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밖 학생은 왕따인가요 - 4차 산업혁명 창의성 시대에 노동 근면성만 강조하는 대한민국
일취월장72017. 7. 4. 10:45
스마트폰 밖 학생은 왕따인가요
2017.07.03 17:00
by 김현재·서정환
통계청이 올 초에 발표한 ‘2016 한국의 사회지표’에 따르면 우리나라 스마트폰 가입률은 90.6%다. 인구 10명 중에 9명은 스마트폰을 쓴다는 의미다. 그야말로 ‘스마트’한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다. 요즘 나오는 스마트폰은 또 얼마나 스마트한가! 테두리를 줄이고 화면을 키우는가 하면, 사람의 눈처럼 렌즈가 두 개 달린 듀얼 카메라를 앞뒤로 탑재한 스마트폰까지 출시되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 청소년들이 그 스마트한 시대에 동참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청소년들이 이용하는 핸드폰은 크게 세 가지의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스마트폰 이용자와 피처폰 이용자,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스마트폴더 이용자다. 4차산업혁명을 앞둔 이 시대에 피처폰과 스마트폴더라니! 이 두 종류의 핸드폰은 보통 학업 때문에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학업을 위한 (어쩔 수 없는)선택이 청소년 본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는 잘 모르겠다. 반면 ‘긍정적이지 못한 경우’는 종종 봐왔기 때문에 간략히 소개해 보겠다.
정체성을 잃은 휴대전화 ‘스마트폴더’
[사진=삼성전자]
스마트폴더가 막 나왔을 때는 꽤 인기를 끌었다. 효도폰이라고 불리며 노년층에서 인기를 끌었고, 카카오톡(이하 카톡)이 가능한 핸드폰라는 사실 때문에 학생들도 많이 구입했기 때문이다. 카톡을 써야 하니 스마트폰을 사달라는 아이들의 요구에 부모님도 스마트폴더폰 정도면 카톡이 가능하고 학업에도 영향을 주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스마트폴더가 널리 보급된 데엔 이런 슬픈 이야기가 있다.
스마트폴더 이용자 신OO(고 1) 학생 역시 “카톡이 해결돼 친구들과 최소한의 연락은 가능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신OO 학생은 이렇게 덧붙였다. “너무 작은 화면에 2G폰인지 스마트폰인지도 구별이 안 되는 ‘끔찍한 혼종’”이라고. 또 통신사의 서비스 지원이 제한적이고 기기의 용량도 부족하다. “추가로 메모리 카드를 꽂지 않는 이상, 평소 이용에 불편함이 많다”는 것이 신OO 학생의 설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점도 존재한다. 배터리가 오래 간다는 것, 튼튼하다는 점이다.
그래도 피처폰에 비하면 스마트폴더는 양반이다. ‘학업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좋은(?) 의도를 가뿐히 넘어서는 치명적 단점을 가진 것이 바로 피처폰이기 때문이다.
카톡방의 왕따, 피처폰
피처폰의 메모장 기능을 이용해 영어 단어를 외우는 학생. [사진=중앙포토]
우리는 ‘카톡’을 일상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친구와 수다를 떠는 데 사용하는 것은 물론, 학교나 친구들 사이에 전해지는 공지사항까지 카톡으로 이야기한다. 이런 세상이니 카톡을 쓰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배려할 수 있을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 소외되는 학생이 있지는 않을까?
한 학생의 사연을 들어봤다. 카톡을 사용할 수 없는 피처폰을 쓰는 이OO(고 1) 학생은 이렇게 토로했다.
“사실 공식적인 일, 예를 들면 담임선생님의 공지는 피처폰만 있어도 크게 문제 없이 받을 수 있어요. 이런 건 문자로도 다 전달이 되거든요. 하지만, 학생사이에도 서로 주고받아야 할 중요한 정보가 있거든요. 그런 경우에 아이들이 피처폰을 배려하는 경우는 흔치 않아요. 동아리 단체 톡방 같은 경우가 그래요. 저만 늦게 정보를 받는 점도 충분히 지장이 있지만, 그보다 훨씬 큰 문제는 제가 동아리의 의사 결정 같은 것에 참여하질 못한다는 사실이에요. 사회에서 뒤처지는 거죠. 학업을 위해서 친목까진 어느 정도 포기할 수 있다고 백번 양보해도, 친목 도모 같은 일이 아니라, 진짜로 학교생활에 꼭 필요한 부문에서조차 뒤처진다면, 저는 어떻게 하면 좋죠? 포기해선 안 되는 것까지 포기할 순 없잖아요.”
휴대전화가 없으면 본인 인증도 안 되는 세상
다수 안에 소수를 억지로 끼워맞추어야 하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우리는 왜 소수의 학생을 배려하는 행동을 하지 못하는 걸까. 그 소수 중에는 휴대전화가 아예 없는 학생도 있다. 휴대전화조차 없는 학생들은 일상생활에 제법 큰 불편을 느낄 정도였다.
그 중 하나가 본인인증이다. 인터넷에서 스스로를 인증하기 위해 하는 본인인증 절차다. 본인인증에 주로 쓰이는 방법이 바로 휴대전화다. 아이핀 같은 수단을 이용하려고 해도 원격으로 발급 받으려면 휴대전화 인증이 필요하다. 결국 주민센터 등에 직접 방문해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래도 살아가는 방법은 다 있다.
큰 쪽박이 깨지면 작은 쪽박이라도 제 역할을 한다 했다. 피처폰 이용자도, 핸드폰이 없는 사람이더라도 나름대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페이스북 등의 SNS를 이용하는 것이다. 카카오톡 없이도 나름 친구들과의 정보 교환이 가능하다. 심지어 스마트폰 공기계를 이용해 와이파이가 가능한 지역에서 카카오톡도 사용할 수 있다.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어떤 사정이건 간에 스마트폰을 포기한 청소년들이 적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각자 힘든 점이 많겠지만, 결국 우리가 그것을 통해 무엇을 얻고 있는지, 무엇을 잃고 있는지를 잘 따져보고 최선의 선택을 내려야 하지 않을까. 하다 못해 내 의견을 잘 정리해서 이야기한다면, 부모님을 설득해 볼 수는 있지 않을까.
지난 10년간 우리사회는 곳곳에서 비정상이 정상으로 둔갑되어 사회정의는 많이 후퇴하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다수 시민 등의 참여로 촛불정신이 촉발된 정권교체였다. 정치권이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역할을 일반 대중의 자발성에 의한 촛불혁명이 이룬 것이다. 현재는 정치권에 이를 지속시키도록 요청하고는 있다.
그러나 기대만큼 일상의 개혁이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않고 있다. 1987년 6월 항쟁의 시민결실을 정치권의 무임승차로 박탈당한 좋지 않은 선례가 문뜩 떠올려진다. 직선제 이외에 상당부분을 제도화로 정착화하지 못한 아쉬움이 회한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현재엔 검찰개혁, 경제민주화, 언론개혁, 대학개혁 등 4대 개혁에 대한 요구들이 촛불혁명 진행 중에도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이 중 가장 시급한 개혁은 대학개혁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광주전남 교수연구자 모임에서 '대학을 대학답게'라는 표어로 대학개혁 방안, 특히 사학 적폐청산에 대하여 관심 있는 교수, 연구자 그리고 일반인들과 함께 토론을 하였다.
참여한 많은 분들이 대학의 고질적인 문제에 대하여 놀라움을 표출하였다. 사학설립자의 자녀 세습, 족벌경영 등 구체적인 실제 사례발표를 접한 참석자들은 도를 넘은 상식 밖의 부조리한 실태에 대하여 믿을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종교집단 등 일부 대형교회들의 담임목사직 세습 승계에 사회적으로 많은 지탄이 일고 있다.
그러나 사립대학 등 사학은 이에 더하여 운영도 자녀 등 가족친지들이 중심이 돼 일상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경영 능력 등도 검증되지 않은 직계위주의 세습은 재벌 등 대기업집단들과 마찬가지로 3대 내지 4대까지 이어가고 있다. 새로이 건전하게 사학을 운영하려는 사람들과 견주어 보아도 기회 제공의 왜곡이라는 불평등성을 심각하게 유발하고 있다.
다른 여느 조직체와는 달리 교육의 공공성 훼손은 사회적으로 큰 죄악임에도 아무런 견제 받음도 없이 일상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사립대학의 정상화 없이 사회정의는 결코 기대할 수 없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는 부정의는 이를 제대로 비판하고 견인할 수 없는 양심세력들의 부재에서 비롯되었다. 이전엔 양심세력의 마지막 보루로서 대학이 그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여타 다른 영역에서 독재권력 등에 의하여 침묵을 강요당할 때도 이를 분연이 떨쳐버리고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용기 있게 행동으로 나선 집단이 대학이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들을 거의 접할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기업경영 방식으로 대학을 운영하고 있는 사학경영자들은 대학도 거대한 이윤축적의 대상으로 간주한다. 자신들의 운영방침에 순종치 않은 비판적 교수들을 재임용 탈락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학교에서 몰아냈다. 이들은 대학도 천민자본주의적 발상으로 이윤을 창출하는 도구로 악용하였다. 부패한 일부 교육 관료들과 결탁하여 공생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도 그 한 예이다. 퇴역 교육부 관료를 총장으로 앞세우거나 교수로 자리를 제공해 주고 특혜 성격의 재정지원사업 등을 챙기는 것도 일반 사학에서 흔한 일이다. 대학교수로서 연구자들을 자신들에게 철저히 복종시킴으로서 조직체의 건전한 비판세력을 아예 소멸시켜버렸다.
나치즘 등장 이전 독일의 지성인을 집단으로 무기력으로 내몰리게 한 상황과 너무 흡사한 것이 오늘날 대학 분위기이다. 절대왕정의 조선시대에도 집현전 학자들의 비판적인 목소리는 수용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금권에 의해 사립대학은 교수 연구자들을 나약한 급여생활자로 전락시켜 버렸다. 대학의 제 기능 방기로 인한 위기는 단순히 대학구성원의 문제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회의 소금으로서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할 대학이 권력 나팔수인 어용 교수 배출처로서 그리고 재벌 등 대기업 조직체의 이익을 옹호해주는 지식 기능인 양성소로 변질되고 만다.
학자적인 양심으로 사회의 그릇된 행태에 대하여 제대로 발언하고 향후 그 역할을 이어갈 수 있는 후진 양성은 아예 뒷전으로 밀린다. 한국사회의 민주화 수준을 한참 후퇴시킨 요인도 사실 대학의 황폐화로 인한 것이다. 이젠 모든 것을 정상으로 제자리 매김해야 할 시점이다.
그러나 얽혀 있는 비정상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과정은 그리 녹록하지 않을 것이다. 최근 법무무장관 후보 등의 낙마 사례에서 확인하였듯이 적폐 세력은 자신들의 이해에 방해가 되는 시도들들 온갖 방법을 동원해 차단한다. 부패 사학 척결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내 보이는 교육부장관 후보에 대하여도 해묵은 사상 논쟁을 제기한다. 예견될 수 있는 그들 기득계층의 행동 수순이다. 사학의 이해엔 상당수 여야 정치가들도 겉으로 내세우는 말과는 달리 은밀히 사학경영자들을 두둔하고 있다. 이는 익히 알려진 것들이다.
노무현 정부 시기 전향적인 사학법개정안이 결국은 당초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누더기로서 개악이 되어 버린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국회에서 한 법안이 성안되지 않은 문제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잘못된 걸 잘못이라고 당당하게 발언할 수 있는 사회 기반으로서 대학사회의 전통을 통째로 붕괴시켜 버린 셈이다. 비도덕적인 사학운영자들도 그들의 복귀 의지만 있으면 반드시 재복귀된다는 나쁜 선례들이 수없이 행하여졌다.
전남의 모 대학은 10년 넘은 임시이사체제로 운영되었음에도 다시 구재단 측에 운영권이 되돌려졌다. 당초 정의롭게 재단 퇴진 운동에 동참한 해당 학교 교수들 상당수는 해직 등으로 학교를 떠나야 하는 어려움을 감내하고 있다. 당연 보장받아야 할 기본적인 노동권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일례로 정대화 상지대 교수는 구 재단의 비정상적인 복귀 반대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사학당국으로부터 20여 차례 이상의 고소, 고발을 당한 상태이다. 더욱 우려되고 있는 상황은 진정한 후속 연구자들의 단절이다. 불량 사학운영자들이 그간 학습효과로 인하여 연구역량이 있는 양심적인 교수들을 아예 채용단계에서부터 잘라내고, 자신들의 친인척 등 우호적인 인사들로 교수인력을 충원한다고 한다.
현재 미약하나마 바른 목소리를 내는 교수들이 대부분 원로교수들이다. 이 분들이 퇴임 등으로 학교에서 직을 수행할 수 없을 경우에 이들의 역할을 대신할 후속 연구자들은 절대적으로 부족해진다. 이런 환경에 내몰릴 수밖에 없는 최악의 상황은 피해야 한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이를 제대로 추진할 수 있는 제도의 틀을 잡아나가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사학운영자들에게 자신들의 과오를 수정할 수 있는 도덕적 회복을 기대할 수 없다. 부패 등 잘못의 개연성이 높을수록 이를 견제할 수 있는 정교한 제도의 도입 등은 절실하다. 많은 분들이 교육부 해체론을 강하게 제기하고 있다. 교육부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부도덕한 사학의 입장을 적극 두둔하고 그들의 이해만을 챙겼다는 의혹마저 받고 있다. 정상적 기능으로 작동하게 될 문재인 정부의 교육부에 기대를 하고 있다. 그동안의 불신을 과감히 떨쳐버릴 수 있는 신뢰 회복의 계기 마련이 전제되어야 한다. 땜질식 부분 처방만으로 고질적인 대학 문제를 해소할 수 없다.
모든 개혁의 최우선 순위로 대학, 특히 사립대학에 정책적인 역량을 설정해야 한다. 현장에 있는 교수 연구자들의 의견들을 모아 많은 대안이 마련되어 정치권에 제시되기도 하였다. 분명, 교육개혁 과정에서 불량 교육관료나 사학 운영자 등 기득계층의 조직적 저항이 나타날 것이다. 이미 내정된 교육부장관 후보에 대해 보수 언론 등의 편파적 공격이 행해지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이전 노무현 정부의 사립학교법개정 실패 등 교육개혁 좌절을 되풀이 않았으면 한다.
국제노동기구로서 ILO에서 재차 권고하고 있는 교수들의 자주적인 노동조합 설립의 법적 보장도 필요하다. 최소 법내 노조로서 조합원 자격을 교수들에게 인정하여 사학의 갑질에 당당 대처할 수 있도록 제도화는 것을 더 미룰 수 없다.
최근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의 연구에 의하면 취업에 힘들게 성공했더라도 근무시간이 길면 결국 구성원들은 더 나은 직장을 꿈꾸는 ‘파랑새 증후군’을 겪을 확률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근무시간이 길수록, 그리고 현 직장 외에 다른 조직에서 근무한 사람일수록 파랑새 증후군이 더 많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는 건 우리나라 노동 현실을 다시 한 번 날카롭게 꼬집는 것 같아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사실 파랑새 증후군은 2000년 이후 해마다 언론에 단골로 등장한 키워드이다. 뚜렷한 질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지치는 만성피로 증후군과 현재 직업에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더 나은 탈출구를 희망하는 파랑새 증후군은 현재 대한민국 직장인들의 삶을 대변해주고 있다.
이제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듯이 대한민국 직장인들의 노동생산성과 연간 노동시간은 선진국 대비 최악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연평균 국내 노동시간은 2113시간으로 OECD 평균인 1766시간보다 무려 347시간이나 많다. 쉬지 않고 하루 평균 1시간 정도를 우리나라 직장인들이 선진국보다 더 많이 근무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에 비해 노동생산성은 2015년 기준으로 31.8달러에 그쳐 OECD 평균인 46.8달러의 70%에도 못 미치고 있다. 해당 통계수치만 보더라도 국내 직장인들이 얼마나 눈치 보기 야근을 많이 하는지 또는 국내 기업들이 생산성이나 기업 성과와 무관한 방향으로 얼마나 노동 강도를 높이고 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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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해 룩셈부르크, 노르웨이 등 유럽 강소 국가들은 평균 65달러를 상회하는 노동생산성을 보이고 있다. 노동생산성이 높은 국가의 공통된 특성은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 확대, 정규직 근로자에 대한 고용 보호 합리화, 비정규직에 대한 안전망과 높은 최저임금 등이 꼽히고 있다. 국내에서도 2100시간이 넘는 살인적인 노동시간이 주는 생산성 저하를 막기 위해 연 1800시간 미만 노동시간 상한제, 노동시간 축소와 신규 일자리 창출 등을 각종 시민단체에서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일부 기업들은 인건비 부담을 호소하며 노동 유연성을 강조해왔고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신규 일자리는 더욱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만을 호소하고 있다.
국내 경제가 50년도 안 걸리는 짧은 기간에 세계 경제규모 10위권에 해당하는 성과를 달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노동자들의 근면성실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부 차원에서는 산업역군을 육성한다는 미명 아래 1963년 노동법 개정과정에서 노동절을 근로자의 날로 명칭까지 변경했다. 노동(勞動)이라는 단어는 한자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일하다’라는 단순 개념을 내포하고 있지만 근로(勤勞)라는 개념은 ‘일하다’라는 의미 앞에 ‘부지런하다’를 강조함으로써 ‘힘을 들여 부지런히 일함’을 국가 차원에서 산업역군의 필수 요건으로 부각시켰다. 부지런히 일하고 남들보다 더 오래 일해야만 선진국에 도달할 수 있다는 패러다임이 지난 50년간 우리 사회를 지배해 온 것이다.
1963년 이후 강조하기 시작한 ‘근로’의 개념이 지난 50년간 우리 사회를 지탱해 왔고 실제로 성공한 국내 기업의 CEO들 역시 자신의 성공담을 젊은이들에게 들려주며 회사를 위해 자신이 얼마나 희생해왔는지, 그리고 얼마나 치열하게 젊음을 바쳤는지를 강조하며 젊은이들에게 보다 열정 있는 삶을 살아야 함을 역설해 왔다. 그러나 이미 선진국은 근면성실에서 벗어나 창의성과 자율성을 중시하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고, 실제 글로벌 기업에서도 구성원들에게 더 많은 복지와 근무시간 단축을 제공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키워드인 인공지능, 빅데이터 분석, 사물인터넷 등 창의성 기반 경쟁은 근면성실로는 결코 이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장기간의 노동시간을 통한 성과 창출은 1900년대 초반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론에서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한 개념이다. 테일러가 사람을 기계로 보고 노동자들에게 돈만 더 주면 성과를 낼 수 있다고 강조한 기계적 사고는 안타깝게도 여전히 국내 기업 CEO들의 머리 속을 지배하고 있다. 과거 제조업 시절 그리고 창의성이 중요한 요소가 아닌 시기에 강조됐던 노동시간 연장은 4차 산업혁명 시대인 이 시점에도 일부 기업가들이 공공연하게 그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고 서비스업, IT업종 등 미래가치를 창출해야 하는 분야에서도 ‘크런치 모드(Crunch Mode)’라는 업계 은어를 통해 조직 구성원들의 근로를 부추기고 있다.
게임업계의 화두였던 ‘크런치 모드’는 쉽게 말하면 중요한 게임 출시를 앞두고 일정 기간 동안 성과를 창출하기 위해 근무에 있어서 강행군을 지속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지난해 한 게임 회사에서 장기간 크런치 모드가 진행되면서 일부 구성원들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 가운데 크런치 모드라는 용어가 더 많이 알려졌지만, 사실 게임업계의 은어라기보다 일반 IT업계에서도 보편적으로 부르는 용어로 간주하는 것이 조금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IT업계에서도 이미 크런치 모드를 진행하고 있는 기업들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창의성이 가장 필요한 IT업종에서 오히려 제조업 마인드인 근면성실을 강조하는 상황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비단 크런치 모드로 화제가 되고 있는 업종이 게임 또는 IT업계뿐인가. 국내 대기업 사옥은 불이 꺼지지 않는 빌딩으로 외국에서도 이미 유명하다. 1990년대 후반, 국내 D그룹의 회장은 임원들에게 ‘위기가 극복될 때까지 집에 들어가지 말 것’을 선포했고 2000년대 중반 모 그룹의 총수는 경쟁사 사옥이 밤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는데 본인 회사의 사옥은 일찍 불이 꺼져 있는 점을 발견해 구성원의 안일함을 질타하며 당분간 조건 없는 야근을 명령했다. 여전히 국내 대기업의 CEO와 임원들은 별을 보고 출근하고 별을 보고 퇴근하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다. “고생했으니 퇴근해”가 아니라 “씻고 와”라는 말이 모 기업 임원들 사이에 일상적으로 통용됐던 말이다.
경영학 연구에서 구성원들의 야근이나 과로가 기업의 성과, 직무만족도, 창의성과 혁신을 창출하거나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논문은 단 한편도 없다. 특히, 4차 산업혁명으로 대변되는 현 시기에는 글로벌 기업가들 역시 더 많은 자율성과 근무시간 단축, 활발한 의사소통, 일과 삶의 균형(Work and Life Balance)을 강조하고 있다. 국내 기업들이 구성원들에게 근면성실을 요구하는데 비해 글로벌 기업들은 왜 위의 사항들을 보편타당하게 제공할까? 모든 경영학, 심리학 연구에서 구성원들이 자율성과 소통, 일과 삶의 균형을 경험할수록 긍정적인 감정과 자신감이 형성되고 그 결과 창의성과 혁신을 더 높이 발휘할 수 있다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부 기업들의 야근과 과로를 대변하는 크런치 모드를 해소하기 위해 법적, 제도적 절차를 손질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지만 실제 효과를 발휘할지는 미지수다. 게임 및 IT산업을 특례업종으로 신설하거나 근무시간 축소와 일자리 창출 등의 정부 대책은 단기적 관점에서만 효과적일 뿐이다. 실제 크런치 모드의 한 가운데 있는 구성원들은 언제나 ‘경영자의 철학과 생각’이 바뀌길 기대하고 있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경영자의 생각이 바뀌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아는 모 중견기업 경영자는 “근무시간을 축소하라고 정부에서 명령해도 빠져나갈 구멍은 많다. 본인 경험상 야근해야 성과도 더 창출할 수 있다”는 점을 지금도 주장하고 있다.
인간존중경영이라는 패러다임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지 벌써 40년이 다 돼간다. 1980년대 초반 이후 우리나라의 모든 경영학 교과서에 인간존중경영이라는 키워드가 반영됐지만 여전히 현실은 인간외면경영만 진행되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이 창의성과 혁신을 활발히 창출하는 이유는 인간을 존중하고 배려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한 명 한 명의 구성원이 자신의 숨겨진 잠재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필자의 주관적 견해가 아니라 글로벌 경영학자가 수십 년간 연구해서 내린 보편적인 결론이다. 파랑새 증후군에 시달리는 국내 근로자들은 경영자의 인재관이 바뀌길 지금도 절박하게 호소하고 있다. 경영자들이 열린 귀로 그들의 숨죽인 호소를 들어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