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칼럼

‘외환위기 20년’ 한국 경제를 돌아보다

일취월장7 2017. 12. 7. 10:35

‘외환위기 20년’ 한국 경제를 돌아보다

김태일 고려대 교수는 정부의 역할을 중심으로 ‘외환위기 20년’을 정리했다. 지금 단계에서는 경제민주화를 통해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차형석 기자 cha@sisain.co.kr 2017년 12월 06일 수요일 제533호

지난 11월14일 한국개발연구원(KDI)은 ‘IMF 외환위기 발생 20년 대국민 인식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10월23일부터 26일까지 만 19세 이상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국민 57.4%가 지난 50년간 한국 경제의 가장 어려운 시기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지목했다. 조사 대상자의 59.7%가 외환위기가 본인 삶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응답했다. 또한 외환위기가 비정규직 문제(88.8%), 안정적인 직업 선호(86.0%), 소득 격차(85.6%) 등을 증가시켰다고 대답했다(복수 응답). 외환위기의 상흔이 깊이 남아 있었다.

20년 전인 1997년, 한국 경제는 연초부터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그해 1월 한보철강 부도를 시작으로 11월까지 삼미·진로·대농·한신·뉴코아·기아·해태·대우 등 대기업의 도산이 이어졌다. 당시 30대 대기업 그룹 가운데 11곳이 해체되었다. 나라 밖에서는 그해 여름, 타이 화폐 바트화가 폭락하고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화폐가치도 폭락해 동남아 외환위기가 발생했다.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이 튼튼해 걱정 없다’던 한국도 1997년 11월21일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12월5일 IMF 이사회에서 구제금융안을 승인했다. 외환위기 이후 외부로부터 지원받은 달러는 550억 달러 정도다. IMF는 구제금융을 지원하고 대신 고강도 구조조정을 요구했으며, 정부는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2001년 8월 구제금융을 상환하며 ‘IMF 체제’를 졸업했지만 한국 경제는 외환위기 이전과 이후로 나뉠 정도로 큰 폭의 변화를 겪었다.

ⓒ시사IN 윤무영
김태일 고려대 교수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저금리 정책을 썼다며 1997년 IMF의 고금리 요구는 지나친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외환위기와 한국 경제의 변화와 관련해 김태일 고려대 교수(행정학과)를 만났다. 재정 전문가인 김 교수는 7월 과거 고도 성장기부터 지금까지 한국 경제의 흐름을 짚은 책 <한국 경제, “경로를 재탐색합니다”>를 펴낸 바 있다. 책의 내용과 인터뷰 내용을 통해 ‘외환위기 20년, 한국 경제’를 정리했다.

1997년 외환위기의 원인은?

어떤 사건이 벌어질 때는 여러 가지가 겹쳐 일어난다. 당시 국제금융 환경이 좋지 않았다. 타이의 바트화가 폭락하고 아시아 금융시장이 불안정했다. 거기에 국내의 요인이 겹쳤다. 1960년대 경제개발이 시작된 이래 1990년대 중반까지 고도성장을 이어왔다. 개발연대 시기, 정부·금융·대기업이 삼각동맹을 이루었다. 정부가 강한 리더십으로 금융과 대기업을 통제 혹은 지원하며 수출과 투자를 밀어붙였다. 과거에 정부가 저축을 강조한 건 기업의 투자 자금 때문이었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 준비 없이 금융을 개방했고, 해외 차입과 투자가 과도해졌다. 1980년대까지 GDP 대비 자본 투입이 20~30%대였는데 1991~ 1997년에는 40%를 넘었다. 과잉투자였다. 웬만한 대기업의 부채비율이 400~500%일 정도로 공격적 차입 경영을 했다.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1980년대는 ‘3저(저유가, 저금리, 엔화 대비 낮은 원화 가치) 호황’으로 운이 좋아 넘겼는데, 계속 차입 경영 행태를 이어가다가 세계 경영 여건이 안 좋아지니까 빵 터져버렸다.

ⓒ연합뉴스
1997년 12월3일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오른쪽)가 긴급자금 지원 내용을 발표하고 있다.
금융권, 특히 종합금융회사(종금사) 문제가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는데?

김영삼 정부가 세계화를 내세우며 OECD 가입을 추진했다. 자본시장 자유화(개방)는 회원국이 되기 위한 조건 중 하나였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개방부터 서둘렀다. 기업에 단기자금을 조달하던 20여 개 단자회사들이 1990년대 중반에 종금사로 전환되었다. 이 종금사들이 해외 단기자금을 경쟁적으로 대거 차입하기 시작했다. 1997년 중반부터 해외 금융기관들이 만기 연장을 거부하고 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종금사가 해외에서 빌린 돈을 갚지 못하자 정부가 보유하고 있던 달러를 투입해 대신 갚아야 했다.

1997년 말에 IMF 구제금융을 받았는데, 1998년은 경제성장률이 -5.5%일 정도로 경제 상황이 더 혹독했다.

IMF는 구제금융 요청을 승인하면서 긴축적 경제 운용(고금리)과 구조개혁을 요구했다. ‘IMF 조건부’라고 한다. 돈을 꿔와 응급 처방을 했으면 그 정도에서 끝났어야 하는데 고금리가 문제였다. 당시 이자율이 30% 수준에 이르렀다. 부자들은 ‘지금 이대로’를 외치며 축배를 든다는 말까지 나왔다. 기업들이 빚을 많이 진 상태에서 이자율을 올려버리니까 부도나는 회사가 속출했다. 경기침체가 심화되고 현실적으로 너무 무리한 처방이라고 해서 1998년 중순에 금리를 내렸지만 이미 1만 개 넘는 기업이 도산했다. 이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미국 등 선진국에 대한 정책과 정반대였다. 2008년에는 저금리와 확장정책을 펼쳤다. 1997년 IMF의 고금리 요구는 지나쳤다.

저서에서 외환위기 시기와 관련해 탈산업사회로의 전환을 주목하는데?

제조업 중심 사회를 산업사회라 하고, 제조업에서 서비스 중심으로 산업구조가 바뀐 것을 탈산업사회라 한다. 1991년 제조업 고용 비중이 28%였는데, 1998년에는 19.7%까지 내려갔다. 탈산업화가 진행된 것이다.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생산성 차이 때문에 서비스업 중심의 탈산업사회는 제조업 중심의 산업사회에 비
ⓒ연합뉴스
1996년 12월5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조합원들이 정부종합청사 인근에서 정부의 노동관계법 개정안 철회 촉구집회를 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해 경제성장 속도가 느리다. 과거와 같은 고도성장을 할 수 있는 경제구조가 아니었는데, 한국은 그 흐름을 과잉투자로 붙잡고 있다가 외환위기로 터진 것이다.

경제구조상 앞으로도 저성장이 이어지나?

2000년대 초반(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 성장률은 4~5%대였다. 이명박 정부 때 평균 경제성장률은 3.2%였다. 2000년대 초반부터 저성장을 문제 삼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3%대 성장이면 양호한 것으로 생각한다. 경제구조 자체가 바뀌었다. 공장 짓고 길 놓고 해서 GDP를 올리는 것은 한계가 있다. 예전에는 공급 능력이 부족해 공급 능력을 늘리는 게 중요했다. 지금은 공급 능력이 부족해 수출을 못하는 게 아니다. 탈산업사회가 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생산 과잉이다.

미국에서 해외에 나가 있는 제조업 공장들이 돌아온다고 하는데, 예전과는 상황이 다르다. 자동화되어 종업원이 적은 공장들이다. 굳이 외국에 둘 필요가 없다. 로봇이 많은 공장은 수리를 위해서라도 미국에 있는 게 오히려 낫다. 제조업을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예전처럼 대규모 고용을 창출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KDI의 조사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외환위기가 비정규직 문제를 증가시켰다고 인식하고 있다.

IMF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늘리고자 해고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고 파견법을 허용하라고 정부에 요구했다. 정리해고제와 파견법이 만들어졌다. 정리해고제는 유예되었던 법을 1년 당겨 1998년 초에 도입했다. 이 정리해고제에 따라 당시 구조조정 과정에서 대량해고가 이루어졌다. 근로자파견법은 외환위기 이후 노동시장 판도를 바꾸었다. IMF는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규제 완화, 민영화, 자본시장 자유화 등)’를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그 당시 완전한 시장경제를 하는 게 번영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 처방과 조건을 내건 것이고. 정부도 경제자유화 조처가 필요하다고 느껴 서로의 이해가 들어맞았다. 노동시장 유연화에 대한 이야기는 그때부터 나왔다.

‘외환위기 20년’을 거론하면서 일부 언론은 다시 노동개혁과 규제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노동시장 유연화에 대한 이야기는 IMF 외환위기 때부터 시작되었다. 해고가 어렵고 고용이 경직된 사람이 전체 노동시장에서 몇 %일까. 대기업에 직접 고용된 블루칼라 정규직일 텐데, 그 규모가 얼마나 될까. 대부분 하청기업 형태 아닌가. 어느 정도 고용 경직성이 문제인지 그 실증 데이터를 보고 싶다. 내 생각에 그 규모가 클 것 같지 않다. 규제개혁은 중요하긴 하다.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해 핀테크, 블록체인 등 국내에서는 규제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다. 빅데이터가 4차 산업혁명의 핵심 중 하나인데 규제를 풀면 개인의 프라이버시 문제가 있다. 민감한 부분이다. 어떤 부분을 풀지 공론화할 필요는 있다. 재벌·대기업의 규제 완화 요구를 일괄 풀자는 것은 아니다. 외환위기 이후 살아남은 대기업은 엄청나게 성공했다.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대로 정부가 집행하면 된다. 법을 위반하면 집행하면 되고 위반하지 않으면 집행하지 않으면 된다. 대기업을 죄인 취급하자는 게 아니라 원칙대로 해나가면 된다.

성장과 분배에서 정부가 어떤 역할을 해왔나에 주목해 ‘외환위기 20년’을 정리했다. 지금 정부의 역할은?

앞으로 책을 쓰려고 한다(웃음). 경제민주화는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시장경제를 하려면 공정성을 확립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 한국 사회에는 공정성을 저해하는 불법·편법이 많다. 대기업들을 강압하는 게 아니다. 시장 경쟁이 작동하는 게임의 룰을 정하고 그 게임의 룰대로 경제가 진행되는지 감시하는 게 정부의 역할이다. 미국만 해도 공정경쟁과 관련한 법률이 세다. 혁신의 원동력은 공정한 게임의 룰을 세팅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룰이 공정해야 선수들이 마음껏 뛸 수 있다. 산업구조가 과거와 다르기 때문에 양극화 등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양극화 해소를 위해 돌봄 등 사회서비스를 강화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다. 사회안전망 확충은 누구나 동의하는 정부의 역할이다. 


당신은 IMF 세대입니까?

[프레시안 books] <IMF 키즈의 생애 >IMF 30대의 아직 불안한 오늘
2017.12.07 02:42:15

국제통화기금(IMF) 구제 금융 외환 위기(이하 IMF로 통칭)가 올 겨울로 딱 20년이다. 예상보다 언론의 조명 강도는 조금 약했고, 사람들의 관심은 그보다 미미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10년 만에 일어난 이 사건은 실제 민주화만큼이나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어느새 사회적으로는 거론의 가치가 그리 크지 않은 과거지사가 된 듯하다. 

하지만, 그 시대를 지나온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과거를 되새긴다. 예컨대 환란 직후 대학생이 된 이들 중에는 입학 직후 집안의 사정으로 대학 생활을 접어야만 하는 이가 있었고, 조금이라도 빨리 입대하려는 친구들로 인해 대기자가 되고서야 군대에 갈 수 있었던 이가 많았다. 대학 입학 상담 시 선생님들은 약속이나 한 듯 오직 경영학, 경제학, 행정학, 그리고 교육학 전공을 권유했다. 취업에 유리하고, 안정적인 직장을 가질 수 있다는 이유로 선택된 전공 학문이다.  

그들은 1996년 연세대 한총련 사태 이후 급격히 퇴조한 대학 운동권의 변화를 (당시는 그 의미를 몰랐으나) 한가운데에서 겪어내기도 했다. 운동권 학생회를 향한 학생들의 비판이 학내에 팽배했고, 학과제는 학부제로 변해 학생 집단이 파편화되기 시작했다. 

모두가 강제로 집단이 아닌 개인으로서 급변하는 시대에 맞서야 했다. 개인의 성공을 기원하는 광고(여러분, 부자 되세요!)가 범람했고, 개인의 발견은 시대의 화두가 되었다. 모든 것이 해체되는 시기, 붙잡아야 할 건 개인뿐이었다. 이들은 가정에서 사회로 첫발을 내딛는 시기, 변화의 의미도 모른 채 변화의 선봉에 서야만 했다.  

전직 기자인 안은별이 쓴 <IMF 키즈의 생애>(코난북스 펴냄)는 IMF 시대에 십대를 보내고 사회의 출발점에 선 이들 일곱 명과의 인터뷰집이다.  

이쯤 되면 이 인터뷰집에 등장한 이들이 어떤 사람일 지 대략 짐작이 간다. 틀림없이 IMF 환란으로 인해 가계경제가 무너지는 경험을 했고, 그로 인해 인생의 지표가 엇갈렸고, 꿈꾸던 삶을 포기해야만 했고, 이렇게 역경을 딛고 저렇게 좌절에 침몰한 이야기들...

책이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하는 지점이 여기 있다. 책은 단순히 주인공들의 불행 겨루기에 머물지 않는다. IMF는 어디까지나 인터뷰이 일곱 서사를 구성하는 조건일 뿐이다. 책의 목적은 그 시기에 십대 시절을 보낸, 지금은 30대인 이들의 삶의 서사를 풀어놓는 데 있다. 따라서 IMF 외환위기라는, 유별나게 강력했던 외부충격은 이 책에서 삶을 견뎌나가야 하는 이라면 누구나 겪을 법한 질곡의 하나로 자연스럽게 소화된다. 

▲ <IMF 키즈의 생애>(안은별 지음, 코난북스 펴냄) ⓒ프레시안

책이 더 집중한 지점은 인터뷰이 삶의 이력으로 보인다. 서문에서 저자가 강조했듯, 저자는 여러 통로로 최대한 다양한 조건에 걸친 사람들을 인터뷰이로 섭외하려 애썼다. 한때 진보정당 운동에 투신했다 현재는 국민의당에서 일하는 여성, 전형적인 엘리트로 자라나 지금은 부유한 삶을 살아가는 전문직 워킹맘, 일찌감치 주변부에서 성공이 아닌 다른 무엇을 지향점으로 잡은 지역의 청년 등이 주인공이다.  

따라서 IMF보다 더 중요한 키워드는 오늘날 삼십대의 삶을 어떻게 조명할 것이냐는 질문에 관한 저자의 답이다. 격변기 여성으로서 대학 문턱에 들어간 이들이 어떻게 사회와의 불협을 찾아내고 이를 극복했는지, 결혼이 현대 여성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청년으로서 살아간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주류 질서에 편승하지 않고 성인이 된 이가 이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다양한 삶의 이력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로 책은 풀어낸다.

이 책은 IMF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러나 IMF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나칠 삶의 통과의례로 재해석된 IMF는 개인의 서사 속에 녹아든다. 그리고 개인의 서사를 통해 우리가 사는 오늘을 바라보게끔 한다.  

IMF라는 단어의 무게감에 함몰되지 않고 개인에게 초점을 맞춘 점은 명민한 선택으로 보인다. 저자가 당부했듯, 이들 개인의 삶으로 'IMF 키즈의 생애'를 진단해서도 안 되며, 진단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 등장한 인터뷰이들의 어제와 오늘은 모두 다르다. '중산층'의 삶을 조금 더 넉넉하게 누리는 이부터 일찌감치 가정의 병풍 없이 홀로 세상을 헤쳐가야 했던 이의 이야기까지, 저자는 비록 인터뷰이 선택에 한계가 있었다고 말하지만 인터뷰의 충실함은 이를 겸손으로 이해하게끔 한다.  

굳이 이 책에 등장한 인터뷰이들의 공통점을 꼽아보는 건 가능하다. 아직 이들은 불안하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