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제정세 칼럼

[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박근혜가 드러낸 어떤 상처는 보이지 않는다

일취월장7 2017. 8. 11. 12:34

[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박근혜가 드러낸 어떤 상처는 보이지 않는다

박근혜의 실패가 곧 여성정치의 실패는 아니다

노혜경 시인·前 청와대 국정홍보비서관 ㅣ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8.10(목) 13:00:00 | 1451호


이쯤에서 제일 난처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다.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과 정치를 말하면서 박근혜를 빼놓을 수 없다는 이야기. 당연히 박근혜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그러나 페미니즘이라는 정치운동이 길을 찾아가려면 박근혜 현상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빠뜨릴 수 없다. 이는 시시하지도 않고 쉽지도 않은 얘기지만, 알고 보면 가장 시시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박근혜를 둘러싼 쟁점은 ‘박근혜가 여성정치의 성장을 보여주는 표상인가’라는 점과, ‘대통령 또는 공적 인물 박근혜가 사적, 개인으로서 지니고 있는 여성성-생물학적이든 문화적이든-에 정치 실패의 책임을 지울 수 있을까’라는 점이다. 첫 번째는 아니라고 결론이 났지만, 두 번째는 분명 진행 중이다.

 

 

‘여성 대통령이 나올 때’가 된 그때

 

2012년 대선 당시 내가 속해 있던 정치세력이 온통 정권교체라는 화두에 매달리는 동안, 대통령 후보 중 두 명이 여성이었던 선거가 치러지고 있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여성 대통령이 등장할 준비가 착착 진행되었던 셈이다. 많은 여성들이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박근혜를 지지할 준비가 돼 있었다. ‘여성 대통령’이라는 말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정치가 가능하다는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확실히 있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진보를 통과하여, 진보 이후에 오는 정치사상이다. 박근혜는 대통령이 되는 것이 가능해 보인 최초의 여성이어서 여성들의 지지를 받았을 뿐, 이는 여성정치의 발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치에서 당선 가능성이란 다른 모든 단점을 덮고도 남을 미덕이지만, 박근혜의 당선 가능성은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박정희의 딸’이어서 높았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여성 정치인 박근혜’라는 화두는 충분히 탐구되지 못했다.

 

박근혜는 전혀 ‘여성적이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여성’이라는 점이 당선에 큰 몫을 차지했다. 하지만 박근혜의 실패가 곧 여성정치의 실패를 의미할 수 는 없다. © 사진=연합뉴스

박근혜는 전혀 ‘여성적이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여성’이라는 점이 당선에 큰 몫을 차지했다. 하지만 박근혜의 실패가 곧 여성정치의 실패를 의미할 수 는 없다. © 사진=연합뉴스


‘여성이 이긴다’라는 말은 단순하지 않다. 여성이라는 이름이 흔히 생각하는 페미니즘의 층위에서가 아니라 일반 정치에서 다뤄질 때, 페미니즘의 가장 중요한 조건 하나를 빠뜨리기 쉽다. 페미니즘은 소수자의 위치에 선 낱낱의 여자사람, 더 나아가 낱낱의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조건이다. 따라서 여성 정치인에 대한 요구는 몸이 여성인 정치인이 아니라 소수자와 약자의 편에 선 정치인이어야 한다는 요구다. ‘그냥 여성인’ 정치가가 대중의 선택을 받아 그로 인해 발생한 권력은 실제로 여성에게 유익할까. 세계적으로 살펴봐도, 보수우파의 여성 정치인이 특별히 여성에게 더 도움이 되는 정책을 펼쳤다는 근거는 없다. 여성 문제는 남성중심 사회의 하위 의제일 뿐이며, 보수정치의 관점에서는 더 많이 그렇다. 페미니스트 정치인이 이겨야 여성의 위상에 변화가 온다. 그렇기에 여성 정치인들은 당선을 위해 달리는 도중엔 자신의 여성적 정체성을 페미니스트적으로 이야기한다. 박근혜의 ‘여성성’을 성찰할 기회를 놓쳐버림으로써 여성들만이 아니라 남성들이, 사회 전체가 놓쳐버린 것이 많다.

 

18대 대선에서 박근혜의 슬로건이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었다는 것을 기억할까. 그가 ‘국가와 결혼한 몸’으로 자신의 여성성을 모성화하고 여성으로서의 동질감을 강조하는 선거전략을 쓸 때, 주로 노령층에 속하긴 하지만 많은 여성들이 환호할 때, 이 예외적 여성이 불러올 재앙을 상상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김무성 당시 박근혜 대선캠프 총괄본부장이 “여성 대통령은 국민들로부터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는 우리 정치의 최고의 쇄신이고, 남성중심의 기존 체제에 새로운 변화와 바람을 몰고올 사회적 혁명이다”고 말할 때는 경악스럽기까지 했다. 이는 페미니즘의 언어이며, 진보의 언어다. 박근혜는 페미니즘을 도용해 이미지 세탁을 했다. 박근혜는 결코 페미니스트가 아니고, 따라서 ‘사회적 혁명’으로서의 여성 정치인도 될 수 없다. 왜 아닌가라는 이야기를 새삼스레 할 필요도 없다. 이미 증명되었으니까.

 

그런데 여성이란, 구체적으로 이성애자 남성의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몸을 지니고 가부장제 사회의 성별분업의 아랫단에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아무도 이 경쟁중시 사회에서 되고 싶지 않은 위치다. 이겼던 여성이 지는 여성이 될 때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그것이 박근혜라도 그렇다.

 

 

도둑맞은 페미니즘은 여성혐오로 돌아오고

 

박근혜를 대통령 자리에서 탄핵하자라고 결의한 순간, 그가 여성이라서 가능한 성적 조롱과 욕설이 밀어닥쳤다. 이것이 얼마나 문제 많고 잘못된 일인가를 이야기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도 함께 조롱당하기 일쑤였다. 탄핵촉구 촛불이 타오르는 동안, 박근혜를 어떻게 비난할 것인가가 나에겐 무척 난감한 문제였다. 화는 나는데, 욕 좀 하고 싶은데, 남성을 향한 욕설과 달리 여성을 향한 욕설 중에 성적인 멸시와 비하를 품지 않은 욕이 드물었다. 그리고 그 욕설 중에 여성 전체를 싸잡아 멸시하지 않는 욕도 드물었다. 박근혜를 욕하는데 내 기분이 더러워지는 아이러니를 상당수 여성들이 경험했다.

 

박근혜는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정치인의 신체가 여성이라는 것이 여성을 위한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고, 더 나은 정치를 하는 보증 또한 아님을 온몸으로 증명했다. 그러나 동시에 탄핵 국면에서 쏟아져 나온 여러 가지 놀라운 사실들은 소위 말하는 ‘여성성’이 공적 영역에서 자칫 조롱거리로 전락하기 쉽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박근혜가 여성이라서 탄핵된 것이 아닌데도, ‘여성 대통령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어렵다’는 식의 도매금 거부를 당해야 했다. 사회적 지위가 높든 낮든 여성은 저 혼자 개인이 될 수가 없고 언제나 모든 여성을 대표하게 된다.

 

박근혜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거의 조선 후기 세도정치 시대부터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를 거쳐 천민화된 자본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를 관통하는, 한 번도 달라진 일 없던 남성지배문화가 박근혜에게는 왜 고개를 숙였나. 그러면서도 어떻게 성형이니 옷값이니 거울방이니 심지어 ‘더러운 잠’이니 ‘미스 박’이니 하는 조롱을 당할 수 있었나. 어떤 남성 학자는 박근혜를 ‘더러운 음부’에 비유하는 칼럼을 버젓이 쓰고도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고 있기도 했다.

 

이 글 한편으로 그 많은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겠다. 그렇더라도, 분명히 함께 촛불을 들었는데, 여성 장관 수는 조금 늘었을지 몰라도 박근혜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체제 자체가 균열한 것 같지는 않고, 그 속에서 여성이 받는 상처와 분노에 대해서는 여전히 몰라도 되는 것 같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해야 할 이야기다. 다만, 이제 여성이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으므로, 곧 세상에 이 말이 들릴 것이다. 


[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축구하는 남자아이와 청소하는 여자아이

그리고 정치적 중립의무 위반

노혜경 시인 ㅣ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8.16(수) 13:00:00 | 1452호


서울시 서초구에 위례별초등학교라고 있단다. 서울시교육청은 성평등 교육을 위한 교사들의 페미니즘 공부모임을 지원하고 있는데, 이 학교에서도 이에 부응해 21명의 교사가 ‘방과 후 페미니즘 동아리’를 결성해 공부를 하고 있단다. 이들 중 한 명인 최현희 교사가 온라인 매체 ‘닷페이스’의 ‘우리 선생님은 페미니스트’라는 코너에 출연해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했다.

 

“왜 학교 운동장엔 여자아이들이 별로 없고 남자아이들이 주로 뛰놀까? 이상하지 않아요?”란 질문에서 시작해 페미니즘은 인권문제이고, 또 아이들에게 페미니즘적으로 질문하다 보면 공교육의 중요한 목표인 비판적 사고능력이 길러진다는 이야기, 아이들은 가정이나 사회나 미디어에서 여성혐오를 체화하는데 그게 어떤 의미라고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 그대로 사회에 나가면 차별을 하거나 당하는 사람으로 자랄 거라는 이야기였다.

 

 

‘페미니즘 교육’ 교사에게 쏟아진 비난

 

나무랄 데 없는 얘기였지만, ‘운동장에서 뛰노는 남자아이’는 충격이었다. 내게는 딸이 하나 있는데, 그 딸이 초등학교를 다닌 무렵은 지금으로부터 거의 이십여 년 전이다. 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잔뜩 화가 나서 담임교사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선생님 나빠. 청소시간인데, 남자아이들에게 나가서 축구하라고 하고는 여자아이들에게만 청소시켰어.” “번갈아 당번 하는 거 아니야. 맨날 그래.” “남자애들은 뛰놀아야 하고 여자애들은 얌전해야 하는 게 세상에 어디 있어?” 딸아이가 쏟아낸 분노의 목록은 아주 길었다.

 

이십여 년 전의 여자아이들이라고 성차별에 결코 둔감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내 딸의 경우를 통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성차별을 예민하게 느끼게끔 해 주던 교사들 중엔 여성들도 많았다는 것도 잘 기억하고 있다. 세상은 그래도 전진해서, 그때의 성차별에 분노하던 소녀들이 자라 최현희 선생님 같은 교사가 됐지만, 아직도 학교 교육현장에서는 ‘축구하는 남자아이와 청소하는 여자아이’가 당연시되나 보다. 그렇다고 이 분노가 설마 남자아이가 청소를 하고 여자아이가 축구를 하면 해소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믿는다.

 

여성이 피해자인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남성중심적이다. © 사진=연합뉴스

여성이 피해자인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남성중심적이다. © 사진=연합뉴스


그런데 저 이야기를 실제로 그렇게 알아들은 사람도 많았던가 보다. 짧은 동안이지만 최 교사에 대한 온갖 공격이 난무하고 신상털기까지 시도됐단다. 이 동영상을 소개한 기사들에 달린 반대댓글을 살펴보니 댓글 다는 사람들의 페미니스트에 대한 반감의 수위가 아주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장 놀랍게 느껴지는 공격은, 교사가 페미니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정치적 중립의무 위반이라는 주장이다.

 

정치적 중립의무란, 각축하는 정치세력 간의 다툼에서 어느 한쪽을 편드는 것이고 실제로는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행위다. 페미니즘을 가르치는 것은 특정 정당을 편드는 일과 아무 상관없고, 따라서 정치적 중립의무에 해당되지 않는다. 심지어 정치적이라는 말의 일반적 용법에 비춰보면 결코 정치적이지 않다. 오죽하면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이 일상에서 겪는 온갖 사소한 개인사들이 알고 보면 가장 정치적이라는 주장까지 할까.

 

페미니즘적 이슈를 담고 있는 어떤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이런 터무니없는 언어 사용을 몹시 자주 보게 된다. 강남역 살인 사건에 등장한 조현병, 왁스숍 살인 사건에는 심지어 ‘생활고’라는 고전적 어휘까지 등장한다.

 

 

‘여성 사건’에 대한 본질 벗어난 시선

 

이 언어들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일종의 ‘묻지마 살인’에 해당하는 강남역 사건의 경우, 피해자가 왜 여성일 수밖에 없었던가라는 이야기를 하면 남성중심사회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으므로 가해자를 이상심리의 소유자로 만들어서 축소한다. 일명 조현병. 왁싱숍 사건의 경우도 왜 하필 여성이 일하는 곳을 노렸으며 성폭력을 시도했나를 말하면 이 또한 남성중심주의적 범죄구조에 메스를 들이대야 하므로 가해자 개인의 사정 중 특수한 사정으로 원인을 축소한다. 일명 생활고. 조현병 환자면 모두 잠재적 살인자이고 생활고에 시달리면 모두가 강도살인을 할까. 개별화되고 파편화된 이런 사건들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여혐범죄라는 본질을 외면하고자 또 다른 약자집단을 공격하는 것이다. 아픈 사람과 가난한 사람.

 

그렇다면 위례별초등학교 선생님을 공격하는 언어로 왜 정치적 중립의무가 등장할까. 이 또한, 해당 선생님이 전교조 교사 또는 그에 준하는 ‘삐딱한’ 교사일 것이란 암시다. 감히 기득권의 남성중심적 사고방식에 이의를 제기했다는 말 대신 전교조에 가해지는 정치적 중립의무 위반이라는 위협을 끌어다 사용한 것일 뿐이다. 이 경우 여성인 최 교사가 가해자로 간주된다는 것만 다를 뿐, 사건을 발생시킨 그 사람 개인의 또는 소수집단의 문제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똑같은 패턴이다. 이런 태도와 방식을 가리켜 나는 ‘분할통치’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당사자를 고립시키면 억압하기가 아주 쉽다.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들도 이런 방법을 쓰곤 한다. 일명 토끼몰이.

 

이런 일이 발생하는 이유는, 아이들에게 성평등 교육, 다른 말로 하면 페미니즘 교육을 어렸을 때부터 함으로써 인권의식 있고 당당한 어른으로 길러내자는 말을 남성기득권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페미니즘을 왜 남자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성기득권적 태도에 이의를 제기하면 무조건 싫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이것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가 하면, 어릴 적엔 여자아이들이 힘이 더 세서 남자아이들이 맞을 수도 있는데, 이때 얻어맞는 남자아이들은 그럼 어떻게 자아존중감을 지닐 수 있을까. 사람은 서로 때리면 안 된다는 것이 페미니즘 교육이라면, 남자가 여자를 때리면 안 된다는 건 기존의 교육일 것이다. 이 말은 곧 힘센 남자아이는 힘 약한 여자아이에게 맞아서는 안 된다는 말을 품고 있으니 말이다.

 

드라마 《공항 가는 길》에서 “왜 여자는 축구부가 될 수 없다는 거야”라며 울부짖던 효은이를 떠올리며, 이런 것을 지적하는 일이 정치적 중립의무 위반이라는 주장에 짐짓 눙치며 대답해 본다. 그러게, 모든 일상적인 일이 알고 보면 정치적이야. 페미니즘에 대해 일부가 느끼는 두려움, 바로 그것이 정치적이야. 페미니스트로 간주되는 사람을 향한 적대적이고 공격적인 언행, 바로 그것이 정치가 해결해야 할 사회적 문제야. 이 일에 아무런 반응도 안 한다면, 그건 정치적 행동의무 불이행이야. 학교에서의 성평등(젠더) 교육이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열쇠는 아니지만, 해결을 시작할 첫단계라는 것을 이번 사건은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