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제정세 칼럼

적폐 청산 그 이상의 것을 보여줘야 - 문재인과 트럼프, 그리고 정치의 죽음

일취월장7 2017. 11. 14. 11:15

적폐 청산 그 이상의 것을 보여줘야

[민교협의 정치시평] 정치적 적폐청산과 교육계의 기득권 보장
2017.11.13 18:16:36 
  
문재인 정부가 국정원을 비롯한 권력기관을 대상으로 불법적인 권한남용에 대한 거의 전방위적인 조사에 들어가면서 묻혔던 비리와 불법행위가 하나하나 드러나고 있다. 과거 정권의 ‘적폐’는 청산되어야 마땅하고, 그로 인한 폐해를 회복하고 법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은 새 정권의 의무이기도 하다. 작년 가을 타올랐던 촛불민심이 말해주는 ‘국민의 명령’도 다름 아닌 적폐청산이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권력의 부당한 행사에 동조하거나 관여했던 측의 불만이나 저항이 표면화되기 마련이다. 이 청산작업을 정치적 복수로 몰아붙이는 최근 일부 정치권과 보수언론의 작태가 그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런 억설은 촛불 이후 국민의식의 변화흐름에 역행하는 것으로, 속속 드러나는 적폐의 내용들이 주는 충격과 더불어 역효과만 낼 뿐이다.  

이같은 노골적인 반발보다 더 차원이 높고 앞으로의 사태전개에 따라 파급력도 가질 수 있는 것이 현실론을 앞세운 일종의 '물타기' 시도다. 과거의 적폐에 대한 청산은 필요하나 적당한 선에서 정리하고 국민통합을 위해 갈등을 봉합하자는 것이다. 정치권 일부에서 현 정권이 과거에 사로잡혀서 미래로 나아가는 동력을 상실했다는 소리가 나오고 여소야대 국면의 박근혜 정권 말기처럼 '협치'가 우선임을 내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미래도 좋고 협치도 좋지만 그것이 적폐청산의 시대적 과제를 접을 이유는 되지 못한다. 적폐청산이야말로 진정한 협치를 위해서나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기반을 조성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문제는 더 근본적인 데 있다. 적폐청산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과도한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혁신하는 조치와 이를 통한 기득권구조의 일정한 재편이 있어야 한다. 과거 정권의 그릇된 관행을 정상화하는 데 멈추고 구조적 변화의 요구나 필요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퇴치해도 그 적폐는 조만간 되살아나기 마련이다. 과연 문재인 정부는 적폐 청산을 넘어서 기득권 구조의 변혁이라는 과제를 얼마나 제대로 해낼 것인가? 여기에 이 정권의 진정한 성패가 달려 있고, 그만큼 쉬운 일도 아니다. 오히려 ‘요란하게’ 겉으로 드러난 적폐를 정리하는 가운데 심층에서 작동하는 기득권구조는 ‘슬그머니’ 유지시키는 것으로 귀결될 우려도 없지 않은 것이다.   

교육부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그 한 예다. 김상곤 교육부는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조사나 비리재단 엄단 등 눈에 보이는 적폐를 바로잡고자 하는 작업은 진행하면서도 불평등을 떠받치고 있는 교육의 기득권구조와 신자유주의적 경쟁체제에 입각한 대학정책의 혁신에 대해서는 유보적이거나 소극적이다. 불평등구조의 보루 역할을 하는 대학서열 문제에 대한 접근에서부터 그렇다. 집권초기부터 전 정부의 문제 많은 수능개편 계획을 그대로 이어받아 시행하려다가 반발에 부딪쳐 유보한 바 있거니와, 교육의 가장 큰 현안인 대학구조조정 또한 전 정부의 기본방향을 그대로 추진한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전 정부가 수립한 대학구조조정 계획은 기본적으로 대학들 사이의 경쟁을 통해 하위 대학들을 도태시키는 방향을 취해왔다. 박근혜정부가 시행한 1주기 대학구조조정 평가는 전국 대학을 5등급으로 분류하여 하위 대학들에 조정을 집중시키고 재정지원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퇴출을 유도하였다. 이로 인해 각 대학들 그리고 대학내부까지 생존경쟁으로 내몰려 교육이나 연구의 본령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지난 촛불혁명의 한 도화선이 되었던 이화여대 사태도 경쟁을 통한 재정지원을 미끼로 구조조정을 강제해온 대학정책의 폐해에 기인한 것이다. 

대학현장의 혼란과 교육 질의 하락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이 신자유주의적 대학구조조정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서열화로 인한 일류대 중심주의 및 그 뒷받침을 이루는 사회 불평등구조와 기득권 체제를 오히려 심화될 것이라는 데 있다. 구조조정이 필연적이니 이 기회에 좋은 대학은 키우고 나쁜 대학은 도태시켜야 한다는 것이 이 조정방식의 기본에 깔려 있는 발상이며, 현 정부도 여기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 때문에 구조조정의 불이익은 하위대에 집중되고 정부재정지원은 상위대 특히 소위 일류대라고 지칭되는 대학들에 과도하게 편중되어 온 것이다. 현 정부의 내년도 예산편성도 동일한 패턴을 유지하고 있다. 중상위층 학생들이 주로 재학하는 상위대학에 더 많은 혜택을 부여하는 이런 정책이 지속되면 대학 간의 부익부빈인빈을 넘어서 서열화체제나 사회 전체의 불평등구조를 악화시키는 데 일조할 수밖에 없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이 정부도 지향하는 대학의 공영성을 높이려면 주로 하위층이 진학하는 지방 중하위층 대학이나 2년제 전문대학을 지원하여 공영화시킴으로써 저소득층에게 필요한 교육의 기회를 넓히는 방향의 재정지원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 두 번의 대선에서 문재인 진영이 현재의 사립대의 반을 공영형으로 전환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운 것도 이를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대학정책에서 이같은 구도는 껍데기만 남아 있고, 대학들의 경쟁유발과 상위대 몰아주기를 기조로 하는 지난 정부의 정책 기본방향이 그대로 채택되었다. 민교협을 비롯, 대학노조, 교수노조, 비정규교수노조 등 대학관련 단체들이 박근혜식 구조조정 정책강행에 반발하여 청와대 앞 철야농성을 지속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득권세력의 반발이 극심하고 국민통합을 헤친다는 담론이 기승을 부리더라도, 촛불운동으로 탄생한 정권이 적폐청산을 위해 매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현상적으로 드러난 적폐를 없애고자 하는 노력이 그 기반이라고 할 기득권 구조에 대한 근본적 혁신과 맺어지지 못하면 적폐청산의 의미는 크게 삭감되고 새 사회를 구축한다는 신정부의 이념도 훼손될 것이다. 대학이 기득권구조의 재생산도구가 된 현실에서 일부 비리사학 운영자를 징벌하고 총장선거의 개입하지 않는 것만으로 대학개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경쟁위주의 대학구조조정 정책이 전면적으로 수정되지 않으면 현재의 불평등구조는 더 깊어지고 대학 자체가 새로운 사회로 가는 길에 가장 큰 적폐로 굳어질 지도 모른다. 


문재인과 트럼프, 그리고 정치의 죽음

[다른백년 칼럼] 美 민주당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2017.11.14 14:28:30

지난주에 미국의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와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 간에 오간 말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두 나라에서 '정치'가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절감했다.

자신이 소유한 고급 골프코스와 사치스런 요리에 대해 말하는 트럼프의 말에선 한국과 미국의 수백만 저임금 노동자와 실업자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듯했다. 그의 말은 단지 '미국 퍼스트'를 넘어서 '트럼프 퍼스트'를 떠들어대는 것으로 들렸다.
그런 트럼프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은 전혀 이의를 달거나 꾸짖지 못했다. 그의 인종주의적인 발언이나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적 정책, 북한에 대한 무분별한 위협에 대해 제동을 거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한국의 언론들은 모든 미국인들, 그리고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트럼프의 우스꽝스럽고 위험한 정책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도했다. 

나는 트럼프와 문재인 두 사람의 발언들을 보면서 '정치'는 정확히 어떤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정치'를 복원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되돌아보았다.

정치란 무엇인가? 

우리는 정치 문화를 개혁하고, 정책과 함께 지역사회와 도시, 그리고 국가 전체의 장기적 발전을 활발히 논의해야 한다. 시민에게 도움이 되는 담화, 정책을 입안, 이행, 해석하는 이들이 바로 반영할 수 있는 담화를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지난 30년간 한국에서 발전한 사회구조를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미국에서 발전한 사회구조도 면밀히 살펴본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아마 정치 지도자들이 진보적 외양에 역행하는 모습을 보일 때가 더 많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이 과정은 수 년이 걸릴 수도 있다. 정치적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하는 지금의 노력이 끝나고 우리 사회를 이끌어갈 다음 세대를 교육지원하는 데에도 이와 비슷하게 충분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 평택 미군기지에서 ⓒ청와대


정치는 평범한 시민의 삶과 완전히 동떨어진 요식적 공간이 되어 버렸다. 의미가 없고, 접근이 가능하지도 않다. 정치인은 자기들끼리 만나 외부인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방식으로 자신의 필요와 관심에 대해서만 논한다. 시민 앞에서 연설을 하고 정기적으로 공식만남을 가지는 등 형식적 행동은 한다. 그러나 이는 자신에게 권한이 있으며, 권력자로서 지역사회를 향해 선의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질문을 받고 미리 준비한 답변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시민과 만나 이야기를 하는 건 지역사회 상황을 파악하고 의견을 들어 정책으로 만들고자 함이 아니다. 대중 홍보용 이미지를 다듬고 언론의 조명을 받기 위해서다.

이는 하나의 형식으로 굳어진 요식 행위일 뿐이며, '정치'의 원래 의미와도 맞지 않는다. 시민과 정치인의 우선순위에는 큰 간극이 존재하며, 이를 줄이기 위한 어떤 노력도 없다. 지역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정치인이 아니라 시민들이 더 잘 알지만, 지난 50년간 소비문화가 맹위를 떨치면서 시민들은 수동적 자세가 몸에 배었다. 정치인은 그저 고를 수 있는 상품이고, 기대했던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다음 선거 때 폐기하면 된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해결책을 제시하고 요구하는 능력이 자신에게 있음을 먼저 인지해야 한다. 정치인은 펩시콜라나 코카콜라처럼 광고를 통해 접하고 구매한 다음 소비해 버리는 상품이 아니라, 책임의식을 가진 시민과 끊임 없이 소통하고 압박을 받으면서 더 높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격려하고 이끌어야 할, 강점과 약점을 가진 사람이다.

'시민과의 만남'은 정치인의 권위를 돋보이게 하거나 언론에 좋은 모습으로 나오기 위한 기회가 아니다. 정책을 제안하고 논의하는 입안과정에서 뺄 수 없는 필수 과정이다. 치열한 논의와 정책 입안을 위한 의사결정은 특정 위원회 안에서 비밀스럽게 내려지거나 정치인, 기업인, 고위 관료가 특권계층을 위한 클럽에서 만나 술을 마시며 내려져서는 안 된다. 시민 또한 이 과정을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 인식하고 참여해야 하고, 도로 건설이나 교육예산 삭감 계획 등을 알고 있어야 한다. 

정치 참여야말로 시민의 책임이라는 의식과 열의가 있다면, 정치를 개혁할 수 있다. 아무리 재능 있는 정치인이라도 혼자 힘으로 혁신을 이뤄낼 수는 없다. (먹방 동영상이나 프로그램을 보는 대신) 국회에서 논의되는 이슈가 무엇인지 시민이 알고, 국회에서 계류 중인 법안과 예산이 무엇인지 신문기사를 만들 만큼 일상에서 잘 따라가고 있다면, 진정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이는 한국 문화, 특히 정치 문화가 변할 때에만 가능하다.

시민과 정치인의 관계는 환자와 의사 관계에 비유할 수 있다. 환자 대부분은 자신이 받는 치료에 대해 상세하게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이런 수동적 태도는 많은 경우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환자가 자신이 받는 치료의 원리와 기술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의사도 환자를 위해 치료 과정을 자세히 설명한다면, 치료 결과는 훨씬 좋아진다. 환자가 유의미한 반응을 보이고 과정에 참여했기 때문이며, 의사와 환자간 신뢰관계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의사 또한 환자가 해당 분야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의사의 전문성을 진심으로 존중하는 자세를 고맙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정치위기 극복 과정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오바마 미 대통령의 실수를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민주당이 의회에서 다수당 자리를 확보하고 변화를 위한 강한 열망이 있을 때 변화를 이끌라는 임무와 함께 대통령직에 취임했다. 그러나 그는 어려운 일이 아니라 쉬운 일에 집중했다. 정치적 이미지와 입지를 구축하는 데에는 놀라운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투자은행이 행정부 정책입안 과정에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걸 바꾸기 위한 노력은 별로 기울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부시 행정부 때 금융위기를 초래했던 금융전문가 일부를 그대로 데려와 경제팀을 구성하기도 했다. 

물론, 오바마는 자신이 영리한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굳이 갈등과 물의를 일으키지 않았고, 공화당에 손을 내밀어 무리 없이 정책을 처리하고 자신의 이미지를 개선했다. 그러나 중요 문제에 있어 명확한 태도를 취하지 않고, 인기가 떨어지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았다. 그 결과 월스트리트는 정치적 영향력을 더욱 키웠고, 오바마는 금융자본의 정부 장악을 숨기기 위해 시민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진보정치의 마스코트로 전락했다. 결과는 재난에 가까웠다. 민주당의 정치 임무가 흐려지면서 결국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단초를 제공했다. 미국 시민은 민주당이건 공화당이건 별 차이가 없다는 걸 점차 느꼈다. 민주당이 더 이상 평범한 서민을 대변하지 않는다는 걸 유권자가 깨달았기 때문에 미국 우선주의로 강렬한 감정을 일깨운 트럼프의 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다.

美 민주당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미국 민주당의 역사를 보면 현재 한국 정치에 관해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다. 1980년대 미국 민주당은 시민과 (힘 잃은) 노조, 청년들 사이에서 지지율이 점차 떨어지고 있었다. 민주당 지도부는 동시대 유권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인식하지 못했고, 시민의 불안과 우려를 알지 못했다. 공화당에서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러도 민주당은 표를 받지 못했다. 민주당이 더 이상 서민의 상황을 알지 못하고, 함께 한다는 느낌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때 빌 클린턴이 등장했다. '새로운 민주당'을 표방한 그는 새로운 전략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연설문에 민주적 개념과 원칙을 넣긴 했지만, 시민단체와 노조의 지지가 예전처럼 선거의 승패를 좌우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공화당이 그 동안 무시했던 산업에 손을 내밀어 그들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공화당이 석유기업이나 방산업체를 보호했다면, 민주당은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IT 기업을 위해 나선 것이다. 전략은 효과적이었고, 클린턴은 정치인으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이는 민주당이 평범한 시민을 대변하지 않고 공화당과 영역이 다른 재계를 대변한 변화의 시작점이었다. 민주당 의원들은 점차 투자은행으로 옮겨갔고, 기존 지지층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 

이제는 많은 시민이 정치에서 소외되어 있다. 이들은 어떤 후보에도 표를 줄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어떤 정당에도 당원으로 등록하지 않았다. 민주당 등의 정당은 시민이 원하는 바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고 선거철이 되면 표를 얻으려고 능력 있는 연설문 작가를 고용해 강렬한 감정을 일으키는 연설문에만 집중한다는 걸 경험상 알고 있다. 선거가 끝나면 정치인들은 기업 고객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자취를 감출 것이다. 정책입안 과정에서 민주주의는 없다. 서민을 위한 자리도 없다. 

그러나 정치가 항상 이랬던 건 아니다. 민주당이 처음부터 진보당이었던 것도 아니다. 민주당이 정치인을 돕는 조직 이상의 정당이 된 시기는 1920년대 말이다. 당시 민주당은 지역사회의 일부가 되어 국민이 어려울 때 의지할 수 있는 정치 조직으로 성장했다. 선거철에만 나서는 것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국민을 한 자리에 모으는 협력적 형태의 조직이었다. 완벽한 정당은 아니었지만, 사회에서 분명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시민에게 의미 있는 정당이 된 민주당은 보수 공화당이 소유한 부와 이것이 만들어낸 권력에 맞설 수 있었다. 서민의 상호 지원을 돕는 네트워크를 구축했고, 강력한 조직을 기반으로 권력을 가진 기업에 성공적으로 맞서며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정당은 이제 미국과 한국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주류 정당은 있지만, 우리 일상과 관계가 없고 국민 대부분이 깊이 신뢰하지도 않는다. 특정 이슈 때문에 정당을 지지하는 유권자가 있겠지만, 대부분은 참여가 제한될 것이다. 진보 정당조차도 돈 쪽으로 기우는 결과가 발생했다. 

정당의 기능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재고해야 할 때다. 정책입안 과정을 정당과 컨설턴트, 기타 이들과 관련된 기업이 장악하면, 헌법에 반하는 정치 환경이 만들어진다. 정책입안과 정책이행은 정부가 담당해야 한다. 충분한 자원을 갖추고 정책을 효과적으로 이행할 역량 있는 인재를 고용해야 한다. 정책입안은 정부와 국민이 해야 한다. 정당은 일반 시민이 참여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역할만 할 뿐이다. 정당이 거대 관료조직처럼 되어 정책을 입안한다면, 정책입안 시스템을 통해 책임을 지우기 힘든 상황이 될 것이다.

시대의 이슈 

해결할 이슈의 범위는 엄청나게 넓지만, 대부분 무시받고 있다. 문제 일부는 정책을 통해 해결 가능하지만, 다른 해결 방식을 필요로 하는 문제도 있다. 어떤 경우든, 시민의 앞에 놓인 복잡한 문제를 역시 복잡한 방식으로 해결 가능한 정치적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현재 우리에겐 금리 인상 혹은 인하, 정부조직 예산 증액 혹은 감액이라는 선택안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정부 조직은 그 특성상 지역사회와 유리되어 있어서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예산을 집행할 능력이 없는 경우가 많다. 잠재적 해결책과 논의 주제의 범위를 확장하는 것이 앞으로의 성공을 위해 필수다. 

예를 들어 보자. 계급 문제는 한국 사회의 중심 이슈지만, 정치인은 해결책을 강구하지 않는다. 소수 특권계층에 부가 집중되고, 이들은 엘리트 계층이 되어 법을 무시하고 가족을 위한 특권을 돈으로 산다. 한국민은 이런 사회문제에 관해 잘 알고 있지만, 계급 격차를 불러온 경제구조의 왜곡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부의 집중은 계급 격차를 가져왔고, 부유층이 자신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다른 사람을 어떻게 하대하며 '갑질'을 하는지 우리는 많은 사례를 보아왔다. 그렇게 하대를 받는 하위 계급이 증가하고 있다. 

부유층 자녀는 가족의 끈을 이용해 인턴이나 일자리를 쉽게 얻는다. 대학 입학 또한 학생 각자의 능력보다 자녀를 엘리트 학교로 보내는 부모의 재력이 좌우한다. 이 문제는 앞으로 더욱 심각해질 것이며, 결국 사회 구조를 파괴할 것이다. 

경제학적 문제 또한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GNP'나 '수출'만이 경제 성장을 측정하는 유일, 혹은 최선의 기준이 아니다. 요즘 이들 수치는 소수에게 집중된 부의 정도만을 보여주고 있다. 안타깝게도 서민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정치인들은 금융기관이 이끄는 경제를 지칭할 때 이들 수치를 인용한다. 
이들 정치인은 서민의 상황을 공감한다고 주장하지만, 막상 서민의 삶을 도울 정책은 만들지 못한다. 이들은 자금의 상당 부분이 결국 대기업으로 향하는데도 낙수효과를 통해 서민에게도 조금은 돌아간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의도가 아무리 좋다 해도 전제 자체가 잘못됐다. 제한된 선택안 사이에서 억지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정치는 아니다. 이 틀을 벗어나야 한다. 우리 경제에 필요한 사항을 결정하고 서민의 필요에 집중한 경제를 만드는 것이 정치가 되어야 한다. 로봇이나 공장, 기업 채권과 파생상품 등 각종 금융상품이 아니라 사람, 그것도 모든 사람을 향한 투자가 우리의 최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 

무역이 증대된다고 반드시 서민의 부가 증가하는 건 아니다. 은행은 단기 수익에 매몰되지 말고 장기 목표에 집중해야 한다. 은행이 주식채권과 연관된 어떤 투기행위도 못 하도록 금지하고, 국가 중요 프로젝트에 관해 뻔하지만 체계적이고 일관된 방식으로 자금을 제공하는 업무에 집중하도록 만드는 정책이 필요하다. 국가 프로젝트의 경우 규모가 크고 기간이 10~40년까지 늘어날 수 있으며, 재생 가능한 경제 참여에 기여해서 지역사회에 협동조합을 만들고 가차 없는 경쟁을 지양하면서 일자리를 주도적으로 창출하도록 도울 수 있다.

그런데 정치인은 국민을 위해 경제를 새롭게 조직하거나 제도적 변화를 통한 해결책을 제안하지 않고 있다. 탐욕을 부리는 '악당'을 공격하려는 경향은 있지만,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거나 피해자 다수의 힘을 모아 문제를 해결하도록 압박하기 위한 노력은 거의 없다. 대부분 정치인은 빈곤층이나 노동계층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려 하지 않는다. 중산층도 무시하기 일쑤다. 사회 최상위층에 속한 경제 엘리트나 기업의 편의를 먼저 봐주고 그 다음에야 서민으로 눈을 돌린다. 그러나 이 순서는 반대로 바뀌어야 한다.

게다가 기후변화의 위협도 있다. 이제 과학계는 기후변화가 인류 최대의 위협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 한다. 다수의 생물종이 멸종하고 어쩌면 인간도 멸종할지 모른다. 농업을 완전히 혁신하고 해수면 상승에 대응하고 사막화를 늦추기 위해서는 수조 달러의 돈을 투자해야 한다. 그런데도 현 정부는 기후변화를 우선 과제로 삼거나 심각한 위협으로 보지 않는다. 기후변화는 국내 정치의 거의 모든 측면에서 하나의 요소로 확실히 고려해야 하며, 상대적으로 위해 가능성이 낮은 북한을 넘어서는 요소로서 안보정책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결론 

뛰어난 교육을 받은 유능한 인재가 정부에 필요하다. 사회계급이나 기후변화 등의 난제를 피하지 않는 자신감과 용기를 갖추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 산업을 효과적으로 규제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기업은 이들 위협이 실재하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만들기 위해 엄청난 돈을 지출했다. 그 결과 북한 핵무기만이 최대 위협이며, 계급격차와 기후변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인식이 존재한다. 한국의 정치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교육과 정치 행동, 구체적 제안을 통해 이들 문제가 실재함을 인식해야 한다.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정부 혹은 각종 조직과 힘을 합치거나 이들의 목표를 알리거나 교육하는 과정에 폭넓게 참여하는 모습이 아직까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참여가 가능하며, 그것이 도덕적 의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시험 점수가 목적이 아니라 시민 역량을 부여하기 위한 교육, 다른 사람의 이익을 갈취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보다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함께 일하는 교육을 맛보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국민을 위해 일하고, 국민과 함께 일하는 걸 당연시 여기는 정부를 보여줘야 한다. 이런 노력은 하루아침에 결실을 이룰 수 없지만, 조금씩 시험적 노력을 하다 보면 다른 이에게 영감을 주어 진전이 일어날 것이다.

정당은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지만, 한국 사회가 진화함에 따라 정당의 역할도 변화한다는 걸 제대로 이해하고 나서야 한다. 서민의 필요에 집중하는, 보다 투명하고 책임 있는 정치 문화 및 경제가 최종 목표다. 가는 길에는 고통스럽고 많은 좌절과 희생이 따르겠지만, 목적을 이루고자 노력한다면 일상의 행동은 새로운 의미를 가질 것이고, 우리가 변화를 일으키고 있음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한국 이름 이만열. 경희대 국제대학 교수 겸 아시아 인스티튜트 소장. 하버드대 언어문화학 박사. 중국과 일본을 연구하다 한국의 중요성을 깨닫고, 한국에 천착.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잘 아는 외국인. '한국인만 모르는 다른 대한민국'(2013),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2016)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