 필요가 있었지만 세종시 개발로 인해 사라졌다. 당시 발굴을 맡은 이홍종 교수는, 허가받은 발굴 범위에서 50미터만 더 나아갔으면 백제시대에 배를 대던 선착장 유적이 나왔을 것 같다며 아쉬워한다.
신도시를 만들고 아파트를 만드는 것은 당연히 중요하다. 하지만 현대 한국 시민들은 신도시와 아파트를 가치 판단의 첫 번째 기준이자 유일한 기준으로 삼고 있다. 그 기준을 적용하는 데 방해가 되는 유적과 유물과 마을을 가차없이 밀어내고는 자신들이 사는 지역을 역사가 없는 황무지로 만든 뒤, 한반도에 유적과 유물이 많지 않은 것을 중국・일본의 침략과 육이오 전쟁 때문이라며 남 탓을 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 시민은 문화혁명 당시의 야만적 파괴 행위를 반성하는 중화인민공화국 시민들의 자세를 진심으로 배워야 한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귀 기울이기, 그리고 기대
다른 나라의 좋은 것을 진심으로 배우듯이, 다른 분야에서 공부한 사람이 내 분야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낼 수 있다는 사실도 진심으로 받아들여서 큰 성과를 거둔 사례가 이 책에는 많이 소개되어 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학제간 연구', '융합', '통섭'이다.
"오랫동안 정통 고고학자들이 관심을 두지 않은"(140~141쪽) 건축공학적인 지식을 장착한 김동현 선생이 경주 황룡사지의 목탑 터 심초석(목탑을 지탱하는 중앙 기둥의 주춧돌)을 들어 올리자고 주장한 결과 놀라운 발견을 한 사례, 지질학자·식물생리학자 등 자연과학 연구자들이 중심이 되어 연천 전곡읍 전곡리 구석기 유적을 연구한 사례, 신석기 시대의 도토리 저장 구덩이 위치를 통해서 신석기 시대의 해안선 위치를 연구한 지리학자 황상일 선생의 사례 등이 이 책에는 소개되어 있다.
마지막 사례는 특히 흥미로운데,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바닷물로 도토리의 떫은 맛을 없애기 위해 바닷물이 드나드는 바닷가에 저장 구덩이를 팠기 때문에 당시의 해안선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 영역은 자기가 가장 잘 알기 때문에 남의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는 자세, 나아가 자기 영역에 다른 영역 사람이 관심을 보이면 히스테릭하게 반응하던 사람들이 득세하던 시절이 끝나고 있음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어, 나는 앞으로 다가올 한국 사회의 미래에 좀 더 희망을 품게 되었다.
이 책은 희망과 더불어 기대도 품게 해주었다. 익산 왕궁면 왕궁리 유적의 경우가 그렇다. 미륵사지로 유명한 곳은 백제의 마지막 왕궁이 조성된 곳이다. 아직 이 곳에서는 왕궁 부근에 반드시 있는 관청들의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 지역을 발굴한 최맹식 선생을 비롯한 관련 학자들은 이 일대에서 백제의 행정 기록이 목간(기록이 남겨진 나뭇각)형태로 발굴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고려시대에 개성·평양과 함께 남경이라 불리는 중요한 도시였던 서울에서는 아직 고려시대의 흔적이 거의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학계에서는 청와대와 경복궁 자리에 고려시대 남경의 흔적이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나는 고 노무현 대통령이 행정수도를 옮기려 했을 때, 그렇게 해서 청와대가 옮겨가고 나면 그 지역을 발굴해서 고려시대 남경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에 행정수도 이전 계획을 지지했다.
물론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한동안 통일되지 않으리라 예상되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북쪽 끝인 서울에서 중심인 세종으로 수도를 옮기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아무튼 익산 왕궁면 왕궁리 유적의 주인공인 백제와 서울 사대문 안 남경 유적의 주인공인 고려 모두 역사 기록이 참 부족한 나라들이다. 제발 작은 기록이라도 땅속에서 나와주면 좋겠다는 바람과 기대를 품으며 <국보를 캐는 사람들>을 덮었다.
리영희 선생이 살아계셨다면, 국보법 폐지를 요구하셨을 것
[기고] 미래 한반도 위해 국보법 폐지, 한미동맹 정상화 필요하다
2019.06.10 11:57:37
이영희 선생님은 70-80년대 반공주의만이 지배하던 국내 상황에서 세계 주요 정세 속의 한반도 문제를 조명하는데 기여하셨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충격이었다. 이 선생님은 베트남 전쟁에서 드러난 미국의 침략성, 마오쩌둥과 중국, 한반도 핵문제의 심각성을 활자화해 제시하면서 사회적 의식화를 선도하셨다. 이 선생님은 <한겨레> 신문 창간에 큰 도움을 주셨고 연로하신 상황에서도 세계를 살피고 그 실체를 파헤치는 작업을 계속하셨다. 이 선생님은 현역 기자 생활 당시 국내외 정세를 살펴 현상 분석과 대안 제시에 탁월했던 분으로 알려져 있다. 만약 오늘날 선생님이 생존해계신다면 비핵화, 남북관계 등에 대해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생각해 본다. 아마 틀림없이 국가보안법 폐기와 한미동맹 정상화를 강조하셨을 것이다.
이 선생님이 계셨더라면 좀 더 과학적이고 활발한 통일언론 보도와 운동이 전개되었으리란 아쉬움이 큰 상황이다. 선생님은 틀림없이 각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할 대미, 대북 정책이 나와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법하다. 필자는 이 선생님이 몸 담으셨던 옛 합동통신, <한겨레> 신문에서 근무했고 좋은 말씀을 많이 들으면서 배우는 행운을 누렸다. 선생님의 명복을 간절히 비는 의미에서, 평화 통일을 가로막는 두 개의 쇠말뚝인 한미상호방위조약과 국가보안법에 대해 본인이 헌법소원을 제기한 이유를 간략히 소개한다. 이 자료는 최근 <군포시민신문>이 주최한 '왜 지금 리영희인가' 토론회를 계기로 작성한 글이다. (필자인 고승우 박사는 지난 4월 24일 국가보안법 폐지 헌법소원을 냈다. 편집자.)
한미동맹과 국보법 헌소를 제기한 이유
국가보안법은 친일 세력이 해방정국에서 제기된 친일 청산 요구를 빨갱이로 몰 수 있었던 보신책이었고, 한미동맹은 6.25 발생 직후 대마도로 도망가 임시 정부를 세우려 했던 이승만이 미국에 퍼주기를 한 20세기 최악의 불평등 체제다. 수구 세력이 국부로 모시려는 이승만이 앞장서 만든 국보법과 한미동맹은 수구 보수 세력이 반세기 가까이 집권할 수 있었던 최대의 정치적 기반이 되었다.
국가보안법 제2조, 3조, 4조, 6조, 7조, 10조는 헌법에 위반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국보법 2조는 반국가단체 정의, 3조는 반국가단체 구성, 4조는 목적수행, 6조는 잠입·탈출, 10조는 불고지며, 7조는 찬양·고무에 관한 것으로 대표적인 독소조항으로 지적돼 왔다. 국가인권위원회(당시 위원장 김창국)는 지난 2004년 8월 국회의장과 법무부 장관에게 "국보법은 제정 과정부터 태생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국보법은 법률의 규범력이 부족한 법으로 그 존재 근거가 빈약한 반인권법"이라며 폐지를 권고한 바 있다.
권력 장악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친일 세력이 만들어 놓은 국보법은 초등학교 –고등교육 교과서 전반을 검열하고 일상적인 언론 보도를 통제한 최대, 최악의 보도지침이다. 통일을 먼 나라 이야기로 치부하는 현실은 국보법이 허용하는 공간에서 성장한 청소년에게 당연한 논리적 결론이었다. 언론은 국보법을 의식한 자기 검열을 체질화한 나머지 국보법을 의식치 못한 채 언론 자유를 이야기하는 기이한 상황에 처했다.
한미동맹을 상징하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4조는 미군의 한국 배치를 권리(right)로 규정, 한국은 grant하고 미국은 accept하게 되어 있다. grant, accept는 조건 없이 주고받는 의미의 외교용어다. 미국에 '슈퍼갑'의 위치를 보장한 4조에서 SOFA(정식명칭 - 대한민국과 아메리카 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 제4조에 의한 시설과 구역 및 대한민국에서의 합중국 군대의 지위에 관한 협정), SMA(방위비분담 특별협정 - SOFA 5조(주한미군에 대한 시설과 구역은 한국이 제공하고 주둔 경비는 미국이 부담하는 내용)의 적용과 관련한 예외적, 특별 조치)가 파생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보장된 특권에 이어 전시작전지휘권까지 장악한 미국이 지난 수십 년 간 북한 선제공격 카드를 대북 협상 또는 위협용으로 휘두를 수 있는 까닭은 바로 이 한미동맹 4조 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평택 미군기지가 미군 해외 기지 가운데 최대 규모라는 사실은 부끄러운 한미관계의 상징으로, 한국이 미국의 군사적 식민지를 방불케 하는 대미종속 상태에 처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지적된다.
정치권, 언론, 학계, 시민운동권은 한미동맹을 원론적으로 거론하는 것을 지난 수십 년 간 극력 회피해왔다. 사드 사태는 한미동맹으로 인해 발생했지만, 새 정부조차 박근혜 정권과 같은 행태를 보이는 이유는 바로 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이다. 그런데도 현 정부는 진실을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다. 필리핀, 일본이 미국과 맺은 동맹관계와 한미의 그것을 비교만 해도 그 실상이 분명해질 터인데, 어느 언론도 그것을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다. 되돌아보면 박정희 정권은 1966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문제점을 대대적으로 국회와 언론을 통해 부각했다. 오늘날 이런 사실을 완전히 망각한 채 한국 사회가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은 너무도 한심한 일이다.
국보법과 한미동맹이 현재의 상태로 온존하는 한 비핵화, 남북교류·협력이나 평화통일 노력이 성공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국보법, 한미동맹이 만들어질 때와 오늘날 남측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북측의 그것의 30~40배에 달하고 남한은 세계 최대 무기수입국의 하나가 되었다. 북한은 정치, 언론의 자유가 없으며 아시아 최빈국의 하나다. 그런데도 냉전 시대의 악법을 유지하면서 북한을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으로 유지하려 하는 것은 심각한 국민 기만이다.
촛불로 들어선 정권이 과거 정권과 같은 태도를 지녀서는 안 된다. 미국이 한국에서 자국 군대와 무기를 자국 영토에서보다 싼 비용으로 관리하게끔 하고, 핵무기까지 제 마음먹은 대로 이 땅에 주둔시킬 빌미를 주는 한미동맹관계를 구태의연하게 온존한 모습을 유지하는 가운데 21세기의 험난한 국제 경쟁 무대에서 우리가 남북평화통일을 추진하려는 태도는 기이하다.
4차 산업혁명은 상상력이 그 성패를 좌우한다. 국보법은 남북한을 포함시킨 평화적인 미래를 상상조차 하지 못하게 제약한다. 남한의 미래학이 그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이유다. 미래는 준비하는 자의 몫이다. 현재와 같은 상태라면 국보법에 의해 표현과 언론의 자유가 억압되고 한미동맹에 의해 남한이 한반도 당사자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후손에게 불행한 조국을 물려주는 과오를 피할 수 없다. 그것은 역사에 죄를 짓는 것과 마찬가지다.
언론은 이제 자기 검열을 일상화하는 타성에서 탈피하고, 비핵화 국면에서 세계 경제력 12~13위권인 한국이 제 역할을 하도록 견인함으로써 한반도 평화 통일은 물론, 동북아 평화와 안정이 달성되게끔 유도해야 한다. 오늘날 한미동맹 관계에서 한국이 자율적인 주권 국가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현실을 국민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는 모습은 100여 년 전 조선이 외세에 휘둘리다 망한 시절을 연상케 한다. 조상이 범한 과거의 치욕은 교통, 통신이 발달치 않아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탓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오늘날 정보 최강국을 자부하는 한국이 국제적인 웃음거리가 되는 이유는 언론 등이 제 역할을 하지 않은 탓이다. 정말 부끄럽고 참담한 일이다.
이념 대결은 냉전 시대와 함께 종식됐고 무력에 의한 통일은 불가능함이 6.25를 통해 검증되었다. 이런 점에서 국보법과 한미동맹을 정상화하는 방안에 대한 언론의 격렬한 토론과 방향 모색이 절실한 때다.
참고로 필리핀과 미국의 방위협정에 따르면 미군은 필리핀에 항구적 기지를 만들 수 없고 필리핀 부대 기지 내에 주둔해야 한다. 미군은 필리핀 국내법을 준수하고 무력사용 시 안보리에 즉각 보고해야 하며, 핵무기를 절대 필리핀에 반입할 수 없다. 일본과 미국의 방위협정은 미군의 일본 주둔이 권리가 아님을 규정한다. 조약의 유효기간은 10년이고 조약의 적용을 양자가 수시로 협의할 수 있도록 했다. 반면,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무기한 유효하다. 그 폐기는 한 당사국이 통보한 후 1년 후에 이뤄진다. 이 조약에 따르면 한반도 분쟁 발생 시 한미 양자는 유엔 등에 보고할 의무가 없다. 한반도 유사시 중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할 훈련을 하는 이유의 하나다.
만약 한반도에서 전쟁이 날 경우 한반도는 자칫 군사 강대국들의 분할 점령으로 귀결되는 각축장이 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남북이 자율적으로, 평화적인 방법으로 주변 국가와 협의하는 통일을 추진하는 것이 한반도 영역을 한민족의 영토로 유지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다. 이 때문에 국보법은 시급히 폐기해야 한다. 한미동맹은 한국 대통령이 한미상호방위조약 6조에 의해 폐기를 선언한 뒤, 불가피하게 동맹을 유지한다 해도 필리핀 식으로 개선하는 방법을 심사숙고해야 한다. 국보법이 없는 상황이 될 때 언론 등이 모든 개연성을 변수로 한반도 미래를 활발히 논의할 수 있는 공론의 장이 설 수 있을 것이다.

▲ '80년 해직언론인 협의회' 회장인 고승우 박사는 지난 4월 24일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는 헌법소원을 냈다. 사진은 지난해 12월 1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국회 앞에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등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국가보안법 폐지 촉구 기자회견'을 연 모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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