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내부 엘리트 vs. 미국 내부 강경파, 그 내막은?
남북 정상회담을 2주일 앞둔 지난 4월 중순, 이삼성 한림대학교 교수가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란 책을 펴냈다. 900쪽이 넘는 대작이다. '핵무장국가 북한과 세계의 선택'이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북핵 문제의 유일하고 궁극적 해결책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임을 논증한다. 마치 올해 초부터 문재인, 김정은, 트럼프 등 남북미 지도자들이 추진하고 있는 한반도 비핵화 및 평화체제 구축 작업을 예견한 듯하다.
이삼성 교수는 이 책에서 북한은 이미 핵무장국가이며 이라크, 리비아와 같은 좀비국가가 아니라면서 한미 보수 세력들이 주장하는 북한에 대한 선제타격이나 참수작전, 또는 남한의 핵무장이나 전술핵 재배치는 현실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나아가 핵확산 금지조약(NPT)이라는 국제 규범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 백인정권 시절의 남아공, 인도와 파키스탄이 미국 등 서방의 묵인과 은밀한 방조 하에 핵무기를 개발‧보유한 사실을 들어 NPT 체제는 미국 등 강대국의 국가이익에 따라 자의적으로 적용되는, 따라서 국제법적 원칙이라기보다는 지극히 정치화된 권력정치의 영역이라고 비판한다. 4반세기에 걸친 북한의 핵무장은 바로 이러한 미국의 위선적 비확산정책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북핵 문제의 궁극적 해법은 남북, 북미 간의 군사적 대립을 해소하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일 수밖에 없다. 나아가 이 교수는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미일 동맹 간의 군사 대결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남북한과 일본에서 핵무기의 배치는 물론 사용까지 금지하는 동북아비핵무기지대의 창설, 그리고 제주도, 오키나와, 대만 등 미일동맹과 중국 간 잠재적 대결지역을 비군사화하는 평화벨트 구상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이삼성 교수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와 관련해 지난 2월 25일 서훈 국정원장과 김영철 북한 통일전선부장 간의 만남에서 한반도 평화협상에 관한 모종의 합의가 이루어졌을 것이며 여기서부터 남북한의 대담한 평화 공세가 시작된 것으로 추론했다.
그는 또한 북한의 완전한 핵폐기와 북미 수교 등의 선후 관계에(이른바 sequencing) 대해 북한은 북미 관계 정상화 등 미국의 체제 위협이 확실하게 종식됐다고 판단되기 전에는 완전한 비핵화에 응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인터뷰는 지난 16일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프레시안>은 이 교수와 인터뷰를 두 차례 나눠서 싣는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 이삼성 한림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이재호)
프레시안 : 남북 정상회담이 있었던 지난 4월 27일 책을 입수해 읽었다. 내용에 크게 공감하면서 '절묘한 타이밍에 책이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내게 된 계기는?
이삼성 : 지난 해 6월 한 세미나에서 <'핵무기국가 북한' 앞에 선 한국의 선택>이란 논문을 발표했다. 한국의 '균형외교'가 북한 핵무장 해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 중요하다는 논점을 제기했다. 이 발표문을 중심으로 그간 한반도 평화에 대해 써온 글들을 함께 묶어 원래는 지난해 8월 경 출판할 계획이었다.
1988년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1990년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핵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350매가 넘는 글을 발표했고 1994년에는 <한반도 핵문제와 미국외교>라는 책을 내는 등 한반도 핵문제에 대해서는 꾸준히 관심을 갖고 글을 써왔다.
그런데 7월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을 연거푸 성공시키고 9월 초에는 수폭실험을 성공시키는 등 사태가 커졌다. 한반도 위기도 심화되어 갔다. 원래 북한 핵무장의 발전 패턴과 남북관계 및 북미관계의 위기 구조는 큰 틀에서 볼 때 본질적으로 연속성이 강하다.
그렇지만 급박하게 전개되는 새로운 상황들을 반영하고 검토해야 했다. 핵문제의 세계적 맥락을 재검토할 필요를 느꼈다. 이런 작업들로 인해 8월로 예정했던 탈고는 올해 1월말로 늦춰졌고 서문은 지난 3월에야 쓸 수 있었다.
프레시안 : 책의 서문에서 "6월항쟁으로 진행된 절차적 민주주의의 심화를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국가안보 담론을 독점하는 권력집단과 보수세력의 정치사회적 기득권의 논리라고 생각했다"면서 "학자로서 그리고 시민으로서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성역의 반열에서 끌어내려 민주적 토론의 장으로 불러오고 권력논리의 대안을 제시하고자 노력하는 것, 그것이 내가 지난 30년간 의식적으로 추구해온 역할"이라고 말했다.
또한 "역사가 일방적인 프리즘으로 해석되고 때로 왜곡되어 우리 사회의 언론과 담론 시장을 지배하면서 정론으로 굳어지는 경우가 많다"면서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는가가 중요하다고도 했다. 나는 이 발언들을 주한미군과 한미동맹을 영원한 절대선인 것처럼 신성시하는 반면 북한을 언제나 적화통일 야욕에 불타는 절대악으로 적대시하는 보수 세력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였다.
사실 이번에 서문을 읽으면서 이 교수가 학자적 견해를 밝힌 발언들 때문에 고초를 겪게 된 사연들을 소상히 알게 됐다. 1989년 10월 KBS <심야토론>에 출연해서 '탈냉전 시대의 한국 안보 백년대계는 주한미군에 의존하지 않는 한반도 평화체제 준비를 포함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나도 당시 TV를 통해 그 장면을 봤다. 내심 '대담한 발언인데' 하며 약간 놀랐고 한편으로는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보니 그 직후 숙명여대 강사 자리에서 쫓겨났더라.
또 그 이전 <신동아> 1989년 6월호에 광주항쟁 당시 미국 역할에 관한(미국은 전두환의 광주 학살과 관련이 없다는) 미 국무부 성명을 반박하는 글을 실은 후 연세대, 고려대 강의도 그만둬야 했다. 지금도 상당한 반발을 불러올 수 있는 민감한 주제를 소신껏 발언했다는 건 웬만한 용기 아니면 어려울 것 같다.
이삼성 : KBS <심야토론>을 마치고 나니 새벽 2시쯤 됐던 것 같다. 문제의 발언을 하고 나서 혹시 우익 테러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KBS 사옥을 나와서 여의도 광장을 지나가는데 나도 모르게 뛰어서 갔다. 택시를 잡고 나서야 겨우 안도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도 내 발언이 문제시될 수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프레시안 : 그 일로 숙명여대에서 이 교수가 강사 자리를 잃게 되자, 학생들이 학과에 항의하면서 집단행동을 했고, 이 교수는 학생들이 당할 피해를 우려해 그들을 말렸다. 학생들은 이 교수의 설득으로 시험 거부를 철회했다. 하지만 곧 학계에서는 이 교수가 강사 자리를 지키기 위해 학생들을 선동한 나쁜 인간으로 낙인이 찍혀 있었다. 더욱이 시험 거부에 참여한 학생들은 모두 나쁜 학점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 학점을 이 교수 본인이 준 것으로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 교수도 10년 후에 우연히 알게 되었다고 했다.
이삼성 : 당시 나는 귀국한 지 2년이 채 안 된 시간강사였다. 시간강사는 파리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전혀 이슈가 될 만한 뉴스는 아니었다. 숙대 사건의 경우, 학생들이 왜 선생님을 해고하느냐며 시험 거부에 나섰다. 내가 눈물로 호소하여 학생들의 시험 거부는 철회되었지만, 항의에 참여한 학생들 대부분이 D나 F의 점수를 받았다는 것을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 알게 되었다.
물론 나는 그렇게 학점을 준 적이 없다. 나를 위해 불이익도 각오했던 학생들에게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학생들은 내가 학교에 대한 서운함 때문에 학생들에게 화풀이를 했거나 강사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학교와 타협해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닐까 하고 오해했다는 얘기를 10여 년 후 우연히 만난 그 때의 학생들로부터 들었다. 권력자의 농간이 개입하여 여러 가지 허위가 진실을 대체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프레시안 : 미국의 핵무기와 주한미군, 한미 행정협정(SOFA) 등에 대해 주류와 다른 시각을 내놓았다는 이유만으로 강의 기회가 박탈된 것도 문제지만, 교수가 평가한 학점이 대학 당국에 의해 바뀌어졌다면 이는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야말로 거짓이 진실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 아닌가. 이 내용을 이번 책 서문에 쓴 이유는 무엇인가?
이삼성 : 그때 마음의 상처를 받은 것은 사실인데 그런 감정 때문에 그 내용을 서문에 넣은 것은 아니다. 저를 위해서 시험 거부 행동을 했던 학생들을 포함해 제 강의를 들었던 숙대 학생들에게, 지금은 50대가 됐겠지만 여전히 저에 대해 실망과 원망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마음의 큰 짐으로 남았다. 학생들에게 그날의 진실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다. 이번 출간한 책의 테마는 그 때 제가 해직 강사가 된 이유와 통한다. 더 늦기 전에 이 책의 서문을 통해서 이제라도 내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다.
민주화 30년, 안보 논의의 성역은 없어졌는가
프레시안 : 1989년과 비교했을 때 촛불 혁명을 거친 지금 우리 사회는 얼마나 진전됐다고 보나? 사회적인 금기나 억압은 이제 좀 많이 없어졌을까?
이삼성 : 말을 하는 것 자체는 자유로워진 것 같다. 그런데 2013년 10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주최한 국제회의에서 천안함 침몰 원인에 대한 재조사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실질적 민주주의가 중요하며 제도적 민주주의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지식인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권력이 구축하고 사회 전체가 순응하는 도그마에 민주적 토론을 제기하는 실천이 중요하다는 얘기였다.
미국이 1964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해서 베트남 전쟁을 합법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을 마련한 것처럼, 민주주의 정권이라고 해도 언제든지 국민을 기만해서 평화를 유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국가에서 권력에 의한 기만은 민주주의라는 외피로 인해 도덕적 정당성을 누리기에 더욱 위험한 성격을 띤다.

▲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 (이삼성 지음, 한길사 펴냄)
2010년 천안함 사태에 대한 우리 사회의 대응을 보면 아직도 기득권의 안보 논리가 자유로운 토론과 진실 추구를 가로막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재조사 필요성 제기한 2013년에도 천안함 '폭침'론에 공개적인 의문을 제기하면 국가보안법에 의한 제재 대상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침몰이라는 표현은 많이 사라지고 있었고 폭침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으면 빨갱이 취급을 받았다. 천안함을 무엇으로 부르느냐가 일종의 '사상의 리트머스 시험지'가 된 것이다.
실제 당시 천안함 폭침론에 의문을 제기하고 재조사를 주장하면서 나 자신이 국보법에 걸릴 가능성을 걱정하기도 했다. 당시 내 논문을 발표하면서도 이 이야기를 하면 국보법 위반으로 감옥에 갈 수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랬는데 청중 중에 미국 워싱턴에서 온 관변 인물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보기에는 천안함 폭침이 맞지만, 다만 발표자가 천안함 사건에 대한 이의를 제기했다고 해서 국가보안법에 의해 처벌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상황은 비슷하다. 천안함 폭침설을 공개적으로 부정하는 사람은 사실상 공직 진출이 불가능하다. 언젠가 공직에 나가고 싶은 사람은 천안함에 대해 폭침 이외의 다른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돼 있다. 여전히 우리 사회의 금기로 남아있는 것이다. 1989년 주한미군 문제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 책에 "만일 천안함 침몰을 북한 소행으로 단정한 것이 한미 양국이 공모한 조작이라면 그것에 대한 규명 없이는 한국 민주주의는 텅 빈 껍데기요 거대한 기만 덩어리에 불과할 것"이라고 썼다. 자세한 내용은 내 책을 봐줬으면 한다.
프레시안 : 이 교수 입장은 '천안함이 북한 잠수정에 의해 격침됐다'는 우리 정부의 공식 입장을 뒷받침할 만한 자료의 공개와 민주적 토론이 부족하다, 따라서 투명한 자료 공개와 철저한 토론을 거쳐 진실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정부, 특히 군은 천안함 침몰 관련 자료들을 제대로 공개하지 않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자료들을 공개해야 실질적 민주주의에 따라 진실을 밝힐 수 있는 것인데.
이삼성 :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 사회는 침묵하고 있다. 일부 개별적 지식인들의 문제 제기가 이어지고 있지만 천안함 문제는 아직 우리 사회에서 민주적인 토론의 대상으로 열려 있지 않은 상황이다.
2월 25일 서훈, 김영철 회동에 주목
프레시안 :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진실에 대한, 특히 안보 문제의 진실에 대한 억압과 왜곡과 자기 검열이 존재한다고 요약할 수 있겠다. 이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대해 얘기했으면 한다.
올 들어 한반도 평화협상이 급진전한 이유로 세 가지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이 미국 본토를 위협할 만큼 커졌다는 것, 둘째 남한에 민의를 제대로 대변할 수 있는 촛불 정부가 탄생한 것, 셋째 미국에 기존의 패권 논리를 부정하는 트럼프 행정부가 등장한 것 등이다.
북한의 핵 무력 완성으로 미국은 더 이상 '전략적 인내'를 지속할 수 없게 됐으며 비로소 대북 협상을 진지하게 고려할 수밖에 없게 됐다. 또한 문재인 정부의 탄생으로 북한의 악마화, 한미동맹의 신성화라는 기존의 도그마에서 벗어나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에 대해 진지하고 현실적 고려를 하게 됐다. 그리고 트럼프는 대중국 군사적 봉쇄라는 미국 제도권의 기존 세계전략을 거부함으로써 한반도 평화협상에 적극 나서게 된 것이라고 판단한다.
이 교수의 이번 책은 1월 말에 본문 원고가 탈고됐다는 점에서 2월 이후의 상황은 반영이 안 됐다고 할 수 있는데, 현재까지 평화 협상 과정을 어떻게 보고 있나?
이삼성 : 지난 2월까지도 한국 사회에서는 북한은 어떤 조건에서도 핵무기를 포기할 리 없다는 주장이 지배했다. 저는 책에서 핵무장 자체가 북한의 궁극 목표는 아니기 때문에, 한미동맹이 평화협정 체제 전환을 수용한다면 북한은 비핵화에 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탈고는 1월 말에 했지만, 책의 내용은 3월 이후의 사태 전개에서 설득력을 갖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책 내용을 수정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2월 25일 서훈 국가정보원장과 김영철 북한 통일전선부장 간의 만남에 주목한다. 이 회동을 통해 북한은 한반도 평화협정 체제 구축에 관련한 문재인 정부의 의지를 확인코자 했다. 여기에서 나름 확신을 가졌기 때문에 3월 5일 정의용 특사의 방북 때 비핵화 의지를 천명하고 미국과의 대타협 의지를 밝힌 것이라고 생각한다.
2월 25일 김영철 통전부장은 서훈 국정원장과의 회동에서 두 가지를 확인하려 하지 않았을까. 하나는 천안함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물론 한반도 평화체제 문제다.
우선 김영철은 한국과 미국에서 천안함 폭침의 책임자로 지목한 인물이다. 그런 인물을 협상 대표로 내려보낸 김정은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그가 서훈 국정원장을 만났을 때 천안함 문제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건 그 자신이 폭침의 주범임을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북한은 천안함 사태가 자신의 소행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중국과 러시아도 같은 입장인 것으로 알고 있으며 한때 미 CIA 한국지부장이었던 도날드 그레그 같은 인물도 2010년 8월 북한 소행설에 공개적으로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김영철은 문재인 정부가 천안함 사건을 북한의 소행이라고 보고 있는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확인했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가지고 있는 의문을 해소시켜줄 수 있는 증거를 제시했을 수도 있다. 그러면서 문재인 정권이 천안함 문제에 대해 북한이 주장하고 있는 진실을 감당할 수 있는 정치적 리더십이 있는지를 알아봤을 것이다.

▲김영철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앞줄 가운데)과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김영철 오른쪽 뒤) 등 북한 고위급 대표단이 2월 25일 오후 평창 진부역에 도착, 출구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회동의 구체적 내막을 알 수는 없지만 두 정보기관 수장 간에 천안함 문제가 논의됐으며 일정한 이해와 공감대가 성립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그런 게 아니라면 김정은이 김영철을 보낸 행위는 남한 사회를 약 올리려 했다는 것 밖에는 되지 않는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나의 합리적 추정이다.
또한 북한은 한미동맹의 군사적 위협과 경제제재를 해제하는 것과 북한의 비핵화를 교환하고 이를 보장하는 한반도 평화협정체제를 구축하는 문제에 대해 문재인 정부의 의지를 확인하고자 했을 것이다. 북한이 그 점에서 남한의 역할을 믿고 미국과의 대타협을 위한 북미 정상회담에 나서도 될지를 가늠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게 일종의 김정은이 띄운 테스트라고도 볼 수 있는데, 문재인 정권이 이를 통과하지 못했다면 현재의 평화 프로세스는 진행되지 않았을 것이다. 3월 이후 진행된 과정은 그 부분에서 김정은과 문재인 정부 사이에 일정한 이해가 성립됐을 거라는 믿음을 준다. 한반도 평화협정 문제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입장을 확인했을 거라는 얘기다.
프레시안 : 평화협정과 북한의 비핵화 순서는 어떻게 가져가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보나? 즉 북미 양자가 합의할 수 있는 북한 핵 폐기와 북미 관계 정상화의 수순은 어떻게 돼야 하나?
이삼성 : 한반도 평화협정이란 한 마디로 말하면 "북한으로 하여금 안심하고 비핵화를 진행할 수 있게 보장하는 법적·제도적 장치"라고 요약할 수 있다. 북한이 비교적 안전한 비핵화의 장치로 생각할 평화협정은 제 판단으로는 최소한 세 가지 성격을 가져야 한다. 첫째 일괄 타결, 둘째 단계적 실천, 셋째 미국에서 초당적 구속력을 가진 협정 양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북한은 1994년 제네바 합의가 행정부 간의 합의에 그침으로써 2002년 부시 행정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쉽게 파기됐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가급적 상원 비준까지 요구되는 협정, 즉 조약 형태를 취함으로써 미국 행정부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합의가 유지되는 초당적 구속력을 가진 제도적 장치를 원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평화협정이 대화의 출구일 수 있지만 입구는 아니라고 이야기하는데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평화협정은 북한의 관점에서는 안심하고 비핵화에 임할 수 있는 조건을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다. 이 장치를 향해 한국과 미국이 함께 공동으로 노력한다는 공감대가 성립할 때 대화는 시작된다.
지난 2월 평창동계올림픽 기간에 남북 간 왕래는 대화 자체라기보다는 대화 가능성의 탐색 절차였다. 대화가 시작된 것은 3월 초순 이후의 일이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실제 이 대화는 2월 말 김영철의 방남을 통해서 북한이 천안함 문제와 함께 평화협정 문제에 대한 남한 정부의 정치적 의지를 타진한 후 진행된 것이다.
평화협정은 북한이 내어줄 것과 한미동맹이 보장할 것을 처음부터 명확히 정하여 이를 기꺼이 동시적으로 교환하고자 할 때 성립한다. 따라서 그것은 기본적으로 일괄타결의 패키지일 수밖에 없다.
다만 이를 단계적으로, 즉 서로가 서로에게 동시적으로 실천하면서 신뢰를 쌓는 단계를 거쳐서 최종적인 조치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북한이 처음부터 핵물질을 당장 내놓아야 한다는 식의 합의는 있을 수 없다.
최종적으로는 미국이 북한의 체제 안전을 보장하고 외교 관계를 정상화해주고 경제 제재를 해소하며 경제 지원을 하는 것과 북한이 비핵화를 완결하는 것, 즉 최종적으로 핵무기, 핵물질의 국외 이전 등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
또 평화협정은 국제법적 구속력을 가져야 한다. 제네바 합의가 문제였던 것은 이것이 의회의 동의가 필요 없는 행정협정이었다는 점이다. 상원의 비준을 거친, 초당적 구속력이 있는 협정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한반도 평화협정은 초당적 구속력을 확보하는 협정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북한의 진정한 비핵화 의지와 이행을 이끌어낼 수 있다.
다만 미국이 조약 형태가 아닌 행정협정 형태의 한반도 평화협정을 고집할 경우 북한이 이를 받아들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고 본다. 한반도 평화협정의 경우 남북한 뿐 아니라 중국과 미국이 함께 당사자로 참여하는 것이 될 것이다.
제가 지난 20여 년간 일관되게 주장해온 것처럼 미국과 중국의 당사자로서의 정식 참여는 당연하고 또한 바람직하다. 이들은 한국전쟁의 당사자들일 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한반도에서 전쟁의 교사자가 아닌 평화의 지원자로서 행동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데, 한반도 평화협정은 그들의 책임과 의무 역시 명확히 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이 협정이 우리 입장에서도 자주적인 것이 된다.
중국과 미국이 정식 당사자로 참여하게 되면 두 나라는 평화협정의 이행을 위해 상대방의 불이행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보다 충실히 하게 될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는 이 협정이 미국 상원의 비준을 받는 조약이 아닌 행정협정이라 하더라도, 협정의 신속한 성립을 위해 북한도 받아들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북한의 입장에서는 우선은 조약의 형태를 강력히 희망할 것이란 점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
김정은은 이러한 방식으로 평화협정을 체결할 의사가 있는지를 문재인 정권으로부터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고, 실제 이를 확인했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3월 5일 김정은이 대북 특사단과 만난 자리에서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천명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본다. 북한은 문재인 정권의 균형외교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비핵화 의지를 천명했고 이를 기초로 북미 정상회담 추진까지 나아간 것이다.

▲ 지난 4월 27일 판문점 남측지역 평화의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문재인(오른쪽)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선언 발표 이후 악수하고 있다. ⓒ판문점 공동 취재단
저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크게 보면 두 국면으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첫째 국면은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대화가 시작되고 마침내 평화협정에 서명하는 시점까지이다. 두 번째 국면은 평화협정의 이행을 시작하고 그 이행이 완성되는 시점까지이다.
그런데 첫 번째 국면에서 대화의 입구는 평화협정이라는 제도적 장치를 통해서 북한이 안심하고 비핵화에 동의할 수 있는 평화협정체제의 청사진에 대한 공감대가 남북한과 미국 사이에 공유될 때 비로소 성립한다.
이러한 공감대가 없으면 북한의 비핵화 의지 표명을 포함하는 대화 자체가 진행될 수 없다. 이 첫 번째 국면은 북한의 비핵화 로드맵을 한국과 미국의 대북한 안전 보장과 경제 제재 해제와 경제 지원의 로드맵을 교환하는 평화협정이 정식으로 체결될 때 완성된다.
그러므로 평화협정에 의한 문제 해결의 방법론에 대한 큰 틀에서의 공감대 형성이 대화의 입구인 것이고, 협정 차제의 성립과 체결이 대화의 출구인 셈이다. 그래서 한반도 평화협정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대화의 출구일 뿐인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출구인 동시에 입구이다.
평화협정 체결은 평화 프로세스의 첫 번째 단계의 완성을 의미한다. 평화 프로세스 전체에서 보면 중간 지점에 해당한다. 평화 프로세스의 두 번째 국면은 그 협정을 이행하는 과정이다. 협정의 이행이 완성될 때 평화 프로세스 역시 완성된다.
프레시안 : '평화 프로세스의 중간 지점에서 평화협정이 될 것'이라고 말했는데 국내 많은 전문가들은 북한의 완전한 핵 폐기와 평화협정 체결이 마지막 단계에 동시에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한다. 어떤 분들은 미국 의회의 비준 절차 등을 들어 완전한 핵 폐기 뒤에 평화협정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기도 한다. 미국이 북한의 완전한 핵 폐기 전에 평화협정을 맺으려 할까?
이삼성 : 북한 핵무기, 핵물질의 국외 이전 및 폐기는 그야말로 불가역적인 반면 미국의 대북정책은 얼마든지 가변적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이 최후, 유일의 카드라고 할 수 있는 핵무기를 평화협정 이전에 내놓으려 할까? 나는 이에 대해 회의적이다.
북한 반발, 배경은?
프레시안 :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13일(현지 시각) ABC와 CNN 등에 출연해서 북한의 핵탄두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미국에 가져와서 이것부터 없애겠다고 이야기했다. 일반적인 핵 폐기는 '핵 활동 중단 → 핵 동결 → 검증 → 불능화' 단계를 거치고 마지막에 해체하는 것인데 볼턴은 미국에게 가장 위협적인 부분인 핵탄두와 ICBM부터 먼저 폐기하자고 했다. 이렇게 되면 북미 간 접점을 만들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한편 북한은 16일 결국 한미 연합 공중 훈련인 맥스 썬더(max thunder)에 대해 항의하면서 남북 고위급회담을 연기했고, 북한 내 미국통이라고 할 수 있는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은 볼턴의 발언을 비판하며 오는 6월 12일로 예정된 북미 정상회담을 안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기점으로 시작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처음으로 장애가 생겨난 셈인데 북한의 이러한 입장은 미국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한 협상 전술인가? 아니면 원래 북한과 미국이 비핵화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기본적 차이가 드러난 것으로 봐야 할까?
이삼성 : 우선 평화협정을 통해 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북미 간 공감대는 유효하다고 본다. 다만 북한 비핵화가 이뤄지는 속도와 미국이 그에 상응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 사이에서 이를 어떻게 교환할 것이냐는 문제가 있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 다양한 방안이 있을 수 있는데, 현재 북미는 이를 가지고 '밀고 당기기'를 하는 것이다.
미국은 가급적이면 북한에 보상을 덜 주면서 완전한 비핵화를 먼저 얻어내려고 한다. 북한의 비핵화가 실제 이행되기 전까지 군사적 압박을 지속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대내외에 전하면서 정치적‧외교적인 명분을 추구하려고 한다.
반면 북한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협상 카드의 모든 것을 다 내주기 전에 외교 관계 정상화와 경제지원을 받아내려고 한다. 그런데 미국으로부터 무언가를 받아내기 전에 다 내주는 상황으로 몰리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 북한 엘리트 집단 내부에서도, 공개적으로는 못하겠지만, 현 국면을 이끌고 있는 김정은 리더십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사실 그런 문제제기가 없다면 이상한 것이다. 김정은 자신도 물론 그런 불안감을 공유할 것이다. 김정은이 엘리트 집단의 불안감을 어떻게 잠재우면서 북미 정상회담을 진행하고 평화체제를 이끌어낼 것인가 고민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앞으로도 이런 과정이 여러 차례 반복될 것이다.

▲ 이삼성 교수 ⓒ프레시안(이재호)
특히 2002년 미국이 제네바 합의를 파기할 때 국무부에서 핵 비확산 문제 담당 차관이었던 볼턴이 안보보좌관으로 임명됐다는 점이 북한이 이런 반응을 보인 배경 중 하나였을 것으로 보인다. 어찌 보면 북한 입장에서는 당연한 반응이기도 하다.
또 미국이 최근 이란 핵협정에서 탈퇴한 것도 김계관 제1부상이 견제구를 던진 주요한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미국이 이란 핵 협정을 깬 이유에는 저농축 우라늄 허용이 고농축 우라늄을 이용한 핵무기 개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작용했다.
또한 이 협정에 따라 향후 15년간 이란의 핵무기 개발 활동은 금지되었는데, 플루토늄을 포함한 핵무기 개발 의혹 시설들을 해체한 것에 맞추어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가 대부분 해제되었다. 그 결과 1000억 달러 안팎에 달하는 이란의 해외 자산 동결도 해제되었다. 이스라엘은 이 협정이 이란의 핵무기 개발은 막지 못하면서 돈줄을 풀어 헤즈볼라와 하마스 등 이스라엘을 부정하는 '테러집단'들을 지원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비판해왔다.
이러한 비판과 이스라엘 및 유대인 집단의 로비 결과로, 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과 독일까지 6개국이 참여해 3년간의 협상 끝에 어렵사리 타결된 이란 핵협정을 트럼프 행정부가 일방적으로 탈퇴하는 것을 보면서 북한은 불안감과 경계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북한은 조약 형태의 보다 확고한 초당적 및 국제적 구속력을 가진 조약 형태의 평화협정 체제에 대한 본격적이고 진지한 논의는 실종된 채, 북한의 비핵화가 선행하면 미국은 북한을 부자 나라로 만들어주겠다는 식의 다분히 구태의연한 논리가 미국과 한국의 대내외 정책 표명의 주류로 복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 북한의 경계심과 우려를 증폭시켰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점에서 문재인 정부의 할 일은 미국 강경파들이 띄우는 구태의연한 "북한 먼저 옷 벗기기" 논리에 맞장구 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는 행동을 삼가고, 북한이 불안해하지 않고 비핵화 의지를 유지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 평화협정의 청사진을 미국 정부를 설득해 구체화하는 일에 더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비핵화는 북미 간에 풀 문제라는 식으로 뒷방에 물러앉는 자세로는 미국의 볼턴-폼페이오 안보 라인이 북한을 불안하게 하고 격동시킴으로써 북한 비핵화 의지를 위협하는 사태는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 이와 함께 한미군사훈련의 규모와 내용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수정을 위해 더 세심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프레시안 : 북한과 미국 사이에 또 다른 논쟁 지점으로 '완전한 비핵화'가 어디까지냐는 부분이 있다. 북한은 핵탄두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폐기를 최대한의 양보로 생각하는 반면 미국은 여기에 중거리미사일(IRBM과 MRBM), 생화학무기 폐기와 함께 핵연료 재처리‧우라늄 저농축‧원자력발전소 건립 금지까지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삼성 : 그 부분에 대해 미국과 북한은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최종적으로 어떤 평화협정이 창출될 것이냐에 달려있고 그 때 결정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북한은 핵무기를 포기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저농축 우라늄과 같은 사안은 당연히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즉 평화적 핵이용 권리는 계속 주장할 것이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란 핵 협정의 핵심 중 하나가 저농축 우라늄 생산시설은 유지시키면서 평화적 핵 이용을 위한 우라늄 농축 시설은 허용한 것이다. 그런데 트럼프 정부가 이를 파기했다. 이는 북한의 평화적 핵 이용을 위한 우라늄 농축 시설에 대해서도 미국이 여러 가지 수준의 개입 및 요구를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북한이 트럼프 행정부의 행보를 경계하면서 중국과 더 잦은 고위급 접촉을 하게 되는 이유일 수 있다.
지난 2010년 북한은 자신들의 우라늄 농축시설은 평화적 핵 이용을 위한 것이라면서, 미국 핵 전문가인 지그프리드 해커 박사를 초청해 영변에 있는 우라늄 농축 시설을 공개한 바 있다.
하지만 미국의 전문가들은 북한이 영변 이외에도 비밀 핵시설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북한은 없다고 하고 미국은 밝히라고 하는 갈등이 벌어질 수 있다. 결국 농축 우라늄 시설을 이용한 핵 프로그램과 관련해 미국이 어느 정도의 요구를 관철할 수 있을 것이냐가 중요한 이슈가 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건설 중인 경수로형 원자력발전소들과 그 연료를 생산하는 우라늄농축시설의 경우 북한은 결코 그 폐기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핵물질의 평화적 이용을 미국뿐만 아니라 남한도 하고 있는데, 북한더러 하지 말라고 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도 하다.
탄도미사일의 경우 일본이 사정권에 포함된 MRBM(준중거리 탄도 미사일)과 괌을 사정권으로 하는 IRBM(중거리 탄도 미사일) 폐기가 문제가 될 수 있다. 북한은 당연히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고 미국은 타협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미국 국내 정치적으로 중요한 것은 ICBM이다. 본토를 타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은 미국에 대해 MRBM과 IRBM의 폐기를 종용하겠지만 미국이 이를 들어줄지는 미지수다.
사실 우리한테 중요한 것은 미사일보다는 생화학무기다. 우리가 생화학무기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 북한의 생화학무기 폐기도 핵‧ICBM 폐기와 함께 이뤄내는 것이 좋다. 김정은이 이른바 '통 큰'합의를 한다면 생화학무기도 포함될 수 있겠지만, 일단 우리도 이 부분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남북 정상회담을 2주일 앞둔 지난 4월 중순, 이삼성 한림대학교 교수가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란 책을 펴냈다. 900쪽이 넘는 대작이다. '핵무장국가 북한과 세계의 선택'이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북핵 문제의 유일하고 궁극적 해결책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임을 논증한다. 마치 올해 초부터 문재인, 김정은, 트럼프 등 남북미 지도자들이 추진하고 있는 한반도 비핵화 및 평화체제 구축 작업을 예견한 듯하다.
이삼성 교수는 이 책에서 북한은 이미 핵무장국가이며 이라크, 리비아와 같은 좀비국가가 아니라면서 한미 보수 세력들이 주장하는 북한에 대한 선제타격이나 참수작전, 또는 남한의 핵무장이나 전술핵 재배치는 현실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나아가 핵확산 금지조약(NPT)이라는 국제 규범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 백인정권 시절의 남아공, 인도와 파키스탄이 미국 등 서방의 묵인과 은밀한 방조 하에 핵무기를 개발‧보유한 사실을 들어 NPT 체제는 미국 등 강대국의 국가이익에 따라 자의적으로 적용되는, 따라서 국제법적 원칙이라기보다는 지극히 정치화된 권력정치의 영역이라고 비판한다. 4반세기에 걸친 북한의 핵무장은 바로 이러한 미국의 위선적 비확산정책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북핵 문제의 궁극적 해법은 남북, 북미 간의 군사적 대립을 해소하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일 수밖에 없다. 나아가 이 교수는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미일 동맹 간의 군사 대결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남북한과 일본에서 핵무기의 배치는 물론 사용까지 금지하는 동북아비핵무기지대의 창설, 그리고 제주도, 오키나와, 대만 등 미일동맹과 중국 간 잠재적 대결지역을 비군사화하는 평화벨트 구상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이 교수는 최근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양측이 다소 이견을 보이고 있지만 미국은 버락 오바마 정부 때 사용하던 '전략적 인내'보다는 훨씬 전향적인 안을 들고 북한을 만났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렇지 않다면 북한에서 "미국이 '새로운 대안'을 가지고" 문제 해결에 관심을 보였다는 식으로 보도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최근의 한반도 국면에 한국 정부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진보 정권이 미국 정부 안팎의 협상론에 힘을 실어주면 강경파도 협상을 받아들일 명분을 얻게 된다면서 어떤 한국 정부가 들어서느냐에 따라 미국의 선택은 결정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인터뷰는 지난 16일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 1편 보러 가기 : 북한 내부 엘리트 vs. 미국 내부 강경파, 그 내막은?)

▲ 이삼성 한림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이재호)
프레시안 : 비핵화에 대해 미국이 북한에 요구할 것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북한 입장에서도 미국에 요구사항이 있을 것이다. 우선 '북한 비핵화가'가 아니라 '한반도 비핵화'라는 입장에서 보면, 북한은 미국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 금지를 요구하지 않을까?
이삼성 : 2016년 7월 북한은 정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의 조건을 언급하면서 북한이 말하는 비핵화는 "조선반도 전역의 비핵화"라고 밝혔다. 그것은 북한뿐 아니라 "남핵 폐기와 남조선 주변의 비핵화"를 포함한다는 얘기였다. 이는 군사훈련 내지 북한 도발에 대한 대응을 명분으로 미국이 수시로 한반도 주변에 전개하는 전략자산들과 그것들이 탑재할 수 있는 핵무기들을 겨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북한은 미국이 자신을 염두에 두면서 순환 배치하는 전략핵과 토마호크 순항 미사일 등 한반도 주변에 배치 가능한 전술핵들에 대해 문제제기를 할 것이다.
지난 2010년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NPR(핵태세검토 보고서)에서 전술핵 장착용으로 쓰이는 토마호크 순항 미사일을 폐기하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2018년 트럼프 행정부의 NPR에서는 이를 유지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북한은 이 계획을 포함해 자신들에 대한 재래식 공격을 금지하고 핵 선제사용 옵션을 폐기하며 한반도 주변에서 북한을 염두에 둔 전략 전술핵 배치를 배제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북한은 안심하고 비핵화 조치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외교 관계 정상화가 북한의 비핵화 완료 후가 아니라 평화협정 이행의 초기 내지 중간 단계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2015년 7월에 타결된 이란 핵협정의 경우, 유엔이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를 해제한 것은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이란의 핵무기 개발 의심 시설들이 협정에서 정한 일정에 따라 해체되었다고 확인한 2016년 1월 16일이었다. 북한은 이란과 달리 핵무장을 완성한 상태에서 협상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비핵화를 내포한 평화협정 체결 과정에서 북한은 핵무기 완전 폐기가 아닌 모종의 중간 단계에서 의미 있는 수준의 경제제재 해제를 요구할 것이다.
비핵화 조치는 진실하게 이행될 경우 일단 진행하고 나면 불가역적이다. 그렇지만 외교 관계 정상화나 경제 제재는 가역적이다. 북한 입장에서는 불가역적인 사항을 가역적인 것과 맞바꿀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동시적이라고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가든지, 아니면 경제제재 해제와 외교 관계 정상화를 적어도 비핵화 중간단계에서는 이행하기를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프레시안 :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볼턴 보좌관과는 다르게 체제 안전 보장, 경제 지원 등을 약속했다. 지난 9일 북한에서 김정은 위원장을 만났을 때 체제 안전 보장과 관련한 합의도 나왔을까?
이삼성 : 북한에서 미국이 '새로운 대안'을 가지고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에 관심을 보인 것을 높이 평가한다고 보도한 바 있다. 폼페이오 장관은 아마도 북한이 납득하고 마음 놓고 비핵화를 할 수 있는 제안이 무엇일지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미간 협상이 성사되길 원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폼페이오는 평화체제와 관련해 '전략적 인내'보다 훨씬 전향적인 안을 가지고 북한을 만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북한이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비핵화를 완전히 이행하기 전에 미국으로부터 체제 보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실한 느낌을 받을 만한 제안이 있었다고 본다.
한편으로 북한은 김정은의 두 차례 방중에 따른 중국과의 관계 복원을 통해 나름의 지렛대를 확보한 상황이다. 따라서 북한은 미국으로부터 확실한 체제 보장을 받았다고 확신할 수 있을 때 완전한 비핵화의 길로 접어들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남한에 균형외교 의지를 가진 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북한은 문재인 정권이 평화협정에 대해 전향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이에 따라 이 정권을 다리로 삼아 비핵화를 전제로 한 북미 정상회담까지 가도 좋겠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적어도 맥스선더 군사훈련과 B-52 이슈가 불거지기 전까지 그랬다.
그런데 북한의 이러한 움직임은 중국을 긴장시켰다. 북한이 미국과 대타협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중국을 긴장시킨 것이다. 중국으로 하여금 북한과 관계를 복원하도록 유도한 셈이다. 이 복원된 관계를 통해 북한은 미국과 협상에서 비교적 안전한 비핵화를 추구할 수 있는 협상의 지렛대를 얻었다.
북한이 중국에 완전히 종속돼있는 상황에서 미국과 대타협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낸 것은 한국의 균형외교다. 그것이 북한의 자주외교를 이끌어내고 가능하게 만든 측면이 있다. 남북 간의 공조로 한반도의 새로운 진로를 뚫어냈다고 볼 수 있다. 즉 핵무기를 들고 있는 북한의 자주외교와 민주화된 남한의 균형외교가 만나면서 현재 국면까지 일이 진행된 것이다.
프레시안 : 주한미군의 지위와 역할에 대해서는 어떤 요구가 있을까? 북한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 있을 텐데?
이삼성 : 김대중 대통령의 자서전에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지난 2000년 6월 정상회담을 했던 기록이 있다. 당시 6월 14일 오후에 열린 회의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주한미군 문제에 대해 동아시아에서 주한미군의 균형자 역할을 인정했다고 한다.

▲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 (이삼성 지음, 한길사 펴냄)
주한미군이 남한의 북침을 막아주는, 한반도 전쟁억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듯한 이야기를 했다고 전해진다. 김정은은 김정일의 이 입장을 일종의 '선대의 유훈'이라고 생각하고 향후 평화협정 협상에서 유연성을 발휘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김정은은 평화협정 체결 과정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못박으려고 고집하지는 않을 것이다. 평화체제가 구축된다면 주한미군 존재 근거는 희박해진다. 미국 내에서도 주한미군의 규모와 역할을 현재 수준으로 정당화 할 명분이 없어진다. 그렇다면 주한미군의 역할은 자연스럽게 축소되고 심지어 철수할 수도 있다.
따라서 주한미군 철수를 평화협정에 못박겠다고 고집해서 평화체제 구축을 지연시키느니, 그 부분에서 유연성을 발휘해서 평화협정을 앞당기고 그 결과로 주한미군 철수를 자연스럽게 기대하려는 측면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서도 주한미군의 한반도 전략자산 전개는 배제될 것이다. 또 북한을 염두에 둔 한미 합동 군사 훈련 자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은 계속 견지할 것이다. 평화협정 이행 과정에서 상호 신뢰 구축을 위한 기본적인 조치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군사 훈련 중지다. 실제 북한은 중국과 군사훈련을 하지도 않고 자체적으로 훈련을 수시로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기 때문에 특히 북한이 위협적으로 인식하는 무기체계와 공세적 작전개념이 개입된 한미 연합 군사 훈련에 대해서는 계속 중단 요구를 할 것이다.
미국을 움직이는 건 한국
프레시안 : 트럼프 대통령의 첫 번째 임기 종료 시점인 2020년까지 북한의 비핵화와 북미 수교, 평화협정 체결 등이 가능할까?
이삼성 : 프로세스를 바짝 앞당긴다면, 단계적으로 실천하되 간격을 짧게 하면 가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제네바 합의처럼 행정협정 수준이라면 대통령인 트럼프가 본인의 의사대로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데, 상원의 인준을 받는 구속력 있는 조약까지 가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
이삼성 : 트럼프 행정부가 미 의회에서 초당적 합의를 얼마나 구축해내느냐의 문제라고 본다. 트럼프가 미 의회와 긴밀한 소통을 해서 프로세스를 앞당긴다면 이론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본다.
2020년 대선 전에 북한의 비핵화 과정을 완전히 끝내는 것을 목표로 삼을 수도 있지만, 일단 평화협정 체제를 구축해서 북한 비핵화가 예정대로 잘 진행돼서 적어도 중간 단계까지 간다면 다소 프로세스가 늦어진다고 하더라도 트럼프 행정부로서는 크게 나쁠 것은 없다.
프레시안 : 미국 사회 내에 북한에 대한 불신이 깊은데, 비핵화도 달성하지 못했으면서 관계정상화를 할 수 있냐는 반론이 나오지는 않을까?
이삼성 : 이 문제 역시 트럼프가 어떻게 미국 정치권과 언론을 설득할 것이냐의 문제라고 본다. 지난 1972년 공화당 출신인 닉슨 대통령이 중국과 관계 정상화를 이뤄냈다. 이런 예를 보더라도 여론의 흐름에 대해서도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고 본다.
올해 말에 치러지는 미국 중간 선거 결과가 바로미터의 역할은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트럼프 행정부가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법을 두고 공화당을 포함해 민주당까지 확장하는 정치적 컨센서스를 이뤄낼 수 있을지는 중간선거에 달렸다.
프레시안 : 이번 책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에서 동아시아에서 미국이 추구하는 전략목표가 네 가지 있다고 말했다. 첫 번째가 미국 주도의 동맹 네트워크유지다. 그런데 네트워크의 핵심은 미일 동맹이며 미일 동맹이 유지되려면 한국이 남아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의 위협이 도움이 된다고 했다.
이와 함께 △미국에 적대적인 국가의 핵‧미사일 개발 저지 △미국 해상패권에 도전하는 중국의 핵전력에 대항(사드 등 MD 구축) △미국 군산복합체의 무기 시장 유지 등을 꼽았다. 그런데 한반도가 정말 비핵화된다면 '미국에 적대적인 국가의 핵.미사일 개발 저지'만 이루게 되는 것이고, 오히려 나머지 세 개의 목표와는 배치되는 것 아닌가?
이삼성 : 북한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비핵화를 이뤄내는 것 자체로 미국 행정부에는 정치적 자산이 된다. 또 미국의 중요한 목표인 핵무기와 미사일 비확산에 기여할 수 있다. 특히 북한이 미국을 위협하는 장거리 미사일들과 결합한 핵무장을 완성한 상태에서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은 트럼프 행정부에 커다란 정치적 자산이 아닐 수 없다.

▲ 9일 평양을 찾은 마이크 폼페이오(왼쪽) 미국 국무장관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노동신문
그리고 북한의 비핵화 방법론에서 결정적인 변수는 한국에 어떤 정부가 들어서느냐 하는 점이다. 위의 네 가지의 목표는 미국의 강경파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군사적 압박으로 일관하는 과정을 통해서 미국은 기득권을 누린다는 차원에서 분석한 것이다. 미국은 한국 정부가 평화적 해법을 강력하게 추구하지 않는 한 군사적 압박 노선을 견지하는 관성을 유지하게 되고 그로부터 각종의 '국익'을 챙긴다는 얘기다.
즉 북한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통해 동맹 네트워크인 미일 동맹을 유지할 수 있고 자신들의 무기를 팔 수 있으며 미사일 방어체계(MD)를 확장할 수 있고, 운이 좋다면 북한이 붕괴할 수도 있다. 북한 붕괴론과 연결돼서 기득권을 누리는 구조가 있는 셈이다.
그런데 한국에 진보적 정권이 들어서 평화적 해법을 강력하게 요구하면 미국내 강경파의 입지가 좁아지고 협상파가 힘을 얻는다. 어차피 강경파가 구상하는 '안전한 첨단전쟁'이라는 군사적 해법은 좀비국가가 아닌 북한에는 통할 수 없기 때문에 강경파는 진퇴양난의 딜레마에서 헤어날 수 없다.
이 때 한국의 진보 정권이 미국 정부 안팎의 협상론에 힘을 실어주면 강경파도 협상을 받아들일 명분을 얻게 된다. 그들에게 한국이 출구를 제공해주는 셈이다. 여기에 한국의 진보정권이 중국과 발을 맞추는 경우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역할이 중요하다. 어떤 한국 정부가 들어서느냐에 따라 미국의 선택은 결정적으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프레시안 : 한반도 평화체제가 달성되면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도 일정하게 바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삼성 : 당연히 바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미국 행정부 내에 있는 권력 엘리트들의 계산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상당히 복잡하다.
부시 정부 때 국무장관을 지냈던 콘돌리자 라이스가 2011년 출간한 자서전 <최고의 영예>를 읽어보면 한반도 정책에 관한 부시 정부 사람들의 계산법을 알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2005년 라이스가 한반도 평화협정을 제안했을 때 의외로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도, 부시 대통령도 반대하지 않았다. 럼스펠드는 한반도 평화협정이 이뤄지면 주한미군을 빼내 세계를 대상으로 한 신속기동군으로 활용할 절호의 기회가 된다고 계산했고, 부시는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나서게 하면 북한이 자동적으로 붕괴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압박과 제재가 아닌 개방에 의한 정권 교체를 떠올린 것이다. 이렇게 미국 권력 엘리트는 다각적인 계산법을 가지고 있다. 즉 그들에게는 대단히 많은 정책 선택지가 있다.
이를 통해 미국의 보수 정권과 남한의 진보정권이 궁극적 목표는 다를 수 있어도 방법론은 서로 합치할 수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타협의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한국과 미국이 궁극적 목표는 달라도 잠정적 합의를 이룰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는 말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미국은 항상 핵 비확산을 최우선 정책과제라고 말해왔는데 이번에 이란 핵 협정에서 탈퇴한 것은 사실 좀 이해하기 힘들다.
이삼성 : 이란의 상황은 한반도의 경우와는 구조적으로 많이 다른 것 같다. 일단 북한의 경우 미일 동맹과 중국의 긴장 구조 틈바구니에서 핵 무장을 완성했다. 반면 이란에는 중국과 같은 긴밀한 배후 국가가 없다. 또 협상 타결 당시 오바마 행정부와 이란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측면이 있었다.
2015년 중동지역에서 최대 문제는 IS(이슬람 국가)였다. 2014년부터 이라크 등을 유린했던 IS에 대처하기 위해서 오바마 정부는 이란과 협력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IS를 견제하는 실질적 군사행동을 하던 집단이 시리아 민병대였는데 이들은 이란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 오바마 정부와 이란이 IS를 매개로 이해관계가 같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IS가 잠잠해졌다. 2015년과 상황이 달라졌다. 또 트럼프 행정부는 오바마 때와는 달리 이스라엘과 굉장히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다. 지난 14일 국제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스라엘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이전하지 않았나. 게다가 이스라엘은 이란 핵협정이 이란에게 저농축 우라늄 시설을 허용했다며 파기를 주장해 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핵 협정이 파기된 것이다.
즉 이란 문제의 경우 매파인 네타냐후가 집권하고 있는 이스라엘 정부와 미국 내 유대인 로비가 미국 강경파를 뒷받침해서 폐기를 이끌어냈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에는 북미 대화를 촉진하는 세력이 집권하고 있다. 양상이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또 중동에는 이란을 배후에서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지정학적 세력이 존재하지도 않는다. 물론 중국과 러시아가 이란을 편들기는 하지만 이해관계가 그렇게 직접적이지는 않다. 중국이 한반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정학적 이익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프레시안 : 아시아와 중동에서 미국이 취하고 있는 정책을 보면, 미국이 내세우는 이른바 '핵 비확산 금지'는 보편적이지 않은 것 같다. 미국의 정치적 목표가 더 우선한다면 그쪽으로 갈 수도 있는 특수성이 있다.
이삼성 : 과거 비핵국가들의 핵무장 과정에서 미국과 국제사회가 보인 반응을 보면 오늘날 세계의 핵무기 비확산 문제는 지정학적인 권력정치의 영역에 속한다.

▲ 이삼성 교수 ⓒ프레시안(이재호)
항구적 한반도 평화체제를 원한다면
프레시안 : 남북미 간에 한반도 평화체제가 타결된다 해도 그것이 끝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 한반도 평화체제가 항구적이고 지속가능하려면 주변국을 어떻게 설득할지가 중요할 것 같다. 이 책에서 이 교수는 독일은 자신들의 통일이 유럽의 안정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주변국에 설득해서 통일이 가능했다고 진단했다.
이를 우리 상황에 대입해보면 한반도의 평화협정만으로는 불충분해 보인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주변국들이 한반도가 비핵화된 통합 국가로 되는 것이 자국의 국익에 유익하다는 점을 인식시키는 게 중요해 보인다.
한국전쟁이 승자도 패자도 없는 이상한 결말로 끝난 것은 한반도의 특수한 지정학적 상황 때문이었다. 즉 미국도 중국도 자신의 의지를 한반도 전체에 관철시킬 방법이 없었다. 미국, 중국 등 주변 강대국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현실적 방안은 한반도 분단 유지였다. 그것이 그들의 국익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민족에게 분단 그 자체가 고통이요 질곡이다. 한반도 분단을 자신의 국익이라 생각하는 주변 강대국들에게 한반도 통합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 교수는 '동북아 비핵지대화', '동아시아 평화벨트' 등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이삼성 : 한반도 평화체제 구상은 동아시아 차원에서 공동안보를 추구하는 노력과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한반도 평화와 동아시아 공동안보를 연결하는 일차적인 고리는 6자회담을 활용하여 동북아에 비핵무기지대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반도와 일본을 비핵무기지대로 만들고 주변 핵보유국들은 그 비핵지대를 존중하면서 핵무기의 군사적 역할을 줄여나가게 한다는 구상이다.
현재 동남아에는 아세안 10개국이 맺은 '동남아비핵지대조약'이 있다. 이 조약 가입국은 핵무기를 만들지도 않고 반입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이들 국가 사이에서는 핵무기 경쟁이 없다. 또 다른 국가, 예를 들어 미국의 핵잠수함이 그 비핵지대를 통과하는 것과 같은 문제는 각국의 개별적 결정에 맡긴다.
이 조약과 함께 동북아 비핵무기지대가 구성되면 동아시아 전체에 비핵무기지대가 성립할 것이다. 그러한 발전은 동아시아 전반의 군사적 긴장을 더욱 해소시킬 공동안보를 확장할 토대가 되어줄 것이다. '동아시아 평화벨트' 구상은 그 연장선에서 생각할 수 있다.
과잉군사화된 타이완해협과 오키나와, 그리고 중국과 미일동맹 사이의 해상패권 경쟁의 중심지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동중국해에 속하는 제주도와 그 주변을 비군사화시킴으로써 이 지역들을 동아시아의 현재적·잠재적 발칸에서 동아시아의 평화와 공동번영을 상징하는 평화벨트로 만들어내는 비전이 필요하다. 어떤 의미에서 남북이 추구하는 서해평화지대의 동아시아적 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벨트를 더 연장해서 동아시아 군사적 긴장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는 남중국해까지 연계한다면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긴장 구조를 형상화했던 대분단선 전체가 평화벨트로 전환될 수 있다. 이게 우리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발판으로 장차 추구해야 할 동아시아 미래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떤 분들은 동북아시아 비핵무기지대 구상을 언급하면 미국과 중국, 러시아 등도 포함해 다 같이 핵무기를 없애자는 것이냐, 황당하다 이런 반응을 내놓기도 한다. 그런데 비핵무기지대는 비핵국가들인 남북한과 일본이 핵무기를 만들지 않고 반입하지 않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여기에 미국, 중국, 러시아 등 주변 핵무기 보유 국가들도 핵무기를 이 지역에 반입하지 않고 사용하지 않고 통과하지도 않는다는 점을 약속하는 것이다. 각국의 국가안보전략 차원에서 동북아 지역에서의 핵무기 역할을 크게 축소하는 조치를 취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의정서 내지 협정 등의 방식으로 그 약속 이행을 보증하는 국제법적 장치를 갖추는 것이다.
프레시안 : 비핵무기지대 구상에서 가장 설득하기 힘든 상대는 일본 아닐까?
이삼성 : 동북아 비핵무기지대 구성에 가장 적극적인 일본 시민사회에서는 미일 동맹 해체까지도 비핵지대 조약에 담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명시적으로 '미일 동맹 해체'를 내세우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본에 대한 미국의 핵우산에서 벗어나는 문제를 조약에 담고자 한다. 미일동맹의 핵심축의 하나가 미국의 대일본 핵우산 제공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같은 얘기가 된다.
그런데 동맹 문제와 비핵무기지대 구상은 분리해야 한다고 본다. 미일 동맹의 문제가 비핵무기지대와 얽히면 이 구상의 실현 자체가 어려워진다.
동북아 비핵무기지대는 미일 동맹과 미국의 대일본 핵우산 제공이라는 문제와 분리될 수 있다고 본다. 실제 일본에 대한 미국의 핵우산이 발동될 때는 중국이나 러시아가 일본을 핵으로 공격할 때다. 그런데 거기에 대항해서 미국이 공격할 대상은 한반도나 일본열도가 아니라 중국이나 러시아다. 따라서 비핵무기지대는 미일 동맹 및 핵우산 문제와 이론적‧현실적으로 분리 가능하다고 본다.
비핵무기지대가 구성되어 공동 안보 질서가 구축되면 미일 동맹과 일본에 대한 미국의 핵우산 제공은 역할이 축소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변화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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