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민주항쟁 30주년에 돌아보고 내다보며
시민들의 '에로스'가 민주주의를 만든다

왼쪽부터 백승헌 변호사, 박영민 바꿈 활동가, 김중배 대기자, 김정헌 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전민용 전 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장, 박석운 진보연대 대표. ⓒ바꿈

▲ 국민평화대행진. ⓒe영상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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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동시위. ⓒe영상역사관

▲ 이한열 장례식. ⓒe영상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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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가 없었다면 6월 항쟁도 없었다
1980년 광주시민들의 거룩한 저항이 없었다면 아마 전두환은 거리낌 없이 시민들 앞에 공수부대를 들이밀었을 테고 거리는 피로 뒤덮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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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구현사제단 1987년 6월12일 명동성당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신부와 시민들이 시위를 하고 있다. |
이 코너에서 여러 번 얘기한 바 있다만 6월 항쟁은 마치 드라마처럼 우리 곁으로 왔단다. 1986년 10월 말, 건국대학교에서 열린 집회에서 평소와 달리 경찰은 학생들의 진입을 막지 않았고 학생들은 멋도 모르고 건국대에 집결해 집회를 열었어. 그런데 별안간 경찰은 건국대를 포위하고 농성하는 학생들을 진압한 뒤 무려 1288명을 구속해버렸단다. 정부는 이를 ‘공산혁명분자 건국대 점거농성 사건’으로 어마어마하게 뻥튀기했고, 국민이 학생들을 지켜보는 눈은 그만큼 차가워졌지. 데모 나가면 시민들이 발을 걸어 넘어뜨려 경찰에 넘기는 일까지 있었다니까. 바로 그 시점에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의 고문을 받던 중 죽었단다. 이 죽음을 둘러싸고 있었던 일들은 여러 번 얘기했을 테니 되풀이하지 않으마. 다만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점차 자신들을 다스리던 정권이 얼마나 폭력적이며, 어찌나 사악하게 거짓말을 해왔는지, 또 비열하게 그 권력을 이어가려 하는지 깨닫게 됐지. 그리고 광주항쟁 이후 7년 동안 왜 그렇게 많은 젊은이들이 전두환의 득의양양한 철벽을 향해 몸을 던져 머리가 깨져나가며 싸웠는지 깨닫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한 거야.
“너는 듣고 있는가 분노한 민중의 노래, 더 이상 노예처럼 살 수 없다 외치는 소리.”
1987년 6월10일 아빠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고 밤 10시30분까지 자율학습을 해야 했지. 그러나 아빠는 이튿날 1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모든 교통편이 끊겨 수 킬로미터를 걸어갈 수밖에 없었거든. 그날 아빠는 시위대와 전경들의 대오를 일곱 번쯤은 가로질러야 했어. 그만큼 시위대가 곳곳에 형성돼 있었고 경찰들은 무지막지하게 밀려드는 시위대에 기가 질린 듯 보였다. 학생들만이 아니었어. 아저씨 아주머니들도 함께 있었고, 그들은 운동가요가 아닌 익숙한 노래를 가사만 바꿔 부르며 함께 어울렸지. “새 나라의 대통령은 대머리가 아닙니다. 대머리가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전국의 대머리 여러분께는 죄송한 이야기이고, 그 대열 속에도 대머리는 많았다만 그들은 ‘대머리 대통령(전두환)’을 야유하며 함께 웃고 떠들며 구호를 외치고 있었어. <9시 뉴스> 시간만 되면 맨 먼저 등장해 그 동정을 국민이 강제로 알아야 했던, ‘본인은’으로 시작하는 그 쉰 목소리의 장본인은 대머리 대통령으로 전락하고 있었어. 이제 한국 사람들은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서는 무녀리들이 아니게 된 거야.
전국 각지에서 학생들은 끝없이 몰려나왔어.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도 나오듯 잡아가는 것도 한계가 있어서 경찰은 버스 한가득 태운 학생들을 교외에 내려놓기도 했지. 버려진 학생들은 또 모여서 데모를 벌였어. 전국의 도시는 시위를 응원하는 경적 소리와 함성, 그리고 외신기자들이 “후일 이 피해는 유전병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할 만큼 시민들이 난사된 최루탄 가루를 뒤집어썼다.
“모두 함께 싸우자. 누가 나와 함께하나, 저 너머 장벽 지나서 오래 누릴 세상.”
시내 한복판에서 가게를 하시던 네 할머니는 데모하다가 경찰에 쫓기는 학생들을 마지막 한 명까지 받아들이고 쫓아온 경찰의 코앞에서 셔터를 내려버리셨다. 고층빌딩에서는 최루탄을 닦으라는 휴지가 눈송이처럼 떨어져 내렸어. “이래서야 어떻게 장사를 하겠느냐”라는 한 상인의 푸념에, “무슨 소리냐. 그런 소리 할 것 같으면 네가 여기를 떠나라”고 이웃 상인들이 한목소리로 핀잔을 주었지. 경찰에게 두들겨 맞는 학생들을 보다 못한 승용차 운전자들은 차에서 기름을 빼주었다. “이걸로 화염병을 만들어요.” 본의 아니게 서울 명동성당에 갇혀버린 학생들을 위해 담장 옆에 있던 계성여중 학생들은 자신들의 점심 도시락을 모아주었고 넥타이 맨 직장인들이 박수를 치고 최루탄 쏘지 말라고 외치며 경찰에 맞서게 됐지. 공권력이 명동성당에 진입하겠다고 통보하자 가톨릭의 최고 수장 김수환 추기경은 이렇게 선언하셨다. “경찰은 맨 먼저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다음으로는 신부들을 보게 될 것이고 그다음으로 수녀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을 밟고 넘어선 뒤에야 학생들을 보게 될 것이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경찰의 호통에 어깨 움츠리고 데모하는 학생들 때문에 나라가 소란할까 두려워하던 소심한 국민들은 역사의 주인공들로 완전히 탈바꿈해 있었어.
“심장박동 요동쳐 북소리 되어 울릴 때 내일이 열려 밝은 아침이 오리라.”
서울의 명동성당은 부산의 ‘논스톱 시위’로 이어졌어. 항도 부산 시민들은 그 화끈함을 과시하면서 사흘 연속 밤샘 시위를 벌였어. 비가 와도 우산을 들고 시위했고 고층빌딩에서 소파를 집어던지며 저항했다. 부산의 공권력은 마비 상태에 빠졌고, KBS와 시청 정도만 필사적으로 방어하며 버티는 지경에 이르렀지. 마침내 전두환은 또 한 번 군대를 동원할 생각을 해. 이 소문이 퍼지자 각 운동단체 구성원들은 아예 집에 들어가지 않았단다. “잡혀가도 거리에서 잡혀가겠다.”
“잡혀가도 거리에서 잡혀가겠다”
이 일촉즉발의 상황을 가로막은 존재들이 있었단다. 전두환이 필생의 업적으로 준비한 88 서울올림픽도 그중 하나였지만 무엇보다 전두환의 발목을 잡아챈 것은 바로 그해로부터 7년 전의 광주였어. 전두환이 정권을 잡기 위해 전국에 계엄을 펴고 공수부대를 투입했을 때 유일하게 일어서서 저항했고 전두환의 독수(毒手)를 피로 받아내야 했던 광주. 그 참혹한 기억은 전두환의 심복들에게도 동요를 일으키게 했어. “또 우리 손에 피를 묻히라고요?”
꼭 기억하렴. 만약 광주가 없었다면, 1980년에 전두환이 아무 기탄없이 정권을 잡았고 그 와중에 광주시민들의 거룩한 저항이 없었다면 아마 전두환은 거리낌 없이 시민들 앞에 공수부대를 들이밀었을 거야. 서울 종로, 부산 서면, 대구 동성로, 대전 으능정이는 피로 뒤덮였을 거야. 그 참혹함을 막았던 건 홀로 봉기하고 외롭게 싸우고 참담하게 죽어간 광주 사람들의 용기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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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87년 7월9일 이한열 열사 민주국민장에서 고 문익환 목사가 절규하고 있다. |
본격적인 6월 항쟁 하루 전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이한열 학생은 한 달여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끝내 숨을 거뒀어. 연세대 교정에서 치러진 장례식에서 민주화 운동의 원로라 할 문익환 목사님이 연단에 오르셨지. 그분은 연설 대신 사람들의 이름을 불렀다. 1970~1980년대 한국을 지배한 군부독재에 맞서 싸우다가 죽어간 사람들의 이름이었어. 전태일부터 이한열까지 무려 26명. 광주의 희생처럼 우리 역사의 디딤돌이 된 이름들이었지. 문익환 목사의 절규에 실린 이름들을 들으며 사람들은 어린아이처럼 울었어. 역사의 깊은 잠을 일깨우기 위해 스스로 종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렸던 이들의 노래를 부르면서 사람들은 또 꺽꺽거리고 울었다. 너도 들어봤을 노래 ‘그날이 오면’은 문익환 목사가 처음으로 부른 이름, 노동자 전태일에게 바친 추모곡이었지. 그 후렴구다.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피맺힌 그 기다림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앞으로 문익환 목사님이 목 놓아 불렀던 이름 가운데 몇 분의 이야기를 전해주려 해. 잘 들어주기 바란다. 우리 역사의 심장 고동 소리로 남은 그분들의 이야기를.
역사의 부름 앞에 당당했던 그해 6월
1987년 6월, 거리에서는 500만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모여 ‘독재타도’를 외쳤다. <시사IN>은 6월항쟁 30주년을 맞아 역사의 한복판에 있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세 사람을 만났다.
1987년 6월은 유난히 낮이 길었다. 이듬해 서울올림픽을 위해 전두환 정권이 5월부터 ‘서머타임’을 시행했다. 긴 낮 동안 벌어진 사건들이 한 시대를 끝냈다. 500만명에 달하는 시민이 거리로 나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다. 6·10 민주항쟁(6월항쟁)의 대미를 장식한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는 100만명이 참석했다. 건국 이래 최대인 이 기록은 지난해 11월 민중총궐기까지 29년간 깨지지 않았다.
그해 거리에 나선 500만명 중 김영삼·노무현·문재인은 대통령이 되었다(당시 김대중은 가택연금 상태여서 시위에 참여하지 못했다). 국회에 들어간 사람도 많았다. 더러는 그 과정에서 “변절했다”라며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6월항쟁 30주년을 맞아 역사의 한복판에 있었던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생생한 증언을 온전히 전하기 위해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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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87년 6월24일 서울 중구 소공동 한국은행 앞에서 ‘직선제 민주개헌을 실시하라’며 구호를 외치던 시민을 향해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했다. |
박춘애
“내 인생은 시민들이 지켜줬다”
학교 축제가 끝나고 시험이 다가오는 1987년 6월 중순이었다. 반독재 운동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전남대 비상시국총회는 6월16일 총학생회장과 투쟁위원장의 삭발식을 결정했다. 총여학생회장이었던 내가 “그걸로는 좀 약하지 않아? 나도 같이해야 하는 거 아냐?”라고 했다. 모두가 말렸다. 머리카락을 깎아 시위한다는 게 흔치 않은 시절이었고, 특히 여학생은 더 그랬다. “이 마당에 안 될 게 뭐가 있어?”라고 대꾸했다. 그날 오후 2시 나는 중앙도서관 앞 5·18민주광장에 앉았다. 시위 때마다 입었던 옥색 저고리와 검정색 치마를 입었다.
의식의 힘이란 무섭다. 긴 생머리가 가위로 잘리자 분위기가 엄숙해졌다. 머리카락을 깎아준 예비역 후배들과 총여학생회 사람들은 내내 울었다. 머리카락이 다 잘리자 군중 속에서 20명 이상이 뛰쳐나와 이어서 삭발을 했다. 몇몇은 옷을 찢었고, 즉석에서 혈서를 쓰는 이도 있었다. 그 힘을 모아 교문 밖으로 나가 거리 시위를 벌였다. 그날 이후 광주 학생들의 시위 참여 인원은 크게 늘었다. 여대생 한 명이 머리를 깎아 광주의 6월에 불을 붙인 셈이 되었다.
사실 내가 총여학생회장이 된 계기를 돌아보면 조금 멋쩍다. 선배들의 권유로 출마했는데, 특별히 사명감이 투철하거나 운동권 주요 인물이어서는 아니었다. 학생회 임원으로 출마하려면 일정 수준 이상 학점을 받아야 했다. 학생회 안에는 그 ‘요건’을 갖춘 사람이 드물었다. 학생회 임원이 된다는 건 언제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갈지 모른다는 뜻이었다. 애인과 의논하자 고맙게도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인데 할 수밖에 없지”라고 말했다. 그가 지금의 남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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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이명익 전남대 총여학생회장이던 박춘애씨(아래)는 30년 전, 독재 반대를 주장하며 긴 생머리를 잘랐다. 전국 최초의 여대생 삭발이었다. |
인터넷이나 SNS가 없던 시절이라 집회 시간과 장소를 알리기 어려웠다. “시민 여러분, 지금 여기로 모여주십시오! 집회합니다!”라고 소리치고 다녔다. 내가 사복 경찰에게 붙들리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사람들(사수조)도 따로 있었다. 경찰들이 나를 잡아가려 들면 옆에 있던 사수조 학생들이 대치하다가 대신 잡혀갔다. 나는 시위 당일 나를 보호하려는 사수조가 누구였는지 모른다. 훗날 “제가 그날 회장님을 보호했습니다”라고 말한 사람들이 여러 명 있었다. 진짜 6월항쟁의 주역이다.
6·29 선언 이후 수배가 해제됐다. 사범대 학생이었기에 1989년 졸업하고 바로 교사로 발령이 났다.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설립됐다. 조합원으로 가입했고, 발령 4개월 만에 해직됐다. 전국 최초 삭발 여대생에 이어, 전국 최연소 해직 전교조 교사가 되었다. 1994년 복직까지 5년간이 어땠는지 부모는 모른다. 휴직하고 다른 일을 한다고 둘러댔다. 더 상처를 줄 수 없었다.
2014년 세월호 참사가 터지고 ‘세월호 3년상을 치르는 광주시민상주모임’에 참여했다. 지난 4월16일까지 3년 동안 날마다 출근길에 피켓을 들고 거리 선전을 했다. 출근 시간보다 30분 일찍 나와서 길거리를 다녔다. 우리 학교 아이들은 종이학 1000마리를 접으면 소원이 이뤄진다며, 스스로 노란 배 1000척을 접었다. 전원 구조가 자기들 소원이라면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상처도 크지만, ‘광주’로 묶이는 자부심과 공감대가 있다. 학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 대학 학생처도 마찬가지였다. 총여학생회장이 된 뒤 학생처장이 해남 고향집에 찾아가 “당신 딸이 운동권 주모자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버지는 한마디만 했다고 한다. “우리 딸이 앞장서서 하는 일이 절대 나쁜 짓일 리 없다”라고. 학생처장은 나한테 “당신 아버지 정말 훌륭한 분이다”라고 말했다.
6월항쟁의 최대 수혜자는 나다. 내 인생은 시민들이 지켜줬다. 삭발할 때만 해도 ‘그래, 내가 이렇게 하다가 죽어도 어쩔 수 없네’라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내 뒤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울면서 머리카락을 자르던 학생회 후배들. 따라서 삭발을 하고 혈서를 쓰던 처음 보는 학우들. 나를 대신해 기꺼이 경찰에 잡혀간 이름 모를 학생들. 거리에 나와 함께 구호를 외친 광주 시민들. 전교조에 가입해 해직될 때도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나를 응원했고, 세월호 피켓을 들 때도 격려 받았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져서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
박근혜 정권하에서 6월항쟁 30주년을 맞았다면 얼마나 참담했을까. 우리 모두가 살아온 삶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하면서…. 촛불혁명 이후 30주년 기념식을 하게 되어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쁘다. 6월10일 광주·전남 6월항쟁 기념식 사회를 맡게 되었다. 30년 전에 입었던 옥색 저고리와 검정색 치마가 아직 몸에 맞았다. 1987년 그때처럼 나가서 떠들었다. 돌이켜보면 30년간 나는 늘 뭔가 해보려고 했다. 할 일이 자꾸 생긴다. 결정의 순간마다 정면 돌파해왔다. 피하지 않았고 잔머리 굴리지 않았다. 그렇게 살았다.
김학규
“30년 전 더 잘했어야 하는데…”
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대학에 갔는데, 들어가서 보니 세상이 내 생각과 좀 많이 달랐다. 군사정권이 광주에서 그렇게 사람을 많이 죽였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선배 하나가 이런 말을 했다. “역사는 붓으로만 쓰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쓰는 거야.” ‘한 10년 투자해서 세상부터 바꾸고 공부하자’고 생각했다. 계획이 틀어져 여기까지 왔다.
종철이와는 서울대 84학번 동기다. 종철이는 전공이 종교학이고, 나는 국사학과였다. 같은 인문대학 소속이라 운동조직 안에서 서로 연관된 일을 맡았다. 종철이는 ‘타이핑 팀’ 팀장이었다. 누구나 워드프로세서를 쓰던 시절이 아니었다. 유인물 하나 만드는 데에는 값비싼 타자기와 전문 인력이 필요했다. 종철이가 그 일을 총괄했다. 나 같은 사람은 몸으로 뛰었다. 타이핑 팀에서 쳐온 문건을 종철이가 전해주면 우리 팀 사람들은 밤새 등사기(서류를 복사하는 데 쓰인 일종의 간이 인쇄기)로 밀었다. 유인물을 많이 뽑아낸 새벽에는 그렇게 뿌듯할 수 없었다.
종철이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1986년 10월 하순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날도 종철이가 문건을 타이핑해서 국사학과 사무실에 주고 갔는데, 내가 무언가 할 말이 있어서 계단으로 내려가는 그 친구를 불렀다. 이야기하려던 게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 친구의 얼굴만은 평생 잊을 수 없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맑은 눈빛이 30년이 지난 지금도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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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조남진 김학규씨(아래)는 ‘10년 정도 투자해서 세상부터 바꾸자’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박종철 열사의 눈을 떠올리면 ‘운동은 평생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다. |
1986년 11월 초부터는 내가 수배를 당해 도피하느라 종철이를 만날 수 없었다. 1987년 1월15일 우연히 밖에 나가 석간신문을 샀다. 늘 그랬듯, 집회나 검거 소식이 실린 사회면을 먼저 펼쳤다. 그 신문에 내 친구 이름이 적혀 있었다. 죽었다고. 기사에는 ‘쇼크사’라고 쓰였는데, ‘고문받다가 죽었다’라고 읽혔다. 두 가지 감정이 떠올랐다. 하나는 친구를 앗아간 정권에 대한 분노, 다른 하나는 나도 당할 수 있다는 공포. 오랫동안 분노와 공포가 뒤섞인 이상한 감정이 내 몸을 지배했다.
다른 학생들과 만나서 종철이 이야기를 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사실 우리도 조금 이상했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너무나 큰 충격과 실의에 빠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사건을 당연시했다. 인권에 초점을 맞춰 정권을 규탄하기보다는 ‘하필 내 친구가 걸렸구나’ 하는 울분만 앞섰다. 비일비재하게 이런 일을 접해온 우리는 ‘고문사’ 소식 앞에 일반인들보다 담담했을 수 있다. ‘고문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라는 구호를, 우리가 더 일찍 외쳤더라면 6월항쟁을 앞당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1988년 5월 붙잡혀 감옥에서 6개월을 살다가 나왔다. 노태우 정권이 유화정책을 펴던 때라, 우습게도 감옥에서 나온 지 2주 만에 복권됐다. 1989년 학교에 복학을 신청했는데 학교 측이 “당신은 휴학이 아니라 제적됐다”라고 하더라. 1987년부터 학교에 아예 못 갔으니 미등록 제적 처리된 것이다. 시대 분위기가 운동권 학생들에게 친화적이라 복적 신청을 하니 바로 받아줬다. 한 학기 장학금도 받았다. 복적하고도 학교에는 거의 나가지 못했다. 노동청년운동을 했다. 이후 6월항쟁 10주년 기념사업 범국민추진위원회에서 사무국장 비슷한 직책을 맡았고, 20주년까지 이 일을 했다. 스무 살에 세운 10년짜리 계획은 이렇게 바뀌었다.
이번 촛불항쟁에 참여하면서 느낀 감정은 아쉬움이다. 30년 전 우리가 더 잘했어야 하는데…. 6·29 선언이라는 당황스러운 대응이 기만책이라는 문제 제기가 분명 있었지만, 돌파해내지 못했다. ‘87년 체제’라는 타협적 시스템하에 30년이 흘렀다. 군사정권을 완전히 몰아냈다면 아마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 이런 비용을 치르지 않고도 민주주의를 발전시키지 않았을까?
6월항쟁 30주년을 맞아,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서 나는 박종철이 갖는 상징적 의미를 고민한다. 좁게 말하면 타인과의 신의다. 물고문을 받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선배가 어디에 있는지 불지 않았다. 말할 수도 있었는데, 그랬으면 종철이는 살았을 수도 있는데. 의미를 더 확장하면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다. 종철이의 신의는, 단순히 한 선배가 아니라 전두환 군사정권에 맞선 운동조직을 향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박종철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2003년부터 해마다 박종철인권상을 시상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고 백남기씨, 올해는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가 수상했다.
종철이가 끌려간 남영동 대공분실은 경찰청 인권센터가 되었다. 그가 죽은 509호실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박종철 기념관도 여기 있다. 운영 주체가 경찰청이다 보니 불편한 점이 많다. 시민사회가 운영하면서, 민주화 희생자 모두를 추모하는 곳으로 바꾸면 좋겠다. 대공분실 건물 입구에는 한여름에도 바람이 쌩쌩 부는 공간이 있다. 고문을 끝낸 경찰들이 시원하게 쉬라고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종종 여기 앉아서 종철이의 눈을 떠올리면, ‘정말 운동은 평생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명준
“동장에서 대통령까지 우리들 손으로”
1947년에 태어나 박정희 정권 때부터 싸웠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느라 1년 늦게 졸업했다. 이후 중앙대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했다. 당시 우리 학과는 수십명 규모였는데 청강생이 많아 수업에는 수백명이 드나들었다. 그런데도 우리가 1969년 학내에서 박정희 3선 개헌 반대 운동을 하는 동안 학우들은 구경만 하더라. 일찌감치 제적당한 터라 그때가 몇 학년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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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조남진 이명준씨(위)는 “6월항쟁의 교훈이 지난겨울 촛불집회에서도 발휘됐다”라고 말했다. |
박정희 정권에서 고문은 예사였다. 나 역시 경찰에 잡혀가 기절할 때까지 물고문을 당하곤 했다. 고문이 아침에 시작됐는데, 깨어나 보면 창밖은 캄캄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지병인 천식이 악화됐고, 뇌출혈이 와서 2주간 의식불명으로 입원한 적도 있다. 아직도 매일 아침 약을 챙겨 먹는다. 종손이었던 내가 대학도 늦게 가고 그마저도 제적당하자 집안사람들은 “패가망신의 원흉”이라고 손가락질했다. 사면복권이 된 뒤인 1997년쯤에야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1974년 명동성당 이기정 수석보좌신부에게 천주교 세례를 받았다. 천주교와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해 지학순 주교가 구속당한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창립되고 활동이 어느 정도 겹쳤다. 바깥에서 운동권 사람들을 만나기 살벌한 시절이었다. 이기정 신부를 설득해 사제관에서 사람들과 모임을 가졌다. 전부터 사제관에 자주 드나들던 젊은 명동성당 신자들과 의기투합했다. 1975년 5·22 사건(김상진 열사 추모집회), 같은 해 명동성당 7인 위원회 사건,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도 연루됐다.
1986년 함세웅 신부를 따라 필리핀에 갔다. 때마침 터진 필리핀 6월 혁명을 현장에서 목격했다. 독재자 마르코스에 대항해 100만명 이상이 거리로 나왔는데도 미국은 군을 투입하지 않았다. ‘제3세계 민주화운동에 대해 군사력으로 누르지 않는다’는, 미국의 저강도 전쟁 정책을 알게 됐다. 이런 추세라면 우리도 민주화가 가능하다고 봤다.
예상대로 전두환의 1987년 4·13 호헌 선언 이후 한국에서도 민주화운동이 본격화됐다. 4월21일 천주교 광주대교구 사제들이 단식을 시작했다. 서울대교구, 안동교구에서도 동참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간사였던 나는 시민들이 스스로 ‘의식화’되는 모습을 목격했다. 신부들의 단식으로 주일 미사가 취소되자 신자들이 난리가 난 것이다. 명동성당을 둘러싼 신자들이 외친 ‘평범한’ 구호가 인상적이었다. “동장에서 대통령까지 우리들 손으로”였다.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 결성에 천주교 집행위원으로 참여했다. 좌우와 양김(김대중·김영삼)을 넘어, 사회 각 단위의 힘이 결합된 조직이 필요하다고 봤다. 개신교 쪽과 불교 쪽도 공식·비공식으로 꾸준히 만났다.
성유보·황인성·김도현과 함께 ‘6·10 국민대회 행동요강’을 작성했다. 우리는 비폭력을 누차 강조했다. ‘폭력을 사용하거나 기물 손괴 등을 자행하는 사람은 국민대회를 오도하려는 외부세력으로 규정한다’는 대목도 넣었다. 당일 명동성당 앞에서 화염병을 만드는 학생들에게 따로 당부하기도 했다. “여기는 경찰도 없는데 화염병을 어디에 던질 생각인가? 시위가 격렬해지면 시민들은 빠진다. 운동을 그렇게 하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필리핀의 사례를 보고 평화 집회여야 성공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6월항쟁의 교훈이 지난겨울 촛불집회에서도 발휘됐다고 생각한다. 촛불집회 초창기 원로회의에 나가 나는 이렇게 말했다. “박근혜는 탄핵돼야 한다. 그러나 그 방법은 여의도를 통해서다. 실탄을 맞으면서 권력자를 끌어내리는 혁명은 틀렸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운동은, 번번이 그런 식으로 실패해왔다.”
MBC에는 6월의 함성이 없다
1987년 6·10 민주항쟁 현장에서 사진을 찍었던 프리랜서 사진가 킴 뉴턴을 주인공으로 해서 촬영 중이던 MBC 다큐멘터리가 제작 중단되었다. 김장겸 사장 취임 직후의 일이다.
서울광장에서 열린 6·10 민주항쟁 30주년 기념식장에 60대의 미국인이 나타났다. 미국에서 대학교수로 일하는 킴 뉴턴 씨였다. 그는 30년 전인 1987년 6월에도 이곳에 서 있었다. <뉴욕타임스> <르피가로> <타임> 등에 사진을 보내는 프리랜서 사진가로서 뜨거웠던 그해 6월의 거리를 속속들이 카메라에 담았다. 지금도 가지고 있는 당시 관련 사진이 6000장이나 된다.
그중 하나가 이한열 열사와 관련한 사진이다. 그는 이한열 열사의 영정과 함께 선 두 학생을 찍었다. 영정을 든 이는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 태극기를 쥔 이는 총학생회 사회부장이었던 배우 우현씨다.
킴 뉴턴은 6·10 민주항쟁(6월항쟁) 기념식장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 이 사진을 선물했다. 아울러 그는 6월항쟁 30년의 소회를 담은 편지를 문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했다. 여러 언론이 이를 6월항쟁 기념식의 주요 장면으로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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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6·10 민주항쟁 기념식장에서 킴 뉴턴 미국 애리조나 대학 교수(왼쪽)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기념 액자를 건네고 있다. |
킴 뉴턴 씨가 한국을 다시 찾은 건 꼭 30년 만이다. 6월항쟁이 있던 그해 군인 출신인 노태우씨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을 보고 이듬해 한국을 떠났다. 그리고 다시 한국을 찾을 일은 없었다. 모교인 애리조나 대학에서 2007년부터 저널리즘을 가르치며 평범한 교육자로 살았다.
‘30년 만의 한국 방문’에는 사연이 있었다. 그를 다시 한국으로 불러온 건 <MBC 스페셜> ‘6월항쟁 30주년’ 다큐멘터리 팀이었다. 다큐 팀은 이방인의 눈을 통해 30년 전 한국 사회와 현재를 관통하는 작품을 만들 생각이었다. 킴 뉴턴 씨는 탄핵 집회가 한창이던 지난 3월 다시 한국을 방문해 역사의 현장을 취재했다. 예정대로라면 그를 주인공으로 삼은 다큐멘터리가 6월10일을 전후해 MBC에서 방영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 이 다큐멘터리의 방영 여부는 불투명하다. 제작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1노조, 김연국 위원장) 등에 따르면 상황은 이렇다. 6월항쟁 다큐 촬영이 한창이던 2월28일 보도본부장 김장겸씨가 MBC 사장으로 취임한다. 그리고 바로 이날 회사 측은 6월항쟁 다큐의 제작 중단을 지시한다.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던 김만진 PD가 ‘윗선’의 승인을 받지 않고 제작을 진행했다는 이유다. 하지만 1노조 측의 설명은 전혀 다르다. 지난 1월 담당 부장이 작성한 <MBC 스페셜> 방송 순서 표에는 ‘6월항쟁 30주년’의 방송 예정일이 기록됐다고 1노조는 주장한다. 윗선의 제작 승인 없이 방송표 작성이 이뤄질 리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방송 중단 지시가 킴 뉴턴 씨의 방한을 겨우 며칠 앞두고 내려졌다는 점이다. 이미 촬영 일정 조율은 물론 항공권 구매까지 이뤄진 마당이었다. ‘30년 만의 약속’을 깰 수 없었던 담당 PD는 제작을 강행했다. 그리고 대선 이후인 5월19일 김만진 PD는 회사로부터 감봉 1개월의 중징계를 받았다. 제작 중단 지시를 따르지 않고 제작비를 임의로 집행했다는 이유였다. 김 PD는 현재 다큐멘터리 팀을 떠나 외주업체 관리 부서에서 일하고 있다.
김만진 PD가 징계를 받던 날 MBC에서는 또 다른 기자와 PD 6명에 대한 징계가 내려졌다. <시사매거진 2580> ‘세월호, 1073일 만의 인양’을 제작한 조의명 기자는 세월호 인양 지연을 비판하는 인터뷰를 삭제하라는 윗선의 지시에 저항한 이유로 ‘주의’ 징계를 받았다. 지난해 <뉴스데스크> 인터뷰 조작 의혹을 제기한 김희웅 기자는 ‘출근 정지’ 20일, 외부 매체와 인터뷰한 송일준 MBC PD협회장은 감봉 1개월 처분을 받았다. MBC 보도를 비판하는 영상을 만들어 온라인에 올린 전예지·곽동건·이덕영 등 막내 기수 기자들에게는 근신과 출근 정지 징계가 내려졌다. 이들 모두 자사의 보도 태도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징계를 받았다.
6월 들어서도 김장겸 사장의 퇴진을 주장하는 사내 게시판 글은 대거 삭제되었고, 사내에서 김장겸 사장 퇴진 구호를 외치며 페이스북 라이브 방송을 한 김민식 PD에게는 6월14일 대기발령 조치를 내렸다. 정치권에서 MBC 경영진 퇴진 주장이 나오자 ‘방송 독립성 위기’라며 뉴스 보도를 통해 강력 반발하고 있다.
김장겸 사장 퇴진 주장 게시판 글은 대거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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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언론노조 MBC본부 제공 5월22일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 조합원들이 김장겸 사장의 부당 징계를 규탄하고 있다. |
최근 MBC에서는 새로운 ‘사건’이 하나 더 불거졌다. 6월11일 <시사매거진 2580>은 미국에 있는 김경준씨 인터뷰를 바탕으로 ‘BBK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를 방송했다. 이 방송은 최근 MBC ‘기류’에 비춰볼 때 다소 의외여서 적잖은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해당 방송을 제작한 박종욱 기자는 며칠 뒤 사내 게시판에 ‘<시사매거진 2580>을 살려주십시오’라는 장문의 글을 올렸다.
박 기자는 BBK 보도 제작 과정에서 윗선으로부터 적잖은 압박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해당 간부들은 “사기꾼의 말을 들어서 뭐 하느냐” “대법원 판결까지 받은 사람인데, 대한민국의 사법체계를 뒤흔들겠다는 것이냐” “김경준이 이야기하는 걸 우리가 왜 들어줘야 하냐. 억울하면 직접 해결하라고 해라”며 아이템 교체를 요구했다고 박 기자는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박 기자는 지난달 휴가까지 내고 자비로 미국에 건너가 김경준씨를 인터뷰했다. 물론 방송이 나간다는 보장은 없었다.
논쟁이 계속되던 중 돌연 5월 말 들어 방영 일정이 잡혔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었다. 최종적으로 보도된 방송은 김경준씨 인터뷰 내용이 상당 부분 사라지고, 취재 요청을 거부했던 이명박 전 대통령 측의 해명이 들어갔다. 박 기자는 해당 간부들을 향해 “2580이란 소중한 프로그램을 위해 전향적인 모습을 보여주시거나 결단을 내려주시기를 요청드린다”라며 글을 맺었다. 6월16일 현재 박 기자가 올린 글에 대해 회사 측은 어떤 대응도 하지 않고 있다.
미디어 비평 시민단체인 민주언론시민연합(민언련)은 6월9~10일 이틀 동안 7개 공중파와 종편의 뉴스 프로그램이 6월항쟁을 어떻게 다뤘는지 분석했다. 이에 따르면 모든 방송이 4~5건 관련 보도를 내보내는 동안 MBC는 6월항쟁 기념식 단 한 건만을 방송했다. 민언련은 MBC가 “군부독재를 타파한 민주주의 역사를 외면했다”라고 비판했다. MBC 한 관계자는 “새로운 경영진은 루비콘 강을 건넜고, 이를 지켜보는 구성원들은 안이해지거나 괴로움에 빠져 있다”라며 탄식했다.
6월10일 킴 뉴턴 씨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달한 편지의 내용은 이랬다. “3월부터 저는 이 다큐멘터리가 방영될 수 없게 한 ‘정치적 상황’에 대해 알게 됐고, 이 이야기가 대중에게 보이지 못하게 됐다는 것을 알고 슬픔에 빠졌습니다. (···) 언젠가 대한민국이 민주주의로 이르게 되는 길에 저의 이야기가 한국 사람들에게 공유되기를 희망합니다.”
참 괜찮은 아들이었다, 한열이는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씨는 지난 30년간 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를 이끌고 국가폭력에 저항하며 아들이 못 이룬 뜻을 이루기 위해 같은 길을 걸었다.
30주년을 맞은 1987년 6월항쟁의 도화선은 연세대 2학년 이한열의 죽음이었다. 그해 1월14일 서울대 3학년 박종철은 경찰의 물고문으로 숨졌다. 이한열은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6월10일)’를 앞두고 연세대에서 6월9일 열린 결의대회에 참여했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졌다. 스물두 살 아들을 떠나보낸 어머니 배은심씨의 삶도 달라졌다. 지난 30년간 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를 이끌며 국가폭력에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어머니’ 노릇을 해왔다. 6월항쟁 30주기를 맞아 서울 창신동에 있는 유가협 사무실에서 배은심씨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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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조남진 배은심 여사는 유가협을 이끈 이유에 대해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한열이를 좋아하고 한열이가 못 이룬 뜻을 이루려고 해서 나도 엄마로서 같은 길을 걸어왔다”라고 말했다. |
6월항쟁 30주년이 곧 이한열 열사 30주기인데.
한열이가 떠난 지 30년이 되도록 좋은 것을 보아도 좋은 줄 몰랐다. 물론 좋지 않은 것, 불의는 더욱 선명하게 보이더라.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한열이를 좋아하고 한열이가 못 이룬 뜻을 이루려고 해서 나도 엄마로서 같은 길을 걸어왔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진기자 네이선 벤이 당시 모습을 담은 사진 두 점을 이한열기념사업회에 제공했다.
아들이 쓰러지던 상황을 짐작만 했지 그런 사진이 남아 있을 줄 몰랐다. 보고 싶은 마지막 모습이었고(배씨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최루탄에 맞아 막 쓰러지는 순간을 생생한 컬러 사진으로 보니까 좀 충격을 받았다.
당시 이한열은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에서 27일간 사경을 헤매다 떠났는데?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 앞에서 매일 있다 보니 휠체어 타고 다니는 환자들을 자주 봤다. 그럴 때마다 “한열이가 의식이 돌아오면 나도 저렇게라도 휠체어 밀고 다니며 살려내야지” 다짐도 하고 빌었다. 그렇게 되길 간절히 소망했지만 아들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박종철 열사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1987>에 이한열 열사도 나온다던데?
배우 강동원이 이한열 역을 맡아 특별출연한다고 광주 집으로 찾아왔다.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의지가 강하더라. 꼭 한번 이한열 역을 맡아 잘 해보고 싶다고 하더라. 몸조심하면서 열심히 촬영했으면 좋겠다.
당초 이한열의 장지가 광주 망월동이 아니었다는데?
그때 장례위원들이 장례를 어떻게 치렀으면 좋겠느냐고 의견을 물었다. 한열이 아버지가 “연세대 뒷산에 올라가면 4·19 때 돌아가신 분 묘지가 있으니 한열이를 거기 묻어놓고 가자. 교문 밖으로 이한열 운구가 나가면 전두환 독재정권이 또 학생들을 죽일 수도 있다. 이런 희생은 우리 한열 하나로 족하다”라고 했다. 내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도저히 안 될 말이었다. 한열이가 보고 싶으면 찾아가서 무덤의 떼라도 만져보고 싶은데 만약 연세대 뒷산에 묻으면 아들 무덤의 풀도 흙도 못 만져보겠다는 생각에 반대했다. 내가 우상호 연세대 총학생회장에게 “한열이를 망월동에 보내자. 광주에서 고등학교도 나왔으니 망월동에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그 이튿날 “광주로 보내달라. 당신들이 안 보내주면 내가 아들 관을 머리에 이고라도 가겠다. 나는 그렇게라도 해야 살지 여기다 놔두고 못 산다”라고 한 내 호소가 신문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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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호국회의원 홈페이지 1987년 이한열 열사 49재 행사에서 당시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이던 우상호 의원(가운데)이 영정사진을 들고 서 있다. |
당시 우상호 의원과 배우 우현씨가 이한열 영정사진을 들고 함께 찍히기도 했다.
그 사진은 장례식이 아니라 연세대학교 안에서 연 49재 행사 때다. 총학생회장이던 우상호 의원이 한열이 영정을 들고 교문 밖으로 나가다 경찰에 연행됐다. 잡아갈 줄 알면서 독재에 그렇게 항거한 거다. 우현이도 총학생회에서 사회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배우 안내상도 연세대 동문인데 한열이가 그렇게 아프게 떠나니까 분노했던 것이지. 자주는 못 보고 우상호 의원 선거 기간에 사무실에 가서 두 배우를 만났다.
광주 망월동행에 대해 전두환 정권이 압박했을 것 같은데.
그때는 쉽게 망월동으로 갈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 부모가 아무리 데려가고 싶어도 마음대로 갈 수 없는 그런 세상이었다. 전두환 정권 자체가 광주에서 사람을 죽여놓고도 버티는데 한열이를 쉽게 망월동으로 보내줬겠나. 그때도 국민들이 망월동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장례식 때 서울시청 앞에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주었고, 또 광주까지 가는데 톨게이트마다 구름처럼 많은 사람이 나왔다. 광주 입구인 장성톨게이트부터 한열이 모교인 광주 진흥고등학교까지 광주 시민들이 거의 다 나와주었다. 한열이가 그나마 광주에 묻힐 수 있었던 건 국민 덕이었다.
한열이의 어릴 적 기억은?
아침에 등교할 때 자주 집에 뭘 놓고 갔다. 뒤늦게 필요하다고 전화하면 내가 택시 타고 학교에 갖다 주곤 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학생회장을 했다. 어려운 친구 준다며 도시락을 두 개 싸달라고 한 적도 있었다. 이런 아들을 보며 나는 마냥 좋았다. 책임감도 강하고 리더십도 좋고, 참 괜찮은 아들이었다.
남은 자녀들은 어떻게 지내나?
한열이랑 같이 자취했던 두 살 위 누나가 교사가 되었다. 누나가 한열이 옷에서 최루탄 냄새가 난다고 이야기해서 그때 한열이가 시위에 참가하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다. 그 누나가 동생을 그렇게 보내고 나서 안일하게 살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전교조 교사가 되어 해직됐다가 복직했다. 학교 다니면서도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일도 많은 거 같다.
아들을 떠나보낸 뒤 어머님의 인생도 바뀌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다른 세상을 살았다. 거리에서 살아온 세월이었다. 억울하고 분한 엄마가 나 혼자인 줄 알았는데 이 집(유가협 사무실)에 와서 저 많은 사진을 보면서, 한열이의 억울한 이야기를 다시는 안 해야겠다고 마음먹기도 했다(유가협 사무실 한편에는 열사들 사진이 걸려 있다).
유가협 회장을 맡기도 했다.
민주정부라면 민주화 과정에서 숨진 이들이나 군대 등에서 의문사한 이들의 명예 회복과 보상책을 내놔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유가협 회장일 때 1998년부터 422일간 국회 앞에서 농성을 벌여 ‘민주화운동 보상법’과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게 했다. 이제 우리들이 할 숙제는 죽어간 많은 사람들을 국가유공자, 민주유공자로 만드는 것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계속 반대를 일삼았는데 문재인 정부에 기대를 걸고 있다.
유가협을 이끌면서 가장 힘이 되었던 분은?
민주화운동의 대모이신 고 이소선 어머님이다. 내가 힘들 때 어찌 알았는지 이소선 어머니가 찾아와서 위로해주셨다. 돌아가셔서 답답하고 아쉬운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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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제30주년 6·10민주항쟁 기념식에 참석한 고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씨(맨 왼쪽)가 문재인 대통령 내외와 함께 앉아 있다. |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씨도 가끔 만나나?
박종철 아버지는 지금 부산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다. 허리를 다쳐 거동을 잘 못한다. 가서 보면 눈물이 나서 볼 수가 없더라. 촛불 항쟁으로 민주적인 대통령도 나오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데 6·10항쟁 기념행사에 같이 참석도 못하셨다.
지난겨울 촛불집회에 자주 나갔나?
서울에서 몇 번 나갔다. 예전 같으면 제일 앞에 앉았을 텐데 지금은 다리가 아파서 헤치고 나오기 힘들어 주변에서 지켜봤다. 처음 촛불시위 한다고 할 때는 백남기 농민 사건처럼 물대포가 나오면 어쩌나 걱정을 많이 했다. 촛불시위 자체가 평화적으로 치러지는 걸 보니 안심이 되었다. 한편으로 또 한열이 생각도 나더라. 최루탄이 없었으면 내 아들 한열이를 그렇게 안 보냈을 텐데. 촛불시위를 보며, 감사하고 여러 가지 희비가 엇갈리는 심정이었다. 그래도 대통령이 탄핵되고, 새 대통령이 뽑히는 등 촛불 승리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마음이 편하다.
문재인 대통령을 올해 5·18 기념식뿐 아니라 지난해 총선 때도 만난 것으로 아는데?
문 대통령이 작년에 국회의원도 당 대표도 아닐 때 광주 망월동에 내려왔다. 그때 한열이 묘를 쳐다보며 문 대통령이 “어머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나한테 묻더라. 그래서 내가 “망월동 옛 묘역도 5·18 국립묘지같이 국가유공자로 만들어주시고 이 사람들도 좋은 자리 가게 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망월동 옛 묘역에는 이한열 열사처럼 5·18 당시 희생자 외 민주 열사들이 상당수 묻혀 있다). 그런 문 대통령이 5·18 기념식에 참석해 연설했다. 참 감동스러웠다. 여러 사람이 울었다. 나도 울었다. 그런 연설, 우리는 처음 봤다.
이한열 세대가 우리 사회 중추가 되었는데?
그 시절 책임감이 강한 사람들이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잘하고들 있으니까 내가 특별히 그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것도 없다. 다만 학생운동 했을 때의 순수한 그런 마음으로, 그런 초심으로 각자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좋지 않을까 싶다.
수형자 박근혜는 자신이 폭압한 '운동권' 덕을 보고 있다

▲ 이석태 전 위원장. ⓒ프레시안(서어리)

▲ 이석태 전 위원장. ⓒ프레시안(최형락)
"잘 늙어가는 충실한 시민적 삶을 살아야 한다"

▲ 황인성 이사장. ⓒ바꿈

▲ 황인성 이사장. ⓒ바꿈

▲ 황인성 이사장. ⓒ바꿈

▲ 정대화 교수. ⓒ바꿈

▲ 각종 소송 자료. ⓒ바꿈

▲ 상지대에 설치된 천막농성장. ⓒ바꿈

ⓒ바꿈
"여성 몫은 '옥바라지'? 지금은 2017년!"

▲ 정연순 회장. ⓒ바꿈

▲ 정연순 회장. ⓒ바꿈

▲ 정연순 회장. ⓒ바꿈
"언론이 제대로면 나라가 함부로 되지 않는다"

▲ 정상모 평화민족문화연구원 이사장. ⓒ바꿈

▲ 언협의 정 이사장 석방 관련 논평.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한겨레 기자평의회 의결사항.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정상모 평화민족문화연구원 이사장. ⓒ바꿈
"내가 박근혜 선배입니다. 구속 선배"

▲ 이수호 이사장. ⓒ바꿈

▲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수호 이사장. ⓒ전교조 홍보영상 캡쳐

▲ 이수호 이사장. ⓒ바꿈

▲ 김인봉 대표. ⓒ바꿈

▲ 화염병을 즉석 제조했던 곳을 가리키는 김인봉 대표. ⓒ바꿈
“내일이면 알게 되리 역사가 어디로 흐르는가를”
1987년 6월9일 ‘국민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 참석했던 경영학과 2학년 이한열이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다. 그의 죽음은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혁명을 꿈꾸는 앙졸라와 마리우스 그룹의 합창, 장발장과 딸 코제트의 이중창, 거기에 테나르디에 부부의 우스꽝스러운 양념송, 혁명을 막으려는 경관 자베르의 독창이 이어지다가 그 모두가 한목소리로 어우러지는 대합창. “Tomorrow we’ll discover(내일이면 우린 알게 되리라) What our God in Heaven has in store!(하느님께서 그 보고(寶庫)에 무엇을 두셨는지) one more dawn(새벽이 한 번 더 오면) one more day(내일이면) one day more!(내일이면!).” 혁명 전야에 펼쳐지는 결의와 비겁, 용기와 도피, 사랑의 뜨거움과 이별의 차가움의 파노라마에 더하여 각양각색 사람들의 처지와 생각이 얼키설키 뒤엉켰다가 “내일이면 알게 된다!”로 합쳐지는 의미심장한 장면이었지. 오늘은 우리 현대사에서 “One day more!”를 부르짖는 듯했던 하루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해.
아빠가 대학에 입학한 건 1988년. 그 전해에 일어난 6월 항쟁 비디오를 보는 건 학생회의 주요한 교육 프로그램 중 하나였지. 1987년 6월10일은 야당과 재야 운동단체가 총집결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개최하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열리는 날이었어. 마침내 D-1의 날이 왔단다. 정문 앞에 나붙은 ‘결전 1일 전’. 더 이상은 이 정권과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는 이들의 각오가 그 획 하나하나에 담긴 듯 글씨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지. 내일. 내일이면 알게 될 것이다.
다음 날 6월10일 행사가 열릴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는 경찰의 원천봉쇄에도 상당수 인사들이 잠입해 있었고 경찰이 성당에 군홧발을 들이밀지 않는 한 원천봉쇄 속에서도 그 깃발을 가냘프게나마 올릴 예정이었어. 허약함에 비해 이 행사를 맞이하는 전두환 정권은 막강했으나 그 이상으로 유치했다.
6만 경찰을 총동원한 것은 기본, 전국 대도시의 도심은 ‘안드로메다 군단’ 또는 로마 병정이라고 불리던 녹색 제복의 전경들로 홍수를 이뤘지. 당시 시위 지도부는 6월10일 당일, 시민들에게 국기 하강식에 맞춰 경적 시위를 해달라고 제안해두고 있었는데 이에 정부는 서울 시내버스와 택시 회사 전화로 득달같이 전화를 돌린다. “경적기를 다 제거하시오. 이유 없소 다 빼시오.” 일반 승용차들은 어떻게 막았냐고? 경적을 울리면 경범죄로 5만원을 물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 검사들을 일선 경찰서에 배치하고 심지어 시위 현장에 나가서 진압을 독려할 것을 지시했으며, 도심의 고층 빌딩들에는 ‘학생들의 점거와 투신’을 예비한 대책 수립을 독촉했고, 데모에 참가할 것 같은 재야인사 수백명은 아예 집에서 한 발짝도 못 나오게 막았어. 그런 살벌한 6월9일이었다. 다음 날은 그들에게도 매우 중대한 날이었어. 집권당인 민주정의당의 대통령 후보가 선출되는 날이었거든. 만반의 준비를 끝낸 그들은 자신만만하게 얘기하고 있었어. “내일은 문제없어.”
6월9일 전국적으로 각 대학에서 ‘출정식’이 열렸어. 당시 아빠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청소 도구를 사러 나왔다가 학교 근처의 대학교로 올라가는 언덕길 어귀에서 한 대학생이 목이 쉬어라 외치고 있는 걸 보았어. 학교 정문은 까마득히 먼 언덕 위에 있었고 경찰들도 심심찮게 출몰하던 곳이었지만, 웬일인지 그는 핸드마이크를 홀로 들고 서 있었어. 그의 한마디는 아빠의 기억에 선연히 남았다. “이건 전두환이 죽느냐 우리 모두가 죽느냐의 싸움입니다.” 그리고 누차 강조하던 내일. 그리고 내일.
“전두환이 죽느냐, 우리 모두가 죽느냐”
그리고 그날 서울의 대다수 대학에서도 6·10 대회 참가를 결의하고 기말고사를 거부하는 학생집회가 열렸어. 연세대학교에서도 그랬지. ‘국민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학생 2000여 명이 몰려들고 학내 집회가 끝난 후 교문으로 진출했어. 그들이 내건 플래카드의 내용은 이랬지. “4000만이 단결했다. 군부독재 각오하라.” 당연히 최루탄이 터졌고 학생들은 학교 안으로 후퇴했어. 그런데 그 와중에 한 학생이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말았지. 경영학과 2학년 이한열이었다.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이한열을 도서관학과 학생 이종창이 부축하면서 진압 경찰을 바라보던 순간을 잡은 사진기자가 있었어. 로이터 통신 정태원 기자였지. 그러나 그 사진이 한국 현대사에서 지대한 의미를 획득한 건 로이터보다는 국내 언론에서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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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로이터 통신 정태원 기자가 찍은 이 사진을 <중앙일보>가 키워서 내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
그날 이창성 당시 <중앙일보> 사진부장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어. 자기 회사 기자들의 사진을 훑어봤는데 그다지 좋은 사진이 없었던 거지. 그는 로이터 통신에 사진 협조를 의뢰했고 표준 렌즈로 찍은 작은 사진 하나를 받게 돼. 바로 이종창이 이한열을 부축하는 그 사진이었지.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친구를 부여잡고 전경들을 응시하는 안타까운 젊은이의 눈빛과 복면에 가려진 (최루탄을 조금이나마 막아보기 위한) 입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을 응시하던 이창성 부장은 순간 역사적 결단을 내린단다. 정부에서 신문사에 보도지침을 내리고 어떤 건 빼고 어떤 건 넣고 기사 크기와 사진 게재 유무까지 결정하던 시기였지.
“이 사진을 키워서 낸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보안대에 끌려가도 내가 끌려간다.” 이렇게 중얼거리며 그가 책상을 쳤을 때, 이한열의 사진은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큰 언덕으로 솟아오르게 됐지.
‘최루탄을 맞은 연세대생이 사경을 헤매고 있다!’ 연세대학교는 학교 전체가 들고일어섰어. 공수부대, 해병대 출신을 선두로 한 예비역들이 군복을 입고 ‘전략적인’ 시위에 나섰고 여행 동아리, 종교 동아리 등 운동권과 별반 관계없던, 오히려 배타적이던 이들까지도 세브란스 병원에서 밤새워 이한열의 병상을 지키게 돼. 당시 세브란스 병원에 있었던 한 연세대 졸업생을 훗날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이런 말을 하더구나. “평생 처음으로 죽을 결심을 했어요. 그리고 전경이 들어오면 그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글거리는 잉걸불 같던 젊음들은 6월9일 밤과 6월10일 새벽을 두 눈 부릅뜨고 맞게 돼. “내일 두고 보자.”
6월9일 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사람 가운데에는 내무부 장관 고건도 있었다. 참여정부의 국무총리를 지내기도 했던 그는 치안 총책임자로서 6월9일 밤을 맞았지. 치안본부에서 밤을 새우며 상황을 주시하던 그에게도 당연히 이한열의 소식은 전달됐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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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87년 7월9일 서울시청 앞에서 치러진 이한열 열사의 노제에 시민 100만여 명이 운집했다. |
그해 여름은 무척 더웠단다. 한낮의 뜨거운 기운은 밤이 되어도 수그러들지 않았어. 아니 되레 끓어오르고 있었지. 1987년 6월9일 대한민국에서 잠 못 이룬 사람들은 모두 역사의 무대에 올라 있었지. 그리고 목청 돋워 노래하다가 대합창을 하게 됐을 거야. 서로 다른 의미로. “내일이면 알게 되리 역사가 어디로 흐르는가를.” 다음 날 대통령 후보가 될 꿈에 부풀어 있던 노태우씨부터 성공회 성당에서 안절부절못하며 6월10일을 기다리던 사람들, 세브란스 병원에서 ‘한열아 한열아’ 부르짖던 연세대 그림패 동아리 학생들, 혹여 내일 보안대에 끌려가더라도 의연해야지 다짐했을 <중앙일보> 사진부장, 내무부 장관 고건, 그리고 내가 봤던 핸드마이크의 대학생까지. 그들 모두가 합창하고 있었어. “내일이면. 내일이면. one day more.”
"촛불광장에 페미니스트가 있었음을 기억하라"

▲ 김금옥 센터장. ⓒ바꿈

▲ 김금옥 센터장. ⓒ바꿈

▲ 김금옥 센터장. ⓒ바꿈
"그날 이후 '개똥 치우기' 보고서가 사라졌다"

▲ 박진도 이사장. ⓒ바꿈

ⓒ연합뉴스

▲ 박진도 이사장. ⓒ바꿈
6월항쟁의 거름은 '민중문화 운동'

▲ 임진택 명창. ⓒ바꿈

▲ 임진택 명창. ⓒ바꿈

▲ 임진택 명창. ⓒ바꿈
아아, 사람들이여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
1986년 봄, 한 달 간격으로 서울대생 네 명이 독재에 항거하며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죽음을 지켜본 문익환 목사는 통곡하듯 이들의 이름을 불렀다.
1980년대에 서울대학교에 입학한다는 건 개인의 영광이요 가문의 기쁨이었고 이웃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수많은 서울대생이 장밋빛 미래를 버리고 가시밭길을 택했으며 죽음으로 독재에 항거했다는 사실 또한 분명히 기억해주었으면 좋겠어. 1987년 7월 고 이한열 학생 장례식에서 문익환 목사가 목메어 부른 ‘열사’ 26명 가운데 서울대생이 아홉 명이나 되거든.
그 가운데 네 명은 1986년 봄, 한 달 간격으로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김세진·이재호·이동수 그리고 박혜정. 먼저 1986년 4월28일 전방 입소(전두환 정권 때는 대학생들을 의무적으로 군부대에 입소하여 ‘교육’을 시켰단다)에 반대하여 시위를 벌이던 도중 서울대학교 자연대 학생회장 김세진과 정치학과 83학번 이재호가 스스로 몸에 불을 댕겼어. 그런데 김세진의 경우 부모에게 이런 편지를 남겼어. “충격이 크시겠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아주 여유 있는 마음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주도하면서도 아주 열심히 싸울 것이고, 성실히 고민할 것입니다. 경찰에게는 지난 수요일부터 쭉 집에 들어가지 않은 것으로 얘기해주세요.” 즉 분신을 치밀하게 준비하고 결행한 건 아니었다는 것이지. 하지만 무슨 사연인지 두 젊은이는 친구들의 눈앞에서 불덩이가 되어 쓰러졌어. 이윽고 1980년대 내내 범상치 않았던 5월이 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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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1988년 4월 서울대 도서관 앞에서 서울대생 김세진·이재호 열사 2주기 추모식을 하고 있다. |
1986년 5월20일 서울대 오월제에 문익환 목사가 찾아온다. ‘광주항쟁의 민족사적 재조명’이라는 강연을 하기 위해서였지. 김세진·이재호 학생에 대한 묵념 후 강연을 시작하려는데 학생회관 4층 옥상에서 날카로운 구호 소리가 들려왔어. 원예학과 83학번 이동수였지. 그는 연신 “폭력경찰 물러가라, 전두환을 처단하자” 외치고 있었지. 그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 중 상당수는 또 한 번의 분신 사태가 일어날 거라는 걸 직감했다고 해. 본능적으로 사람들이 “안 돼!” 외치는 가운데 이동수는 온몸이 불덩이가 돼 땅으로 떨어져 내렸어. 그는 운동권 활동을 제대로 한 적이 없는 학생이었어. 오히려 81학번 선배들한테 몰매까지 맞은 적이 있다고 했지. 삼수생으로 나이가 81학번 또래였던 그가 선배들에게 존댓말 쓰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야(<서울대저널> 제141호 중 인용). 이른바 운동권 조직의 일원도 아니었으나 뒤틀린 나라에 분노하고 정직하게 항거했던 한 청년은 스스로 생명을 거뒀다. 그의 유서 중 인상 깊은 한마디. “‘아니오’라고 할 수 없을 때 인간은 노예가 된다.”
눈앞에서 사람이 불타 떨어지는 걸 본 서울대 학생들은 걷잡을 수 없이 분노했어. 그때 도서관에는 한 학생이 뛰어 들어와 열람실 안의 학생들에게 이렇게 부르짖었다고 해. “사람 죽었다 이 자식들아. 나와서 싸우자. 안 싸우겠으면 나와서 구경이라도 해라.” 운동권이든 아니든 전두환 정권의 야만에 분노하고 있던 서울대생들은 도서관과 강의실을 박차고 나왔어. 돌을 던지고 경찰과 육박전을 벌이면서도 많은 학생들은 울고 있었다. 그 가운데 국문학과 83학번 박혜정도 있었어.
용기 없음을 자책하던 젊은이는…
박혜정의 아버지는 군인 출신이었다고 해. 공식적으로 연좌제가 폐지되긴 했으나 데모하는 자식을 둔 군인, 공무원 아버지는 그 자리를 지키기가 쉽지 않았어. 그래서 “네가 데모하면 우리 집안이 망한다”는 게 현실적 압박이던 때였지. 박혜정 역시 엄한 집안 분위기에서도 데모에 종종 참여했지만 본격적으로 운동에 뛰어들지는 않았다고 해. 가족과의 갈등이 엄청났을 것이고, 본인이 가꿔온 문학도로서의 꿈도 소중했을 테니까. 그녀는 동짓달 그믐밤같이 날선 독재 치하의 암흑과 제 몸을 불태워 발하는 순백 사이의 회색지대에 남아보려고 애썼어. 하지만 이동수가 불덩이가 되어 떨어지는 모습을 본 그녀 역시 울면서 돌을 들었다. 용기 없음을 스스로 질책하던 한 젊은이의 폭발이자 외면할 수 없는 전쟁에 참전하겠다는 선언이었지. 그날 그녀는 평생 처음 외박을 했고 이후 버스를 탔지만 집으로는 돌아가지 않았고 며칠 뒤 한강에서 시신으로 발견됐어. 그녀가 남긴 유서에는 헤아릴 수 없는 감정들이 버무려져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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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1987년 7월8일 경남 진주교도소에서 가석방된 문익환 목사. |
“떠남이 아름다운 모든 것들. 괴로운 척, 괴로워하는 척하지 말 것. 소주 몇 잔에 취한 척도 말고 사랑하는 척. 그래 이게 가장 위대한 기만이지. 사랑하는 척. 죽을 수 있는 척. 왜 죽을 수 없을까? 왜 죽지 않을까? 자살하지 못하는 건, 자살할 이유가 뚜렷한데 않는 건 비겁하지만 자살은 뭔가 파렴치하다. 함께 괴로워하다가 함께 절망하다가 혼자 빠져버리다니. 혼자 자살로 도피해버리다니.”
본인에게 던지는 불평 같기도 하고 김세진과 이재호와 이동수에게 던지는 비명 같기도 하지. 자살할 이유가 뚜렷한데 하지 않는 건 비겁하다고 규정하면서도 외려 그 죽음을 원망하고 있으니까. 차라리 당신은 죽어서 속 편하지 않으냐고, 당신은 이제 이 고통과 절망에서는 차라리 벗어나지 않았냐고 토로하는 것 같으니까. 그런데 그녀의 유서는 그 후 단호해져.
“반성하지 않는 삶. 반성하기 두려운 삶. 반성은 무섭다. 그래서 뻔뻔스럽다. 낯짝 두꺼워지는… 아파하면서 살아갈 용기 없는 자, 부끄럽게 죽을 것. 살아감의 아픔을 함께할 자신 없는 자. (중략) 이 땅의 없는 자 억눌린 자 부당하게 빼앗김의 방관, 덧보태어 함께 빼앗음의 죄. 더 이상 죄지음을 빚짐을 감당할 수 없다. 아름답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부끄럽다. 사랑하지 못했던 빚 갚음일 뿐이다.”
같은 학번이었던 이동수의 살이 타들어가는 냄새를 맡으면서 법전을 파고들고 토플 단어를 외우는 뻔뻔함을 가지지 못했고, 그 죽음에 아파하면서 몸 바쳐 살 용기는 한술 부족했던 청년, 숱한 사람들의 목숨을 속절없이 앗아가던 역사에 슬쩍 다리만 걸칠 깜냥도 없었을 뿐 아니라 그런 비겁함을 ‘함께 빼앗는 죄’로 규정했던 젊은 여학생의 발길은 결국 한강 다리로 향하고 말았어.
1986년 봄의 뼈아픈 죽음들 앞에서 가장 충격을 받았던 사람이 바로 문익환 목사였어. 이동수가 떨어져 죽던 바로 그날, 아들이 서울대 강연을 간다는 말을 들은 문 목사의 모친 김신묵 여사는 이렇게 애타게 호소했다고 해. “일제 때 독립운동하던 사람들이 단 한 사람도 그렇게 죽는 거 봤니. 네가 가서 꼭 부탁하거라. 제발 죽지 말고 싸우라고.” 그러나 그 말을 미처 하기도 전에 일은 벌어져 이동수가 죽고 박혜정이 스러졌다. 이후 문 목사는 스스로 체포되다시피 감옥으로 갔고, 1년 뒤 6월항쟁을 거쳐 정권의 항복 선언이 있은 후 7월8일 석방됐어. 그리고 바로 다음 날인 7월9일 이한열의 장례식에 달려가 부르지 못한 이름들을 통곡처럼, 비명처럼 불렀던 거야. 김세진·이재호·이동수·박혜정, 그 험난했던 1986년 서울대생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문익환 목사는 어떤 심경이었을까. 아빠는 상상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 아파오는 가슴을 쥐고 박혜정의 시를 노래로 만든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를 읊조릴 뿐이야 “아아 사람들이여.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
※ 제502호 ‘전두환 아저씨 나는 왜 죽었나요?’의 ‘전두환씨가 고향을 방문해서 모교 체육대회에 가면 그 앞에서 모교 학생들이 큰절을 올린다지요’와 관련해 전씨에게 절을 올린 이들은 대구공고 재학생이 아니라 일부 동문이라는 지적이 있어 이를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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