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제정세 칼럼

남북? 금기를 금지합니다

일취월장7 2018. 5. 15. 11:43

남북? 금기를 금지합니다

[장석준 칼럼] 1968년 세계혁명운동 50주년
2018.05.15 03:41:12

올해는 1968년 세계혁명운동 50주년이다. 사실 1968년에 성공한 혁명은 하나도 없었다. 파리가 혁명 일보직전인 듯 '보였고' 프라하는 정말 혁명 중이었지만, 다 실패했다. 그런데도 ‘1968'은 현대사의 상징적 연도 중 하나가 됐다. 비록 당장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지구 전체를 무대로 한 반란과 봉기의 연쇄가 너무나 장관이었던 데다 그 영향도 일국의 승리한 혁명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1968년 세상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던가? 음력설이었던 1월 30일에 남베트남 전역에서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이른바 '테트(구정) 공세'가 시작됐다. 시가전에서 미군이 게릴라에 밀리는 모습이 전 세계에 TV로 중계됐고, 이것이 거대한 서막 역할을 했다.

곧바로 2월에 서베를린에서 베트남 문제에 대한 국제 대회가 열렸고, 이 자리에 각국 학생운동 대표들이 참석해 이후 몇 달 동안 전 세계를 뒤흔들 세력의 실체를 알렸다. 두 달 뒤 서베를린에서는 총격 사망자까지 발생한 격렬한 반체제 시위가 벌어졌다.

바로 이때(4월) 미국에서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당했고, 절망한 흑인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은 베트남 전쟁 반대와 대학 개혁을 요구하는 학생들에게 점거됐다. 미국, 서독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에서도, 일본에서도, 복지국가 스웨덴과 제3세계 멕시코에서도 학생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가장 결정적인 두 장면은, 위에도 언급한 파리와 프라하에서 연출됐다. 5월에 프랑스에서도 대학 문제와 베트남 전쟁이 도화선이 돼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진정한 사건은 그 다음부터였다. 1천만 노동자가 학생 시위에 호응해 대중 파업에 돌입했다. 한때 해방의 영웅이었으나 이제는 늙은 권위주의 통치자일 뿐인 샤를 드골은 군부의 친위 쿠데타까지 고려해야 했다. 또 다른 '프랑스 혁명'이 임박한 듯 보였다.  

그래도 프랑스 사태는 체제의 유연한 대응으로 일단 흐지부지됐지만, 체코슬로바키아는 그렇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트'를 소련 공산당보다 20년 앞서 시도한 공산당 개혁파 정부에 호응해 민중권력이 이미 일상이 돼 있었다. 미국과 함께 1968의 또 다른 적대 세력 중 하나였던 소련 정부는 이를 결코 두고 보지 않았다. '프라하의 봄'은 8월 '사회주의 형제국'(?)의 탱크에 짓밟혔다. 더불어 현실사회주의는 자기정정과 갱신의 절호의 기회를 발로 차버렸다.  

1968년의 남은 몇 달 동안도 세상은 들썩였다. 대선 후보를 뽑는 미국 민주당의 시카고 전당대회는 베트남 전쟁을 규탄하는 시위장으로 돌변했고, 멕시코 올림픽은 부패 정권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피로 얼룩졌다. 그리고 이탈리아는 프랑스의 5월보다 더 대중적이고 전투적이며 장기간 계속될 노동자 투쟁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1968년의 전 세계적 사건들을 대충만 훑었는데도 숨이 막힐 정도다. 그만큼 예외적인 한해였다. 여러 나라에 연쇄적으로 혁명이 일어난 사례로는 이미 1848년 유럽혁명이 있었지만, 지구 전체가 무대가 된 사례는 1968년이 최초다. 이후에도 1989년 동유럽 민중혁명이나 2011년 '아랍의 봄'이 이를 제한된 지역 안에서 반복했을 뿐이다.

그렇기에 신자유주의 위기 이후의 세상은 1968년 50주기를 예사롭게 넘길 수가 없다. 마치 그때처럼 전 세계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새로운 역사 국면으로 돌진할 수는 없을지 고민하고 갈망한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대학입시 경쟁 강화 시도에 반대하며 50년 전과 마찬가지로 주요 대학을 점거한 프랑스 대학생들의 구호에 바로 이런 열망이 꿈틀거린다.


"우리는 1968을 기념하지 않는다. 지금 1968을 계속한다."

1968이 과거인 이유, 그럼에도 현재와 직결된 이유  

하지만 1968이 그대로 재연될 수는 없다. 현재의 젊은 세대(이른바 '밀레니얼 세대')에게 충고랍시고 1968을 반복하라고 할 수는 없다. 이 해에 벌어진 사건들의 연쇄는 대단히 독특한 정세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1968을 '영원한 청춘의 반란' 쯤으로 낭만화하는 시각을 걷어 내면, 대략 다음과 같은 역사적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누가 뭐래도 1968은 베트남 없이 생각할 수 없다. 1968은 제3세계 반제국주의 투쟁과 다른 지역 사회운동 사이의 폭발적인 상호 작용의 결과였다. 어쩌면 아직 식민지의 형식적 독립조차 완결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가능했던 광범하고 치열한 국제 연대였을지 모른다. 물론 북반구의 남반구 지배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식민 통치나 전쟁보다는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경제적 지배여서 그때와 같은 극적인 국제 연대는 기대하기 힘들다. 아마도 중국에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나는 정도가 돼야 그런 국제 연대가 가능할지 모르겠다.

1968은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의 긴 그림자를 시야에 담지 않으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거리에 나온 젊은이들만 봐서는 안 된다. 그들이 맞서거나 대화한 상대가 누구였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이들 기성세대는 제2차 세계대전을 직접 겪은 이들이었다. 그만큼 파시즘의 잔해도 강하게 남아 있었지만, 반파시즘 레지스탕스의 기억도 생생히 살아 있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반파시즘 투쟁의 성취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문제제기를 할 수 있었다. 신자유주의의 폐허 위에서 출발해야 하는 지금 청년들과는 전혀 다른 조건이었다.

게다가 그 시절은 자본주의 최대 최장 호황의 끝 무렵이었다. 웬만한 언론의 1968 특집 기사가 예외 없이 지적하는 것처럼, 그때 대학생들은 취업 걱정이 없었다. 그때의 고민은 오히려 취업하고 난 뒤에 해야 할 노동의 비인간성이었다. 이런 장기 호황의 긴 여진 속에서 이후 68세대 상당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안온한 중산층의 삶을 살았다. 그러고는 이제 망가진 세상을 물려주려 하고 있다. 한국의 86세대가 욕을 많이 먹지만, 그 원조는 서구 68세대다. 그러고 보면 신자유주의야말로 1968의 최대 유산 아니냐는 비판은 일리가 있다.

1968년 세계혁명운동은 이렇게 지금과는 전혀 다른 정세 속에서 그 시절의 독특한 요소들이 서로 결합된 결과였다. 그렇다고 이를 러시아 혁명만큼이나 먼 과거의 일쯤으로 넘기고 말 수는 없다. 아직 이를 능가하는 사례가 없는 대사건으로서 1968은 지금 우리의 투쟁과 결단, 건설과 직접 이어지는 중요한 참조점이다. 프랑스 대학생들의 구호가 분명히 하듯, 1968을 '반복'할 수는 없어도 이를 '계속'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내가 생각하는 이유들은 이렇다.

첫째, 1968을 거치면서 인간 사회에는 근본 모순'들'이 존재함이 분명해졌다. 그때까지는 좌파조차 자본과 노동의 대립 혹은 부와 노동의 괴리라는 한 가지 모순에만 집중했다. 덕분에 다른 모순들은 심지어 사회운동 안에서도 억압돼왔다. 그러나 1960년대에 새롭게 성장한 사회운동들은 이 모순들을 폭로하고 점차 계급 모순과 대등한 문제로 부각시켰다. 지적 차이에 따른 권력 관계, 제국주의가 낳은 인종/민족 사이의 위계, 산업 문명과 지구 생태계의 충돌이 그런 문제들이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충격을 준 것은 여성과 남성의 차이와 모순 그리고 이에 바탕을 둔 가부장제의 폭로였다. 정확히 말하면, 이 문제는 1968 사회운동이 아니라 이 사회운동 안에조차 존재하는 남성 지배에 도전한 포스트-1968 사회운동을 통해 부각됐다. 그러나 기존 좌파 교리나 전통조차 넘어서려던 1968의 요소들이 이런 도전을 부추겼다는 점에서 이를 1968과 한 묶음으로 보는 게 억지는 아니다. 말하자면 마치 어제 일처럼 1968과 직결된 현재의 운동은 다름 아닌 미투운동이다. 미투운동을 통해 1968은 지금 이곳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둘째, 1968은 역사를 바라보는 감각을 크게 교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에도 불구하고 전후 민주주의는 진보사관을 복권시켰다. 파시즘을 이겨내고 등장한 복지국가나 '인민민주주의' 국가가 민주주의의 돌이킬 수 없는 승리를 입증한다는 낙관주의가 퍼졌다. 1950년대에 동유럽마저 강타한 미국발 소비문화의 안온함이 이런 승리의 찬가에 기분 좋은 화음을 더해주었다. 냉전의 양편, 그러니까 자유주의, 사회민주주의, 소련식 공산주의 모두 이 합창에 동참했다.  

1968년의 대규모 저항은 이 천진한 감각을 뒤집었다. 인간성이 여전히 위험에 휩싸여 있다는 항의가 곳곳에서, 베트남 같은 제3세계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중심부와 현실 사회주의권에서도 터져 나왔다. 과장도 없지는 않았다. 1970년대에 서유럽이 이미 파시즘으로 회귀했으니 무장 항쟁이 필요하다던 일부 주장은 그 자체 질병의 징후였다. 그러나 파시즘의 불씨에 눈을 가린 전후 민주주의의 위선과 자기기만, 안이함을 향한 경고는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다시금 극우 인종주의가 창궐하는 2010년대를 사는 우리에게 이 경고는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야만으로 되돌아갈 위험은 항상 현재진행형이고, 민주주의는 각 세대마다 재발명되어야 한다.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68세대 좌파 조직의 이름처럼, "투쟁은 계속된다(Lotta Continua)".  

셋째, 1968이 우리에게 직접 전해준 유산도 있다. 그것은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다. 미국의 68세대를 상징하는 학생운동 조직 '민주사회학생연합(SDS)'이 1962년에 발표한 '포트 휴런 선언'은 미래의 이념으로 참여 민주주의를 제시했다. 비록 이 정도로 분명히 정식화하지는 않았더라도 세계 곳곳의 반란 현장에는 공통의 시대정신이 생동하고 있었다. 파리의 반란자들과 프라하의 이단자들을 하나로 꿰뚫은 이상은 냉전의 양편 모두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에 따라 철저히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때 이 이상은 속절없이 패한 듯 보였다. 그러나 과연 그렇기만 했을까. 과거의 투쟁을 여러 방식으로 돌아볼 수 있겠지만, 그 중 한 방법은 만약 이 투쟁이 없었다면 현실이 과연 지금보다 얼마나 더 나빠졌을지 묻는 것이다. 이 물음 속에서 지금의 현실은 민중의 필사적인 개입을 통해 그나마 최악의 가능성을 가까스로 피한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이 물음을 통해 우리는 비록 과거의 투쟁이 패배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이 남긴 불멸의 자산이 존재함을, 그리고 이들이 어디에 잠복해 있는지를 간취하게 된다. 1968 운동들의 꿈인 참여 민주주의에도 이렇게 접근해볼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든 현실사회주의권이든 1968년의 운동들이 가장 우려한 것 중 하나는 초중앙집권적 통제 사회의 경향이었다. 당시 기술 발전 방향에는 분명 이런 우려의 여지가 다분했다. 그러나 우리는 어쨌든 <1984>식 초중앙집권 사회의 도래는 피했다. 적어도 아직은 그렇다. 정보화는 일정한 분산 원리에 바탕을 둔 네트워크 사회를 낳았다. 이 경향이 시장지상주의를 부추기기도 했지만, 20세기 좌우 양편의 전형적 독재 체제가 지속되기 힘들게 만들기도 했다. 이것은 결코 기술 발전의 '필연적' 결과만은 아니었다.

나름의 필사적인 개입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68과 그 후속 운동들이 일정한 변수가 됐다고 봐야 한다. 아마도 가장 열정적인 담지자는 오픈 소스 운동을 벌이며 정보화 초기부터 공유(commons)의 의미를 묻고 새롭게 다져온 과학기술자 집단일 것이다. 그들이 정보화의 주도권을 쥘 수는 없었지만, 주도 세력조차 이들의 성과를 의식해 기술 발전 방향을 끊임없이 재조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 그 결과 우리는 기술 내적 논리의 당연한 귀결만은 아닌 정보화 혁명의 결과, 즉 네트워크 사회를 살고 있다.

50년 전 젊은이들의 손에는 화염병이 들려 있었다(한국에서는 30년 전이겠지만). 50년 후인 지금 젊은이들이 쥐고 있는 것은 화염병이 아니라 스마트폰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 변화가 비루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오히려 여기에서 1968이 후대에게 직접 건네준 소중한 유산을 봐야 한다.  

이 유산을 제대로 간취한 후대가 1968이 마치 어제 일이었던 양 생생히 다시 시작한 운동이 스페인의 포데모스이고, 영국 노동당의 코빈 지지 운동인 모멘텀이며, 미국 민주당을 안으로부터 전복하려는 샌더니스타(Sandernistas, 버니 샌더스 지지자를 뜻함) 운동이다. 이들은 모두 네트워크 사회의 잠재력을 십분 활용한 참여 민주주의로 생명력을 되찾은 새 세대 사회주의 운동들이다.  

새 세대는 어떻게 자기 시대의 좌파가 되는가  

하지만 1968이 세대를 이어 '계속'돼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1968이 21세기 젊은이들에게도 현안인 어떤 물음을 처음 던진 사건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물음 말이다.  


"새 세대는 어떻게 앞선 세대의 좌파 문화에 압도되거나 그것과 완전히 동떨어지지 않고서 자기 시대에 맞는 좌파가 될 수 있는가?" 

1960년대에 대학에 다니거나 공장에 처음 들어간 젊은이들은 이전 어떤 세대보다 과거와의 단절을 심각하게 경험했다. 그만큼 전후 자본주의는 급격히 변화했다. 이런 급변 속에서 자본주의에 맞서는 세력, 즉 좌파-사회운동의 세대 간 계승 자체가 처음으로 중대한 문제로 부상했다.  

1968은 어찌 보면 이때의 젊은 세대가 이 문제에 예상보다 훨씬 더 자신감 넘치게 응전한 결과였다. 그들은 때로 너무 한다 싶을 정도로 기성 좌파정당과 노동조합 간부들을 야유했고, 지난 몇 세대 동안 계승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언어를 발명하겠다고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T. W. 아도르노 같은 원로 좌파 지성이 말 그대로 혼이 쏙 나가버리는 비극을 겪기도 했지만 말이다.  

68 세대가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러기에는 아직 '노동계급의 당'과 모스크바, 베이징의 권위가 너무 컸고, 그들의 꿈도 자원과 능력에 비해 너무 앞서갔다. 하지만 그들은 자본주의가 지나치게 농익어갈수록 새 세대가 기존 좌파 전통에 주눅 들지 않고 자기 시대의 좌파됨을 새롭게 구성하는 과제에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점만은 세계사에 더 없이 명확히 새겨 넣었다.

오늘날 세계 어느 곳이든 젊은 세대는 다름 아닌 이 도전 앞에 서 있다. 19세기, 20세기를 이으면서도 그때와는 또 다르게 해방의 의미와 방향, 언어와 전략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과제 앞에 서 있다. 비록 실패했지만, 이 과제야말로 부딪혀볼만하다는 것을, 그런 응전이야말로 삶의 가장 찬란한 내기라는 것을 보여준 선례라는 점만으로도 1968은 '계속'되어야만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내 동생 이름을 불렀을 때…"

[인터뷰] 박래전 열사 30주기,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을 만나다
2018.05.15 10:53:27

故 박래전 열사. 1988년 6월 4일 "광주는 살아있다!"고 외치며 숭실대 학생회관 옥상에서 분신, 스물다섯 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이름은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의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사에서 불렸다. 그리고 올해 박래전 열사 30주기를 맞았다. 


박래전 열사 30주기를 앞두고 그의 형,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을 만났다. 동생 박래전 열사에 대한 질문의 답은 세월호 얘기로, 또 다른 유가족들 이야기로 끝났다. 문 대통령의 입에서 동생 이름이 호명된 것에 대한 소회에 대해서도 "공식 석상에서 동생 이름이 불린 게 처음이었다. 진짜 울컥하고 울음이 날 뻔했다"면서도 "그리고는 집에 돌아왔는데, 문득 최덕수 열사의 어머니가 생각났다. '덕수 어머니도 아들의 이름이 호명되는 것을 바라셨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30주기를 맞아 박래전기념사업회에서는 책 <1988 박래전 - 30년, 다시 만나는 동화 박래전>(박래전기념사업회 지음, 굿플러스북 펴냄)을 냈고, 다큐멘터리 <겨울꽃>을 만들어 상영할 계획이다. 형 박래군 소장은 동생의 유품과 자료를 정리해 '인권도서관 동화'(서울 마포구 소재)를 추모 공간으로 만들 생각이라고 한다.  

다음은 지난 11일 오전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진행한 인터뷰 전문이다. 박 소장은 인터뷰를 마치고 청와대 앞으로 쌍용차 해고자 전원 복직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하러 갔다.

▲ '박래군' 이름 뒤에 붙은 직함은 우리 사회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는 4.16연대 상임운영위원이자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 공동운영위원장이며, 용산범국민대책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이자 쌍용자동차 희생자 범국민 추모위원회 위원이다. ⓒ프레시안(최형락)


"살려 달라"는 외침이 들렸다  

프레시안 : 세월호 선체가 바로 서는 모습을 목포신항에서 지켜봤다.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박래군 : 세월호 선체가 45도 정도 세워졌을 때 어떤 소리가 들렸다. '바닷물이 쏟아지는 소리인가?' 했는데, 세월호 안 철판이 떨어지면서 난 소리였다. 그런데 그 소리가 꼭 희생자들이 "살려 달라"고 외치는 것처럼 들렸다. 현장에 있던 유가족들도 비슷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전명선 4.16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이 "세월호를 바로 세웠다는 것은 돈보다 사람의 목숨,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일깨우는 시금석"이라고 했는데, 세월호 선체 직립을 계기로 대한민국이 돈보다는 생명을 중시하는 사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프레시안 : 세월호가 바로 섰다고 하지만, 2기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에 대한 문제 제기는 계속되고 있다.  

박래군 : 5월 초 황전원 특조위 상임위원의 공개 사과 및 서약으로 갈등이 일단락된 듯 보이지만, 특조위가 하루라도 빨리 가동돼 진상이 밝혀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세월호 유가족들이 오히려 한발 물러선 것이다.  

2기 특조위의 정식 명칭이 '가습기살균제사건과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다. 가습기살균제 사건을 포함한 사회적 참사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위원회다. 따라서 조사 인원도 조사 기간도 한정되어 있다. 그럼에도 2기 특조위가 밝혀야 할 일이 굉장히 많다.

먼저 해경 123정이 사고 해역에 도착해서도 세월호와 교신하지 않은 점, 어떤 세력이 구조대 활동을 사실상 막았다는 의혹 등 구조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은 이유를 밝혀야 한다. 두 번째가 침몰 원인이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는 정상이라고 보기 어려운 항적을 보였다. 그로 인해 외부 충격설도 제기된 상태다. 그리고 무엇보다 불법 증축 및 셀프 안전검사 등 제도의 문제를 짚어야 한다.  

2기 특조위는 1기 특조위와 다른 분위기에서 활동한다. 그럼에도 황 상임위원처럼 세월호 진상 규명을 방해했던 세력이 여전히 남아있다. 특히 참사 책임이 있는 해경 지휘부의 경우 4년이라는 시간 동안 퇴직하거나 승진했다. 또 자료 은폐 내지 조작을 시도했을 가능성도 높다. 대통령이나 정부의 의지만으로 부족한 이유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내부 고발 혹은 양심 고백이 나왔으면 한다. 세월호 진상규명까지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 세월호 선체가 참사 4년 204일만에 바로 섰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은 세월호 선체 직립 과정 중 "살려 달라"는 외침이 들렸다고 했다. ⓒ프레시안(최형락)


동생 래전이가 죽었다 

프레시안 : <1988 박래전 - 30년, 다시 만나는 동화 박래전>을 보면서 박래군 소장도 국가폭력에 희생당한 유족이라는 점을 새삼 느꼈다. 세월호 유가족과 또 여러 인권 이슈와 연결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래군 : 동생을 잃고 방황할 때 전태일 열사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이하 '유가협')에 나오라고 권했다. 뜨문뜨문 나가다가 1988년 10월 17일부터 135일간 기독교회관에서 진행된 의문사 진상 규명 농성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당시 의문사 가족 35명을 매일 밤 인터뷰하며 자료집을 만들었는데, 이들이 자료라며 제시한 것 대부분이 총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사진, 목매달아 죽은 사진, 부검 사진 같은 것이었다. 끔찍해서 못 보겠더라. 그런데 자식 잃은 부모들이 억울하다며 봐달라고 하는데, 외면할 수가 없었다. 이들 모두 자신들의 사연을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야기는 잘 들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병상련이랄까. 유가족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편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치유' 같은 게 됐던 것 같다. 유가협 사무국장까지 맡으며 5년 동안 활동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국가폭력 문제를, 또 인권 문제를 접하게 됐다. 지금까지 이렇게 인권운동을 하게 만든 건 이소선 어머니다.(웃음)

프레시안 : 책에서 "어떻게 일주일을 견뎌냈는지 지금 생각해도 모르겠다. (중략) 모두가 연극인 것처럼 여겨졌다"(66쪽)고 회고했다. 당시 상황에서는 '왜 하필 내 동생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 같다. 

박래군 : 그랬다. 마치 다른 사람의 일처럼 느껴졌다. "노동운동 탄압 말라. 노동3권 보장하라"를 외치며 분신한 박영진 열사(1986년 3월 17일)를 마석모란공원에 모시기 위해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기도 하고, 미국대사관과 독일대사관 등에 '노태우 부정집권'을 고발하는 투서를 보내는 등 학생운동을 하다 의문사한 고정희 열사(1988년 5월 13일) 영안실을 지키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 남의 일이었다. 실제로 내 동생이 그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 했다.

래전이는 1988년 6월 4일 "광주는 살아있다"를 외치며 분신했는데, 학생운동으로 수배령이 떨어진 상태에서 경기도 화성 부모님을 찾아 인사하고 안산에 있는 큰 형네 집도 들렸다. 그때 왜 몰랐을까. 장례를 치를 때도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가. 내가 어떤 연극에서 악역을 맡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긴가민가했다.
        
대부분의 유가족이 그렇듯 그러다 부재의 시간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 어머니는 15년 동안 대문도 닫지 않고 불도 끄지 않고 주무셨다. 래전이가 불시에 문을 열고 들어올까 봐. 나의 경우에는 환시·환청 같은 일이 종종 있었다. 길을 가다 뒤에서 누가 "형!"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면, 아니었다. 래전이가 없었다. 또 앞에 키가 큰 학생이 있어 동생인 것 같아 쫓아가 보면, 아니었다. 래전이는 없었다.  

▲ 故 박래전 열사의 호는 '동화(冬花)'다. ⓒ박래군 페이스북


동생 래전이는 시인이었다 

프레시안 : 책을 보면, '열사 박래전'이 아닌, '시인 박래전'에 주목한 것 같다.

박래군 : 분신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한 시대를 같이 살았고, 같은 시대를 살며 어떻게 보면 우리보다 더 여린 사람이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열사(烈士)'라고 불리는 사람들 대부분이 20대 초반 학생들이다. 감수성이 가장 발달한, 누구보다도 고민을 많이 한 젊은이들이었다.

동생이 생전에도 시를 쓰는 걸 알고 있었다. 아마 계속 시를 썼으면 훌륭한 시인이 되지 않았을까? 래전이는 학교를 졸업하면 부모님 곁에서 농사를 짓겠다고 했는데, 아마 농촌 현실을 담은 또 농민 문제를 고발하는 시인이 되지 않았을까? 지금 생각하면 안타깝다. 동생 49제에 맞춰 유고시집 <반도의 노래>(세계 펴냄)가 출판되기도 했다.

래전이가 우리 나이로 26살, 만 25세를 살다 갔는데 30년이 흐른 얼굴이 상상이 안 된다. 나는 이렇게 나이를 먹고 주름이 생기고 했지만, 동생은 계속 청년으로 남아있다.

동화(冬花) / 박래전

당신들이 제게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아는 까닭에 
저는 당신들의 코끝이나 간질이는 
가을꽃일 수 없습니다

제가 돌아오지 못한 것을 아는 까닭에 
저는 풍성한 가을에도 뜨거운 여름에도 
따사로운 봄에도 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떠나지 못하는 건 
그래도 꽃을 피워야 하는 건 
내 발의 사슬 때문이지요

겨울꽃이 되어 버린 지금 
피기도 전에 시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진정한 향기를 위해 
내 이름은 동화(冬花)라 합니다

세찬 눈보라만이 몰아치는 
당신들의 나라에서 
그래도 몸을 비틀며 피어나는 꽃입니다


동생 래전이가 호명되다
 

프레시안 :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제37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 때 박래전 열사를 호명했다. 그때 심정이 어땠는가.  

박래군 : 그날 세월호 유가족과 함께 정식 초대장을 받아 참석했다. 늦게 도착한 것도 아닌데, 앞쪽에는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뒤쪽 나무 그늘에 앉아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5.18 정신을 헌법전문에 담겠다'며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민주화 운동의 정신 자체'라고 말하길래, '광주시민들에게 정말 큰 선물을 주는구나' 생각했다. 그러면서 '기념사도 곧 끝나겠네' 하고 있었다.  

ⓒ프레시안(최형락)

그런데 동생 이름을 '박관현', '표정두', '조성만', 그리고 '박래전' 하고 부르는데 충격이었다. 공식 석상에서 동생 이름이 불린 게 처음이었다. 진짜 울컥하고 울음이 날 뻔했다. 그런데 세월호 유가족들과 같이 있으니까 울 수는 없고.(웃음) 내가 유가족이라는 사실을 그때 세월호 유가족들도 알게 됐다. 물론 몇몇 사람은 알고 있었지만. 이후 언론사 몇 군데와 전화 인터뷰도 하고 그랬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왔는데, 문득 덕수와 덕수 어머니가 생각났다. 조성만 열사가 5월 15일 투신했고, 최덕수 열사가 5월 18일 분신했다. 그리고 최덕수 열사의 영향을 받은 래전이가 6월 4일 분신했다. 유가족들 중에서도 덕수 어머니가 유독 살갑게 대해주신 것도 래전이와 덕수의 연결성 때문이었다. '덕수 어머니도 아들의 이름이 호명되는 것을 바라셨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1988년 당시 '광주'를 외치며 유명을 달리한 이가 모두 12명이다. 원래 문 대통령이 열사 12명의 이름을 모두 부르려 했으나, 시간 관계상 최종 원고에서는 열사 4명만 포함됐다고 하더라. 그래서 대통령 기념사 문구 그대로 열사 12명을 호명했다.

유가협 활동 시절부터 몸에 밴 건데, 내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어도 다른 사람을 인터뷰하라고 연결해 주곤 했다. 사람들이 전태일 열사나 박종철 열사 등 유명한 사람들을 찾을 때면 나머지 사람들은 소외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의문사 희생자 유가족들은 더 그렇다. 그래서인지 문 대통령이 동생 래전이를 호명했을 때 여러 감정이 들었다. 다 같이 불려야 하는데. 그런 것에 대한 불편함도 있었다. 그냥 내 감정에 충실하면 좋은데, 그러지도 못하고.(웃음) 생각이 안 나면 좋을 텐데 덕수 어머니 생각도 나고, 또 다른 어머니 생각도 나고 그랬다. 

1980년 광주 학살에 항의하는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남기고 종로5가 기독교회관 6층에서 투신 사망한 스물한 살, 서강대생 김의기.

1980년 서울 이화여대 앞 네거리에서 "유신잔당 물러가라!"고 외치며 분신 사망한 스물두 살, 노동자 김종태.

1981년 학내에서 산발적인 시위 도중에 도서관 6층에서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를 세 번 외치고 투신 사망한 스물두 살, 서울대생 김태훈.

1982년 광주교도소에서 광주 진상규명을 위해 40일간의 단식으로 옥사한 스물아홉 살, 전남대생 박관현.

1985년 광주 전남 도청 앞에서 "광주시민이여! 침묵에서 깨어나라!"고 외치며 분신 사망한 스물다섯 살, 노동자 홍기일.

1985년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분신 사망한 스물일곱 살, 경원대생 송광영. 

1986년 "전두환 및 5.18 쿠데타 주동자는 물러가라"는 주장을 하고 목포역에서 분신 사망한 스물두 살, 사회운동가 강상철.

1987년 "광주사태 책임자 처벌"을 외치며 분신 사망한 스물다섯 살, 노동자 표정두.

1987년 "군부독재 끝장내고 민주정부 수립하자!"는 주장을 하면서 42일간 학내에서 1인 시위를 하다가 분신 사망한 스무 살, 목포대생 박태영.

1988년 "광주학살 진상규명"을 외치며 명동성당 교육관 4층에서 투신 사망한 스물네 살, 서울대생 조성만.

1988년 "광주항쟁 진상규명"을 외치며 학교 교정에서 분신 사망한 스무 살, 단국대생 최덕수.

1988년 "광주는 살아있다!"고 외치며 숭실대 학생회관 옥상에서 분신 사망한 스물다섯 살, 숭실대생 박래전.

- 2017년 5월 19일 자 박래군 페이스북


▲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제37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유족의 편지'를 낭독한 김소형 씨를 위로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5.18 광주, 그리고 4.16 세월호  

프레시안 : 5.18 민주유공자 여성들의 '미투'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5.18 광주가 과거와는 또 다른 의미로 되살아나는 것 같다.  

박래군 : 전남도청 안내방송을 담당했던 김선옥 씨가 계엄군에게 붙잡혀 고문과 성폭행을 당했다는 기사(5월 8일 자 <한겨레> '[단독] "고문 뒤 석방 전날 성폭행"5월항쟁 38년만의 미투')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성폭행이 있었다는 사실, 그때는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나치를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 발생한 학살 관련 자료를 많이 봤는데도 광주에서는 성폭행이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생각하지 못했다.

인권을 말하고 인권운동을 하며, 미투(#metoo)에 동의한다고 위드유(#withyou)한다고 해도 나는 아직도 남자인 것이다. 존재 자체가. 5.18 광주 성폭력 문제에 예민하지 못했다. 계엄군에게 끌려갔던 여고생들이 5.18 청문회 때 '오빠에게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했다는데, 여동생과 누이가 당한 일에 그들조차 침묵했다. 그들도 남자였기 때문이다. 인권 감수성이 이렇게 부족하다니. 아직도 넘어야 할 게 많다.  

프레시안 : 문재인 정부 들어 국가폭력 등 과거사에 대해 '이제는 말할 수 있다'라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 같다.  

박래군 : 세월호 참사 이후 나타난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그 흐름이 촛불시민혁명으로 이어지면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바꿀 수 있다'라는 기대감도 생겼다고 본다.

세월호 참사를 겪은 뒤 △잊지 말자(잊지 않겠다), △가만히 있지 않겠다, △세월호 이후는 이전과 달라야 한다 등 일명 '4.16 운동'을 실천하고 있는데, 이전과는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강남역 살인 사건'과 '구의역 참사'의 경우,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포스트잇 추모 글을 쓰고 추모 행사를 갖는 등 사고 현장을 추모 공간으로 바꿨다. 시민들의 사고가 달라졌고, 움직이는 방식도 바뀌었다. 운동사회 역시 그에 맞춰 가야 한다.

프레시안 : 박래전 열사 이야기를 하다가도 세월호를 떠올린다.(웃음) 30년 인권운동가의 삶 또한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것 같다. 

박래군 : 세월호 참사 전후 스스로도 바뀌었다. 세월호 이전에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에 대한, 또 죽게 만드는 세상에 대한 분노가 컸다. 그래서 '사회 구조를 어떻게 바꿀까?'를 고민했다. 그런데 세월호 이후 '죽음 끝의 생명'이라는 걸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생명이 존중되는 세상'에 초점이 맞춰졌다. 특히 '사람뿐 아니라 뭇 생명과 상생하는 세상이 맞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확대됐다.  

1997~98년 IMF 이후 망가진 사회가 세월호 참사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우리 사회가 사람과 생명보다는 돈, 이윤, 효율성, 경쟁 등을 중시하는 세상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처음에는 이에 저항했지만, 어느새 내면화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특히 타인에 대한 아픔과 슬픔에 대한 공감마저 막았다. 사회가 집단 상실감에 빠졌다고 할까? 하지만 세월호 참사 후 생명의 소중함이 각인되면서 이런 감정 또한 회복되고 있다.

최근 인권운동도 변화하고 있다. 인권이 동물권으로, 또 자연에 대한 권리로 확대되고 있다. 인도는 지난해 3월 히말라야 산맥의 강고트리(Gangotri) 빙하와 야무노트리(Yamunotri) 빙하에 법인격이 있다고 인정했다. 뉴질랜드 역시 비슷한 시기에 강 왕거누이(Wanganui·Te Awa Tupua)에 '모든 권리, 권한, 의무 및 책임을 지닌 합법적인 사람'으로서의 법인격을 부여했다.

사실 '인권(人權)'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배제시킨 말이다. 사람과 사람 간 관계만을 다룬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이 자연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다는, 즉 만물의 영장이라는 논리가 있다. 인권 중심 주창이 오히려 인간의 자연 지배와 착취 등을 합리화한 배경이 됐다. 그러나 요즘에는 '생태적 인권'으로 바뀌는 추세다.  

프레시안 : 4.16운동이 곧, '뭇 생명 모두를 위한 운동'이 된 것 같다.

'안전 사회'라고 하는 것은 뭇 생명이 타의든 자의든 죽지 않아도 되는 사회여야 한다. 한해에 자살자만 1만 5000명 이상이고, 노동자 2000여 명이 산업현장에서 죽는다. 미래세대를 위해서라도 이런 사회가 지속해서는 안 된다. 말로는 '생명이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생명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말라'고 하고 있다.

래전이가 유서에 '나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죽음이 없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결단을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동생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또 세월호 참사를 통해서 확인된 삶의 지향을 위해서라도 이제 '생명'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4.16운동 자체가 우리 사회의 근본을 바꾸는 운동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프레시안(최형락)


동생 래전이를 추모하다  

프레시안 : 올해가 박래전 열사 30주기다.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박래군 : 숭실대 동문이 중심이 된 기념사업회에서는 매년 6월 4일 열리는 학내 추모제와 6월 6일 묘지 추모제 외에도 다큐멘터리 <겨울꽃> 상영회를 계획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유품과 자료를 정리해 '인권도서관 동화'(서울 마포구 소재)를 추모 공간으로 만들 생각이다. 그래서 추모위원들을 모으고 있다. 이한열 열사의 운동화처럼 래전이가 분신 당시 신었던 구두가 남아있다. 30년이나 지나 밑창이 가루가 됐지만, 당시 제품을 찾아 복원할 계획이다.  

프레시안 : 1998년이 아닌, 2018년 현재 동생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박래군 : 광주 학살자 전두환을 처단하지 못했다. 래전이 하고 약속을 못 지킨 것이다. 나름대로 30년 동안 쉬지 않고 치열하게 살았는데, 약속을 못 지켰다. 인권을 통해 래군이가 바라던 세상을 만들겠다고 했는데, 그 약속도 아직이다.(웃음)  

지난 30년, 도망가고 싶을 때마다 동생과의 약속을 떠올렸다. 스스로에게도 또 주변에도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한다. 우리 죽은 사람과의 약속은 지키고 살자고. 그게 의리라고. 산 사람과 약속은 변경할 수 있지만, 죽은 사람과 약속은 그럴 수 없다. 죽은 사람과 약속은 또 강요된 게 아닌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한 약속이다. 스스로 우러나와서 한 약속, 실천하지는 못하더라고 기억하고 사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그리고 '전두환 학살 원흉 처단'이라는 당시 열사들의 외침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 흐름에 맞게 끊임없이 재해석하면서 오늘이 있기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의 희생이 있었다는 걸 기억했으면 한다. 그런 속에서 동생 래전이도 기억해줬으면 좋겠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