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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네 인생 살아" 유아인, 왜 네티즌에 날 세웠나 - 유아인은 페미니스트인가

일취월장7 2017. 12. 16. 10:07

[N초점] "너네 인생 살아" 유아인, 왜 네티즌에 날 세웠나

(서울=뉴스1) 장아름 기자 | 2017-11-25 10:32 송고

"제발 너네 인생 살아"

배우 유아인이 네티즌들과 SNS 상에서 설전을 벌였다. 2시간 동안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거침 없이 밝혔고, 다소 날선 답변으로 대응해 이목을 집중시켰다. 유명 연예인으로서 네티즌과의 설전이 화제로 이어질 것을 예상 못하진 않았을 터. 그럼에도 그가 왜 굳이 SNS 상에서 일부 네티즌들에게 왜 날을 세운 것일지 궁금증을 더하고 있다. 

유아인은 지난 24일 자신의 트위터에 "좋은 방법 하나 알려줄게. 내가 보기 싫으면 안보면 돼. 언팔 하면 되고, 검색창에 굳이 애써서 내 이름 안치면 돼"라며 "너네 제발 너네 인생 살아. 나 말고 너네 자신을 가져가. 그게 내 소원이야. 진심이고. 관종이 원하는 관심을 기꺼이 줘서 감사하다!"는 글을 올렸다.

그는 이어 "나는 내가 예쁘게 놀 수 있고 제대로 자기 힘을 내게 사용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랑 놀게"라며 "너네 그냥 너네끼리 놀아. 왜 굳이 스스로 불편을 찾아내는 거야? 불편이, 그것으로 세상에 뱉는 몇마디로 너희의 존재감을 가져가지 마. '존재'를 갖도록해"라고 충고했다.

유아인은 계속해서 "이것이 내가 너희를 소비자가 아니고, 관객이 아니고, 악플러도 아니고, 잉여도 아니고 하나의 '인격'으로 존중하는 방식"이라며 "'무시'가 아니라. '장사'가 아니라! 감사. 내가 너희에게 '감' 하는것 처럼. 그래야 가질 수 있단다. PEACE!"라고 글을 이어 게재했다. 

유아인 인스타그램 © News1


발단은 지난 18일 유아인이 올린 글에서 비롯됐다. 일부 네티즌들은 유아인이 "애호박으로 맞아봤음?(코찡긋)"이라는 글을 올리자 여혐 논란을 제기했다. 유아인은 한 네티즌의 "유아인은 20m 정도 떨어져서 보기엔 좋은 사람, 친구로 지내라면 조금 힘들 것 같은 사람. 냉장고를 열었는데 덜렁 하나 남은 애호박이 내게 '혼자라는 건 뭘까?' 하며 코 찡긋할 것 같음"이라는 글을 리트윗하고 이 같은 글을 남겼던 것. 

때 아닌 여혐 논란에 유아인은 "농담 한마디 건넸다가 여혐한남, 잠재적 범죄자가 됐다"며 "애호박-현피로 이어지는 발상의 전환이 참으로 아름답고 자유로운 이 세계"라고 덧붙이며 자신의 글이 왜곡돼 확산돼고 있다는 현실에 대해 한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논란은 해소되지 않고 더욱 확대되는 양상을 보였고, 결국 유아인이 "너네 제발 너네 인생 살아"라는 글을 올리기에 이르렀다. 

이외에도 유아인은 이날 "증오를 포장해서 페미인 척하는 메갈짓 이제 그만", "한남이 뭔가요. 알려주세요"라는 글을 남기는가 하면, 한 네티즌의 "쓸데 없는 말 해서 신세 조진다"는 글에 "내 신세, 아님 네 신세? 뭐가 더 나은 신세일까"라고 응수했고, "가만히 있으면 반은 간다는데"라는 말에는 "너는 왜 가만히 안 있니? 반이라도 가지"라고 날선 답을 남겨 눈길을 끌었다.

마지막으로 유아인은 "살아라. 제발 살아라. 내 인생 말고. 너희의 인생을!", "저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 증오 마저 가엽게 여기소서. 저들을 구원하소서. 나를 구원하소서", "나의 전투력이란. 일당백 아니고 100명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면서도 살아남는 나의 정신력이란! 너희가 나를 훈련시켰구나! 진심으로 감사하다", "50분 동안 이곳에서 내가 한 일의 가치를 부디 알아주시길! 그럼 이만 불금!"이라는 글을 차례로 게재한 뒤 설전을 마무리지었다.

유아인 인스타그램 © News1


매번 자신의 SNS 글이 구설에 오르내리자 이와 같은 생각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 앞서 유아인은 최근 세상을 떠난 고(故) 김주혁을 애도하는 글을 올렸다가 '허세 글'이라는 지적을 받았고, 또 동료 송혜교·송중기 부부 결혼식에서 포착된 피로연 현장 모습이 비난을 받자 "작품을 함께 했던 선배 배우분의 사망 소식과 오랜 친분을 가진 동료들의 결혼이 겹친 상황을 조롱하듯, 깊은 조의와 축복을 동시에 가져야 하는 난감한 상황의 간극을 비집고 들어와 논란거리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들에게 동조하지 말아주시기를 바란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리기도 했다. 

또 그는 당시 "의도적으로 사실관계를 외면하고 타인의 진심을 악의적으로 매도하고 비난을 위한 비난을 서슴지 않는 실체 없는 소음에 눈과 귀를 닫으시고 부디 모든 사실과 진실과 진심을 바라보며 벼랑 끝의 이 세계를 함께 정화해 주시기 바란다"는 당부의 글을 적는가 하면, "아주 조금만 경계를 넘어도 두만강을 넘는 탈주민을 겨냥하듯 집요하게 뒤를 쫓는 이 나라", "세상을 향한 분노는 타인을 향한 분풀이로 증발하지 않고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의지로 발현돼야 한다고 믿는다"고 전하는 등 자신의 생각과 소신을 날카롭게 밝히기도 했다. 

그리고 획일적인 개성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표현 혹은 존재 방식에 대한 타당한 자유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나는 세상이 아니라 세상에 무릎 꿇는 나 자신에게 저항해왔다. 다들 똑같은 가면을 안전모처럼 착용하고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은 표정을 짓고 똑같이 입고 똑같이 말하고 똑같은 것을 원하는 재미없는 세상을 내 멋대로 휘젓고 싶었다"며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진심을 담은 다른 형태의 존재와 행위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조금은 믿었다. 위로나 인정도, 이해도 바라지 않았다"고 전했고 "간편해서 불편한 침묵, 외면, 비난 보다 더 가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소셜미디어를 통해 나의 마음을 전한다"면서 "과연 무엇이 인생의 낭비인가"라고 되묻기도 했다.   



유아인은 페미니스트인가

“나는 페미니스트다”라고 선언한 배우 유아인은 페미니스트일까? 페미니스트 의식은 성차별의 뿌리 문제를 인식하고 뿌리 물음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강남순 (텍사스 크리스천대학교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 webmaster@sisain.co.kr 2017년 12월 07일 목요일 제534호

“나는 페미니스트다.” 지난 11월26일 배우 유아인이 페이스북에 이렇게 선언했다. 이 선언 이후, 유아인이 페미니스트인가 아닌가 하는 찬반론이 SNS를 메운다. 이 물음에 반응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야 할 질문이 있다. 과연 페미니스트란 어떤 사람인가. 페미니즘의 다양한 이해에 따라서 누군가가 페미니스트인가 아닌가에 대한 답은 달라진다. 페미니스트에 대한 각기 다른 이해와 개념 정의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페미니스트다’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는 논쟁은 파괴적이고 소모적이다.

1971년 미국에서 나오는 <가톨릭 세계(Catholic World)>라는 저널에 “예수는 페미니스트였다”라는 글이 발표되었다. 이 글의 저자인 레너드 스위들러라는 신학 교수는 남성이다. 그의 글이 나온 후, 다양한 논쟁이 벌어졌다. 논쟁은 ‘예수가 페미니스트인가, 아닌가’는 물론이고 ‘남성 구세주인 예수가 여성을 구원할 수 있는가’라는 주제로까지 확산되었다. 그는 ‘페미니스트는 누구인가’를 규정하는 데에 복잡한 페미니즘 이론을 차용하지 않는다. 그 당시 하부 인간으로 취급받으며 살아가던 여성들을 온전한 인간으로 본 예수의 시선과 행동에 초점을 두었다. 여성을 온전한 인간으로 보는 것, 이것이 페미니스트의 우선적 규정 기준이었다. 이러한 페미니스트 개념에 따르면, “예수는 페미니스트였다, 그것도 매우 급진적인 페미니스트였다”. 스위들러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와 같이 급진주의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은 페미니즘을 생물학적 본질에 관한 것으로 귀속하게 하며, 페미니즘 자체를 매우 편파적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페미니즘은 궁극적으로 본질에 관한 게 아니라, 성차별을 포함한 다층적 차별 구조를 넘어서고자 하는 정치적 견해로 보아야 한다. 페미니즘의 다양한 정의 중 이론가들이 수용하는 것은 ‘페미니즘은 여성도 인간이라는 급진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급진적(radical)이라는 말은 뿌리로 간다는 의미이다. 즉, 눈에 보이는 현상의 근원으로 들어가서 차별적 구조들에 근원적인 문제를 제기한다는 의미이다. 페미니스트 의식은 성차별의 뿌리 문제(root problem)를 인식하면서, 그 문제들에 뿌리 물음(root question)을 던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유아인은 이러한 뿌리 문제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하고 있다. 가부장제가 자연스러운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것이 의미하는 가부장제적 특권(두 누이가 있는데 아들이라는 이유로 막내인 자신이 ‘장남 특권’을 누려왔다는 사실)과 남존여비의 전통이 양산하고 있는 “차별적 사랑”을 받으며 살아온 것의 부당함 등의 인식을 드러낸다. 또한 그러한 사적 영역에서의 차별이 “인간 사회의 참상”으로 이어진다는 사실도 짚어내고 있다.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이다’라는 페미니즘의 모토와 연결되는 지점이다.



ⓒ연합뉴스

페미니스트 자격을 간단명료하게 판단할 ‘대심판관’은 없다

유아인은 페미니스트인가. 이 질문에 대하여 ‘그렇다-아니다’라는 소모적 논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페미니스트라는 표지는 단순한 자기 정체성만이 아니라, 과제이자 책임성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여타 페미니스트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유아인의 페미니즘’도 치열한 학습과 개입에의 의지 없이 ‘남자와 여자는 평등하다’는 공허한 구호만을 외치는 ‘낭만적 페미니즘’을 넘어서야 하는 과제를 지닌다. ‘차별과 배제의 문제가 이 현실 세계 속에서 매우 복합적인 다양한 얼굴로 구성되고 실천되고 있는가’에 대한 다층적 학습을 통해서 페미니스트가 되어가야 한다.

다양한 종류의 특권과 권력이 복합적으로 교차하는 이 현실 세계에서, 누군가의 페미니스트 자격을 간단명료하게 판결 내릴 수 있는 ‘대심판관’은 어디에도 없다. 논쟁적 이슈가 등장할 때, 비난과 냉소가 아닌 비판적 개입과 토론이 필요한 이유이다. 남성·여성 또는 트랜스젠더 등 그 어디에 속하든, 페미니스트 역시 다층적인 인식의 사각지대를 지닌 존재로서, 오직 ‘형성 중인 페미니스트’인 것이다.

[시론] 일상으로 들어온 페미니즘

남인숙 작가 ㅣ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12.08(금) 16:03:47 | 1468호


1990년대 대학에서 강의를 들을 때만 해도 페미니즘은 평범한 학생들에게 실제 삶과는 거리가 먼 ‘-이즘’ 중 하나였다. 당시 몇 개의 페미니즘 강의를 듣고 적당한 학점을 받고 난 필자에게 남은 것은 ‘여자도 남자에게 의존하지 말고 독립적으로 살아야 한다’라는 의지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에도 페미니즘 논의의 발전이 이 정도에 그치지는 않았지만, 그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필자의 의식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필자는 개인적인 자아의 독립만으로도 평등한 삶에 어렵지 않게 편입할 수 있다고 믿었고, 시대가 그만큼은 진보했을 거리고 어림짐작했다. 그러나 이후 오랜 시간 많은 삶의 문제들에 부딪혔고, 나중에야 그 문제의 상당수는 남성으로 태어났으면 겪지 않았을 종류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시각이 달라졌다.

 

그 사이 인터넷 공간에서 여러 담론의 장이 형성되면서 페미니즘은 일상으로 영역을 넓히게 되었다. 이론과 학문이 아닌, 실제 삶의 가치관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이 변화의 과정에서 수많은 충돌이 있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얼마 전에는 한 연예인의 인터넷상 발언이 파문을 일으켜 꽤나 어수선한 모양이다. 필자는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한 그 남성 연예인의 글 자체보다는 그에 대한 여러 종류의 반응에 흥미를 느꼈다.

 

© 사진=연합뉴스·유아인 인스타그램

© 사진=연합뉴스·유아인 인스타그램


여성이 주체가 되는 상황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은 이전에는 ‘여자가 감히…’라고 시작되는 발화로 의견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제는 같은 가치관을 가진 이들이 보다 세련되고 진보적으로 느껴지는 표현으로 논지를 펴고 있다. 기본적으로 페미니즘과 양성평등에 대한 지지를 전제한 후 그것에 대한 정의를 선점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이 세계가 이미 양성평등을 넘어 여성상위인 시대로 접어든 것으로 느껴지고, 누군가에게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여성으로서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변화의 과제로 느껴지는 것이다. 여하튼 남성 대비 여성의 임금, 가사분담률, 남성에 의한 여성 범죄 등의 수치로 계량화된 각종 지표에 의하면 한국은 양성평등에 있어 갈 길이 먼 사회인 것은 맞다.

 

4차 산업혁명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날 미래 사회에서는 양성평등이 이루어지는 쪽이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득이 될 것이다. 다만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면에서 우선적으로 평등이 이루어질 것을 주장하는 각 입장들에 대한 합의가 앞으로의 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당장은 양성의 ‘다름’에 따른 형평을 정립하는 데도 수많은 진통이 따를 것이다.

 

사실 우리 사회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페미니즘은 쉴 새 없이 진보와 퇴보를 반복하는 골치 아픈 가치다. 유엔 미래보고서에서는 남녀 임금이 같아지는 시점을 투명망토가 상용화되는 시기와 비슷하게 보고 있고, 미래학자들은 전 세계적으로 양성평등이 이루어지는 시기를 200년 후쯤으로 예상한다. 어차피 단기간에 합의가 이루어지고 끝을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때문에 이런 복잡한 충돌들을 불필요한 사회적 낭비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일단 양성평등이 지향점이라는 것에 언어적 합의를 이룬 것만으로도 몇 수 앞의 평화로운 합의가 기대된다면 지나치게 낙관적인 것일까? 



‘유아인의 용기 있는 페미니스트 선언’으로만 남은 사건

이민경 작가 webmaster@sisain.co.kr 2017년 12월 15일 금요일 제534호

경찰이 가정폭력 피해 쉼터를 찾은 가해자를 두둔했다. 직장 내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가 결국 퇴사했다. 한양대에서 총여학생회 선거를 앞두고 폐지 요구를 받는다. 어제까지 어떤 싸움도 명쾌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지만 오늘 싸움이 또 시작된다. 주된 싸움터는 유일하게 목소리 낼 수 있는 피난처이자 목소리를 효과적으로 증폭시킬 수 있는 온라인이다. 응답 없는 현실에 차오르는 절망, 새롭게 등장한 가해자에게 치미는 증오, 기약 없는 기다림이 모여 있는 곳. 가상세계로 불리는 이곳에서 실재하지 않는 싸움은 단 하나도 없다. 전부 현실에 발 딛고 있다. ‘모든 차별에 반대합니다’ 같은 말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는 현실 말이다.

ⓒ정켈 그림

그 와중에 배우 유아인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부르며 평화를 찾자고 제안했다. 멋진 일일 수 있었다. 한 누리꾼에게 애호박으로 맞아보겠느냐는 말을 던지고, 스스로의 젠더 권력을 성찰하라는 다른 누리꾼들의 요구에 ‘증오를 페미니즘으로 포장하는 메갈 짓을 멈추라’고 말한 직후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메갈 짓’으로 싸잡힌 투쟁을 하던 이들 중 증오 대신 다른 것(주로 사랑)을 택하자는 말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이 말을 자신의 목소리로 내어보지 않은 이는 과연 있을까. 나만 해도 확신에 차서 내뱉던 내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왜 굳이 화를 내야 해?’ 저 멀리서 방관하던 위치에 있던 부끄러운 시절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그는 어떨까. 그 좋은 평화를 얻어내려 죽도록 싸우는 사람들에게 무례를 범한 지금을 언젠가 부끄럽게 여길까, 아니면 언제까지고 같은 자리에 머무를까. 그의 변화 가능성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남성이 다른 페미니스트를 준엄하게 꾸짖음으로써 진정성을 가로채는, 여성의 투쟁이 긴 역사에 걸쳐 겪어온 이 지겨운 사건이 또 한 번 반복되는 일을 막고 싶다. 아무 여성에게나 반말로 대꾸하다 남성 평론가에게는 공손한 존대로 대답하던 그가 페미니스트라는 선언으로 손쉽게 얻은 인정은, 수모와 오명을 무릅쓰고 지지부진한 투쟁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의 몫이었다. 페미니스트들은 애호박으로 맞아보겠냐는 말이 더 이상 농담이 될 수 없음을 지적했다는 이유로 가짜라고 폄하당했다. 반면 유아인은 수많은 남성들의 환호를 등에 업으며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세계 여성폭력 추방의 날 바로 다음 날에 그가 일으킨 사건이 이제 어떤 연쇄반응을 부를지 불을 보듯 뻔하다. 당장 학교에서 성차별에 목소리를 높이는 여학생들이 감수하던 위협과 모멸감의 정도가 한층 커질 것이다. 페미니즘적 발화를 낙인찍고 싶어 하던 이들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써 평화는 한층 요원해졌다. 수습은 늘 그렇듯 싸우던 이들의 몫이다. 마음 깊이 염원하는 숭고한 결말이 눈앞에서 또 한 뼘 멀어진다.


‘유아인의 용기 있는 페미니스트 선언’으로만 남은 사건


이 사태는 결코 새로워서가 아니라 식상할 만큼 익숙해서 괴롭다. 막막한 현실에 맞서 변화를 만든 여성들은 동시대 남성들에게 단 한 번도 존중받지 못했다. 언론을 통해 ‘유아인의 용기 있는 페미니스트 선언’으로만 알려졌을 이 사건은 그 오랜 역사를 또 반복했다. 페미니스트가 오욕의 역사 속에서 싸우는 상대는 불의 대신 불의로 인한 분노를 불편해하는 자다. 그 상대에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칭한 이들도 늘 포함되어 있다. 누군가가 자신을 무엇이라 부르든, 이 역사를 무시한 채 훈수 두는 위치부터 차지하며 등장한다면 그는 십중팔구 보기 드문 깨인 남성이 아닌 발에 차이게 흔한 남자일 것이다. 상차림에 드는 공은 우습게 보면서 대뜸 상석을 차지하고 앉아 수저부터 들기 바쁜 그들의 일장연설은 이제 그만 듣고 싶다.



유아인 댓글 논란, SNS 과몰입하는 우리 사회 자화상

안드로메다로 간 ‘애호박 게이트’

하재근 문화 평론가 ㅣ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12.16(토) 20:00:00 | 1469호


유아인 SNS 논란이 한동안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시작은 지난 11월18일 한 누리꾼이 SNS에 올린 글이었다. ‘유아인은 한 20미터 정도 떨어져서 보기엔 좋은 사람일 것 같지만 친구로 지내라면 조금 힘들 것 같음’이라면서 ‘냉장고 열다가도 채소칸에 애호박 하나 덜렁 들어 있으면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나한테 혼자라는 건 뭘까? 하고 코 찡끗할 것 같음’이라고 쓴 것이다.

  

유아인 댓글, 여혐·남혐 논란으로 발화

 

여기에 유아인이 직접 ‘애호박으로 맞아봤음?(코찡끗)’이라는 답글을 썼다. 대중이 연예인에 대해 다양한 감상을 말할 수도 있는데 굳이 대응한 유아인도 과도했지만, 누리꾼들의 대응은 더 이상했다. ‘애호박으로 맞아봤음?(코찡끗)’이라는 말은 가벼운 농담 정도로 보이는데도, 누리꾼들은 ‘맞아봤음?’이라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폭력을 암시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에 논란이 번지면서 이른바 ‘애호박 게이트’의 ‘헬게이트’가 열렸다.

 

© © 사진=연합뉴스·유아인 SNS 캡처

© © 사진=연합뉴스·유아인 SNS 캡처


그런데 사태의 방향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쪽으로 흘렀다. 여성혐오·남성혐오, 즉 여혐·남혐 논란으로 번진 것이다. ‘(누리꾼이) 그냥 한 말인데 애호박으로 때린다니 한남(한남충의 준말, 김치녀의 반대말) 돋는다’는 지적에 유아인은 ‘그냥 한 말에 그냥 한 말씀 놀아드렸는데 아니 글쎄 한남이라녀(코 찡긋) 잔다르크 돋으시네요’라고 응수했다. 이 밖에도 ‘너 한국남자 맞으세요 ... 여자가 (이런 글을) 올렸으면 팬들이 깔깔 웃으면서 농담이라 그랬을까?’ ‘요즘 장난이라도 남자가 때린다는 표현 쓰는 게 인식이 좋지 않네요’ 등등의 반응이 나오면서 유아인이 여성에 대한 폭력을 암시한 것처럼 몰아갔고 그것이 최근 예민한 이슈였던 여혐·남혐 주제를 발화시켰다. ‘애호박’이란 키워드가 성폭력을 암시한다고 느낀 사람들도 있었다.

 

이 논란에 유아인이 다시 기름을 끼얹는다. 11월25일 새벽에 불특정 다수 누리꾼들과 실시간 댓글 전투를 벌인 것이다. ‘쓸데없는 말해서 신세 조진다’는 글에 ‘내 신세, 아님 네 신세? 뭐가 더 나은 신세일까’라고 응수하고, ‘가만히 있으면 반은 간다는데’라는 말에는 ‘너는 왜 가만히 안 있니? 반이라도 가지’라고 했다. ‘살아라. 제발 살아라. 내 인생 말고. 너희 인생을!’ 등의 말로 누리꾼을 자극하며 자신이 벌인 전투에 대해 ‘일당백 아니고 백 명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면서도 살아남는 나의 정신력’이라고 자평하기도 했다. 이에 누리꾼들은 ‘누가 이기는지 한번 두고 보자’는 식으로 더욱 전투력을 올렸다.

 

 페미니즘 논란, 인권침해 논란으로 번져

 

유아인은 자신이 여성혐오자로 몰린 것에 대해 ‘애호박 드립에 애호박 드립으로 성별 모를 영어 아이디님께 농담 한 마디 건넸다가 마이너리티리포터에게 걸려 여혐한남(여성을 혐오하는 한국남자), 잠재적 범죄자가 됐다’고 했다. 마이너리티리포터란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나온 말로, 이 영화는 범죄를 저지르지도 않은 사람의 마음속을 미리 간파해 검거한다는 내용이었다. 즉,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농담 한 마디 했을 뿐이고 애호박은 그 사람이 먼저 언급한 것을 장난으로 받아친 것에 불과한데,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속을 마음대로 해석하면서 여성혐오자로 낙인찍었다는 한탄이다.

 

유아인이 이렇게 언급하자 ‘애호박 게이트’는 ‘공식적’으로 페미니즘 논란으로 인정받게 된다. 이제 사람들은 유아인 SNS 논란에 끼어들어 당연하다는 듯이 페미니즘을 논했다. 이 전쟁에 한서희가 참전한다. 한서희는 빅뱅의 탑과 함께 대마초를 피웠다고 해서 ‘유명해진’ 인물이다. 물의를 빚었어도 어쨌든 유명해지면 그게 일종의 스타덤처럼 작용하면서 유명인 행세를 하는 할리우드를 방불케 한다. 그 한서희가 유아인에게 일침을 가하면서 사태는 더욱 뜨거워진다.

 

유아인이 ‘여성이니까 여성 인권에만 힘쓴다는 말은 남성들에게 남성이니까 남성 인권에만 힘쓰라는 말과 같다’라고 했는데, 한서희가 ‘여성이니까 여성 인권에만 힘쓰죠’라며 ‘김치녀 된장녀 김여사 등등 한국 남자들이 만든 여혐 단어들이 넘쳐나는데 고작 한남이라고 했다고 증오? 혐오? 페미 코스프레하고 페미 이용한 건 내가 아니다’라며 페미니즘 맞불을 놓은 것이다. 그러자 유아인은 ‘나는 페미니스트’라는 긴 글을 발표했고 전투는 더 치열해졌다.

 

이 싸움에 영화 평론가까지 끼어들었다. 박우성 영화 평론가가 ‘유아인은 여성을 혐오하는 다수자의 오래된 역사와 대결하지 않는다. 대신, 그 불편부당한 역사에 저항하는 소수자의 힘겨운 역사에 시비를 건다. 이제부터 그는 피해자를 이중 삼중으로 짓밟으며 생존을 이어가는 가해자의 상징적 얼굴이 될 것이다’라며 ‘유아인이 ‘사랑’하자며 권하는 곳은, 짓밟힌 사회적 소수자를 자양분 삼는, 특히 여성을 때리고 강간하고 살인하는, 유아인류(類)의 한국남자는 모르는/몰라도 되는/모른 척하는 ‘폭력’의 세계다. 또 ‘메갈리아’(남성혐오 사이트)가 ‘메갈짓’을 할 수밖에 없는 계기를 숙고했다면 감히 ‘메갈짓’이라는 표현을 쓸 수 없다. ‘메갈짓’의 계기에 ‘메갈짓’이라 비아냥거리는 한국남자들의 여성혐오가 있다’라고 한 것이다.

 

어떤 논의가 너무나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는 걸 누리꾼은 ‘안드로메다로 간다’고 한다. 이쯤 되면 ‘애호박 게이트’는 확실히 안드로메다로 간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정신과 의사가 전쟁의 대미를 장식한다.

 

김현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유아인의 SNS 글을 보고 위험한 상태라고 지적한 것이다. 경조증 유발 가능성이 있다며 ‘후폭풍과 유사한 우울증’으로 빠지면 ‘억수로 위험’하다고 했다. 이에 대한정신건강의학과 봉직의협회가 반발하고 나섰다. 심도 깊은 상담도 없이 SNS 글만으로 의사가 진단을 내리는 것도 부적절하고, 게다가 그 내용을 만인에게 공표한 것은 의료윤리 위반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애호박 게이트’는 의사 직업윤리와 인권침해 논란으로까지 비화했다.

 

이 황당한 사태는 포털 실시간 검색어 차트를 점령하고 수많은 매체에 의해 보도되며 무려 반 달 정도를 끌다가, 유아인이 SNS 대응 중단을 선언하며 12월초에 종결됐다. 하지만 누리꾼이 유아인의 SNS를 주시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 다시 재개될 수 있는 일종의 휴전 상태 같은 느낌이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SNS에 과몰입하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애초에 유아인이 ‘애호박’ 글에 대응할 일이 아니었지만, 설사 대응했다 해도 왜 사람들이 거기에 이렇게까지 뜨거운 반응을 보였는지는 합리적으로 설명이 안 된다. SNS 글 하나하나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사생결단의 자세로 달려드는 사람들이 과도하게 많아졌다. SNS를 통해 사회생활을 해 온 10대들이 사회인이 되면 이런 현상이 더 심화될 수 있다.

  

‘SNS 관종’들 끼어들어 논란 더욱 격화

 

SNS가 워낙 크게 주목받으니 일이 터지면 ‘SNS 관종’, 즉 SNS를 통해 관심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끼어든다. 시위대를 폄하하는 ‘전문 시위꾼’이란 부정적 표현이 있는데, ‘SNS 관종’에게 그야말로 적합한 표현이다. SNS 논란이 터지면 일단 끼어들어 가장 과격하고 극단적인 의견 개진으로 주목받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이런 이들의 과격한 글에 사람들이 더욱 자극받아 논란이 증폭되고, 그러면 ‘SNS 논란꾼’이 더욱 분발하는 악순환이다.

 

이번 사태는 우리 사회에 여성혐오·남성혐오 문제가 얼마나 뜨거운 이슈인가를 절감하게 했다. ‘애호박으로 맞아봤음?’이라는 농담에서 여성혐오 논란을 터뜨린 사람들의 강박적 상상력도 놀랍지만, ‘얼마나 그 문제에 민감했으면 농담 한 마디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을까’라는 지적도 나오는 것이다. ‘한남, 메갈, 페미니즘’ 등의 키워드가 제시될 때마다 사람들의 관심이 활활 타올랐고, ‘인터넷 관종’의 전투력도 타올랐다.

 

사회 모순, 부조리, 갈등 요인이 있을 때 합리적으로 대처하며 관용적인 해결책을 이끌어내면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지만, 보복에 보복으로 맞서며 대치하면 사회 갈등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애호박 게이트’가 여혐·남혐 난전으로까지 번진 것은 이 문제가 사회갈등의 원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 문제를 방치해 상호 증오가 쌓이면 합리적 해결은 점점 더 멀어질 것이다. 어쩌다 여성차별 해소를 위한 노력이 여혐·남혐 증오의 덫에 걸렸는지 진지하게 성찰해야 할 시점이다.

 

설리·정준하 © 사진=연합뉴스

설리·정준하 © 사진=연합뉴스


이 사태는 또, 연예인의 태도도 돌아보게 한다. ‘애호박으로 맞아봤음?’이라는 농담을 다른 연예인이 했으면 일이 이렇게 안 커졌을 것이다. 유아인이어서 문제였다. 유아인은 그 전부터 SNS에 사람들이 선뜻 이해하기 힘든 글들을 올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 직설적으로 토로하는 것도 화제였다. 이런 것들이 인터넷 ‘떡밥’이 되어 논란꾼들을 유인했고, 이번 사태에 ‘만선’이 된 것이다. 자기 생각을 개진하는 것 자체는 문제 될 것이 없지만, 연예인이라면 대중의 눈높이에 맞는 상식적인 언어와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다. 거기에서 벗어나면 누리꾼의 표적이 되기가 쉬운데, 설리와 유아인이 대표적인 경우다.

 

또, 연예인이라면 대중의 지적을 겸허하게 수용하는 자세를 보일 필요가 있다. 누리꾼이 뭐라고 한 것에 일일이 날 선 대응을 했다간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게 된다. 최근에 정준하가 누리꾼과 댓글 신경전을 벌였다가 그의 명예만 실추되고 말았다. 유아인도 이번 논란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았으면 사태가 반 달 가까이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연예인의 날 선 대응 그 자체가 사태를 타오르게 하는 연료 구실을 한다. 정말 물러설 수 없는 대의명분이 있다면 또 모르되, 일반적인 지적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은 연예인에게 자살골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