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문화, 예술

김어준식 '미투 공작설', 그리고 '미투 감별법'에 부쳐

일취월장7 2018. 4. 13. 10:50

김어준식 '미투 공작설', 그리고 '미투 감별법'에 부쳐

[이라영과 미투 톺아보기] ①
2018.04.11 08:08:49

미투 운동이 긴 시간 우리 사회에 파장을 낳고 있다. 적잖은 유명인이 충격적인 폭력의 가해자로 언론에 오르내렸다. 여성들이 미투로 드러난 성폭력 문제를 개선하려는 시도가 폭로를 뒤이어 이어지고 있다. 국회와 여성단체 등은 우리 일상의 성폭력 문제를 논의하고, 대안점을 찾으려는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한편에서는 미투를 향한 불만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익명 폭로자를 향한 '꽃뱀'이라는 날선 비난이 제기되고, '어디까지가 미투냐'는 식의 질문의 외피를 쓴 비난이 이어지고 있다. 다시금 인터넷은 과거 메갈리아 사태 당시처럼 미투를 계기로 남녀 성대결 구도로 재편되는 모양새다.  

남성 대부분에게서 미투의 맥락과 원인, 더 구조적으로는 여성이 집단으로 목소리를 내는 현 상황을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를 찾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지금이라도 미투를 더 큰 맥락에서, 더 쉬운 말로 재정리할 필요가 있다.  

과거 <프레시안>에 여성혐오 문제에 관한 글을 여러 차례에 걸쳐 게재한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가 미투와 관련한 첨예한 질문들에 대답하는 글을 보냈다. 세 차례에 걸쳐 미투가 지금 나오는 이유, 미투에 대한 남성들의 일반적인 생각에 관한 단상, 미투 운동의 다음에 관한 고민 등을 나눠 싣는다. 글은 <프레시안> 이대희 기자가 질문하고 이라영 연구자가 답변하는 방식으로 정리했다. 편집자.  


왜 지금 '미투'인가? 

-요즘 미투 운동이 세계적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닌데요, 왜 지금 미투 운동이 이처럼 세계적으로 일어날까요? 여성 차별은 이미 오래 되었고, 페미니즘 운동도 제법 오랜 시간 이어졌는데요.  

그동안 쌓여왔던 목소리가 그나마 조금 들리는 시점에 이르렀다 생각합니다. 목소리의 양적 성장이 더는 여성의 주장을 무시하기 어려운 지점이 되었죠. 유명인의 권력형 성폭력 폭로를 시작으로 점차 일상의 성폭력이라는 문제로 화두가 옮아가고 있습니다.

이번 Me Too, 곧 성폭력 고발 운동에는 미디어의 영향도 큽니다. 피해자가 익명으로 말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었고, 소셜 미디어를 통해 말이 퍼져나가는 파급력도 큽니다. 지역과 국가를 넘어 말이 들리게 하는 효과가 있기에 미투에 동의하는 이들이 국경을 넘어 연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 국가에서 말이 이어지다 보니 사회가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또한 누구나 항상 휴대하는 스마트폰을 통해 사진과 녹취를 남기거나 메시지를 저장할 수 있어서, 여성들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를 확보하기가 예전보다 쉬워졌어요.

수많은 묵살을 경험하면서 여성과 사회의 소수자들은 말의 연대를 이어가야 겨우 말이 들린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미투, 곧 '나도 OO다'는 주장은 피해자를 고립시키지 않는 언어지요. 

-한국의 미투 운동이 다른 나라의 운동과 다른 지점이 있을까요?

운동의 차이점이라기보다, 성폭력의 양상에 선진국과 조금 차이가 있기는 합니다. 폭력의 양상이 다르니 그 후 이어지는 반응도 다를 수밖에 없겠지요. 한국 남성들은 대체로 유혹을 가장한 성추행을 하지 않습니다. 유혹으로 가장하려는 위선적인 노력조차 안 합니다. 그럴 필요가 없죠. 여러 사람 앞에서 추행하거나 조직적으로 폭력의 무대를 만들어주는 일이 더 빈번해요. 또한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여주는 폭력적인 방식(벽치기, 손목을 아프게 잡고 끌고 가기, 심지어는 구타 등)이 모두 로맨스의 과정으로 그려져요. 이를 우리 사회가 학습하고 있죠.  

성차별주의자나 성폭력범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제도적 처벌 양상이 다르고 사회의 반응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도 다릅니다. 한국은 수많은 법적 판결에서 보듯이 여성이 겪는 폭력에 매우 관대합니다. 조직은 대부분 가해자를 보호하지요. 심지어 법적으로 유죄를 받은 배우도 오히려 사건 전보다 언론에 자기 생각을 더 많이 말합니다. 법적으로 가해자라고 확인이 되어도 그의 억울함이 문화적으로 더 존중받고 있어요. 

상대적으로 미국에서는 앵커나 배우 등이 성폭력 가해자로 알려진 후 비교적 빠르게 해당 사실을 인정, 사과하고 방송에서 즉각 하차했습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케빈 스페이시가 맡았던 역할을 크리스토퍼 플러머로 교체한 후 영화를 다시 찍었어요. 한 장면을 찍기 위해 투입되는 노동력이 엄청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결정은 굉장히 상징적입니다. 물론 이건 겉으로 보이는 변화이고, 실질적인 변화는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죠. 이러한 대응이 성폭력을 획기적으로 줄여준다고 믿지도 않습니다. 나아가 그 확실한 선긋기가 무조건 옳은가, 이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죠. 다만, 사회가 미투에 반응하고 응답한다는 건 중요합니다. 한국은 상대적으로 이런 반응이 약해요. 여전히 미투를 무시하죠. 

최근 한국도 변하고 있긴 합니다. 얼마 전 김생민 씨가 방송에서 하차하기로 결정했으니까요.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김생민 씨처럼 빨리 인정하고 사과할 경우, 특히 가해자가 그간 좋은 이미지를 쌓았을 경우, 가해자가 '잃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대체로 가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버티고, 억울해 하고, 피해자를 모독하고, 조직은 대응하지 않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주변에서도 지쳐서 폭로한 사람을 지겨워하고... 우리 사회는 이런 흐름에 익숙하기 때문에 가해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한 것만으로도 가해자가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는 효과를 얻어요. 졸지에 그는 폭로 '당해서 불쌍한' 사람이 되지요.

▲강남역 살인사건 당시도 여성들은 집단적 목소리를 냈다.그간 지속되어온 여러 움직임이 폭발했다. 이번 미투 운동 역시 그간 우리 사회가 개별 여성의 목소리를 듣지 않자, 여성이 집단의 목소리를 내는 움직임으로 이어지고 있다. ⓒ연합뉴스


미투 지지자는 '꼴페미'? 

-지난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당시 여성이 본격적으로 집단적 목소리를 냈습니다. 이런 움직임이 계기가 되어 지금의 미투로 이어졌다고도 볼 수 있을까요?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여성들이 집단적 목소리를 냈다기보다는, 여성의 목소리가 모이면서 강남역 살인사건을 사건화 할 수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여성이 어이 없이 죽임 당하는 일이 처음은 아니었으니까요. 그 전에 2015년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선언이 있었고, 메갈리아를 통해 언어 대항을 하면서 여성들이 집단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경험들이 축적 되었습니다. 그 경험의 축적이 강남역 살인사건을 여성혐오 살인이라고 명명하여 사건화 할 수 있는 추동력을 더해 주었다고 봅니다. 

겉보기에는 어느 순간 여성들이 터져 나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조금씩 쌓아온 맥락이 있지요. '~내 성폭력'이라는 고발도 2016년에 있었고요. 성폭력 피해자의 옷차림을 문제 삼은 캐나다 경찰의 한 마디로 촉발되어 세계적인 운동으로 퍼졌던 '잡년행진'도 있었고, 2000년대 초반에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 대회가 한국에 이미 있었죠. 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여러 개인들의 고된 싸움이 있었고요.  

메갈리아는 도발적인 언어를 통해 여성을 유머의 주체, 이름을 만들어 부르는 주체로 만드는 시도를 했기에 대중적인 파급력이 있었습니다. 메갈리아 이후, 그들의 '상스러운' 언어가 남성은 물론이요, 많은 여성을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지요. 그 '불편함'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불편하지 않은 변화는 없어요. 

종종 '잘못된 분노'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있지요. 형식적으로 틀린 지적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말 문제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분노가 아닙니다. 분노가 억압당하는 게 문제지요. 분노에 잠식당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지만, 분노해 보는 경험도 중요합니다. 자기 안에 갇힌 분노가 자신을 뚫고 나와 '공분'이 되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한 여성들의 공분은 애도의 정치화, 여성 살해의 정치화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미투 초기의 충격에 대중이 어느 순간 익숙해진 듯합니다. 이와 동시에 '미투 지지=꼴페미'라는 등식이 온라인에서 회자되면서, 다시금 여성혐오가 강하게 일어나는 듯합니다. 일각에서는 미투를 정치적 음모론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만들어진 미투 지형이 우리 사회에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어떤 일이든 시간이 지나면 대중이 익숙해질 뿐 아니라, '지겹다'는 사람들도 나오기 마련이죠. '문화화된 폭력'의 경우, 사람들은 폭력이 지겨운 게 아니라 그 폭력(문화)을 폭력이라 규정하고 말하는 목소리에 더 지겨움을 느끼니까요. 실제로 권력형 성폭력의 경우 가해자는 흔히 '관행'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어차피 뭘 해도 '꼴페미'는 계속 창조됩니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성폭력을 폭로하면 꼴페미고, 얼굴과 이름을 가리고 폭로하면 꽃뱀이고, 폭로하지 않으면 '걸레'입니다.  

정치적 음모론, 이건 아주 비열한 대응이에요. 우리편이냐 아니냐로 사안을 판단하려니 무리수를 둘 수밖에요. 김어준 씨를 비롯하여 그 주변 인물과 지지자들은 안태근이라는 이름이 나올 때까지만 성폭력 폭로를 지지했습니다. 화살이 딱히 정치적 진영에 머물지 않자 '걱정'한다는 명목으로 '저쪽에서 공작을 꾸미면 어떡하느냐'는 둥 위험한 발언을 흘리더니, 점점 '우리 편'의 실체가 드러나자 본격적으로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와 가해자 옹호하기에 앞장섰습니다. 

이 사안에 대한 김어준 씨의 발언과 태도에는 꾸준히 많은 문제제기가 있어 왔지만 그 중 아주 거슬리는 문장 하나만 꼽자면 "피해자들을 준비시켜 진보매체를 통해 등장시켜야 되겠다"라는 공작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부분입니다. 상대 정치 진영에서 현재 정권을 공격하기 위해 피해자들을 준비시켜 진보매체에 내보낼 가능성을 우려한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피해자들을 의식이 있는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 '준비시켜', '등장시켜야' 하는 수동격의 인물로 본다는 뜻이죠. 김어준 씨는 '나꼼수 비키니 응원'이 비판받을 때에나 여성의 주체성을 강조했어요. 곧 여성이 '주체적 성적 대상'이 될 수는 있어도, 스스로 문제제기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을 안 합니다. 

한국은 네크로필 사회 

-미투 운동을 통해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화할 수 있을까요? 미투 운동을 통해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요?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당분간 시끄러워지겠지요. 폭력이 줄어든다기보다는 폭력이 가시화 될 테니까요. 우리 사회가 이 '소란스러움'을 마땅히 지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그저 지속 가능한 폭력의 구조를 유지할 뿐입니다.

이 운동을 통해 성폭력 피해자에게 일방적으로 전가해 온 수치심의 개념이 아주 조금은 바뀔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피해자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자신의 경험을 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니까요. 

-어디까지가 미투인가요? '키스 시도도 미투냐'는 식으로 많은 남성이 불만을 드러냅니다. 여성 혐오가 깔린 질문이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남성이 미투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게 현실입니다. 

"어디까지가 성폭력인가요"라는 질문으로 이해합니다. 키스 시도도 성폭력이냐는 질문에는 사람의 몸을 개척하는 땅으로 보는 시각이 담겨 있어요. 물리적 장소로서 몸의 어디까지가 허락되고 어디부터 안 되느냐는 의식이 보입니다. 물론 '허벅지를 만졌다'와 '구타를 동반한 강간'은 명백한 차이가 있지요. 가해자에 대한 사회적, 법적 처벌을 위해서는 이를 구체적으로 따져볼 필요가 있어요. 하지만, 성폭력의 발생 맥락과 개념을 근본적으로 따져 보기 위해서는 다른 관점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많은 남성이 여성과 의견을 교류하지 않는 게 문제예요. 키스가 되느냐 안 되느냐, 가슴을 만지면 되냐 안 되냐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에요. 모든 여성에게 일괄적으로 정해진 '어디까지'는 없어요. 서로가 교류하는 지점, 상황, 모두 다 달라요. 날아다니는 벌이 꽃에 다가가듯이 생각하지 말고, 여성도 움직이는 사람이며 선택하고 결정하는 인간임을 자각했으면 합니다. 여자와 '만나지' 않고 여자를 구경하고, 여자와 관계 맺지 않고 여자를 덮치고, 자빠뜨리는 대상으로 삼으니 이해를 못하겠지요. 

어린 아이에게 뽀뽀해달라고 조르는 어른들은 아이의 의사를 궁금해 하지 않아요. 아이의 '싫음'이 존중받지 못합니다. 보통의 남성이 여성을 대하는 태도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한국은 여성에 대하여 네크로필(nécrophile, 시간증) 사회나 다름없어요. 상대의 감정을 살피고, 내 감정을 조절하고, 동의를 구하고, 제 생각을 조리 있게 말해보고, 상대가 생각할 동안 기다리고, 관계의 숙성을 인내하는 모든 노동을 하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무 의식이 없는 생물에게 일방적으로 성행위를 하는 겁니다. 권력이 있으면 물리적 힘을 동원하지 않고도 성폭력을 행사하죠. 무력을 통한 강간, 약물 강간만이 아니라, 권력으로 짓눌러 아무 말도 못하게 하는 행위 역시 사람의 의식을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정봉주는 왜 거짓말을 했을까?

[이라영과 미투 톺아보기] ②실명 미투만 인정하겠다는 위험한 태도
2018.04.12 08:57:35

여성 문제에 관한 이라영 필자의 다른 글 보기



여성의 일상을 이해해야 미투에 공감한다 

-'미투'란 '나도 당했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이를 통해 너도 용기를 내라는 뜻을 갖고 있잖아요. 왜 꼭 미투여야 하나요? 내가 성폭력을 당했다면, 곧바로 변호사를 찾아가 상담하고 법적 대응을 하면 안 되나요? 많은 남성이 '당했을 때 바로 변호사를 찾지, 왜 긴 시간이 흐르고 나서냐'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런 시각이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일부 정치인을 두고 황당한 음모론이 나오는 원인이 되는 듯합니다.  

영화 <델마와 루이스>의 주인공들은 왜 경찰서에 가지 않았을까요? 왜 도망 다니다가 일을 점점 더 부풀린 끝에 자살할까요. 델마는 사건이 벌어진 후, 경찰서에 가서 자수하자고 합니다. 정당방위이지 않았냐고. 그러나, 이미 한 번 성폭력을 겪었던 루이스는 경찰을 신뢰하지 않아요. 루이스는 델마에게 이렇게 말하죠. "네가 그 남자랑 춤추는 거 술집 안 사람들이 다 봤다. 경찰이 네 말을 믿어 주겠니?" 같이 춤을 췄다는 사실만으로도 여자의 말이 믿어지지 않으리라는 루이스는 걸 잘 압니다. 피해자의 말을 무조건 믿으라는 게 아니에요. 성폭력 문제에서 세상은 여성의 말을 공정하게 들어볼 생각조차 안 한다는 겁니다. 이게 여성들이 미투를 통해서야 겨우 자신의 폭력 경험을 얘기하기 시작한 첫째 이유입니다. 

둘째, 사회가 피해자의 말을 불신하기 때문에 2차 가해가 서슴없이 자행됩니다. 단역배우 집단 성폭행 사건 피해자는 경찰의 2차 가해에 괴로워하다 결국 자살했습니다. 피해자들의 어머니는 "경찰이 죽였다"고 말합니다. 물리적 폭행은 한 사람이 했을지라도, 그 후 이어지는 2차 가해에 가담하는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아요. 성폭력 피해를 알린다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 되는 거죠.  

셋째, 추행이나 희롱의 경우 증거 확보가 어렵고, 물리적 폭력의 증거가 설사 있다고 해도 시간이 지날수록 이 증거의 효력이 결국은 사라집니다. 다시 <델마와 루이스>를 보면, 사건 발생 후 며칠 지나 루이스가 델마에게 이러지요. "이제는 네 얼굴에 맞은 상처도 사라졌어"라고. 어차피 말은 믿어지지 않고, 그나마 폭력의 증거가 되는 몸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건을 증명하기 어려워져요. 

"차라리 법의 심판을 받고 싶다"고 말하는 가해자가 있었죠. 법이 누구의 말을 들어주는지 아는 겁니다. 37년 간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던 여성이 남편을 살해했을 때 정당방위로 인정받지 못한 사례가 있습니다. 반면, 여자친구나 아내를 살해한 남자들이 3년 이하의 형량을 받은 후 집행유예로 사실상 풀려나거나, 아예 무죄를 선고받은 사례도 있습니다.

피해자들이 결국 폭로라는 최후의 수단을 택하는 결정적 계기는 전혀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가해자의 모습을 볼 때입니다. 안태근의 간증하는 모습을, 대외적으로 페미니스트 흉내를 내면서도 성폭력을 행사한 안희정 전 지사의 모습을 보며 피해자들은 폭로를 결심했습니다. 

왜 긴 시간이 흐른 후 나서느냐는 지적에 거꾸로 질문하자면, 왜 그 긴 시간동안 우리 사회는 피해자의 말을 듣지 않거나, 그가 말하지 못하도록 했나요.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과거에는 자살을 하곤 했는데, 이는 명백히 사회적 살인이죠. 

-'여성이 용기를 내고, 연대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성이 많습니다. 여성들이 왜 이럴 수밖에 없는가를 제대로 이해해야만 미투 운동에 관한 공감의 출발이 가능할 것 같아요. 여성이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더 일상의 차원에서 설명해주세요. 

살면서 '가벼운' 성추행 한 번 안 겪은 여자가 있을까. 많은 여성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한편 가해자들을 비롯하여 미투 운동을 바라보는 남성과 일부 여성 중에는 '저런 식이면 안 걸릴 남자가 어디 있느냐'는 반문이 나옵니다. 결국, 두 상반되는 입장은 한 가지 사실을 입증합니다. 성폭력이 매우 일상적이라는 뜻이죠. 

여성을 연쇄 살인하고 강간한 흉악범이 아니라, 꽤 괜찮아 보이는 남성이 성폭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몹시 불편해 합니다. 성폭력범의 얼굴이 악마나 괴물의 모습이 아니라 평범하다는 사실은, 바로 '평범한'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주기 마련이죠. 결국, 그와 비슷한 행동을 자신도 했고, 하지 않았어도 적어도 들었거나 봤는데 이 모든 게 졸지에 폭력이라니, 환장할 노릇이죠. '강간문화'라는 말에 발끈하게 됩니다. 

우리 사회 대다수 여성의 일상을 짚어 보죠. 화장실 갈 때 디지털 성폭력을 걱정하거나, 취업과 승진, 임금 협상에서 성별 때문에 불이익을 받거나, 결혼 후 집과 직장 중에서 선택해야 할 상황에 놓이거나, 꾸밈에 더 많은 돈과 시간을 들이지만 꾸밈 때문에 성폭력 원인제공자가 될 위험에 처하거나, 술에 취하면 강간당할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거나, 택시에 홀로 탔을 때 기사가 무섭거나, 집요한 스토킹으로 공격받거나, 심지어 살해되는 여성을 보며 전이되는 불안을 느끼거나, 길거리나 직장, 학원, 식당, 대중교통 가리지 않고 성별 때문에 추근대는 사람들을 맞닥뜨리거나, 모두가 신화 속의 파리스라도 된 양 여성의 외모를 품평합니다. 여성이 겪는 이 모든 상황은 자연현상이 아닙니다. 그래도 되는 사람은 없어요.

피해 사실을 고발하는 이들은 공통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라고 사건을 재정의하고, 가해자가 이 사실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사과하라고 말입니다. 더불어 같은 경험을 한 다른 피해자에게 용기를 주고 싶으며,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합니다. 성폭력 문제를 피해자 잘못으로 돌리는 문화에 문제제기하고, 피해자들의 연대를 구축해 같은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사회 구조의 개혁을 호소합니다.

▲ 많은 남성이 여성의 일상의 공포를 그저 유난 떠는 수준으로 생각한다. 여성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미투운동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해당 카드뉴스 전문은 다음 링크에서 확인 가능하다. http://icwa.kr/226105 ⓒ인천여성회


펜스룰 운운은 '여성을 사람으로 보려 노력할 의사 없음'

-여성을 이해할 수 없는 많은 남성이 이른바 '펜스룰'을 미투 대처법으로 거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언론은 이런 남성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펜스룰이 왜 문제인가요?  

펜스룰을 일상에 적용하겠다는 선언은 '나는 여성을 나와 동일한 사람으로 보지 못합니다. 여성들은 나에게 그저 성적 대상으로만 보입니다. 그렇게 보지 않기 위해 노력할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꼴입니다.  

펜스룰 운운하는 태도는 바로 자신만이 여성과의 성애를 결정하고 선택하는 위치에 있음을 과시하는 겁니다. 사실 한국에 굳이 펜스룰이 왜 필요한가 싶어요. 이미 여성 배척이 만연하잖아요. 국민은행과 하나은행에서 신입사원 채용 시 성차별 기준을 적용한 정황이 나왔습니다. 

여성이 성폭력 구조를 이야기하면 "무슨 말도 못하겠다"고 푸념하는 남성도 있는데, 이는 두려움을 느껴서가 아니라 상대에게 두려움을 주려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내 말을 문제 삼지 말라는 일종의 권력행위지요. 두려움을 이용해 지배하려 합니다. 

펜스룰이 이와 마찬가지 태도입니다. 무고가 두렵다고 하지만, 이는 과잉 걱정입니다. 여성을 자신과 동일한 인간으로 보고, 여성과 충분한 대화와 교감을 나누는 남성이라면 무고를 걱정하지 않을 겁니다. 비단 한국만이 아니라 인간 사회가 남성을 과잉 걱정합니다. 남성 걱정을 중심으로 사안을 바라보는 습관이 세포 하나하나에 배어 있어요. 미국도 그래요. 남자들이 무고를 걱정하고 아들의 부모가 제 아들이 무고 당할까봐 걱정해요. 남성의 감정은 정치화되기 쉽죠. 이들의 불안과 걱정은 사회가 들어주니까요. 

-일각에서는 '미투 때문에 한국도 일본처럼 남녀의 데이트가 어려워지는 사회로 변화할 것'이라며 경계감을 드러냅니다. 이런 변명성 주장에 일일이 대응하는 데 여성들이 큰 피로감을 호소합니다만, 안타까운 건 이런 시각이 남성 일부만의 문제는 아니리라는 점입니다. 답변을 해 주신다면요? 

성폭력 고발로 데이트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면, 데이트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점검해 보는 게 좋습니다. 성범죄로 오해 받을지도 모를 말과 행동이 아니고선 여성을 대할 수 없다고 선언하는 걸까요? 많은 남성의 관계를 시작하고, 관계를 끝내는 방식에 심각하게 문제가 있습니다.  

남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야 하고, 여자는 자기를 좋아해주는 남자를 만나야 행복하다는 말이 있죠. 매우 이상한 말이에요. 이런 관념이 안전한 관계가 아니라 위험한 관계를 조장합니다. 선택과 거절을 여성에게 봉쇄시킨 채 남성이 관계를 이끌어야 한다는 문화가 있습니다. 이는 소유관계이지 동지관계가 아니에요. 그러니 고백을 안 받아줬다고 죽이고, 거절하면 죽이는 사람이 나오죠. 

춘향에게 수청을 들게 하는 변학도의 행동은 오늘날의 언어로 옮기면 성상납 강요입니다. 춘향은 자기보다 신분이 높은 이몽룡이 방자를 시켜 만남을 청하지만 처음에 이를 거절해요. 춘향은 감히 거절하고, 선택합니다. 춘향은 봉건적 가치관에서 자유로운 인물이 아니지만, 근대적 개인의 모습도 중첩되어 있습니다. 변학도의 몸의 지배를 거부함으로써 계층과 무관하게 한 개인 여성이 성적자기결정권을 가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회가 여성의 선택과 거절을 묵살하다가 유난히 관심을 보이는 순간은 성매매와 성폭력에 한해서입니다. 성매매는 여성이 '선택'했으며, 성폭력은 여성이 '거절'하지 않았다며 여성에게 책임을 지웁니다. 남성은 욕망의 수동적 피해자가 되죠. 

"실명 미투해야 한다"는 폭력성 

-많은 이가 '미투는 실명 공개를 전제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최근 <프레시안>의 A씨 보도 논란에서도 숱한 이는 물론, 이른바 진보 언론 일부도 익명 미투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이 같은 지적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매우 위험한 태도입니다. 얼굴과 이름을 공개해야 한다는 주장은 결국 피해자를 보호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피해자를 더욱 취약한 상태로 만들어 위험한 상황에 몰아넣으려는 태도입니다. 복면 쓴 시민은 테러리스트라고 하던 박근혜 정부의 태도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름을 공개하면 피해자의 말을 믿나요? 여성이 신변 보호를 위해 익명을 유지하려 할 때는 가면을 벗기려고 하지만, 정작 여성이 이룬 성취에 대해서는 여성을 열심히 지우지요.

정봉주 씨는 왜 거짓말을 했을까요.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겠죠.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법적으로 걸리지 않은 이상, 가해자가 가해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대체로 피해 여성의 말보다는 남성의 말을 더 믿어요. 정봉주 씨는 자신의 말과 기억이 훨씬 객관적인 힘을 가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 사건은 '객관성'이라는 기준을 지배해온 남성 권력행위의 막강함을 보여줍니다. 말과 기억에 대한 남성의 지배 권력을 과시하는 행위였습니다. <아이 캔 스피크>에서 옥분이 옷을 걷어 올리고 "내가 증거요!"라고 외치는 장면을 떠올려 봅시다. 옥분이 제 몸의 상처를 보여 주며 자신이 증거라고 합니다. 몸에 참혹한 증거가 새겨져있어야 우리 사회는 겨우 피해자의 말을 믿습니다. 

-많은 이가 '익명 미투=꽃뱀' 프레임에 동조하는 듯합니다. 

과잉 공포입니다. 미투 운동 국면에서 많은 이가 피해자의 말을 듣고 생각하기보다, 피해자가 '누구인지' 궁금해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가 이름을 밝히면, 가해자와 같은 입장의 이들이 피해자를 응징하기가 더 쉬워지죠. 전혀 죄의식을 갖지 못한 채 신상을 털고, 외모 품평을 하며 피해자를 서슴없이 괴롭힙니다. '꽃뱀'도 바로 여성의 말을 믿지 못하도록 조장하는 전략입니다. 유혹의 피해자가 되는 남성이라는 틀을 만들어요. 꽃뱀이라는 틀은 여성이 몸을 통해 돈을 번다는 생각을 반영합니다. 

이름과 얼굴 공개에 집착하는 행동은 인격을 존중하지 않겠다는 뜻일 뿐입니다. 여성뿐 아니라 사회의 소수자 말은 믿어지지 않기에, 약자들은 오직 몸이라는 물질성으로만 존재합니다. 반면, 성폭력 가해자들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거의 예외 없이 '의도'에 집중합니다. 나타난 결과가 무엇이든 애정표현이었다, 교육목적이었다, 위로였다는 등 자신의 의도를 강조해요. 이 말이 받아들여지기 때문이죠. 가해자의 '의도'는 피해자의 고통보다 상대적으로 더 신뢰받아요. 


'#미투'에서 '#아이 빌리브 유'로

[이라영과 미투 톺아보기 ③·끝] 여성을 약자화하는 사회에 의구심을
2018.04.13 08:27:44

여성 문제에 관한 이라영 필자의 다른 글 보기


가해자 말고 피해자에 감정이입해야 

-미투 운동이 크게 화제가 되었는데, 최근에는 정치인에 관한 폭로와 대학가 폭로를 끝으로 새로운 소식은 잘 나오지 않는 듯합니다. 한편에서는 이제 시민 사회 단체를 중심으로 미투에 힘을 실을 작업이 진행 중이고요. 앞으로 미투에 남은 과제는 무엇일까요?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를 밝히는 일은 어쩌면 부차적입니다. 폭로는 최후의 수단이기에 폭로에 의존하는 사회는 문제가 있지요. 폭로가 나오지 않더라도 제도가 응답을 해야 합니다. 법을 다루는 권력기관인 검사마저도 자신이 겪은 일을 제도적으로 해결할 길이 막혀 언론에 직접 호소한 게 현실입니다.  

'나꼼수 코피 사건'처럼 여성은 정치적 응원을 위해 '자발적' 벗음을 요구받거나, <더러운 잠>처럼 정치적 응징을 위해 벗겨지는 일이 꾸준히 일어납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상황이 쉽게 달라지진 않겠지요. 가해자 한 사람 잘라낸다고 쉽게 이 '문화'가 달라지리라 믿지는 않아요. 다만 미투 운동을 계기로 이에 침묵하지 않는 사람들은 늘어날 겁니다.

피해자 보호와 치유에 사회가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여성에게도 삶의 시간, 역사가 있어요. 통념적으로 여성이 공간화(자궁)된다면 남성성은 진보의 주체, 곧 시간입니다. 그들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존재로 여겨져요. 그래서 사회가 여자 때문에 과거에 발목 잡힐까 봐 남성을 걱정해주고, 그의 미래를 걱정해줘요. 반면 피해 여성이 회복하는 시간에는 무심합니다.  

사건도 사건이지만, 사건 이후의 삶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피해자들은 피해가 있었던 그 시간으로 계속 돌아갑니다. 피해자의 절규에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는 사회에서 가해자는 제 삶을 살지만, 피해자는 과거의 기억에서 떠나지 못합니다. 단역 배우 자매들의 어머니는 딸이 죽은 시간까지 기억해요. 그 날에 인생이 멈췄다고 합니다. (☞관련기사 : [인터뷰] 단역배우 자매 어머니 "국가는 없었다" 

-당장은 법조-언론-여성단체의 역할이 중요해 보입니다. 이들은 미투를 뒷받침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요? 

여성단체들은 지금도 과하게 일을 많이 하는 걸로 압니다. 저는 이런 사안에서 늘 여성단체의 역할을 기대하는 태도도 조금 의아합니다. 언론과 사법 영역이 여성단체의 비판과 요구를 끊임없이 무시해왔습니다. 셀 수 없이 비판이 거듭되어도 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언론의 태도는 매우 느리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가해자 입장에서 기술하고 가해자의 성별을 가려줍니다. 또한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은 그야말로 입을 막는 용도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내 말을 믿지 않겠지, 말해봐야 나만 손해지, 증거가 없는데 무고로 고소당하면 어떡하지? 이렇게 말이 믿어지지 않는 경험이 쌓이면 말하기를 주저하게 됩니다. 그래서 미국이나 유럽에서 미투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I believe you'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피해 호소인을 지지하는 움직임도 곧 일어났어요. 피해자의 말이 믿어지지 않는 사회니까 이런 움직임이 이어졌요. 대부분 사회가 가해자의 시선과 입장에서 성폭력 사건을 기술하고 가해자의 마음에 감정이입합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언론과 법이 (성별과 무관하게) 가해자 일반에 감정이입한다기보다, 여자에게 폭력을 행사한 남성 가해자의 입장에 감정이입합니다. 남자를 때린 남자, 여자를 성폭행 한 여자에게는 다른 반응이 나타나잖아요. 성소수자의 경우, 성폭력 사실이 알려지면 더욱 빨리 사회에서 사라지는 사례를 볼 수 있습니다. 영화감독 이현주 씨의 사례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남자가 여자를 때리거나, 성폭행 하거나, 심지어 죽였을 때에는 악착같이 피해자에게서 원인을 찾습니다. 여성은 남성의 기분을 좋게 하거나 나쁘게 하는 감정의 매개이지, 감정의 주체가 될 수 없어요. 남성의 기분을 중심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우발적' 행동이라는 이유로 남성의 폭력을 법이 잘 이해해 줍니다. 남성은 여성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아마도 무의식중에) 생각하기 때문에 남성의 기분을 나쁘게 한 여성은 벌을 받을 만 하다고 여기는 거죠. 

기존의 진보와 보수라는 틀을 벗어나야 합니다. 진보 세력은 그동안 성 정치에서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여기서는 조금 넓은 의미의 '진보'를 말합니다. 여성의 말과 행동은 툭하면 지나친 것이 됩니다. 남자가 여자를 죽이면 죽일만한 이유를 여자에게서 찾지만 여자는 '한남'이라고만 말해도 지나치고 과격하다고 합니다. 이 사회에서 여성들이 더 '지나치게' 말해야 합니다.  

-여성이 일상을 보내는 곳, 즉 집-학교-직장이 여성을 향한 폭력이 없는 곳으로 변화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근본적인 해법은 무엇일까요? 아울러, 여전히 여성 혐오에 관한 이해가 없는 남성에게 '무엇이 문제인가'를 주입식으로 알릴만한 방법은 없을까도 궁금해요.

남성들이 여성혐오에 대해 이해가 없는 건 이해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죠. 알고 싶지 않고, 알 필요가 없으니까 모르는 상태를 유지합니다. 왜 남성은 평소에는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자의 역할을 자처하면서 인간관계, 특히 여성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를 자처할까요.  

여성과의 관계에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닙니다. 전반적인 인간관계에 대한 고찰이 필요합니다. 남성은 서열관계 속에서 복종하거나 다스리는 관계에 익숙합니다. 서열관계로 빚어진 인간관계가 너무 많아서 동등한 인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감정노동을 낯설어 합니다. 누구와의 관계에서든 인간은 이 감정노동에서 자유롭지 않은데도 말이죠.

일단 여성의 가시화가 필요합니다. 한국의 TV토론을 보면 대부분 남성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요. 아무리 백인 중심 사회인 미국의 방송이라 하더라도 TV토론에서 백인 남성으로만 패널을 구성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형식적일지라도 젠더와 인종 문제를 고려하는 척이라도 합니다. 강남역 살인사건을 주제로 남성으로만 구성된 TV토론이 방영되는 모습은 경악스러웠어요.  이렇게 여성을 지우는 게 우리의 일상입니다. 여성이 수동적인 피해자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사회입니다. 

발언권이 상대적으로 적은 사람과 집단에 대해 사회가 행할 수 있는 정의는 그들의 발언이 옳고 그르냐를 따지기 이전에, 일단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라 봅니다. 발언의 양이 상대적으로 적은 집단은 어떤 말을 했을 때 작은 실수나 잘못이라도 매우 크게 부풀려집니다. 이것은 정의롭지 않아요. 양적으로 공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질적으로 더 까다로운 잣대를 들이댑니다. 미투 국면에서 폭로가 터져 나오는 와중에 모두 전적으로 옳은 말만 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러나, 저는 일단 말이 막혔던 이들이 말하도록 장을 만드는 것. 그것이 선행되어야 할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참정권 운동의 역사와 이유, 현재 한국에서 청소년이 투표권을 쟁취하기 위해 삭발까지 하면서 투쟁하는 이유는 바로 의견을 낼 권리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이 사회에서 생각하는 인간으로 존중받기 위한 기본적인 권리를 외치는 거예요.

▲ 이제는 정부가 제도로 응답해야 할 때다. ⓒ프레시안(최형락)


남성은 왜 듣기를 거부하는가 

-특히 남성의 왜곡된 성 관념을 교정하고, 여성이 약자임을 제대로 우리 사회가 이해하는 게 중요해 보이는데요. 효과적인 방법이 없을까요? 대부분의 여성이 이 문제를 남성에게 설명하기를 아예 포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남성들은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을 폭력의 구실로 삼는데 매우 익숙합니다. 성폭력을 '내 안의 악마', 곧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본능이라는 자연법칙에 따라 발생한 일로 만들죠. 그래서 가련한 본능의 피해자가 되어요. 가해자들의 말에 이런 화법이 자주 등장합니다.

성폭력 가해자가 대부분 남성인데, 이 남성들은 경제활동을 이유로 종종 구제받습니다.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이라는 이유로 심지어 의붓딸이나 친딸을 성폭행해도 판사가 '이해'해 줘요. 반면 여성은 피해자가 되어도 남성의 사회생활과 해당 조직에 방해되지 않도록 일자리에서 물러나기를 권유받거나, 순수한 피해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일자리를 떠나야 한다고 여깁니다. 왜 거기서 계속 일해? 일을 그만두지 않은 걸 보니 서로 좋아한 거 아니냐. 이렇게 진행이 돼요. 왜 여성이 일을 그만두는 문제는 이토록 쉽게 생각할까요. 

믿어지지 않겠지만 여성도 일이 필요해요. 가해자를 퇴출시키는 문제도 신중하게 논해야 하는데, 피해자는 으레 '알아서 나가겠지'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자연스러운 태도이고, 알아서 나가지 않으면 뭔가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여겨요. 한 조사에 따르면 성폭력 피해자의 72%가 직장을 떠난다고 합니다. 

여성이 필연적으로 약자는 아닙니다. 여성을 약자로 만들고 있는 사회에 의구심을 가져야 합니다. 여성이 약자라기보다 노동하는 인간이며, 독립적으로 살아갈 권리가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성폭력이 야기하는 많은 문제 중 하나는 여성의 노동권을 침해하여 경제력을 박탈한다는 점입니다. 

또한 여성이 설명하기를 포기했다고 보는 게 바로 문제입니다. 여성에게 설명하는 노동을 강요하는 것, 이것이 바로 특권입니다. 모른다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은 입장에 있음을 과시하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스스로 생각할 필요를 못 느낀다는 거죠. 남성들은 왜 이렇게 듣기를 거부하는가. 왜 듣지 않으면서 여성에게 친절한 설명을 원하는가. 이 사회는 인간관계와 돌봄에 대한 남성의 무지를 과잉 이해합니다. 남성은 너무 이해받고 여성은 자기검열이 상대적으로 더 강해요. 효과적인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계속 싸울 수밖에 없어요.

성차별에 저항하는 행동이 '반사회적'으로 읽히는 사회입니다. 이러한 성차별주의자들을 교화하거나 계몽하는 게 운동의 목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개인에게 갇혀 있던 경험이 더는 개인적이고 예외적인 경험이 아니라 이 사회의 보편적인 '문화'임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듣지 않으려는 사람을 향해 설명하기보다는, 말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줘서 목소리를 더 키우는 게 낫습니다. 여자들의 심판자 노릇을 하는데 익숙한 이 남성연대 사회를 갑자기 바꾸지는 못해도, 적어도 불편함을 직시하는 사람들은 늘어나리라 봅니다. 겉모습에 불과할지라도 조금 조심하려는 남성들을 실제로 보고 있어요. 미미하지만 듣는 남성이 늘어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단역배우 자매 어머니의 목소리를 다시 전하고 싶습니다. "이 나라는 딸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해주지 않았다." 비평의 영역을 벗어나 정부가, 제도가 응답을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