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통일 문제

나의 제자이자 동반자 서동만의 '북한 연구'를 말한다

일취월장7 2019. 6. 5. 09:33

나의 제자이자 동반자 서동만의 '북한 연구'를 말한다

[전문] 북한 초기 역사에 대한 한국 최초의 학문적 연구
2019.06.04 14:04:39
북한 연구자이자 실천적 지식인이었던 고 서동만 상지대 교수(1956년 5월 31일-2009년 6월 4일)의 10주기를 맞아 그를 추모하는 학술모임이 3일 서울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에서 열렸다.

이날 모임에서 서동만의 도쿄대학 은사 와다 하루키 도쿄대학 명예교수는 그의 박사논문 '북조선 사회주의 체제 성립 1945-1961'은 "북한 초기 역사에 대한 한국 최초의 학문적 연구"이며 "아직도 그의 연구는 고전적 가치를 잃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북조선: 유격대 국가의 현재>는 바로 서동만의 박사논문을 기초로 해서 쓴 것"이라며 서동만은 자신과 북한 연구의 학문적 동반자였다고 회고했다.   

와다 교수는 이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것은 북한 체제가 보여주는 살아남는 힘"이며 앞으로 북한 연구자들의 과제는 이 생존력의 근원을 규명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서동만 교수는 서울대 정치학과 재학 중인 1978년 5월학내 데모를 주도했다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제적, 구속됐으며 1986-1995년 와다 교수의 지도 아래 도쿄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경남대 극문제연구소, 외교안보연구원과 상지대 교수로 일했으며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의 외교안보 브레인으로 활약한 인연으로 국가정보원 기획조정실장(2003년 4월-2004년 2월)을 맡았다. <프레시안> 편집위원으로 언론인 활동도 활발히 했다. 

다음은 와다 교수의 발제문 전문이다. 

서동만은 1970년대 중반에 서울대에 입학, 학생운동을 하다 퇴학 처분을 받았고 구속되었다. 1980년대 초에 복학해 졸업하고 1986년에 일본으로 건너왔다. 도쿄대학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해 본인의 지도 하에 북한 현대사 연구를 시작했다. 1989년에 박사 과정에 진학해 박사 논문 준비에 들어갔다. 

나는 러시아·소련사를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해당 분야의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그러다 1981년부터 초기 북한사 연구를 시작했다. 첫 논문인 '소련의 조선정책 1945년 8월-1946년 3월'이 1983년에 한국에서 번역되면서 나를 북한 연구자라고 생각하고 나에게 지도 받기를 원하는 한국인 유학생들이 생겼다. 나는 1970년대부터 한국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며 시민 연대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 정부와의 관계가 좋지 않아 유학생들은 오랫동안 나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 1983년에 일본에 온 조성우가 이에 상관하지 않고 나의 지도를 받는 대학원 연구생이 된 후, 조성우를 따라 일본으로 온 서동만이 내 밑에서 대학원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그런 의미에서 서동만은 나의 한국인 유학생 1호였다. 나는 그를 나의 러시아·소련사 세미나(교수 지도 아래 이루어지는 학생의 공동 연구·연습-역주)로 불렀고, 후에 그를 위해 북한사 세미나를 개설했다. 나 자신도 막 연구를 시작했을 무렵이었기 때문에 나와 서동만이 공동으로 북한사 연구를 시작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더구나 그 시기가 세계적으로 봐도 북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역사 연구의 요람기였음을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이다. 당시 존재했던 연구는 냉전시대에 쓰여진 로버트 스칼라피노와 이정식의 공저 <한국공산주의운동사 Communism in Korea>' 상하 두 권이 전부였다. 나의 논문이 나오기 직전에 브루스 커밍스의 기념비적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제1권이 간행되었다. 미군의 자료와 미군이 전쟁 중에 북한에서 포획해 온 북한 문서를 바탕으로 한 한국 정치에 대한 분석은 압도적이었지만, 북한을 다룬 장은 여전히 초보적인 서술에 그쳤다.  

나는 1982년 가을에 미국에 있는 커밍스를 찾아가 의견을 교환하고, 연구 상의 협조를 약속했다. 그때 그가 내게 준 것이 북한 체제의 모델 분석, '코퍼러티즘 국가'론에 관한 논문이었다. 나는 이 논문을 읽고 1985년에 북한 체제를 '유격대국가'로 보는 견해를 제시하며 김일성의 만주 항일 전쟁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다. 1992년에는 스즈키 마사유키(鐸木昌之)가 사회주의와 유교적 전통 간의 '공명(共鳴)'이라는 개념에 입각한 '수령'제 국가론을 제시했다. 1995년에는 이종석이 주체사상과 유일지도체계의 결합에 주목한 모델을 제시했다. 

이러한 모델은 변화하지 않고 붕괴할 뿐이라는 견해가 있었다. 나는 이러한 견해에 반발하며, '체제 성립의 논리를 들여다보면 변화는 다양한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고,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 하에 모델의 역사적 변용에 주목한 새로운 논문 '유격대국가의 성립과 전개'를 <세계> 1993년 10월호에 발표했다. 1970년 전후에 형성된 매우 독특한 북한의 현 체제는 1961년 이전에 성립된 북한의 '국가 사회주의 체제 위에 구축된 이차적인 형성물'이며, 소련 동유럽형 당(党)=국가 체제가 변형되어 탄생한 것이라는 가설을 세운 것이다.

서동만은 나의 가설을 받아들여 북한 체제의 토대를 이루는 국가사회주의 체제의 성립을 확증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서동만은 내 세미나에 참가하게 된 이후 소련사 연구 업적을 심도 있게 공부했고, 일본에서 토론을 거치면서 정교해진 방법론을 도입했다. 무엇보다도 당, 국가, 사회단체의 관계에 주목해 '당=국가' 체제를 분석하는 방법을 배우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완성시켰다고 할 수 있다. 

서동만은 6년에 걸친 노력 끝에 박사 논문 '북한 사회주의체제의 성립 1945-1961'을 썼고 1995년에 도쿄대학에 제출했다. 놀랄 만한 논문이었다. 새로운 자료의 입수라는 면에서는, 서동만은 그의 뒤를 잇는 세대의 한국 대학원생들이 그리했듯이 러시아를 찾아 러시아 문서관에서 소련 점령군의 문서를 볼 수는 없었다. 포획 북한 문서 자료를 꼼꼼하게 검토했을 뿐, 특별히 새로운 자료를 활용한 것은 아니었다. 서동만의 연구방식의 특징은 북한의 공식 문헌, 당의 기관지 및 기타 잡지를 모든 기간에 대해 동일한 밀도로 읽는 것이었다. 서동만처럼 '노동신문'을 정독한 사람은 전무후무할 것이다. 소련사회사 연구의 철칙은 신문잡지를 정독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일본 학계의 통념이었기 때문에 서동만은 충실하게 원칙을 따른 것이다. 

서동만은 북한 기관지를 통해 인사(人事)의 변화를 분석하고 전면적으로 확정했다. 그리고 만주파, 연안계, 소련계, 국내계라는 와다(和田)의 당내 계파의 구별을 채용하면서도 국내계를 박헌영 중심의 남로파, 그 밖의 남로계, 북한의 국내계로 세분화했다. 각파, 각계가 어떠한 위상을 차지하는지, 그것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정밀하게 추적 확정해, 공식 문헌을 해독하는 단서로 삼은 것이다. 

국가사회주의의 성립 과정을 5개의 시기로 나눈 후 각 시기별로 핵심적인 '당=국가' 체제가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밝히고, 그러한 관련성 안에 군대도 포함시켜 '당=정부=군대' 간의 관계의 발전 및 변화를 분석했다. 또한 '당=국가' 체제 하에서 공업과 농업의 관리 체계가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되는지를 분석했다. 여기에서 '당=정부=사회단체'의 관계의 발전 및 변화에 대해서도 분석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946년 8월 북한 노동당의 탄생을 '당=국가'를 지향하는 당의 출현으로 파악하고, 1947년 2월에 북한 인민위원회와 인민회의가 수립된 것을 '당=국가' 체제의 완성으로 보고 있다. 이후 이 '당=국가'가 비대해지면서 그것이 사회에 미치는 통제가 확대되는 것을 확인했다. 경제에서는 중공업 비중이 높고, 기간산업의 국유화, 계획화가 이른 시기부터 이루어졌는데 전쟁 과정에서 사영(私營)상공업이 몰락하면서 사회주의로의 전면적인 이행이 시작됐다고 주장한다.  

전후 1956년의 당내 투쟁을 통해 당은 김일성 주류파로 일원화되었고, 군대도 완전히 만주파가 장악하게 되었다. 사회주의적 개조는 위로부터 강행되었다. 농업집단화는 소련 모델에 따라 이루어졌다. 1958년부터 1961년까지 숙청이 전국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를 통해 사회, 국가에 대한 당의 우위가 제도적으로 확립되었다. 이는 군대에서 시작되어 농촌, 공장으로 확대되었다.  

1961년 제4차 조선노동당 대회는 김일성과 만주파에 의한 '승리자의 대회'였다. '당 중앙위원회의 만주파화'는 완성되었고 이는 '당·정·군의 일체화'였다. 공업 부문에서도 당 우위의 제도화가 이루어졌다. 공장당위원회에 의한 집단적 지도체계로의 이행이 선언되고 농촌에는 군(郡)농업협동조합 경영위원회라는 국가기관이 설치되었고, 군당(郡党)은 이를 통해서도 '리(里)=농업협동조합'을 관리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농업협동조합의 국가화가 관철되었다. 북한의 국가사회주의는 제4차 당대회를 기점으로 성립되었다. 당정 관계, 군대, 공장, 농촌 말단에 이르기까지 당의 일원적 지도체계가 구축되었고, 국가사회주의가 완전히 확립되었다. 

서동만은 이와 같이 북한의 국가사회주의 체제가 확립되었다고 결론 지은 후, 이 체제는 소련, 중국의 체제보다 훨씬 집권적이며 동시에 군사적 색채를 짙게 띠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군사적 색채는 '사회주의를 보다 철저히 하는 요소'로 볼 수 있고, 근본적으로 국가사회주의 체제에는 변화가 없으며 더욱 강화된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고 보았다. 서동만도 이 체제 위에 70년대에는 '유격대국가', '수령제', '사회주의적 코퍼러티즘', '유일지도체계' 등 다양하게 불리는 '제2차적 구조'가 형성된다고 보지만, 이 구조물은 근간인 국가사회주의 체제를 유지, 강화한 결과의 산물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본 논문은 사회주의국가에 대한 선행 연구 성과를 흡수한 후 검증된 방법론에 입각해 북한 사회주의체제의 성립을 명확히 규명한 획기적 업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표로 소개한 당, 정, 사회단체, 당대회 간부직력도 기존에 발표된 인사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포괄적이고 정확한 것으로, 가치가 높다. 1945년부터 1950년까지, 혹은 1953년까지의 시기에 대한 연구는 어느 정도 존재했지만 1953년부터 1961년까지 핵심적인 시기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거의 없었던 상황에서 처음으로 1945년부터 1961년까지의 전 과정에 대한 본격적 분석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북한사 연구의 토대를 마련한 고전적인 업적으로서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되었다. 

서동만의 논문 심사는 1995년이 가기 전에 끝났고, 박사 학위가 주어졌다. 서동만의 논문은 제출 직후부터 한국의 북한 연구자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졌고 초기 북한사에 관한 한국 최초의 학문적 연구로 인정받았다.  

서동만의 연구는 와다(和田)의 가설의 기본 부분에 대한 확증을 제공하여 '유격대국가'론을 전개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나는 바로 서동만의 이 논문을 기초로 하여 1998년에 <북조선 ― 유격대국가의 현재>(이와나미 서점)를 썼다. 이 책은 한국에서는 돌베개사에서 2002년에 출간되었다(<북조선 : 유격대국가에서 정규군국가로>-역주).

이 무렵, 러시아에 건너가 문서관에서 소련군 문서 발굴에 힘쓴 전현수, 김성보 등의 학위 논문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전현수는 1997년 모스크바 대학에 학위 논문을 제출했고, 김성보는 연세대학에 학위 논문을 냈다. 이들 논문은 소련군 점령기의 북한의 사회경제적 개조, 특히 토지개혁과 농업협동화 등을 규명했다. 미공개 소련군 문서를 이용해 심도 있는 연구를 수행했다는 점에서는 서동만의 논문을 넘어선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연구를 새로운 자료에 기초해 종합한 북한 건국사가 집필되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커밍스의 지도를 받은 찰스 암스트롱은 2003년에 <북한의 탄생 1945-1950 The North Korean Revolution 1945-1950>(코넬대 출판)을 냈다. 포획 북한 문서 자료를 자세히 살펴보고 건국까지의 북한의 사회 변동을 전체적으로 다루려고 시도한 의욕적인 저서지만, 내가 말하는 '유격대국가'(그는 a guerrilla-band state라고 부른다)의 원형이 이미 이 '북한 혁명'기에 생겨났다고 주장하고 있는 점이 성급한 단순화이다.  

같은 무렵, 러시아 연구자로 한국에 와서 국민대학 교수로 있는 안드레이 란코프도 본인의 왕성한 북한 정치사 연구의 첫 저서를 발표했다. <스탈린에서 김일성까지:북한의 형성 1945-1960>(럿거스대학 출판, 2002년)이다. 서동만의 논문과 동일한 시기의 북한사를 그려내고 있지만 훨씬 간략한 연구로, 비교가 안 된다. 소련 외무성 자료에 기초한 란코프의 중요한 업적은 2009년 러시아에서 나온 1956년 8월 사건과 그 후의 숙청에 관한 연구이다.

서동만의 논문이 책으로 나온 것은 2005년으로, 같은 출판사 '선인'에서 2003년에 김광운의 저서 <북한 정치사 연구 I ― 건당·건국·건군의 역사>가 발간된 후였다. 북한 건국까지를 대상으로, 철저한 자료 수집과 인물의 경력에 대한 강한 관심을 바탕으로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는 연구지만, '김일성 지도체제 수립'을 중심으로 역사 과정을 서술하고 있어 서동만의 연구와 비교하면 어딘가 아쉽다. 

1998년에 경남대학에서 열린 심포지엄에 초청되었을 때, 나는 북한이 '유격대국가'에서 '정규군국가'로 전환되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한국의 동료 연구자들은 반신반의였다. 이 때 유일하게 내 생각에 동의한 사람이 토론자였던 서동만이었다. 그가 논증한 국가사회주의 체제 위에, 국가의 형태를 바꾸어 살아남는 것을 북한은 목표로 하고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우리의 견해는 일치했다. 김정일로부터 김정은에게 권력이 승계되었을 때 나는 통상적인 당=국가체제로의 회귀가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토론을 하고 싶어도 서동만은 더 이상 없었다. 

2011년에 김성보, 이종석은 <북한의 역사 1 ― 건국과 인민민주주의의 경험>과 <북한의 역사 II ― 주체사상과 유일체제>를 역사비평사에서 출판했고 나는 2012년에 <북한 현대사>를 이와나미서점에서 출판했다. 김성보의 제1권은 북한이 인민민주주의 시기에 다양성을 상실했고 사회주의 체제는 중국이나 베트남과 달리 경직성을 드러냈다는 비판적인 고찰을 하고 있다. 이는 서동만의 연구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시각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것은 북한 체제가 보여주는 살아남는 힘이다. 이것이 규명되어야 한다. 변화는 북한의 국가사회주의 체제, 당=국가체제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내 책은 북한의 국가체제의 변화를 따라가며 정리한 스케치일 뿐이다. 나는 소련 점령기의 북한사를 쓰기 시작했는데, 죽을 때까지 완성하지 못할 것 같다. 

서동만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 그의 논문이 나온 지 24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의 연구는 고전적 가치를 잃지 않았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학 명예교수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