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문화, 예술

“이게 다 노무현 덕분이다”

일취월장7 2019. 5. 29. 12:03


유시민이 말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긴 과제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사진)을 만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우리에게 갖는 의미와 그가 남긴 과제에 대해서 들어보았다. ‘사람 사는 세상’ ‘정의’ ‘민주주의’ 등 10개 키워드로 정리했다.

고재열 기자 scoop@sisain.co.kr 2019년 05월 28일 화요일 제610호


ⓒ시사IN 윤무영

노무현 전 대통령 10주기를 맞아 다양한 추모 행사를 진행하는 노무현재단은 올해 주제를 ‘새로운 노무현’으로 설정했다. 애도와 추모를 뛰어넘어 깨어 있는 시민들이 ‘사람 사는 세상’의 꿈을 가지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자는 의미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만나 노 전 대통령이 우리에게 갖는 의미와 그가 남긴 과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사람 사는 세상’ ‘정의’ ‘민주주의’ ‘서민 경제’ ‘한반도 평화’ ‘국민 대통합’ ‘정치 개혁’ ‘지역주의 타파’ ‘언론 개혁’ ‘청년 노무현’ 등 10개 키워드로 정리했다.

1988년 변호사 노무현이 처음 선거에 출마했을 때 홍보물 제호가 ‘사람 사는 세상’이었다. 돌베개출판사에서 그 디자인을 차용해 만든 인쇄물을 보니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수은중독으로 사망한 열다섯 살 소년의 죽음을 상기하는 부분이 나온다. 김용균씨 사고를 떠올리게 한다.
수은중독으로 사망한 문송면군과 원진레이온 산재 노동자들을 위해 노무현 대통령이 굉장히 열성적으로 뛰었다. 김용균씨도 산업재해이긴 한데 문송면군과 성격이 좀 다르다. 문군 사망 때는 법적 보호장치 자체가 거의 없었다. 산업 현장의 상황도 아주 영세했다. 유독성 물질에 관한 인식 또한 부족한 시기였다. 모든 면에서 1988년 상황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낙후했다. 반면 김용균씨 사건은 법적 보호장치, 사업장 내 안전규정이 다 있는 상황에서 사업주가 그냥 안 지킨 거다. 문군의 사망이 모든 게 미비했던 상황에서 벌어진 참혹한 비극이었다면, 김용균씨는 마음만 먹으면 막을 수 있는 죽음이었는데, 사업장 내에서 노동자들의 안전과 권익이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조건에서 발생했다.

노사 간 힘의 관계는 여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는 법적 보호장치도 약할 뿐 아니라 노동조합을 만들거나 활동하는 데도 이중의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 스스로 조직하거나 발언하기도 어렵다. 거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 때문에 시민들이 화가 많이 나는 거고, 김용균씨 어머니도 아들이 죽은 이유를 개별 사업장의 특수한 사례가 아니라 유사한 산업재해가 일어나는 보편적인 문제로 보고 정부에 대책을 요구하는 거다.

노동문제에서도 그렇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의’의 실현을 중요시했다. 검찰의 정치적 중립과 검찰 개혁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검찰이나 수사기관에 관한 부분은 좁은 의미에서의 정의 구현이고 사회 전체적으로 정의의 개념을 확장해볼 필요가 있다. 가만 놔두면 사람들 사이에 정의로운 관계가 서질 않는다. 나는 인간 사회는 기본적으로 그렇다고 본다. 내버려두면 당연히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꾀 많은 자가 어리석은 자를, 운 좋은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지배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그것을 막기 위해 국가가 있는 거다. 국가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사람들 사이에 정의로운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다. 공동체가 장기 존속하려면 정의가 서야 한다.

정의를 집행해야 하는 검찰이 가장 정의롭지 못한 집단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법만으로는 정의를 다 수립할 수 없는데, 사정기관이 법으로 규정된 것조차도 무시하고 제대로 집행 안 하고 누구에게는 불리하게 하고 누구에게는 유리하게 봐주면 그 사회는 전반적으로 정의가 수립되기 어렵다. 검찰은 5공(전두환 정권) 이후에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자기들이 봐주고 싶은 사람 있으면 봐주고, 혼내고 싶은 사람 있으면 혼냈다.

노 전 대통령 집권기에도 수사권 조정이나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설치 등을 추진했지만 못 했다.
보통 “노무현 대통령이 못 했다”고 말하는데 노 대통령이 못 한 게 아니다. 저는 언론의 그런 보도에 대해서는 지극히 불만이다. 국회가 안 한 거다. 한나라당이 막아서 못 한 거다. 입법기관이 제 일을 못 한 걸 가지고 계속 대통령이 못 했다고 얘기하는 것은 옳지 않은 표현이라고 본다. 그때 법안을 다 제출하고 정부 입장도 다 밝혔는데 몇 년이 지나도록 국회에서 처리가 안 되었다. 결국 17대 국회가 마감되면서 수사권 조정이나 공수처 설치 등 법안이 폐기되었다.

노무현 정부 때 추진하지 못해서 아쉬운 것이 또 무엇이 있나?

김대중 대통령 5년, 노무현 대통령 5년,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 2년까지,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71년 동안에 고작 12년을 진보 쪽이 집권했다. 4·19 혁명 이후 1년 정도를 합하더라도 13년에 불과하다. 나머지 58년을 보수 쪽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집권했다. 지금이 3기 진보 개혁 정부인 셈인데, 과제는 동일하다. 노 대통령 돌아가실 무렵에 김대중 대통령이 3대 위기론을 말했다. 민주주의, 서민 경제, 남북 관계의 위기. 진보 개혁 정부의 과제는 이 세 가지밖에 없다. 시대 상황과 과제의 구체적 내용이 달라져서 그렇지 이 세 가지가 공통적으로 주된 과제였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금 이 세 가지를 위해 싸우고 있다.

먼저 ‘민주주의’부터 짚어보자. 자유한국당은 ‘좌파 독재’라고 비난한다.

자유한국당이 좌파 독재라고 하는데 독재의 개념 규정을 새로이 하지 않는 한 독재라고 할 수 없다. 언론에서 진지하게 보도하는데 한마디로 정신 나간 소리다. 독재라 함은 권력에 집중하는 제도, 그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러도 견제할 수 없는 외부 조건, 권력자 개인의 독재적 특성이 결합될 때 나타난다. 제도 면에서 지금 헌법이나 법률은 그대로다. 이명박·박근혜 대통령 때 제도가 그대로 있다. 견제 세력? 자유한국당부터 시작해서 온갖 세력이 있다. 마지막으로 문재인 대통령에게 독재자의 캐릭터가 있나? 아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지. 문 대통령은 개인 캐릭터상 독재자라고 말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정서적으로 안정돼 있고 현란한 언어로 사람들의 감정을 격발시키는 사람도 아니다. 법률가여서 자기 영역을 넘어 권한을 행사하려는 것도 없다. 모범생 중의 모범생 스타일 대통령을 독재라고 하니까 세 차원 모두에서 안 맞는다.

자유한국당이 요즘 장외투쟁, 삭발투쟁, 민생대장정 등 총력을 다하고 있다.

그들도 확신은 없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절박함 때문에 현 정부를 좌파 독재라며 이념적으로 공격한다. 헌법이 파괴된다는 둥, 근거 없는 헛소리를 남발하면서 그냥 해보는 거다. 혹시라도 이렇게 해서 되면 되는 거고. 자기들이 말하면 그대로 들어주는 일부 유권자만으로는 총선에서 이기지 못한다는 걸 잘 알지만 의지할 수 있는 다른 게 없다. 일단 이걸 밀고 나가면 확장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이거 외에는 방법이 없다. 대책 없이 밀고 나가는 거다. 이해는 된다. 그만큼 내년 총선에서 못 일어나면 죽는다는 공포감이 있어서 그러는 것 같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07년 7월 당시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오른쪽)과
청와대 회의장으로 들어서는 노무현 대통령.


‘서민 경제’와 불균형 해소 관련해서는 최저임금 인상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노무현 대통령도 성과를 크게 못 거두었고 문재인 정부도 아직은 성과를 많이 못 거두고 있다. 계급·계층별 격차가 확대된 것을 줄이는 중대한 과제다.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돼도 격차가 너무 크면 시민들이 느끼기 어렵다. 중산층과 서민의 삶을 개선하는 과제는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손에 확 잡히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 때도 노·정 관계가 안 좋았는데 지금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이나 정부가 마음먹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고용 창출을 정부에서 하는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민간기업, 노동조합과 관계돼 있고 일자리 창출과 관계된 여러 행위 주체들이 서로 간에 태도를 조율하지 않으면 성과를 내기가 어렵다.

최저임금 인상이 마치 모든 경제문제의 원흉인 것처럼 공격을 받고 있다.

그래도 여론조사를 보면 최저임금 인상을 지지하는 여론이 좀 더 높지 않나? 누가 최저임금제를 공격하는지를 보면 우리 언론이 얼마나 오염돼 있는지가 보인다. 최저임금 인상에 대해 제일 먼저 공격을 시작한 곳이 경제신문들이고, 조·중·동으로 번져나갔다. 그렇게 담론의 영역에서 최저임금 인상이 만악의 근원인 것처럼 퍼뜨렸다. 경제신문이 이 문제에서 객관적인가? 대기업이 주주이거나 기업인이 오너다. 언론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옹호하는 지라시였다. 최저임금을 올리기 전부터 공격했고 지금도 그런다. 경제신문은 이해당사자 아닌가?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 신문들은 수익의 95% 이상이 광고료 수익이고 광고주 중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는 게 대기업이다. 광고주 이익을 대변한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언론 활동이 아니다. 그렇게 2년 내내 집중포화를 쏟아부었는데도 여전히 최저임금 인상은 적절했다는 의견이 좀 더 많다는 것을 나는 희망적으로 본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라도 남북 관계가 중요한데, 다시 교착상태에 빠졌다.

미사일이나 핵 문제는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정부가 재량권을 갖고 해결하기 어렵다. 그래도 이 문제는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고 본다. 매듭을 못 지었을 뿐 계속 노력해나가면 출구가 나올 수도 있다. 딱 세 주체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 언제든 풀 수 있는 문제다.

남북 관계가 교착상태에 빠지자 자유한국당의 공세가 더 거칠어졌다.
남북 관계가 하노이 북·미 회담 이후 정체 상태이다. 진도가 더 나가면 자유한국당이 설 이념적 토양이 없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기도하는 수준으로 하고 있다. 딱하다. 정치를 왜, 뭐 때문에 하는지. 70년 넘는 세월 동안 긴장된 사회에서 살았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군사적 긴장이 풀리면 자기들은 못 산다고 생각하나 보다. 그 점이 나는 안타깝다. 평화롭게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나라 만들자고 정치하는 것 아닌가? 여전히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일부 유권자들 없이는 당의 존립 기반이 없다는 것 아닌가. 그런 것 없이도 보수 정당으로서 존속할 이념적·사회적 기반을 만들어나갈 생각을 해야지. 지금 당장 먹을 게 없다고 과거에 다 버렸던 밥을 다시 퍼 담는 게 말이 되나.

지금도 정치권이 갈려 있지만 노무현 대통령 집권기에는 더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노 대통령은 ‘국민 대통합’을 많이 강조했다.

내가 해석하기에 노 대통령이 말한 국민 통합은 공존의 질서를 만드는 일이었다. 서로 이해관계와 생각이 다른 사람이 공존할 수 있는 룰을 만들고 그에 걸맞은 문화를 체득하게 하는 것, 그게 통합이다. 선거구제 개편에 집착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어떤 한 사람의 계획이나 리더십만으로 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자신은 당선이 불가능한 선거제도 아래에서 몸으로 부딪쳤지만, 대통령이 된 이상 이런 제도적 환경을 만들고 문화를 창출해가는 것이 통합의 길이라고 보았다.

대연정 제안에 대해서는 지지자들 내부에서도 비판이 많았다.
국민의 의견을 똑같이 만드는 게 통합이 아니다.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공정하게 경쟁하며, 결과에 승복하고, 다음 경쟁에서 소수가 다수가 될 가능성을 항상 열어놓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국민 통합이다. 나는 노 대통령이 대연정을 추진한 방식이나 시점은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동기나 진의를 가지고 비난하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정치 개혁’ 차원이라 하더라도 대연정 제안이 당시 너무 앞서갔던 것 아닌가?

노 대통령은 ‘쟤가 성공하면 내가 죽는’ 구조가 대결 정치를 부추기고 지역구도를 재생산해내는 근본 원인이라고 봤다. 이것을 바꾸는 게, 자기가 대통령되는 것보다 정치에 더 큰 발전이 될 거라고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생각해왔다. 2005년 4월 재·보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의 과반 의석이 무너지니까 이 얘기를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고 당 주요 인사와 사석에서 얘기했다. 그런데 그게 어느 신문에 통째로 나가버렸다. 아이디어 차원에서 말해본 거라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 정면으로 치고 나가서 대연정 제안을 해버렸다. 진보·보수 막론하고 다 욕했다. 진보는 당신 혼자서 정권 잡았느냐, 왜 당신 마음대로 권력을 나누느냐 하고. 보수 정당 쪽에서는 선거구제 개편이 죽어도 싫었다. 영남의 많은 지역구를 기반으로 제1 야당 아니면 집권당을 하고 있는데 노 대통령이 그걸 해체하겠다니 경계심이 발동했다.

ⓒ사진공동취재단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한 2009년 5월23일 유시민 전 장관(가운데)이 봉하마을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다.


선거구제 개편이 핵심이었다는 점에서 지금 이슈가 되고 있는 패스트트랙과 맞닿아 있다.
지금 패스트트랙에 올라가 있는 반쪽짜리 연동형 비례대표가 큰 혁신은 아니지만, 네가 살면 내가 죽고 내가 살면 네가 죽는 정치 문화를 약화시키는 제도다. 지지받는 몫만큼 의석을 가져갈 수 있다면 그런 게 좀 완화되니까. 그런 점에서 보면 노 대통령이 하려 했으나 방법을 찾지 못하고 욕만 먹었던 대연정 제안의 핵심인 선거구제 개편이 패스트트랙에 올라간 것이다.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노 대통령이 노력을 많이 했다.

지금 대구·경북 지역에 출마하는 더불어민주당 후보들의 득표율을 보면 떨어진 후보라도 1997년 대선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얻었던 것보다 훨씬 높다. 지금 낙선하는 사람도 당시 진보 개혁 진영 최고 정치지도자보다 표를 많이 얻는 셈이다. 부산 지역에 가도 노 대통령이 출마했을 때보다 훨씬 많이 얻는다. 노무현 대통령이 36~37% 받고 떨어졌는데, 지금은 낙선하는 사람도 그것보다 더 받는다. 지금 많은 변화가 있었고 불안한 요소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나아지는 쪽으로 가고 있다. 선거제도가 바뀌면 더 나아질 거다.

‘언론 개혁’ 관련 질문을 안 할 수가 없다. 노 대통령은 <조선일보>에 대해 “그들은 법 위에 있다, 존재 자체가 수치스러운 존재다(친일·독재 협력), 그들에 대해 너무 많은 사람들이 겁을 낸다”라고 지적했다. 최근 장자연 사건, 방용훈 사장 고소 사건이 재조명되는 걸 보면 <조선일보>에 대한 우리 사회의 태도가 바뀌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나?
법 위에 있다가 법 아래로 들어오는 중이라고 본다. 아직 완전히 들어온 것은 아니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법 위에 있었다. 무슨 방문 조사를 하고 참고인인지 피의자인지 알 수 없는 조사를 하면서 거기에 신문사 기자가 배석하고. 범죄 혐의자를 그런 식으로 조사하는 게 어디 있나? 법 위에 있었던 <조선일보>가 이제 법 아래로 옮겨 가는 과정이라고 본다. 언론은 개혁될 수 없다. 개혁 대상이 되는 언론의 영향력이 줄어들 수 있도록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그들이 최소한 법의 지배 아래 들어올 수밖에 없게끔 하고. 장사가 안 되게 만들어서 시장에서 퇴출시키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나 같은 경우에는 거래처로 삼지 않는 것으로 소극적 의사 표현을 하고 있다.

서거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이 그의 죽음을 슬퍼한다.
다 살고 가셨으면 안 그랬을 텐데 갑자기 가셨기 때문에 애도 기간이 좀 길 수밖에 없었다. ‘청년 노무현’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이 죽으면 애달프다. 노 대통령 돌아가실 때 예순네 살이었다. 청년은 아니지만 묘하게 청년처럼 남는 이미지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꿈 많았던 청년의 죽음으로 나는 해석했다.


ⓒ시사IN 신선영
5월12일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이
광주 5·18 민주광장에서 개최한 시민문화제에 참석해 토크쇼를 하는 유시민 이사장(왼쪽).


10주기에 새롭게 조명해야 할 것은?

그 청년이 하려고 했던 게 무엇이었는지 10년이 지나 다시 생각해보고, 그 일들이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챙겨보고, “이거 아직 남아 있어요”라고 말하고 싶은 게 10주기 행사와 그 이후 재단 활동의 중심 테마다. 10주기가 됐으니까 정서적으로 슬퍼하고 애달파하고 이런 시기는 이제 좀 지난 게 아닐까 싶다. 한 인간으로서 노무현 대통령을 잃은 상실감이 지난 시기를 압도했던 감정이라면, 이제는 그것을 넘어서 우리가 왜 그렇게 애달파했는지 생각해볼 시기인 것 같다.

노무현재단도 새롭게 방향 설정을 한 것이 있나?

우리가 슬펐던 이유는 그분이 하려고 했던 일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많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한 것도 있지만 잘 안 된 것도 있고 제대로 하지 못한 것도 있다.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가셨으면 서운하기만 할 텐데, 하려고 했으나 하지 못한 것을 많이 남기고 갔다. 그런 걸 좀 우리가 챙겨봐야 할 시간인 것 같다. 애도와 추모를 넘어서 개선과 확산, 이런 콘셉트를 잡고 ‘새로운 노무현’이라는 메인 슬로건을 10주기 행사에 채택했다. 나만이 아니라 논의 과정에서 모두의 공감대가 있었다. 기념사업의 내용과 방향을 미래 지향적이고 진취적으로 무게중심을 옮겨보려고 한다. 무게중심을 개선과 확산 쪽으로 옮기기 위해 이번 10주기 추모행사도 시민문화제의 출연진 가수들이나 곡목도 추모 분위기라기보다는 축제 분위기 비슷한 쪽으로 조정했다.

재임 시절 노 대통령이 던졌던 화두 중에서 지금 이슈가 되는 것들이 많다.

재단에서 사료 관리하는 팀이 계속 찾아내고 있다. 키워드 넣고 검색해서 영상을 돌려보면 다 나온다. 우리가 직면한 과제와 관련해서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 중에 ‘노 대통령이 관련해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지금 보니까 참고하여 해법을 강구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드는 영상을 챙기고 있다. <알릴레오>에서 현안 문제 다룰 때 가끔씩 보여드린다. 재미있다. 과거 영상들을 보는데 타임머신 태워서 모시고 온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노무현에 씌워진 ‘경포대’ 프레임, 팩트체크

노무현 대통령 집권 5년 동안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4.5%였다. 전해 대비 수출 증가율이 평균 18.2%에 달했다. 코스피 지수는 3배까지 올랐다. ‘경제를 포기한 대통령’ 프레임은 억지다.

이종태 기자 peeker@sisain.co.kr 2019년 05월 28일 화요일 제610호

“그놈은 ○○○ 달고 다닐 자격도 없는 놈이야(송영선 전 의원).”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한나라당 의원들이 2004년 6월 공연한 ‘환생경제’라는 연극에서 노무현 당시 대통령을 겨냥해 내뱉은 막말 중 하나다. 최근 다양한 막말로 입길에 오른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각종 사건·사고를 어떤 근거도 없이 ‘북한 소행’으로 몰아붙이던 중 뇌물 시비로 제명된 송영선 전 의원, 그리고 심재철 의원, 박순자 의원 등 쟁쟁한 정치인들이 출연했다. 자칭 정치 풍자극인 ‘환생경제’에서 무능한 가장인 ‘노가리(노무현 대통령을 빗댄 배역)’는 둘째 아들 ‘경제’의 사망(사인은 이른바 ‘후천성 영양결핍’) 이후에도 소주병이나 들고 다니며 허송세월한다. 서민으로 분한 한나라당 의원들은 노가리에게 성적 모욕이 포함된 온갖 욕설을 퍼붓는다. 결국 저승사자가 경제를 환생시켜주는 대신 노가리를 데려가기로 한다. 연극에서 경제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거론된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객석에서 즐겁게 관람 중이었다.
ⓒ연합뉴스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신년 특별연설(위)에서 “상품 수출 국가에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자본투자 국가로 나아가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당시 한나라당은 ‘한국 경제가 이미 죽었다’라는 믿음을 유포하는 데 열중했다. ‘경제 파탄’이란 유행어도 만들었다. 노무현 대통령을 ‘경포대’라고 불렀다. ‘경제를 포기한 대통령’이란 의미다. 이런 시도는 상당한 정치적 성공을 거뒀다. 한나라당의 후신인 자유한국당은 최근 한국 경제를 ‘경포대 시즌 2’라고 부르는 중이다. 그들이 환생시키고 싶은 것은 경제가 아니라 ‘경포대 프레임’일 터이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은 정말 ‘경포대’였을까? 그의 대통령 임기(2003~2007) 동안 경제지표들을 보면 그렇지 않다.

노 대통령 취임 1년차인 2003년 한국 경제의 실질성장률은 시원치 않았다. 2.9%다. 비교적 인식되지 않고 있는 사실이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1997년의 외환위기 이후 또 하나의 대규모 금융위기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취임했다. 전임 김대중 정부는 금융제도 자유화 및 경기 부양 차원에서 신용카드 규제를 크게 완화했다. 카드사들은 고객의 상환 능력도 제대로 따지지 않은 상태에서 카드를 마구 발급하며 시장점유율을 높이려 했다. 신용카드 사용금액 한도도 크게 늘렸다. 2002년 말 카드 빚을 못 갚아서 신용불량자로 전락한 인구가 300만명에 가까웠다. 신용불량자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

민간 부문이 빚으로 쪼들리면 소비를 할 수 없다. 이에 따라 투자가 줄어드는 악순환이 전개되면서 경제성장률이 하락하게 된다. 노무현 대통령은 전임자(김대중)와 마찬가지로 집권과 동시에 경제위기부터 수습해야 하는 운명이었다. ‘신용카드사 종합대책’을 시행하면서 신용불량자는 집권 2년차인 2004년 4월(380만여 명)을 기점으로 줄어들기 시작한다. 그해 경제성장률은 4.9%로 회복되었다. 임기 말인 2006년과 2007년엔 각각 5.2%와 5.5%를 기록했다(아래 <표> 참조). 노무현 대통령 집권 5년 동안의 경제성장률을 연평균으로 환산하면 4.5%다. 소비자물가 상승률도 2%에서 3%대 초반으로 유지했다. 거시경제를 안정적이고 효율적으로 관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003~2007년의 한국 경제를 ‘파탄’이라 불렀던 자유한국당 계열의 대통령들은 어떤 성적을 거뒀을까? 이명박 대통령 재임 기간(2008~2012)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3.2%, 박근혜 대통령 재임 기간(2013 ~2016)의 그것은 3.0%에 불과했다.

수출 실적 역시 노무현 대통령 임기 동안 굉장히 가파르게 치솟았다. 전해 대비 수출 증가율이 평균 18.2%에 달했다. 덕분에 수출액이 2006년엔 3000억 달러를 돌파한다. 이명박 대통령 임기 동안 연평균 수출 증가율은 9.14%다. 2011년엔 수출액이 5000억 달러를 넘긴다. 박근혜 대통령 재임 4년 동안엔 수출 실적이 전해보다 평균적으로 2.14%씩 줄었다. 결과적으로 박근혜 정부 임기 마지막 연도인 2016년의 수출액은 5000억 달러 이하로 떨어졌다.

부동산도 선방한 편, 양극화 문제엔 ‘고전’

주가지수는, ‘경포대’로 불리고 있는 가운데서도 엄청나게 뛰어올랐다. 노무현 정부 출범 당시 620대였던 코스피 지수가 2007년 말에는 1900 선까지 올라갔다. 2002년 말 기준 1200억 달러 규모였던 외환보유액(외환위기가 발생한 1997년 말엔 89억 달러)이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할 당시에는 2600억 달러 규모로 2배 이상 증가했다(35쪽 <표> 참조).

물론 이런 경제지표만으로 노무현 정부가 이명박·박근혜 정부보다 경제를 훨씬 잘 운영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국가경제의 전반적 상황은 해당 시기 정부의 경제정책은 물론이고 외부 환경으로부터도 엄청난 영향을 받는다. 국내에서 아무리 좋은 경제정책을 추진해도 해외 국가들의 경기가 좋지 않으면 수출을 크게 늘리기 힘들다. 더욱이 경제가 고도화되고 그 규모가 커질수록 성장률은 낮아진다. 다만 노무현 대통령 임기 5년 동안의 한국 경제가 1인당 국민소득 1만4000달러(2003년)에서 2만3000달러(2007년)로 증가하는 등 사실상 선진국 대열에 들어가는 시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4.5%의 경제성장률을 “경제 파탄”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이보다 낮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시기의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이 노무현 대통령을 ‘경포대’라고 부르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노무현 대통령 스스로도 경제 부문에 관한 한 자신감을 여러 차례 피력했다. 2007년 1월 신년 연설에서 그는 재임 기간에 “세계시장에서 조선 1위, 반도체 3위, 전자 4위, 자동차 철강 5위를 점유하는 등 우리 주력산업이 세계시장을 주도”하고, 4% 이상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OECD에서 7위 정도의 성적이라며 자랑스러워했다.

당시 각 당의 차기 대선 주자들은 ‘경제 대통령’을 자처하며 ‘나는 경제를 잘 알아요’를 주장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특유의 말투로 이에 대응했다. “분명한 것은 경제를 아는 어떤 대통령도 5%를 훌쩍 넘는 성장을 이루지는 못할 것입니다. 저는 지금의 경제를 파탄이라고 말하는 차기 주자들이 성장률을 얼마로 공약하는지 지켜볼 것입니다(실제로 이명박 전 대통령은 당시 7%를 공약했다).”

이런 노무현 대통령 역시 두 가지 주제에서는 당당한 태도를 유지하지 못했다. 부동산과 양극화였다.

임기 동안 부동산에 대한 그의 입장은 “하늘이 두 쪽 나도 부동산만은 잡겠다”에서 “부동산 말고는 꿀릴 게 없다”로 바뀌더니 2007년 초에는 “부동산, 죄송합니다. 너무 미안합니다. 올라서 미안하고, 국민을 혼란스럽게 하고, 한 번에 잡지 못해서 미안합니다”라고 사과하기에 이르렀다. 통계수치로 살펴보면, 노무현 대통령 임기 동안 집값이 다른 정권에 비해 많이 올랐다. 한국감정원 <전국주택가격 동향조사>에 따르면, ‘전국 주택가격 상승률’이 2003년 5.7%, 2004년 -2.1%, 2005년 4.0%, 2006년 11.6%, 2007년 3.1%였다. 연평균으로 환산하면 4.5%다(취임 연도의 첫 2~3개월은 임기에 넣고, 퇴임 연도의 첫 2~3개월은 빼서 계산했다). 같은 방법으로 다른 대통령 임기 동안의 ‘전국 주택가격 상승률’을 계산해보니, 연평균 기준으로 노태우(1988~1992) 8.7%, 김영삼(1993~1997) 0.1%, 김대중(1998~2002) 3.5%, 이명박(2008~2012) 2.7%, 박근혜(2013~2016) 1.6%였다. 노무현 대통령 임기 동안의 상승률이 김영삼, 김대중,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보다 높고 노태우 정부에 비해서는 낮다.

다만 노무현 정부 때 주택가격이 크게 오를 수밖에 없었던 객관적 사정이 있다. 2000년대 초 IT 거품이 폭발한 이후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가 기준금리를 대폭 낮춰 경기를 부양하면서 글로벌 차원에서 유동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늘어난 유동성 중 상당 부분이 부동산에 투자되어 전 세계적으로 집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이런 거품이 터진 것이 바로 2008년 세계 금융위기다. 이후 글로벌 부동산 시장은 안정기 혹은 침체기로 들어섰다. 2008년에 전 세계를 덮친 불황이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의 부동산 거품이 어느 정도의 깊이와 넓이를 가졌는지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노무현 정부 때 한국 경제 역시 외환위기 이후 글로벌 금융자본주의에 본격적으로 포섭되면서 외부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는 체질로 바뀌어 있었다.

‘토지+자유연구소’ 남기업 소장은 OECD 자료에서 2003~2007년(노무현 정부) 24개 회원국별 주택가격 상승률을 조사했다. 주택가격이 가장 크게 오른 나라는 유럽의 덴마크(1위)였다. 상승률은 무려 53.8%(물가인상률의 영향을 배제한 실질치). 이 밖에도 뉴질랜드(2위)는 51.9%, 프랑스(4위) 46.1%, 스웨덴(6위) 44.2%, 미국(16위) 15.3% 등이다. 한국의 주택가격은 9.3% 올랐는데, 24개 국가 중에서 순위는 18번째였다.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비교적 주택가격이 덜 오른 편이라는 이야기다. 일본·독일·포르투갈·아일랜드 등은 주택가격이 오히려 내린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당시 심각한 불황을 겪고 있던 나라들이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03년 2월25일 노무현 대통령(왼쪽)이 취임식 후 김대중 전 대통령과 단상을 내려오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집값 상승에 부동산 대출 규제와 공시지가 현실화, 보유세 부과 등으로 대처했다. 이 정책들은 ‘경제 파탄’을 주장하던 세력의 반발로 전진과 후퇴를 반복했으나 점차 한국 정부가 부동산 시장에 개입하는 기본적인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만약 노무현 정부가 경기 부양으로 치우쳐 부동산 시장의 과열을 방관했다면, 2008년 세계 금융위기는 한국 경제에 1997년 외환위기에 비견할 만한 충격을 가했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부동산과 함께 괴로워했던 문제는 양극화였다. 당시 국정홍보처장을 지낸 김창호씨는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직후 <시사IN>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노무현이) 가장 가슴앓이 했던 것이 바로 양극화 문제였다. 양극화란 것은 전 지구적 현상이다. 한 나라의 정부 처지에서는 해결하는 데 뚜렷한 한계가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양극화가 참여정부 시기에 심화된 것은 객관적 사실이다. 노 전 대통령이 자신을 ‘실패한 대통령’으로 부른 속내는, 이 문제에 만족스러운 대안을 찾지 못했다는 짙은 회한이다(<시사IN> 제90호, ‘과거의 썩은 다리로 미래의 강을 건널 수 없었다’ 기사 참조).”

통계청이 제공하는 지니계수(0에 가까울수록 평등,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를 보면 당시의 양극화 경향이 확인된다. ‘도시 2인 이상’ 가구 기준으로 지니계수는 1990년 0.266에서 1995년 0.259로 떨어진다. 1990년대의 상반기에는 한국 사회가 더욱 평등해졌다는 의미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2002년에는 0.293까지 올라간다. 노무현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인 2007년에는 0.316으로 증가했다.

5분위 배율(상위 20%의 소득을 하위 20% 소득으로 나눈 수치. 클수록 불평등) 역시 1990년대 초·중반 3.8~3.9 수준이었지만, 외환위기 이후인 2002년에 4.77로 높아진다. 2007년에는 5.79까지 올라간다.

문제는 양극화가 단기적으로 속 시원하게 해결될 수 있는 의제가 아니라는 데 있다. 1990년대 이후 전 세계적 차원에서 진행되어온 지구화와 정보화의 속성 가운데 하나가 양극화다. 양극화를 피하기 위해 지구화·정보화의 대열에서 이탈할 수는 없다.

전임 김대중 대통령은 1997년 외환위기에 따른 국가경제의 붕괴를, 글로벌 금융자본주의에 한국을 더 깊이 편입(=개방)시키는 방법으로 해결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을 내세운 미국 등 서방 선진국의 요구이기도 했다. 외환위기 이전엔 외국인은 물론 한국인도 국내 대기업의 주식을 자유롭게 사고팔 수 없었다. 재벌 일가의 경영권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IMF는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대신 한국 대기업 주식의 매매에 대한 규제를 철폐(자본시장 자유화 및 개방)하라고 요구했다. 물론 미국 등 선진국 금융자본에 한국 대기업 주식 거래를 통한 금융수익 추구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한국의 자본시장 관련 제도가 글로벌 표준과 비슷해지면서, 그만큼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한 한국 경제의 편입 정도가 심화된다는 의미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IMF의 요구를 받아들여 건국 이후 가장 파격적인 시장자유화와 개방 조치를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그 자유화와 개방은 자본시장뿐 아니라 서비스와 노동까지 포괄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도 진보 진영은 김대중 대통령을 ‘신자유주의자’라고 비판한다.

다만 신자유주의로 불리는 흐름 가운데 어떤 측면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전통적 의제와 일맥상통한다. IMF가 요구한 자본시장 개혁은 결과적으로 재벌 일가의 영향력을 줄이게 된다. 마침 한국 민주화운동 역시 재벌 일가를 정경유착의 원흉이자 민주화의 적으로 공격해왔다. 적어도 당시의 한국에서는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와 손잡을 수 있는 경제적·정서적 환경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 경제의 지구화는 양극화의 심화를 의미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각종 복지제도의 강화와 신설로 지구화를 보완했다. 극빈층을 위한 국민기초생활법을 제정하고 4대 보험의 적용 대상을 넓혔다.

노무현 “개방을 통해 경쟁력 키워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김대중의 길’을 따라갔다. 사실 김대중 대통령의 자유화와 개방은 외세로부터 강요받은 측면이 있었다. 구제금융을 받아 국가부도를 피하려면 개방해야 했던 것이다. 이에 비해 노 대통령은 적극적으로 개방해 경제발전의 동력으로 삼으려 했다. 그에 따르면,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가 우리 시장은 닫아놓고 남의 시장만 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칠레·싱가포르 등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데 이어 아세안(ASEAN)·캐나다·중국·유럽연합(EU), 나아가 미국과 FTA 협상을 추진했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개방은 한국 경제의 새로운 고도화, 즉 이미 세계적 수준에 도달한 제조업에 이어 금융산업, 교육, 의료 같은 고부가가치 서비스업을 발전시키는 전략이기도 했다. 2007년 신년 특별연설에서 노 대통령은 한국을 동북아시아의 금융·물류 허브로 발전시켜야 한다며, “상품 수출 국가에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자본투자 국가로 나아가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금융 같은 첨단 서비스업을 국내에서 발전시키려면 “개방을 통해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또한 개방을 통한 국가발전 노선을 성공시키려면 국내 시장을 글로벌 표준에 맞춰 더욱 공정하고 자유롭게 바꿔야 했다.

측근들에 따르면 노무현 대통령에게 한·미 FTA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변양균 전 기획예산처 장관은 ‘노무현 경제의 지향점’(<한국경제포럼> 제5권 제1호)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노무현 대통령은 한·미 FTA를 세계사의 흐름에서 균형자 이론으로 접근했다. 조선 세종 때 우리는 대륙 세력인 중국과 함께 해양 세력에게 문을 닫았다. 결과는 임진왜란과 일본의 식민지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한·미 FTA를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 간의 균형자 입장에서 파악하고 추진했다.”

‘노무현의 경제 파탄’을 주장했던 세력은 지금도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좌파 반시장주의’ ‘반미 종북’ 같은 딱지를 붙인다. 그러나 정작 대한민국 건국 이후 가장 강력한 수준의 시장 자유화와 개방, 심지어 대륙 세력(중국)으로 경사되기 쉬운 지정학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말과 선동이 아니라 정책으로 승부한 것은 재임 시절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개방을 통한 경제발전만으로는 ‘민생(양극화 문제 해결)’을 챙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거듭해서 “경제만 좋아진다고 민생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지구화된 경제의 발전 자체는 양극화를 심화시킨다는 것을, 그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경제만 발전시키면 일자리도 늘어나고 양극화도 해결된다’는 당시와 지금의 ‘경제주의자’들과는 많이 달랐다.

다만 양극화를 피하기 위해 경제를 발전시키지 않을 수는 없다. 지구화와 정보화에서 이탈할 수도 없다. 이런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는 복지제도가 경제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했다. 복지는 사회적 자원의 낭비가 아니라 ‘사회투자’였다. 그의 말처럼, 집이 없고 끼니를 걱정해야 하고 건강하지 않으며 안정된 직장도 없고 직업능력 향상을 위한 교육 연수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넘치는 나라의 경제가 경쟁력이 있을 수는 없다. 더욱이 그가 한국의 미래 전략산업으로 꿈꾼 첨단 서비스업에서는 개인의 능력이 제조업에서보다 훨씬 중요하다.

복지 분야 예산 연간 20%씩 늘려
ⓒ연합뉴스
노무현 대통령(가운데)이 2006년 8월30일 ‘비전 2030 보고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복지 분야 예산을 연간 20%씩 늘렸다. 기초생활보장 관련 지출이 2002년 2조8000억원에서 2007년에는 7조3000억원까지 증가한다. 특히 보육 예산이 5배로 늘어났다는 것은 ‘사람(해당 아동과 그 부모)에 대한 투자’를 늘려 생산성을 키운다는 사회투자라는 용어와 상응한다. 실제로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GDP 대비 공공사회복지지출’ 비율이 2002년 4.8%에서 2007년 7.12%로 껑충 뛴다. 재정 중 복지지출 비율은 2002년 20%에서 2006년 28%로 높아졌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복지의 난점’ 역시 인식하고 있었다. 보육 복지가 생산성 증대로 이어지려면 해당 아동이 성인으로 성장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 연금 보험료를 납부하는 사람들은 수십 년 뒤에야 그 혜택(연금급여)을 받는다.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여러 조치도 마찬가지다. 그 기간에 어떤 정치세력은 ‘세금을 낭비한다’며 복지제도를 파탄시키려 들 것이다. 혹은 정치적 인기를 얻기 위해 재정 문제를 도외시하며 복지 혜택만 늘리겠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공적 지위에 있는 자가 자신의 사적 이익(정치적 인기)을 위해 공공의 이익을 배신하는 ‘대리인 문제’다. 결국 복지와 그 재정은 장기적 관점에서 계획되어야 한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은 한국 정치인으로서는 매우 기묘하다고 여겨질 수밖에 없는 행위를 한다. 당시로부터 머나먼 미래인 2030년까지의 장기 국가발전 전략을 짜서 제시한 것이다. 2006년에 발표된 ‘비전 2030’이다. 목표는 2030년까지 GDP 4만9000달러, 국가경쟁력 10위(당시는 29위), 삶의 질 10위(당시 41위), GDP 대비 공공사회지출 21% 등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한 개방과 시장자유화, 복지, 재정지출 계획을 ‘비전 2030’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변양균 전 기획예산처 장관은 <노무현 경제의 지향점>에서 “비전 2030은 당시 ‘저주받은 걸작’처럼 외면당하고 조롱받았다”라고 썼다. 비전 2030의 운명은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이 한나라당에 제안한 대연정의 운명과 같았다. 한국 정치인들은 ‘비전 2030’에 포함된 대통령의 선의를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특히 ‘경제 파탄’ 프레임을 내세운 이들은 비전 2030이 공공사회지출의 증가를 제시한다는 이유로 노무현 대통령을 포퓰리스트로 몰았다.

역설적이지만, 자신의 정치적 인기 폭락을 무릅쓰면서까지 복지 재정 문제에 덤벼든 것은 입으로만 떠드는 사람들이 아니라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예컨대 국민연금은 1988년 ‘보험료율 3%-소득대체율 70%’ 체제로 시작했을 때부터 ‘재정적으로 지속 불가능하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가입자 소득의 3%를 받는 대신 그 70%를 연금급여로 지급’하는 시스템이라면, 결국 세금이나 후세대가 부담해야 하는 몫이 커지게 된다. 그러나 대다수 정치인들은 보험료율을 높이자거나 소득대체율을 낮추자고 말하지 못한다. 인기를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논란이 벌어지는 가운데서도 정작 굵직한 국민연금 재정 개혁을 시도한 대통령은 둘밖에 없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소득대체율을 60%로, 노무현 대통령은 40%로 내렸다. 물론 인기는 폭락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의 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든, 적어도 사적 이익을 위해 공공 이익을 배신하는 ‘대리인 문제’에서는 자유로웠다.


당신의 반대편에 서 있던 나

안지섭 webmaster@sisain.co.kr 2019년 05월 28일 화요일 제610호

입대한 지 2개월밖에 되지 않은 나는 군기가 바짝 든 채로 내무반에 앉아 있었다. 주말이었기에 내무반에는 하루 종일 텔레비전이 켜져 있었고, 이등병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각 잡고 앉아서 곁눈질로 텔레비전을 보는 것뿐이었다. 여느 때처럼 평온한 토요일 아침이었다. 텔레비전에서 속보를 전해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었다.

2002년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부모님은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마땅치 않게 여겼다. 중학생이던 나는 자연스레 부모님 영향을 받게 되었고 이회창 후보를 응원했다. 우리 가족은 노무현 후보의 낙선을 바랐다.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기에 임기 내내 부모님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모진 소리만 내뱉었다. 전세를 살고 있던 우리 가족에게 집값이 오르는 것도 ‘노무현 탓’이었으며 비정규직이었던 아버지가 정규직이 되지 못하는 것도 ‘노무현 탓’이었다. 그런 대통령이 갑작스레 세상을 등진 것이다. ‘그냥 한 사람이 갔구나. 참 딱하다’ 정도의 생각만으로 비보 소식을 접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날 이후 텔레비전에서는 연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행적, 죽음의 이유, 유서의 내용 등을 전했다. 임시로 차려진 분향소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애도를 표했고 그중 몇몇은 울다가 지쳐 실신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곤 했다. 내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가족, 친구가 죽은 것도 아니고 그저 한 국가의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것뿐인데, 무엇이 저들을 그토록 통곡하고 오열하게 만드는 것인지 의아하고 궁금했다. 임기 내내 온갖 비난과 멸시를 당했으며 심지어 탄핵 위기까지 몰렸던 그런 대통령이었다. 이제 와서 그의 죽음에 왜 이토록 슬퍼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시간은 흐르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또한 사람들에게서 점차 잊혀졌으며 나는 군 생활을 마치고 복학했다. 당시 누구와도 어울리기 힘들었던 복학생 신분으로 마음 편히 드나들 수 있던 곳은 도서관뿐이었다. 어느 날 찾아간 도서관에서 운명처럼 만난 책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서전 <운명이다>였다. 반대편에 서 있던 인물의 자서전을 읽게 된 원동력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건 아마도 분향소에서 오열하던 어느 시민의 눈물이 아니었을까 싶다. 가족도 친구도 아닌 누군가를 위해 진심으로 흘리는 눈물, 그 누군가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내가 그 책을 펼치게 만들어주었다.

운명처럼 만난 책은 그저 그런 책 한 권이 아니었다. 노무현이라는 한 사람을 내 삶에 스며들게 해 나를 바꾸었다. 가난한 학생 시절부터 잘나가는 변호사, 5·18 광주민주화운동 청문회 당시 패기 넘쳤던 신인 정치인, 선거마다 패배하던 실패한 정치인, 바보 노무현의 재탄생, 그리고 국민의 힘으로 당선된 대통령, 그런 국민들을 위해 펼쳤던 정책, 탄핵 위기, 임기 후 봉하마을에서의 삶, 마지막으로 그의 유서까지 어느 하나 빠짐없이 나를 웃고 울게 했으며, 세차게 요동치다가도 맥없이 쓰러지게 했다. 물론 의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와 반대편에 서 있던 내가 책 한 권으로 흔들릴 수는 없었다. 한 권의 책으로부터 시작된 그에 대한 탐구는 관련된 다른 서적, 영상물 등 모든 매체로 이어졌다. 몇 달간 정말 노무현 대통령을 가족만큼이나 가깝게 여겼다. 그렇게 노무현 전 대통령을 받아들이고 나서 한참을 울었다. 미안해서 울었고 후회되어서 울었다. 진즉 그를 몰라보고 지켜주지 못한 것이 너무나도 후회스러웠으며 아무 잘못 없던 그를 비난하고 헐뜯은 것이 무척이나 죄송스러웠다. 그런 과정을 겪으며 그에 대한 적대는 믿음으로 변해갔다. 그 뒤 나는 봉하마을을 찾았다.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고자.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렇게 내 사람이 되었다.



미국에서 알게 된 노무현

문수진 webmaster@sisain.co.kr 2019년 05월 28일 화요일 제610호


2003년, 일을 마치고 집으로 올 때마다 아버지는 한국 마트에서 공짜로 주는 미주 한국 신문을 챙겼다. 아버지는 이 신문을 옆에 쌓아두고 읽으며 “한국이 망했다”라고 말했다. “대통령을 잘못 뽑아서 나라가 엉망이 되었다”라고도 했다. “멍청한 노무현, 대학도 못 나온 게 어떻게 대통령이 되어서 나라를 망치는가.” 아버지는 신문을 읽을 때마다 이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그때 나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사람도 대통령이 됐구나. 신기하네’ 혹은 막연히 ‘진짜 무능한 대통령인가 보다’라고 여겼다. 굳이 자세히 알아보고 싶은 의지도 상황도 아니었다.

나는 1995년 캐나다로 이민을 왔다. 그리고 1999년에 결혼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집권할 당시 나와 남편은 아버지 집에 얹혀살고 있었다. 아르바이트와 학교를 병행하며 가난한 이민자의 삶을 살고 있었다.

2009년, 남편이 미국에 취직이 되어 처음으로 안정된 삶을 살고 있을 때, 평상시 습관대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한국 포털 사이트에 접속했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 사람은 언젠가 아버지가 그렇게 욕하던 대통령이 아닌가?’ 잘 모르는 사람의 죽음은 내게 ‘그냥 안됐다’라는 안타까움 그 이상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에도 한국은 온통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물결로 가득 찼다. ‘이 사람이 도대체 어떤 일을 했길래? 어떤 사람이었길래? 대통령으로서 무능했던 이 사람을 사람들은 진심으로 추모하는가’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그리고 알게 된 노무현이라는 사람. 충격이었다. 어떻게 한국 언론이 한 사람에 대해 그렇게 왜곡하고, 줄기차게 비판할 수 있는가? ‘정치적 무관심은 결국 악한 자들의 지배를 돕는다’는 말이 이해되었다. 한국을 떠날 때 스물두 살이었다. 투표는 딱 한 번 성년이 된 기념으로 했다. 그것도 그냥 다 모르는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을 대충 찍고 나왔다. 다이어리에 ‘처음으로 투표함’ 이렇게 적었다. 내게 정치인이란 그리고 대통령이란 나와는 상관없는 그들만의 리그 안의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하나같이 국민을 등쳐먹는 나쁜 인간으로 여겼다.

ⓒ시사IN 포토
2009년 5월29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 영결식이 끝나고 서울광장에서 서울역 방향으로 운구 행렬이 지나가고 있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을 알게 된 이후로는 대통령이 국민을 사랑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딸아이에게도 자신 있게 소개해줄, 내가 존경하는 조국의 대통령이 생겼다. 2009년, 그분이 없는 시간에 그분을 더 알게 되고 존경하게 되었다. 또한 언론이 주는 대로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2019년, 매주 성경공부 모임에 나가고 있다. 어느 날, 모임에 오는 한 분이 대뜸 사람들에게 같이 토론토에 가자고 했다. ‘한국이 적화통일이 된다’고, 가서 ‘나라를 구해야 한다’고. 그래서 이번에 열리는 태극기 집회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이다. 2019년에 그것도 미국과 캐나다에는 이런 어르신들이 아직 많다. 이분들은 선거철이 되면 꼭 투표를 하러 가신다. 그래서 우리도 악착같이 미국에서 투표를 한다. 이런 사람들의 표가 아무런 의미 없는 숫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노무현이 남긴 숙제10년 만에 진행 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 추진한 검찰 개혁은 제도로 확립되지 못하고 끝났다. 정권이 바뀌면서 검찰 개혁은 뒷걸음쳤다. 여론을 등에 업은 문재인 정부가 노무현의 숙제를 완성할 수 있을까.

김은지 기자 smile@sisain.co.kr 2019년 05월 29일 수요일 제610호

노무현 전 대통령 10주기를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 중 하나가 검찰이다. 2009년 5월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대검 중수부)의 수사를 받던 중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논두렁 시계’로 대표되는 가짜 뉴스와 검찰의 피의사실 공표, 표적수사 등으로 고통받던 노 전 대통령은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는 정치 검찰에 대한 성토로 이어졌고 한편으론 검찰 개혁의 불씨를 지폈다. 검찰의 칼이 정치적 반대자를 탄압하는 수단으로 쓰인 대표 사례였다. 검찰 개혁은 노 전 대통령이 던진 생의 마지막 메시지였던 셈이다.
ⓒ사진공동취재단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9년 4월30일 ‘박연차 게이트’ 수사와 관련해 대검찰청에 출두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 들어 개선되었다고 평가받았던 검찰의 정치적 중립은 정권이 바뀌면서 순식간에 후퇴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내내 ‘정치 검찰’ 문제가 불거졌다.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정연주 전 KBS 사장, MBC <PD수첩> 제작진에 대한 무리한 기소와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김무성 의원, 정윤회씨 봐주기 불기소 등으로 대표되는 검찰권 남용은 왜 개혁이 필요한지 보여주었다(<시사IN> 제506호 ‘검찰 개혁 재수, 이번엔 성공할까’ 기사 참조).

참여정부는 ‘검찰 개혁’이라는 화두로 시작했다. 대통령 취임 2주도 안 된 2003년 3월9일, 노무현 대통령은 평검사들과 마주앉았다. 검찰 개혁을 두고 ‘전국 검사들과의 대화’에 나섰다(41쪽 기사 참조). “이쯤 가면 막 하자는 거지요?” 노 대통령의 말이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이날 맞장 토론에는 검찰 개혁과 관련해 꼼꼼히 뜯어볼 장면이 많다. 노무현 대통령은 특유의 대중 화법으로 이렇게 말했다. “검찰의 중립은 정치인들이 보장해주는 게 아닙니다. 검찰 스스로 지키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언론 자유라는 건, 흔히들 피 흘린다고 합니다. 감옥 가고 구속되고 해직되고 싸워서 지켜냈습니다. 검찰의 독립도, 검찰 스스로 품위를 가지고 지켜나가십시오. 제가 그걸 못 지킬 만큼 강압적으로 하진 않겠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뼈저린 후회


실제로 참여정부 당시 대검 중수부는 여야를 가리지 않고 불법 대선 자금을 수사했다. ‘좌희정’으로 불린 현직 대통령의 측근 안희정씨가 구속되었다. 살아 있는 권력 앞에서도 휘지 않는 검찰의 칼을 향해 시민의 응원이 쏟아졌다. 당시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2012년 18대 대선 박근혜 캠프 참여 및 2016년 20대 총선 새누리당 후보 출마)은 ‘국민검사’라는 별명도 얻었다.

대선 자금 수사 결과에 대해 노 대통령은 2004년 3월11일 특별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검찰의 능력에 대해서 참으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보기에 따라서는 소름이 끼친다고 할 만큼 검찰은 유능했다. 때로는 너무한다 싶은 때도 있었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그러한 검찰이 한편 믿음직스럽다고 생각하고 그간의 노고를 치하한다.” 검찰의 정치적 중립에 대한 노 대통령의 의지는 이렇게 일관됐다.

참여정부 동안 검찰의 정치적 중립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지만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당시 고비처, 현재는 공수처로 불림) 설치 및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조정 등 제도 개혁까지는 이뤄지지 못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1년 발간된 책 <문재인, 김인회의 검찰을 생각한다>에서 공수처 설치에 대해 이렇게 복기했다. “(참여정부) 출범 당시에는 검찰 권력의 민주적 통제에 대한 요구보다는 권력형 비리를 척결해야 한다는 요구가 굉장히 높았다. 그래서 고비처(공수처)를 검찰 개혁 과제로 생각하지 않았다. 권력형 비리에 대한 사정 강화 차원에서 논의했다.”
ⓒ연합뉴스
이인규 대검 중수부장이 2009년 6월12일 ‘박연차 게이트’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국회 상황도 쉽지 않았다. 2007년 11월27일 삼성비자금 의혹 특검 법안 관련 기자회견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검찰이 공정하게 수사하기 어려운 사건도 있을 수 있으므로 공직부패수사처(공수처), 이런 것이 필요하다고 지난 대선 때 각 당이 모두 공약했고, 공약에 따라 법무부와 검찰의 이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을 거쳐서 정식으로 국회에 제출했다. 그것을 통과시키면 되는데 왜 국회가 그 법은 통과시켜주지 않느냐.”

검경 수사권 조정도 난항을 겪었다. 가진 권한을 내려놓아야 하는 검찰과 더 확보하려는 경찰 사이 다툼으로 변질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아쉬움을 표했다. 2007년 10월19일 제62주년 경찰의 날 기념식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한 말이다. “경찰과 검찰의 수사권 조정 역시 아직 미결로 남아 있다. 저로서는 공약했던 수준보다 한발 더 나아간 안을 마련해서까지 중재하려고 했으나 여러분의 조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참으로 아쉽게 생각한다. 지금은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결정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경찰 수사의 독자성 인정과 검찰의 사법적 통제를 절충하는 방향에서 적절한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임기 말 노 대통령의 아쉬움이 묻어나는 말처럼 검찰 개혁은 제도로 확립되지 못한 채 끝났다. 검찰 개혁은 결국 정권이 바뀌면서 뒷걸음질 쳤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동안 검찰의 ‘알아서 잘하기’는 착시효과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검찰 권력을 손아귀에 쥐고 싶은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욕망을 제어할 장치가 없었다. ‘상대 편’에게 가혹하고 ‘내 편’에게는 관대한 정치 검찰로 복귀했다.

이에 대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후회는 뼈저리다. 생전 글을 모아 펴낸 책 <운명이다>에서 그는 이렇게 후회한다. “검찰 자체가 정치적으로 편향되어 있으면 정치적 중립을 보장해주어도 정치적 중립은 지키지 않는다. …검경 수사권 조정과 공수처 설치를 밀어붙이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스러웠다. 이러한 제도적 개혁을 하지 않고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려 한 것은 미련한 짓이었다.”

문재인 대통령도 책 <문재인, 김인회의 검찰을 생각한다>에서 노 전 대통령과 비슷한 평가를 내렸다. “우리가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너무 나이브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정치적 중립성이 해결되면 검찰의 민주화까지 따라온다고 생각했다. 정권이 검찰을 정권의 목적에 맞춰 장악하려는 시도만 버린다면 검찰의 민주화는 시간이 좀 걸려도 따라온다고 봤고, 또 민주적 통제를 말하려면 정치적 중립부터 국민들에게 보여줘야 했다.” 참여정부 청와대에 근무하며 검찰 개혁을 가까이서 지켜본 인사의 평가도 비슷하다. “노 전 대통령은 관료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 선한 의지로 선하게 대하면 잘할 거라는 믿음이었다. 개혁 의지가 있는 젊은 검사들과 대통령이 결을 공유할 수 있을 거라고 봤다. 그렇다고 검찰을 정권의 손아귀에서 놓지 말았어야 한다는 지적에는 동의 못한다. 그 방향은 참여정부가 추구하는 가치가 아니었다. 다만 이를 뒷받침하는 검찰권 견제와 분산 시스템 구축이 함께 이뤄지지 않았기에 절반의 성공이라 평가하고 싶다.”
ⓒ연합뉴스
2018년 6월21일 검경 수사권 조정 합의문 서명식이 열렸다.

2016년 광장으로 나온 시민 수백만명이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함께 검찰 개혁을 요구했다. 2017년 19대 대선 당시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를 제외한 모든 후보가 공수처 설치에 찬성한 이유이기도 하다.

검찰 개혁은 그만큼 중요한 공약이었다. 19대 대선 더불어민주당 정책공약집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다. ‘권력 눈치 안 보는, 성역 없는 수사기관을 만들겠습니다’라는 대목에서 수사기관은 정확히 검찰을 겨냥한다. 검찰권을 분산시키겠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네 가지 구체적인 안 중에서도 ‘공수처 설치와 검경 수사권 조정’이 1번으로 꼽혔다.

검찰은 여전히 엄살 중


문재인 정부는 지난 10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검찰 개혁에 대한 마스터플랜을 짜고 이를 진행해왔다. 2017년 정권 초 검찰과 경찰, 국정원 등 권력기관 자체의 개혁위원회를 꾸렸다. 각 기관은 지난 10년 동안의 권력에 대한 종속과 전횡을 반성하는 내용을 조사해 발표했다. 2018년 6월 박상기 법무부 장관과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이 검경 수사권 조정을 골자로 하는 합의안을 발표했다. 2019년 4월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여야 4당은 이 내용을 수정·보완한 법안을 패스트트랙에 올렸다. 공수처 설치, 검경 수사권 조정, 검찰의 피의자 신문조사 증거능력 삭제 등이 주요 내용으로 담겼다.

이에 대해 검찰은 국회 패스트트랙 안을 두고 반발하지만, 여론의 눈치를 살핀다. 과거만큼의 반발은 하지 못하는 양상이다. 조직적인 반대를 하기에는 검찰 개혁에 대한 여론의 요구가 훨씬 높아진 덕이다. 문무일 검찰총장도 공수처 설치를 두고 공개적으로 반대 의견을 표명하지 못했다. “(공수처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많은 국민들께서 공감한다. 공수처 논의가 20여 년 지속된 원인이 있을 텐데, 그 원인을 20년 기회 동안 저희가 해소 못했다면 인정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문 총장은 “다만 수사를 착수한 사람(공수처)이 기소 독점까지 갖고 있는 것은 국민이 용납하기 어렵지 않나”라고 말했다. 문 총장이 지적한 수사·기소권 집중 발언은 부메랑이나 다름없다. 이 같은 지적이 검찰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검찰은 수사권(수사개시권·수사지휘권·수사종결권), 영장청구권, 기소권 등을 가진다. 이 가운데 검찰은 수사지휘권·수사종결권·영장청구권·기소권을 독점한다.

패스트트랙에 태운 법안보다 더 강한 개혁을 요구하는 이들은 검찰의 ‘엄살’을 지적한다. 지난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검찰의 직접수사권 범위가 너무 넓고 기준이 모호하다”라고 비판했다. 정부 안에 따르면 특수·공안 사건은 여전히 검찰 수사권 범위에 들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검찰 개혁의 의지를 지속적으로 밝혔다. 지난 5월9일 취임 2주년을 맞아 KBS와 한 대담에서 문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검찰 스스로 개혁을 할 수 있는 많은 기회들을 지금까지 놓쳐왔다. 그래서 검찰이 개혁의 당사자이고 이제는 셀프 개혁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 국민의 보편적인 생각이다. 검찰이 좀 더 겸허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뼈저리게 후회한 검찰 개혁이라는 숙제는 2019년 현재 진행 중이다.


6.6%였던 노무현 신뢰도, 10년만에 45.3%로

2007년 <시사IN> 조사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신뢰한다는 응답은 6.6%였다. 2017년에는 45.3%로 뛰었다. 이는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신뢰 자본’이 든든함을 보여준다.

장일호 기자 ilhostyle@sisain.co.kr 2019년 05월 29일 수요일 제610호


민주주의란 어떤 정당이든 선거에서 패배할 수 있는 체제다. 정치학에서는 ‘민주주의 공고화(democratic consolidation)’의 기준 중 하나로 평화적이고 수평적인 정권교체를 꼽는다. 미국의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집권 세력이 선거 결과에 승복하고 평화롭게 정권이 이양되는 과정을 두 번 이상 거칠 때 민주주의가 정착되었다고 간주한다. 이 과정을 통해 국민은 집권 정당과 정부에 책임을 물을 수 있고, 정당은 국민의 지지를 놓고 경쟁하게 된다. 한국은 1997년과 2008년 두 번의 테스트를 통과했고, 2017년 세 번째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박정희와 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은 한국 정치사를 양분하는 보수 정권과 민주 정권의 ‘아이콘’이다. 정권교체의 주요 장면마다 두 대통령의 빛과 그림자가 소환된다. <시사IN>은 2007년부터 신뢰도 조사를 통해 역대 대통령의 신뢰도를 점검했다(2008년과 2011년은 조사 없음). 눈에 보이는 영향력보다 중요한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신뢰다. 영향력과 신뢰도는 밀접하게 이어져 있다.

보수 정당 집권 시기를 거치는 동안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신뢰도는 꾸준히 상승해 2012년에는 조사 이래 처음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신뢰도를 오차범위 내 차이(0.8%포인트)로 따돌렸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딸인 박근혜 대통령 집권 초기에 다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신뢰도를 앞서갔지만, 이전과 달리 압도적 신뢰도를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다. ‘박근혜 게이트’가 시작된 2016년 20%대로 주저앉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신뢰도는 박근혜 정권의 실정과 함께 가파른 내리막길을 걸었다. 문재인 정부가 집권한 이후 실시된 2018년 신뢰도 조사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신뢰도(21.1%)는 노무현 전 대통령 신뢰도(42%)의 절반이었다. 집권 세력에 대한 기대나 불만이 두 정치 세력을 대표하는 전직 대통령의 신뢰도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해석해볼 수 있다.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두 대통령의 신뢰도 추이로 정권교체 여부까지 예측해볼 수 있는 셈이다.

30대의 극적인 변화

<시사IN>이 신뢰도 조사를 처음 시작했던 2007년으로 돌아가보자. ‘박정희 신화’는 마치 철옹성 같았다. 당시 응답자의 절반 이상(52.7%)은 전·현직 대통령 가운데 가장 신뢰하는 인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꼽았다. 호남과 20대, 학생 계층을 제외한 모든 지역과 연령, 직업군에서 모두 압도적인 신뢰를 보냈다. 박 전 대통령은 전 세대를 아우르는 ‘산업화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며 중·장년층에게는 향수로, 청년에게는 경제성장에 대한 ‘신화’로 소비되었다.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는 ‘경제 대통령’을 내세우며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긍정적 이미지를 승계한 적자를 자임했고, 이후 대선 승리를 거머쥐었다.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임기 말임을 감안해도 상당한 민심 이반을 경험하고 있었다. 신뢰하는 전·현직 대통령 3위(6.6%)에 올랐지만, 가장 불신하는 전·현직 대통령 순위로는 2위(21.2%)였다. 신뢰도보다 불신도가 3배 이상 높았다. 2009년 신뢰도 조사에서는 반전이 일어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신뢰도는 전·현직 대통령 10명 중 2위(28.3%)를 차지했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생존 시보다 사후에 더 너그러워지는 경향을 감안하면, 그해 5월23일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의 추모 열기가 신뢰도에 반영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특히 30대의 변화가 눈에 띄었다. 2007년 조사에서 30대 응답자가 노 전 대통령을 신뢰한다는 대답은 8.8%에 불과했다. 그러나 2009년 조사에서는 45.4%로 큰 차이를 보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30대 신뢰도(22.6%)와 비교해도 2배 이상 높은 수치였다. 박 전 대통령은 당시 60세 이상과 대구·경북, 한나라당 지지층 등 ‘고정 지지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신뢰도 1위(41.8%) 자리를 지켰지만, 이는 2007년에 비해 10%포인트 이상 빠진 수치였다.

이명박 대통령 임기가 반환점을 돈 2010년 신뢰도 조사는 ‘박정희 신화’에 균열이 시작됐음을 알려줬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지목한 응답이 처음으로 30%대로 내려앉았다.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의 신뢰도를 합치면 43.5%로 박 전 대통령의 신뢰도 수치(34.2%)를 넘어섰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신뢰도에 당시 현직이었던 이명박 대통령의 신뢰도인 6.4%를 합쳐도 40.6%로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신뢰도를 합친 수치에 미치지 못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집권이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성장주의’에 대한 환상을 일정 부분 거둬갔음을 보여주는 결과였다.

2012년 대선을 3개월 앞두고 시행된 신뢰도 조사에서는 처음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신뢰도(33.7%)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신뢰도(32.9%)를 근소한 차이로 앞서갔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신뢰도는 해마다 떨어졌다. 대선이 가까워오면서 후보에 대한 지지율과 신뢰도가 수렴되는 모양새를 보인 만큼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 후보가 ‘박정희의 딸’ 박근혜 후보에 버금가는 후광효과를 입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결과는 모두가 아는 대로였다.
ⓒ시사IN 자료
2007년 9월 휴일을 맞아 청와대에서 손녀와 자전거를 타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에는 민주주의 회복에 대한 기대가 겹쳐진다.

2013년 신뢰도 조사는 ‘종북’을 무기로 내세운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집권 1년차 효과가 반영된 결과다. 통합진보당 정당 해산 사건, NLL(북방한계선) 논란 등 일련의 북한 관련 이슈가 여론을 뒤덮는 데 성공하며 전직 대통령 신뢰도 순위도 보수 우위로 재편됐다. 가장 신뢰하는 전직 대통령을 꼽아달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37.3%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꼽았다. 2012년 대비 4.4%포인트 늘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8%로 전년에 비해 5.7%포인트가 빠진 2위로 내려앉았다.

‘우경화’로 정권을 단단히 틀어쥔 것 같았던 박근혜 정부의 독주는 2014년 세월호 참사를 거치며 브레이크가 걸렸다. 그해 신뢰도 조사에서는 박근혜 대통령과 여야 정당은 물론 법원·검찰·경찰·국세청·감사원 등 모든 국가기관의 신뢰도가 일제히 추락했다. 대통령 신뢰도는 2012년 조사 결과와 흡사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신뢰도(33%)가 가장 높았다. 세월호 참사 이후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도 상대적으로 옅어지는 추세를 보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신뢰도는 2015년을 시작으로 뚜렷한 오름세를 보인다. 추세는 이어졌다. 2016년 신뢰도 조사는 ‘전직 대통령 신뢰도의 정권교체’라 할 만했다. 2016년 조사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가장 신뢰한다고 꼽은 응답자는 28.8%로 역대 조사 중 가장 낮았다. 조사 이후 처음으로 30% 선이 붕괴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신뢰도는 39.9%로 ‘박정희 신뢰’ 응답을 오차범위 밖에서 앞섰다. 이 역시 2007년 조사 이후 처음이었다.

문재인 대통령 신뢰 자본 ‘든든’

박정희 신화는 그 적절함을 떠나 ‘국가주도형 개발주의’라는 막강한 대안 위에서 위력을 발휘해왔다. 반면 노무현에 대한 향수에는 ‘민주주의 회복에 대한 기대’가 겹쳐진다. 2017년 5월,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열린 조기 대선에서 유권자들은 문재인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택한다.

그해 9월 실시된 2017년 신뢰도 조사는 조기 대선을 거치며 유권자들이 과거에 대한 평가를 재구성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2017년 신뢰도 조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가장 신뢰한다는 응답은 전체 응답자의 45.3%였다. 2007년 조사 당시 노 대통령의 신뢰도 6.6%와 비교해보면 극적이다. ‘노무현’이라는 이름이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신뢰받는 이름으로 등극하는 데 10년이 걸렸다. 변화의 일등공신은 물론 박근혜 대통령이었다. 2017년 신뢰도 조사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신뢰도는 23.1%까지 떨어졌다.

2018년 조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신뢰도는 42%로 2017년 조사에 비해 소폭 하락했다. 일정 부분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반영됐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노무현·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신뢰 응답을 합하면 57.9%인 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신뢰도가 21.1%로 조사 이래 최하위인 점을 고려하면 ‘노무현 신뢰도’로 가늠해볼 수 있는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신뢰 자본’은 아직 든든한 편이다. 2019년 신뢰도 조사는 9월로 예정돼 있다. 올해는 어떤 변화를 보여줄까. 이번에도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신뢰도가,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는 유권자층의 크기를 짐작해볼 가늠자가 될 수 있을까.



그날, 봉하마을의 소나기

이진욱 webmaster@sisain.co.kr 2019년 05월 29일 수요일 제610호


아내와 첫째 아이는 등교하고 둘째는 유치원에 가서 한가로운 시간이 되었다. 미세먼지 농도가 약간 높은 편이었지만 언제 봄이었나 싶게 초여름 날씨인 5월 첫날이었다. 노동절이라는 의미 있는 날이지만 내게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진 5월의 시작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후 열 번째 5월이다.

둘째 아이의 심한 멀미로 인해 먼 곳에 다니기 힘들어 봉하마을에도 가족끼리는 두 번밖에 같이 가지 못했다. 혼자 있으니 편하게 봉하마을에 갈 기회여서 10년여 세월을 함께한 애마를 몰고 봉하로 향했다.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자’는 마음으로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하고 한참을 달려도 차 안이 조용했다. 차를 살 때 함께 단 내비게이션이 작동하지 않았다. 그래도 불안하지 않았다. 반백 번 정도 가보았으니 눈 감고도 갈 수 있는 곳이다. 1시간20분쯤 걸려 도착할 때까지 내비게이션은 먹통이었다. 초행길이었으면 참 난감했을 터이다.

내게도 이 길이 초행길이던 적이 있었다. 2009년 5월24일이었다. 하루 전날은 토요일이었다. 여자 친구와 아침 일찍 만나 데이트 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자에게서 문자가 왔다. ‘선생님, 노무현이 자살했대요’라고 적힌 문자를 확인하는 순간 ‘노무현’이라고 해서 화가 나는 것보다 ‘자살’이라는 글자에 시선이 멈췄다. 그냥 장난이려니 싶었다. 여기는 대구라서 노무현을 싫어하는 사람이 대부분인 곳이니 학생이 장난치는 것이라 생각했다. 혹시나 해서 텔레비전을 켜고 확인해보니 믿을 수 없는 소식이 속보로 나오고 있었다.

너무나 현실감 없는 소식에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냥 여느 다른 날처럼 여자 친구와 시간을 보내다 다음 날 만날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혼자 집에 있으니 대통령님 서거가 점점 무겁게 느껴졌다. 허망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튿날 아침 여자 친구에게 “우리 봉하마을에 다녀오자”라고 말했다. 여자 친구도 흔쾌히 승낙했다. 알고 봤더니 여자 친구도 대통령님을 좋아했다. 대구 토박이가 노무현이라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인데 말이다. 그런 나 역시 경상도 토박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남들과 생각이 달랐다.

사실 내 삶에서 노무현이라는 사람을 좋아하게 된 것은 늦은 편이었다. 2000년 총선에서 낙선하고 노사모가 결성될 때 난 군인이었다. 그 이전에 그가 낙선을 계속할 때도 나는 정치를 모르는 고등학생이었고,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으려던 대학생이었다. 당장 눈앞의 임용시험과 학군단 생활이 우선이었다. 학창 시절부터 군 생활까지 그저 쉼 없이 흘러가는 삶을 살았다. 그러다 세상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2002년이었다. 그해 대선이 있었다. 말년 중위로 무서울 것 없는 군 생활을 하고 있었고, 전역과 동시에 교사로 발령 예정이라 고민도 없었다. 동기 소대장들은 취업 걱정에 노심초사할 때, 난 세상 돌아가는 소식이나 챙기며 생활했다. 그 시절 최고의 뉴스는 월드컵과 ‘노풍’이었다. 외박 나오던 길에 사봤던 시사 주간지를 통해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의 노무현이라는 인물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가 내 기억 속에서 멋있는 아저씨였음을 20대 중반이 되어서야 알았다. 5공 청문회에서 빛나던 단 한 사람이었고, 명패를 집어던지던 열혈 사나이였다. 그런 그가 대통령 후보가 되는 과정은 마지막 군 생활의 소소한 재미였다.

전역 후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후의 우여곡절, 그리고 기적 같은 승리는 모두 아실 것이다. 대통령이 되고 낮은 지지율로 퇴임할 때까지도 항상 그가 좋았다. 퇴임 후 전해오는 훈훈한 소식에 한번 찾아가야지 생각만 하다 가지 못했다. 결국 대통령님의 서거 후에야 후회와 슬픔 속에서 찾아갔다.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길을 따라 찾아간 진영읍은 전국에서 모여든 조문 인파로 인해 도로가 주차장으로 변해 있었다. 지금은 진영휴먼시아 6단지 아파트가 들어선 14번 국도 육교 근처 빈 곳에 주차했다. 어딘지 몰라 사람들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지금은 그 길이 3.5㎞ 정도 떨어진 지점인 것을 알지만, 거리감도 없이 그냥 걸었다. 유난히 햇살 좋았던 초여름 날씨에 등에는 땀이 가득했다. 마을 어귀에 들어설 무렵 걸음을 멈춰야 했다. 조문 순서를 기다리는 줄이 줄어들지 않는 듯했다. 한참을 기다린 뒤에야 빈소가 마련된 마을회관에 도착했다. 조문 차례가 되어 절하는 순간 여자 친구는 오열해 일어서질 못했고, 내 눈에는 눈물이 흘러 앞이 보이질 않았다. 겨우 여자 친구를 일으켜 나오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다. 비를 피하고 싶지 않았다. 조문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비를 맞으며 그냥 있었다.

비와 함께 눈물이 흘러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것이 한참 동안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처음 간 길을 되돌아 집에 도착하니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첫 봉하 방문이다. 그 뒤로 여자 친구와는 한 번 더 봉하마을에 갔다. 그렇게 그곳을 함께 갔던 여자 친구는 지금 아내가 되었다. 이제는 가족으로 함께 대통령님께 인사드리는 사이가 되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노무현을 사랑했던 두 사람이 만나 앞으로 노무현을 존경할 두 사람이 더 생겼다. 이제 열 살, 여섯 살인 두 딸이 자라 세상을 조금씩 알아갈 즈음 내 마음과 같을 순 없지만 각자 새로운 의미로 대통령님을 그리워할 순간을 기대해본다.



“이게 다 노무현 덕분이다”

장재원 webmaster@sisain.co.kr 2019년 05월 29일 수요일 제610호

어느새 서른 살이 되어버렸다. 나는 08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했던 해에 새로운 ‘경제’ 대통령이 등장했다. 그에 대한 당시 내 시각은 모호했다. “알아서 잘하겠지, 뭐.” 반면 막 임기를 마쳤던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관점은 달랐다. 공부만 하던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갓 대학에 입학했을 때도, 그에 대한 생각은 다소 명확했다.

‘일 못하고 성깔 더러운 대통령.’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그는 희화화의 대상이었고, 나는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댓글을 수도 없이 달았다. 당시 그는, 적어도 내겐 그런 존재였다. 누군지도,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지만, 욕은 해도 괜찮은 대상.

그가 퇴임 후 봉하마을에 내려가면서 그에 대한 이미지는 한결 나아졌다. 손녀와 자전거를 타고, 동네 주민들과 막걸리를 마시는 장면, 시골 아저씨 외투를 입은 채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고 있던 그의 모습에선, 이전에 본 적 없었던 한 정치인의 소탈함과 솔직함이 묻어났다. 나는 어쩌면 ‘자연인 노무현’에 먼저 빠졌는지도 모른다.

대학 새내기 시절은 빠르게 흘러갔다. 광화문광장엔 촛불 시민들이 모이고, ‘명박산성’이 설치된 날이 많았지만, 나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때 내게 중요한 건 단 한 가지였다. ‘오늘은 술을 누구랑 마실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2009년 봄이 한창이던 어느 날, 아침부터 텔레비전이 시끌벅적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이 모든 매체를 뒤덮었다.
ⓒ시사IN 포토
2008년 4월13일 봉하마을을 찾아온 방문객들에게
노무현 전 대통령이 손을 들어 인사를 나누고 있다.

문득 세상이 궁금해졌다. 적어도 퇴임 후에는 편해 보였는데, 잘 지내고 계신 것 같았는데, 무엇이 그를 떠나보낸 것일까. 무심코 댓글을 달았던 나도 잘못이 있던 건 아닐까. 그와의 제대로 된 인연은, 그가 이 세상을 등지고 난 뒤에야 시작된 셈이다.

나는 찬찬히 그의 흔적을 돌아보았다. 그의 국민장에 모인 수백만 시민들의 눈빛을 헤아리기 시작했고, 그가 남긴 말과 영상을 찾아보았다.

그렇게 어느새 10년이 흘렀다. 이제는 노 전 대통령의 사진만 봐도 눈물이 고인다. 실로 놀라운 점은, 그의 모든 공식적인 언행에는 내가 파악했던 ‘자연인 노무현’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그토록 진실되고, 성실했던 정치인 노무현. 부정과 불성실이 당연시되는 정치 현실에서 스러져간 자연인 노무현. 그를 떠나보내야 했던 이 역사의 비극을, 나는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가 대통령직을 수행할 때 무관심, 퇴임 후 큰 난관에 처했을 때 무관심, 주변 세상과 정치에 대한 무관심. 내가 학창 시절 아무 생각 없이 그를 향해 달았던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는 댓글. 늦었지만 이제는 “이게 다 노무현 덕분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런 삶을 실현하기 위해, 스스로 부끄럽지 않도록 노력하는 중이다. 어쩌면 나는, 아직도 속죄 중인지도 모른다. 내 나이 스무 살 때 망연히 떠나보냈지만, 서른이 되도록 사무치게 그리운 사람, 오늘도 무척이나 그가 그립다.


천호선 노무현시민학교 교장이 말하는 ‘새로운 노무현’

<시사IN>이 만드는 팟캐스트 ‘시사인싸’에 천호선 노무현재단 이사가 출연했다. 노무현시민학교 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의 눈에 비친 노무현 전 대통령과 노무현재단의 ‘새로운 노무현’은 어떤 의미일까.

차형석 기자 cha@sisain.co.kr 2019년 05월 30일 목요일 제612호


노무현 전 대통령 10주기를 맞이해 노무현재단에서는 ‘새로운 노무현’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 5월21일 <시사IN> 팟캐스트 ‘시사인싸’가 천호선 노무현재단 이사를 서울 홍대 인근 녹음실로 초대했다. 그는 참여정부에서 참여기획비서관, 정무기획비서관, 의전비서관, 국정상황실장, 대변인, 홍보수석을 역임했다. 현재는 노무현시민학교 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회자 최광기씨, 김은지·이상원 기자와 천호선 노무현재단 이사가 한 시간 동안 나눈 내용을 재구성해 정리했다.

ⓒ연합뉴스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천호선 추진단장이 23일 서울 마포구 노무현재단에서 열린 노무현 대통령 서거 10주기 준비 기자간담회에서 노무현시민센터 건립 추진 현황을 설명하고 있다.

참여정부 대변인으로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다.



이유가 있다. 사실 대변인은 임기 말에 10개월밖에 안 했다. 다른 걸 더 많이 했다. 의전비서관은 두 번이나 했다. 대변인을 한 기간이 길지 않았는데 오래 기억되는 건 대변인으로 일할 당시가 ‘취재지원 선진화 방침’ 때문에 언론과의 관계가 굉장히 좋지 않았을 때여서일 거다. 당시 기자들이 라면 박스 위에 촛불 켜놓고 노트북 두드리면서 ‘최고의 언론탄압 국가’라고 하던 시절이었다. 취재지원 선진화가 예고돼 있는 상황에서 대변인을 맡게 되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을 많이 했다. 참여정부가 하도 많이 거두절미 왜곡을 당하니까 그걸 좀 막을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다가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생방송을 했다. 오후 2시30분에 지상파 방송사 카메라 다 켜놓고 사전 각본 없이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를 했다. 그걸 퇴임 전전날까지 했다. 노출이 많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샘물교회 사건’이 있었다. 그때 스무 분이 넘게 납치됐기 때문에 청와대에 상황실이 차려졌다. 국방부 장관, 국정원장, 외교부 장관이 매일 회의를 했고 그 상황을 청와대 대변인이 브리핑했다. 모든 언론이 24시간 체제였고 하루에도 몇 번씩 제 브리핑이 나갔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제가 대변인을 제일 오래 한 것으로 기억하게 된 것 같다. 사실은 윤태영 대변인이 1년씩 두 번을 했다. 그래서 윤 대변인이 굉장히 억울해했다(웃음). 참여정부의 진정한 대변인은 윤태영이고, 저는 그저 노출이 좀 많았을 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입 구실을 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악역을 담당해야 하고 온갖 언론으로부터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내는 측면도 있었다. 생중계되는데 ‘모른다’고 할 수 없으니 최대한 공부해 성실한 답변을 해야 했다. 그런데 어떻게 답변을 해도 문제가 되는 질문이 있다. 가령 이런 질문이다. “지금 주식 상황이 안 좋다. 청와대가 대책이 있느냐?” 이런 질문은 정말 곤혹스럽다. 청와대가 일상적으로 주식시장에 개입하지 않는다. 개입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문제다. 어떻게 말해도 그날 오후의 주식 시황이 달라져버리니까. 그런 질문을 하는 기자들이 가끔 있었다. 문제가 되지 않게 그런 질문을 어떻게 피해나갈 것인가 하는 게 간단치 않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연설이나 인터뷰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굉장히 많다. 제일 유명한 연설은 독도 연설이다. 또 대선 경선 때 ‘아내를 버리란 말입니까’ 하는 연설도 기억난다. 개인적으로 제일 통쾌했던 연설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라고 제목 붙여진 2006년도 민주평통자문회의 연설이다. 민주평통자문회의는 이름 그대로 통일을 위한 시민자문단체다. 보수 진보를 떠나 많은 국민이 참여하고 있다. 그 연설 당시 분위기가 이랬다. 전시작전권을 우리가 환수해오려고 하는데 현역 장성들은 물론이고 예비역 장성 모임 등에서 전시작전권을 가져오면 안 된다고 성명을 발표하던 시절이다. 그걸 보면서 ‘우리가 북한에 비해서 전력이 우위에 선 지 20년이 지났고, 그 격차가 10배가 넘는데, 도대체 나 장관입네, 국방장관입네, 참모총장입네 하면서 뭐 한 거냐. 지금 이 상황에서도 우리가 전시작전권 갖지 못하고 북한과 중국을 어떻게 떳떳하게 대하겠느냐’라는 얘기를 호통치듯이 연설을 하셨다. 원고가 없는 연설이었다. 거의 평상어를 섞어가며 연설하셨는데, 저는 그 연설이 가장 속 시원하고 감동적이었다.
학생운동을 한 이후 학원 강사로 일할 때 노무현 의원이 직접 찾아와 ‘같이 일하자’고 했다던데.
학생운동 하고, 노동운동 하다가 파업 주도해 구속되고. 먹고살아야 하니까 수원에서 학원 강사로 일했다. 백수로 살다가 오래간만에 돈을 좀 벌 때였다. 1988년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주례를 봐주셨다. 그 이후로는 TV에서만 뵙고, 거의 못 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광재씨랑 같이 집 앞에 다 왔다’고 연락이 왔다. 서울에서 수원까지 오셔서 지금 들어간다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거두절미하고 “내일부터 나랑 일하세” 이렇게 얘기하시더라.

그때 나는, 어떻게 보면 제도 정치권 내에서 사회개혁을 이끌어가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활약 자체가 그런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런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엄두를 못 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와서 제의를 하시니. 그 자리에서 흔쾌히 “감사합니다”라고 말씀드렸다. 학원을 정리하고 의원실로 출근했다. 그때 국회의원실 보좌관 정수가 5명이었는데, 노무현 의원실에는 지구당까지 포함해 열몇 명이 일했다. 보좌관 다섯 명 월급을 열몇 명이 나누어 썼다. 그때 받은 월급이, 보좌관에게 공식적으로 나오는 월급의 4분의 1 정도였다. 학원 강사로 벌던 수입의 10분의 1정도로 줄었다. 월급이 갑자기 10분의 1로 준다는 건 삶이 참 암담해지는 거거든요(웃음).

그런데 제가 초야에 묻힌 대단한 현인도 아니고 능력자도 아닌데, 좋게 보시고 같이 일하자고 수원까지 와주셨다. 그때는 별 감사하단 생각을 안 했는데 지금 보면 특별한 배려였던 것 같다. 그런 배려만큼이나 제가 기여했나,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생각을 요즘 한다.

ⓒ연합뉴스
27일 오후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대통령 묘역 인근 문화생태공원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 탄생 70주년 봉하 음악회에서 노 전 대통령 부인 권양숙 여사(왼쪽)와 유시민 전 장관(가운데), 천호선 전 정의당 대표(오른쪽) 등이 박수를 치고 있다.

서거 10년을 맞아 노무현재단에서 ‘새로운 노무현’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는데, 어떤 의미인가?



윤태영 대변인이 작명했다. 굳이 공식적인 해석은 없다. 직관적으로 알 수도 있고, 해석이 다양할 수도 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한다. ‘노무현을 다시 새로 보자’는 의미가 있다. 지난 1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정쟁의 소재이자 공격의 대상이었나. 우리 입장에선 그것을 방어하거나 왜곡을 바로잡는 데 상당히 많은 시간을 보냈다. 지금도 그렇다. 그런 점을 바로잡아야 되겠다. 또 보수나 진보 양측에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 ‘뜻은 좋았으나 결국 실패한 대통령 아니냐’는 생각을 많이 한다. 저는 성공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실패한 건 아니다. 그런 점도 바로잡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10년 동안 추모 중심이고, 방어와 바로잡는 데 초점을 두었다면 이제는 노무현 대통령을 있는 그대로 알리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객관적으로 이루어지게 하자는 거다. 저는 ‘새로운 노무현’을 그런 뜻으로 받아들인다.
또 50년 뒤에, 100년 뒤에 노무현은 어떻게 기억될까 이런 생각을 해본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바른 이해, 기록, 기억, 평가를 남길 필요가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민주주의와 통합은 어떤 것이었나?


통합 하면, “통합? 에이~ 뭐 싸움꾼이었지”라고 하는 분들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일생 중에 상대적으로 덜 조명받는 기간이 있다. 3당 합당 이후 꼬마민주당을 창당한 때부터 김대중 대통령의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기 전까지. 노무현 대통령은 사실 제3의 길을 걸으려고 했다. YS·DJ·JP로 상징되는 지역 구도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DJ를 굉장히 존경하지만 갈등도 있었다. 지역주의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다만 그에 앞서 정권교체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하고 민주당 이름으로 부산에서 출마했다. 그런 긴장 관계가 항상 있었다.

언론과의 관계에서도 맨날 싸움만 했다고 하는데 ‘건전 기사 수용제도’라는 것도 있었다. 언론의 비판 중에서 일리 있는 것, 정부가 받아들여야 될 것, 왜곡된 것, 설명이 필요한 것을 구별해 대응했다. 전자는 시행령, 법 개정, 정책에 반영되었고, 그 결과를 일일이 공개했다. 그런 건수가 훨씬 많다. 무조건 싸운다가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의 연설에도 나온다. ‘민주주의는 인권 존중의 사상이기도 하지만 더불어 투쟁을 통해서 분열을 통해서 통합하는 기술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통합의 기술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라고 본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런 생각을 일관되게 갖고 국정도 운영하고 정치를 했던 분이다.

참여정부 평가포럼 연설은 3시간 반짜리 연설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철학, 정치철학이 다 담겨 있다.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라는 말씀도 거기서 나온다. 길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생각을 이해하시려면 꼭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연설이다. 추천하고 싶다.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 사회 비주류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그런 대통령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최근 영화 <노무현과 바보들>이 나왔다. 거기에 보면 돌아가시기 전인 4월쯤에 녹취된 내레이션이 나온다. 봉하 사저에서 한 말씀이다. 봉하마을이 봉화산 아래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봉하에 조그만 산이 있다. “저 산은 산맥이 없어. 나는 산맥이 없어.” 이런 자기고백적인 말씀이 나온다. 1997년 이전 기준으로 민주당은 야당에 비주류였다. 야당에서도 호남 출신의 정통 엘리트가 있다. 영남 출신인 노무현 대통령은 야당에서도 비주류였다. 또 운동권 출신 중에서도 주류가 아니었다. 한국 사회에서, 야당 민주당에서, 재야운동에서도 주류가 아니었다. 3중의 비주류였다. 그런 외로움이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삶을 지배했다고 볼 수 있다.
최근에 출간된 <노무현 전집> 중 연보 편에 천호선 대변인이 서문을 썼다. 잠시 그 글을 읽어보겠다. “가신 지 10년이 됐습니다. 100년 뒤에 노무현은 어떻게 기억될까요? 10년을 돌아보며 100년을 준비합니다. 바르게 기록하고 바르게 이어가야 합니다. 보수와 진보를 뛰어넘어 그분의 삶이 온통 우리 모두의 자산이 될 것입니다. 노무현은 그렇게 당당하게 살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이런 글을 썼는지 궁금하다.

제가 노무현재단 이사, 노무현시민학교 교장, 노무현시민센터 건립추진단장을 맡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한다. 100년쯤 뒤에 노무현 대통령은 어떻게 기억될까. 그런 질문을 스스로 하면서 몇몇 떠올린 인물이 있다. 그중 하나가 광해다. 왕으로 대접을 못 받았다. 그런데 광해는 중립외교, 대동법을 통한 개혁에 나선다. 사대부의 엄청난 저항에 부딪히게 되고 결국 왕으로 불리지 못한다. 백성을 위한 개혁 그것 때문에, 사대주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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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이 7일 선관위 결정에 대한 청와대 공식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청와대는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평가포럼 강연에 대해 중앙선관위가 선거법상 공무원 중립의무 조항을 위반한 것으로 결정한 것과 관련, "매우 유감스럽고 납득하기도 어렵다"며 "법적 문제를 면밀하게 검토해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빠져 있고 자신의 땅만큼 세금 내기 싫어하는 사대부들의 엄청난 저항에 부딪히게 되고 결국은 왕이 되지 못한…. 이제 광해에 대한 생각이 바로잡히는 것 같다. 광해에 대한 대중적 복권이 이루어졌구나 싶다. 또 하나 떠올린 게 링컨 대통령이다. 링컨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유사한 점이 굉장히 많다. 일단 변호사이고, 그다음이 서민 출신이고, 별건 아니지만 둘 다 16대 대통령이다.


두 사람 다 당시에는 저평가받았다. 링컨 대통령도 100년쯤 지나서야 제대로 된 해석이 이루어졌다, 정치적 복권이 이뤄졌다고 한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으로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도 당시 언론으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지금은 그 짧은 연설이 민주주의의 교범처럼 되었다. 그걸 보면서 우리가 잘하면 노무현 대통령도 100년쯤 뒤에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겠다 싶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다 잘한 건 아니다. 성과도 있고, 실패도 있다. 때론 성과는 못 냈지만 방향을 제대로 잡아놓은 것도 있다. 이런 것을 종합적으로 살펴 ‘노무현을 새롭고 더 넓게 보자’는 생각이다. 그런 노력을 지금 해두어야 나중에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노무현시민학교 교장을 맡고 있는데, 노무현시민학교는 어떤 곳인지?


간단히 말하면 민주시민 교육을 하는 곳이다. 민주주의 교육을 하고 여러 가지 문화 교양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더 나아가 사회적 실천을 함께 도모하는 것을 뒷받침해드리는 역할도 하려고 한다. 중요한 사업 중 하나가 리더십학교다. 고위과정, 청년과정으로 나눈다. 10주, 26주 과정으로 리더십 훈련과 교육을 한다. 실천을 함께 모색하며 ‘작은 노무현’ 또는 젊은 민주주의자들을 육성하려 한다. 민주주의가 지식만으로 이뤄지는 건 아니다. 민주주의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시민의 민주주의 역량을 키우는 연습. 그런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그걸 담을 공간으로 노무현시민센터 건립을 추진 중이다.

천호선 교장에게 ‘노무현’이란?


그 질문을 굉장히 많이 받는데, 한마디로 얘기하기가 어렵다. 그분이 없었다면 오늘의 제가 있지 않았을 것이다. 제가 기억하는 노무현 대통령은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너무나 뜨거울 정도로 정의로운 분이었다.
※ 더 자세한 내용은 유튜브, 팟빵·팟티·아이튠스 팟캐스트에서 ‘시사인싸’를 검색하면 들을 수 있습니다(14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