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제정세 칼럼

우리는 왜 전쟁을 했을까

일취월장7 2018. 5. 16. 12:52

하노이 대화, 그리고 싱가포르 대화

[우리는 왜 전쟁을 했을까] ① 대화, 전쟁 억제와 종식의 수단
2018.05.11 09:34:10

하노이 대화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인 1997년 6월 20일부터 23일까지 나흘 동안 베트남 하노이의 메트로폴 호텔에서는 좀처럼 유례를 찾기 어려운 특이한 역사 회의가 열렸다. 베트남 전쟁(1955~1975) 당시 미국과 베트남의 전쟁 수행 당사자들이 직접 얼굴을 맞대고 모여 대화를 나눈 것이다. 베트남 정부는 이 대화를 적극 지원했지만, 미국 측 참석자들은 민간 차원의 개인 자격이었다.

이들의 대화 주제는 오직 하나였다. 영어로 미스트 오포튜니티즈(missed opportunities), 즉 '베트남 전쟁을 회피 혹은 조기 종결시킬 수 있는 기회는 없었는가'였다.

베트남 측 사망자 수만 약 360만 명, 미국 측 사망자는 약 5만 8000명이다. 도대체 왜 이런 막대한 사망자를 내면서까지 베트남과 미국은 전쟁을 벌였을까. 왜 전쟁을 조기에 종결짓지 못했을까. 

1975년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한 뒤 22년 만의 일이었다. 종전 20년만인 1995년 미국과 베트남이 다시 국교를 재개한 지 2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전쟁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하노이 대화'다.(<우리는 왜 전쟁을 했을까>(히가시 다이사쿠 지음, 서각수 옮김, 역사넷 펴냄) 참고)  

하노이 대화에는 미국의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를 비롯, 13명의 미국인이 나섰다. 1961년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국방장관에 임명되었고, 1968년 존슨 대통령에 의해 사실상 해임될 때까지 베트남 전쟁을 직접 진두지휘한 책임자가 바로 맥나마라였다. 그래서 베트남 전쟁은 일명 '맥나마라의 전쟁'으로 불리기도 한다. 

베트남 측은 외무차관이었던 응우옌 고 탁을 필두로 역시 13명의 베트남 측 인사들이 참석했다. 

'메트로폴 호텔'은 1901년 베트남을 식민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가 건설한 호텔이었다. 1954년 베트남이 남북으로 분단된 뒤 북베트남이 '통냐트(통일) 호텔'로 개명해서 운영하던 하노이 제일의 호텔이었다. 

미국은 1972년 12월 18일부터 무려 18일 동안 평화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최대 규모의 북폭을 감행하였다. 이 크리스마스 폭격으로 하노이 일부는 완전 초토화되었고, 어린이를 비롯한 수많은 베트남 인민들이 학살되고 말았다. 

폭격이 한창이던 24일 성탄절 밤, 미국의 유명한 반전 가수 존 바에즈는 메트로폴 지하 방공호에서 기타를 들고 '위 쉘 오버컴(we shell overcome)'이라는 노래를 수도 없이 부르고 또 불렀다. 방공호 안에 피신해 있던 각국의 대사와 특파원들도 폭격의 공포 속에서 함께 따라 불렀다. 

당시 한 일본 특파원이 테이프레코더로 녹음해 존 바에즈의 방공호 반전 노래는 전 세계 반전운동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1970년대 한국의 민주화운동 시위에서 어김없이 불리던 불온한 데모 가요, '우리 승리하리라'가 다름 아닌 바로 이 곡이다.

▲ 로버트 맥나마라 전 국방장관. ⓒgoole.com


전쟁 억제와 종식 수단, 현명한 지도자끼리의 대화 

대화는 내내 격렬했다. 세월이 흘렀다고는 하지만 적이었던 양 당사자가 마주 앉아 전쟁의 전 과정을 들추어내고 복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45년 베트남의 지도자 호찌민이 트루먼 대통령에게 미국과의 수교 의사 편지를 보낸 것에 대해 왜 미국은 무시했는지, 몇 차례에 걸친 미국의 종전 비밀협상 제의를 베트남이 왜 무시했는지 사실 확인부터 서로의 입장과 관점 차이는 그 간극이 너무나 컸다. 

맥나마라의 문제의식과 발언 또한 미국의 전 국방장관으로서는 파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미국 내에서는 배신자라는 비판을 듣기까지 했다. 그러나 베트남 입장에서 보면 강대국인 미국의 관점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았다. 

맥나마라는 2년 전인 1975년 11월 베트남 미국 수교 직후에 하노이를 방문해서 베트남 전쟁 영웅인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맥나마라는 통상의 인사말을 전한 뒤 곧바로 지압 장군에게 1964년 8월 4일 미 구축함 매독스에 대한 베트남의 2차 공격, 즉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 명분을 제공한 이른바 통킹만 사건의 진실을 물은 바 있었다. 지압 장군은 즉각 8월 2일 베트남 영해를 침범한 매독스 함에 대해 정당한 공격은 있었지만, 공해상에서의 2차 공격은 없었으며, 미국이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날조한 것이라고 답변했다. 맥나마라는 미국은 끔찍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고백하며 이 사실을 자신의 회고록에 적어 놓고 있다. 

하노이 대화를 주도한 맥나마라의 다음 발언은 지금 현재의 우리에게는 두고두고 곱씹을만한 내용이다. 

▲ <우리는 왜 전쟁을 했을까>(히가시 다이사쿠 지음, 서각수 옮김, 역사넷 펴냄). ⓒ역사넷

"하노이 대화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베트남 전쟁은 미국과 베트남 쌍방의 지도자가 보다 현명하게 행동했더라면 회피할 수 있는 전쟁이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대화의 교훈을 바르게 배운다면, 미래에 이와 같은 전쟁은 막을 수 있을 겁니다.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교훈을 두 가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는 우선 적을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적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비록 상대가 적이라고 할지라도 최고 지도자끼리의 대화, 그렇습니다. 대화를 계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게을리했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교훈입니다."(<우리는 왜 전쟁을 했을까>(히가시 다이사쿠 지음, 서각수 옮김, 역사넷 펴냄) 227~228쪽) 

우리는 왜 전쟁을 했을까 

4.27 판문점 선언은 순간 시간이동처럼 한순간에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길고도 긴 65년의 전쟁 상태를 끝내고 한반도 냉전 체제를 일거에 허물어 버렸다.

맥나마라가 강조한바, 남북의 두 지도자가 상대방에 대한 편견 없는 이해를 전제로, 새들이 평화롭게 지저귀는 푸르른 봄날의 나무다리에서 무릎을 맞대고 대화와 소통을 하는 순간은 그야말로 온 국민이 꿈인지 생시인지 제 살을 꼬집어 봐야 하는 기적이었다.

그 순간 켜켜이 쌓이고 쌓여 있던 증오와 편견, 그 두껍고 견고했던 콘크리트 휴전선은 순식간에 흐물흐물 녹아버리고 말았다. 

경천동지라는 말로도 부족한 전환이었다. 앞으로 남북 인민들은 남북 지도자들의 주도로 벌어지는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 북미 북일 수교와 평화체제 구축 등의 숨 가쁜 일정을 경이의 눈으로 계속 지켜보게 될 것이다. 

완전한 비핵화와 평화협정을 주제로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사이에 열리는 북미회담 또한 마찬가지다. 65년이 넘게 서로를 악마화해 왔던 북한과 미국이 상대방의 계산과 전략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대화를 하기로 합의하자마자 전쟁은 정말 순식간에 저 멀리 그림자도 보이지 않을 만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대화의 힘은 이렇게 위대하다. 배제가 아닌 인정, 외면이 아닌 경청의 힘은 이렇게 세상을 변화시킨다. 인정과 경청, 대화야말로 민주주의의 기본임을 다시 뼈저리게 확인하는 4.27 판문점 선언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남북이 왜 전쟁을 했는지 차분히 곱씹어 보고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도대체 우리는 왜 그토록 끔찍한 6.25동란의 동족상잔을 벌여야 했을까. 왜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적대적 공존의 휴전 상태에 정지되어 있었을까. 미국과 베트남은 종전 20년 만에 수교했는데, 북한과 미국은 왜 65년이 지났는데도 수교를 하지 않았을까.('한국전쟁'이란 용어 대신 '6.25동란'이란 말을 사용하는 까닭은 인민의 입장에서 전쟁이란 그저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끔찍한 난리가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원인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다시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되풀이되지 않게끔 지속가능하고(sustainable)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전쟁체제 해체(SVID)와 확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이룩할 수 있다. 

남북 두 지도자의 합의와 선언은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의 물꼬와 길을 열었다. 남북 정부와 기업들은 이 길을 따라 새로운 한반도 경제의 번영과 활로를 개척해 나갈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 평화체제의 논밭을 갈고 열매를 수확하는 일은 오직 남북 인민들의 몫이다. 다시는 전쟁이 다시 재발하지 못하게 평화세력을 확고부동하게 온 나라 방방곡곡에 튼튼히 구축하는 일은 온전히 한반도 인민들이 나서서 해야 할 일이다.

맥나마라가 강조한 지도자들끼리의 대화와 약속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지속가능한 평화 체제 구축은 그것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5년마다 바뀌는 지도자에 따라 오락가락 하는 평화체제란 언제든 갈라질 수 있는 살얼음 체제에 지나지 않는다.

멀리 다른 나라 역사를 살펴볼 필요도 없다. 박정희와 김일성의 7.4공동성명을 비롯해서 북미 간 숱한 핵 합의와 선언, 협정의 역사만 보아도 이는 자명하다.

현명하지 못한 지도자가 출현해 대화와 소통을 외면하는 순간 한반도는 다시 전쟁 직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다. 우리는 바로 엊그제 '이명박근혜' 정권 9년 동안 이를 생생하게 체험하지 않았던가. 

▲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 4월 27일 판문각 도보다리에서 30분이상 배석자 없이 대화를 했다. ⓒ판문점 공동취재단


전쟁을 억제하는 힘은 무엇일까 

휴전협정의 당사자이자 한국군의 전시작전권을 갖고 있는 미국은 한국의 식민지 모국이 아니다. 그러나 막강한 미국의 힘의 정치(Power Politics) 앞에서 한국은 여전히 수동태의 형태로 영향력 행사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처지임을 부인할 수 없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을 치르지 않은 해가 단 한 해도 없을 정도로 전쟁이 체질화된, 전쟁으로 먹고사는 전쟁기계 국가다. 전 세계 국방비의 절반이 미국의 국방비다. 2017년 무기 판매액만 약 420억 달러에 이른다. 국제 질서가 미국 일극 체제에서 다극 체제로 바뀌고 있다고는 해도 여전히 미국의 힘은 상상 이상이다. 

한국이 미국에게 앞으로도 계속 주한미군을 유지할 것이며 무기 또한 계속 구매할 것이라는 약속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판문점 선언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미국은 앞으로도 언제든 자신의 이익이 침해받는다고 간주하면, 한반도판 통킹만 사건이나 한반도판 이라크 식 대량살상무기 사건을 조작해서라도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막가파 식 초강대국이다. 

힘이 있어야 상대방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국제 정치에서 만고의 진리로 통한다. 북한의 핵무력 완성 선언이 북미 협상을 이끌어냈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렇다.

그렇다면 한반도가 비핵화 된 상태에서 우리는 어떤 힘을 갖고 한반도 평화체제를 지속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세계의 군사 강국이 모두 집결된 동북아시아의 한 복판에서 말이다.     


6.25는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전쟁이었다

[우리는 왜 전쟁을 했을까] ② 6.25동란과 평화세력
2018.05.12 14:27:44

전쟁세력이 전쟁을 일으킨다

6.25동란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전쟁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시작된 전면전은 분명 북한의 남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누가 전쟁을 먼저 시작했느냐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1945년 한반도가 38선에서 분단된 순간, 그리고 남과 북에 각기 서로 다른 체제의 미소 양대 강국의 군사정부가 들어선 순간 이미 전쟁은 예고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남북의 전쟁은 이미 진행되고 있었으며, 6.25동란은 그것을 전면화한 것이었다. 1945년에서 1950년까지 5년 동안 약 1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각종 투쟁과 시위, 봉기, 게릴라전, 38선에서의 소규모 전투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 2016년 6월 'AP통신이 본 6.25와 서울' 전시회 사진. ⓒgoogle.com


6.25동란은 북한 정부와 남한 정부만의 전쟁이 결코 아니었다. 더더구나 북한 인민과 남한 인민의 전쟁도 아니었다. 

미소의 냉전이 없었다면, 미국과 소련, 중국이 전쟁을 원하지 않았거나 동의하지 않았다면 6.25동란은 일어나지도 않았다. 그만큼 6.25동란의 분명한 주체는 미군정과 소군정의 연장 선상에서 미국과 소련이었다. 남한과 북한은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한쪽을 배제하고 한 쪽만 선택한 전쟁의 피선택자이기도 했다. 

물론 남북의 김일성 정권과 이승만 정권은 명확히 남조선 해방 전쟁과 북진 통일 전쟁을 공언하던 전쟁세력, 전쟁의 일차 당사자 주체였다. 특히 북한은 토지개혁의 성과를 바탕으로 남한을 압도하는 무력과 경제력을 내세워 인민 해방이라는 목적의식을 뚜렷이 가지고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남로당은 남한에서 불법화되어 지하 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남한 인민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고 가장 강력하게 무장투쟁을 선도하는 전쟁세력이었다. 조만식 등은 북한에서 이미 힘을 잃고 있었고, 심지어는 이들도 전쟁을 은연중 원하고 있었다는 증언들까지 있다. 현상 유지 상태에서는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없는 상태에서 현상 타파의 전쟁을 원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의 승리와 베트남 등 아시아 민족해방운동의 고양 또한 전쟁 선택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외부의 원조 없이 단독으로는 전쟁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특히 비행기와 탱크를 움직일 석유와 각종 무기의 확보는 소련의 원조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비밀 해제된 소련과 중국 문서를 연구한 자료들에 따르면 스탈린은 전쟁에 소극적이었다. 중국은 미군이 소련과 합의한 38선을 넘어서 북진하는 순간 순망치한(脣亡齒寒)을 내세워 미 제국주의의 침략이라고 간주하고 참전을 결정했다. 

무엇보다도 미국이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면 애초부터 6.25동란은 불가능한 전쟁이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아직도 미국의 남침 유도설을 확신하고 있기까지 하다.

그동안 이른바 국내외 진보 역사학자들의 6.25동란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대부분 미국 책임론이라고 할 수 있다. 한반도 분단과 전쟁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군산복합체의 무기 판매 지속과 미국 자본주의의 성장을 위한 전쟁경제 확대, 도미노이론에 따른 냉전 체제 설계와 집행에 기인한다는 주장이다. 

그렇다. 한반도 분단과 전쟁의 주요한 책임은 분명 미국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도 주한미군은 유엔사 이름으로 남한에 주둔하고 있다. 미군정은 아니지만 여전히 미국은 한국의 군부를 비롯해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상전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우리의 현실을 솔직하게 모두 인정한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다. 미국과 소련이 아무리 전쟁을 원하고 동의한다 해도 우리 내부에서 전쟁만은 절대로 안 된다는 인민들의 확고한 결의와 이를 뒷받침하는 결사 전쟁 반대의 물리력이 강력하게 존재하고 있다면 전쟁은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전쟁세력을 압도하는 평화세력의 기반과 힘이 있다면 언제든 뛰쳐나올 수 있는 전쟁이라는 우리 안팎의 괴물은 우리 모두가 달려들어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좌우합작 연립정부가 그런 사례이다. 

오스트리아는 왜 신탁통치를 받아들였을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좌우합작 정부를 운영하면서 10년의 신탁통치를 받아들인 오스트리아의 경험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는 반면교사의 사례다. 역사와 정치 문화가 다르고 유럽이라는 지정학의 차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좌우합작이 무산되고 신탁통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전쟁으로 치달았던 한반도와 비교가 되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는 한국과 달리 2차대전 직후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등 4대국의 신탁통치를 받아들였다. 

오스트리아는 2차대전 이전에 좌우익 간 극심한 내전까지 치른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오스트리아의 좌우익 정치 지도자들은 나치 수용소에서 풀려나오자마자 곧바로 좌우합작 정부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연합국과 끈질긴 협의를 통해 분단을 막고 전쟁을 막았다. 이후 오스트리아는 미소 냉전의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중립국으로서 독립과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도대체 오스트리아와 한반도의 차이는 무엇일까. 

불행하게도 남북한에는 그런 평화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세력과 힘이 지극히 미약했다. 여운형과 김구, 김규식 등은 좌우합작을 통한 평화와 남북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쳤지만 결국 전쟁을 막지는 못했다. 

아니 전쟁 이전에 그들은 전쟁세력에게 모두 암살당하고 말았다. 해방에서부터 6.25동란까지 5년의 기간 동안 평화세력은 남북 모두에서 조직된 힘이 없었다. 이들의 정치·경제·사회 기반은 지극히 취약했으며 이것이 6.25동란을 막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이었다.

6.25동란은 1950년 당시 남북한 전쟁세력을 압도하면서 갈등을 조정하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인민의 평화 세력이 미약했기 때문에 제어가 되지 않았던 필연의 전쟁이었다.

아무리 강대국이 한반도를 침략하고자 해도 민주주의와 평화를 실천하고자 하는 정치 세력이 확고부동하게 인민 속에서 힘을 갖추고 있고, 그 강대국 인민들과의 국제 평화 연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전쟁만큼은 막을 수 있었다. 

친소 공산주의 세력과 친미 자본주의 세력을 대화와 소통의 협상 테이블에 앉힐 수 있는 강한 정치력과 인민 연대의 제압력이 있었다면 전쟁은 방지될 수 있었다.

평화세력이 지속가능한 평화체제를 만든다 

6.25 동란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처절한 육성은 바로 이것이다.

인민이 평화 세력으로 무장해야 개죽음과 전쟁을 막을 수 있다. 핵 무장이 아니라 평화와 자유인의 삶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연대와 연합을 결의하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정치력 무장 말이다. 

인민의 주권자 자유인으로서의 자각, 인민의 좌우 합작과 연대 정치력이야말로 평화체제 구축의 주춧돌이다. 

김구, 김규식, 여운형 등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남북 간 전쟁을 막기 위해 좌우합작운동을 온 힘을 다해 펼쳐 나갔다. 그들은 전쟁을 막고 신생 조선을 통일 독립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다 마침내 목숨까지 바친 진정한 애국자들이었다. 

이들 선각자들의 주장은 단순했다. 남북 간에 전쟁이 일어나면 죽는 것은 인민들이고, 이득을 보는 자들은 남북의 매국노들과 미국, 일본을 비롯한 외세뿐이라는 것이었다.

▲ 백범 김구 선생이 1948년 4월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개최된 남북협상회의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google.com


1948년 2월 10일 김구가 38선을 넘으면서 발표한 '3000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을 다시 읽어보면, 그 정확한 전쟁 예측과 전쟁을 막고자 하는 절절한 심정을 느낄 수 있다.

"제2차 대전에 있어서 동맹국은 민주와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천만의 생령을 희생하여 써 최후의 승리를 전취하였다. 

그러나 그 전쟁이 끝나자마자 이 세계는 다시 두 개로 갈리어졌다. 이로 인하여 제3차 전쟁은 온양되고 있다. 
과거에 있어서 전쟁을 애호한 자는 파시스트 강도군 밖에 없었다. 지금에 있어서도 전쟁이 폭발되기만 기다리고 있는 자는 파시스트 강도 일본뿐일 것이다. 그것은 그놈들이 전쟁만 나면 저희들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남북에서 외력에 아부하는 자만은 혹왈 남정, 혹왈 북벌하면서 막연하게 전쟁을 희망하고 있지마는 실지에 있어서는 아직 그 현실성도 없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촉발된다 하여도 그 결과는 세계의 평화를 파괴하는 동시에 동족의 피를 흘려서 왜적을 살릴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 될 것이다. 

이로써 그들은 새 상전들의 투지를 북돋울 것이요, 옛 상전의 귀염을 다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전쟁이 난다 할지라도 저희들의 자질만은 징병도 징용도 면제될 것으로 믿을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왜정 하에서도 그들에게는 그러한 은전이 있었던 까닭이다.

미군 주둔 연장을 자기네의 생명 연장으로 인식하는 무지 몰각한 도배들은 국가 민족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도 아니하고 박테리아가 태양을 싫어함이나 다름이 없이 통일 정부 수립을 두려워하는 것이다."(1948년 2월 13일 자 <서울신문>) 

김구가 개탄하듯이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한반도에는 박테리아가 태양을 싫어하듯 국가와 민족의 이익은 안중에도 없는 매판 전쟁세력이 여전히 극단주의 기득권 세력으로 독사처럼 똬리를 틀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5조 '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는 조항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헌정 파괴세력이 말이다.


가짜뉴스, 그 시작은 1945년 12월 <동아일보>

[우리는 왜 전쟁을 했을까] ③ 전쟁세력과 가짜뉴스
2018.05.14 08:22:56

개미 사회의 의사소통 도구는 페르몬이다. 페르몬을 제거하면 개미 집단은 곧바로 붕괴되고 군집에 속한 개미들은 모조리 죽는다.

사회성 동물인 사람의 소통과 교류 수단, 자기 인식 수단은 언어다. 사람에게서 언어를 제거하면 개미와 마찬가지로 그 언어 공동체는 붕괴되고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도 곧 흩어지거나 죽는다. 물론 다른 언어 공동체로 편입되면 살 수 있다.

사람은 모두 다 유일무이한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귀한 존재다. 일란성 쌍둥이라도 세포 하나까지 똑같은 사람은 단 하나도 없다. 

서로 다른 사람이 모여 협동하고 경쟁하는 공동체와 국가 안에서 협동과 함께 갈등은 필연이다. 대화를 통한 갈등 조정과 관리 방식은 그래서 공동체를 지속가능하게 조화시키는 필수불가결한 관습 또는 제도다. 

사람과 사회의 차이와 갈등은 사람의 진화와 변화, 사회 변화의 원동력이다.

그러나 차이가 차별이 되고, 갈등이 전쟁으로 바뀌는 것은 악성 종양이 생기는 것과 같다. 악성 종양은 억제하거나 수술로 제거해야 한다. 

공동체 안의 차별과 전쟁 또한 억제하고 제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동체는 수많은 사람들의 끔찍한 고통과 함께 붕괴된다. 

병정 개미 가운데 소수 무리가 페르몬을 뿌려대면서 가까운 곳에 죽어가고 있는 탐스런 애벌레 먹이가 있다고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막상 가서 보니 먹이는 없고 죽음의 개미핥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한민국에 그런 개미핥기 끄나풀들이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전쟁세력의 무기, 가짜 뉴스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1945년 12월 27일의 그 유명한 동아일보 1면 머리기사다. 해방이 된 지 4개월이 지난 시점이었고, 12월 1일 동아일보가 복간된 지 채 한 달도 안 된 때였다. 당시 신문은 한 장짜리 2면이었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 영, 소 3개국 외무장관 회의에서 미국은 조선의 즉시 독립을 주장한 데 반해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가짜뉴스의 효시 격인 기사다. 동아일보는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호외까지 발행했다. 

▲ 1945년 12월 27일 자<동아일보> 1면. ⓒ동아일보


조선인들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치욕의 일제 36년 식민지에서 해방된 모든 조선인들의 하나같은 열망은 조선의 즉각적인 통일 독립국가 건설이었다. 그런데 소련이 그같은 즉시 독립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또다시 식민지와 같은 신탁통치를 획책하고 있다니 분노가 저절로 불타오르는 소식이었다. 이전까지 남한의 인민들은 소련을 전혀 적대시하지 않았고, 오히려 해방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것은 명백한 오보였고, 의도된 가짜뉴스였다. 조선의 즉시 독립을 일관되게 주장해 온 것은 소련이었다. 반대로 조선을 신탁통치 해야 한다는 구상을 세우고 이를 일관되게 관철시키고자 한 것은 다름아닌 미국이었다. 

이날을 기점으로 해방 후의 조선 정치는 찬탁의 좌익과 반탁의 우익으로 확연히 갈라졌다. 친일파 처단과 자주독립국가라는 온 국민의 염원은 순식간에 미국이냐 소련이냐, 반탁이냐 찬탁이냐, 좌익이냐 우익이냐 하는 이분법의 진영 논리에 파묻히고 말았다.

미국은 1945년 9월 미군의 조선 점령 초기부터 조선 인민은 자치 능력이 없다고 철저하게 경멸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군은 조선에 진주하자마자 일제의 친일부역 조선인 경찰과 관료들을 대거 다시 미군정 경찰과 관료로 재기용했다. 1853년 미국이 일본을 문호개방한 이래 태평양전쟁 시기를 빼고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미국의 뿌리깊은 일본 우선 전략, 미일 동맹을 통한 아시아전략의 일환이었다. 

일제 식민지 관료기구를 그대로 부활시킨 미군정은 1945년 12월 12일 곧바로 조선인 스스로 조직한 좌우합작 행정 자치기구인 인민위원회를 불법화시켰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미국은 자치능력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를 강하게 추진했다. 

그런데 이처럼 미국이 제안한 신탁통치안을 친일파 언론과 관료들은 완전히 거꾸로 소련이 제안한 것으로 백팔십도 왜곡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는 거센 반탁운동을 통해 하루아침에 반탁 민족주의 세력으로, 매국 부역신문 동아와 조선은 반탁 민족진영 언론으로 신분 세탁을 하고 말았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6.25동란으로 가는 첫 번째 갈림길을 제공한 것은 명백히 1945년 12월의 신탁통치 가짜 뉴스였다. 

촛불이 전쟁세력을 해체한다 

우리는 아직도, 70년 넘게, 대를 이어, 변함없이, 매일매일 되풀이되고 있는 이같은 가짜뉴스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친일에서 종미(친미가 아니다!)로 하루 아침에 상전을 바꾼 전쟁세력은, 대를 이어, 여전히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의 기득권 지배 동맹세력으로 인민 위에 군림하고 있다. 이들이 휘둘러대는 전가의 보도는 종북 빨갱이 타령과 태극기 부대, 즉 가짜뉴스와 유사 파시즘의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다. 

그러나 이제 가짜뉴스가 먹히는 시대는 지나갔다. 

국가주의 이데올로기가 인민들을 옥죄고 블랙리스트가 버젓이 통용되던 이명박근혜 9년의 저강도 유사 유신시대도 끝이 났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일이 폭력과 전쟁을 통해 쟁취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까지 거의 모든 혁명은 폭력을 동반했다. 아예 무장투쟁을 통해 혁명을 성공시킨 사례도 부지기수다.

그런데 한국의 촛불 혁명은 백만이 넘는 주권자들이 광화문 광장을 점령했음에도 그 어떤 폭력 행사 하나 없었다. 그냥 잔치 벌이듯이 평화롭게 모인 촛불 주권자들은 평화의 해방구에서 구호를 외치고 그냥 물흐르듯이 자연스럽게 경찰도 군대도 태극기부대도, 그 어떤 폭력도 뒤로 물러나게 만들었고, 마침내 박근혜를 끌어 내렸다. 이보다 더 평화세력의 놀라운 힘을 웅변해 주는 역사 현장은 없었을 것이다. 

이제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이며, 국민이 대한민국의 새로운 민주주의와 평화 체제를 만들어갈 것이라는 사실을 이보다 더 강렬하게 행동으로 보여준 적은 없었다.

전쟁세력의 경제 근거지는 재벌이다. 박정희와 전두환은 재벌을 육성 지원하고 이들로부터 뇌물을 받아 축재도 하고 전쟁세력 구축에 돈을 댔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극우 폭력단체 땃벌떼, 용팔이 등을 육성한 것처럼 삼성재벌은 어버이연합 등에 돈을 대 폭력시위를 배후조종했다. 재벌들은 전경련을 조직, 여론 조작과 함께 그런 전쟁세력 지원의 창구로 활용했다. 

대한항공도 그런 재벌 가운데 하나이다. 조양호 회장의 부인 이명희 아버지가 박정희 시절 교통부 차관 이재철이다. 최근 동영상 공개로 일부 실체가 드러난 이명희, 조현아, 조현민 등 조양호 일가의 역겨운 갑질은 전쟁세력의 갑질을 보여주는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삼성 이재용을 석방시킨 판사에서부터 장충기 문자에서 그 일부가 고구마줄기처럼 뽑혀 나오는 정계, 관계, 재계, 언론계의 유착과 기득권 갑질 동맹은 청산해야 할 적폐 중의 적폐다.(<뉴스타파> 장충기 문자, 2018. 4. 24.~5. 5.) 

국회 적폐, 사법부 적폐, 관피아 적폐, 언론 적폐, 재벌 적폐, 교육 적폐 등등 청산해야 할 전쟁세력의 적폐는 많고도 많다. 70여년 쌓이고 쌓여 악취나는 쓰레기더미가 63빌딩보다도 더 높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 적폐를 청산하고 갑질을 끌어내리는 것도 하나하나 차근차근 평화의 해방구를 넓혀가는 인민들의 끈질긴 비폭력 촛불 평화 행동임을 지금 우리는 목도하고 있는 중이다.

이명박을 구속시킨 것도 다스는 누구겁니까 묻고 행동하는 촛불 주권자들이었다. 결코 구체제의 기득권에 갇혀 눈치만 보고 복지부동하는 적폐 검찰과 경찰이 아니었다.

갑질 동영상을 공개하고 가면을 쓰고 촛불집회를 열어 조씨 일가 아웃과 갑질 청산을 외치는 재벌 적폐청산의 주역들도 대한항공 직원들과 시민들이다. 재벌 적폐 청산을 해야 할 정부와 입법, 사법부 고위 관피아들은 오히려 재벌을 도와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혁명이든지 혁명 이후에는 구체제 기득권 세력의 반동이 튕겨져 나온다.

촛불 주권자의 힘은 선거를 통해 대한민국 대통령과 행정부 장관들을 바꾸었다. 그러나 입법부와 사법부를 비롯해서 정부와 산하기관의 고위 임직원들까지도 상당수는 여전히 구체제의 이명박근혜 전쟁세력들이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언론은 여전히 전쟁세력이 완고하게 따발총처럼 가짜뉴스를 쏴댄다. 

촛불 주권자의 평화롭고도 끈질긴 일상 정치의 주권 행사와 적폐 청산이 지속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평화가 애국이다 

애국이란 평화를 지키고 평화를 확대하는 것이다. 결코 전쟁이 아니다.

한국의 전쟁세력이란 김구의 지적처럼 정확히 말하면 대부분 이미 오래 전부터 재산과 자식을 외국에 도피시켜 놓고 자신도 여차하면 외국으로 도망갈 만반의 준비태세를 갖춰 놓은 매국노들이었다. 그들은 국가와 공동체를 지키고자 하는 보수세력이 결코 아니다.

6.25동란 당시 대전에 내려가 수도 서울을 사수하고 있다고 거짓방송을 하고는 한강 다리를 폭파해 수많은 서울시민을 죽인 자들, 부산항에 도망갈 배를 마련해놓은 채 부산과 가까운 일본의 야마구치 현에 망명정부를 세우겠다고 일본정부에 구걸한 자들, 이들이 다름아닌 이승만과 남한 정부 관리들, 언론과 기업인들이었다. 

전쟁을 수행할 석유도 능력도 없는 북한은 괴물이 아니다.

북한이 극단의 군사주의 체제를 선택한 주체 왕조 체제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심각한 식량난과 악화된 경제난 속에서 미국의 극심한 봉쇄정책과 체제 붕괴 전략에 맞서 핵개발과 선군정치라는 극단의 군사주의 노선을 선택한 것은 북한의 생존 전략일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북한은 군사 우선주의 노선에서 경제 우선주의 노선, 민생 우선 정책으로 확실하게 전환하고,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에 사활을 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남북한 평화체제와 민주주의 정착, 국가주의 극복, 지역 자치공동체의 재생이란 과제는 사실 분단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결코 달성 불가능하다. 남북의 군사주의자와 국가주의자들을 고립시키지 못하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자치와 자립의 민주주의 공동체 사회는 전혀 실현 불가능하다. 

4.27 판문점선언은 한반도에서 역사를 바꾸는 진정한 애국의 길을 열었다. 이제 인민들이 평화체제의 구축이라는 애국의 길로 나설 때이다.  


태극기부대, 이스라엘 국기가 웬 말인가

[우리는 왜 전쟁을 했을까] ④ 국가 우선주의에서 국민 우선주의로
2018.05.15 10:46:33

국가주의는 최악의 일제 잔재다

사람은 언어로 생각하고 언어로 세상을 만드는 사회성 동물이다. 그래서 모든 사회운동과 문화운동은 먼저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4.27 판문점 선언은 길게는 근대 100년 동안 지속된 구체제, 폭력을 수단으로 하는 적대적 공존과 전쟁문화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는 전환점이었다.

이제 새롭게 전개되는 인민의 한반도 평화운동은 새로운 패러다임과 새로운 평화의 언어를 새봄의 벚꽃과 철쭉 축제처럼 만들어낼 것이다. 

우리가 가장 먼저 벗겨내야 할 구체제의 이데올로기 족쇄 가운데 첫 번째가 국가주의다.

국가주의란 인민을 위해 국가가 존재하는 게 아니라 국가를 위해 인민이 존재한다는 이데올로기다. 한마디로 국가 우선주의, 국가 지상주의다. 국가주의는 국민을 국가에 집중시키고 복종시키기 위해 상시 전쟁 상태의 전쟁국가를 만들어낸다.

히틀러의 제3 제국과 일본 제국주의가 그랬다. 나이 어린 가미카제 특공대 병사들은 대일본제국 만세를 외치면서 자살공격을 하도록 세뇌 교육을 받았다. 국가의 결정에 무조건 복종하라는 말은 결국 관료와 지배층의 결정에 무조건 따르라는 말이다.

국가주의는 지배자, 독재자들이 자신들을 국가와 동일시하고 인민들을 억압 착취하기 위한 편리한 인민 노예화 이데올로기다. 국기와 국가(國歌) 등 국가주의 상징에 대한 지나친 충성 의례를 강요하는 것도 국가주의의 도구 가운데 하나이다. 태극기부대가 그 사례다.

국가가 인민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묻지 말고 국민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으라는 미국 대통령 케네디의 취임 연설문은 국가주의의 아주 간결한 정의다.

오늘날 미국의 지배층과 정치가, 펜타곤 전쟁 마피아들은 거침없이 자신들을 국가주의의 결정체인 제국이라고 호언한다. 록펠러, 모건 등 국제 금융 마피아들의 자본과 국방부 지원으로 제작된 숱한 할리우드의 국가주의 영화는 지금도 넘치고 넘친다.

국가주의는 국가의 암세포다. 민주주의 정치라는 면역력을 감옥에 가두어 놓고 수많은 인민을 학살하는 끔찍한 전쟁으로 치달아 스스로 무덤을 파고 들어가는, 국가의 악성 종양이다.

전쟁은 서구의 이른바 전문가들이 주장하듯이 다른 수단을 동원한 정치의 연장이 결코 아니다. 전쟁은 명확히 정치의 실패다. 

정치란 갈등을 끈질기게 조정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아무리 험한 욕설과 몸싸움이 일어나도 전쟁으로 비화하지는 않도록 때로는 냉각 기간을 갖기도 하고, 때로는 술도 먹고, 때로는 정략을 동원하기도 하면서 타협과 조화를 추구하는 게 정치 본연의 모습이다.

그런데 국가주의는 이런 정치를 부정하고 인종청소 하듯이 없애버린다.

한국의 국가주의는 부활한 친일파들이 구축해 놓은 친일 잔재이자 군사독재체제의 유산이다. 민주공화국의 이념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부활 이데올로기다. 판문점 선언을 음양으로 무력화시키고자 할뿐만 아니라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아닐 수 없다. 

▲ 지난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남북 정상회담을 진행하는 동안 보수단체 회원들은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에서 집회를 열었다. ⓒ연합뉴스


국가 우선주의에서 공동체 우선주의로 

대한민국 헌법은 국가가 최고의 권리를 갖고 있다고 명시한 조항이 단 하나도 없다. 국가는 국민에 대한 의무 조항만 있다. 

헌법에는 권리라는 말이 21번 나온다. 모두 주권자인 국민, 인민의 권리다. 의무란 말은 20번 나온다. 자녀에 대한 교육 의무, 근로의 의무, 납세의 의무, 국방의 의무 등 국민의 의무를 빼고는 나머지는 모두 국가와 대통령, 국회의 의무다. 

헌법 10조는 이를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국가주의는 애국을 강요한다. 그러나 강요된 애국은 애국이 아니다. 지켜야 할 가치가 있다고 인민 스스로 판단할 때 애국심은 저절로 나온다. 내 가족과 내 이웃, 내가 살고 있는 지역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국가가 있는 것이고, 그래서 국토 방위와 국가 안전을 위해 흔쾌히 병역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물론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병역 의무는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 하는 감옥과도 같은 강제 사육 기간으로 청년들에게 인식되어 왔다. 그나마 돈 있고 배경 있는 전쟁세력의 기득권 자식들은 갖가지 편법을 동원해 아예 군대에 가지도 않았다.

남북의 전쟁 체제는 폭력으로 인민을 이 같은 국가주의의 감옥에 가두어 놓았다. 이제 우리는 그 같은 감옥의 벽부터 우리 스스로 평화의 망치를 들고 베를린 장벽 허물 듯이 허물어뜨려야 한다. 

국가 우선주의가 아니라 국민 우선주의와 공동체 우선주의가 대한민국 헌법이 지향하는 가치다. 공동체 국가가 한반도 평화체제를 지속가능하게 만들고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평화국가다. 지역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지방의 연대(연방주의)와 연합, 권력 분점의 연방주의 국가가 평화와 민주주의를 꽃피게 할 수 있다.  

지방분권과 지역자치가 인민의 평화체제 구축에 필수불가결한 까닭은 이것이야말로 주권자의 권력행사와 지역공동체 재생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전국 방방곡곡의 지역공동체 자치 민주주의가 떠받쳐 주지 않는 민주공화국은 언제든 파시즘으로 휩쓸려 들어갈 위험이 너무나 많다. 비만증 걸린 국가주의는 점점 비대해지는 관료제로 귀결되고, 결국은 부패와 불평등으로 국가 자체를 붕괴시키고 만다. 

지방이란 말은 고을의 행정 용어로 그 자체가 중앙권력의 용어이자 개념이다.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풀뿌리 인민들의 자치와 자립 시각에서는 지역이란 말이 사용된다. 지방과 지역, 고을과 마을은 이렇게 관점의 차이가 뚜렷한 말이다. 고을 수령이라고 하지 마을 수령이란 말은 사용하지 않는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공동체 국가를 강조할 때는 중앙정부 시각의 지방자치란 말 대신 굳이 지역자치란 말을 쓰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오늘날 한국의 헌법은 여전히 주권재민의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대의정 권력체제 일색이다. 깃발만 주권재민의 민주공화국 깃발이지 실제로는 전국토가 반란군인 극소수 엘리트 대의정에 점령되어 있는 형국이다. 주권자의 권력 행사와 자치 민주주의는 아예 원천 봉쇄되어 있다. 대통령만 제왕이 아니다. 제왕적 국회의원, 제왕적 판사, 제왕적 검사 등을 우리는 지금 점점 더 커지는 분노와 함께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 

국회와 행정부의 여전한 '이명박근혜'식 행태를 보라. 심지어 사법부는 주권자의 사법권력 위임 절차인 선거도 거치지 않고, 법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제멋대로 방목된 도적의 무리처럼 탈취한 사법 권력의 칼을 마구잡이로 인민들을 향해 휘두르고 있다.

진보 국가주의도 극복 대상이다 

한국 사회에서 진보 세력이란 그 주의 주장과 범위가 너무나 넓다. 사회주의 지향 세력을 지칭하던 진보란 말은 1990년대 초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사회민주주의를 포함해서 이른바 개혁을 지향하는 세력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변했다. 심지어는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자들도 진보를 자처한다. 

워낙 한국의 우익이 종잡을 수 없는 20세기의 극우 전쟁세력 일색이었기에 벌어진 코미디 같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태극기집회에 감초격으로 성조기가 나오는 것은 그렇다 쳐도 이스라엘 국기가 나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미국인과 유럽인들이 있을지는 의문이다.

현실 사회주의는 사실 국가 사회주의 또는 국가 자본주의라고 지칭될 정도로 국가주의로 치달았다.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생산수단의 국유화로 대체한 결과였다. 구소련은 수천 년 내려오던 전통 미르 농업공동체를 강제로 해체하고 농민을 국영농장의 노동자로 신분 이동시키기도 했다. 사회 대신 국가를 대입한 것이다. 

결과는 사회주의의 실험의 대실패였고, 실제로는 국가주의의 실패였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한국의 진보 또한 지금까지도 국가주의에 갇혀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측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진보학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기본소득을 국가복지의 축소로 보고 반대하기까지 한다. 

기초자치단체의 정당추천제를 강하게 주장해, 보수 정당에 명분을 제공해 주면서 정당추천제 폐지를 막은 주범 또한 자칭 진보정당인 민노당, 지금의 정의당이었다. 결과는 지방자치는커녕 중앙 권력자에 예속된 지방 토호 정치, 지역까지도 보수-진보의 적대적 공존으로 분열되는 지역공동체 민주주의 정치의 실종이었다. 

지방과 지역을 국가 차원에서 중앙을 추종해야만 하는 하위 식민지로 본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는 행위였다. 

6월 항쟁 이후에 창립하거나 변화된 이른바 진보언론 또한 이런 국가주의에 갇혀 여전히 중앙언론에 머물러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방은 그저 지방판이나 중앙에서 파견하는 주재기자로 존재할 뿐이다. 지금도 여전히 보도의 대부분은 중앙의 의제이거나 국가에서 생산하는 뉴스 따라잡기 중심이다. 

새로운 저항과 탐사 미디어로 주목을 받은 팟캐스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4.27 판문점 선언을 계기로 국가주의 언론에 대한 성찰과 새로운 모색은 풀뿌리 지역 미디어와 결합하는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의 주요한 과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재벌과 국가로부터의 광고에 의존하는 '기생언론'을 때려치우고 독립언론을 추구하는 실험은 이미 다양하게 진행 중이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역 미디어 연대 연합으로서의 연방주의 언론, 지역주민들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는 제대로 된 연대의 지역 미디어 활동이야말로 풀뿌리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전초기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바야흐로 남한 내부의 상위 적대적 공존이라고 할 수 있는 남북-북미의 적대적 공존이 해체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판문점 선언 이후의 한반도 정치경제 변화와 인민의 평화체제 구축에 이른바 진보 언론이 무슨 기여를 할 수 있을까. 아니 급변하는 미디어 시장의 변화 앞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는 있는 것일까.     


자본의 '북침'이 아닌, 공동체 경제의 번영으로

[우리는 왜 전쟁을 했을까] ⑤ 성장의 경제에서 사람의 경제로
2018.05.16 10:18:13

6.25동란이 만들어 낸 '폭력 사회'

한국은 심하게 말하면 거대한 노동·노예 집단, 거대한 정신병동의 폭력국가, 폭력사회였다.

오늘날 한국사회가 성폭력을 비롯한 다종다양한 숱한 아동폭력, 학교폭력, 교육이라는 폭력, 이데올로기 폭력, 조직폭력, 노조 파괴 폭력, 조 씨 일가의 갑질 폭력 등등 가히 전(全) 사회가 폭력을 내면화한 폭력집단, 폭력인간이 된 근원에는 자본의 폭력까지 성장시킨 주범이자 총합으로서 국가폭력이 자리 잡고 있다. 

모든 폭력의 기초이자 시발점은 국가폭력이며, 특히 군대, 경찰, 사법제도 등의 제도화된 폭력이다. 파시즘과 일본 제국주의가 그 정점이다. 

일제의 폭력국가 유산은 깊고도 넓은 일상의 폭력이었다. 모든 갈등을 폭력과 무력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일제 잔재의 청산은 친일파의 부활과 반민특위 해체와 함께 물거품으로 끝나고 말았다. 김구, 여운형 등의 암살을 포함한 서북청년단 등의 정치폭력 일상화도 결국은 일제 폭력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었다. 땃벌떼와 용팔이의 후예인 어버이연합 등의 폭력단체들도 마찬가지다. 

6.25동란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 같은 폭력의 일상화와 국가주의라는 일제 잔재 청산 작업이 시작조차 되지 못한 데 있었다. 

6.25 동란으로 기사회생한 이승만 독재정권 이후 박정희 유신체제와 전두환 군사독재 체제, 이명박근혜의 저강도 독재 체제 등 길고도 긴 폭력국가의 지속은 한국의 인민들에게는 모태 폭력의 유전자와도 같은 것이었다. 광주항쟁의 폭력 진압은 한국전쟁의 양민학살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었다.(1950년 대한민국 제2대 총선거인 5.10 선거에서는 사실상 초대 이승만 친일정권을 붕괴시키는 투표 주권의 혁명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당시 전체 의원 210명 가운데 이승만의 대한국민당은 겨우 24석을 얻는 데 그쳤다. 야당인 민주국민당도 24석이었다. 무소속 당선자는 전체의 60%인 126명이나 되었고, 1948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해 총선거에 불참했던 남북협상파와 중간파도 다수가 당선되었다. 대통령 간선제였던 당시의 헌정 체제에서 이승만은 사실상 대통령에 재선될 수 없었다. 6.25 당일 아침에도 이승만은 한가롭게 경회루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이런 식물 대통령 이승만을 살려낸 것이 다름 아닌 김일성과 박헌영 주도의 6.25동란이었다.) 

국가폭력과 자본의 폭력이 결합한 정점에 다름 아닌 핵발전소와 핵무기가 있다. 때문에 한반도 비핵화 과정이란 바로 이 같은 국가폭력의 근원을 인민 스스로 해체하고 치유하는 공동선의 과정이어야만 지속가능한 평화 체제 구축의 기초를 닦을 수 있을 것이다.

폭력의 치유, 국가와 자본으로부터의 해방 공간, 마을공동체

아이들이 어떠한 피난처도 없이 무방비 상태에서 가해자로부터 폭력을 당할 때 심리적으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자 피난처는 자신과 그 가해자를 동일시하는 것이다. 폭력은 폭력을 성장시키고 확대하며 결국은 사회 폭력과 일상의 폭력을 강화시킨다.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수많은 피폭 정신질환자를 양산한 원흉은 전쟁국가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6.25동란은 전 인민을 빨갱이 사냥의 폭력에 노출된 희생자이자 폭력을 휘두르는 정신병동 사회의 폭력 인간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한국의 인민들은 거의 대다수가 결국에는 권력과 힘을 추구하고, 국가폭력의 배다른 쌍둥이 폭력인 성장과 개발의 자본폭력까지 폭력을 내면화한 스톡홀름 증후군의 정신질환자 삶을 당연시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진보운동과 민주화운동 역시 어쩌면 그런 국가폭력을 당연시한 국가주의 추구의 사회운동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른바 민주정부 또한 10년 동안 권력을 갖게 되자마자 똑같은 국가폭력을 인민에게 휘둘렀다. 

한국의 여성주의자들이 성폭력의 해결책으로 내놓는 각종 성폭력 방지 제도화는 실제로는 오히려 국가폭력을 더욱 강화시킴으로써 성폭력을 더욱 조장할 수 있는, 어쩌면 문제의 근원을 보지 못하는 국가주의의 측면이 있음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내면화된 국가와 자본의 폭력을 치유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국가와 자본의 폭력으로부터 해방된 공간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데 있다. 그것이 수많은 지역의 풀뿌리 모임이고, 우애와 환대의 이웃 관계를 회복하는 자립·자치의 마을공동체 운동이다. 그것이 남북한 적대적 공존을 끝장내는 평화운동이고 한반도 비핵화 운동이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자유롭게 소통하고 만나고 대화하고 우애를 나눌 수 있는 데서 폭력의 치유는 시작된다. 서로의 피폭에 대해 공유하고 어루만져주고 자유인으로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자유인들의 연합체야말로 국가폭력과 국가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일 것이다. 

전체 가구 가운데 20% 이상이 1인 가족일 정도로 전쟁국가와 자본의 폭력에 인간관계와 공동체가 산산이 깨진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4.27 평화운동은 이런 밑바닥 자유인들의 연합체에서부터 시작되어야만 거대한 국가폭력을 해체하고 새로운 평화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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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 지상주의에서 사람 우선주의로 

자본주의는 신성불가침의 절대 선(善)이 결코 아니다. 아니 오히려 자본주의는 이제 코뚜레를 꿰어 고삐를 죄고 그 탐욕과 방임상태를 억제해야 한다. 

대한민국 헌법은 결코 자본주의 경제의 헌법이 아니다. 공산주의 경제의 헌법도 아니다.

굳이 헌법의 표현을 빌리면 '국민의 경제' 헌법이다. "개인과 기업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하되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헌법 제119조) 국가가 규제와 조정을 하는, 재산권의 행사까지도 공공복리에 적합해야 한다(헌법 제23조)고 명시하고 있는 공동선의 경제를 추구한다. 

우리 헌법은 다양한 기업과 생산방식을 포용하는 자유롭고 창의로운 민주주의 경제 헌법이다. 주식회사 같은 자본주의 경제, 공기업 같은 사회주의 경제, 협동조합 등 사회적경제, 자영업과 소농 등 소소유자 경제 등 다양한 경제를 모두 용인하고 포괄한다.

자본주의의 성장 지상주의는 폭력이다. 최대한의 이윤과 성장을 위해서 노동자와 국토와 대기를 비롯한 환경은 무자비하게 희생되고 파괴된다. 99%의 인민을 값비싼 기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싸게 노동자 노예로 부려먹다가 '노동력이 마모'되고 나면 가차 없이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린다. 살인 미세먼지와 미세 플라스틱, 기후변화 등 인류를 멸종으로 이끌지도 모를 환경 재앙의 주범이면서도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 

오직 이윤만을 위해 폭력국가와 일체가 되어 벌이는 삼성재벌의 정치폭력배 육성과 지원은 자본의 일탈이 아니다. 용역깡패를 동원한 노조파괴 폭력 행사는 자본의 본래 모습 그 자체다. 물론 사회주의 또한 국가주의를 바탕으로 전쟁경제, 폭력경제로 치달았다.

자본주의는 자본이 주인인 서구 산업화 경제 이데올로기다. 결코 사람이 주인인 경제가 아니다. 사회주의 또한 자본주의와 쌍둥이로 국가가 주인인 서구 산업화 경제 이데올로기였다.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와 마찬가지로 현실 자본주의도 이미 실패를 예고하고 있다. 자원과 에너지 고갈, 기후변화 등만이 문제가 아니다. 사회와 유리된 금융자본주의 자체의 폭주는 조만간 붕괴를 피할 수 없다. 오늘날 전 세계 외환 시장의 약 2% 정도만이 대금 결제와 직접투자 등의 이른바 실물경제에 사용된다. 나머진 모두 카지노 투기 노름이다. 이런 투기 노름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겠는가. 

한반도 평화 경제가 이런 카지노 경제 체제에 목을 매달 아무런 이유가 없다.

한국은 이미 자본주의 경제 체제도 아니다. 그냥 대를 이어 부와 권력과 심지어 학력까지 세습하는 세습 경제 체제, 봉건 경제 체제다. 천박한 재벌 경제 체제다. 전쟁 세력의 기득권 유지 경제 체제다. 

극단의 불평등과 양극화, 1% 상위 재벌들만 피둥피둥 살찌고 나머지 중소 영세기업인과 자영업자를 포함한 대다수 인민들은 나날이 삶에 짓눌리는 이런 경제 체제를 지속시킬 까닭은 하나도 없다. 

한반도 평화 경제의 새 시대를 맞아 우리는 사람과 공동체가 주인인 경제 패러다임으로의 대전환을 우리 스스로의 준비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언제든 전쟁 경제로 순식간에 바뀔 수 있다. 사람의 경제, 지속가능한 평화 경제의 구축이야말로 이 같은 전쟁경제로 결코 되돌아갈 수 없게끔 만드는 방파제다. 

자본의 '북침'에서 공동체 경제의 공존과 번영으로 

남북한과 남북중러 사이에 경제 교류가 활성화되고 무역 규모가 엄청난 규모로 확대되면 그것이 평화체제를 담보하는 확실한 약속어음이라는 주장이 난무한다. 주로 재벌과 기업 홍보지에 가까운 경제지들이 그런 주장을 한다. 물론 그런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나 2차 세계 대전이 서구 유럽 국가들 사이의 경제 교류가 없어서 일어난 것은 전혀 아니다. 전쟁의 문제는 다시 강조하지만 정치의 문제다.

판문점 철조망이 걷히자마자 사람이 아니라 자본부터 대규모로 자유롭게 '북침'하는 그런 평화 경제란 재앙이다. 재벌들의 투기 불로소득을 더 확대하는 신경제라면 그것은 미친 짓이다. 

한반도 에너지전환의 계획과 실천 없이 미세먼지 배출 화석연료 발전소를 대규모로 북한에 건설하고, 거대한 송전탑을 북한에까지 마구잡이로 세우는 남북중러 슈퍼그리드 사업이라면 밀양 송전탑 사태를 북한에서도 일으키고자 하는, 썩을 대로 썩고 부패한 에너지 적폐 독재 체제의 연명술일 뿐이다. 

에너지와 식량은 그저 돈벌이하기 좋은 소비재 산업이 결코 아니다. 에너지와 식량은 인민의 목숨과 직결되는 생존재라는 사실을 성찰해야 한다. 

동해안에 가스관을 설치하고 서해안에는 바다와 철도를 이용한 물류 등 경제 기초시설의 구축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속도로와 거대 슈퍼마켓이 생기면서 남한의 읍면동 지역경제가 초토화되고 마을공동체가 해체되는 것을 북한에서도 반복하려는 자본의 거대 물류 인프라 설비는 거대 독점자본 체제의 복사판이 될 위험성이 다분하다.

바야흐로 몇 % 성장에 집착하는 성장 지상주의의 주술에서 이제는 해방될 절호의 순간이 왔다. 인민의 생활과는 관련도 없고 오로지 극소수 재벌 배만 불리는 숫자 경제는 이제 지겹기까지 하다. 

한반도 평화 경제는 성장에 굶주린 자본의 먹잇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과 사회가 중심이 되는 국민경제, 공동체 경제의 돌파구여야 한다. 청년 일자리가 수도 없이 생겨나고 불평등과 양극화가 풀뿌리 마을경제부터 해소되는 대안의 경제 체제를 구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한반도 번영과 평화의 경제다 

사람의 경제, 한반도 평화 경제의 신천지를 여는 주체는 오직 주권자인 인민들 스스로에게 있다. 문재인 정부의 신경제를 이 같은 국민경제 패러다임의 전환이 될 수 있도록 추동하는 것은 오직 촛불 주권자들의 실천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