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후정 인터뷰]① “‘여성은 원래 그래야만 한다’는 건 없다”
- 구민주 기자 · 정리=이준엽 인턴기자 (mjooo@sisajournal.com)
- 승인 2019.03.06 11:00
윤후정 초대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 인터뷰(上)
혼돈의 시대다. 혹자는 난세(亂世)라 부른다. 갈피를 못 잡고, 갈 길을 못 정한 채 방황하는, 우왕좌왕하는 시대다. 시사저널은 2019년 올해 창간 30주년을 맞았다. 특별기획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 등 각계 원로(元老) 30인의 ‘대한민국, 길을 묻다’ 인터뷰 기사를 연재한다. 연재 순서는 인터뷰한 시점에 맞춰 정해졌다. ⓛ조정래 작가 ②송월주 스님 ③조순 전 부총리 ④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⑤손봉호 기아대책 이사장 ⑥김원기 전 국회의장 ⑦김성수 전 대한성공회 대주교 ⑧박찬종 변호사 ⑨윤후정 초대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한다.’(헌법 36조1항) 1980년 8차 개헌이 돼서야 우리 헌법엔 처음으로 남녀평등이 명문화됐다. 이 조항은 이후 남성 중심 사회에서 차별로 싸우는 여성들에게 가장 유력한 근거가 됐다. 여성 운동사(史)에서 가장 큰 성과로 꼽히는 호주제 폐지 판결(2005)에도 주춧돌 역할을 했다. 이 짧은 한 줄은 수백 년간 기울어 있던 가족구조의 법적 종결이자 성평등 논의의 출발이기도 했다.
40년 전 개헌 당시, 평등 조항을 논의조차 않던 남성 헌법학자들의 틈바구니에서 홀로 이를 관철해 낸 인물이 있다. 윤후정 전 이화여대 명예총장이자 초대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이다. 그는 그 시기 국내에 거의 유일한 여성 헌법학자였다. “개헌을 위해 모인 자리에서 늘 난 평등에 대해 가장 강하게 주장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신문에 매일 이 내용은 하나 없고, 내가 부수적으로 언급한 다른 조항에 대해서만 실렸어요. 지금 생각해도 화가 나요. 그때도 ‘내가 남자였으면 찾아가서 기사에 대해 한바탕했을 텐데’ 생각하고 말았죠.”
2월12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한 이화학당에서 윤 전 총장을 만났다. 아흔을 바라보는 그의 나이 탓에 건강을 우려한 것도 잠시, 2시간을 훌쩍 넘은 대화 동안 윤 전 총장은 쉬는 틈 없이 문장마다 힘주어 답변을 이어갔다. 수십 년 전 일들을 더듬는데도 날짜와 지명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태어나 처음 ‘이해 못 할’ 성차별을 체감했던 어린 시절부터, 김대중 정부 당시 여성특위를 이끌며 남성 세계와 부닥쳤던 일화들을 그는 어제 일처럼 생생히 풀어놓았다.
굴곡 많던 ‘싸움의 기억’들을 모두 미소로 회상하던 윤 전 총장은 최근 성폭력 피해를 폭로하는 여성들의 ‘미투운동’을 말하며 한참 목이 메기도 했다. “오랜 세월 관념에 갇혀 있던 여성들이 마침내 들고일어난 현상입니다. 여성 스스로 더욱 현명하게 지키고 발전시켜 나가야 해요.” 견고한 전통과 싸우는 어려움을 잘 알기에, 인터뷰 동안 윤 전 총장은 오늘날 여성들에게 거듭 염려 섞인 당부를 건넸다.

열다섯에 홀로 월남길에 오르셨어요. 남한에 정착해 대학에 진학하기까지 곡절이 많았을 듯합니다.
“1945년 해방 후 열넷에 북한 원산사범학교에 입학했어요. 이듬해 어느 날 교무주임께서 아주 싱글벙글하며 나를 부르시더니, 내가 북조선 전체 여학생 중 유일하게 특별장학생으로 선정됐다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공부 열심히 하면 김일성대학에 진학해 여성 지도자가 될 수 있겠다’고도 하셨죠. 하지만 나는 그때부터 ‘아, 내가 여기 있어선 안 되겠구나’ 싶었어요. 어릴 적부터 교회를 다니기도 했고, 이 체제에서 영화를 누리고 사는 게 의미 없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혼자 월남하겠다고 하니 부모님께서 아주 놀라셨죠. 하지만 말리진 못하셨어요. 추운 겨울 산중에서 밤을 새우고 동두천·연천·철원을 거쳐 서울로 들어오게 됐습니다.”
그 후 전쟁도 겪고 피난도 경험하셨습니다. 학업은 어떻게 이어가셨나요.
“인천 쪽 친척 집에 잠시 머물기도, 우체국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바람 새는 공장에서 지내기도 했어요. 그러다 월남해 계신 내 초등학교 선생님이 찾아와 고교 진학을 도와주셨어요. 이후 광주여고를 거쳐 이화여고를 다니던 중 전쟁이 터졌어요. 부산으로 피난해 있는데, 이화여고 시절 강연을 왔던 강원용 목사님을 만나게 됐어요. 그분께 대학진학 상담을 받았어요. 무조건 이화여대를 가라고 하시는 거예요. 당시 설립된 지 1년밖에 안 된 학교에 가라니 당황스러웠지만, 어르신 판단이 나와 분명 다를 테니 따르자 해서 이화여대와 길고 긴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국내 최초 여성 헌법학자’로 불립니다. 1980년 8차 개헌 작업에 참여해 양성평등 조항을 포함시키기도 했습니다.
“그 전에도 개헌 작업에 참여를 요구받았지만 정당한 정권이 아니라고 생각해 깊게 관여하진 않았어요. 그러나 8차 때 민주화 헌법의 필요성이 대두됐고 제대로 참여하게 됐어요. 몇 사람이 모여 개헌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발표하는 식으로 진행됐어요. 평등, 독재 방지 등 그때 내가 헌법에 명시하자고 부르짖고 주장한 것들이 대부분 빠졌어요. 지금 생각해도 아쉽고 화나는 부분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머니의 대답 “여자는 그런 거란다”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총장님의 첫 ‘차별의 기억’은 무엇입니까.
“어릴 적 우리 집은 농사를 지었어요. 부모님 두 분 다 밭에 나가 일을 하셨죠. 어머니는 아침 5시에 일어나 식사를 준비하시고, 낮에 두 분이 같이 밭에 나가세요. 저녁 5시쯤 들어오시면 어머니는 또 집안일 하시고 저녁밥을 하세요. 아버지는 저녁 드시면 그대로 마을로 나가시고요. 어머니는 밤 11시 넘어 주무셨는데, 늘 ‘아이고, 다리야 허리야’ 하셨어요. 그래서 종종 어머니께 ‘왜 여자들은 이렇게 살아요?’ 물었어요. 어머니는 늘 ‘여자는 그런 거란다’라고 반복해 답하셨어요. 내 머릿속에 이 대답이 아주 오래 남았어요. 또 어느 날은 아버지가 족보를 가져오셨는데, 우리 여자 형제 셋 이름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왜 우리 이름은 없냐고 물으니 아버지는 그냥 허허 웃기만 하셨어요. 그 기억도 아주 깊게 자리 잡고 있죠. 그게 출발이었나 봐요. 언제부터 남녀가 이리 살게 됐는지 알고 싶었고 언젠가는 바로잡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정계 진출에 대한 권유도 많았을 테고 스스로 마음도 있었을 것 같은데 교육자의 길만 걸으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어릴 때부터 국회의원이 돼 우리나라 여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꿈이 있었어요. 법학과에 간 것도 판검사가 돼야 제대로 된 정치를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서였어요. 그런데 대학원에 들어가 조교 일을 하는데 어찌나 일이 많은지, 고시 공부할 시간이 도통 안 났어요. 일하는 도중에 도서관 구석 자리에 숨어 고시 공부하다가 교수님께 들켜 몇 번 야단도 맞았어요. 그때 교수님께서 정치는 안 된다, 학교에 남아 있으라 강조하셨어요. 거기에 설득당했죠. 일찍이 학부 때도 이상하게 나한텐 동급생들을 앉혀두고 강의를 진행할 기회들이 주어지곤 했어요. 이런 것들이 모여 학교를 오래 떠나지 못하게 됐죠.”
- 구민주 기자 · 정리=이준엽 인턴기자 (mjooo@sisajournal.com)
- 승인 2019.03.06 11:00
윤후정 전 이화여대 명예총장이 그나마 정치권에 가장 가까이 머무른 건 바로 1998년 김대중 정부 당시 대통령 직속 여성특위 초대 위원장을 맡게 됐을 때다. 전례 없는 열악한 조직을 갑작스레 떠안게 된 그는 직접 정부 부처를 뛰어다니며 예산을 늘리고 권한을 따냈다. 그 과정에서 영부인 이희호 여사의 응원과 지원이 큰 힘이 됐다. 여느 조직의 한 달 예산도 안 되는 1년 예산을 갖고도 윤 전 총장은 차곡차곡 여성특위의 존재감을 쌓아 나갔다. 남녀차별신고센터 개소, 여성 실업 실태 파악, 대중매체 성차별 개선 권고 등 당시 여성특위에선 현재까지 이어지는 활동들을 앞서 실행했다.
여성특위원장 임명은 당시에도 파격적이었습니다. 어떻게 특위를 맡게 되셨나요.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고 1998년 2월말, 정부 소속의 한 직원이 찾아와 3월2일 유엔 총회가 있는데, 대통령께서 나보고 거길 가라고 하셨다는 거예요. 가서 뭘 하는지, 뭘 준비해야 하는지 물었는데, 가면 총회에서 다 준비할 테지 그냥 가시면 된대요. 당황스러웠죠. 갔더니 준비는 무슨 준비예요. 4년에 한 번 각 나라에서 여성 정책의 현황을 소개하고 토론하는 자리였는데, 하나도 준비가 안 된 상태였어요. 밤새 부랴부랴 준비해 천만다행으로 잘 끝마쳤어요. 그러더니 곧장 신낙균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이 날 찾아와 여성특위원장을 하라고 하는 거예요. 안 한다고 하고 귀국했는데 이미 내가 하는 걸로 공고가 알려져 있더라고요. 그래서 하게 됐죠.”

“남녀차별금지법 폐지, 여성 의원들에 속상”
처음엔 예산도 적고 여러모로 업무를 펼치기에 한계가 많았을 것 같습니다.
“첫 출근을 하니 아무도 없는 빈 사무실에 나 혼자 떵하니 있더라고요. 비서 한 명 없이. 그래서 그때부터 한 사람 한 사람 뽑기 시작했어요. 직원 40명이 일하는 부서인데 1년 예산이 20억원이었어요. 그거 갖고 무슨 행정을 하라는 건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예산청장을 찾아가 2시간을 기다려 담판을 지었죠. 20억원이 추가돼 40억원으로 시작하게 됐어요. 그때부터 직원들이 날 많이 신뢰했어요. 내가 가만히 앉아서 명령만 하다가 나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늘 직접 돌아다니며 일을 해결하니까요.”
당시 김대중 대통령 내외의 지원이 있었나요.
“이희호 여사께서 상당히 협조적이셨어요. 여성특위 시작한 지 두어 달 후 여사께서도 참석한 한 자리에서 내가 특위의 한계를 쭉 나열했어요. 특위가 입법·집행권도 없이 자문만 하는 역할이라면 더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어요. 대통령 직속이지만 대통령이 저 멀리 계셔서 만나 뵙기 힘들다고도 했죠. 여사께서 이런 말을 쭉 받아 적으시더라고요. 다음 날 대통령께서 즉각 나를 부르셨어요. 배석한 비서실장에게 내가 요구하는 걸 다 적으라고 시키시더라고요. 그렇게 묵묵히 지원을 많이 해 주셨죠.”
여성특위의 대표적인 성과가 ‘남녀차별금지법’을 제정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어려운 점 많으셨죠.
“그때만 해도 남녀차별에 관한 법률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잘 없었어요. 그렇지만 공공사회에서 남녀차별을 없애고 평등을 보장토록 하는 아주 중요한 법이었죠. 초안을 만들면서 부처의 동의를 받는 게 참 힘들었어요. 반응도 싸늘하고 반대도 많았어요. 일단 다 남성들이었고. 법에 대한 협조를 얻기 위해 한 여자 국회의원 사무실 앞에서 직원들과 몇 날을 기다리기도 했어요. 그런데 날 보자마자 스무 살은 더 많은 내 손을 휙 뿌리치고 가더라고요. 어쨌든 매우 협조적인 의원 한두 분 덕에 법이 통과될 수 있었어요. 그때 ‘성희롱’에 대한 개념을 처음 법률에 집어넣기도 했죠. 그런데 이 남녀차별금지법이 2005년에 폐지됐잖아요. 참 여성의원들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요. 왜 그 좋은 법을 그렇게 쉽게 폐지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가고 속상해요.”
위원장 시절 군 가산점 제도를 폐지하기도 했습니다. 군 가산점 문제는 아직도 뜨거운 감자인데요.
“군 가산점제는 1961년부터 시행됐어요. 공무원시험을 칠 때, 군 전역자에게 총 점수에서 5% 가산을 해 주는 거죠. 합격이 0.1%로 좌우되는데, 5% 가산을 해 주니 여성들이 붙을 수가 있겠어요. 진작 문제라는 인식이 많았지만, 남성들이 고위직에 많으니 다들 무서워서 그냥 뒀어요. 그걸 내가 건드렸죠. 국가를 위해 희생한 남성들에겐 미안했지만, 공무원시험에서 가산점을 줄 게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대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런 취지는 다 빼고 얘기가 되니 내가 그때 욕을 많이 먹었죠.”
특위 위원장을 역임하는 동안 윤 전 총장은 끊임없이 여성부(현 여성가족부) 신설을 주장했다.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여성 정책을 주도할 주무 부처 출범은 그를 비롯한 여성계의 숙원이었다. 그의 바람은 2001년 이뤄졌다. 직원 100여 명, 예산 300억원이라는 작은 규모로 출발한 여성부는 어느덧 스무 살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그간 여성부는 잊을 만하면 여론의 도마에 오르며 존폐 위기에 시달렸다. 정무장관 체제의 한계 속에서 정권에 따라 정책 기조가 변하기도, 민감한 여성 문제에 소극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2004년 성매매 방지법, 2005년 호주제 폐지 등 성과도 있었다. 그러나 20년 전 윤 전 총장이 제기했던 여성 문제들 가운데 상당수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윤 전 총장은 지난 20년 여성 문제와, 이를 다루는 여성부를 어떻게 지켜봤을까.

2005년 호주제 폐지 판결은 상당히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호주제는 굉장히 복잡한 문제예요. 당시 호주제라는, 가족구조를 단단히 받치고 있던 큰 기둥 하나가 무너지자 남자들은 그렇게 반대하며 붙잡으려 했어요. 여성들은 폐지 소식에 만세를 불렀고요. 그 후 10년도 더 흘렀어요. 그런데 민법에선 여전히 ‘호주’라는 표현을 쓰고 있고, 여전히 가족구조에서 차별적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어요. 어떤 근본적 문제가 있는지 지금쯤 다시 한번 짚어봐야 합니다. 본래 남녀는 하나가 하나를 다스리고 한쪽이 복종하는 관계가 아니잖아요. 여성이 본인 의사에 의해 여성으로 태어난 게 아니니까요. 비단 호주제 문제뿐 아니라 이런 차별은 아주 반문화적이고 불공평한 일이죠.”
여성가족부의 지난 20년 활동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일일이 데이터를 뽑아 평가해 보지 않아 정확히 말할 순 없지만, 여성의 삶에 마음을 다해 관심 갖고 잘한 장관도 있었고 그냥 여느 업무처럼 생각하며 처리해 온 장관도 있었죠. 여성가족부가 여성의 차별 문제만을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니지만, 누가 맡든 앞으로 장관들이 여성의 삶을 맘에 잘 지니고 강한 의지를 갖고 풀어나가 줬으면 좋겠어요.”
여성부 탄생 초석 다진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

1988년 노태우 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제2정무장관실을 신설, 여성 정책을 전담토록 했다. 처음으로 국내 여성 정책 전담기구가 생겼지만, 여성계는 보다 독립적인 행정부처의 신설을 꾸준히 바랐다. 1997년 대선에 출마한 김대중 당시 후보는 이 같은 여론을 반영해 여성부 신설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여성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출범 후, 행정기구가 아닌 위원회 형태의 여성 정책 전문조직 설치를 추진했다. 그렇게 여성계의 기대 반 아쉬움 반으로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는 탄생했다.
윤후정 초대 위원장의 분투로 여성특위는 다양한 여성 정책 마련체계를 잡아나갔다. 취임과 동시에 특위에 처음 편성됐던 예산을 늘리고 전문성 갖춘 인력을 영입해 조직을 꾸렸다. 남녀차별금지법을 제정하고 오늘날 사용되는 ‘성희롱’의 정의를 처음 규정하는 등, 여성계에서 유의미한 사건으로 꼽히는 여러 성과를 남겼다. 그러나 국무회의에서 의결권이 제한되고 집행권도 주어지지 않는 등 특위의 한계는 갈수록 명확하게 드러났다. 여성계의 꾸준한 요구 속에 김대중 정부 집권 4년 차인 2001년 1월29일, 정부조직법 개정으로 마침내 여성부가 신설됐다. 초대 장관으로는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임명됐다.
직원 100여 명, 예산 300억원의 소규모로 출발한 여성부는 이후 노무현 정부 들어와 몸집을 키웠다. 2005년에는 가족업무까지 이관 받아 ‘여성가족부’라는 명칭을 새롭게 얻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성특위를 이끌면서도 꾸준히 여성부 신설을 대통령에게 요구했던 윤후정 초대 위원장은 지금까지 여성부 탄생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 그는 1년여의 특위 활동 중에도 언제든 여성부가 출범할 수 있도록 밑그림을 그리고 청사진을 마련했다. 이 때문에 그는 “앞으로 여성가족부를 이끌 장관들이 단순한 업무로서가 아닌 여성의 삶에 진심으로 관심을 갖고 일해 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 구민주 기자 · 정리=이준엽 인턴기자 (mjooo@sisajournal.com)
- 승인 2019.03.06 11:00
아직도 여성들의 사회적·경제적 진출을 제한하는 유리천장이 존재한다는 시각이 많습니다. 승진의 차별과 출산·육아로 인한 경력단절 등 이런 문제가 어떻게 해야 바뀔 수 있을까요.
“난 일단 우리 여성들이 스스로 생각을 넓고 깊게 가졌으면 좋겠어요. 수천 년 동안 남녀는 태어날 때부터 다르다,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이런 사고가 있었잖아요. 여자들도 그저 그에 따르며 가만히 있었어요. 그게 정숙한 여성의 마땅한 덕이라 생각했으니까요. 여성들은 여기에 갇혀 늘 중요한 가치들을 놓쳐왔어요. 그런데 요즘 ‘미투’처럼 여성들이 거의 처음으로 다 같이 들고일어났어요. 기존의 테제(정)를 뒤집는 ‘안티테제(반)’가 드디어 등장한 것이라 봅니다. 이게 얼마나 발전적으로 향할지, 그래서 이 많은 부조리한 구조들을 바꿀지는 여성들이 앞으로 얼마나 꾸준히 열의를 갖고 나서느냐에 달렸다고 생각해요.”
미투 현상을 한편에선 긍정적으로 보셨겠어요.
“TV 등을 통해 많이 접했는데 ‘참 용기 있는 여성들이다’ 생각했어요. 보면서 마음도 아팠고요. 그런 일들을 당했는데도 오래 말도 못 하고 가슴에 묻고선…(윤 전 총장은 목이 멘 채 울먹이며 답변을 이어갔다) 이제부터 이들이 용기 있게 살 수 있길 많은 여성들이 따뜻한 시선으로 격려해 주면 좋겠어요.”
미투 현상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도 많습니다. 여성혐오도 심각해지고 있고요.
“남성들이 자신의 오랜 영역이 줄어들고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일부 여성들에게 화살을 돌리고 있다고 봐요. 왜 진작 우리 세대, 어머니·아버지 세대에서 이걸 바로잡아주지 못했는가 안타깝기도 해요. 여성 없이 남성들이 어떻게 살아요. 반대도 마찬가지고요. 남녀는 동반자예요. 지금 서로에게 화가 잔뜩 나 있어요. 그러니 성폭력 문제가 발생해도 피해 여성에게 2차 가해를 하고 가해 남성도 사죄의 마음이 별로 없어요. 상호 협력하고 같이 힘을 합해 살아야지 지금처럼 반목해서 되나요.”
페미니즘 문화에 대한 생각은 어떠신가요.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라는 용어는 개인적으로 그리 좋아하지 않아요. ‘여성주의’ ‘여성주의자’를 부르짖고 싶진 않아요. 여성 문제 해결 주의자지, 여성주의자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여성주의자, 남성주의자가 강조되는 순간 싸움이 되고 대립이 펼쳐져요. 미국에서 한때 페미니즘이 부상했을 때도, 일반 여성운동과 여성주의 운동이 갈라진 적이 있어요. 남녀는 결국 수평적으로, 서로 동등한 위치에 서야 해요.”
여성 문제 해결에 힘을 실어줄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신가요.
“이제 내 나이 아흔이 가까워졌어요. 길게 계획해서 뭘 하고 그럴 순 없지만, 여성에게 유익한 일이 뭘까 계속 고민하고 내 선에서 실행할 수 있는 일을 찾으며 살면 좋겠어요. 이제 학교의 짐도 다 벗었고… 그런 유익한 일들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있어요.”

학생·교수·총장·명예총장까지, 일생을 동행한 이화여대
“2016년 정유라 사태, 있어선 안 될 일 일어나”
아흔을 바라보는 윤후정 전 이화여대 명예총장 삶의 8할은 이화여대와 함께했다. 이화여고 졸업 후 고 강원용 목사의 조언으로 이화여대 법학대학에 입학한 윤 전 총장은 1955년 졸업 후 전임강사를 거쳐 정교수로 재직했다. 1975년부턴 법학대학장으로 지내기도 했다. 윤 전 총장은 1990년 이화여대 사상 처음으로 교수 직선제를 통해 제10대 총장으로 선출돼 7년 가까이 역임했다.
“학교를 거쳐 나가는 여성들이 전부 자신의 능력을 한껏 발휘해 스스로 무언가를 이뤄나가며 사는 인재가 되길 바랐어요. 그러기 위해 정보화·세계화·과학화 이 세 가지를 늘 강조했어요. 1990대 초였던 그때부터 이 세 가지에 대응하지 못하면 흐름에서 지체될 수 있다고 봤어요. 인재 육성에 필요한 실질적인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대외협력처라는 부서를 신설하기도 했어요. 직접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돈을 구했고 모금운동도 하면서 그 당시 약 900억원을 모았어요.”
윤 전 총장은 퇴임 후 명예총장에 이름을 올렸고 2000년부터 10여 년간 이화학당 이사장을 지냈다. 그리고 최근까지 재단 이사를 맡으며 학교와 연을 이어갔다. 이 오랜 연으로 인해 그는 줄곧 학교의 ‘막후 실세’로 꼽히기도 했다. 2016년 터진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 부정입학 사태로 윤 전 총장은 책임을 지고 모든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우리 학교에서 결코 있어선 안 될 일이 생긴 건데, 2011년부터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난 그런 학생이 들어온 줄도 몰랐다”며 “그때 총장(최경희)에게 조만간 한번 직접 물어보려 한다. 적어도 나한텐 거짓말 안 할 테니 정확하게 무슨 일인지 들어보려 한다”고 말했다.
스스로 “학교의 짐을 이제 모두 벗은 상태”라고 말한 윤 전 총장은 2011년 이사장직에서 물러난 후, 학교에 10억원을 기부해 ‘윤후정 통일 포럼’을 출범시켰다. 오랜 소원이라던 ‘통일’에 보탬이 될 만한 일이 없을까 고심한 결과였다. 2014년 6월 1회 포럼 개최 후 매년 한 차례씩 각계 인사를 초청해 개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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