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출범과 '진보-좌파'의 과제
19대 대선 결과
지난 1987년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정치 지형 또는 선거 구도는 줄곧 이른바 민주 대 반민주 구도를 중심으로 형성됐다. 그런데 이는 다른 한편에서 한국 사회의 현실을 왜곡, 은폐시키는 작용을 해왔다. 특히 김대중-노무현 자유주의 정권 아래에서 신자유주의가 전면화 된 1997년 이후로는 더욱 그러했다. 자유주의 정권이 일부 민주적 조치를 시도한 것은 맞지만 그들 정권이 내세운 개혁이란 다름 아닌 신자유주의적 개혁으로서 한국사회의 힘 관계가 자본(시장) 위주로 완전히 기울어지는 결과를 불러왔다. 이로써 민주 대 반민주 구도는 그 정치적 효력을 사실상 상실했다. 반대로 말하면 한국 사회가 완연한 부르주아민주주의 사회로 진입한 것이다. 이명박-박근혜 보수정권이 노골적인 친자본 정권으로 나선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부르주아민주주의 체제에서도 그 구체적 양상은 각 나라가 처한 조건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또한 부르주아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기능한다고 하더라도 민주(주의)는 늘 과부족 상태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다. 자본의 힘이 노동에 비해 월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르주아민주주의 체제에서도 민주(주의)는 여전히 쟁점이 되며, 투쟁의 대상이 된다. 예컨대 지난 촛불집회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이게 나라냐' 등이 외쳐진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사실 박근혜 정권이 보인 비정상적 행태가 워낙 두드러져서 그렇지만 민주공화국이 원래 그런 것이다. 부르주아민주주의가 실제 문제가 되는 매우 정상적인 상태에서도 민주(주의)가 늘 과부족 상태에 처한다는 데 있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가 진짜 문제에 직면하게 될 시점은 이 나라를 민주공화국답게, 나라답게 만든 다음부터다. 물론 그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그 시점은 더욱 빨라질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이번 19대 대선 결과가 한국사회, 한국정치에 가져온 가장 중대한 변화는 기존 민주 대 반민주 구도가 더는 작동하기 어려워졌다는 점에 있다. 즉 정상적인 부르주아민주주의 자체가 쟁점이 되고, 투쟁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런데 이점은 한국의 보수세력에 의해 먼저 시도됐다. 지난 이명박 정권 등장 이후 한국의 보수 세력은 한국사회 정치지형을 보수 대 진보 또는 우파 대 좌파의 대결구도로 표현하기 시작했으며 자유주의 세력도 이를 따랐다. 다만 자유주의 세력은 보수를, 특히 선거 시기에, 반민주 세력으로 묶어두고자 했다. 이게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때문인데, 하나는 한국의 보수세력이 여전히 반(비)민주적 행태를 보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주의 세력 자신이 보수세력 못지않게 반(비)노동적 행위와 정책을 펴는 것을 왜곡, 은폐시키려 한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언론은 이런 실상을 덮기 위한 '한국형'(?) 정치적 레토릭으로 각 정치세력 앞에 '친(親)'자를 붙이기 시작했다. 이른바 '친노, 친이, 친박, 친문' 등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먼저 '진보(세력)=민주(세력)', '보수(세력)=반민주(세력)'이라는 등식을 약화시키고, 나아가 노동자민중의 아래로부터의 투쟁이 부르주아민주주의 자체를 향하는 것을 차단하는 효과를 거뒀다.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자유주의 세력이 주도한 민주 대 반민주 구도는 두 측면에서 한국의 민주(주의)가 오히려 후퇴하는 결과를 낳았다. 한 측면은, 자유주의 세력은 부르주아민주주의 아래에서나마 충분히 가능한 조치마저 취하지 않고 단지 보수세력에 대한 반사이익을 누리는 선에서 머물렀다는 점이다. 또 한 측면은, 이점이 더욱 중요한데 부르주아민주주의 아래에서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진전, 향상시킬 수 있는 노동자 계급의 요구와 투쟁을 민주 대 반민주 구도 아래 묶어두는 효과를 낳았다는 점이다. 즉 한국사회 정치지형 또는 계급역관계가 노동 대 자본의 대립구도로 형성되는 것을 차단했다. 부르주아민주주의 아래에서의 민주(주의)의 진전과 향상은 오직 노동 대 자본의 힘 관계의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는 매우 치명적이다.
2016년 총선에서 이미 한국의 정치지형에 일부 변화가 발생했다. 즉 기존 민주 대 반민주 구도의 토대가 되었던 거대 양당 구조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만약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이은 거대한 촛불집회가 없었다면 이번 19대 대선에서 다시 그 같은 양당 구조가 부활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촛불집회로 인해 양당 구조는 더욱 약화되고, 기존 민주 대 반민주 구도를 넘어 설 수 있는 정치적 효과가 발생했다. 무엇보다 10년 만에 '진보정당'이 대선에서 다시 독자완주를 했다. 단지 형식만 부활한 것이 아니다. 그 이전 민주노동당 시기의 경우 독자출마는 사실 전체 정세와는 무관한 자체 행사 수준의 것이었다. 그나마 이명박-박근혜 정권 아래에서 '진보정당(정치)'는 존재감이 계속해서 후퇴했다. 자유주의 세력의 2중대에 머물렀던 게 사실이다. 이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이 다시 찾아왔다. 물론 이번에도 대세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분명 자체 행사 차원은 넘어 선 것이었다.
두 가지 과제
이제 '진보-좌파' 세력에게는 두 가지 과제가 놓여 있다. 첫째, 미완의 촛불집회 또는 아직도 진행 중에 있는 촛불집회가 제기한 과제를 끝까지 부여잡고 계속해서 이를 확장, 확산시켜야 하는 과제다. '진보-좌파'는 촛불집회에서 그 가능성을 확인한 아래로부터의 직접민주주의를, 촛불집회에서 터져 나온, 단지 '적폐청산'으로 대체할 수 없는, 정치사회적 요구를 실현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 이 과제는 정당 정치 또는 공식 정치 차원의 활동에 머물러서는 실현하기 어렵다. 노동자민중의 아래로부터의 투쟁(계급) 정치, 시민들과 함께하는 거리 정치, 다양한 이슈를 뿜어내는 운동(지역)정치, 성평등을 추구하는 성정치, 인간과 자연의 공생을 지향하는 생태정치, 이주노동자와 관련한 정치, 시민이 일상에서 부딪히고 있는 생활정치 등을 확장, 확산해 나가야 한다. 정당 정치, 공식 정치는 바로 이를 확장, 확산하기 위한 과정, 수단이 되어야 하며 그 자체를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
둘째, 그러기 위해서는 정당 정치, 공식 정치 차원에서 정치적 독자성과 독립성을, 단지 형식에서만이 아니라, 실질(내용)적인 측면에서 더욱 강화해 나가야 하는 과제가 있다. '진보정당' 안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공동정부' 문제는 그런 면에서 검토할 여지와 가치가 없는 것이다. '공동정부'에 어울릴 정도의 조건과 힘이 갖춰져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어떤 상황에서도 지배 세력의 일부에 해당하는 정부에 참여하는 것은 백해무익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말할 것도 없이 지배 세력의 일부이다. 물론 그렇다고 사안별 협력, 연대, 공조마저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아니 그것들은 오히려 필요에 따라 먼저 제안하고, 그 속에서 주도권을 쥐려는 노력과 시도를 다 해야 한다. 아무리 원내 소수정당이기는 하지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는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지금의 정치지형도 그 어느 시기보다 그럴 수 있는 조건이 가장 확대되어 있다. 무엇보다 촛불집회가 제기한 문제를 자신의 과제로 부여잡는다면 능히 가능한 일이다.
'진보정당'은 문재인 정부에 대한 2중대 또는 단순한 야당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야당은 나머지 정당만으로도 충분하다. 물론 이들 정당은 모두 문재인 정부 오른쪽에서의 야당이다. 문재인 정부가 하고자 하는 최소한의 개혁조차 발목잡고, 방해하려 들 것이 분명하다. 지금은 비록 '협치'를 내세워 눈치 보기를 하고 있지만, 조그만 실수라도 나오면 언제든 달려들어 분탕질하려 할 것이다. 아마 그 결정적인 정치적 시험대는 '개헌'과 '선거제도 개정' 국면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진보정당'이 왼쪽에서의 야당 역할을 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보수세력의 준동을 저지하고, 문재인 정부에 대한 왼쪽에서의 비판을 가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나아가 한국사회, 한국정치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구체적 방안에 대한 큰 틀에서의 정치적 비전과 전망을 독자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재인 정부를 보완, 보충하는 역할을 넘어 노동자민중의 아래로부터의 요구와 투쟁을 조직하고 강화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적어도 '진보정당'이라면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분수령
민주노총은 올해 2월 대의원 대회를 통해 6월 30일 이른바 '사회적총파업'을 결의, 결정한 바 있다. 올 2월은 알다시피 사실상 정권교체가 이루어질 것이 기정사실로 여겨지던 정세였으며, 민주노총은 바로 정권교체 이후를 대비하기 위한 차원에서 그 같은 결의, 결정을 한 것이다. 민주노총 한상균 집행부가 박근혜 정권의 노동개악시도에 맞서 정면으로 투쟁을 조직하고 집행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민주노총은 비록 박근혜 정권의 일방적인 행정지침까지는 막지 못했지만 국회에서 노동개악 안이 처리되는 것은 저지해냈다. 현 시점에서 문재인 정부가 박근혜 정권의 노동개악 안을 그대로 처리할 가능성은 낮다. 그러나 노동개악 저지는 그야말로 최소한의 것에 불과하다. 산적한 노동 문제는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 문재인 정부가 이 모두를 노동자민중의 입장에서 해결하기를 바라거나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른 사안도 그렇지만 특히 노동 문제는 단순한 하나의 정책이 아니라 정치적, 계급적 차원의 문제로서 체제와 직결되는 문제다. 예컨대 문재인 정부는 최저임금 1만원을 2020년까지 하겠다고 공약했지만 벌써부터 내부에서 임기 내, 즉 2022년까지로 미뤄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민주노총은 문재인 정부를 향해 최저임금 1만 원, 비정규직 문제 해결, 노동조합(특히 전교조와 전국공무원노조) 인정과 노동3권 보장, 노동시간 단축과 청년실업 해소 등 4대 정책 의제와 산업·업종별 교섭틀 구성을 위한 노정 직접 교섭을 제안했다. 민주노총은 특히 정부 권한으로 즉각 시행할 수 있는 과제들을 제시했다. 최저임금 1만 원 실현을 위한 로드맵 제시, 노동개악 4대 지침 폐기, 노동시간·통상임금 등 잘못된 행정지침·행정해석 폐기, 전교조와 공무원 노조 합법화, 특수고용 노동자 노조 인정, 간접고용 하청 노동자들과 원청의 교섭 성사, 한상균 위원장 등 구속 노동자 석방, 하청 산재에 대한 원청의 책임 강화 조처, 노조 활동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취소, 근로기준법 시행령 개정을 통한 4인 이하 사업장 적용 확대, 산별 교섭 촉진 등이 그것이다. 무엇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지만, 문재인 정부의 선의를 기대하거나 기다려서는 무엇 하나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다. 민주노총은 문재인 정부와의 사회적대타협을 위한 파트너로서가 아니라, 노동자민중의 아래로부터의 독자적인 투쟁을 앞장서 조직하는 투쟁 사령부로서의 역할을 계속해서 해야 한다.
민주노총 6.30 사회적총파업이야말로 문재인 정부의 향후 국정운영 방안과 정국의 향방을 가르는 일차 분수령이 될 것이 분명하다. 민주노총은 물론, '진보-좌파' 세력도 6.30 사회적총파업 조직화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탄핵 집회 이끈 퇴진행동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1987년 6월 항쟁 30년이다. 그러나 기억하는 항쟁은 경험으로부터 나온다. 나는 91학번이다. 사람이 참 많이 죽었던 해. 아침이면 누가 또 꽃처럼 떨어지지 않았을까 두려움에 떨던 때. 짙은 립스틱을 바르거나 지하철 손잡이만큼 커다란 링 귀걸이 걸고 다니는 것이 입시에서 해방된 자들의 권리라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하루가 멀게 최루탄이 터지고 화염병이 날아 다녔다. 비범했던 시절이었기에 평범한 스무 살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해 8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USSR)도 무너졌다. 학교 주변 술집에는 절망과 비관에 찬 청춘들이 널 부러져 있었다. 감옥에 가거나 감옥을 피한 친구들의 소식 속에 살았다. 좌절된 혁명에 비틀거리고 '민중 파탄'의 현실에 비분강개하는 청춘들이 넘쳤다. 그 해가 아니었으면 나는 이곳에 있을까, 종종 생각한다. 그래서 고민은 깊다. 2016년과 2017년의 촛불 시민혁명을 통과하는 이들에게 사회는 어떻게 재구성될까….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의 공동상황실장이었다. 공동대변인을 겸하기도 했다. 단체에서 주는 안식년 동안, 국정농단 사태가 터졌는데 쉬고만 있을 수 없었다. 거리로 나왔고 감사하게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언제부터 기산했는지 알 수 없으나 역대 최대 규모라고 했다. 전국 2300개의 단체들이 모였다. 어떤 명칭이 좋을지 오래 토론했고, 매번 집회를 결정하기 위한 회의도 길었다. 많게는 100여 명, 적게는 70~80명이 모여 안건을 논의하고 결정했다. 다수결로 결정하지 않았기에 그 만큼 논의 시간은 길었다. 하루에도 몇 개의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던 때였던 만큼 한순간들이 숨 가빴다. 하루 서너 개의 논평과 성명을 풀기도 했다. 탄핵과 구속 등 중요 사안을 앞둘 때는 기각과 통과의 두 개 성명 초안을 작성하고 결과를 기다렸다. 약칭을 퇴진행동으로 썼지만 기자들조차 정확하게 읽어주는 곳은 없었다. 국민운동본부 또는 비상행동이라 부르는 전화를 받았다. 퇴진행동에 대한 관심은 집회에 대한 것으로 집중되었다. 이번 주말 집회는 어떤 내용이냐, 누가 나오나, 몇 명이나 오는가, 행진은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이냐를 물었다. 몇 회 차 부터였는지 매주 목요일 기자간담회를 진행했다. 이번 주 집회에 대해 브리핑했다. 언론은 꼬박 꼬박 촛불에 대한 보도를 빠트리지 않았다.

ⓒ사진공동취재단
토요일 비상국민행동, 촛불을 준비하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보여지는 것은 토요일 단 하루였지만, 이를 위해 상황실은 일주일 내내 움직였다. 월요일과 화요일 각 팀 회의가 진행되고 수요일 상임운영위나 운영위가 열리면 결정된 것에 따른 집행이 시작되었다. 웹자보를 만들고 홍보를 시작하고 기자간담회를 진행했다. 그 사이 필요한 기자회견이나 중소 규모의 집회가 있는 날도 있었다. 평의회와 토론회를 조직했다. 국회 등 정치권을 만나기도 했다. 사무국, 정책기획팀, 언론팀, 조직팀, 대협팀, 시민행동팀, 선전홍보팀, 법률팀, 재벌구속특위, 시민참여특위, 적폐청산특위 등 소속된 활동가들은 100여명이었다. 자신들이 있는 단체에서 파견된 활동가들이 5달 동안 헌신적으로 일했다. 자원봉사자들을 모집하고 시민 자유발언자들의 신청을 받았다. 홈페이지와 페이스북 등의 온라인을 관리했으며 행사를 알리기 위해 홍보 선전물을 만들었다. 전국각지에서 다양하게 들어오는 요청을 듣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시민 자원봉사단과 마찬가지로 모두 자원활동으로 움직였다. 자기 단체의 일을 중단하고 전면적으로 결합한 사람도 많았다. 광장에서 웃고 우는 시민들과 함께 호흡했다. 그들의 땀과 노동이 있었기에 큰 탈없이 촛불광장이 유지되었음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24일, 퇴진행동이 해산 기자회견을 했다. 퇴진행동의 해산을 두고도 격론이 벌어졌다. 박근혜 정권은 사라졌지만 해결하지 못한 적폐가 이렇게 많은데 해산이 맞냐는 의견도 많았다. 정권의 퇴진이라는 커다란 과제를 해결했으면 마침표를 찍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견이 결론이 되었다. 탄핵이후 대선까지 유지하기로 합의하고 매주 집회하던 틀거리를 그에 맞게 바꿨고, 마침내 해산 기자회견에 이르렀다.
승리의 결실을 가지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몇 안 되는 운동이다. 적폐청산의 과제는 새로운 정부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운동이 다시 짊어지고 헤쳐나가야 할 것이다. 이례적인 지위를 많이 부여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소위 '지도부'가 단 한명도 구속되지 않은 정치적 연대체, (모든 과정이 합법적으로 진행되었기에) 기록을 살아있는 그대로 남기게 된 연대운동, 모금과 기부의 역사를 새로 쓴 운동, 무엇보다 (아마도) 최초로 처음과 끝이 분명한 연대운동이다. 이밖에 더 많은 평가는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에 했으면 한다. 퇴진행동을 통해서 본 한국 사회운동의 현주소와 같은 것들. 민주주의 적들에 맞서 더 많은 민주주의 실험을 했는가, 거리에 나선 시민들의 정치적 대표가 되었는가, 2015년 민중총궐기로부터 시작된 거리의 항쟁은 촛불 시민혁명과 어떻게 연결되었는가, '소위' 민중진영과 시민진영이 공동으로 활동한 연대의 경험은 무엇을 남겼는가, 냉정히 분석할 것들이 많다.
새 정부가 시작되었다. 어느 정권보다 기대가 많다. 새 대통령은 촛불 정신을 이어가는 정부를 만들겠다고 약속했고, 약속을 밟아나가는 과정이다. 많은 국민들이 열망을 담고 있다. 때로는 감격할 것이고 때로는 우려하게 될 것이다. 적폐 청산과 촛불 대개혁은 그 과제의 깊이와 크기로 인해 단시일에 모두 해결되기 쉽지 않을 것이다. 퇴진행동에 몸담았던 한국 사회운동은 꾸준히 길을 갈 것이다. 새 정부의 협력자이기도 하고 비판자가 되기도 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한 마음으로 촛불을 들었던 것처럼 시민의 한 사람으로 살아낼 것이다. 일상의 촛불을 들고 촛불 시민혁명의 시대를 살아낼 것이다.
기록을 잘 남기기로 했다. 1주년이 되는 10월 29일 경, 100년을 바라보는 촛불의 기록을 세상에 공개할 예정이다. 우리에게는 무엇이 왔고 무엇이 남았는지를. 촛불 시민혁명은 기록될 뿐 마침표를 찍지는 않을 것이다. 퇴진행동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퇴진행동이 걸어왔던 길은 다시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 기획·연재합니다.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는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 공동상황실장을 역임했습니다.
“노 대통령이 시작한 일을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인터뷰] 김정호 전 참여정부 기록관리 비서관
경남 김해=구민주 기자 ㅣ mjooo@sisajournal.com | 승인 2017.05.23(화) 21:15:28
‘생태, 가장 소중한 보배’.
부엉이바위로 향하는 등산로 입구에 설치된 식수대 한 면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친필이 깊게 새겨 있다. 2008년 2월 노 전 대통령은 퇴임 후 곧바로 고향인 봉하로 내려와 친환경 생태농업을 실천하는 ‘농부’로서의 꿈을 키웠다. 매일 아침 마을 곳곳을 청소했고, 틈틈이 비서들과 모여 농사 계획을 나눴다. 직접 벼를 심었고 수확의 날을 기다렸다. 그러나 첫 수확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 그는 홀연 봉하를 떠나버렸다. 주인 잃은 마을은 패닉에 빠졌고 노 대통령의 꿈은 그대로 끝나는 듯 했다.
그런 봉하에 다시 생기를 더하고 그가 남긴 유업을 묵묵히 이어간 이가 있다.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기록관리비서관을 맡았던 김정호 영농법인 ‘봉하마을’ 대표다. 노 전 대통령을 따라 봉하로 내려와 얼떨결에 농사일을 시작한 김 대표는 이제 ‘농부’의 삶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방문객들의 손에 들린 봉하산 쌀과 차엔 모두 그의 손길이 담겨 있다. 지난 10년, 청와대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바쁜 나날을 보냈다는 김 대표는 이달 초 봉하마을의 10년 기록을 담은 책《바보 농부 바보 노무현》을 출간했다. 봉하마을 한편에 위치한 영농법인 사무실에서 만난 김 대표는 올해 추도식 분위기가 작년까지와는 확연히 달랐고 전했다.
“작년까진 노 대통령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죄책감들이 추모객들 가운데 짙게 깔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올해 8주기를 맞아 찾아온 이들의 표정엔 지난 겨울 촛불집회부터 문재인 대통령 당선까지 거치며 생겨난 희망과 기대가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아요. 여전히 눈물은 있지만 여느 때와 다른 생기가 돌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올해로 봉하 생활 10년째를 맞았고 또 문재인 대통령도 취임한 해라서 유독 감회가 남다르네요.”
김 대표를 비롯한 봉하마을 주민들은 5월9일 대선 당일 마을 내 방앗간바이오센터 2층에 모여 방송사 출구조사 결과발표를 함께 지켜봤다. 저녁 8시 출구조사 발표 결과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를 크게 앞선 것으로 나타나자 2층은 큰 함성으로 뒤덮였다. 김 대표의 제안으로 모두가 잔을 들고, 그의 건배사에 맞춰 함께 잔을 부딪쳤다.
“노무현, 문재인, 위대한 대한민국 국민을 위하여!”

참여정부 시절 기록관리비서관을 지낸 김정호 영농법인 '봉하마을' 대표는 이달 초 봉하에서의 10년 생활을 담은 책 《바보 농부 바보 노무현》을 출간했다. ⓒ사진=구민주 기자
김 대표는 이날 봉하에 취재를 온 기자들에게 “내 인생 최고의 농사를 지은 것 같다”고 말했다.
“마을 사람들과 다 같이 모여서 대선 결과를 지켜봤어요. 서로 부둥켜안고 기뻐하며 축제 분위기였죠. 가슴 한 편에 상당한 보람을 느끼기도 했어요. 오랜 기간 지켜봐 온 문 대통령은 언행일치를 분명하게 실현하는 분이에요. 앞으로도 계속 지금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하리라 믿습니다.“
그는 이번 선거 기간뿐만 아니라 지난 10년을 봉하에서 사실상 야인으로 지냈다. 그와 가까운 문 대통령이나 참모들을 한 발 짝 멀리서 바라봐온 셈이다. 그 간격만큼이나 지난 2주 문재인 정부가 발표하는 각종 인사나 정책 등을 바라보는 느낌은 남달랐을 것이다. 언론을 통해 각종 소식을 접했을 때 과연 그는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국민들 바라왔던 것을 족집게로 집어내듯 바로바로 해내는 모습에 통쾌했죠. 확실히 그동안 잘 준비를 해왔던 게 느껴지더군요. 다만 걱정은 그동안 문 대통령을 괴롭혀 온 근거 없는 친노·친문 패권 프레임이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게 이후 또다시 새 정부 발목을 잡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나는 친노이자 친문이기도 합니다. 내가 경험한 친노·친문은 지역주의와 권위주의 타파하고 국민들만 바라보고 가자는 정신을 기본으로 합니다. 그게 무엇이 문제인가. 그런 패권이라면 되레 장려해야 하지 않나요.”
친노와 친문은 같다고 하지만, 노 전 대통령과 문 대통령은 다른 사람이다. 누구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두 사람을 지켜본 그가 느꼈던 두 대통령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노무현 대통령이 행동하면서 생각하시는 화통한 분이라면 문 대통령님은 말보다 실천으로 먼저 보여주는 성격입니다. 문 대통령을 향해 누구는 ‘호수’라고 비유하기도 하고 나 역시 굉장히 정적인 분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시절을 거치며 굉장히 역동적이고 능동적으로 바뀐 것 같아요. 호수도 태풍이 몰아치면 파도가 생기지 않나요. 단호해야 할 땐 한없이 단호하고 가차 없는 것이죠. 오랜 지인들도 그 면모를 최근에야 새롭게 발견 중입니다”
김 대표가 농사를 지으면서 틈틈이 쓴 책이 바로 이번에 출간한 《바보 농부 바보 노무현》이다. 그는 책을 준비했던 지난 11개월을 봉하 생활 10년 중 가장 보람된 순간으로 꼽았다.
“과거 기록관리비서관을 했기 때문에 기록이 중요성을 진작 알고 혼자 꾸준히 영농일기를 쓰긴 했는데 책을 내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런데 문득 나처럼 맨땅에 헤딩하며 농사일을 배우고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하면 된다’고 공유해주고 싶었습니다. 또 노 대통령께도 한번쯤 보고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어요. 책을 한번 쓰고 나니 휘리릭 지나간 지난 내 인생, 특히 노 대통령과 함께 했던 20여년 세월이 한번 정리가 착 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문재인 당선인은 참여정부 시절, 초대 민정수석과 마지막 비서실장을 지내며 노무현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함께 했다 ⓒ 사진공동취재단
2008년 노 전 대통령이 내려온 후 봉하마을의 각종 풍경이 담긴 사진을 찾아보면 김 대표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장화를 신고 논두렁에서 모를 심는 그의 얼굴과 안경에는 진흙이 가득 묻어 있었다. 1980년 인권변호사 노무현을 부산에서 처음 만나 직업 정치의 영역에 발을 딛은 김 대표는 느즈막한 나이에 또 한 번 직업을 바꿨다. 어쩌면 ‘팔자’에도 없었을지 모를 ‘농부’의 길로 그를 이끈 노 대통령에게 한 번 쯤은 원망도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전혀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원망할 겨를이 없었어요. 상을 치른 후 한동안 방향타를 잃은 기분에 멍하기만 했습니다. 대통령을 받들며 늘 함께하리라 생각했는데 이제 나에게 지침을 내려줄 존재가 갑자기 사라져버린 거니까... 정신 차리고 나서는 혼자 좌충우돌 농사일 배운다고 바빴어요. 어쨌든 노 대통령이 시작한 일을 그대로 둘 순 없었으니까요. 나중에 어느 정도 일을 익히고 났을 땐 ‘이제 원망한들 무엇 하나’ 싶더라구요.
《바보 농부 바보 노무현》 책 뒤에 추천사를 쓴 사람은 다름 아닌 문재인 대통령이다. 후보시절 추천사를 부탁하기 위해 김경수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주로 의사소통을 했다고 한다. 그 날도 평소와 다름 없이 김 의원과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문 대통령이 갑자기 전화를 직접 받더니 김 대표를 ‘김 작가’라고 부르며 반가워했었다는 것. 이후 자신에게 과찬(?)을 섞은 추천사를 직접 보내줬다고 한다. 문 대통령은 추천사를 통해 “김 작가가 이 책을 통해 국민과 더욱 많은 대화를 나누길 바란다”고 썼다. 김 대표가 이 책을 통해서 국민들과 나누고 싶었던 대화는 무엇이었을까.
“대통령께서 내려와 이곳을 생태마을로 가꾸려 했던 생전 의지와 노력이 전달되길 바랍니다. 자연을 사랑하고 친환경 농업을 아끼던 그분의 가치를 지금도 계속 지켜나가고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요.”

김정호 대표가 출간한 《바보 농부 바보 노무현》 표지. ⓒ 생각의길 제공
김 대표는 책이 나오자마자 가장 먼저 책을 노 대통령 영전에 올렸다.
“대통령님은 생전에 칭찬에 아주 인색하셨어요. 웬만해선 칭찬받기 어려웠죠. 그렇지만 당신의 못 다한 꿈을 이뤄나가고 있는 지금 봉하의 모습을 책을 통해 보셨다면 그래도 한 마디 툭 던지지 않으셨을까요.
”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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