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문화, 예술

'마지노선 민주주의'를 넘어서야

일취월장7 2017. 11. 7. 11:37

'마지노선 민주주의'를 넘어서야

[민미연 포럼] 우리는 '더불어 함께' 살고 있을까?
2017.11.07 11:11:29

몇 년 전 수도권의 한 빌라촌에 살았다. 폐지 노인의 수와 행색이 경험한 곳 중 심한 편에 드는 동네였다. 그날도 평소처럼 폐지 리어카가 인도 옆에 붙어 힘겹게 도로를 지나갔는데, 평소와 조금 달랐던 건 한 초등 3, 4학년쯤 돼 보이는 꼬마 아이였다. 아빠 손을 잡고 가던 그 아이는 고개를 돌려 한참이나 폐지 리어카의 뒤뚱거림을 응시했다. 아이는 무슨 생각이 들어 그랬을까? 아빠가 말했다. "너,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

얼마 전 실시된 설문 하나가 눈에 띄었다. '우리나라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살아간다는 느낌을 가진다.' 이 질문에 몇 %나 그렇다고 답했을까? 10명 중 3명, 31%다. 이 답변 숫자는 보기에 따라 너무 적고 또는 너무 많다.  

위 조사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세대별로 다른 인식이다. 20대는 18%, 30대는 24%, 40대는 38%, 50대는 46%가 '더불어 함께 살아간다는 느낌을 가진다'고 응답했다. 40·50대라고 비율이 높은 건 아니지만, 20·30대와 적잖은 차이가 난다. 노후의 생활 격차가 극심한 60·70대가 조사대상에서 빠졌는데, 그들은 어찌 생각할지 궁금하다. 짐작으로는 극심한 빈부 차에도 불구하고 제일 높은 응답률이 나왔을 것 같다. 


한국은 예나 지금이나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게 무엇인지 경험해본 적이 없거니와, 이에 대해 문제의식은 느껴도 극복을 위한 의지도 실천도 미약하다. 한때는 그렇게 살아도 '표면적으로는' 큰 문제가 드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나름대로는 한국 자본주의의 황금기라 불리는 호시절을 구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으로 구성된 사회가 연대하며 같이 사는 방법을 활용치 못하는데, 탈이 안 나고는 못 배긴다. 무릇 문제는 점증하는 것이니, 각개약진형 사회의 피해는 어린 세대일수록 더 크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흉흉한 세태에 대한 현실 인식이 젊은 세대에서 더 심화된 것은 지나친 각자도생의 폐해가 악화일로에 있다는 방증일 터다. 또한 '무슨 사회를 이따위로 망쳐놓았냐'는 청년들의 원망일 터다. 

▲ 지난겨울 촛불집회 당시 국정농단 주범인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 씨와 같은 20대들은 '유라는 특혜인생 우리는 최저인생'이라는 현수막을 들고 나왔다. ⓒ프레시안(최형락)


'더불어'란 당명을 쓰는 정당의 지지율이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인품이 높고 희생 정신이 강한 대통령이 어금니까지 절개해가며 분투하고 있지만, 한국의 '더불어 살아가기'는 여전히 난관에 봉착해 있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이를 '마지노선 민주주의'의 한계라고 이해한다. 아래 김 교수의 글을 인용한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나쁜 대통령을 유권자의 투표로 심판하기 위해서 촛불을 드는 '방어적 성격의 민주주의'라는 생각이다. 주로 대통령 심판의 권리를 양보할 수 없는 민주주의의 쟁취 및 수호의 경계로 삼고, 고용과 소득의 불안정과 약자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은 삶의 현장에서 각자 맞서 싸우거나 적응해야 할 사적인 문제라 여기는 민주주의다. 이런 민주주의에서 사적인 문제는 공적 공간인 촛불의 광장과 거리에서 다루어서는 안 되며, 다룰 수도 없다. 옳음과 그름을 판정하기엔, 또 촛불의 대의로 삼아 내기엔 너무나 내밀하고 복잡하기에 그러하다."(<경향신문> 8월 29일 자 '[시론] '마지노선 민주주의'를 넘어서기')

'마지노선 민주주의'도 중요하다. 이것이 무너지면 '차악'마저 사라지며 극심한 정치적 혼란 속에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불공정을 해결할 동력이 아예 소멸한다. 동시에 '마지노선 민주주의'를 극복해야, 탄핵을 이유로 촛불 시위에 나설 필요가 없는 강인한 민주주의를 확립할 수 있다. 고용과 소득의 불안정과 약자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은 삶의 현장에서 각자 맞서 싸우거나 적응해야 할 사적인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테이블에 전 국민적 의제로 반드시 올라와야 한다. 그렇지 못한 민주주의는 사상누각일 뿐 아니라 약자들에게는 위선의 민주주의다. 

잠깐 통계 이야기를 하자. 지니계수를 비롯한 OECD의 전통적 격차 지표는 모두 샘플조사에 근거한 균등화가처분소득을 토대로 한다. 가구의 가처분소득(쉽게 말해, 소득-세금+복지)을 가구 구성원을 고려해 재조정한 것이 균등화가처분소득이다. 각국의 연구자들은 이 격차 측정의 오류를 지적하며 국세청 자료를 보강해 전체 성인인구를 대상으로 상위 10%의 소득 점유율을 뽑아냈다. 

새로운 격차 지표에서는 전에 잘 보이지 않던 격차의 면모가 선명하게 드러났는데, 그중 하나가 소수 부유층이 많이 쓸어가는 사회는 그 아래 상위소득층도 많이 챙겨간다는 점이다. 반대로 보면, 소수 부유층을 제외한 고소득층이 적게 차지하는 사회는 소수 부유층 역시 적게 차지한다. 이는 소득을 가져가는 사회의 풍토가 나라마다 다르며, 유형무형의 사회적 규율에 따라 일부 상류층과 이하 상위층의 '소득 과점유'가 제어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국은 안타깝게도 각자도생에 잠식된 사회를 증명하듯, 수십만의 부유층은 물론 몇백만 명의 고소득층에도 너무 많이 편중돼 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다. 너나 할 것 없이 각자가 알아서 세상에 맞서 싸워왔다. 이 방식에선 필요 이상의 격렬한 경쟁을 피할 수 없고, 경쟁에 힘들었던 만큼 보상을 극대화하려는 심리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심대한 경쟁이 심대한 격차로 전이할 때 밀려나면 안 된다는 관념이 전 사회를 뒤덮고, 결국 '내 밥그릇 불리기' 세태가 필연적으로 가속화·고착화된다.

앞으로는 이전과 반대로 살아갈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법은 무엇인지 고민과 대화가 늘어나야 한다. 같이 살자는 희망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길 소망한다. 그처럼 사람이 사람다워질 때, 비로소 나라다운 나라가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이다.


촛불의 핵심, 한국 보수우파는 집권해선 안 된다

[장석준 칼럼] <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를 읽고
2017.11.07 09:23:51

다큐멘터리 <공범자들>을 보기로 했을 때 기분은 그렇게 비장하지도, 긴장되지도 않았다. 이미 다 아는 이야기들을 하나로 이어 되돌아보는 기회려니 했다. 그런데 막상 보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하고 등골이 서늘했다. '아는' 이야기들이되 '제대로' 알지는 못했음을 실감했다. 우리가 살아온 지난 9년은 그때 느끼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처참했다. 촛불의 승리가 아니었다면, 지금 우리는 대체 어떤 지옥도 속에 살고 있었을까.

또한 <공범자들>을 본 누구나 그랬겠지만, 나는 마지막 몇 분 동안 예기치 않은 감정의 격랑에 휩쓸려야 했다. 언론노조 MBC 본부 간부로 170일 파업을 이끌다 해고된 이용마 기자의 근황 때문이었다. 시대의 고뇌가 육신에 똬리를 튼 것인가. 그는 지금 복막 중피종이라는 희귀 암과 싸우고 있다. 몇 년 전 단단했던 한 사내와 수척해진 요즘 모습이 교차하는 <공범자들>의 마무리 몇 장면은 예리한 바늘처럼 보는 이의 가슴을 찔렀다.

그 아픔이 좀처럼 씻기지 않아서였을까. 이용마 기자가 쓴 책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나오는 대로 꼭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며칠 전 그 책이 드디어 나왔다. <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 – 지금까지 MBC 뉴스 이용마입니다>(창비, 2017).  

사실 처음에는 책장을 펼치기가 좀 두렵기도 했다. <공범자들>을 보며 느낀 회오리치는 감정이 반복되겠거니 하는 짐작 때문이었다. 더구나 이 책은 이용마 기자가 이제 갓 초등학교 저학년인 두 아들이 성년이 됐을 때 읽으라고 남기는 편지다. 인간인 바에야 어찌 이런 글을 무심히 훑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막상 읽어보니 어조가 너무도 담담했다. 이 책에서 이용마 기자는 지난 삶을 시대 흐름과 교차하며 돌아보고 자신이 직접 체험한 바에 따라 한국 사회를 분석, 비판하며 대안까지 치밀하게 모색하고 있었다. 마치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격정조차 "세상은 바꿀 수 있다"는 이성의 목소리로 반전돼야 함을 저자 스스로 솔선하는 것만 같았다.

덕분에 나는 <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를 읽으며 지난 몇 년간 나를 비롯해 동료 한국인들이 살아낸 삶을 차분하게 되짚을 수 있었다. 촛불 1주년에 더없이 어울리는 성찰의 기회였다.

촛불의 간단명료한 핵심 – 한국 보수우파는 집권해선 안 된다

<공범자들>을 보면서도 그랬지만 <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를 읽고서도 첫 번째 든 생각은 지난 9년이 정말 말도 못할 역사의 퇴행이었다는 것이다. 요즘 거의 하루에 한 건씩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벌인 황당한 일들이 뒤늦게 밝혀지며 우리를 허탈하게 하고 있다. 저들은 참으로 치열하게 부정을 저질렀고 부패를 일삼았으며 불의를 꽃피웠다. 이용마 기자는 이렇게 회고한다.  

"한 마디로 이명박 정부 5년은 1987년 이후 확대되던 우리 사회 민주주의의 시곗바늘을 거꾸로 되돌린 시기였다. 전두환 같은 자들이 다시 고개를 쳐들고, 뉴라이트가 정부의 지원을 받아 목소리를 높였다. 비상식이 상식을 몰아내고 비정상이 정상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시작된 퇴행은 박근혜 정부에서는 더욱 노골적으로 진행되었다.

박근혜 정부는 일베 집단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우리 사회에 1퍼센트 정도밖에 안 되는 극우 집단이 나머지 99퍼센트를 향해 비정상이라고 말하며 지배한 시기였다. (…)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서 드러난 것처럼 정권과 재벌 간의 정경유착 역시 유신정권 수준으로 돌아갔다. 그야말로 1970~80년대를 풍미했던 기득권 세력들이 일시에 귀환한 것이다." (<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 317~318쪽)  

지나고 보니 우리는 너무도 안일했었다. 한나라당-새누리당이 집권하더라도 민주화의 성과들이 크게 훼손되지는 않겠거니 마음을 놓고 있었다. 보수우파라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민주화 이후'의 보수우파일 터라고 너무 높이 봐줬다. 이명박의 '실용주의'를, 박근혜의 '복지', '경제민주화' 위장을 바보처럼 쉽게 믿어줬다. 그들에게 표를 준 이들만 그랬던 게 아니다. 적대 정파에 속한 이들도 그랬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뼈아픈 오류였다. 1987년 이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유신과 5공 시절 그대로였다. 바뀐 것은 오직 하나, 선거 결과를 존중한다는 점 정도였다. 선거 결과가 저들의 권력이 연장되는 방향으로 나오도록 나머지 모든 영역에서는 온갖 불법과 모략, 내란에 준하는 난동을 벌일 준비가 돼 있었다. 이런 짓을 벌이는 데 가장 좋은 수단이 국가정보원과 검찰이었고, 가장 노력을 기울여 정비한 곳이 언론, 그 중에서도 방송이었다.

방송 현장에서는 언론 노동자들이 이런 음모에 맞서며 오랫동안 싸움을 이어왔다. 시민들도 모르지 않았다. 공중파에서 200여 일 가까운 파업이 계속됐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위기 의식이 실제 위기의 정도만큼 심각하지 못했다. 민주주의의 여러 진지들 중 '단지 한 곳'에서 벌어지는 대치라고만 여겼다. 그곳이야말로 나머지 전선 전체의 판세를 결정할 한 곳일 수 있음을 제대로 꿰뚫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적어도 저들만큼은 냉철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고립을 탓하지 않고 투쟁을 이어간 이들이 있었다. <공범자들>에서 오랜만에 다시 본 얼굴들이 바로 그런 이들이었다. 이들이 땅 밑에서 열어간 물길들이 다시 모여 결국은 촛불 항쟁으로 터져 나왔다. 그러고 보면 역사는 단순 인과 법칙으로만 움직이지 않는, 뭔가 '신학'을 요구하는 연구 대상임에 분명하다. 역사를 조종하려고 시도하는 자들의 손아귀에서 결국은 빠져 나와 오히려 이들을 심판하는 묘한 힘이 작동한다. 민주화 이후 적의 실상에 대해 치명적인 오판을 한 우리에게는 참으로 다행이게도 말이다.

촛불 1주년을 맞이해 요즘 그 의미를 다시 묻는 시도들이 많다. 심오한 여러 해석들이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심오하게만 볼 일은 아니다. 촛불 항쟁의 간단명료한 핵심은 다수 대중이 한국의 보수우파를 파문했다는 것이다. 보수우파가 더 이상, 그리고 앞으로도 이 나라의 집권 세력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6월 항쟁 이후 30년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보수우파는 민주주의에 맞게 변화하지 못했다는 게 확인됐기 때문이다. 변화할 수 없으며 그럴 의사도 없음이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 이용마 MBC 해직 기자. ⓒ프레시안(최형락)


그런데 왜 보수우파가 집권했는가 – 사회 개혁의 지연  

보수우파가 집권하지 않으려면, 다른 세력이 집권하면 된다. 표면적 해법은 그렇다. 조기 대선으로 실제 이 해법이 실현됐다. 그러면 이제 촛불 항쟁의 뜻이 다 이뤄진 셈인가?

그렇지 않다. 보수우파가 권력을 쥐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판결은 간단명료하지만, 이 판결의 집행 방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물론 정권 교체가 필수 요구 사항 중 하나였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이런 물음이 남기 때문이다. "민주화 와중에 있던 사회에서 왜 보수우파가 선거로 권좌에 복귀하게 됐는가?" 우리가 한나라당-새누리당을 오판했던 것만 문제가 아니다. 2008년 이후 하필 그들이 '대안'으로 선택된 배경과 이유 또한 따져봐야 한다. 이용마 기자가 <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의 서두에서 던지는 물음이 바로 이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두 차례에 걸쳐 민주정부가 수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역사의 후퇴를 막지 못했는가. 과거 민중을 억압하고 기득권을 챙긴 권위주의 세력들은 어떻게 부활할 수 있었는가. 국민들은 왜 그들에게 다시 권력을 맡겨야 했는가." (위의 책, 5~6쪽)

< 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는 이 물음을 놓고 이용마 기자가 체험과 사색을 버무려 내놓은 답변이다. 이 책이 촛불 시민들의 필독서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자야말로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반민주 폭거에 할 말이 많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굳이 이를 장황하게 되짚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폭거가 시작될 수 있게 길을 열어준 리버럴 정부의 실패, 더 나아가 민주화 세대의 오류와 한계를 살피는 데 집중한다. 그래야만 보수우파가 '대안'으로 부각되는 부조리한 상황을 다시 맞이하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됐던 것인가? 저자는 제8장 "우리 사회의 적폐와 노무현 정부"에서 명쾌하게 답한다. 민주화의 다음 단계 과제인 경제, 사회 개혁이 지연된 게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었다. 재벌과 경제 관료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노동권과 복지를 강화했어야 했다. 하지만 '민주'를 표방한 집권 세력은 이를 분명히 인식하지 못했고, 따라서 제대로 된 실행 계획도 없었다.  

"386 정치인들은 콘텐츠가 전혀 없었다. (…) 국회에서 이들을 만날 때마다 '문제는 경제'라고 목이 쉬도록 얘기했지만 쇠귀에 경 읽기나 다름이 없었다. 애초에 이들의 머릿속에 경제 문제를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던 것이다." (위의 책, 290~291쪽)

"노무현 정부는 (…) 경제 문제에 관한 한 박정희 체제 이래 지속되어온 재벌 위주 경제성장 패러다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 결과 노무현을 지지했던 새로운 세대, 새로운 진보 성향 지지층의 기대를 충분히 수렴하지 못했다.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가 말하는 '갈등의 치환'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사회적 양극화는 심화되었고 민심 이반이 일상화되면서 야당으로 정권이 넘어갔다." (위의 책, 303~305쪽)  

이용마 기자가 지적한 대로, 사회 개혁의 성과가 보이지 않자 상당수 대중은 부동산 시장 부양으로나마 떡고물을 안겨주겠다는 보수우파의 대안을 받아들였다. 결국 2007년 대선에서 한나라당 '필승' 구도가 만들어졌다. 이 구도에서 승자가 된 한나라당-새누리당이 이후 5000만 명으로부터 9년의 시간을 강탈해갔지만, 애초에 이런 구도를 열어준 1등 공신은 사회 개혁에 실패한 전임 정부들이었다.  

개혁 비전과 청사진이 없었던 리버럴 세력은 점차 기존 관료 기구에 크게 의존했다. 경제 부처 고위 관료들에게 나라 살림살이를 맡겨 버렸고, 군부 독재가 종식된 후 안하무인의 권력 집단이 된 검찰 조직과 타협했으며, 대미 굴종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는 외교부의 무능에 휩쓸렸다. 정작 권력의 주인은 민주당-열린우리당이 아니라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이들 관료 기구였다. 한나라당-새누리당은 집권 후 이들의 등에 올라타기만 하면 됐다.

이용마 기자가 <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에서 가장 치열하게 파헤치며 고민하는 것은 기자로서 직접 마주했던 이들 관료 기구의 실상이다. 촛불이 보수우파를 권좌에서 끌어내렸지만 불길이 비선출직 엘리트 권력에까지 닿지 못한다면 역사의 퇴보는 충분히 재연될 수 있다. 10년 전과는 달리 집권당이 일정한 경제, 사회 개혁 프로그램을 갖추었더라도 관료 권력과 대결해 이들을 제압하지 못한다면 실패는 반복될 수 있다. 이용마 기자는 바로 이 점을 우려하면서 동료 촛불 시민들의 각성을 요청한다.  

실은 정치인들만 고민할 문제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엘리트 권력이 깊이 뿌리 내린 곳은 국가 관료 기구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업이나 학교 같은 민간 조직도 마찬가지다. 이용마 기자는 특히 자신이 속한 언론계의 속사정을 철저히 파헤친다. 언론계야말로 다른 어느 조직보다 비전과 창의성이 중시돼야 할 텐데도 한국 언론계를 지배하는 것은 여느 관료 조직과 다름없는 연공서열과 연줄(학연, 지연 등)이다. 일상 곳곳에 엘리트 권력이 형성되기에 적합한 조건이며, 그런 일상의 권력들이 국가 권력과 유착해 마침내 민주주의를 전복시키기에 딱 좋은 토양이다.  

그래서 <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는 집권당의 변화에만 주목하는 '마지노선 민주주의'를 넘어 훨씬 광범한 생활 속 변혁을 촉구한다. 촛불 항쟁이 진정 '혁명'이려면 무수한 '조직 혁명'들로까지 확산돼야 한다고 역설한다.  

"나는 진정한 개혁을 위해 한 계단씩 올라가는 현행 인사 시스템을 그대로 두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 의문이 들 때가 많다. 이미 연공서열과 기존 시스템에 의해 구축된 조직이 있는데 상층부 몇 명 바꾼다고 달라질까. 정부 부처를 비롯해서 각 부문의 파격적인 혁신이 없다면 개혁은 쉽지 않을 것이다." (위의 책, 133쪽) 

"기존의 엘리트 충원 시스템 또한 바꾸어야 한다. 고시라는 일률적인 형식을 통해 연공서열 방식으로 승진하는 현행 구조가 유지되는 한, 아무리 개혁적인 인사도 결국 조직 논리의 포로가 된다. 기존의 조직 논리를 깰 수 있도록 파격적인 인사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외부 수혈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문호를 확장해야 한다." (위의 책, 360쪽)

촛불 이후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 감각  

▲ <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 ⓒ창비

<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는 오늘날 전 세계가 "고전적 자유주의에서 제한된 자유주의, 신자유주의를 거쳐 또다시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그 대체적인 방향은 "우리 사회에서 최근 강조되고 있는 복지와 경제민주화와 유사한 흐름"(180쪽)일 것이라고 한다. 같은 생각이다. 시대 인식이 이러하다면, 오랜 지체 끝에 서둘러야 할 사회 개혁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더 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2000년대와는 달리, 촛불 이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결코 실패해선 안 된다. 어중간하게 타협해서도 안 된다. 빠른 시간 안에, 늦어도 앞으로 몇 달 안에 기존 엘리트 권력이 곳곳에서 무너지고 복지가 늘어나는 일이 실제 벌어져야 한다. 부패하고 무능하며 무도한 대통령을 쫓아낼 수 있음을 확인한 것처럼, 이런 일들도 한국 사회에서 충분히 실현될 수 있음을 우리 모두 체험해야만 한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우리의 시간 감각을 예민하게 다시 가다듬어야만 하지 않을까. 우리 앞의 하루하루가 다시 못 올 기회임을 절감하며 변화를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 지난날 우리는 몇 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선거에 지나치게 익숙해지면서 이런 시간 감각으로부터 멀어지고 말았다. 달력의 주기가 변혁의 맥박을 집어삼키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는 다그쳐야 한다, 우리 세대에게 더 이상 그런 무한한 시간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기회는 이번 한 번뿐이다. 촛불 이후 몇 달, 몇 년의 시간 동안 다시 실패한다면 기회는 더 이상 오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리 여기고 살아가야 한다. <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의 책장을 덮고 "지금까지 MBC뉴스 이용마입니다"라는 부제를 곱씹으며 나는 그렇게 다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복지국가 운동, 이제 새로운 10년의 시작

[복지국가SOCIETY] 복지국가 운동, '깨어 있는 시민'이 나서야
2017.11.07 09:24:35 
    
지난 11월 2일 저녁,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복지국가소사이어티 10주년 기념행사가 있었다. 국회의사당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행사장 입구에 아세안 회의를 위한 출국으로 직접 참석하지 못한 정세균 국회의장의 화환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지난 10년 동안 꾸준히 복지국가소사이어티를 격려해주신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의 화환도 나란히 자리 잡아 이채로웠다.  

10주년 기념 행사의 사회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회원이자 더불어민주당 오영훈 의원이 사회복지사인 안진숙 정책위원과 함께 보는 것도 보기 좋았다. 오영훈 의원은 국회에서 복지국가를 실현하기 위한 의원들의 모임인 '민주주의와 복지국가 의원연구회'의 간사를 맡고 있다. 또 문옥륜 이사장, 최병모 전 민변 회장, 고충석 전 제주대 총장, 이래경 대표,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변광수 명예교수 등이 참석했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의 축사는 박주민 의원이 대신 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을 만들었고, 환경운동연합을 창립하는 데 기여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특별검사였던 최병모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초대 이사장은 "이제 복지국가 운동의 중요한 방향으로 비례대표 확대를 통한 적극적인 정치 개혁을 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남인순 국회 여성가족위원장은 이날 기념행사의 축사에서 지난 대선을 앞두고 국회 세미나를 통해 '모든 의료비를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정책을 제안했고, 그것이 현 정부에서 "문재인 케어"로 구체화되었다는 사례로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활동을 소개했다. 남인순 의원은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연구하는 데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정책을 공약으로 만들어 정치사회적으로 제안하고 국민 운동으로 전개하는 복지국가 운동 방식을 통해 우리 사회를 변화시켜 왔다는 점을 잘 말해 주었다.  

▲ 지난 2일 국회에서 열린 복지국가소사이어티 10주년 기념행사에서 축하 케이크를 절단하는 모습이다. 왼쪽부터 차흥봉 전 보건복지부 장관, 홍옥녀 대한간호조무사협회장, 이금형 공동대표, 남인순 국회의원, 문옥륜 이사장, 강위원 공동대표, 이상이 공동대표, 최병모 상임고문. ⓒ복지국가소사이어티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신자유주의 노선의 규제 완화를 전면에 내세운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 기간 동안 절차적 민주주의의 회복을 넘어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주장했다. 박정희 시절 만들어진 성장 담론의 대안으로 역동적 복지국가를 제안하고, '87년 체제를 대체하는 복지국가로의 전환을 주창해온 지난 10년 동안 드라마틱한 현대사의 한 가운데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자리 잡고 있었다.  

2010년 3월에 열렸던 '복지국가 대국민 제안대회'는 그해 6월의 전국 동시 지방선거에서 무상급식 논쟁을 통해 보편적 복지를 국민들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무상급식 반대 시민투표는 오세훈 시장을 사퇴시키고 보궐선거로 이어지는 힘을 발휘했다. 이후 복지국가가 시대정신으로 서서히 부상하자, 눈치 빠른 정치권은 여야 할 것 없이 앞 다투어 복지국가를 당헌에 명기했다. 그리고 2012년 대선 토론은 복지국가를 누가 더 잘 할 것인가의 논쟁으로 이어졌다. 지난 10년 동안 전국 곳곳에서 벌였던 '복지국가 정책 아카데미'와 '복지국가 강의'는 촛불 시민들에게 비전을 제공했다. 또 촛불혁명 기간 동안 지속된 팟캐스트 방송을 통해 적폐청산 이후 새로 만들어갈 나라의 비전으로 복지국가를 국민들에게 제시했다.

다시 새로운 10년을 시작하며  

행사의 후반부는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새로운 10년을 제안하는 세 분의 연설로 마무리되었다. 정혜선 정책위원(가톨릭대학교 교수)는 구의역 지하철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사망한 청년과 건설 현장 크레인 사망자, 하루 16시간을 일하다가 과도한 노동으로 자살한 집배원과 과로사 공무원, 그리고 주민의 인격적인 모독으로 자살한 아파트 경비원 이야기를 하면서 노동자의 건강과 생명을 보장하는 복지국가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민주당 안산 단원갑 지역위원장 고영인 대표는 정당이 복지국가 정책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국민은 정책으로 정당을 선택할 수 있도록 비례성을 높이는 선거제도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고 대표는 문재인 정부가 성공할 수 있도록 보다 적극적인 복지국가 정치개혁 운동을 제안했다. 강위원 공동 대표는 복지국가를 위한 풀뿌리 지역운동, 복지국가 증세 운동, 그리고 회비 납부 및 회원 확대 등 회원들의 활발한 참여를 요구했다.

참석자들은 촛불 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가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의 성과를 계승하면서 이전의 민주 정부들이 챙기지 못했던 많은 과제들을 복지국가 정책으로 자리 잡게 하는 데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숨은 노력이 큰 기여를 했다는 데 대해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지나온 10년 동안 역동적 복지국가를 열기 위해 노력했던 숱한 과정들을 되돌아보는 것은 그 노력의 성과와 더불어 그에 만족하지 말고 앞으로 더 노력해 열어가야 할 '또 다른 10년'에 대한 희망과 결의를 다시 다지기 위함이다.  

기념행사의 폐회사를 통해 문명순 정책위원(전 금융산업노동조합 부위원장)은 지금까지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시대적 요구에 제대로 부응하는 모범적인 역할을 수행해 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렇지만, 그만큼 국민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에 요구하는 것도 많아졌기 때문에 앞으로 해야 할 더 많은 일들에 대한 더 큰 책임감도 동시에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끝으로 이제 앞으로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참여 속에 새로운 10년을 힘차게 시작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선언하면서 폐회사를 마쳤다. 앞으로 만들어갈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10년은 '깨어있는 시민들'이 주인이고, 그들이 복지국가 운동을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상이의 칼럼 읽어주는 남자 바로가기 : '어떤 정부 형태인가' 보다 훨씬 중요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