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김정은의 '치킨 게임'…美, 6·12 정상회담 전격 취소(종합)
한반도 정세 중대 고비…공은 다시 北으로
이민우 기자 ㅣ mwlee@sisajournal.com | 승인 2018.05.25(금) 06:37:42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5월24일(현지 시각) 북·미 정상회담을 전격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북·미 정상회담이 좌초될 위기에 놓였다. 이로써 해빙 무드에 놓여 있던 한반도 정세는 중대 고비를 맞게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을 통해 공개한 서한에서 "세계적으로 해악이 되겠지만 우리 서로를 위해 싱가포르 정상회담이 열리지 않을 것임을 이 서한을 통해 알리고자 한다"며 북·미 정상회담 취소 의사를 밝혔다.
노벨상보다 부통령 지지 택한 트럼프
트럼프 대통령의 정상회담 전격 취소는 매우 즉흥적으로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미국 소식통에 따르면, 미국은 최근 싱가포르에 정부 관계자들을 파견해 정상회담 실무 점검을 마무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불과 이틀 전 문재인 대통령과 가진 한미 정상회담 때만 해도 북·미 정상회담은 난항이 예상되는 가운데서도 일정대로 진행될 것으로 보였다. 하루 이틀 사이에 갑자기 워싱턴의 분위기가 급변한 데 따른 배경이 무엇인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5월24일(현지 시각) 공개 서한을 통해 "다음달 12일 열릴 예정이던 북·미 정상회담은 열리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 트위터
트럼프 대통령은 "당신(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보여준 시간과 인내, 노력에 대해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한다"면서도 "당신과 함께 그곳에 있기를 매우 고대했지만, 애석하게도 당신들(북한)의 최근 발언에 나타난 엄청난 분노와 공개적 적대감을 두고 현 시점에서 회담을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최근 발언'은 리비아 모델 적용 가능성 등을 거론한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을 맹비난한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의 담화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은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보도된 담화에서 펜스 부통령을 '정치적으로 아둔한 얼뜨기'라고 비난했다. 그는 "미국이 우리를 회담장에서 만나겠는지 아니면 핵 대 핵의 대결장에서 만나겠는지는 전적으로 미국의 결심과 처신에 달려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CNN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와 그의 측근들은 이 성명서에 격분했고, 강력히 대응하기를 원했다.
북한과 미국의 비공식 언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 당국자는 5월23일(현지 시각) 마이크 펜스 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정상회담이 실패할 경우, 북한이 핵전쟁을 준비할 수 있다고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은 "당신은 당신의 핵 능력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며 "그러나 우리의 핵도 매우 엄청나고 막강하기 때문에, 나는 그것들(미국이 보유한 핵무기)이 절대 사용되지 않기를 신에게 기도 드린다"고 경고성 발언을 했다.
美, 다시 대북 강경 노선으로 회귀하나
평화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던 한반도가 다시 급속도로 냉각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북·미 관계의 급작스런 회복이 위기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해 왔다. 돌발 변수들이 상존하는 가운데 급작스럽게 정상회담이 추진되면서 이런 상황이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는 시각이었다. 문제는 그 이후다. 정상회담이 취소될 경우 군사 옵션을 포함한 대북 정책이 더욱 강경해질 수 있다는 우려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이 태도를 바꾼 5월17일 이후 리비아 모델과 선을 그으면서도 "회담이 열리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선택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당장 국제사회의 반응이 우호적이지 않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이날 스위스 제네바의 유엔 군축회의에서 회담 취소 소식을 접한 뒤 "미국 대통령과 북한 지도자의 싱가포르 회담이 취소됐다는 데 깊은 우려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콘스탄틴 코사체프 러시아 상원 국제문제위원회 위원장은 "트럼프의 결정은 북한의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 뒤에 나온 근거 없는 조치"라고 비판했다. 영국 총리실 대변인은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간에 정상회담이 더 이상 예정대로 진행될 수 없다는 사실에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실제로 대북 제재를 강화하는 단계에서부터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대북 제재를 위해선 유엔 회원국의 적극적인 동의가 있어야 한다. 특히 이번 정상회담 추진 과정에서 북한과 관계를 회복한 중국은 정상회담 무산 탓을 미국에 돌리며 대북 제재에 동의하지 않고 북한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선회할 공산이 커졌다.
北 반응에 한반도 운명 달렸다
일각에서는 북·미 정상회담이 연기된 것일 뿐 완전히 무산된 것은 아니라는 조심스러운 분석도 나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아마도 기존의 회담이 일어날 수도 있고 아니면 나중에 정상회담이 열릴 수도 있다"며 대화 재개 가능성을 열어뒀다.
트럼프 대통령은 공개 서한에서 "억류됐던 인질들을 석방해 집으로 보내준 데 대해 고맙게 생각한다. 그것은 아름다운 제스처였으며,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언젠가는 당신을 만나기를 고대한다"며 "가장 중요한 회담과 관련해 마음을 바꾸게 된다면 주저 말고 내게 전화하거나 편지를 해 달라"고 언급했다. 백악관 관계자는 "북한과의 평화에 대한 희망은 여전히 있지만, 그렇게 하려면 북한은 수사(말)를 바꿀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로써 대화 재개의 선택지는 다시 북한 앞에 놓였다. 북한이 다시 화해 제스처를 취하며 대화를 이어간다면 이번 사태는 정상회담 길목의 해프닝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북한이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 장면을 취재하러 간 취재진을 억류하거나 즉흥적이면서도 강경한 반응을 내놓으면 트럼프 행정부와의 대화는 사실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꼴이 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 앞으로 공개서한을 보낸 만큼, 북한도 일단 트럼프 대통령의 서한 내용 등을 분석한 뒤 공개적인 입장을 밝힐 것으로 보인다. 이전까지의 담화보다 한층 강하게 반발할 가능성이 크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여지를 둔 상황이어서 북한이 반발의 '수위'를 어떻게 정할지가 주목되는 대목이다.
2018과 2020…김정은과 트럼프의 엇갈린 시간
북·미, 비핵화 로드맵 놓고 '동상이몽'
오종탁 기자 ㅣ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18.05.24(목) 19:01:17
'21분' 5월22일(미국 현지시간) 있었던 한·미 정상 간 단독회담 시간이다. 당초 예정된 시간은 30분이었다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돌발 기자회견'을 열면서 밀려 9분 줄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과의 단독회담 시간을 아껴 대북(對北) 메시지 전달에 집중했다. 북한 비핵화와 관련해 '일괄 타결(all-in-one)'이라는 목표를 재확인하면서도 초단기간에 최소한의 단계로 나눠서 진행할 수 있다며 타협 여지를 남겼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미국의 '타협안'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한·미 정상회담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배치되는 회의론도 만만찮다. 미국과 북한의 비핵화 시계가 워낙 다르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5월22일(미국 현지시간) 백악관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과의 단독 회담에 앞서 돌발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 연합뉴스
北, 핵실험장 폐기 강행…비핵화 의지 천명
북한은 이르면 5월24일 내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행사를 단행할 예정이다. 우리 정부와 군, 정보당국은 북한이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갱도 폭파를 위해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로 평가하고 있다.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행사는 북한이 국제사회에 표명한 비핵화 의지를 실행에 옮기는 첫걸음이다. 최근 한반도 경색 국면에도 북한이 핵실험장 폐기를 예정대로 진행하는 데서 '비핵화 방침을 무를 생각이 없다' '나름대로의 핵 폐기 일정을 갖고 있다'는 속내를 읽을 수 있다.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는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행사가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상대방(미국)에게 상응한 행동 조치를 촉구하는 선제 조치'라고 강조했다. 향후 북한이 미국과의 사전 협상 과정에서 이번 핵실험장 선제 폐기를 지렛대로 사용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상한다.
미국이 북한의 핵실험장 폐기에 상응하는 보상을 내놓을지는 미지수다. 이미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에서 사실상의 '비핵화 최종 로드맵'을 북한에 제시했다. 그는 김 위원장이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CVID)를 수용하면 정권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하고, 한국처럼 경제적 번영을 이루도록 대폭 지원할 뜻을 밝혔다. 비핵화 시기에 대해선 "일괄 타결이 좋다"며 "물리적인 이유로 인해 딱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는데, 그렇더라도 '굉장히 짧은 기간 내(over a very short period of time)'가 돼야 한다. 근본적으로 일괄 타결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를 놓고 '미국이 북한의 단계적·동시적 비핵화 방식에 보조를 맞췄다' '북핵 해법을 위한 트럼프식 모델이 제시됐다'는 해석이 쏟아졌다.
그런데 한·미 정상회담을 지켜본 북한은 5월24일 최선희 외무성 부상 담화를 통해 또 다시 불만을 표출했다. 최 부상은 "미국이 우리의 선의를 모독하고 계속 불법무도하게 나오는 경우 나는 조·미(북·미) 수뇌회담을 재고려할 데 대한 문제를 최고지도부에 제기하겠다"면서 "저들이 먼저 대화를 청탁하고도 마치 우리가 마주앉자고 청한 듯이 여론을 오도하고 있는 저의가 무엇인지, 과연 미국이 여기서 얻을 수 있다고 타산한 것이 무엇인지 궁금할 뿐"이라고 비난했다. 형식적으론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의 폭스뉴스 인터뷰 발언이 문제시됐지만, 비핵화를 둘러싼 북·미 간 엇박자가 여전함을 방증했다.
'2020년'에 맞춰진 트럼프 시계…김정은은 '당장 보상' 원해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은 한·미 정상 간 논의 결과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비핵화냐'에 대한 고민이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윤 전 원장은 "짧은 단독회담 시간 동안 한·미 정상이 주한 미군과 미 전략자산, 한·미 연합훈련 등을 어떻게 할지는 논의하지 못했던 것 같다"며 "이는 북한이 체제 보장을 이유로 제거해주길 바라는 부분인데, 우리 정부 인사들은 그게 마치 기정사실화할 것처럼 쉽게 예상하는 반면, 미국 측은 관련 언급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에 (비핵화의 반대급부로) 줄 것들에 대해 한·미가 허심탄회하게 얘기하고 있는지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앞서 미국은 비핵화의 대가로 북한의 경제적 번영을 거론하면서도 북한이 요구하는 체제 안전 보장에 대해선 공언을 자제해왔다. '김정은 위원장이 계속 통치할 수 있다' '미국의 보호를 받게 될 것'이란 식이었다.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양측은 북한 비핵화 방식과 체제 안전 보장의 구체적 내용이나 합의를 도출하지 않았다. 종전 선언을 통해 미국의 대북 군사행동에 대한 북한의 우려를 줄이는 방안 정도가 언급된 것으로 알려졌다. 리비아식 '선(先) 핵 폐기·후(後) 보상' 해법 지양, 체제 안전, 경제적 보상 등은 이미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5월17일 북한에 약속한 바 있다.
결국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의 첫 임기 마지막 해인 2020년까지 비핵화를 달성한다'는 기존 대전제 하에서 크게 움직이지 않고 있는 셈이다. 그간의 미국 정부 외교안보 핵심 인사들 발언을 종합해 보면 북·미 비핵화 협상의 골자는 트럼프 대통령의 첫 임기 사실상 마지막 해인 2020년까지 북한이 비핵화를 달성하면, 미국은 국제사회의 대북 투자와 경협을 막는 각종 제재를 해제하고 북·미 수교와 평화 협정을 체결하는 등의 내용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이 '보유 핵'과 '미래 핵'을 모두 파기하는 조치의 시한을 2020년으로 정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오른쪽)이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을 접견했다고 5월10일 보도했다. ⓒ 연합뉴스
하지만 북한에 있어 중요한 시간은 '2020년'이 아닌 체제 보장 조치를 받을 수 있는 시점이다. 북·미 정상회담 준비를 위해 두 차례 방북해 김정은 위원장을 만난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김 위원장이 비핵화에 대한 반대급부로 체제 보장과 평화 협정 체결, 미국의 경제 지원을 원했다고 23일(현지시간) 밝혔다. 무엇보다 북한이 가장 시급하게 원하는 것은 체제 보장이다. 핵 폐기 프로세스 가동과 동시에 체제 안전을 담보 받아 북·미 수교까지 무사히 이루는 게 핵심 관심사다. 정영태 북한연구소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비핵화 관련 발언(단기간 내 일괄 타결)은 북한 입장에선 전혀 새롭지도, 와닿지도 않을 것"이라며 "미국이 주한 미군 성격·기능 변화 등 실질적인 체제 보장 조치를 우선 제시하면서 과감하게 나아갈 때 북한도 가까이 다가올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런 가운데 북·미는 이번 주말 싱가포르에서 정상회담 준비를 위한 고위급 사전협의를 진행할 계획이다. 양측 고위 인사들은 비핵화와 보상의 단계 및 시한 등 회담 핵심 의제와 함께 보안 문제 등을 놓고 구체적으로 논의할 것으로 관측된다. 북·미 정상회담의 성패 혹은 제대로 열릴 수 있을지를 가늠하는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정영태 소장은 "향후 일주일이 고비"라며 "북·미가 실무선에서 확실한 접점을 찾지 못하면 정상회담이 불발될 우려도 여전하다"고 말했다.
'뒷문' 연 북한, '새판짜기' 기회는 남았다
김정은, 트럼프에 직접 편지 보내라
실무 총책임자인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불과 하루 전만 하더라도 북미 정상회담에 낙관적인 발언을 했고, 주말이나 다음 주 초에는 싱가포르에서 고위급 실무 접촉도 예정되어 있었다. 트럼프 본인도 "다음 주에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트럼프는 김정은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빌려 북미 정상회담을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민주주의와 정상간 외교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숙의 과정이 독불장군식의 기질 앞에서 질식한 셈이다.
트럼프는 왜 그랬을까? 일단 24일 북한의 최선희 외무성 부상의 단화에 자극을 받은 것은 확실해 보인다. 트럼프가 편지에서 "당신들의 가장 최근 발언에 나타난 엄청난 분노와 공개적 적대감을 볼 때, 지금 시점에서 오랫동안 계획돼온 이 회담을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느낀다"고 밝힌 것도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해준다. 아울러 최선희가 맹공을 퍼부은 마이크 펜스 부통령은 트럼프의 런닝메이트라는 점도 주요하게 작용한 것 같다.
또한 최선희의 담화 가운데 두 가지 내용이 트럼프의 눈에 거슬렸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우리도 미국이 지금까지 체험해보지 못했고 상상도 하지 못한 끔찍한 비극을 맛보게 할 수 있다"며 "미국이 우리를 회담장에서 만나겠는지 아니면 핵 대 핵의 대결장에서 만나겠는지는 전적으로 미국의 결심과 처신 여하에 달려있다"고 밝힌 구절이다. 이는 존 볼턴 백악관 안보보보좌관에 이어 펜스도 리비아의 전철 운운한 것에 대한 북한식의 익숙하지만 거친 반응이었다.
하지만 이는 트럼프의 마초 기질을 자극하고 말았다. 그는 정상과의 악수 대결이 상징적으로 보여준 힘겨루기에서 밀리는 것을 대단히 싫어한다. 올해 초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핵 단추" 발언에 "내 핵 버튼은 더 강력하고 작동도 한다"고 맞받아치기도 했었다.
이러한 기질은 트럼프의 편지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났다. "당신은 당신의 핵 능력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것이 매우 엄청나고 막강하기 때문에 나는 그것들이 절대 사용되지 않기를 신에게 기도를 드린다"고 한 것이다. 이 발언이 공개적으로 "친애하는 위원장"에게 보낸 편지에 담긴 것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노골적인 협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하나는 최선희가 "(미국이) 먼저 대화를 청탁하고도 마치 우리가 마주앉자고 청한 듯이 여론을 오도하고 있는 저의가 무엇인지"라고 말한 부분이다. 공개적으로 알려진 것은 김정은이 3월 초에 방북한 문재인 정부 특사단에 트럼프를 "가능한 빨리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고,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으로부터 이 메시지를 전달받은 트럼프가 "영구적인 비핵화를 위해 5월 이내에 만날 것"이라고 화답한 것이었다.
그런데 최선희는 "미국이 먼저 대화를 청탁"했다고 주장했고, 트럼프는 "북한이 이 회담을 요청했다고 (한국으로부터) 전달"받았다고 반박했다. 실체적 진실의 향방에 따라, '중매'에 나섰던 문재인 정부가 상당히 곤혹스러운 처지에 몰릴 수도 있는 대목이다.

▲ 24일(현지 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북미 정상회담 취소와 관련된 입장을 밝히고 있다. ⓒAP=연합뉴스
물론 이보다 더 본질적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북미정상회담에서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힘들 것이라는 판단이 바로 그것이다. 트럼프가 원하는 결과는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그리고 대단히 빠른(CVI+Fast) 비핵화'였다고 할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자신이 탈퇴를 선언한 이란 핵협정보다 더 강력한 합의도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김정은은 "단계적·동시적 조치"를 고수했고, 김계관과 최선희는 CVID에 대한 거부 방침을 분명히 했다.
공교롭게도 트럼프의 정상회담 취소 발표는 북한의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행사 직후에 나왔다. 안타깝게도 트럼프는 비핵화 여정을 향한 북한의 '행동'보다 최선희의 담화 형식으로 발표된 북한의 '말'에 경도되고 말았다. 북한에 대한 무지가 불러온 씁쓸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일단 북미 양측의 공개적인 언사는 서로에게 공을 넘기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트럼프는 김정은에게 "가장 중요한 회담과 관련해 마음을 바꾸게 된다면 부디 주저 말고 내게 전화하거나 편지해달라"고 했다.
이에 대해 김계관은 "우리는 항상 대범하고 열린 마음으로 미국측에 시간과 기회를 줄 용의가 있다"며 "아무때나 어떤 방식으로든 마주앉아 문제를 풀어나갈 용의가 있음을 미국측에 다시금 밝힌다"고 했다. 서로를 향해 대화에 나설 용의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도, 그 의사 표현을 먼저 해달라는 메시지를 던진 셈이다.
한편 김계관은 "트럼프 방식이라고 하는 것이 쌍방의 우려를 다같이 해소하고 우리의 요구조건에도 부합되며 문제해결의 실질적 작용을 하는 현명한 방안이 되기를 은근히 기대하기도 하였다"고 밝혔다. 이는 트럼프의 귀를 솔깃하게 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걸리는 대목도 있다. 트럼프는 "친애하는 위원장" 김정은에게 공개 편지를 보냈는데, 김정은은 김계관의 담화 형식으로 "위임"해 답장을 보낸 셈이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이에 대해 불쾌감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의 편지에 대해 한참 직책이 낮은 김계관이, 그것도 북미정상회담 "재고려"를 처음으로 언급한 인물의 답변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위임에 따라"는 곧 김정은의 담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트럼프는 북한의 독특한 전략 문화는 잘 모르는 반면에 인정 투쟁 욕구는 대단히 강하다. 이에 따라 북한의 답변에 트럼프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거꾸로 김정은이 트럼프를 잘 모르는 것도 매한가지라고 할 수 있다. 김계관의 담화에 담긴 것처럼 김정은은 북미정상회담을 강력히 원하고 있고, 또한 '트럼프 방식'도 논의할 의사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본인 명의의 담화가 훨씬 효과적이다. 하루빨리 김정은이 직접 담화를 발표하거나 트럼프에게 답장을 보내야 할 까닭이기도 하다.
가장 난처한 입장에 직면한 쪽은 문재인 정부와 우리 국민들이다. 트럼프의 북미 정상회담 취소 발표가 한미 정상회담 이틀 뒤에 나왔을 뿐만 아니라, 정의용 실장이 북미 정상회담 성사 가능성을 두고 "99.9%"라고 말했던 것과 너무나도 대비되기 때문이다.
이 발언의 행간에는 김정은이 북미 정상회담에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었다. 그래서 확신했다. 하지만 정작 트럼프의 변심 가능성에는 대비하지 못했다. 이른바 '운전자론'과 낙관론에 도취된 나머지 시야가 흐려진 것은 아니었는지 철저한 자기반성이 필요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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