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제정세 칼럼

현재가 미래를 개입하게 두지 말아야 한다

일취월장7 2019. 3. 4. 10:39

현재가 미래를 개입하게 두지 말아야 한다

[서리풀 논평] '단기주의'의 위험
2019.03.04 09:17:22

숨 가쁘게 지나간 한 주였다. 하노이 북미회담 탓이 크지만, 한국인의 정서를 흔들기 마련인 삼일절까지 들어있었다. 그사이 야당은 지도체제를 개편했고, 말썽 많은 한유총의 자본가형 '파업'은 현재진행형이다. 아, 미세먼지는 이제 사건 축에도 끼이지 못하나?

생전 처음 보는 일이 거의 매일 생기고, 이제 익숙하겠거니 싶어도 또 생소한 사건이 닥친다. 적어도 현상적으로는 우리 사회가 여전히 '역동적'이고 변화할 가능성을 내장한 듯 보인다. "다이나믹 코리아!"는 아직 유효한 구호다. 

사람들의 반응은 역동적인 동시에 습관적이다. 극적으로 출렁이는 것은 한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음 관심으로 옮겨가고, 세상을 바꿀듯한 여론도 금방 동력을 잃는다. 나, 자아, 주체, 그 무엇이라 부르든 속도와 시간에 적응한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 북미회담도, 삼일절과 일본 문제도, 야당과 수구적 정치 행태도, 또한 유치원 파업도, 지나가리라. 다른 문제가 닥쳐 지금 문제를 치우고 몰아내는 일이 되풀이될 것이다. 우리의 관심도 금방 다른 데로 옮겨가 새로움에 열정을 다할 것이 틀림없다. 겉으로만 역동적이지, 사실은 '홈 파인 공간'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학생들이 새 학기를 시작하는 때라 역사적 사건과 '시간'을 더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현재적 삶과의 관계. 마침 통계청이 발표한 통계 한 가지. 이런 일은 어떻게 될까 묻는 사이 '현재'는 벌써 지나간 듯 보이는 좋은 예라 생각한다.  

"통계청이 27일 발표한 '2018년 출생·사망통계 잠정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출생아 수는 전년(35만7800명)보다 8.6% 감소한 32만 6900명이었다. 이는 1970년부터 관련 통계를 작성한 이래 최저치이자 30년 전(1988년 63만 명)의 반토막 수준이다. 우리나라 출생아 수는 2002~2016년 사이 15년 가까이 40만 명대를 유지했지만 2017년 처음 30만명대로 낮아진 이후 2년 연속 급감세를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지난해 합계출산율(0.98명)은 역대 최저였던 전년(1.05명)보다 더 낮아졌다."(☞관련 기사 : 출산율 0.98명…세계 저출산 기록 다시 쓰는 한국)  

당연히, 처음 듣는 소식이 아니다. 아주 가깝게는 지난해 말부터, 멀리는 십수년 전부터 어느 정도 예상되었던 사태인, 오히려 피로감을 걱정해야 할 정도다. "또 그 소리", 동어반복, 공허한 처방들.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저출산과 고령화 그 자체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나날이 지나가는 우리의 고통과 삶의 과제가 이 '구조' 변화와 무관하지 않으니 그냥 가만히 있기 어렵다. 인구 변화는 과거의 결과이면서, 미래의 조건이자 원인이다. 그것도 '거의 모든 것'을 망라하는.  

예를 들어, 유치원 교육의 공공성을 두고 논란이 있지만, 조건은 곧 바뀐다. 유치원 입학 대상인 만 3~5세 유아 수는 2018년 135만 명에서, 2021년 112만 명으로, 2025년에는 103만 명으로 줄어든다(☞관련 기사 : "국공립 유치원 40% 땐 사립 1020곳 문 닫는다"). 2025년이면 아주 먼 미래도 아니다. 정부와 민간은 무슨 준비를 어떻게 하고 있을까?

소신 수준의 공방에 근거 없는 말만 무성한 소득 불평등은 또 어떤가? 우리는 한 주전 <논평>에서 이렇게 지적했다(☞'역진 경제'에 대비하는 사회정책으로, <프레시안> '역진 경제' 시대, 문제는 일자리가 아니다, <라포르시안> 사상 최대 소득 격차가 놀랍지 않은 이유).

"우리 사회에 이만큼 노인이 많았던 적이 없고, 노인 인구 비율이 높았던 적이 없다. 가난한 노인도 단군 이래 가장 많다. 1954년 출생자가 55만 명가량, 1959년 출생자가 80만 명가량인데, 노인의 상대빈곤율은 47%가 넘는다. (…) 인구 피라미드 그림은 지금 만 60세부터 만 50세까지가 가장 두껍다. 10년, 15년 안에 이들은 노인이 되고, 빈곤율이 그대로면 절반 정도가 통계의 소득 1분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인구구조는 익숙한 한 가지 예일 뿐, 오늘 문제로 삼는 것은 바로 '미래'이다. 삶의 조건과 맥락, 본질에 관여하는 문제로, 통일은 어떻게 하고, 건강보험 재정은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가? 공항을 짓는다고 '지방'을 살릴 수 있을 것이며, '○○형 일자리'를 만든다고 지역의 미래가 보장될까? 정부는, 경제부처는, 무엇보다 '국정'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당연히, 먼 훗날 닥칠 수치와 지표가 중요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공동체 구성원이 값있고 행복하게 살 조건이 무너지는 상황이 우리의 관심이다. '미래'라는 말도 오해하지 마시라. 예를 들어, 미래사회의 구성원은 툭하면 동원되는 그 '미래 세대'가 아니다. 5년 뒤, 10년 뒤, 30년 뒤가 그리 먼가, 미래 세대는 '그들'만이 아니라 나와 너, '우리' 세대이기도 하다.

현재가 미래를 결정한다는 말은 구닥다리 격언 같지만, 그 모든 것을 흔들 변화가 진행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미래에 개입하는 현재가 말할 수 없이 답답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단기주의(short-termism)'가 거의 대부분이라는 현실.

노인 빈곤, 불평등 심화, 지방 붕괴와 소멸을 뻔히 예측하면서도, 경제와 삶을 둘러싼 구조 개혁은 말도 꺼내지 못한다. 청와대, 행정부, 경제 부처에겐 당장 다음 분기 소득과 일자리 지표를 개선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저출산이 어떻고 고령화가 어떻고 하지만, 대기업은 콧방귀만 낄 뿐이다. "지금 내 코가 석 자인 형편에…." 

단기주의는 일차적으로는 정치적 무책임, 이차적으로는 신자유주의 체제가 불러온 개인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정부와 정치의 사활적 이해관계는 미래가 아니라 현재, 그것도 정치적 현재에 있다. 여론, 지지율, 다음 선거, 다음 정권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경제 주체는 더구나 각자도생, '공동체'는 시장을 벗어나는 순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당장 살아야 하고 커지지 않으면 곧 소멸하는 것이니, 구호와 다짐, 윤리로는 현재를 이길 수 없다. 누구나 자영업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대다수 당사자에게 개혁은 고통일 뿐이다. 

정치와 경제 모두, 자기 이해관계에 충실하다는 뜻에서 합리적으로 움직이며, 바로 '시장'이 그 바탕과 틀로 작동한다. 정치와 경제가 시장 메커니즘에 충실할수록, 단기주의, 정치적 무책임, 개인주의는 '자연'의 질서이며 '합리성'이다. 구조이고 법칙이면, 개인이 어때야 한다는 해법은 소박한 구호를 벗어나기 어렵다.  

힘에 부치지만, 아직 사람을 위한 정치가 남아 있다. 우리는 정치적 주체가 유일하게 이 질서에 새로운 틈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연주의적 질서를 흔들고 재편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고유한 역할이라는 추가 설명은 중언부언에 가깝다.

우리는 그중에서도 국가권력이 핵심적인 정치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기대한다. 사회경제체제를 전환하는 일에 어떤 다른 대안이 있는가. 지금을 두고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국정 기조를 바꾸고 이에 따라 새로운 사회정책과 경제정책으로 전환하기 바란다. '지금이라도'가 아니라 '지금이야말로' 그래야 한다.  

예를 들어, 공공 일자리를 크게 늘릴 수 있을까? 소득 불평등과 일자리 축소에 대한 미래 대안으로 기본소득 도입을 검토하는 것은 어떤가? 소멸 위기를 맞아 시장이 무너지기에 이른 곳을 중심으로, 지역 단위의 포괄적 '공영' 보건의료체계를 구축하면?

현실을 탓하며, 현재가 미래에 개입하게 두지 말라. 단기주의를 벗어나 미래를 현재로 끌어오는 것, 미래가 현재에 개입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정치와 정치세력의 과제이자 능력이다. 정치의 소명이며, 마땅히 감당해야 할 도덕적 의무임을 강조한다.


복지국가로 가는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좋은나라 이슈페이퍼] 정보를 통한 모형의 편집이 필요하다
2019.03.04 09:48:50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특히 제4차 산업혁명으로 표현되는 기술혁신으로 인해 자본주의의 생산양식이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다. 전환기의 자본주의란 신자유주의적 생산방식으로부터 뭔가 ‘새로운 생산방식’으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한국 자본주의도 이미 이러한 전환기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는지도 모른다. 자본주의가 전환하고 있고 그러한 과정에서 정부가 대처하는 정책들이 제대로 된 효과들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는 근본적인 이슈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했기에 두려울 수도 있는 자본주의 전환에 대한 현상과 방향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분석이 필요하고, 이에 대한 혁신적 대처방안에 대한 논의가 폭넓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복지국가의 새로운 길 찾기 프로젝트다. 복지국가의 대안 논의에서 가장 강력한 대안은 기본소득이다. 하지만 복지국가의 전환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단순히 기본소득으로의 수렴 또는 기본소득을 만병통치약으로 간주하는 경향은 경계해야 한다. 복지국가의 새 길 찾기 프로젝트는 아주 긴 시간과 이해관계의 충돌을 동반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복지국가의 목적이 시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이러한 갈등과 충돌을 극복하는 과정은 복지국가의 새로운 길을 찾는 과정에서 의미있는 성장통으로 감수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특히 제4차 산업혁명으로 표현되는 기술혁신으로 인해 자본주의의 생산양식이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이러한 변화를 설명하는 개념들은 점차 풍부해지고 있다. 인지자본주의, 정동자본주의, 포스트 자본주의 등은 그 대표적인 예들이다. 각 개념들은 자본주의 변화를 설명하는 범위 및 내용에 차이가 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기술혁신과 정보지식의 중요성, 정보재생산에서 한계비용의 제로, 네트워크(정보의 통로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상호작용) 등으로 인해 신자유주의 하에서 작동하는 생산방식에서 뭔가 ‘새로운 생산방식’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새로운 변화는 세계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1997년 미국 언론인 케빈 켈리는 새로운 경제질서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첫째, 새로운 경제질서는 세계적이다. 둘째, 새로운 경제질서는 추상적인 것들(아이디어, 정보, 관계)을 좋아한다. 셋째, 그리고 새로운 경제는 밀도 높은 연결을 형성한다.      

자본주의에 고착화된 우리의 삶은 당연히 이러한 변화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새로운 생산양식으로서 플랫폼 경제의 출현에 따라 YouTube creator가 새로운 직종으로 떠오르고 있으며, 몇 개의 성공스토리는 그 가능성을 폭 넓게 열고 있다. 대기업들은 앞 다퉈 신산업(AI, IT, 신재생에너지 등)으로의 투자를 확대하고 있으며 기존의 제조업 중심의 대기업들은 상대적으로 뒤처지고 있는 상황이다. 기술혁신으로 가능해진 새로운 시장에서도 당연히 앞서가는 자와 뒤처지는 자로 구분될 수밖에 없다. 새로운 불평등이 출현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잘 아는 배달앱 회사들과 배달 라이더들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배달앱 회사에서 근무하는 정규직 사원들은 안정적인 임금과 풍족한 기업복지의 혜택을 누리는 반면에 실제 배달 라이더들은 상대적으로 불안정 노동을 경험하고 있다. 유튜브 크리에이터들의 경우도 몇몇 영향력 있는 크리에이터들은 고소득을 창출하지만 대부분의 많은 크리에이터들의 소득은 매우 낮은 것이 현실이다. 또한 이러한 신산업과 플랫폼 경제와 관련이 없는 기존 산업군에서 일하는 저소득 불안정 노동자들도 여전히 전체 노동자 대비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제조업 중심에서 서비스업 중심으로의 변화(탈산업화), 표준적인 노동에서 비표준적인 노동으로의 변화(비정규직화) 등의 노동시장에서의 급격한 변화는 불안정 노동자(예를 들어, 프레카리아트)의 증가를 초래하고 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복지국가는 어떻게 적응하고 있는가? 복지국가의 출현은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서 출현하는 다양한 사회적 위험에 대한 대응기제로 등장하였다. 노동시장의 불안정성, 인구구조의 변화, 자본주의 피해자에 대한 보상 등은 복지국가의 성장에 필수적인 선행요인으로서 작용하였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전환기에 올드(old)한 복지국가체제를 통한 시민들의 삶의 질을 보장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자본주의의 변환 그리고 이에 따른 복지국가의 개혁논의는 단지 일부 서구 선진국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Globalization은 이미 우리 삶 깊숙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의 자본주의의 전환과정도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고 있고 복지국가 역할과 기능 또는 구조적 변화에 대한 요구도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글은 한국 현실을 되돌아보고 뭔가 준비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즉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제기를 던지고 있다. 시장영역에서는 지속적으로 '창조' 또는 '혁신'이 돌파구의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그렇다면 복지국가 영역에서는 어떤 '혁신'을 기대할 수 있을까? 정해진 답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제기에 따른 진지한 후속 논의를 기대해 본다.     

복지국가 3.0 

데이비드 갈런드는 <The Welfare State: A very short introduction>이라는 책에서 복지국가의 역사적 발달단계를 설명하고 있다. 그 저자는 복지국가는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복지국가는 폐기되지 않고 진화되어 왔다고 설명하였다. 전후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복지국가 1.0, 신자유주의의 복지국가 2.0, 그리고 후기산업사회의 복지국가 3.0으로 설명하였다. 유럽 국가들은 오랜 전쟁에 따른 폐허를 복구하기 위해 대규모 재건사업들이 진행되었으며 그 결과물로 복지국가 1.0이 형성되었다. 전후 복구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복지국가의 발달에 영향을 미쳤고 경제성장과 맞물려 복지국가는 확고한 지지를 받으며 발전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경제위기와 신자유주의 정부들의 등장은 복지국가를 흔들어댔고 시장경제의 원칙을 더 강화시켰다. 이러한 상황은 선택·소비중심·경쟁을 강조하는 복지국가 2.0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주목할 것은 이러한 신자유주의자들의 공격에도 복지국가 핵심적인 제도들은 대부분 생존했고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경제·정치·사회적 과정들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고 이러한 변화에 복지국가들은 정책적 적응과 쇄신을 통해 지속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의 변화들은 매우 심층적이고 구조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후기산업사회로의 전환, 서비스기반 경제로의 전환, 금융위기의 세계화, 노동시장에서의 불안정 노동자의 증가, 인구사회학적인 문제 증가, 성과 가정역할의 변화, 이민문제 등의 새로운 사회적 위험은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복지국가를 거칠게 흔들고 있다. 국가별 대응과정과 결과들은 차이가 있지만, 후기산업사회에서의 복지국가 3.0은 사회투자(인간자본 증대, 생산성 개선, 노동시장 참여 확대), 개별화(대상자 중심적 개입), 그리고 성민감성(여성들과 아동들의 욕구에 대응)을 주요 전략으로 강조하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기본소득을 중심으로 한 복지국가 4.0? 

갈런드의 복지국가 설명은 복지국가 3.0에 멈춰있다. 현재의 상황을 후기산업사회로 규정하면서 그러한 경제적 사회적 상황의 변화에 따른 복지국가의 전환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만, 급진적인 전문가들은 현재의 자본주의의 전환을 좀 더 과격하게 설명하고 있다. 대표적인 개념은 포스트 자본주의이다. 포스트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내 기술의 혁신적 발전으로 인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경제체제로 정의된다. 이러한 포스트 자본주의의 가능성은 노동의 필요성을 감소시키고 노동과 임금의 연결고리를 느슨하게 만드는 정보기술의 혁명성, 독점과 희소성에서 벗어나 무한하기 때문에 시장의 가격결정 능력을 약화시키는 정보재(Information goods)의 확대, 그리고 시장의 명령과 관리자의 권위에 순응하지 않는 협동적 생산에 의한 상품과 서비스의 확대를 통해 증가하고 있다.  

Mason은 필요노동시간의 단축은 포스트 자본주의를 현실화하기 위해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구조적인 제도적 변화로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그러한 제도적 변화는 기본소득이라는 것이다. 사실 기본소득은 우파가 복지행정비용을 줄이기 위해 제안한 적도 있고, 인간의 자유권을 확보하기 위한 대안으로 좌파가 주장하기도 했다. 포스트 자본주의의 기본소득 개념은 첫째, 노동과 임금의 분리를 공식화한다는 점에서, 둘째, 평생의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과정을 촉진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기본소득의 실행과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노동가능 연령에 속하는 모든 성인은 무조건 기본소득을 받는다. 둘째, 재원은 세금으로 마련되며 실업수당은 폐지된다. 셋째, 가족수당, 장애인 보조금, 아동수당 등은 남겨두되, 그 지급인상율은 기본소득보다 낮게 설정된다. 포스트 자본주의에서는 일하지 않는 사람이 낙오자로 여겨지지 않는다. 오히려 기본소득은 영국의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표현한데로 “쓰레기 일자리”에 대한 항생제의 역할을 한다. 쓰레기 일자리는 그동안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저임금 불안정 일자리를 의미하며 이러한 노동자를 하찮게 취급하는 일자리들은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최근 핀란드에서 실시한 기본소득실험에 대한 부정적(?) 평가로 제기되는 일자리 측면에서의 긍정적 효과가 없게 나오는(예를 들어, 2019년 2월 9일자 연합뉴스 타이틀을 보면 “월 72만원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 행복도 상승·고용유발 미미”로 제시하고 있음) 것은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핀란드 정부는 2017년 1월 이 기본소득 실험을 하면서 2천명의 실업자를 임의로 선발해 2년간 매달 560유로를 지급하고 저임금 직장이나 임시직 취업 등을 독려하였다. 이러한 실험은 어찌 보면 기본소득의 충분한 이해가 없이 실업수당을 대체하기 위한 도구적 사고에 의해 도입되었고, 실제 불안정 노동자들이 경험하는 상황 그리고 노동시장을 비롯한 자본주의의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노동효과만을 고려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개인들로 하여금 저임금일자리를 찾기보다는 기본소득을 통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활동의 증가로 이어졌다면 이것이 기본소득 본연의 긍정적인 제도효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험 참가자의 행복도가 증가하였다는 것은 아주 주목할 사항이다.   

우리는 어디에 있나?   

우리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표현으로 제시되듯이 전후 엄청난 속도로 경제발전을 달성해 왔다(GDP 순위 11위). 또한 경제발전에 대한 안정장치 마련 그리고 사회적 위험에 대한 제도적 대처 필요성에 의해 한국형 복지국가는 점점 개선되어 왔다. 지난 2005년부터 2015년 사이 한국의 사회복지지출 증가율은 11.0%로 OECD 평균 5.3%의 두 배에 가깝다(그러나 한국 GDP 대비 사회복지지출 수준은 OECD 평균의 약 53.7%로 낮다). 이러한 노력에도 한국 시민들이 처한 상황은 반갑지 않은 지표들로 가득 차있다. 근로시간 과다(OECD 36개국 중 34위), 노인빈곤율 1위, 자살율 1위, 낮은 삶의 만족도 등은 경제성장은 달성하였지만 시민의 삶은 여전히 위기에 처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재인 정권의 출현은 반갑다. 문재인 정부는 대선과정에서 국가비전으로 혁신적 포용국가를 제시하였다. 박근혜 정부의 실정 그리고 시민들의 촛불혁명으로 집권하게 된 문재인 정부는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포용국가라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구상하였다. “모두를 위한 국가, 약자를 살리는 세상을 위하여”라는 생각을 구체화시키는 핵심전략으로 소득주도성장과 포용복지를 채택하였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3대 경제정책 기조로 ‘소득주도성장-공정경제-혁신성장’을 설정하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우리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 가운데 소득주도성장과 공정경제는 보다 포용적이고 따뜻한 성장, 정의로운 성장을 이루기 위한 경제성장 방법인데 비해, 경제성장의 기반을 만들어내는 것은 혁신성장에서 나온다”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좋은 취지의 비전과 정책들은 안타깝게도 현실에서 좋지 않은 성적표를 받고 있다. 최근 통계청에서 발표한 한국 사회의 양극화 추이 및 균등화 소득 5분위배율 결과들은 대표적이다. 소득1분위 근로소득은 2017년 대비 급격하게 추락하였고, 시장소득 및 처분가능소득으로 본 불평등(소득 5분위 배율)은 악화되는 상황이다. 저소득층 근로자를 위해 최저임금을 인상하고 근로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도입된 제도들이 이들의 소득을 낮추는 결과는 기대치 않은 결과(Unintended consequency)임에 틀림없다. 경제학적으로는 부정적 외부효과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에 대한 다양한 원인들이 제시되고 있다. 일차적으로 한국 노동시장에서 자영업 비율이 높은 상황에서 최저임금의 상승으로 인한 자영업자들이 임금 부담을 느껴 아르바이트를 비롯한 근로자 감소 및 근로시간 단축으로 이어진다는 설명이 있다. 이러한 설명들은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소득주도성장 및 재분배 정책들(기초연금 인상, 근로장려세제, 카드수수료 인하, 청년 구직활동지원금 및 추가 고용장려금 등)의 도입 취지 및 효과성에 관한 비판으로 이어지고 있다.    

문재인 정부 측을 변호하면 야당의 반대로 3대 경제정책 기조인 ‘소득주도성장-공정경제-혁신성장’의 법적 제도적 추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점 그리고 제도효과가 시장에서 나타나기까지 충분한 시간필요 등을 주장할 수 있다. 물론 그럴 수 있다. 특히 공정경제의 핵심 제안들이 국회에서 입법되지 않은 상황에서 단순히 최저임금(최저임금만 입법논의가 필요 없고 최저임금위원회에서 결정하면 됨)만 올린다고 저소득층의 소득이 올라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전환하고 있고 그러한 과정에서 정부가 대처하는 정책들이 제대로 된 효과들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는 근본적인 이슈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했기에 두려울 수도 있는 자본주의 전환에 대한 현상과 방향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분석이 필요하다. 이에 대한 혁신적 대처방안에 대한 논의도 폭넓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복지국가의 새로운 길 찾기 프로젝트이다.  

어디로 갈 것인가?: 복지국가의 길 찾기 프로젝트  

복지국가에서 마련한 제도적 장치들이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상황들이 누적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혁신적인 대안 구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장 자체가 괜찮은 일자리를 만들지 못하는 상황에서 정부주도의 일자리 창출정책이 언제까지 작동할 수 있을까? 창업은 강조하면서 창업관련 규제가 심해서 외국으로 옮겨 창업하는 현상이 증가하는 부정합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이런 질문들은 제도와 현실 간에 부정합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지국가라는 댐에 여러 구멍이 생긴 상황에서 몇 개의 구멍을 땜질식으로 막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자본주의의 전환에 대한 정밀하고 치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특히 이러한 자본주의의 전환이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에 따른 사회적 위험들은 어떻게 발현되는가를 분석해야 한다. 이러한 치밀한 분석에 따라 복지국가의 좌표 및 전략들을 수립해야 한다. 새로운 복지국가를 통해서 어떠한 제도적 기제가 도입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통해 복지국가의 방향에 대해서 여러 가지 대안들의 제시가 필요할 것이다.   

현재 대안들 중에서 강력한 후보는 기본소득이다. 학계 및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기본소득의 필요성 및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기본소득을 설명하는 서적들도 줄이어 나오고 있고 사회복지 및 관련 학회에서 기본소득 연구자들의 학술발표도 증가하고 있다. 앞에서 논의한 자본주의의 전환을 주장하는 전문가들도 기본소득을 옹호하고 있는 상황은 기본소득의 필연성을 강조하고 있다. 경기도를 비롯한 서울시에서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기본소득의 실험을 구상하고 실천하는 과정은 기본소득의 가능성과 관련된 논의를 발전시키고 있다. 이러한 기본소득은 단순히 하나의 제도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선택을 향상시키고 네트워킹을 강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단단한 철학에 기초한 패러다임일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도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복지국가의 전환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단순히 기본소득으로의 수렴 또는 기본소득을 만병통치약으로 간주하는 경향은 경계해야 한다.      

그렇다면 복지국가의 새로운 길 찾기 프로젝트는 누가 어떻게 해야 할까? 주지하듯이 정부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출발점은 정부차원에서의 포스트 자본주의로 불리는 자본주의의 변화 및 전환에 대한 의제설정이 될 것이다. 의제설정에 따라 치밀한 분석 및 연구 그리고 그 결과물들에 대한 논의의 장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논의의 장에는 정치 및 경제 이념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포함한 학자 및 전문가들의 참여가 있어야 한다. 또한 자본주의의 전환에 대한 분석을 추진하는 전문가와 복지국가 전문가들의 통합적 논의가 필요하다. 자본주의의 전환에 따른 적절한 복지정책은 경제와 복지의 정합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복지국가의 목적 

자본주의가 전환기에 있다. 한국 자본주의도 이미 이러한 전환기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는지도 모른다. 학자들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은 이러한 상황을 분석하는 다양한 정보들을 제시하고 있다. 복지국가의 재편 논의는 아직 파편적이다. 파편적인 결정적인 이유는 아마 자본주의의 전환에 대한 통일된(?) 해석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 논의한데로 전환된 자본주의의 모형은 완벽하게 구성되어 있지 않지만 그 핵심 뼈대(개념들)에 대한 설명들은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에게 편집기술을 요구하고 있다. 

어느 방송프로그램에서 문화심리학자인 김정운 박사가 개인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발전시키고 인생에서 재미를 즐기기 위해서는 편집역량이 중요하다고 강연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양한 정보들이 넘치는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개념들의 편집이라고 주장하는 Editology(편집학)를 제시하였다. 자본주의의 전환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집단지성을 통해서 복지국가의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편집능력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정보를 통해서 어떠한 경제모델을 구상할 것인지, 그리고 복지국가의 모형을 그려낼 지를 편집해야 한다는 것이다. 복지국가의 새 길 찾기 프로젝트는 아주 긴 시간과 이해관계의 충돌을 동반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복지국가의 목적이 시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이러한 갈등과 충돌을 극복하는 과정은 새로운 길 찾는 과정에서 의미있는 성장통으로 감수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