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문화, 예술

'범죄와의 전쟁' 하면, 우린 더 안전해질까? - <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

일취월장7 2017. 11. 3. 09:58

'범죄와의 전쟁' 하면, 우린 더 안전해질까?

[양지훈 변호사의 법과 책] <가난을 엄벌한다>
2017.11.02 08:58:47

연예인이 키우던 개가 무고한 시민을 물어 죽인 사건이 발생했다(아직 사망의 인과관계는 확인되지 않았다). 더 놀라운 일은 그 우발적이고 비극적인 사건 이후에 발생했다. 온라인 포털에 불어 닥친, 반려견과 이를 관리하지 못하는 견주에 대한 시민들의 강한 혐오와 불안이 그것이다. 시민들은 평소 거리에서 반려견에 대해 그렇게도 강한 불안을 느끼고 있었나. 연예인의 일상과 도덕적 흠결을 매의 눈으로 감시하는 대중과 짧은 시간 들끓는 언론의 속성을 감안하더라도, 이 사건을 대하는 일반적인 태도는 이상하다. 무엇이 우리를 그토록 '안전'에 민감하게 만들었는가. 

뉴욕의 경찰은 한 때 행동 지침에 따라 목줄 없이 개를 풀어놓는 시민을 체포할 수 있었다. 심지어 횡단보도를 무단 횡단하거나 벨을 울리지 않고 자전거를 질주하는 등 대수롭지 않은 상황에서도 시민을 체포하는 게 가능했다. <가난을 엄벌하다>(시사인북 펴냄)의 저자 로익 바캉은 이와 같은 형사정책이 루돌프 줄리아니 뉴욕 시장이 시작한, 범죄에 대한 일련의 '톨레랑스 제로' 정책에 따른 결과였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범죄에 대한 무관용 정책은 신자유주의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범죄의 정치적 활용 : 신자유주의와 한국의 군사정권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정책이, 경제 부문에서 국가 역할을 줄이면서 사회복지 예산은 없애고 동시에 법원과 경찰, 감옥의 기능은 키운다는 것이 <가난을 엄벌한다>의 핵심 내용이다. 국가가 경제 부문에선 사라지고 형벌 부문에선 더 강력하게 등장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3대 덕목인 자유시장, 개인의 책임과 의무, 가부장적 가치를 더 확대하고 전파하고자 했던 맨해튼연구소가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었고, 이를 선거에 적극 이용하여 당선된 줄리아니 시장이 1993년부터 '톨레랑스 제로' 정책으로 시정에 적극 반영하여, 신자유주의 형사 정책이 등장했다. 

▲ <가난을 엄벌하다>

강력 범죄에 대한 무관용 정책은 그 자체로 시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 문제는 이와 같은 엄벌주의 경향이 범죄자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의 생활에도 침투하여 견주나 보행자, 자전거 운전자 같은 이들의 일상적 자유를 제한하는 데까지 나간다는 것이다. 한편, 미국 대도시에서 시작된 무관용 정책이 결국엔 인종차별적으로 작용하여 흑인 수감자들만 배타적으로 늘렸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실제 범죄율 감소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연구도 있다. 본질적인 문제 해결 없이 시민들의 자유만 제한하는 결과만 초래한 것이다.

저자의 과감한 주장은 이와 같은 신자유주의 형사정책이 고도의 기만적 정책이라는 점으로 이어진다. 사회복지와 형벌 제도의 연계를 통한 치안 정책은 점증하는 사회불안과 그로 인한 하층 계급의 불안정을 응징으로 처벌하는 정치 프로젝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국가는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고 이를 개인에게 돌리는 데 성공한다. 범죄 혹은 범죄자에 대한 증오를 활용하는 것은 사회적 불만을 누그러뜨리고 유권자에게 감정적으로 호소할 수 있는 매력적인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더 적극적으로 우리는 사회 불안을 범죄에 대한 증오로 해소했던 역사를 갖고 있다. 과거 정치적 정당성이 미약했던 권위주의 정권이 시작될 무렵에는, 언제나 범죄자들과의 전쟁이 있었다.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초기에 자유당 정치깡패 소탕을 명분으로 내세우기도 했고, 전두환은 국보위에서 삼청교육대라는 기관을 세우고 상습폭력배들을 격리하여 수용했으며, 그나마 선거를 통해 당선된 노태우는 아예 '범죄와의 전쟁'으로 캠페인 이름을 정하고 이를 보안사 정치 스캔들을 감추는 데 활용했다. 

중산층이 호출하는 범죄와의 전쟁 

우리 사회에서 범죄에 대한 무관용 정책은, 모범 시민인 중산층에게 감정적으로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들이 우리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안락하게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러한 중산층이 안전에 대한 불안을 가장 많이 경험한다는 것이다. 중산층은 자신이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고 사회적 지위가 하락할 위험을 걱정하고 주택담보대출을 연체하여 집을 잃게 될 것을 우려하며, 자신의 아이가 더 좋은 대학에 취업하지 못하여 사회의 하층계급으로 떨어질까 끝도 없이 걱정한다. 과거 범죄와의 전쟁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왔다면 이제 시민들은 스스로 그 전쟁을 호출하고 있다.

견주와 반려견에 대한 증오와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견주에 대한 과도한 비난과 안전에 대한 강박의 기원을 한두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한국 사회에서도 신자유주의 형사 정책이 부상하고 엄벌주의가 확산되는 현상이 배경으로 지적될 수 있다. 최근 소년법 폐지 논란을 초래하며 청소년 범죄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의견이나 사형제 집행 찬성에 점점 동조하는 현상도 엄벌주의 경향에 부합한다.

우리의 불안이 한 걸음 나아가, 경찰이 목줄 없이 산책하는 견주를 재량껏 체포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가 된다면 시민들은 더 안전해지는 것일까. 다시 묻자. 한국 사회는 범죄나 사고로부터 시민의 일상적 안전을 보장할 수 없을 만큼 위험한 사회인가? 그렇지 않다. 북한 변수를 제외하면 한국은 세계적인 안전 여행지이고, 객관적인 범죄율도 상대적으로 낮다. 우리의 불안은 범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 자체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전염병처럼 우리 의식에 숨어들고 그것이 엉뚱하게 어떤 범죄와 범죄자에 대한 과도한 증오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강력한 치안을 통해 안정을 달성하여 스스로의 자유를 구속하는 사회로 나갈 것인가, 아니면 시민적 자유와 권리를 스스로 통제하는 사회를 지향할 것인가. 프렌치 불독에 대해 불안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우리가 개에게 물리는 것처럼 갑작스럽게 일자리를 잃을지 모른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끼고 있다면, 이제 해결해야하는 문제는 달라진다. 


자녀에게 전하는 이용마 기자의 아주 긴 리포트
[프레시안 books] <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
2017.11.02 17:22:42

이명박 정부 당시인 2012년 MBC 노조가 장기 파업에 들어갔다. 결국 정부의 강경 대처를 견디지 못한 MBC는 시청자들에게 버림받은 지금의 모습이 됐다. 

당시 파업하던 이들을 취재했다. 현장에서 지켜본 그들은 늘 한 가지 커다란 궁금증을 갖게끔 했다. 

신념을 가진 사람이 되기란 쉽지 않다. 우리 대부분은 신념과 고집 사이에서 갈등하며, 현실과 이상의 중간에서 헤매고, 당위와 타협의 선택 기로에서 길을 잃는다. 한 번 가진 신념을 지키기란 더 어렵다. 우리 주위의 숱한 이가 다른 신념을 바꾼다. 잘 나가는 정치인을 비롯해, 유명인일수록 그럴 가능성은 더 크다. 어떤 사회이든, 개인이 시스템의 주류가 된다는 건 시스템에 자신을 맞춰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 당시 MBC 노조의 패배는 필연적이었다. 당시 노조의 파업 환경은 지금과 같지 않았다. 대중은 노무현 정부에 실망한 상태였다. 언론인들의 파업에 공감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정부가 바뀌고 사장 인사가 단행되는 것만으로 두 방송사 뉴스가 지금과 같아지리라 구체적으로 생각한 이는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기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MBC 사상 최장인 170일의 파업을 이어가지 못했다. 급여가 끊기고, 숱한 이가 해고당하고, 업무 복귀 후 많은 이가 강제 전보 조치됐지만 파업은 멈추지 않았다. 파업의 결말은 패배로 이어질 것이 뻔한데, 무엇이 그들에게 그토록 강력한 파업 동력이 되었을까.  

<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이용마 지음, 창비 펴냄)는 파업 당시 MBC 노조 홍보국장을 지내다 해고된 이용마 기자가 장래에 두 아들에게 건네는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많은 이가 알다시피, 이 기자는 해고 후 복막암 말기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이다. 그가 아버지로서 자녀에게 건네는 이야기 형식의 이 책 제목이 과거 파업 취재 당시 내 궁금증에 단호한 형태로 대답한다. 물러섰다간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는 절박함이 당시 그들의 외침이었다. 

87학번인 이 기자는 책머리에 아버지로서 자녀의 인생에 등대가 될 수 있는 이야기를 건네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고백한다. 왜 아버지가 직장에서 해고되는 것까지 무릅쓰고도 당시 파업에 나설 수밖에 없었는가를, 즉 왜 아버지가 신념에 따른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책에 인생 전반의 경험을 정리해 풀었다. 어린 시절 개인적 이야기부터 호남 출신으로서 겪은 차별의 현실, 87학번으로서 독재 체제가 민주 체제로 전환하는 한가운데를 지낸 경험을 담백하게 풀었다.  

아울러 기자로서 겪은 경험담을 당시 세상사와 엮어 정리했다. MBC의 과거를 미화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직업인으로서 겪은 기자 조직의 모순을 서술하고, MBC 내에서 어떤 부당한 인사가 일어났는지, 어떤 내부 정치적 고려가 기자의 발목을 잡았는지도 찬찬히 서술했다. 이명박 정부와 싸운 언론인으로서 마냥 노무현 정부를 좋게 포장하지도 않았다. 

이용마 기자는 책 말미에 '세상을 바꾸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누구보다 파업 현장에서 생생한 경험을 한 그가 전하는 말은 과거 <프레시안>과 인터뷰에서 언급한 내용이기도 하다. 마치 선수교체하듯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권 입맛에 맞는 이가 공영방송사 사장에 앉지 않도록 하려면 어떤 정책을 마련해야 하는지를 서술하면서, 그는 검찰 개혁과 언론 개혁이 세상을 새롭게 하는 가장 중요한 길임을 강조한다. 

마침 2일을 기해 MBC 사장은 교체가 확실시되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여전히 정권 입맛에 맞는 인사 교체라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다. 형식적으로만 보면, 정권 입맛에 따라 이 같은 일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MBC는 방송문화진흥회와 정수장학회가 지분 70%와 30%를 소유하고 있는데, 방문진 이사회는 여야 정치권 추천으로 구성된다. 방문진 이사를 정하는 방송통신위원회의 여야 이사 비율은 6대 3이다. 필연적으로 정치적 영향을 받게끔 되어 있다. 

KBS도 마찬가지다. 사장과 임원 인사권을 쥔 KBS 이사회는 여야 7대 4 비율로 구성된다. 공영방송사 지배 구조를 근본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이용마 지음, 창비 펴냄) ⓒ프레시안

이 기자는 정치권이 공영방송 임원진 선임 과정에 완전히 손 떼고, 국민대리인단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공영방송 사장 입후보자를 대상으로 여야가 청문회를 개최하되, 선임권은 이를 지켜본 국민대리인단이 가지게끔 하자는 주장이다. 공영방송이 정치권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뉴스 신뢰도를 회복할 수 있고, 그래야만 공영방송이 정부 입맛에 따라 움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처럼 끝까지 자사에 관한 고민을 담은 <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는 '기자 이용마'가 아주 긴 시간에 걸쳐 전하는, 한국 사회 전반을 방대한 양으로 정리한 뉴스 리포트로 읽힌다. 개인적 경험담과 한국 사회상을 자연스럽게 교차해, 독자가 부담 없이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게끔 했다. 한 마디로 깔끔하게 정리해 잘 이해되는, 전달력 좋은 뉴스 리포트다. 

그럼에도 이 책을 관통하는 송곳 같은 무엇이 느껴지는 이유는, 책 제목대로 이 책이 그의 진심을 담은 신념 전달체이기 때문이다. 과거 파업 현장에서 보았던 그 확신에 찬 얼굴로, 이 기자는 자녀에게 전하는 솔직한 이야기를 책에 담았다. 다른 보통의 사회 관련 서적과 달리, 독자가 책의 학습자, 관찰자 입장에 머무르지 않고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만드는 힘이 그것이다.  


일자리가 사라진 세계, 똑똑한 기계와의 경쟁에서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제언|_좋은 책 추천 & 서평   아발론 | 조회 380 |추천 1 |2017.09.19. 10:18


4차 산업 혁명, 실업 대란의 시대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똑똑한 기계와의 경쟁에서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제언


몇 년 전 미국에서는 최저임금 인상 바람이 불었다. 최저임금의 수혜자인 패스트푸드 업체의 노동자들을 비롯한 저임금 노동자들은 환영했지만, 고용주들은 최저임금을 인상한다면 인간 노동자 대신에 자동화 시스템을 더 많이 도입할 것이라고 반발했다. 그리고, 그 경고는 무인자동 주문시스템, 무인 햄버거 기계, 무인자율주행 배달로봇, 머신러닝을 통해 학습하는 로봇을 통해 현실화되고 있다.

이와 비슷한 일은 미국이나 한국에 비해서 아주 임금이 낮은 태국에서도 벌어졌다. 2013년 태국정부가 최저임금을 300 밧으로 인상하자 태국의 기업들이 고용을 줄이고 로봇-자동화 시스템의 도입을 늘린 것이다. 최저임금을 인상했다고 하더라도 당시 300 밧이라는 태국의 최저임금은 한국의 몇 분의 1 수준이었다. 그러나 태국의 기업들은 그조차도 비싸다고 자동화 시스템의 도입을 확대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최근 대한민국 정부는 최저임금을 7,350원으로 인상했다. 애초의 목표였던 1만원에는 못 미치지만 이 최저임금 인상을 통해 소득을 증대시키고 그로써 내수를 진작시키는 것이 목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과연 그 목적은 달성될 수 있을까? 한국의 몇 분의 1 수준의 저임금인 태국에서도 최저임금이 인상되자 기업들은 자동화 시스템의 도입 확대로 대응했다. 한국이라고 다를까? 더구나 기술의 발전에 의해 자동화 시스템의 가격은 점점 낮아지면서도 성능은 더 좋아지는 상황에서,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은 한국의 기업들-고용주들에게 그동안 미루고 망설여왔던 자동화 시스템의 도입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물론 최저임금이 아니더라도 생산 현장은 (지금까지보다 훨씬) 급격한 자동화로 변환할 것이다.


똑똑한 기계, 인공지능 등이 인간을 배제한 채 생산의 주체가 되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똑똑한 기계들은 생산 현장에서 생산성을 올리고, 노동력을 절감시킨다고 한다. 힘들고 위험하고, 복잡한 일들을 인간대신 담당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힘들고, 위험한 일에서 해방된 인간들에게는 닥쳐올 미래는 일자리 상실이다. 자동화로 인한 대규모 실직, 자동화된 기계가 가져올 일자리 소멸이 결과로 나타난다.


구글의 자율주행차량은 운전기사라는 직업의 존재 이유를 앗아간다. 패스트푸드 음식점에서 단순 조리를 하던 인력들은 이미 자동화된 기계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 패스트푸드점의 무인주문결제 시스템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 노동자를 줄여서 인건비를 절감하는 것이다. 상점에서 물건을 팔던 점원들은 자동화된 무인판매 시스템, 온라인의 자동화된 판매시스템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 최근 선보인 아마존 고라는 이름의 오프라인 매장은 무인 자동화된 시스템을 통해 수백만 명의 인간들의 일자리를 위협한다.


이들 스마트한 기계들이 인간을 대체하고 일자리를 잠식한다면 사라진 일자리만큼의 일자리가 그들 스마트한 기계들을 만드는 곳에서 생겨나야 하지만, 그것들을 만드는 것 역시 결국에는 또 다른 자동화된 시스템이다. 따라서, 기존의 일자리는 사라지지만 새로운 일자리는 생겨나지 않는다. 설사 생겨나더라도 사라지는 일자리에 비해 턱없이 적은 수의 일자리가 생겨난다.


인간을 제조업 현장에서 내모는 스마트 팩토리가 도입된다면, 한국 내 약 360만명의 제조업 종사자들 중 약 78%에 달하는 단순기능직, 조립공들 대부분은 자동화 시스템에 의해 자신의 일자리를 잃고 말 것이다. 약 281만의 일자리 중 다수가 사라질 것이다.


인간이 운전할 필요가 없는 자율주행차량이 도입된다면, 운전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화물운전기사, 버스운전기사, 택시운전기사 등을 포함하는 85만명이 넘는 운전기사라는 업종의 일자리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자동차보험, 차량 정비, 운전학원 등의 부수적인 일자리를 포함한다면 100만개가 넘는 일자리가 수년 안에 사라질 것이다.


무인 생산시스템과 자율주행차량이 도입되고, 여기에, 농업이나 서비스업, 각종 전문직 일자리까지 자동화 시스템, 인공지능, 로봇 등이 도입된다면, 짧으면 수년, 길면 10년 안에 수백만의 일자리가 기계에 의해 대체되고, 인간의 일자리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2016년 2월 워싱턴에서 열린 미국과학진흥협회에서는 인공지능과 로봇의 발전으로 인해 향후 30년 이내에 인간 일자리 중 최소 50%가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옥스퍼드 연구진의 분석 결과에 따르면 미국 일자리 중 약 47%가 인공지능과 로봇등 자동화에 의해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특정 분야에서 대기업 한 두 개만 사라져도 연쇄적으로 수많은 일자리가 사라지고 수많은 사람이 거리로 내몰린다. 그런데, 소위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스마트한 기계, 자동화 시스템, 인공지능에 의해 다수의 직종에서 인간이 일할 일자리가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생각하고 대비할 법도 한데, 대한민국 사회는 아직까지 아무런 대책이 없다. 준비의 조짐조차 보이지를 않는다.


자동화에 의해 기존의 일자리가 사라지더라도 더 많은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날 것이라고 희망고문을 남발하지만, 기존의 일자리를 대체한 똑똑한 기계들을 생산하는 것 역시 또 다른 자동화 시스템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친다면, 사람이 일할 일자리는 그곳에서 만들어질 수가 없다는 것을 손쉽게 깨달을 것이다. 그렇다고 기본소득제, 로봇(자동화 세), 공공 분야의 일자리 확충…이런 것들은 우리의 일자리와 생계를 지켜줄 수 있을까?


이미 우리는 격랑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가져올 일자리 소멸이라는 상황을 당신과 나, 우리는 어떻게 대비해야 할 것인가?


4차 산업혁명이 장밋빛 미래를 가져올 것이라는 기득권자들의 희망 고문에 속지 않기 위해서 반드시 읽어봐야할 책이라고 생각되어 추천합니다.



[스크랩]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우리 사회에 문제가 많은 이유)|【자유게시판】
삶 배우기 | 조회 394 |추천 1 |2017.10.27. 15:32

 

 

인간이 사는 세계에서는 운명(運命)이라는 말이 항상 회자(膾炙)되고 있다.

사람들은 이 운명을 두고 '바꿀 수 없는 것이다.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라고 말해왔다. 이 운명은 어떻게 지어지는 것이며, 한번 자기 속에 존재하게 된 운명은 왜 영원히 갖고 살아야 하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운명이란 "자기 속에 있던 일, 자신이 한번 지은 일은 자기 속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나 볼 수 없는 것이나 모든 것은 세상에 한번 태어나게 되면 그것은 활동을 통해서 계속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더 보충해서 말한다면,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이든지 있게 되면, 그 일은 하나의 인연을 통해서 다시 생기게 된다는 말이며 그 일은 알게 모르게 세상에 존재하게 된다는 뜻이다.

운명이란 말은 바로 여기에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운명의 근원은 자기 속에 있던 일들이 쌓이고 쌓여서 그 쌓인 일들이 계속 자기 속에서 활동을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활동은 같은 일을 계속 만들어 내고 있다는 말이 된다.

사람들이 제각기 성격이 틀리고, 성질이 틀리고, 보는 것이 틀리고, 듣는 것이 틀리고, 말하는 것이 틀리는 것은 자기 속에 있는 일이 각각 틀리기 때문에 자기 속에 있는 것들의 작용에 의해서 있는 일을 보아야 하고, 있는 일을 듣고 이해하게 되고 또 자기 속에 있는 것을 계속 말하게 되는 것이다.

한 사람이 어떤 실수를 하는데 그 실수를 유심히 관찰해보면 그 사람에게는 그런 실수가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자기 속에 그 실수를 유발시키는 근원적인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일을 두고 사람들은 '누구도 운명은 바꿀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해 왔던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줄로 알고 여태 살아 왔다.

하지만 운명이란 얼마든지 바꿀 수 있고, 바꾸어 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 주변에 있는 일을 예를 들어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쉽다. 빨간 물감에다 흰색을 넣으면 분홍으로 변하고, 계속해서 흰색을 더 넣으면 분홍에서 연한 분홍으로 변한다.

그러므로 세상 일에 대한 깨달음이 있다면 자기에게 실수를 계속 유발하던 것들이 붉은 색에서 분홍색으로 변하고, 분홍색이 연분홍으로 변해서 나중에는 이것이 더욱 연해져서 다른 색깔로 변화하는 물감의 경우처럼 운명도 이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이 없고, 깨달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이 운명은 영원히 자기 속에서 반복된 활동을 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운명은 같은 일을 계속 만들어 내고 같은 행동을 계속 하게 한다.

내가 일부러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일들이 그러한 일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게 된다고 하겠다.

여기에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사람들이 깨달음이 없는 가운데 자기의 나쁜 습성을 반복하거나 또는 무지로 인해 나쁜 습성들을 계속 받아들이게 된다면 그 운명은 더욱 어두워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은, 새로운 삶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일들이 자기에게 생기게 되면 새로운 일들이 자기 속에 들어와서 활동을 하게 되기 때문에 운명은 하나의 인연에 의해서 좋은 쪽으로도 변화할 수 있고, 나쁜 쪽으로도 변화할 수 있다고 한다면 틀리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한번 지어진 운명은 나고, 늙고, 병들고, 죽게 되는 일들까지 관계하게 되는가 하면, 심지어는 윤회의 과정 속에 있는 일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윤회(輪廻)라고 하는 것은 자신 속에 있던 활동에 의해서 자기를 반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이 자신의 활동에 의해서 윤회를 하고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자신 속에 있는 것도 활동을 통해서 계속해서 존재할 수 있고, 또 그것이 자신에게 끝없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운명은 개인에게만 존재하는 것인가?

있는 일은 개인에게도 영향을 미치지만 사회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인간의 세계에서 있게 되는 일은 자기의 운명을 만들고, 사회의 운명을 만들기도 하고, 국가적인 운명을 만들기도 하며 세계적인 운명을 만드는 근원이 되기도 한다.

우리 사회의 미래를 알아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람이 어떠한 공식에 의해서 변화할 수 있다면, 사회도 그러한 공식에 의해서 변화할 수 있으며, 국가도 그런 일로 인하여 변화할 수가 있다. 우리는 한 사회나 한 국가의 운명을 보면서 매우 흥미로운 일들을 관찰할 수가 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특히 조선조에서는 일본을 수 백년 동안 미개한 자들이 사는 나라, 미개한 나라라고 말했다. 이것은 고유의 문자나 가르침이 없다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사람들이 세상을 제대로 몰랐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일본이라는 나라는 일본자체에 존재하는 가르침이 있었다. 그 가르침은 그 당시 한국사회가 받아들였던 유교나 다른 종교의 가르침보다도 더 위대했다고 할 수 있다.

일본과 한국이라는 사회를 비교할 때 지난 수 백년 동안 일본사회의 국력이 한국사회를 앞질러 갈 수 있었던 것은 그 사회에 존재하는 가르침 때문이었다.

일본사회에는 한국사람들이 미개한 나라라고 말한 이유처럼 특별한 가르침이 많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본 역사 속에는 4백 여 년 전에 풍신수길(豊臣秀吉)이라는 한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서 일본이 통일되고, 그가 통치하는 일본에는 하나의 새로운 제도가 생기게 되었다.

그 중의 하나는 일본에도 신이 있으니까 외국의 신은 필요 없다고 해서 기독교나 다른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그들은 한국을 침략했던 임진왜란 때에 군대가 철수하면서 한국의 많은 기술자들을 일본으로 끌고 갔다.

예컨대 도자기 굽는 기술자로서 도공(陶工)들을 일본으로 데려 가서 도자기를 굽게 했다. 한국에서 끌려간 도공들이 여러 대(代)를 걸치면서 일본의 전통과 접목시켜 유명한 도자기 가문을 이루어 왔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은 4백년 전부터 현실에 대한 중요성을 제도적으로 일깨워준 셈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현실에 대해 뛰어난 사람들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배웠는가? '공자 왈 맹자 왈'을 배웠다. 그러나 우리가 배운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 속에는 현실이 빠져 있었다. 유교라고 하는 가르침은 사람을 일깨워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문제를 만들어 놓고는 그 과정에 있는 현실적인 일을 빼어 버렸다고 말 할 수 있다.

현실에 눈먼 자들이 하나의 이상적인 가르침을 도입해서 그것을 가르치는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사람들은 배우면 배울수록 현실에 눈 먼 장님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결과를 낳은 그 증거들은 한국의 역사 속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쉬운 예로서 선비들이 집안에 땟거리가 없는데도 책만 읽고 있었다는 일화들이 지금도 많이 전해지는데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지금까지 4백년 동안, 일본사람들은 한국사람들보다도 현실에 현명했다는 증거가 된다.

일본사람들은 현실적으로 생활에 현명했고, 한국사람들은 그 반대로 이상적인 일에 치우쳤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한국사회에는 많은 어두운 일들이 항상 있었고, 일본에서는 이런 일들이 없었다고 하겠다.

선진사회, 즉 국력이 신장된 사회를 보면 현실적인 가르침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현실적인 가르침이 세계 속에서 뛰어난 사회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불안전하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도 이 불안전한 사회에 대처하는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생각이 항상 이상에 치우쳐있으니까 현실적인 해답을 얻으려 하는 것이 아니고 이상적인 해답을 얻으려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느 대통령부인이 점을 보러 점쟁이 집에 다녔다는 이야기는 차마 웃지도 못할 일이다. 아니 이것이 진짜 웃기는 이야기이다.

윤회조차도 하지 못하는 점쟁이 귀신에게 물어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 하는데, 길흉화복을 결정하는 것은 귀신이 아니고 바로 세상과 자신에게 있는 일이 길흉화복을 만들어 내는 원인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일을 하는 과정에서 좋은 판단이나 좋은 가르침이 있어야 거기에서 좋은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르는 일을 하면 실패가 많고, 아는 일을 하면 성공하는 예가 많다.

그런데 왜 우리사회에는 이런 일들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그것은 5백년 동안 유교의 영향을 우리 모두의 의식 속에 지녀왔기 때문이다.

원인도 모르고, 그 과정에 있던 일도 모르고, 원하는 결과만 얻으려 하는 어리석은 사고 형태 때문에 결국 우리 사회가 오늘날 불안전한 사회,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 이러한 운명은 문제의 근원이 풀리기 전에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 사회에서 지금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 하는 예를 외국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과 비교해 보자.

'폴'이라는 한 영국 사람을 알고 있는데 '폴'의 막내 동생이 지금 18세의 나이가 되었다. 이 막내 동생이 어머니 밑에서 살고 있는데 "나는 대학에 가고 싶다, 대학에 갈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어머니는 그때부터 그 딸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대학을 무엇하려고 가려 하느냐?", "대학에는 왜 가야 하느냐?" 부모와 자식간에 이러한 암투가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실정은 어떤가? 자식을 키우고 있는 부모들의 심정은 대부분이 어떻게 하면 자식을 대학에 넣느냐 하고 고민한다. 자식이 대학에 안가겠다고 하면 "너 대학을 안나오면 장래를 보장할 수도 없으려니와 장래를 망치게 된다."고 부모가 안달이다.

자식을 대학에 가게 해 달라고 절에 가서 빌고, 바위 밑에 가서 빌고,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는 등 소란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그 부모들이 잘살아서 그런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남편은 경비원, 부인은 파출부를 하면서도 자식은 대학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선진국 사람의 부모와 후진국 사람의 부모의 차이이다.

대학을 보내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과연 대학에 가서 자식이 무엇을 배우며, 대학에서 무엇을 얻어서 어떻게 자기의 앞날에 밑거름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무조건 대학졸업장만을 목표로 하게 된다는 사실은 매우 우려할 만한 일이며 부끄러운 일이기도 한 것이다.

세계에서 인구에 비례하여 대학도 제일 많지만, 그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가장 많이 노력해야 하는 나라가 한국이다. 그런데 대학을 잘못 나오면 사람을 망쳐버린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다.

대학에서도 공학(工學)계통의 기술적인 것은 배워서 현실과 접목시킨다면 자신과 사회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과가 이상(理想)에 근원을 두고 가르치고 있다.

어떤 대학에서는 무당 굿하는 것을 가르치는 경우도 있다. 무당 굿하는 것을 배워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무당이 되겠다는 것인가?

우리는 자신에게 한번 받아들인 것은 자기 속에서 계속 잠재하면서 끊임없이 활동을 한다는 사실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좋은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에는 자기 속에서 좋은 활동이 끊임없이 일어나서 좋은 일들을 자기에서 일어나게 하지만 나쁜 것을 받아들이게 되면 계속해서 자기 속에서는 나쁜 현상이 나오고 나쁜 일들을 나타나게 한다. 운명의 근원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있는 일을 바로 가르치고 바로 배우는 것이 학문이라는 점이다.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능을 내가 이어 받는다는 것이 전문인 교육이다.

어떤 도공이 멋있고 값지고 우아하게 보이는 도자기를 만들어 냈다면 과연 그 기능이 어떻게 해서 나왔는가를 전수하는 것이 배움이며 전문인 교육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의 금속을 다루는 사람이 어떤 과정에서 튼튼하고 실용적인 좋은 금속을 만들어 내느냐 하는 것은 기능이며, 그 기능을 얻어오는 것을 우리는 배움이라고 말한다.

한국에서는 기능인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학을 많이 세우고 그 대학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 입시제도라는 벽을 만들어 놓았다. 과연 1970년대 이후 30년 동안 이 대학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장차 우리 사회의 중요한 요소에 각각 배치되었을 때, 지금도 불안전한 이 사회가 더 이상 어떻게 유지될 것인가 하는 것은 참으로 상상하기조차 두려운 일이다.

이런 사람들은 사회를 도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도 제대로 다스리기가 힘이 들어서 별 일도 아닌 일에 신경질을 내고 문제를 유발시키는데 이 사람들이 사회의 공직을 담당하고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기관에서 일을 하게 되었을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날 것인가는 참으로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교육은 기능에 대한 이해와 연구 및 탐구가 아니고 문제와 답을 그냥 외우는데 지나지 않는다. 어떤 일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수수께끼 같은 어려운 문제들을 많이 알고 답을 쓸 수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유능한 지도자가 될 수는 없다.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맡은 일을 잘 하는 사람이라야 한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 있는 지도자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고 일을 잘하는 사람들이라고는 믿기 매우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교육은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갈 만한 인재의 양성에 실패했고, 발굴에도 실패했고, 사회적 역할에도 실패한 결과 오늘과 같은 현상들이 존재하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사회에는 어떤 일이 있는가 하고 묻는다면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농산물 생산을 예로 들면 인구는 많고 자원이 없는 나라에서 녹지 보존에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땅의 가치란 그 땅에서 일정한 생산성이 갖추어질 때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이지, 어떤 땅이 만원 짜리 가 백 만원 짜리 가 되고, 거기에 도로가 생기자 천 만원 짜리 가 되어서 땅의 가치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땅의 진정한 가치는 거기에서 자연의 활동이 이루어 질 수 있고, 거기에서 어느 정도의 생산성이 나타날 수 있느냐에 따라 평가되어지는 것이다.

절대자원이 부족하고 인구가 포화상태에 이른 곳에서 녹지보존의 실패는 엄청난 정책적 과오일 수밖에 없다.

능력이 부족하고 무책임한 사람들이 자기 앞과 이익에만 급급하다가 국가의 장래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소중한 제나라의 땅을 줄기차게 파괴시켜 왔다.

 

우리 사회가 알아야 할 일은 외채의 수급에 관한 문제이다.

외채의 도입은 특히 한국과 같은 사회에서는 매우 조심해서 결정해야 하는 일이었다. 더구나 무분별한 외채의 도입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니다.

신문에 난 정부의 발표를 소개하면 "해외거주자 예금이 100억 달러를 넘어섰고, 기업을 팔아서 외화가 계속해서 들어오는데 달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없고 자꾸 보유만 되니까 환율이 1,200원대 이하로 내려간다." 이는 큰일 날 얘기이다.

환율이 1,200원대 이하로 내려가면 어떻게 되는가?

수출을 하면 할수록 손해가 난다. 왜냐하면 외국에서 원자재를 수입해서 가공을 하여 수출하는 나라에서는 이 환율이 적정선을 유지해주지 아니하면 장사를 해도 이익이 남지 않는다.

그러면 국제 경쟁력에서 우수한 기술이나 자원을 보유하지 못하는 나라에서는 노동생산성을 상실하게 된다. 노동생산성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은 자원이 없는 사회에서 일거리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식량 자급률이 겨우 23% 밖에 되지 않는 이 나라에서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고사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한국 사회에서 노동력이야말로 최고의 자원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자원을 썩히고 있는 것이다.

정부에서는 환율을 올리지 않기 위해서 수출금융을 들먹인다. 신용장을 받고 납품실적만 있으면 은행에서 돈을 대주라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제도는 사기꾼들이 한 몫 잡을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들은 외국에 가 있는 가족이나 친척 명의의 현지회사를 차려서 한국의 은행에 신용장 개설을 한다. 그래 놓고 3천6백만 달러 어치의 컴퓨터 칩을 보내라고 한다. 컴퓨터 칩은 새 것을 넣는 것이 아니라 중고나 폐품 10만 달러 어치를 구해서 기름 칠해서 박스에 넣고 포장해놓으면 새 것과 흡사해서 세관에서 알기 힘든다.

한국 사회에서 신문지상에 소개된 전례가 있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하는 말이다. 결국 사기 쳐서 살아라 하는 말과 똑같은 것이다.

왜 이런 설명이 필요한가 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운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있는 일을 잘 보고 잘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환율이 이천 대 일 이상으로 변한다면 국제거래가 타산이 맞게 되어 있다. 산술적으로 1,300원이면 밑지고, 1,400원이 본전이면 2,000원을 받게 되면 600원이 남게 된다.

장사의 원리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신발공장, 의류공장 등이 생겨서 노는 사람들이 일을 하게 된다.

전국민이 일을 해서 그 노동력 자원을 이용하게 되면 우리사회도 얼마든지 잘못된 운명에서 벗어날 수가 있게 된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이상 속에서만 훈련이 된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이러한 일을 알아보기도 어렵고 이러한 말이 들릴 리도 없다. 그래서 거꾸로 하고 있는 셈이다.

부처도 사람들의 이런 일을 두고 말씀하기를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 했다. 중생들은 항상 거꾸로 생각하고 거꾸로 일을 한다는 뜻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현실이 말 그대로 이다.

 

많은 학문을 외우고 있거나 여러 학교의 졸업장이나 어떤 학위를 가진 사람이 좋은 선생이 아니라 사회에 필요한 뛰어난 기능을 소지한 자가 좋은 선생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깨달아야 한다.

좋은 기술은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실상을 알지도 못하는 문제나 답은 자기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고 남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금강산에 봉우리가 몇 개인가를 안다고 해서 그것이 삶에 어떤 이익을 가져오는가? 백두산의 높이가 얼마인가를 안다고 해서 우리 사회에 무슨 이익이 돌아오는가? 낙동강의 길이가 얼마이며,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크게 물리친 곳이 어디인가 등은 지리나 역사에서 가르쳐야 하긴 하지만 이런 것은 생활에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의 교육은 앞뒤가 뒤바뀌어 실제로 중요한 현실은 빠져 버렸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좋은 스승은 좋은 기능의 소지자다. 또한 현실을 가장 잘 이해하는 자이다. 이런 사람이 좋은 스승인데 그런 스승은 지금 어디에서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불안전하고 이 불안전한 일들이 쉽게 해소될 수 없는 것이다.

잘못된 교육, 잘못된 행정, 잘못된 언론 등이 우리의 의식을 점점 어둡게 만들고 또 그 어두운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실수들에 의해서 우리 사회가 잘못되어 가고, 국가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잘못되어 가고 있는 일들이, 하루아침에 어떤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기도를 해서 풀리느냐 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 믿음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깨달음이 없는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바위가 금이 될 것이라고 아무리 믿는다고 한들, 그 바위가 금이 될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또는 바위 속에 금맥이 없다면 어떻게 금이 그 바위 속에서 나오겠는가?

믿음이라는 것도 어떤 과정에서는 중요한 단계가 되겠지만 막연한 믿음만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현실 속에 있는 일을 잘 알고 있는 일을 잘 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 사회는 희망이 넘치게 되고 그 희망은 국가를 부흥하게 할 수 있다.

요즈음은 개인의 운명이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다. 왜냐하면 국가의 운명이 변하니까 개인의 운명도 거기에 따라서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있는 일이라는 것은 내가 저지른 일도 있는 일이지마는 나에게 생기게 되는 일도 있는 일이다.

살아가다 보면 내가 원하지 않는 일도, 내가 활동하던 것에 의해 지어진 인연에 의해서 결국 자신에게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로 인해 나의 삶이 풍비박산이 나고 불행해 지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운명은 개개인의 정신 속에 있는 것이고, 개인의 운명은 그 사회의 하나의 제도나 환경에 의해 변화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있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일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잘 되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잘살기 위해서는 있는 일에 대한 이해가 무엇보다도 급선무라는 것이다.

일본 같은 나라에서는 검사(檢事)직을 갖고 정부에서 일을 하던 사람이 아버지가 직접 운영하는 우동가게의 대를 잇기 위해 자신의 검사직을 사퇴했다는 보도가 난 적이 있다.

바로 그러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 사회가 유지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우동가게가 잘 유지되는 것처럼 그 사회는 믿음이 존재하게 된다.

우동가게가 잘 되어서 장사가 잘 되니까 관직을 사퇴하고 그 우동가게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일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일정한 과정을 거처서 시험을 쳐서 들어가는 자리라면 누구라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기능을 가지고 좋은 음식을 만들어 내거나, 좋은 그릇을 만들어 내거나, 좋은 생활용품을 만들어내는 일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기능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바로 이러한 일들이 일본사회에 존재했기 때문에 오늘날 일본이라는 사회가 한국사회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영국이라는 사회에도 앞에서 말한 그런 부모가 있기 때문에 선진국으로서의 영국사회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는 많은 일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누구도 그 일에 대해서 진실을 알려고 하는 사람이 없다.

제대로 알고 따지는 사람이 없다. 힘있는 자가 잘못했을 때에는 "아! 누구든지 실수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하고 위로하려고 하지, 따지려고 나서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 결과 사회의 위계질서가 무너지고, 한국을 아는 외국인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공직사회에 병폐가 극심해졌다. 이런 일들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잘못된 가르침들에 의해서 있게 된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지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바로 우리가 어떤 인연을 우리 속에 존재하게 할 것인가 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있는 일을 바로 아는 것은 우리 모두를 잘 살게 하는 길이고 우리 사회를 복되게 하는 길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국가를 빛내는 일이다.

한국에서 진실을 모르고 살아가는 국민의 가장 친한 벗은 텔레비전이다.

지금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은 축구선수, 야구선수, 골프선수, 가수, 탤런트 등이다. 텔레비전에는 한 번만 나와도 유명인사가 된다.

텔레비전에 안나오면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유명인사가 아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텔레비전이 인물을 만들고 텔레비전이 사회를 좌지우지하는데 그 텔레비전에서는 사회의 운명이나 국가의 운명이나 사회에 있었던 일이나 어떤 개인에게 있었던 일에 대해서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는다.

그 이유를 잘 알기는 어렵지만 그릇된 기득권을 살리기 위해 선량한 사람들의 운명이 점점 어두운 구렁텅이로 빠지고 있다는 사실만은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는 현실이다.

우리가 현실을 아무리 부정한다 해도 눈을 감아 버린다 해도 있는 일이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 있는 일은 계속 반복되면서 또 다른 일에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리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 나라의 국민 모두가 현명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모든 국민들을 현명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가르침이 진실되어야 하고, 그러한 가르침에는 어떤 인연이 존재해서 어떤 이해(利害)를 우리 속에 주는가 하는 점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는 이러한 가르침이 존재한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