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제정세 칼럼

"루스벨트는 진주만 기습을 미리 알았다"

일취월장7 2019. 4. 28. 10:25

"루스벨트는 진주만 기습을 미리 알았다"

[전쟁국가 미국·2강-③] 미국의 2차 대전 참전 : 겉모습과 실제
2019.04.26 05:32:05

미국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2차 대전이 세계인의 생각에 미친 치명적이고 심대한 장기적 효과"에 대해 "전쟁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계속 존속시킨 것"이라면서 이로 인해 "1차 대전의 무의미한 살육 이후 철저하게 불신됐던 전쟁이 다시 한 번 숭고한 것이 됐다"고 지적한다.

'전쟁의 정당화'야말로 2차 대전이 낳은 최악의 결과라는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미국인은 2차 대전을 '좋은 전쟁(Good War)'으로 생각한다. 미국은 군국주의 일본의 비열한 기습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참전했다, 그러나 전쟁을 통해 세계의 평화와 정의를 회복했으며 세계의 지도국가로 등극했다는 것이 2차 대전에 대한 미국의 공식 서사다. 군사력에 의한 세계 질서의 유지, 이것이 '좋은 전쟁'의 핵심 요지다. 2차 대전을 계기로 되살아난 미국의 군사주의는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1차 대전 이후 2차 대전 참전 직전까지 대다수 미국인들은 전쟁을 혐오하고 불신했었다. 1차 대전의 경험 때문이었다. 1917년 4월 2일 참전을 결정한 윌슨 행정부는 자원병 100만 명 확보를 목표했지만 모집 공고 6주 동안 입대를 자원한 사람은 7만 3천 명에 불과했다. 결국 자원이 아닌 징병을 통해 병력을 충원해야 했다. 윌슨 행정부는 방첩법, 선동금지법 등 악법을 제정해 시민들의 반전운동을 철저히 억압하는 한편, 대대적 선전 선동을(참전 결정 직후 결성된 선전기구 CPI의 홍보 요원은 자그마치 7만 5000명이었다) 통해 국민들의 전쟁 의욕을 고취시켰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1차 대전의 실상이 드러나면서 미국인의 반전여론은 극에 달했다. 수정주의 역사가들과 의회 청문회 등을 통해 미국의 참전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JP 모건 등 대기업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고 이를 위해 무고한 미국 시민의 목숨이 희생됐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라던 1차 대전의 결과, 세계가 평화로워지기는커녕 새로운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미국인들의 강력한 반전 여론에 따라 미 의회는 1935년 이후 4차례 중립법을 제정해 미국의 해외 전쟁 참여를 막으려 했다. 이러한 미국인의 전쟁 불신은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때까지 계속됐다. 다시 말해 진주만 기습이 없었다면 미국의 참전은 지극히 어려웠을 것이다. 

이 때문에 미국 역사학자 스티븐 암브로스는 미국은 2차 대전에 '참가한(enter)' 것이 아니라 '끌려 들어갔다(pulled-in)'고 말한다. 즉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고, 나흘 뒤인 12월 11일에는 나치 독일이 미국에 선전포고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아시아와 유럽의 전쟁 모두에 뛰어들게 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0년 11월 대선에서 '전쟁 불참'을 공약으로 3선에 성공했다. 또한 진주만 기습 다음 날, 12월 7일을 '치욕의 날(Day of Infamy)'로 지칭하며 일본의 비열한 기습 공격을 강력히 비난했다. 미국은 최후의 순간까지 일본과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애썼지만 일본은 선전포고도 하기 전에 미국의 주요 군사기지를 기습하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의 여론은 일거에 반전된다. 일본에 대한 증오심으로 국민 모두가 총력전 체제로 돌입한 것이다. 평화를 위해 노력했던 미국에 대한 일본의 비열한 기습 공격, 이것이야말로 '2차 대전은 좋은 전쟁'이라는 공식 서사의 핵심 요소다.

평화를 지향했던 미국은 선의의 피해자인 반면 기습 공격을 감행한 일본은 사악한 전쟁범죄자라는 인식이 미국 국민들에게 깊이 각인됐다. 이제 미국의 참전은 완벽하게 정당하며 또한 필요한 것이 됐다. 1차 대전 이후 철저하게 불신됐던 전쟁이 다시 한 번 숭고한 그 무엇이 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참전 과정에 대한 이러한 공식 서사는 과연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것일까? 그렇다고 보기 어렵다. 진주만 기습 직후부터 지금까지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당시 미국은 강력한 경제 제재 등을 통해 일본을 전쟁으로 몰아갔다는 의견에서 진주만 기습을 사전에 알고도 고의로 방치했다는 주장까지 다양한 반론이 제시되고 있다.

이들 반론의 핵심은 과연 '진주만 공격은 미국을 속인 일본의 기만적 기습이었나?'라는 것이다. 나아가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루스벨트를 비롯한 미국의 핵심 정책 입안자들은 일본을 자극함으로써 일본이 먼저 미국을 공격하도록 도발한 것은 아닌가?' 

'미국이 일본의 비밀 암호문을 감청하고 해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을 감춤으로써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부추긴 것은 아닌가?'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막거나 방해할 수도 있었던 미군의 군사 활동을 미국의 고위 정치지도자가 고의로 저지하지는 않았는가?' 

'진주만 수정주의(Pearl Harbor Revisionism)'로 불리는 이러한 반론은 1948년 미국 역사가 찰스 비어드가 <루스벨트 대통령과 1941년 전쟁의 도래 : 겉모습과 실제에 관한 연구>를 펴내면서 본격 제기됐다. 비어드는 미국 역사학회 회장을 지낼 정도로 저명한 역사학자였으나 이 저서에서 루스벨트를 맹비난하면서 학문적으로 철저하게 매장된다.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국민적 영웅 루스벨트에 대해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인 원흉으로 비난한 대가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상당수 역사가, 논픽션 작가, 언론인들에 의해 수정주의적 반론은 계속 제기되고 있다. 태평양전쟁에 대한 최고의 논픽션 작가로 인정받는 존 톨랜드의 <치욕: 진주만과 그 이후>(1982년), 전쟁 당시 해군 병사였으며 이후 신문기자로 활동하면서 17년간 20만 건의 관련 문서를 발굴하고 암호해독 요원들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진실을 파헤친 로버트 스티네트의 <기만의 날: 루스벨트와 진주만의 진실>(1999년), 그리고 역사학자 스티븐 스니고스키의 논문 <진주만 수정주의를 옹호함>(2001년)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진주만 기습 직후부터 1946년까지 5년간 9차례 조사가(해군과 육군의 자체 조사, 의회 청문회 등) 진행된 데 더해 전쟁 후 50년이 지난 1995년에도 국방부 재조사가 진행됐을 정도로 진주만의 진실은 여전히 논란거리다.  

1995년, 진주만 군사책임자였던 허즈번드 키멀 해군 제독과 월터 쇼트 육군 중장의 유족들은 루스벨트 행정부가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관한 정보를 유독 이들에게만 전달하지 않음으로써 이들이 (진주만 방어에 태만했다는) 직무유기의 죄를 뒤집어쓰고 2계급 강등 예편 당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재조사를 통해 이들의 계급과 명예를 회복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국방부는 7개월 조사 끝에 50쪽의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유족의 요청을 기각했다. 또한 1999년에는 미 상원이 키멀과 쇼트의 명예 회복에 관한 결의안을(찬성 52, 반대 47) 채택하고, 2000년 클린턴 대통령에게 이들의 계급을 복원시켜줄 것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50여 년이 지난 후까지도 당사자 측의 이의 제기가 있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렇다면 진주만 기습의 진실은 무엇인가? (4편에 계속됩니다.)


팍스아메리카나 vs. 대동아공영권, 충돌은 불가피했다

[전쟁국가 미국·2강-④] 미국의 2차 대전 참전 : 겉모습과 실제 (중)
2019.04.27 10:31:41


진주만 기습은 일본의 사악한 전쟁 음모가 아니었다. 세계 정복이라는 거창한 야망의 시도도 아니었다. 대공황 이후 미국과 일본 두 나라의 국가이익이 충돌한 필연적 결과였다. '미국을 모델로 전 세계를 재조직'하려는 루스벨트의 구상(One-Worldism)과 중국에서 동남아에 이르는 지역을 '일본 주도의 자급자족적 제국'으로 만들려는 일본의 전략(대동아공영권)은 양립할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됐다는 점이다. 이로써 일본은 '침략자'로 규정됐고, 미국은 정당한 방어 전쟁이라는 명분을 갖게 됐다. 그렇다면 왜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했을까?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미국이 완전한 굴복, 아니면 전쟁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만주 침략에서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본다.

미국은 스페인전쟁 이후(1899년) '문호개방'의 원칙에 따라 세계 전체를 자신의 시장으로 만들려 했다. 미국 경제는 이미 1890년대부터 세계 최강이었다. 끝없이 생산되는 농산물과 공산품을 처분하기 위해서는 세계 전체가 필요했다. 반면 일본은 기존 식민지 조선과 대만에 중국과 동남아를 더해 자신의 독점적 경제권을 만들려 했다. 대공황을 맞아 자본주의 열강이 자유무역을 포기하고 자신만의 배타적 경제권 형성을 통해 각자도생을 도모하는 상황에서 대동아공영권은 일본의 유일한 활로였다. 즉 중국과 동남아는 미국에도 일본에도 핵심적 지역이었다.  

사실 2차 대전은 대공황으로 영국 주도의 국제 자유무역 질서가 무너진 이후 미국, 독일, 일본 등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시장쟁탈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독일과 일본이 각각 유라시아의 서부와 동부를 독점적으로 지배하려 했던 데 비해 미국은 전 세계를 자신이 주도하는 단일한 경제권으로 묶으려 했다는 점이다. 독일과 일본이 군사력에 의한 특정 지역의 영토적 지배를 추구한 반면, 미국은 압도적 생산력을 바탕으로 세계 전체에 대한 경제적 지배를 지향했다. 

당초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형님(senior partner)' 노릇을 했다. 미국은 일본을 개항시켰고(1854년), 러일전쟁 당시 영국과 함께 전쟁 비용의 60%를 지원했으며, 러시아와의 휴전 협상을 중재했다. 또한 태프트-가쓰라 조약을 통해 일본의 조선 병합을 인정했다(1905년).

미일 충돌의 서막, 일본의 만주 침략 

긴밀했던 미일 관계가 틀어지게 된 계기는 1931년 9월 일본의 만주 침략이었다. 일본은 대공황 극복을 위해 만주에 괴뢰국가를 세우고 경제 침탈에 나섰다. 1931년 일본의 수출은 대공황이 시작된 1929년 대비 43%나 감소했다. 특히 일본이 직접 통치하는 조선, 대만에의 수출은 급증한 반면 그 밖의 지역에 대한 수출은 급감했다. 결국 일본에게는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경제 영토의 추가 확보가 절실했다. 그 결과가 만주 침략이다.

그러나 영국, 미국 등은 반대였다. 일본의 만주 침략 이전까지 자본주의 열강의 중국 경제 진출은 중국의 주권 존중(영토 보전)과 기회 균등을 원칙으로 했기 때문이다. 열강은 중국 정부가 국내 치안을 유지할 정도로 강하면서도 열강의 경제적 요구를 물리치지 못할 만큼 약하기를 원했다. 또한 열강의 중국 진출 기회는 공평해야 한다는 묵계가 있었다.

일본의 만주 침략은 이러한 열강들 간의 묵계를 깨고 중국 일부를 독점적으로 지배하겠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문호개방 원칙에도 어긋난다. 미국은 스팀슨 독트린에 따라 만주국을 승인하지 않았고, 국제연맹은 현지 조사를 통해 일본의 침략을 비난하고 철수를 요구했으나 이는 쇠귀에 경 읽기일 뿐이었다. 일본의 만주 점령을 철회시킬 수는 없었다. 원자재와 시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일본에게 만주 지배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핵심 국익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19세기 후반 이후 미국의 동아시아 진출은 궁극적으로 중국 시장을 노린 것이었다. 일본의 개항, 필리핀의 식민지화, 문호개방 원칙의 선언 등도 모두 중국을 겨냥한 것이었다. 세계 최대의 인구를 가진 중국은 곧 세계 최대 시장이 될 잠재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미국과 영국이 일본을 지원한 것은 러시아의 동아시아 제패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동진에 대한 방파제 역할을 하면서 미영의 대리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러일전쟁이 끝난 이후 일본은 미영의 라이벌로 부상한다. 일본이 만주를 침략한 것은 미영의 그늘에서 벗어나 동아시아의 맹주가 되겠다는 야심을 드러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의 만주 침략은 미국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었다. 미국으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사태 전개였다. 일본의 만주 침략은 미국과 일본의 국가 이익이 정면충돌하는 시발점이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경제제재나 군사력을 동원한 강경 대응을 할 수 없었다. 만주 침략 당시 국무장관 스팀슨은 국제연맹을 통한 경제제재를 추진했으나 후버 대통령의 반대로 무산됐다. 경제제재가 전쟁을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대공황에 따른 국내 상황의 급박함도 영향을 미쳤다. 

▲ 만주에 진출한 일본군들 ⓒWorld War II Database


중일전쟁 이후 미국은 군비 확장, 일본은 동아시아 제패 구상

일본은 만주 침략에서 그치지 않고 1937년 7월 중국 침략에 나섰다. 중국 전체를 독식하겠다는 것이었다. 한편으론 불가피한 대응의 측면도 있었다. 일본의 만주 침략이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공동 항일전쟁(2차 국공합작)을 촉발함으로써 만주국의 안정이 위태로워졌기 때문이다. 군사적으로 중국을 굴복시켜 일본의 만주 지배를 받아들이도록 해야 했다. 일본은 1937년 12월 난징에서 약 30만 명의 중국인을 학살하고 이듬해 난징에 친일 괴뢰정부를 세웠다. 중일전쟁의 시작으로 미국과 일본은 정면충돌에 한 발 더 다가섰다.

1938년 루스벨트는 군비 확장에 시동을 걸었다. 세계 최강의 해군 건설을 목표로 10년간 11억 달러를 투입하는 '해군법'을 제정했고, 괌에 군사기지 건설을 시작했다. 중국에 대한 군사지원을 강화하는 한편 미국 업체의 일본에 대한 항공기 및 항공기 부품의 자율적 수출 규제를 실시했다.  

한편 일본은 동아시아 신질서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1938년 11월 3일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는 장개석 정부는 중국을 대표하지 않는다면서 일본 스스로의 조건에 맞게 중국을 재건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일본, 만주국, 중국...이 세 나라가 새로운 문화를 만들 것이며 동아시아의 긴밀한 경제 통합을 이룰 것"이라는 것이다. 1940년 8월 공식화되는 대동아공영권의 시작이다. 

일본의 전략 목표는 만주를 포함한 중국 북부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중일전쟁을 조속히 마무리 짓는 것이 급선무였다. 일본 병력의 절반이 중국과의 전쟁에 투입된 데다, 1937년이 되면 무역 적자를 메우기 위해 금 보유고의 절반 가까이를 탕진할 정도로 일본의 곤경은 심각했다. 

일본은 만주 지배권에 대한 미국의 인정과 지원을 기대했다. 일본이 원하는 조건대로 중국과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미국이 중재해줄 것을 바랐다. 이를 위해 일본은 중국 남부는 미국과 영국에 양보할 용의까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기대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다. 미국의 최대 목표는 세계 전체에 대한 문호개방의 관철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한 선결과제는 중국으로부터 일본 군사력의 철수였다. 이후 미일 협상에서 미국은 언제나 일본 군대의 중국 철수를 최우선 조건으로 제시했다. 

일본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10년 가까이 피땀 흘려 쟁취한 기득권을 전면 포기하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미국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면서 대동아공영권을 완성하려 했으나 이를 달성할 방법은 없었다. 석유와 기계류 등 핵심 군수물자의 조달을 미국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전쟁 역량은 미국과의 교역 여부에 달려있었다.

딜레마에 빠진 일본 

이러한 일본의 근본적 취약점에 대해 당시 일본의 마르크스 경제학자 나와 도이치는 일본의 군사주의는 덫에 걸려들었다고 지적했다. 수출 의존적 경제 구조를 가진 일본이 군수물자 생산을 늘릴수록 민수 물자 생산과 대외 수출은 줄어들 것이며 이에 따라 서방으로부터 석유, 기계류 등 핵심물자를 사들일 재원도 부족해진다는 것이다. 석유와 기계류는 군사용이기도 하지만 산업화와 미래의 자급자족을 위한 필수 물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일본은 중국 침략과 자체 산업화를 동시에 추진할 수 없다는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나와는 일본의 중국 침략은 이러한 일본의 근본 모순을 악화시킬 뿐이라고 경고했다.

일본의 선택은 미국의 요구대로 중국 정복을 포기하고 삼류 국가라는 초라한 미래에 안주하든지, 아니면 근본적 취약점에도 불구하고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자급자족적 제국을 위해 대미 공격에 나서든지 둘 중에 하나뿐이었다. 조선을 병합할 때처럼 미국의 축복 속에 중국을 정복할 수는 없었다. 중국은 미국에도 너무나도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정통파 역사학자 조나단 어틀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국 정부 관리들은 (일본과 중국에) 타협안을 제시함으로써 전쟁을 끝낼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두 나라가 전쟁을 계속함으로써 일본 군국주의자들을 군사적 파탄으로 몰아넣는 것이 더 좋은 방책이라고 결론 내렸다." <일본과의 전쟁(1937-1941)>(Going to War with Japan) 

'하나의 세계' vs. '대동아공영권' 

중일전쟁 이후 1941년 12월 7일 미일 개전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하나의 세계' 구상과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전략은 끝내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미국과의 전쟁 없이, 즉 미국의 양해 아래 대동아공영권을 실현하려 했던 일본은 결국 대미 전쟁이라는 자멸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1939년 7월 초 일본은 장개석 정부가 있는 충칭을 폭격했다. 7월 26일 미국은 1911년 체결된 미일 무역조약의 파기를 선언했다. 파기는 6개월 후 발효됐는데, 이로써 미국은 일본에 대한 경제 제재가 가능해졌다.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데 이어 1940년 5-6월에는 프랑스, 네덜란드까지 단 6주 만에 서유럽을 제패했다. 2차 대전이 본격화되면서 미국과 일본은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미국은 태평양함대와 공군력 증강에 나서는 한편 미 역사상 최초의 평시 징집법을 제정했다. 1940년 5월, 루스벨트는 일본의 만주 침략 당시 국무장관을 지낸 재계의 거물 헨리 스팀슨을 전쟁부 장관으로 발탁했고, 7월에는 의회에 군사비 40억 달러 증액을 요청했다. 스팀슨 발탁은 총력전에 대비해 미 산업계의 협력을 얻기 위한 조치였다. 실제로 스팀슨 취임 이후 미국은 항공기 등 대대적 군수물자 생산에 돌입한다.  

또한 국가방위법도 통과됐다. 대통령 재량으로 미 방위에 필요한 군수물자의 수출을 제한할 수 있게 한 법이다. 이에 따라 항공기와 공작기계 등 40개 품목의 대일본 수출이 통제됐다. 일본 경제에 대한 목조르기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 주일 대사였던 조셉 그루는 미국의 경제 제재가 '다모클레스의 칼'처럼 일본의 머리 위에 대롱거리고 있다고 평가했다.

일본의 오산 : 3국 동맹으로 미국 견제? 

한편 전격전으로 순식간에 유럽대륙을 제패한 독일의 파죽지세에 고무받은 일본은 동아시아 제패를 추진한다. 요체는 중국의 저항을 평정하고 석유 등 자원의 보고인 동남아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미영 등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 자신이 주도하는, 아시아인에 의한 신동아시아 질서의 구축을 천명한다.  

1940년 7월 2차 고노에 내각이 성립, 외무상에 친독일 성향의 마쓰오카 요스케, 국방상에 도조 히데키가 기용됐다. 고노에 내각은 취임 직후 모든 정당을 해산했다. 전쟁을 반대하는 정치세력을 말살한 것이다. 8월 1일에는 마쓰오카 외상이 대동아공영권 추진을 공식 천명했다. (7월 30일 작성된 비밀문서에 따르면 마쓰오카는 장래 일본의 세력권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영국령 말라야,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보르네오, 태국, 버마, 인도, 호주, 뉴질랜드를 포함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갖고 있었다.) 

당시 일본에 우호적이었던 반루스벨트 성향의 고립주의자 해밀턴 피시 의원은 대동아공영권에 대해 '일본판 먼로 독트린'이라고 평가했다. 미국이 중남미에 대해 배타적 통제권을 가졌듯이 일본도 중국 및 동남아에 대해 독점적 우위를 누리려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평가로 말미암아 일본은 대미 타협의 가능성을 높게 보았을 수도 있다.

1940년 9월 22일 일본군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북부에 진입했다. 이어 9월 27일에는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3국 동맹을 맺었다.  

인도차이나 진입은 독일의 프랑스 정복으로 가능해졌다. 일본은 중국 봉쇄와 함께 동남아 진출을 노렸다. 우선은 버마를 통한 중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지원을 차단하면서 때가 되면 동남아 전역을 정복하겠다는 심산이었다(일본의 남진은 1941년 7월 단행된다).

일본은 3국 동맹을 통해 유럽과 아시아에 각각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이 주도하는 신질서를 건설하겠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속셈은 미국을 겁주기 위한 것이었다. 즉 일본이 독일과 손을 잡으면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 두 곳에서의 전쟁이라는 모험을 감수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상에서 나온 책략이었다.  

일본이 세게 나오면 미국이 일중 화해를 주선할 것이며, 일본이 원하는 조건으로 중일전쟁을 끝내고 동남아 정복에 나선다는 계산이었다. 즉 미일전쟁을 하지 않고도 동남아를 먹을 수 있다는 속셈이었지만 이는 치명적 오산이었다. 미국은 중국과 동남아를 일본에 양보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속셈 : 그랜드 에어리어와 일본 

미국의 목표는 미국이 지배하는 단일한 세계경제의 건설이었다. 당초 미국은 나치 독일이 지배하는 유럽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통합을 목표로 했다. 이른바 그랜드 에어리어(Grand Area)가 그것이다. 독일이 욱일승천 하던 1940년까지 독일 세력권을 넘볼 수는 없었다. 소련이 독일의 침공을 견뎌낼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해진 1941년 가을 이후 그랜드 에어리어는 세계 전체로 확대된다. 

2차 대전 발발 직후인 1939년 9월 12일 미 외교협회(CFR)의 제안으로 12월 출범한 '전쟁과 평화 연구'는 미국 경제의 활로를 위해서는 기존 세력권인 서반구 외에 중국과 동남아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본의 대동아공영권과 정확히 겹친다. 특히 영국령 말라야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가 일본 손에 넘어간다면 유럽의 대독일 전쟁이 위험해질 수 있었다. 이 지역의 석유, 주석, 고무 등은 영국에게도 절실하게 필요한 핵심 군수물자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동남아에 대한 일본의 팽창주의는 비독일지역에서의 미국의 우세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 위협은 "가능하다면 평화적으로, 안 되면 무력으로라도 진압되어야 했다" ('전쟁과 평화 연구' Memorandum E-B 19 1940. 10. 19) 

'전쟁과 평화 연구'의 경제.금융 그룹은 11월 23일, 독일이 패권을 차지하지 않은 지역에 대한 미국의 무제한적이고 자유로운 접근을 방해하는 일본에 맞서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를 논의했다. 

미국은 1940년 7월부터 일본이 만주국을 비롯한 중국 내 일본 군사력을 철수하지 않는 한 전쟁은 불가피하며, 동남아의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식민지를 공격한다면 이 역시 개전의 이유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일본군의 인도차이나 진입 직후인 1940년 9월 26일 미국산 고철의 대일본 수출을 금지함으로써 일본의 무기 생산에 차질을 주었다. 한편 중국에 대한 지원을 본격화해 이 해 1억 2500만 달러의 차관을 제공했다. 나아가 1941년 1월 중국에 대한 군사 지원 강화, 영국 등과 함께 동남아 방어, 일본에 대한 일부 전쟁물자의 공급 차단 등을 공식 정책으로 택했다.

▲ 1940년 베트남 동당으로 진입하는 일본군 ⓒ위키미디어 커먼스


루스벨트는 "(미국은) 무력으로 지배되는 세계의 외로운 섬으로 살아갈 수 없다"고 강조했다. 또한 미 상공회의소도 미국 기업의 중국에서의 동등한 사업 및 무역 기회를 위해 정부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중국과 동남아를 일본의 독점적 세력권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얘기다.  

1940년 9월 인도차이나 북부에 진입한 일본군이 10개월이 지난 1941년 7월 말에야 인도차이나 남부로 진격한 것은 소련의 기습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일본은 1939년 5월 노몬한 전투에서 소련군에 대패한 바 있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 40년 만의 패배였다. 남진에 앞서 북쪽 전선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1941년 3월과 4월 마쓰오카 외상이 독일과 소련을 방문했다. 당시 일본과 독일은 서로 다른 속셈을 갖고 있었다. 마쓰오카는 소련을 3국 동맹에 끌어들이려 한 반면 독일은 소련 침공을 추진 중이었다. 마쓰오카의 독일 방문에서 양측은 각자의 속셈을 드러내지 않았다. 4월 13일 마쓰오카는 스탈린과 일소 중립조약을 체결했다. 어느 일방이 타국의 침공을 받을 경우 엄격한 중립을 지킨다는 내용이었다. 조약 시한은 5년이었다. (소련은 1945년 8월 8일 이 조약을 무시하고 일본을 공격한다.)  

미국은 경악했다. 중국에 대한 무기 임대(렌드리스)를 시작하는 한편 미 공군 조종사들을 퇴역시켜 의용군 '플라잉 타이거즈'를 결성, 중국의 대일 항전을 돕게 했다. 나아가 저명한 동아시아 전문가인 오웬 라티모어 존스홉킨스대 교수를 정치고문으로 중국에 파견했다.

미일 교섭, 핵심은 일본군의 중국 철수 

한편 4월부터 코델 헐 국무장관과 노무라 기치사부로 주미 대사간에 비밀협상이 시작됐다. 미국의 요구는 중국에서의 일본군 철수, 군사 정복의 포기, 문호 개방의 준수였다. 일본이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그런데 이때까지도 노무라 대사는 '미국이 만주국을 인정할 것'이라는 오판을 하고 있었다. '문호 개방'에 대한 미국의 의지가 확고하다는 점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6월 22일 독일의 450만 대군이 소련을 침공했다. 독일의 소련 침공은 2차 대전의 분수령이다. 1939년 8월 23일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폴란드 등 동유럽을 분할 점령했던 소련이 2년도 채 안 돼 독일의 적국이 된 것이다. 유럽에서 소련이라는 군사적 우방을 얻은 미국의 입장은 강경해진 반면 일본은 혼란에 빠졌다.  

마쓰오카 외상은 자신이 일소 중립조약을 체결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을 침공하자고 주장해 일본 지도부를 경악케 한다. 마쓰오카의 주장은 1주일간의 내부 격론 끝에 기각되고(당시 시베리아에서 소련의 군사력은 일본의 2배였다) 7월 2일 인도차이나 남부로의 진격이 결정된다. 이른바 남방옵션이다. 마침내 7월 21일 일본은 남부로 진입했다.

영국 역사가 노먼 데이비스는 1930년대 후반에서 1945년까지를 국제적 조직폭력배의 전성기라고 지적했는데, 마쓰오카의 행태가 바로 이에 해당된다. 사실 1933년 미국의 소련 승인에서(일본의 만주 침략에 대한 대응) 1941년 독소 불가침조약을 파기한 독일의 소련 침공, 전통적 우방이었던 미국에 대한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이르기까지 열강의 행태는 조직폭력배와 다름없었다. 국익을 위해 야합과 배신을 서슴지 않았다.

일본의 인도차이나 점령, 미국의 강력한 대일 경제 봉쇄
 

일본의 인도차이나 남부 진격에 대해 루스벨트는 미국 내 일본 자산의 동결과 석유, 철, 고철의 전면 수출 금지로 맞섰다. 당시 미국은 일본 석유의 60%를 공급하고 있었다. 미국의 경제 제재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7월 27일 '전쟁에 가장 가까운 극단적인 공격'이며 중국에 대한 일본의 기득권을 무효화하기 위한 조치라고 평가했다.

또한 미 해군 작전본부장 리치몬드 켈리 제독은 대일 석유 금수 조치의 영향에 관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미국산 석유의 일본 수출 금지 조치는 즉각 일본의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 대한 침략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 석유 금수 조치는 미국에 대한 일본의 심리적 저항감에 즉각적이고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일본의 권력자들이 현재의 행동 방침을 계속 밀고 나가게 할 것이 분명하다. 또한 일본이 영국 및 네덜란드에 대해 군사 조치를 취한다면 필리핀에 대해서도 군사행동에 나설 것이 분명하며 이로써 미국은 태평양전쟁에 말려들게 될 것이다."

1941년 8월 초에 이르면 일본은 모든 전략적 원자재에 대한 거의 완벽한 통상 금지 상황에 직면한다. 여기에 일본 선박의 파나마 운하 통행까지 금지해 11월이 되면 일본 수입의 75%가 감소한다. 미국은 일본과의 전면적인 경제전쟁에 돌입했으며 그 결과 일본 경제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한편 루스벨트는 1937년 예편한 맥아더를 복귀시켜 극동사령부를 창설한다. 미국과 일본은 전쟁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일본은 8월 초부터 호놀룰루에서 고노에 총리와 루스벨트 대통령의 정상회담을 추진한다. 중국에서의 일본군 철수를 반대하는 강경 입장의 군부를 우회해 직접 담판하겠다는 취지였다. 일본은 중일전쟁이 마무리되면 인도차이나 주둔 일본 군대를 철수하는 대신 미국이 인도차이나에 대한 일본의 특수지위를 인정하고 미일 무역관계가 복원하기를 원했다.

한편 8월 9일부터 1주일간 대서양에서 처칠과 회담을 한 루스벨트 대통령은 17일 만일 일본이 무력을 사용한다면 미국은 스스로의 "권리와 이익, 안전과 안보를" 지키기 위해 즉각 "필요한 모든 조치를" 강구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미영의 대일 전쟁 방침은 사실상 이때 결정됐다. 

9월 25일 노무라 대사가 일본 측 협상안을 헐 국무장관에 전달했다. 일본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평화를 원하며, 미국이 유럽전쟁에 참여한다면 일본은 3국 동맹을 "완전히 독립적으로 해석하겠다"(즉 독일을 돕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일본이 원하는 조건으로 중일 평화를 이루기 위한 중재 역할을 미국이 해주고, 중국에 대한 군사지원을 중단한다면 일본은 중국과 공평하게 교역할 것이며 미국도 일본과의 정상적 무역관계를 복원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일본군은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할 것이며 이로써 동남아 지역에 대한 미국의 군사부담이 완화될 것이라는 게 일본의 논리였다.

10월 2일 헐 장관이 미국 측 입장을 노무라 대사에게 전달했다. 문호개방 4원칙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영토 보전, 내정 불간섭, 공평한 통상의 보장, 태평양지역 질서의 평화적 방식에 의한 변화가 그것이다. 역시 핵심은 일본군의 중국 철수였다. 정상회담은 불발됐다.

10월 16일 고노에 내각이 붕괴하고 도조 내각이 성립됐다. 11월에 이르면 미국이 일으킨 경제전쟁은 이미 일본을 결사적인 국면으로 몰아넣었다. 일본의 수입이 75%나 감소한 것이다. 물자 부족으로 설탕, 휘발유, 고무 등은 1년 이상 배급제를 실시하고 있었다. 도고 시게노리 신임 외상은 조셉 그루 대사에게 "이러한 종류의 경제적 압박은 실제 전쟁보다도 더 국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고 하소연했다.  

11월 20일 일본이 최후의 제안을 내놓았다. 1941년 7월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자, 즉 인도차이나 남부로 진격한 일본군을 철수시킬 테니 미국의 경제제재를 풀어달라는 것이었다. 11월 26일 미국의 답변(Hull Note)은 "중국 및 인도차이나로부터 일본의 모든 군사력 및 경찰력을 철수"한 이후에야 일본과의 교역 및 석유 수출을 재개하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일본은 12월 1일 어전회의를 통해 미국에 대한 공격을 최종 결정한다. 기습 함대는 이미 11월 26일 일본을 떠나 하와이로 가고 있는 상태였다. 

일본은 이미 9월 6일의 어전회의를 통해 10월까지 협상에 총력을 기울이되 안 되면 전쟁이라는 방침을 세워두고 있었다. 7월 미국의 석유 금수 조치로 일본의 석유는 시간이 지날수록 고갈될 터였다. 시간은 일본 편이 아니었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11월 26일 일반에 공개된 미국의 최후통첩은 7월 이후 일본의 모든 제안을(특히 11월 20일의 잠정 협정 제안)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것이었다. 미국이 7월의 경제 봉쇄 이후 4개월이 지난 11월 26일에야 최후통첩을 보낸 것은 유럽의 전황과 관련이 있다. 동부전선에서 소련이 버틸 수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졌기 때문이다(12월 5일 소련은 최초의 반격에 나선다). 당초 독일의 전격전에 의해 짧으면 6주, 길어야 3개월 안에 굴복하리라던 소련이 5개월 이상 버티면서 미국은 두 개의 전쟁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다.

1941년 11월 말까지도 "워싱턴과의 협상이 결렬되지 않고 지속되도록 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다"고 강조해왔던 도조 수상은 12월 1일 미일의 잠정적 공존을(modus vivendi) 위한 어떤 대화도 더 이상 "무용"하다는 결론을 내리며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미국은 중국으로부터의 완벽하고 무조건적인 철군, 난징의 (1938년 일본이 세운 친일) 중국 정부에 대한 인정의 철회, 그리고 삼국동맹의 사문화를 요구했다. 이것은 우리 제국의 위엄을 무시하고 우리가 중국 사태의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것도 불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제국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외교를 통해서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해졌다." 

10월 하순 이후 미일 교섭을 이끌었던 도고 시게노리 외상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미국의 일본에 대한 정책은 일관되게 우리의 변함없는 정책인 동아시아의 신질서 수립을 위협하는 것이었다고 믿는다. 만일 우리가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우리 제국의 국제적인 위치는 만주사태 이전보다 더 낮아질 것이고 우리의 생존이 위협받는 것은 불가피하다" 

도고 외상은 임진왜란 때 납치된 조선인 도공의 후손으로 1939년 소련 대사 당시 노몬한 전투 이후 일소 휴전을 성사시킨 인물이다. 그는 3국 동맹으로 미국을 견제하겠다는 마쓰오카의 책략에 회의적이었으며 일본의 군사 행동은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전후 A급 전범으로 20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 사망한(1950년 7월 23일) 그는 옥중 수기를(한국어판 <격동의 세계사를 말한다>) 통해 다음과 같이 당시를 회고했다.

"(미일) 교섭을 성사시키는 유일무이한 방법은 미국의 요구를 전부 수용하는 데 있었다. 말하자면 만주사변 이전부터 여러 해에 걸친 희생을 전부 수포로 돌리는 일이었음은 물론 대륙에서 전면적인 퇴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바꿔 말해 패전 후 오늘날과 같은 지위에 둘 각오로 머리를 조아리는 데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이 이러한 것을 시행할 상황이 아니었음은 매우 명백하다. 어쨌든 당시 전면적인 퇴각까지 단행해야 한다는 생각은 정부나 민간 어디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른바 자유주의 진영에서조차도 또 원로대신 층에서도 미국의 제안을 그대로 수락한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또 "미국은 (1941년) 8월 이후 전쟁을 예정"하고 있었고, "일본이 미국의 요구를 전부 수용하지 않는 한 전쟁이며, 일본이 모든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예측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일본이 미국의 문호 개방 요구에 전면 굴복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일본은 전쟁을 통해 미국에 전면 굴복하게 된다. (5편에 계속됩니다.)


진주만, 통킹만, 그리고 9.11

[전쟁국가 미국·2강-⑤] 미국의 2차 대전 참전 : 겉모습과 실제 (하)
2019.04.29 08:00:58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6월, 영국 보수당 내각의 올리버 리틀턴 생산부 장관은 '미국이 전쟁에 말려들었다는 말은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다. 미국의 심각한 도발이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가져왔다'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미 국무장관이 해명에 나섰고, 얼마 후 리틀턴은 미국의 불만을 완화하기 위해 해명성 성명을 발표해야 했다.

미국의 2차 대전 참전 경위에 대한 의혹은 지금까지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즉 미국은 일본의 기습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참전했다는 것이 전통적 견해라면, 미국이 정당한 전쟁이라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 일본을 의도적으로 도발했다는 수정주의적 견해도 만만치 않다.

'모든 음모론의 어머니'  

미국은 진주만 기습 나흘 후인 1941년 12월 11일 해군의 자체 조사를 시작으로 1995년 국방부 조사까지 무려 10차례 이상의 조사를 벌였지만 '미국이 의도적으로 일본의 선제공격을 유도했다'는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을 확실하게 잠재울 수는 없었다. 진주만 기습의 진실에 관한 논란이 이후 케네디 암살에서 9.11테러에 이르기까지 '모든 음모론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이유다.  

진주만 기습 후 열흘 남짓부터 미 의회는 진상 조사를 요구했다. 12월 19일 야당인 공화당의 로버트 태프트 상원 원내대표는 "아마도 진주만 기습의 책임이 현지 사령관에게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지적했다. 톰 코널리 민주당 상원의원은 행정부를 지지하면서도 일본 기습 공격의 눈부신 성공은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라고 말했고 아서 반덴버그 상원의원(공화당)은 하원 해군위원회와 함께 진주만 사태에 대한 전면 조사를 촉구했다.

루스벨트는 의회가 아닌 자신이 임명한 위원회(위원장 오웬 로버츠 대법관)에 조사를 맡겼으나 의혹을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42년 1월 24일 발표된 1만 3000쪽의 위원회 보고서는 진주만 기습을 방어하지 못한 책임을 전적으로 허즈번드 키멀 제독과 월터 쇼트 장군 등 현지 군사령관의 직무유기 탓으로 돌렸다. 루스벨트, 스팀슨, 마셜 등 정부와 군부 지도자에게는 면죄부를 준 것이다. 

이에 대해 키멀의 전임자였던 제임스 리처드슨 제독은 "이제까지 발표된 정부 보고서 중 이처럼 불공정하고 부당하며 부정직한 문서를 본 적이 없다. 조사위원들이 명예를 아는 사람이라면 최대한의 유감과 최대한의 수치를 느껴야 마땅할 것"이라고 강력 반발했다.

태평양함대를 진주만으로 옮긴 이유는? 

그는 1940년 5월 미 해군 함대의 본거지를 본토의 샌디에이고에서 하와이 진주만으로 옮긴 데 대해 반대하다 퇴역 당한 인물이다. 태평양함대는 1940년 4월 연례 합동 훈련을 위해 진주만으로 이동한 이래 샌디에이고로 귀환하지 않았다. 루스벨트는 5월 15일 태평양함대의 상당 기간 하와이 체류를 결정했는데 이때는 독일이 네덜란드, 프랑스 등을 공격할 때였다.

이후 리처드슨 제독은 루스벨트와의 두 차례 독대(7월과 10월)에서 함대의 샌디에이고 귀환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다음해 2월 예편 당했고 후임에 키멀 제독이 임명됐으며 태평양함대의 진주만 이전은 공식화됐다.  

10월 면담에서 리처드슨은 자신이 지난 5개월간 태평양함대의 진주만 이전에 반대한 이유로 진주만의 훈련시설 부족, 탄약 및 연료 저장 시설 부족, 인양함 수선함 등 지원 함정 부족,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병사들의 사기 저하, 건조 도크 등 수리시설 부족 등 다섯 가지를 꼽았다. 그러나 현지 사령관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앞서 7월 8일 루스벨트와 백악관에서 오찬을 하고 난 후 그는 "(대통령의 참전하지 않겠다는) 공식 발언과는 달리 (11월 대선에서) 3선을 이룰 때까지 영국이 버틴다면 참전할 각오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로버츠위원회 보고서에 대한 리처드슨 제독의 분노는 이러한 루스벨트의 이중플레이를 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루스벨트는 1940년 대선 과정에서 '해외 전쟁 불참'을 공약으로 내세우면서도 측근들에게는 "하지만 우리가 공격 받으면 우린 싸우게 될 걸. 누군가가 우리를 공격하면 그땐 해외 전쟁이 아니잖나?"라고 털어놓았다. 그는 또 "미국 국민은 자국이 공격을 당하기 전에는 유럽 전쟁 참전에 절대 찬성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재무장관 헨리 모겐소는 "(루스벨트는) 전쟁 상황으로 떠밀려 들어가길 기다리고 있다"고 적었으며 해럴드 이케스 내무장관도 "오랫동안 나는 미국이 참전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은 대일본전을 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중략) 확실히 우리가 일본과의 전쟁에 돌입한다면 불가피하게 독일과의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이른바 '뒷문으로 참전(Back Door to War)'의 논리다. (<해럴드 아이크스의 숨겨진 역사>, The Secret History of Harold L. Ickes, 1954, p.20)  

이처럼 루스벨트 행정부는 참전의 명분을 잡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던 반면 진주만 기습 직전까지 미 국민의 80% 이상은 참전에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주만 기습 전후 미국 정책담당자들의 언행을 보면 일본의 전쟁 돌입을 예상하고 기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주만 기습에 '안도감'을 느낀 스팀슨과 루스벨트 

예컨대 11월 25일 미국의 최후통첩을 일본에 보내기 하루 전날, 루스벨트는 "미국이 며칠 안에 일본과 총격전을 벌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일본의 공격이 11월 27일-12월 1일에 있을 것으로 예상하기까지 했다. 이날 전쟁부 장관 스팀슨은 백악관에서 헐, 녹스, 마셜 육군 참모총장, 스타크 해군 작전부장 등과 회합을 가진 후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문제는 어떻게 해서 일본이 먼저 공격하도록 할 것인가, 우리 편에 지나치게 큰 피해가 없이 일본의 선제공격을 유도할(maneuver) 것인가이다"  

다음 날 헐 국무장관은 미일 교섭에 관한 최후통첩(헐 노트)을 일본 측에 발송하기 직전 스팀슨 전쟁부 장관에게 '이제 나의 업무는 끝났다. 이제부터는 당신과 녹스(해군부 장관)의 업무'라고 말했다. 27일에는 미국 주재 영국 대사에게 '미일 외교가 사실상 종료하여 사태는 이제 미 육군과 해군에 위임될 것'이라고 전했다. 또한 이날 전군에 전쟁 경보를 내리면서 "만일 전쟁을 회피할 수 없다면 미국은 일본이 먼저 도발하기를 원한다"고 지시했다.

특히 스팀슨은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이 참전이 확정된 직후인 12월 9일의 일기에 "이제 일본 놈들이 하와이를 직접 공격함으로써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 (중략) 내게 처음으로 든 느낌은 우유부단의 시기가 끝나고 우리 국민 모두가 일치단결 할 수 있는 형태의 위기가 왔다는 사실에 대한 안도감이었다."라고 기록했다. 또한 이날 대국민 방송을 한 루스벨트에 대해 "이제 오랫동안 묵혔던 모든 것이 마침내 운명에 따라 그리고 일본의 공격 덕분에 결정적으로 무르익었기 때문에 마음에서 큰 짐을 덜어내고 안도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적었다.

진주만 기습에 대해 '놀라움과 분노'가 아니라 '모든 문제가 해결'된 데 대한 '안도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의 지도자들이 일본의 선제공격을 고대했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일본을 도발하기 위해 의도적 책략을 쓴 것은 아닌가라는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예컨대 마셜 육군 참모총장은 11월 15일 루스벨트를 대신해 백악관에서 7개 주요 언론사에 대해 극비 브리핑을 가졌다. <뉴욕타임스>, <뉴욕 헤럴드 트리뷴>, <타임>, <뉴스위크>, 그리고 AP, UPI, INS(International News Service) 등 3개 통신사 대표들에게 마셜은 "며칠 안에 미국이 일본과 전쟁을 벌일지 모른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는 일본에 대한 공격을 계획하고 있다"면서 일본 본토에 대한 폭격 계획을 설명했다. 마셜 장군은 자신의 전쟁 예측은 일본에서 유출된 정보에 기초하고 있다며 "우리는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알고 있고, 그들은 이러한 (미국이 일본 측 사정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말했다. 나아가 "미일 전쟁이 12월 첫 열흘 안에 발발할 것"이라고 예언하기까지 했다. 

'미국이 일본에 대한 공격을 계획'하고 있다는 이 극비 브리핑의 목적은 무엇인가? 역사가 로버트 스미스 톰슨은 브리핑 내용이 일본에 간접적으로 전달되기를 기대한 것은 아닌가라는 의혹을 제기한다. 즉 "루스벨트의 대리인으로서 마셜 장군은 누군가가 자신의 발언을 유출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의식하고 언론인들에게 브리핑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으로 하여금 미국에 공격당하기 전에 차라리 선제공격에 나서도록 자극했다는 것이다.

또한 <기만의 날>의 저자 로버트 스티네트는 전쟁 계획을 군사지도자가 아닌 언론사 대표에게 브리핑한 데 대해 두 가지 도덕적 질문을 제기한다. 

첫째, 언론인 상대로 기자회견을 여는 대신 감청을 통해 얻은 (12월 초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정보를 월터 쇼트 중장에게 알려야 했던 것 아닌가? 둘째, 언론인들은 이러한 정보를 현지의 키멀 제독과 쇼트 장군에게 알려야 했던 것 아닐까?

이에 대한 만족할 만한 대답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 진주만이 일본군에 공격을 받고 있는 모습 ⓒUS archives


진주만 수정주의 

'진주만 수정주의'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미국이 의도적으로 일본과의 전쟁을 도발했다는 것이다. 일본과 전쟁 중인 중국에 대한 군사 지원, 영국 네덜란드와의 준군사동맹, 그리고 일본에 대한 가혹한 경제 제재 등이 그 논거다. 둘째는 루스벨트가 진주만 기습을 사전에 알았으나 전쟁의 명분을 얻기 위해 (참전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현지 군사령관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의 정통 역사학계는 미국이 일본과의 전쟁을 각오했고 이왕이면 일본의 선공으로 시작되는 것을 원했다는 것까지는 인정하지만, 의도적으로 전쟁을 도발했거나 진주만 기습을 사전에 알고도 은폐했다는 점은 부정한다. 수정주의자 중에서도 전자는 주장하지만 후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학자들도 있다. '진주만 기습 은폐'는 가장 극단적인 수정주의에 속한다. '진주만 수정주의'는 정계든 학계든 미국의 제도권에서는 인정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관련 기록 등 나름 탄탄한 근거를 바탕으로 의혹을 제기하는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은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일본 근해 미 군함 파견 이유는?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은 첫째, 루스벨트가 경제 제재에서 더 나아가 일본의 군사 대응을 촉발하기 위한 군사적 도발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미국 전함을 일본 영해 내 또는 인근 해역에 파견한 것이다. 루스벨트는 이들 군함이 "이곳저곳에서 출몰"할 것이라면서 "나는 이들 군함의 출몰로 일본 놈들을 혼란시키길 원한다. 군함 대여섯 척을 잃어서는 안 되겠지만 한두 척 정도 잃는 것은 괜찮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키멀 제독은 반대했다. 그는 1941년 2월 18일 스타크 해군 작전본부장에게 보낸 전문에서 "이는 바람직하지 않은 계획이며 자칫하면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1941년 3월부터 7월 사이 3차례에 걸쳐 일본 인근 해역에 미국 군함을 보냈다. 예컨대 7월 31일 두 척의 미군 순양함이 분고 해협(혼슈와 시고쿠 사이)까지 진출했다가 일본 구축함이 출동하자 남쪽으로 사라졌다. 이에 대해 일본은 "일본 해군은 이 배들이 미국 순양함인 것으로 믿고 있다"며 항의했을 뿐 무력으로 대응하지는 않았다. (<기만의 날>, Day of Deceit, 로버트 스티네트, p.9-10) 

이어 미국의 최후통첩으로 전운이 감돌던 1941년 12월 1일, 루스벨트는 마닐라 주둔 아시아함대 토마스 하트 제독에게 '작은 함선 3척으로 일본을 정찰하라'는 임무를 내렸다. 미군 장교가 지휘하고 선원은 필리핀인으로 하며 대포를 탑재해(군함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일본 군함이 동남아로 나아가는 해역에 진출하라는 것이었다.

역사가 스티븐 스니고스키는 "이처럼 사소한 군사작전을 대통령이 직접 지시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라면서 "게다가 항공기 정찰이 일반화된 마당에 18, 19세기에나 있을 법한 함선에 의한 정찰은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즉 루스벨트의 지시는 일본의 군사 대응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라는 얘기다. 

첫 번째 함선 이사벨은 12월 1일 출항했으나 무사 귀환했고(하트 제독은 군사 충돌을 우려해 루스벨트의 명령과는 달리 도발적 행동을 자제토록 했다), 두 번째 함선 라나카이가 마닐라 항을 떠나기 직전 진주만 기습이 시작됐다. 역사가 해리 엘머 반스는 만일 당시 미국 군함이 일본의 공격을 받았다면 진주만 기습을 피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진주만보다 작은 규모의 피습으로 전쟁을 시작하려던 시도가 실패했다는 것이다.

일본군 암호 해독은 언제부터인가? 

수정주의자들의 두 번째 주장은 미국이 1940년 가을부터 일본의 주요 암호 전문을 해독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일본의 전쟁 계획과 공격 지점까지 사전에 파악했으나 이같은 사실을 키멀 제독과 쇼트 장군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로버트 스티네트에 따르면 미국 정보기관은 1940년 9월말부터 10월 초에 걸쳐 일본 측 암호 해독에 성공하기 시작했다. 일본 외무성 암호 전문인 '퍼플'은 해독 완료됐고, 29개 코드로 이루어진 '가이군 안고(海軍 暗號)'는 일부 해독에 성공했지만 이 또한 1941년 4월경에는 완벽한 해독이 가능해졌다.  

스티네트는 2차 대전 당시 해군 병사 출신으로 전후 <오클랜드 트리뷴>의 기자로 일하면서 17년간 정보공개법에 따라 20만 건의 관련 문서를 확보하고 암호 해독요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러한 결론에 이르렀다.  

그가 확보한 문서에 따르면 로열 잉거솔 해군 작전본부 부본부장은 1940년 10월 4일 리처드슨 태평양 함대 사령관과 토머스 아시아 함대 사령관에 보낸 편지에서 "일본 주요 함대의 모든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게 됐으며 외무성 전문도 해독할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미 해군이 일본 해군 보급함의 암호 코드를 '99% 해독할" 정도이며 1941년 4월경이면 전함 간 교신을 비롯한 해군 암호 전체를 해독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스티네트에 따르면 루스벨트는 1941년 1월 30일부터 해독된 일본 해군의 암호전문을 보고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극비사항이었다.

이에 따라 미 정보기관은 진주만 기습 사흘 전인 1941년 12월 4일 미일 외교관계의 파기를 의미하는 "히가시노가제, 아메(동풍, 비)"라는 핵심 구절을 포착한다. 일본 외무성은 전쟁이 초읽기에 들어간 11월 19일 이른바 일기 예보 형식의 '기상 암호' 시스템을 도입해 재외 공관들에 일본 정부의 방침을 알렸는데 '동풍, 비'란 곧 전쟁을 의미했다. 또한 미국은 일본 전함 간 교신의 감청을 통해 항공모함을 비롯한 일본의 공격 함대가 진주만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움직임은 키멀 제독 등 하와이 현지 군사령관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일례로 키멀은 진주만 공격 2주일 전 하와이 북부 북태평양 해역에서 일본 항공모함에 대한 수색에 나섰으나 백악관 지시로 철수해야 했다. 그곳은 일본의 공격 함대가 항행하던 곳이었다. 

한 수정주의 역사가는 당시 키멀과 쇼트에게 △외교적 협상에서 일본에게 전쟁 또는 굴복의 양자택일을 강요한 미국의 행동 △수 백 통의 일본 암호 해독을 통해 일본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사실(루스벨트와 고위 보좌관은 전쟁을 각오했으며 곧 시작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 △하와이에 있던 일본 첩자와 도쿄와의 비밀 전문 해독을 통해 진주만이 일본 공격의 목표물임이 드러났다는 사실 등 3가지 종류의 정보가 제공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이 때문에 키멀과 쇼트 장군은 이후 일련의 청문회에서 극도로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고 한다. 

증거 은폐 

1944년 미 육군과 해군의 진주만 청문회에서 미 정보기관 감청 요원들은 1941년 12월 4일 "히가시노가제, 아메(동풍, 비)"라는 메시지를 해독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1945-46년의 의회 청문회에서는 증언이 번복됐다. 당국자들은 어떤 "기상 암호" 메시지도 받은 바 없다고 주장했으며 암호 해독을 입증할 서류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한 메시지를 본 적이 있다고 증언한 많은 증인들이 이전의 증언을 철회했다. 오로지 로렌스 새포드 대위만이 이전의 증언을(즉 미국 정보기관이 '기상 암호' 메시지를 가로채 해독했고, 미 정부 내에 널리 알렸다) 고수했다. 

스티네트에 따르면 이는 정부의 조직적인 증거 은폐 때문이었다. 미 해군은 진주만 기습 나흘 후인 1941년 12월 11일 일본의 외교 및 군사 전문의 감청 내용을 기록한 서류의 파기를 지시했다. 또한 전쟁이 끝나고 2주일 후인 1945년 8월말에는 진주만 기습 이전의 모든 감청 내용을 극비(Top Secret)로 분류했다. 일반 공개를 차단한 것이다. 1945-46년의 의회 조사에서는 일본의 외교 전문만 공개했고 해군 교신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그런데 메릴랜드 주 첼튼햄의 해군 통신기지에서 감청 요원으로 근무했던 랠프 브릭스 선임 준위는 1977년 해군보안국 인터뷰에서 "히가시노가제, 아메(동풍, 비)"라는 핵심 메시지를 포착했다고 인정하면서 그러나 상부로부터 "1946년 상하 양원 합동위원회에서 그 문제에 대해 증언하지 말 것, 나아가 로렌스 새포드 대위와의 어떤 접촉도 중지하라는 상관의 지시를 받았다"고 밝혔다. 이같은 사실을 밝혀낸 존 톨랜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새포드 자신을 제외한다면 그 문제에 가장 관련이 깊은 사람은 아마도 선임준위였던 랠프 브릭스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1941년 12월 초에 '기상' 암호를 받은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미 해군의 대서양 연안 도청 시설인 M기지에서 일본의 메시지 도청 모두를 감독하도록 배치된, 유능한 실무자의 한 사람이었다. 가타가나 강사인 그는 그날 밤 "히가시노가제, 아메" 즉 "동풍, 비"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치욕: 진주만과 그 이후>Infamy : Pearl and Its Aftermath, 존 톨랜드, 1982년)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진주만 기습 직전 24시간 동안 미국 고위 당국자들의 행적이다. 일본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분명히 알았음에도 대응책 마련은커녕 하와이 현지에 경고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워싱턴 시각 12월 7일 오후 1시에 선전포고가 담긴 외교 전문을 미국 정부에 전달하며, 같은 시각에 진주만 기습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일본의 외교 전문은 모두 14개로 나뉘어져 앞의 13개는 6일 오전 6시 30분에서 10시 20분(이하 워싱턴 시각) 사이에 발송됐다. 선전포고가 담긴 마지막 조항은 다음 날인 7일 오전 3시와 4시에 두 라인으로 전송됐다.

그러나 미국은 이미 12월 6일 이른 저녁에 일본의 답신 13개를 감청해 해독했고 이 내용을 대통령을 비롯한 각 군 지도자에게 보냈다. 이 내용을 읽은 루스벨트는 측근 해리 홉킨스에게 "전쟁을 하겠다는 거군(This means war)"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선전포고가 명시된 마지막 14항이 해독된 것은 7일 아침이며 미국 주재 일본 대사가 헐 국무장관을 만나 이 문서를 전달한 것은 이날 오후 2시 20분이다. 

그러니까 미국은 이르면 12월 6일 저녁, 늦어도 12월 7일 아침에는 일본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알았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워싱턴은 하와이에 경보를 보내지 않았다. 경보를 보낼 권한을 가진 마셜 육군 참모총장은 이날 아침 내내 행방이 묘연했다(일요일이라 평소처럼 승마를 했다고 주장). 마셜 장군은 정오경, 이미 일본의 공격이 시작된 뒤에 쇼트 장군에게 경보를 보냈고, 해군부는 1시 50분 키멀 제독으로부터 진주만이 일본의 공습을 받았다는 특전을 받았다.

미국은 1940년 6월 사소한 징후를 이유로 하와이에 전면 경계경보를 내린 바 있다. 그런데 그보다도 훨씬 명백한 공격 징후에도 무사태평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게다가 12월 6일에서 7일에 이르는 동안 루스벨트를 비롯해 스팀슨, 녹스, 마셜 등 고위 지도자들의 행적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이후 수많은 조사에서 이들은 당시 행적에 대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로 사태를 얼버무리려 했다. 그토록 중요한 순간의 행적이 기억나지 않는다니. 존 톨랜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본 측 메시지를 읽고 난 후 '전쟁을 하겠다는 거군'이라고 말한 대통령이 즉각 전쟁부와 해군부 장관을 비롯해 육군, 해군 지휘관을 소집하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나? 프랭크 녹스 해군부 장관의 절친한 친구인 제임스 스탈만은 1973년 켐프 톨리 제독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녹스 장관이 1941년 12월 6일 밤 백악관에서 대통령을 비롯해 스팀슨 전쟁부 장관, 육군과 해군 주요 지휘관인 마셜 장군과 스타크 제독, 그리고 대통령의 최측근 해리 홉킨스와 함께 있었다는 말을 녹스 본인으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이들 모두는 곧 다가올 사태, 그들이 이미 예견했던 그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진주만 기습이었다." (<치욕: 진주만과 그 이후>Infamy : Pearl and Its Aftermath, 존 톨랜드, 1982년)

이러한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제도권, 또는 정통 학계는 대체로 다음 두 가지 이유를 들어 반박한다.  

첫째, 미국이 일본 측 암호를 해독할 수 있게 된 것은 1942년 봄부터다. 즉 진주만 기습 이후, 스티네트가 주장한 1940년 10월보다 1년 6개월 늦은 시점이다. 따라서 진주만 기습을 사전에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은폐의 여지도 없다. 

둘째, 설사 일부 암호 해독이 가능했다 하더라도 핵심 메시지는 수많은 정보의 홍수(Noise) 속에 파묻혀 있었다. 감청 요원에서 정보 책임자, 군 지휘관, 대통령에 이르는 명령계통에서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일본의 명백한 의도로 파악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9.11테러 직전 수많은 테러 징후에도 불구하고 세계무역센터 공격을 예견하지 못한 것과 같은, 선의의 '정보 실패(Intelligence Failure)'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역사학자 리처드 번스타인은 1999년 발간된 스티네트의 <기만의 날>에 대한 <뉴욕타임스> 서평에서 엄청나게 많이 제시된 문서 증거가 인상적이기는 하지만 '결정적 한 방(smoking gun)'이 없다고 일축했다.  

이에 대해 스티네트는 2000년 5월 "미국이 일본의 진주만 공격에 대해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추가로 확인시켜 주는 4천 건 이상의 통신 정보 서류들을 발굴했으며, 이 서류들은 진주만에 관한 가장 논쟁적인 두 가지 쟁점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서류들을 통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주장에 대해 반박했다. 첫째, 미국의 무선 암호 해독자들이 일본의 해군 암호를 해독하는 데 실패했다는 설과 둘째, 실제로 암호가 성공적으로 해독되고 번역되었다 하더라도 진주만으로 항해하는 일본 전함들이 무선 교신을 자제했기 때문에 진주만이 공격 목표임을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스티네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새로운 서류로 인해서 이 두 주장은 허물어진다. 2000년 정보공개법에 따라 기밀 해제된 서류들이 압도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일본의 해군력이 하와이를 향하고 있던 1941년 11월에 미국의 무선 암호 해독자들은 일본 해군의 주요 암호를 해독했고, 일본의 최고위 제독들이 일본 해군 전파로 교신했으며, 일련의 전파메시지에서 진주만이 공격 목표라는 것을 밝혔다는 점이다.



미국의 대중과 의회에 거의 60년 동안 접근이 허용되지 않았던 이 문서들은 진실을 명명백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일본의 고위 해군 제독들은 북태평양을 횡단해 진주만으로 가는 동안 무선 통신을 주고 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추적한 미군 측에 엄청난 정보를 제공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중략) 미군의 무선 암호 해독자들은 1941년에 잠들어 있지 않았다."

그 밖의 정황 증거들 

일본이 진주만 기습을 계획하고 있다는 첩보는 1941년 초부터 여러 차례 미국 정부 고위층에 전달됐다. 1941년 1월 도쿄의 페루 외교관 리카르도 슈라이버는 미 대사관의 한 외교관에게 일본의 공격 계획을 알렸고 이는 조셉 그루 대사를 거쳐 코델 헐 국무장관과 해군 정보당국에도 알려졌다. 당시 그루 대사는 이 첩보가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한 반면 해군 정보당국은 가능성을 일축했다. 

또 1941년 가을에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독립운동가 한길수가 조선과 일본의 정보원들로부터 일본이 크리스마스 이전에 진주만을 공격할 것이라는 증거를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미국 정계와 언론계 등에 이승만과 맞먹는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한길수는 10월 하순 가이 질레트 상원의원을 통해 이러한 정보를 국무부와 육군 및 해군 정보기관, 그리고 루스벨트 대통령에게까지 전달했다. 당시 국무부의 3인자였던 스탠리 혼벡 차관은 헐 장관에게 한길수의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메모를 보냈다.

한편 에드가 후버 FBI 국장은 진주만의 공격 대상에 대한 정보 수집 활동을 벌이고 있었던 일본 영사 기타 나고아와 스파이 모리무라 타다시를 밀착 감시했고 이들을 체포하려 했으나 루스벨트가 막았다. 당시 아돌프 벌 차관보는 "그들을 어떤 혐의로 추방하든 일단 추방하게 되면 미국이 일본 암호를 해독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이 바깥 세계에 알려질 것이기 때문에 추방은 불가능하다"며 이들의 체포를 저지했다. 

스티네트는 "FBI의 고위 관리들은 1941년 12월 7일 이전의 모리무라 타다시의 활동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고 50년 이상 주장해 왔다. 이 같은 부인은 진주만에 대한 도 하나의 커다란 은폐 공작"이라고 지적한다.  

한편 해군 정보 책임자인 앨런 커크 대령은 1941년 10월 하와이에 (일본의 공격 가능성에 대한) 경고를 해야 한다고 고집하다가 전보되었다. (<진주만 수정주의의 사례, The Case for Pearl Harbor Revisionism, 스티븐 스니고스키, ) 

마지막으로 1941년 11월 하와이에서 적십자사의 전쟁 관련 활동을 지휘하던 돈 스미스가 루스벨트로부터 '일본이 곧 하와이를 공격할 테니 비밀리에 대비하라. 그러나 하와이 군 지휘관들에게는 알리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증언이 있다. 이는 1995년 키멀과 쇼트 장군의 직무유기에 대한 국방부의 재조사 과정에서 돈 스미스의 딸 헬렌 해먼이 클린턴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혀진 내용이다. 

'진주만 기습의 진실'이 중요한 이유 

진주만 기습으로 미군 2355명이 전사하고 1143명이 부상했다. 민간인 사망은 68명 부상은 35명이다. 이 기습 공격으로 미국은 전격적으로 2차 대전에 뛰어들었으며 그 결과 독일, 일본 등 군국주의 세력을 물리치고 세계의 평화를 회복했다. 미국의 참전이 있었기에 식민지 조선의 해방도 가능했다. 따라서 미국의 참전 자체는 문제시 될 이유가 없다. 당시의 세계정세에서 미국의 참전은 불가피했다. 또한 만주, 중국 침략 등을 통해 동아시아를 무력으로 지배하려 했던 일본의 시도는 전쟁을 통해서라도 저지돼야 마땅했다.

그러나 참전에 이르는 과정에서 미국 정부의 모종의 공작이 있었다면 이는 전쟁의 정당성과 관련해 중대한 문제가 된다. 수정주의 역사가 스티븐 스니고스키는 '평화를 지향하던 미국이 일본의 불의의 일격으로 어쩔 수 없이 참전했다'는 인식은 '2차 대전은 좋은 전쟁(Good War)'이라는 미국인의 인식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인식은 이후 미국의 세계 경영에서 군사력이 핵심적 역할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미국의 제도권은 진주만의 진실에 대한 수정주의적 인식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진주만 기습의 진실'은 이후 미국의 '전쟁 만들기(War Making)'와 관련해 중대한 시사점을 제시한다. 베트남전쟁과 2003년 이라크 침공의 경우가 그러하다. 미국은 1964년 8월 통킹만에서 북베트남의 공격을 받았다는 이유로 의회의 전폭적 지지를 받아 베트남전쟁에 본격 개입했고, 2001년 9.11테러를 빌미로 (이번에는 국제사회의 거센 반대를 무릅 쓰고) 이라크를 비롯한 대중동지역의 평정에 나섰다.  

그러나 통킹만의 경우 미국과 남베트남의 도발이 먼저 있었고, 이라크는 9.11테러와 아무 관련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조직적인 정보 조작에 의해 미국의 공격 목표가 됐다. 즉 1960년대의 베트남전쟁과 2000년대의 대중동전쟁은 미국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전쟁임이 분명하다. 이 두 전쟁이 미국 국력의 쇠퇴와 국제사회의 신뢰도 저하에 결정적 역할을 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즉 2차 대전으로 세계의 패권국가가 된 미국은 베트남전쟁과 대중동전쟁을 통해 쇠락했다. 

특히 지난 2000년 미국의 네오콘 집단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PNAC)'가 '미국의 방위를 재건함(Rebuilding America's Defenses)'이라는 문서를 발표하면서 '새로운 진주만(New Pearl Harbor)'을 언급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당시 PNAC는 탈냉전 이후 미국 패권의 영속화를 위해 어떤 지역에서건 미국에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지역 패권의 등장을 막아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군사력을 대폭 증강해야 하는데, 이는 '새로운 진주만'과 같은 충격적 사태가 일어나야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결국 이들은 1년 후 9.11테러를 '새로운 진주만'으로 삼아 대중동전쟁에 나섰다.  

이들 네오콘은 진주만을 미국 패권 형성의 계기로, 새로운 진주만은 미국 패권 영속화의 기회로 인식했다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의 진실은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