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제정세 칼럼

6월 항쟁 30주년 특집 인터뷰

일취월장7 2017. 7. 6. 10:41


6월 민주항쟁 30주년에 돌아보고 내다보며

[특별 기고] 6월 민주항쟁 30주년을 맞아


1. "내 탓이요" 자세 필요

1987년 6월 항쟁 전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태전개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인 필자가 발제한다는 게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내 탓이요"라는 심정으로 우리의 자화상에 엄정한 잣대를 들여 대보자는 심경으로 받아들였다. 좀 더 나은 우리의 미래를 기약하자면 "내 탓"부터 해야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2. 87년 6월 항쟁 이전의 상황  

1972년의 유신, 전두환 신군부 쿠데타, 광주학살, 5공 군부독재가 극심했던 터라 민주 대 반민주 대결은 너무 당연했고 통일 대 반통일 구도 역시 도식적이었다. 1960년 4월 혁명이 5.16군사쿠데타로 무산된 뒤 계속된 군사독재-유신체제 폭압과 야당에 대한 실망 때문에 역설적으로 재야민주화 운동에게 기대가 몰렸고 성장하기 시작했다. 80년 광주학살 이후, 한국의 군사독재와 미국에 대한 반발이 가져온 체제 거부의식이 학생운동 속에 사회주의권에 대한 편향으로 나타났던 것도 사실이었다. 동시에 민족해방론(NL)이 학생운동 속에서 북한의 정통성-정당성을 인정하는 경향을 보였던 것도 사실이었다.

많은 제적학생 청년들은 민족해방(NL)론 의식을 지닌 채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동시에 러시아혁명 초기 볼세비키 이론이 도입되어 노동해방(PD)론으로 영향을 미쳤다. 청년학생운동의 동향은 사회운동, 종교운동, 지식인운동, 문화예술운동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전두환 군사독재의 야만적 탄압이 있었다고 해도 청년학생운동이 분단 상황에서 급진화하는 것은 우려할 일이었다. 비록 청년학생들의 반발과 비난을 듣더라도 중견 이상 선배들의 설득과 견제가 필요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민주항쟁의 지속-유지에만 급급했지 항쟁 성공 이후의 청사진 논의에는 소홀했다.  

재야민주화운동에서는 김대중-김영삼 중심으로 직선제 쟁취를 통한 야권 정권교체만을 대안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대세였다. 재야 사회운동이 올바른 방향성을 가질 때라야, 조직적 힘을 발휘할 때라야 야권의 분열과 파쟁을 막을 수 있다는 인식에는 이르지 못했다. 70년대 이래 다수 재야진영은 김대중 세력과 여러 시국사건으로 함께 고초를 치르면서 심리적 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NL, PD 이론과 논쟁 그리고 직선제 개헌을 통한 정권교체론만 있을 뿐 실현가능한 재야 시민사회의 독자적 대안, 특히 직선제 개헌을 통한 정권교체의 구체적 내용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필자는 1986년 인천민주항쟁을 배후조종했다는 혐의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탄압당할 때 그 사무처장으로 수배 당했다가 남영동 대공수사단에 체포되었다.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된 가운데 대공수사단에서 고문살해당한 고 박종철군의 죽음이 은폐조작되었다는 것을 감옥 밖으로 알려 6월항쟁의 도화선에 불을 지핀 일이 있었다. 당시 의로운 교도관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서 6월민주항쟁에 불씨를 살릴 수 있었다. 동아일보에서 자유언론운동했다가 유신독재체제의 탄압으로 해직기자가 됐지만 기자의 소임을 감당한 것으로 생각했다.
  
3. 6.29선언으로부터 87년 13대 대선-총선 패배까지

전두환-노태우 신군부집단은 3김이 모두 대통령에 입후보할 수 있는 기본전제인 대통령 직선제에 양보하면서 다른 모든 것에 대한 통제권은 그대로 장악했다. 6.29선언이 바로 그 내용이었다. 신군부를 비롯한 기득권세력은 1960년의 4월 혁명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이 정통성과 정당성에서 열세에 몰려 자신들이 정권을 잃게 될 경우, 사회개혁의 파도에 떠밀려 해방 직후부터 유지해온 특권구조를 잃게 될 것이라고 긴장했다.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민주화운동 진영은 비록 민주항쟁을 통해 군부세력을 거세하지 못한 채 제한된 항쟁의 성과 위에서 민주화를 진행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정권이 대선과 총선을 관리하는 ‘과도정부’ 역할을 하도록 용인한 것은 최대의 실수였다. 전두환의 퇴진을 관철할 때까지 양김의 연대를 유지하도록 강제했어야했다. 6.29선언이 있자 직선제 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는 양김의 철수와 함께 텅 빈 집이 되었다고 했다. 양김의 분열이 맹렬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이른바 재야 민주화운동 진영도 양분되어갔다. 비판적 지지(김대중 지지)와 후보단일화(김영삼 지지) 그리고 독자후보 진영으로 신속히 분열했다.  

우선 김영삼 중심의 통일민주당이 김대중 지지 세력인 평화민주당의 분열로 양분되었다. 전두환-노태우 세력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달성되는 순간이었다.

재야 민주화운동 세력의 주력은 김대중을 지지했다. 야당을 분열시켰다는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노태우-김영삼-김종필-김대중 4자가 입후보해야 승리할 수 있다는 ‘4자입후보 필승론’을 내세웠다. 그 논리는 경북, 경남, 충청, 호남 4대 권역으로 나뉘어 대결하면 단결력이 우세한 호남이 승리할 수 있으리라는 예상이었다. 그러나 양김의 분열로 사기가 떨어지고 실망한 야당 지지자들과 젊은 유권자들은 패배를 예감하고 선거를 외면하고 있었다. 대선이 끝날 즈음 여권의 부정선거 시비가 일어났지만 국민여론이 외면했다. 양김과 민주화운동 진영이 반쪽이 났는데 선거관리를 맡은 과도정부 전두환 정권이 부정선거를 저지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국민은 정권교체의 기회를 줘도 분열을 일삼는 야당과 민주세력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13대 대선으로 한국은 정확하게 네 조각으로 분열했다. 이 분열 위에 소선거구제 국회의원 선거로 다시 분열을 제도화했다. 이렇게 지역분열구도를 완성했다. 4월 혁명이 5.16군사쿠데타로 무산된 뒤,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 26년 동안 온갖 희생과 투쟁으로 성취한 6월 민주항쟁의 결과를 대선-총선 패배와 지역분할구도로 귀결시켰다. 87년 대선은 다음과 같은 중대한 후유증을 남겼다. 1) 그동안 위태롭지만 하나의 대오를 이뤄 투쟁해왔던 민주화운동 진영이 영호남, YS-DJ 진영으로 분열했다. 그리하여 급진세력을 제어할 힘을 잃었다. 2)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부와 기득권세력의 주요 보루인 영남에서 민주개혁 세력이 주도권을 획득할 기회를 잃게 만들었다. 3) 7~80년대 동안 제도 야권에서 주도권을 장악해왔던 YS가 영남에서마저 기반이 흔들리자 여당인 민정당과의 합당을 모색하게 되었다. 4) 군부 기득권세력이 다시 쿠데타로 집권할 가능성은 사라졌지만 냉전 기득권의식이 잔존할 수 있는 토양이 유지되었다. 

4. 6월 민주항쟁 승리와 정치적 패배 

필자는 1987년 13대 대선 패배를 경북 김천교도소에서 맞았다. 함께 수감되어있었던 청년학생 출신 수감자 40여명은 분노와 허탈 속에 빠졌다. 그들은 맨 주먹으로 감방의 시멘트벽을 쳐서 살갗이 벗겨지곤 했다. 이렇게 6월항쟁 승리의 성과는 배신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더 두려운 것은 이들 청년들도 감옥 안에서 NL과 PD 논쟁을 벌이면서 한 치의 양보 없이 분열하고 있었다. 양김의 분열과 다름없이 이들 청년들의 분열도 미래 불안의 불씨로 떠오를 것을 필자는 예감했다. 필자도 노태우의 대통령 취임으로 특별사면되어 석방되었다. 바깥세상은 이미 13대 총선 열기로 달아올라 있었다. 아직 대선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던 학생들과 노동자들은 분신항쟁으로 맞서고 있었다. 석방된 필자는 이들 분신 사망한 학생-노동자들의 장례 위원장 노릇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러나 더 곤혹스런 것은 장례식에 김대중, 김영삼 야당 지도자들이 참석하는 장면이었다. 자신들의 분열과 패배로 그 젊은이들이 세상을 등졌다는 것에 참회의 뜻을 표하는 것이기보다는 재야인사들로부터 13대 총선의 지지를 얻기 위해 참석하고 있다는 점이 참기 힘든 모욕으로 생각되었다.

13대 총선은 전 국민을 4등분으로 쪼개놓은 지역분열 그대로 여소야대, 즉 여당인 민정당보다는 김대중-김영삼-김종필의 야권이 다수를 차지하는 것으로 낙착되었다. 이 여소야대가 6월 항쟁의 성과로 선전되기도 했다. 이른바 국회의 여소야대 구도에서 거둔 성과로 전두환을 비롯한 5공 군부세력에 대한 ‘광주청문회’가 열렸다. 노태우 세력는 전두환이 주도한 광주학살에 대한 면죄부를 노렸으며 청문회를 계기로 5공 신군부 세력 속에서도 전두환-노태우 세력의 분화가 일어났다.  

국제적으로는 소련의 고르바초프 정권 등장이후 미소 양대 강국 사이에 진행된 데탕트, 탈냉전사태는 한반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88년에는 서울올림픽에 소련과 중국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이 참여했고 북한이 외교적 고립을 겪는 계기가 되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 한국은 수세적이었던 남북관계에서 북한의 연방제 안에 대해 국가연합제 안에 근거해서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제안했다. 노태우 정권은 남북고위급회담을 갖고 남북관계의 기본지침이 된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에 합의했다. 이처럼 남북관계가 순항할 것이 예상되는 가운데 소련과 중국이 남한과 외교관계를 수립했고 남북한은 1991년 유엔에 동시에 가입했다. 그러나 소련과 중국이 남한과 수교하는 것을 전제로 미국과 일본도 북한과 수교할 것을, 다시 말해서 4대국교차승인을 할 것으로 기대됐으나 미국과 일본은 북한을 인정하지 않았다. 북한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기 시작했다. 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을 붕괴시켰듯이 북한에 대해서도 체제붕괴를 기도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북한은 핵개발에 착수했다. 다시 한반도에 전쟁위협이, 그것도 핵전쟁위협이 시작되었다. 

노태우 정권의 등장으로 위기감에서 벗어난 기득권세력은 88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러시아-중국을 비롯한 사회주의권 국가들과의 외교관계 수립, 수출경제의 비약적 확대, 남북관계에서의 우월적 위상 확보에 고무되자 두 개의 전선에서 공격적 입장으로 선회를 시도했다. 첫째, 여소야대의 의회구도를 만들어 보수대연합을 통한 기득권세력의 확대를 시도, 민주화운동으로 성장한 민주진보세력의 확장을 차단하고자 했다. 13대 총선에서 김대중 평민당에 이어 제3당으로 추락한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은 6월 항쟁 이전의 야권 주도세력의 위치를 당시의 정치구도에서는 실현할 수 없는 처지였다.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3당통합을 통해 여권 보수대연합에서 정권장악을 시도하려했다. 첫째, 거대 민주자유당의 출현은 민주화운동으로 제기되었던 개혁-진보 의제의 후퇴를 강요했고 보수-공안세력의 재강화를 가져왔다. 둘째, 남북관계에서도 세계유일 초강대국으로 등장한 미국의 강경노선에 맞춰 점차 대북강경노선이 강화되었다. 전쟁이 아닌, 군비경쟁과 외교를 통해 소련방과 동구 사회주의권 국가들을 해체시킨 미국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배경으로 관철시켜나갔지만 북한에 대해서는 예외적으로 봉쇄노선을 강요했다.  

5. 6월 민주항쟁과제, 촛불시민혁명으로 계승 

1997년의 김대중 정권과 2002년의 노무현 정권, 두차례 민주정권 집권은 남북관계와 내정개혁에 진전을 보이는 듯 했지만 집권경험의 부족과 극우보수진영의 반격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곤 했다. 그래도 노무현 정권으로의 계승은 김대중의 노련한 국정운영에 대한 평가였다고 보겠다. 노무현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렸다. 그의 진솔한 품성에 대한 대중적 애정이 젊은 세대들 속에 깊이 뿌리박기도 했지만 국정운용의 미숙성은 깊은 상흔을 남겼다. 그러나 민주정권 10년이 지나고 이명박-박근혜 두 보수정권은 김대중-노무현 두 개혁 진보정권의 모든 치적을 부정하고 지우는데 노력을 경주했다. 남북관계의 파탄과 부의 편중에 따른 사회불안의 극대화로 나타났다. 최순실 국정농단과 부정부패의 만연은 2016~17년의 촛불시민혁명으로 나타나 박근혜의 탄핵과 구속, 문재인 개혁진보정권의 등장으로 귀결되었다. 1600여만 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촛불시민혁명은 비폭력평화운동으로 전개되어 전 세계가 놀라고 찬탄하는 사회운동으로 기록되었다. 우리에게 이 같은 능력이 있다는 것에 우리 자신을 따듯한 눈으로 평가할 여유가 생겼다. 부상자 한 명, 구속자 한 명 없이 권력자를 권좌에서 내려오도록 만든 시민혁명이 성공했던 것이다. 아직도 진행중인 이 시민혁명이 어떻게 매듭지어질 것인지 세계가 우리들과 함께 지켜보고 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과제를 2017년 평화시민혁명이 이어받아 실현하고 있는 중이다. 개헌과 선거법개정을 비롯한 제도개혁도 중요한 과제다. 

무엇보다 중요한 흐름은 6월 항쟁 때와는 달리 동아시아에서는 현재 세력변환이 진행 중이다. 미국의 일극체제가 다극체제로 진행 중이며 분단된 한반도의 남북도 외세에 의해 일어났던 분단을 어떻게 남북 스스로의 노력으로 극복해 나갈까 본격적으로 고민하고 있다. 북핵 위기를 대결과 전쟁 없이 해소해 나가는 지혜가 무엇보다 가장 긴요한 지혜일 것이다. 일제 식민지배, 해방과 분단과 전쟁, 독재와 민주화와 산업화--지난 한 세기 이상 겪은 고난과 담금질이 강인한 인내와 지혜를 우리로 하여금 터득하도록 만들었다. 지난 촛불시민운동의 비폭력 평화시민혁명이 그것을 보여주었다.   

이부영 동아시아평화한국위원회 운영위원장은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도 함께 맡고 있습니다.  



시민들의 '에로스'가 민주주의를 만든다

[6월항쟁 30주년 특집좌담] 2017년에 6월항쟁을 말하다
2017.06.22 15:17:45

6월민주항쟁 30주년, 그 의미를 찾는 여정을 정리하기 위해 '6월민주포럼'과 (사)'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이 좌담을 준비했다. 김중배 대기자(당시 50대, <동아일보> 논설위원), 김정헌 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당시 40대, 화가), 박석운 진보연대 대표(당시 30대, 노동운동가), 전민용 전 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장(당시 20대, 치과대학생),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박영민 바꿈 활동가가 좌담에 참여했다. 2017년을 기준으로 80대에서부터 20대까지, 세대를 막론한 다섯 패널이 백승헌 변호사('바꿈' 이사장, 당시 변호사 2년차)의 사회로 2시간 동안 '6월항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백승헌(변호사, 이하 사회) :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먼저 6월항쟁 하면 뭐가 떠오르는지. 사적 체험과 사회적, 역사적 체험이 만나는 지점이 어디인지부터 이야기 나누었으면 한다. 

왼쪽부터 백승헌 변호사, 박영민 바꿈 활동가, 김중배 대기자, 김정헌 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전민용 전 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장, 박석운 진보연대 대표. ⓒ바꿈


30년 전 6월, 그날들의 기억 

박석운(진보연대 대표, 이하 박석운) :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거대한 성과, 위대한 승리를 했다는 점이다. 6월항쟁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7, 8월 노동대투쟁으로 이어지는 정치사회적 공간을 열고, 이어졌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권교체에 실패함으로써 '죽 쒀서 개줬다'는 의미도 있다.(웃음) 

김정헌(화가, 이하 김정헌) : 광장에 모였던 것, 특히 故 이한열 열사 장례식 때 제일 많이 모였던 것 같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구나 하는 사실에 굉장히 흥분했었다. 또, 6월항쟁에 미술이 많이 관여를 했다. 최민화 작가의 '이한열 부활도'가 이한열 열사 장례 행렬 가운데에 딱 놓이고, 만장이 일렬로 쫙 나오는 장면이 두고두고 생각난다. 그때 광장에 모였던 체험이 2017년 촛불항쟁까지 온 게 아닐까 한다. 

전민용(건치신문 대표, 이하 전민용) : 치과대학을 다닐 때였다. 시험을 6월10일 무렵까지 본 것 같은데, 그 다음부터는 시험 거부를 결의하고 거리로 나갔다. 의대, 치대생들이 함께 부상자들을 응급 치료하는 길거리 의료팀을 구성했다. 의료인가운을 입고 있으면 어디든 갈 수가 있으니까 그 중에 일부는 연락을 담당했다. 며칠 지나니 가운 입은 사람도 (통행이) 허용 안 되고, 잡혀 가고 그랬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6월 말 무렵에 경찰들도 거의 손을 놓고 집회를 막지 않아서 거리 집회 후 대학로 같은 곳에서는 차량 통행이 안 되고 군중들이 2~30명 씩 모여 길거리 토론회가 열리곤 했다. 거리에서 시국토론을 하는 것을 그 이전까지는 상상도 못했다. 그런 것들이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세상이 바뀌는구나….  

김중배(전 MBC 사장, 이하 김중배) :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이여' 칼럼을 쓰기 전에 사람들이 그렇게들 많이 전화를 했다. 말을 하기 전에 자꾸 운다, 통곡을 하면서. 그런가 하면 칼럼을 내보내고 나니까 영감들이 계속 전화를 했다. 그때는 SNS 없이 '전화부대'라는 게 있었는데, '빨갱이 새끼 하나 뒤진 걸 가지고…'라며 정반대로 나왔다.

전민용 대표가 말씀하니, 6월26일(국민평화대행진)이 상당히 셌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사망한 박채라는 친구하고 돌아다니는데, 최루탄이, 최루탄 폭격이 맹렬했다. 쫓아다니다보니까 좀 피곤해서, 쉬려고 이렇게 자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내가 원래 까무잡잡한데, 의대생들이 보더니 "저 양반이 변고가 났나" 해서 "선생님, 괜찮습니까?" 하는 거다.(웃음) 지금도 선하다. 

또, (최루탄 때문에) 눈물이 나고 하니까 건물 화장실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잔뜩 있다. 전경들도 들어온다. 그러면 전경들이 그런다. "선생님들, 이렇게(눈 부미면서) 씻지 마세요. 물 뿌리세요." 

▲ 국민평화대행진. ⓒe영상역사관


이 말씀을 장황하게 드린 이유는, 일련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학자들이 말하는 에로스효과(Eros Effect)라고 할까. 사랑과 자유와 연대, 공감, 감수성 이런 것이, 말을 나누지 않았더라도, 서로 모르는 사이라고 할지라도 (생긴 거다). 그 연장 확대판이 촛불이라고 생각한다.

김정헌 : 문화예술 쪽에서는 그때가 제일 활발하게. 우리가 그때 막 만들어놓은 '그림마당 민'이라는 전시장이 있었다. 거의 처음하다시피 한 전시회가 '반고문전'인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나자마자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있나! 하고 '반(反)고문전'을 열었다. 박불똥이라는 작가가 전경들이 전두환을 붙잡아서 연행하는 그림을 그려서 붙여 놨다.

종로경찰서 대공과와 정보과가 항상 전시장을 드나들며 감시했는데, '반고문전'이 열린다니까 들이닥쳐서 압수해 가려고 했다. 결국 몇 명이 연행당하고, 작품을 자진 철수하는 조건으로 해서…전시를 며칠 못하고 문을 닫고 끝냈다. 

또 이애주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부터 해서 그때 활약들을 했다. 이애주가 춤을 췄다. 문화예술이 그때를 전후해서 막 폭발적으로 꽃을 피웠다. 문화예술 계에서는 6월항쟁이 아주 기폭제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사회 : 저도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당시 2년차 변호사였다. 변호사들이 해방이후 처음으로 변호사 이름을 걸고 집단적으로 거리시위에 나섰고, 그러한 활동이 나중에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결성으로 이어졌다. 개인적으로는 그 시위에서 최루탄을 맞아서, 수포로 조금은 고생했고 그 상흔이 오랫동안 남아 6월을 기념하기도 했다(웃음).

박영민(세상을바꾸는꿈 활동가, 이하 박영민) : 중학생 때 역사책에서 배운 게 기억이 난다. 역사와 관련된 책에는 다 나오는데, 6월항쟁만 단독으로 나오기 보다는 3.1운동부터 시작해서 이 땅에 이런 항쟁이 있었다는 그런 걸 가르쳐 준다. 6월항쟁에 대해 이렇게 길게 고민해본 건, 6월항쟁 30주년 특집 인터뷰를 하면서 사실상 처음이다.

촛불집회 때문에 6월항쟁이 더 새롭게 다가오는 지는 사실 잘 모르겠지만, 선생님들 뵙고 인터뷰를 하려고 조사를 하면서 더 느껴지는 게 있다. 대학에서 북한학을 전공했는데, '과정으로서의 통일'이라는 말을 쓴다. 통일이라는 것을 하나의 사건이 아닌 통일로 가는 노력 전체, 과정 전체를 통일로 봐야 한다는 의미다. 6월항쟁 역시 그렇게 다가왔다. 항쟁의 당사자였던 선생님들이 6월 어느 날에만 운동을 딱 하고 끝낸 게 아니었지 않나. 과정으로서 항쟁이 뭔지 최근에 고민을 좀 하는 것 같다. 

김중배 : 6월 10주년 때(1997년) 서울대에서 강의를 했는데, 서울대 학생들에게 6월항쟁 이야기를 했더니 모르는 애들이 많았다. 

박석운 : 그래서 교과서가 중요한 것이다. 때문에 저들이 교과서를 바꾸려 하는 것이고. 정권이 바뀌고 교과서가 바뀌면서, 그 뒤 세대는 6월항쟁에 대해 알게 됐다.

사회 : 결국 체험이 어떻게 전승되느냐의 문제인데, 과거를 어찌 기억하는지와 현재와 연결되는 강도가 현실을 끌어가는 힘이 된다고 생각한다. 지금 나에게, 혹은 우리 사회에 6월항쟁은 어떤 의미로 남아있다고 보시나. 

ⓒ바꿈


30년 후 되돌아본 6월항쟁 

김정헌 : 개인적으로는 미술의 밑받침이다. 88년에 개인전을 했는데 작가들은 그 전부터 준비를 한다, 1년 전부터. 그때 일기식으로 쓴 노트를 보니, '반고문전' 준비에서부터 '이렇게 내가 농촌하고 관련된 그림을 편하게 그려도 되는가' 이런 자각심도 생겼더라. 일종의 문화적인 각성 같은 걸 6월항쟁 때 몸에 새긴 게 아닐까 한다. 

사람이 달라지면 안에서 그때 길러진 에너지가 알게 모르게 작동하는 것 같다. 그 전에는 집회 같은 데에서 노래를 같이 부르는 걸 쑥스러워 하고, 손도 올라가다 말고 그러다 끝났는데, 그 다음부터는 확확 올라갔다. 모르는 사람들하고 섞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뻔뻔해졌다고 볼 수 있는데, 대신 세상을 상당히 용감한 눈으로 보기 시작했고, 그에 따른 행동이 뒤따른 게 아닌가. 

김중배 : 이 얘기를 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좌담에 오면서 생각을 했다. 나는 4.19혁명 이전에 신문기자가 돼서 4.19혁명과 5.16쿠데타, 5.18광주항쟁, 그리고 6월항쟁을 다 겪은 세대다. 4.19혁명 때는 그렇지 않은 데도 있었지만, 한국 언론 대부분이 시민, 민중들에게 굉장한 지지를 받았다. 신문사 취재하는 사람들이 지프차를 타고, 신문사 깃발을 꽂고 다녔는데 <동아일보>가 제일 환대를 받았다. 나는 <한국일보>에 있었는데 <한국일보>도 그런 지지를 받았다.  

그럼에도 지금 통한으로 남은 것이, 물론 사회전체가 이렇다하게 저항을 못했지만, 언론은 더군다나 저항을 못했다. 저항의 역사적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부끄럽고, 통탄스러운 흔적이다.  

이 말씀을 구태여 드리는 것은 촛불집회를 하고 정권이 교체됐지만, 실질적인 사회‧정치‧경제학적 ‘기축 기둥’은 거의 박정희 시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촛불집회, 박근혜 탄핵으로 박정희의 유령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바탕에는 지금도 이것이 기능하고 있는 그런 시대에 살았다. 언론계는 통탄스럽고 부끄러운 시대에서 조금 탈출하려고 하는데 미수에 그쳤다.

(예전에는) 언론이 지금보다 훨씬 부자유스러웠다. 나 같은 사람도 남산에 끌려 다니기도 했다. 그때는 통제를 받고 제대로 보도 못하고, 우리가 정말로 마땅히 내보내야 될 진실을 못 내보내고 있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그 공감대가 일부 사주까지, 이를테면 <동아> 같으면 김상만 씨 정도는 공감했다. 내가 현역(언론인)이 아니라 정확하게 말할 순 없지만, 지금은 그런 분위기가 아니잖나. 그런 점에서는 굉장히 달라졌다. 굉장히 퇴행했다.

박석운 : 그 당시 6월항쟁이 나름의 성과를 낸 배경으로는 축적된 모순, 누적된 민심 이반들이 있었다. 광주항쟁이 완전히 진압되고, 그 이후에 학생들의 처절한 투쟁들이 진행됐고, (전두환 정권은) 이른바 '유화국면'으로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걸 뚫고 이런저런 민주화운동들이 움을 트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1985년) 2.12 총선에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986년) 개헌 현판식 때, 5.3인천사태 등 문제가 생기기도 했지만, 탄압이 계속됐고 저항들도 계속됐다. 저항의 아주 큰 줄기가 (부천서) 성고문 사건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 그리고 보도지침에 대한 폭로와 저항, 그러다가 박종철 고문치사가 터졌다. 모순의 강도가 훨씬 더 세지고, 그에 대한 저항도 질적으로 고양되는 과정을 거쳤다. 누적된 민심이반, 그게 (6월항쟁의) 배경이 됐다는 거다.

한편으론 6월항쟁이 그 정도로 전국으로 번지게 된 데에는 미시적으로 몇 가지 요인이 있다. 많이들 놓치는 부분인데, 6월10일 국민대회 때 초장에 경찰들이 요사이처럼 압도적으로 막았다면 성공하지 못했다. 그날 잠실운동장에서 노태우를 민정당의 다음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지명대회가 있었다. 그래서 주요 경력들이 다 강남에, 잠실운동장 근처를 철통같이 에워쌌다. 그 바람에 시내에 허술한 공간이 생겼다. 분노한 시민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기동 가능한 공간이 생긴 거다. 모순의 한 결과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명동성당이다. 초전박살을 당하지 않고 커지면서 세(勢)가 붙었다. 세가 붙은 상황에서 탄압을 당했다. 토끼몰이 당하듯이 해서 명동성당으로 밀려들어갔는데, 김수환 추기경 등 가톨릭에서 방어를 해줬다. 가뜩이나 민심이 이반된 상태에서, 가톨릭과 전면전을 해야 하는 부담이 전두환정권에게 생겼다. 그래서 준-해방구 거점이 형성됐고, 전국적으로 상징적인 공간이 된 거다. 언론에서도 핵심 이슈가 됐다. 

세 번째는 전두환정권이 계엄을 선포해야겠다는 고민을 하게 만든 동시에, 결국 계엄을 선포 못하게 된 원인이기도 한데 (6월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는 점이다. 당시 나는 노동운동에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 뿐 아니라 수도권의 이른바 주요 위성도시들을 다니면서 가담을 하고, 판세를 봤다. 전두환정권은 서울을 방어하기도 급급한 상황이었고, 전체적으로는 무인지경이었다. 전국적으로 동시다발로 들고 일어나니까 이를 모두 다 막기에는 경찰이 부족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지방의 도시들도 주요 거점 중심으로 방어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수도권 위성도시들이나 지방의 대도시나 중소도시들은 거의 무인지경 비슷한 상황이 된 것이다.  

▲ 명동시위. ⓒe영상역사관


계엄령을 내리지 못한 게 일각에서는 미국의 개입 때문이라고 하고, 일부 그런 측면도 있다. 하지만 계엄을 선포하고 군인을 투입하면 끝장이 나는, 전면전 내지 엄청난 유혈사태로 가면서 판이 뒤집히는 양상으로 갈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전두환이 계엄 선포를 검토하다가 못했지 않나 생각한다. 

또, 앞서 이한열 장례식을 말씀하셨는데, 이한열 열사 장례는 (노태우의 6.29선언 다음이니까) 6월항쟁의 중간 결과로 봐야 한다고 본다. 열린 공간에서 장례식이라는 계기를 잡아서 국민들이 대규모로 모인 것이고, 6월항쟁의 본질은 그 장례식 이전에 전국적으로 최루탄 맞아가면서 동시다발 내지 각각의 현장에서 많은 민초들이 함께 나서서 열심히 싸웠다는 점이 굉장히 중요하다. 저는 6.29까지 투쟁이 들불처럼 번져가는 과정이 1단계, 2단계가 이한열장례, 3단계가 7월~8월의 노동자대투쟁이라고 본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대선 과정에서 죽 쒀서 개 주는.  

김중배 : 6월18일 계엄론은 여러 가지 증언과 기록이 있다. 미국이 반대를 했고, 경찰도 군대까지 동원해서 전국을 제압하기 어렵거니와 오히려 더 반발을 살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또 일부 증언들에 따르면, 군 내부에서 별로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계엄령을 하려고 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전민용 : 호헌철폐 직선제 서명운동이 5월 무렵 상당히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민심이반이라는 게 확인되는… 치과계 쪽도 그동안 침묵하던 분들이 용기를 내어 서명에 많이 참여했다. 그 때까지도 정권의 서슬이 시퍼럴 때였는데도 여러 분야에서 꽤 확산이 됐다.

사회 :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서명운동 하는 게 운동방식이 되기도 하였다. 집단의 의사를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했지만, 참여자들에게는 혼자 고립돼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생각이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용기를 내는 과정이기도 했다는 생각이 든다.

박석운 : 저들(전두환 정권)은 호헌 지지 선언을 조작했지만, 민주시민들은 각계 선언으로 확산돼 가는 그런 게 굉장히 귀했다. 신문에 날 정도였다. 

전민용 : <동아>에서 조그맣게 실어 줬다.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런 부문별 서명운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삶의 어떤 방향에 대한 전망이 생긴 거다. 그전에는 '모 아니면 도' 식으로 평생 비밀 활동을 하고 수배 받고 고문당하고 투옥되고 그렇게 살 건가, 아니면 현실을 모르는 척 적당히 눈감고 살 건가 택일해야 했다면, 부문별 서명운동 과정을 통해서 많은 치과의사들이 참여를 하고, 6월항쟁을 거치면서 대중적으로 확산이 됐고, 이런 동력을 기반으로 부문 운동들이 생긴 거다. 

사회 : 6월항쟁 때까지는 승리의 경험이 정말 희귀하였는데, 귀한 승리의 경험으로 참여했다는 것이 자부심으로 이어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참여한 분들일 수록 승리만큼이나 6월 항쟁의 한계 내지는 미완성의 문제를 많이 지적하고, 특히 정권이 유지되었다는데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것 같다. 그것이 6월항쟁 이후에 성립된 '87년 체제에' 대해 긍정적 의미화 함께 극복을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이한열 장례식. ⓒe영상역사관


87년 체제의 의의 그리고 한계의 극복 

전민용 :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말도 있고, 앞서 박영민 씨가 '과정으로서의 통일'이라는 말도 했지만, 민주주의도 과정으로 봐야 한다. 민주주의는 어떤 제도로도 완성될 수가 없다. 깨어 있는 시민들에 의해서 시기마다 계속 고민하고, 판단하고 합의하고 이러한 과정을 끊임없이 유지해나가는 그런 형태, 그런 구조 자체가 민주주의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87년체제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박영민 : 막연히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이렇게 했어야지. 왜 그렇게 못 했데'라고 쉽게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때 이야기를 더 들어볼수록 그게 미완성 혹은 한계점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과정으로서의 항쟁을 겪고 있다. 87년 광장에 있던 사람에게 '두 발자국 밖에 못가는 건 미완이야'라고 하는 게 민주주의로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책임은 분명 그것을 목격하고, 미래를 그리는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김중배 : 동의한다. 민주주의에는 종착역이 없다. 하지만 항쟁의 시대를 살았던 내 입장에서는 그 당시부터도 미완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왜냐하면 당시 국본에서 내건 지침을 보면 '노동자‧농민‧도시‧빈민' 여기부터 나온다. '재분배 문제'를 제기하고, '노동 기본권을 억압하는 독재자 타도하자'라는 구호가 나온다. 그러니까 (7, 8월)노동자대투쟁의 주제들이 국본의 강령 속에 이미 있었던 거다. 사실은 국본이 그걸(강령)을 이루지 못한 거다. 

87년체제의 극복이라는 이야기, 그것도 일리가 있지만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87년체제의 극복이 아닌 붕괴되는 모습을 명백히 봤다. 극복하기는커녕 그 체제도 유지하지 못하면서 무슨 극복을 이야기하느냐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87년체제가 공고해야 한다' 그런 의미는 아니다. 물론 극복해야겠지만, 붕괴됐을 때 우리는 어떻게 했던가. '촛불'이 나서서 그 국면을 넘어섰지 않은가. 87년체제를 그나마 회복시킨 거라고 본다. 그것을 토대로 가야한다. 

김정헌 : 전민용 원장이 앞서 이야기를 했는데 '모든 혁명은 항상 미완으로 남는다'고 생각한다. 완성인 혁명이 어디 있겠나. 김중배 선생께서 초반에 에로스효과라고 한 말씀이 87년체제가 극복했거나 망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촛불혁명까지 계속해서 가고 있다.

ⓒ바꿈


박석운 : 6월항쟁을 미완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절반의 승리라고 생각한다. 내 관점에서 절반의 승리밖에 되지 못한 원인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정권에서) 이른바 '일반 시민'과 노동자 간에 굉장히 입체적인 이간책을 썼다. 여론을 조작해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패륜 집단, 집단 이기주의, 폭력투쟁 이런 식으로 몰아가는 수법으로 항쟁의 확산을 차단한 거다. 

두 번째는 대선 과정에서 사회운동, 정치 운동하는 진영에서 전략적인 실수를 했다. 당시에 나왔던 후보 단일화, 비판적 지지론, 독자 후보론… 이게 다 틀린 거였다. '권력 분점을 매개로 한 선거연합'으로 갔어야 하는데, (당시에는) 나도 그런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민주화운동 진영에서 고민들이 굉장히 '천박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정치인들 중심으로 이 문제를 접근함으로써 대사를 그르친 거다. 

절반의 패배가 만든 것은 결과적으로 노태우, 군인 출신의 대통령의 집권과 3당 야합, DJP연합과 같은 야합과 같은 과정을 거쳤다. 중간에 故 노무현 대통령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명박, 박근혜로 이어지는 실패를 잉태하게 된 과정이었다고 본다.

절반의 승리로 인해서 그 뒤에 일어났던 일이 노동운동 내지는 민중운동, 부문 운동이 활성화되고 그 뒤에 또 경실련, 참여연대와 같은 시민운동이 활성화되는 것, 30년간의 여러 사회운동의 기반을 만든 것이다. 

한편 6월항쟁 10주년 토론회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했지만, 6월민주항쟁과 7․ 8월노동자대투쟁을 합해서 통합적으로 87항쟁으로 불러야 한다는 거다.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 대투쟁은 토대의 변화를 일으킨 효과가 있다고 본다. 노동 운동이 여러 비판을 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성을 지니면서 사회 진보에 중요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다들 주목을 하지 않지만 이번 촛불대항쟁은 조직된 노동자들인 민주노총 대오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다시 말해, 87년 6월항쟁으로 생긴 정치적 숨 쉴 공간을 뚫고 누적된 노동 모순들이 폭발하면서 노동대투쟁으로 이어지는 것이 있었다면, 이번 촛불대항쟁의 성과로 생기는 정치적 공간에는 비정규 노동자들의 권리 찾기가 새로운 흐름으로 등장해야 한다. 

사회 : 30년은 물리적으로 한 세대라는 의미도 있지만, 현실 속에서 30년을 맞이하는 2017년 다시 시민의 힘으로 동시에 87년체제를 통해 성립된 제도 틀안에서 , 반민주적인 권력을 교체하였다는 의미가 겹치기도 한다. 때문에 아무래도 6월항쟁과 촛불항쟁을 동시에 겪은 세대에서는 이 둘의 연속성이나 연관성을 항상 염두에 두게 되는 것 같다.

6월과 촛불항쟁, 그 연속성에 대하여 

박영민 : 시민들이 만들어낸 항쟁이라는 점에서 유관할 수는 있지만, 이번 촛불에 대해서는 그 숫자와 헌정 최초 탄핵이라는 것 외에는 개인적으로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동안 얼마만큼 헌정이 잘 지켜졌던가. 파업이 제대로 되지도 못했고, 기본권이 지켜지지도 않았다. 한 번도 헌법 내에서 존중받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최순실-박근혜 게이트'가 터지고 난 후 헌정 질서를 되찾아야 한다고 얘기하니까 당황스러운 면이 있었다.

전민용 : 87년에 박종철, 이한열이 있었다면 이번 촛불의 가장 큰 동력은 세월호 참사와 쌓여 있던 사회경제적 모순이라고 본다. 그 희생이 사람들의 감성을 잡아두었다가, 계기를 만나 폭발을 한 것이다.  

87년에는 자기 과제라는 것이 별로 없었다. 눈앞에 있는 거대한 군사독재 정권의 타도가 시급했고 모두 다 쉽게 공감했다면, 이번에는 다양한 요구가 많이 나왔다. 대표적으로 페미니즘. 비정규직 이야기도 나왔고, 여러 차원에서 사회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주인 의식이 확장되고 있는 거다. 

또 한편에서는 합리적 보수와 진보가 만났다. 합리적 보수층 역시 '이게 나라냐' 이런 생각을 갖게 됐고, 그들이 같이 모여 광장을 형성한 것이다. 그리고 광장의 뜨거움과 제도의 냉철함이 만나 선출된 살아 있는 권력을 감옥에 보냈다. 이렇게 이중적인 부분들이 모여서 결과를 만들어 냈는데, 세계적으로도 유례없고 새로운 역사를 만든 건 아닐까 생각한다.

김정헌 : 나는 즐겁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많이 모였는데, 왜 이렇게 즐거울까…. 촛불집회에서, 가장 추운 날이었던 거 같다. 그날도 한복 입은 여학생들이 있었다. 그런데 옷이 너무 추워보였다. 어떡하지 고민하고 있는데, 멋진 아주머니 한 분이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서 그 학생들에게 줬다. 

나는 그 촛불집회에서 가장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부모들, 그럼 그 아이들이 30년 후까지 기억을 할 것이다. 그때 촛불시위 나도 나갔는데 하고. 자신이 인지가 떨어지더라도 부모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30년 후에도 기억을 상기시키고 소환할 수 있다고 본다. 이번 촛불시민혁명은 감성혁명으로서, 그야 말로 90%는 완성된 것이라고 본다.

박석운 : 87항쟁과 촛불항쟁이 다른 점도 있다. 같은 점부터 이야기하자면, 평화시위라고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87항쟁 때는, 사실 (엄격한 의미의) 평화시위만은 아니었다. 투석하기도 했다. (경찰이) 최루탄을 쏘지 않으면, 우리도 돌 던지지 않겠다고 했지만 어쨌든 전체적으로 보면 평화시위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더 평화로웠다.

87년보다 이번이 훨씬 평화로운 양상으로 진행이 될 수 있던 이유가 국회가 여소야대였다는 점도 있다.  민심이 확인이 되면, 해결할 수 있는 길이 꽉 막힌 것이 아니라 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가 이번 촛불항쟁은 기본적으로 조직된 대오의 투쟁과 미조직 시민들의 합세가 상승작용을 해서 성공한 거다. 87년 당시에는 노동자와 일반인들을 이간질해서, 투쟁의 확산이 성공적으로 저지가 됐다. 하지만 이번에서는 거꾸로 조직대오가 주축이 됐고, 여기에 미조직 시민들이 합세함으로써 이간질을 당하지 않았다. 이 부분들이 종전과 달라진 그런 측면이다. 그 결과로 박근혜를 파면시켜 교도소로 보내고, 이재용도 구속시키고, 정권 교체까지 가는 성과를 냈다. 이 부분들이 종전과 달라진 점이다. 물론 항쟁의 승리가 어떻게 '촛불항쟁 시즌2'를 통해서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지, 진화·발전해 갈지가 과제다. 하지만 1차적으로 촛불항쟁은 우리 현대사에서 거의 유일한 성공한 항쟁이다. 1단계 항쟁은 성공은 한 것이다. 

사회 : 6월항쟁에서 승리한 경험이 짧지 않았던 기간 진행된 촛불을 유지,강화시키는 가장 큰 동력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제도적으로 보면, 87년체제가 제대로 된 선거를 만드는 데 있어서는 진일보했지만, 선거를 통해서 성립된 정권이라는 이유로 그 정권이 반민주적 행태를 보일 때 제어해내지 못한 측면도 있다. 이번 촛불은 선거 시기의 민주주의를 넘어서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는 일상 시기에도 지켜져야 한다는 의미로 확장된 측면이 있다. 

또 역사적으로 보면 한국 민주주의 역사 속에서 가장 크게 4월의거, 광주항쟁, 6월항쟁 그리고 이번 촛불시민혁명이 큰 획을 그었다고할 것이다. 

당시로서는 성과와 한계가 항상 병존하였지만 긴 역사에서 본다면 그 과정을 통해 우리의 민주주의는 조금씩 진보해 왔음이 분명하다. 이번 촛불에서 보여준 특징과 성과 중 하나는 반민주적이고 부패한 정권에서 권력을 박탈하는 과정을 제도 내에서 해결했다는 것이다. 또한 다단순시 대의제 안에서만 된 것이 아니라 직접 민주정과 대의제 사이의 결합을 통해서 했다는 점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승리 경험이라 생각이 든다.

이런 성과와 의미에도 불구하고 30년 전에 느꼈듯이, 이번 촛불항쟁 역시 상당 부분에 있어 여전히 미완이고 새로운 과제를 많이 던져줬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10년 간 어떤 부분에 집중할 것인지 미래 전망 혹은 미래 의지를 다져보았으면 한다. 

ⓒ바꿈


촛불 10년, 6월항쟁 40년…앞으로의 과제는 

김중배 : 정권이 교체됐다고 하지만 우리 사회를 바탕에서 이끌고 있는 소위 '기층 권력'은 전혀 교체되지 않았다. 이것을 문재인 정부에서 다 교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거기에 갈 수 있는 토대, 바탕은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다.

다들 유행가처럼 다들 4차 산업혁명 노래를 부른다. AI(인공지능)을 비롯한 시스템이 들어오면서, 다음 세대가 어떻게 될 것인가. 어떤 직업이 없어지는가. 하지만 나 같은 아마추어가 보기에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게 대격변인데, 여기에 맞는 시스템, 기술적 격변에 대응하는 사회시스템에 대한 구상이 전혀 없다.  

그런데 시간이 별로 없다. 그것들을 일거에 다할 수는 없지만, 토대를 쌓아가야 되지 않나. 그래서 앞서 에로스효과를 의도적으로 꺼냈다. 왜냐. 나는 이번 촛불집회에서 제일 많이 따라다닌 곳이 중‧고등학생들이었다. 이 중학생들이 '중학생 혁명당' 이름을 딱 내걸었더라. 우리는 87년 체제를 말하지만 1997년 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에 신자유주의의 본궤도가 깔렸다. 중학생들도 학원가기 바쁘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틀에 넣고 쥐어짜는 이 와중에, 저 애들이 어떻게 해서 혁명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일부 정치학자들이 말하는 뉴-노말(New Normal), 신자유적인 문명이 비정상을 새로운 노말이라고 규정하는 이런 상태였는데, 그걸 어떻게 극복해 갈 것인가. 뉴-노말로써 내면화된 소위 '내면 헌법'이 있지 않은가. 정부가 어떻게 하더라도, 내면 헌법이 증발되거나 승화해서 중학생혁명당처럼 에로스로 바뀔 수는 없을까.(웃음)  

김정헌 : 우리나라의 양당 제도에 의해서 끊임없이 여야로 편이 갈라져서 있는데, 이게 고쳐지면 조금 나은 삶이…. 자신의 가치로 소수가 모였지만, 그것이 하나의 정당이나 대의활동을 할 수 있어야 기본적인 것들이 만들어질 수 있을 텐데, 그걸 아직도 만들지 못한 것이 너무 안타깝다. 촛불혁명을 계기로 그런 부분까지 바뀌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촛불혁명을 만들어 준 최순실과 정유라를 잊지 말아야 한다.(모두 웃음)  

박석운 :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당장 눈앞에는 당면한 적폐청산 과제가 많이 있다. 검찰 등 권력기관의 개혁이 첫째고, 둘째는 언론 개혁이다.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은 다른 모든 개혁을 만드는 개혁, 기본적 개혁으로서 중요하다. 그런데 검찰개혁은 될 것 같지만 언론개혁은 잘 안 보인다. 현재 갑갑한 국면이 벌어지는 주요한 배경이, 언론개혁이 이뤄지지 않는 것에서 기인하는 게 아닌가 이렇게 본다. 

정치개혁도 굉장히 중요한데,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등 선거제도개혁은 선거법개정 방식으로는 쉽지 않고 개헌을 통해서만 가능할 지도 모른다. 결선투표제, 18세 투표권 등도 정치개혁의 문제다. 또 노동개혁과 민생개혁, 재벌개혁 과제나 세월호 문제나 원자력발전소 같은 안전 사회 문제… 이런 것들이 당면 개혁과제에 속한다. 

향후 10년, 20년을 이야기한다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진보 정치. 지금 문재인 정부의 개혁이 굉장히 위태롭다. 원인은 진보정치가 헤매고 있어서다. 제대로 개혁하게 하려면, 진보정치가 역할을 제대로, 대오를 갖추고 해야 한다. 또 하나는 분단 모순이다. 분단 적폐 청산인데, 평화와 자주 통일. 이 두 부분이 중기적으로 중요한 과제가 된다고 본다. 

전민용 : 일단 헌법에 직접 민주주의 요소들이 들어가면 좋겠다. 또 하나는, 우리나라 차원에서 해결할 수 없는 세계사적인 문제들, 예를 들어 4차 산업혁명, 기후 변화, 또 지역적‧국지적으로 벌어지는 갈등들에 대해서도 우리나라가 성숙하기 위해서는 대안을 가져야 한다.

대안적 사고를 하려면 새로운 가치와 방향에 대한 훨씬 더 유연한 생각들이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진보정치도 좁은 틀에서 현재 우리가 진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들뿐만이 아니라, 2030 세대가 생각하는 새롭고 창의적인 생각들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깊어지고, 넓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박영민 : '민주주의'에서 민의 개념은 항상 달랐다고 생각한다. 범위가 확장되고, 깊이가 달라질 때도 있었다. 10년 후에는 우리가 상상도 못했던 가치가 발견돼서 '이것도 민주주의에 포함된다고?' 하며 놀랄 수 있을 거다. 예를 들어, 30년 전에 동물권이 나올 거라고 누가 상상을 했겠나. 10년 후에는 더 많은, 더 넓은 '민'들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조금 더 다양한, 시각을 넓히려는 노력을 이 사회 전체가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김중배 : 이미 뉴질랜드에서는 강에 인격을 부여했다. 히말라야 빙하도 그렇다. 자연에 대해서 존중하는, 인간과 동일시하는 걸 녹색당 같은 곳이 해야 한다. 반대로 지금부터는 '적색당'이 될 수 있는데, AI 시스템이 들어왔을 때 로봇에 과세를 해야 한다. 원천적으로 AI 로봇을 소유할 수 있는 건 막대한 자산가 밖에 없다.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니까 소요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사회 : 어떤 도전이 끝나면 비로소 새로운 도전을 알게 된다. 촛불 역시 우리가 해결할 많은 숙제를 남겨주었다. 말씀해주신 여러 과제들을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논의할 시기가 지금이 아닌가 한다. 긴 시간 귀한 말씀하여주셔서 감사하다. 모두 건강하셔서 10년 후 , 또 30년 후 촛불과 6월에 대하여 다시 이야기 나누길 소망한다. 



광주가 없었다면 6월 항쟁도 없었다

1980년 광주시민들의 거룩한 저항이 없었다면 아마 전두환은 거리낌 없이 시민들 앞에 공수부대를 들이밀었을 테고 거리는 피로 뒤덮였을 것이다.

김형민 (PD)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6월 09일 금요일 제507호


ⓒ정의구현사제단
1987년 6월12일 명동성당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신부와 시민들이 시위를 하고 있다.

이 코너에서 여러 번 얘기한 바 있다만 6월 항쟁은 마치 드라마처럼 우리 곁으로 왔단다. 1986년 10월 말, 건국대학교에서 열린 집회에서 평소와 달리 경찰은 학생들의 진입을 막지 않았고 학생들은 멋도 모르고 건국대에 집결해 집회를 열었어. 그런데 별안간 경찰은 건국대를 포위하고 농성하는 학생들을 진압한 뒤 무려 1288명을 구속해버렸단다. 정부는 이를 ‘공산혁명분자 건국대 점거농성 사건’으로 어마어마하게 뻥튀기했고, 국민이 학생들을 지켜보는 눈은 그만큼 차가워졌지. 데모 나가면 시민들이 발을 걸어 넘어뜨려 경찰에 넘기는 일까지 있었다니까. 바로 그 시점에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의 고문을 받던 중 죽었단다. 이 죽음을 둘러싸고 있었던 일들은 여러 번 얘기했을 테니 되풀이하지 않으마. 다만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점차 자신들을 다스리던 정권이 얼마나 폭력적이며, 어찌나 사악하게 거짓말을 해왔는지, 또 비열하게 그 권력을 이어가려 하는지 깨닫게 됐지. 그리고 광주항쟁 이후 7년 동안 왜 그렇게 많은 젊은이들이 전두환의 득의양양한 철벽을 향해 몸을 던져 머리가 깨져나가며 싸웠는지 깨닫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한 거야.

“너는 듣고 있는가 분노한 민중의 노래, 더 이상 노예처럼 살 수 없다 외치는 소리.”

1987년 6월10일 아빠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고 밤 10시30분까지 자율학습을 해야 했지. 그러나 아빠는 이튿날 1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모든 교통편이 끊겨 수 킬로미터를 걸어갈 수밖에 없었거든. 그날 아빠는 시위대와 전경들의 대오를 일곱 번쯤은 가로질러야 했어. 그만큼 시위대가 곳곳에 형성돼 있었고 경찰들은 무지막지하게 밀려드는 시위대에 기가 질린 듯 보였다. 학생들만이 아니었어. 아저씨 아주머니들도 함께 있었고, 그들은 운동가요가 아닌 익숙한 노래를 가사만 바꿔 부르며 함께 어울렸지. “새 나라의 대통령은 대머리가 아닙니다. 대머리가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전국의 대머리 여러분께는 죄송한 이야기이고, 그 대열 속에도 대머리는 많았다만 그들은 ‘대머리 대통령(전두환)’을 야유하며 함께 웃고 떠들며 구호를 외치고 있었어. <9시 뉴스> 시간만 되면 맨 먼저 등장해 그 동정을 국민이 강제로 알아야 했던, ‘본인은’으로 시작하는 그 쉰 목소리의 장본인은 대머리 대통령으로 전락하고 있었어. 이제 한국 사람들은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서는 무녀리들이 아니게 된 거야.

전국 각지에서 학생들은 끝없이 몰려나왔어.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도 나오듯 잡아가는 것도 한계가 있어서 경찰은 버스 한가득 태운 학생들을 교외에 내려놓기도 했지. 버려진 학생들은 또 모여서 데모를 벌였어. 전국의 도시는 시위를 응원하는 경적 소리와 함성, 그리고 외신기자들이 “후일 이 피해는 유전병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할 만큼 시민들이 난사된 최루탄 가루를 뒤집어썼다.

“모두 함께 싸우자. 누가 나와 함께하나, 저 너머 장벽 지나서 오래 누릴 세상.”

시내 한복판에서 가게를 하시던 네 할머니는 데모하다가 경찰에 쫓기는 학생들을 마지막 한 명까지 받아들이고 쫓아온 경찰의 코앞에서 셔터를 내려버리셨다. 고층빌딩에서는 최루탄을 닦으라는 휴지가 눈송이처럼 떨어져 내렸어. “이래서야 어떻게 장사를 하겠느냐”라는 한 상인의 푸념에, “무슨 소리냐. 그런 소리 할 것 같으면 네가 여기를 떠나라”고 이웃 상인들이 한목소리로 핀잔을 주었지. 경찰에게 두들겨 맞는 학생들을 보다 못한 승용차 운전자들은 차에서 기름을 빼주었다. “이걸로 화염병을 만들어요.” 본의 아니게 서울 명동성당에 갇혀버린 학생들을 위해 담장 옆에 있던 계성여중 학생들은 자신들의 점심 도시락을 모아주었고 넥타이 맨 직장인들이 박수를 치고 최루탄 쏘지 말라고 외치며 경찰에 맞서게 됐지. 공권력이 명동성당에 진입하겠다고 통보하자 가톨릭의 최고 수장 김수환 추기경은 이렇게 선언하셨다. “경찰은 맨 먼저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다음으로는 신부들을 보게 될 것이고 그다음으로 수녀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을 밟고 넘어선 뒤에야 학생들을 보게 될 것이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경찰의 호통에 어깨 움츠리고 데모하는 학생들 때문에 나라가 소란할까 두려워하던 소심한 국민들은 역사의 주인공들로 완전히 탈바꿈해 있었어.

“심장박동 요동쳐 북소리 되어 울릴 때 내일이 열려 밝은 아침이 오리라.”

서울의 명동성당은 부산의 ‘논스톱 시위’로 이어졌어. 항도 부산 시민들은 그 화끈함을 과시하면서 사흘 연속 밤샘 시위를 벌였어. 비가 와도 우산을 들고 시위했고 고층빌딩에서 소파를 집어던지며 저항했다. 부산의 공권력은 마비 상태에 빠졌고, KBS와 시청 정도만 필사적으로 방어하며 버티는 지경에 이르렀지. 마침내 전두환은 또 한 번 군대를 동원할 생각을 해. 이 소문이 퍼지자 각 운동단체 구성원들은 아예 집에 들어가지 않았단다. “잡혀가도 거리에서 잡혀가겠다.”

“잡혀가도 거리에서 잡혀가겠다”


이 일촉즉발의 상황을 가로막은 존재들이 있었단다. 전두환이 필생의 업적으로 준비한 88 서울올림픽도 그중 하나였지만 무엇보다 전두환의 발목을 잡아챈 것은 바로 그해로부터 7년 전의 광주였어. 전두환이 정권을 잡기 위해 전국에 계엄을 펴고 공수부대를 투입했을 때 유일하게 일어서서 저항했고 전두환의 독수(毒手)를 피로 받아내야 했던 광주. 그 참혹한 기억은 전두환의 심복들에게도 동요를 일으키게 했어. “또 우리 손에 피를 묻히라고요?”

꼭 기억하렴. 만약 광주가 없었다면, 1980년에 전두환이 아무 기탄없이 정권을 잡았고 그 와중에 광주시민들의 거룩한 저항이 없었다면 아마 전두환은 거리낌 없이 시민들 앞에 공수부대를 들이밀었을 거야. 서울 종로, 부산 서면, 대구 동성로, 대전 으능정이는 피로 뒤덮였을 거야. 그 참혹함을 막았던 건 홀로 봉기하고 외롭게 싸우고 참담하게 죽어간 광주 사람들의 용기였단다.

ⓒ박용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87년 7월9일 이한열 열사 민주국민장에서 고 문익환 목사가 절규하고 있다.

본격적인 6월 항쟁 하루 전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이한열 학생은 한 달여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끝내 숨을 거뒀어. 연세대 교정에서 치러진 장례식에서 민주화 운동의 원로라 할 문익환 목사님이 연단에 오르셨지. 그분은 연설 대신 사람들의 이름을 불렀다. 1970~1980년대 한국을 지배한 군부독재에 맞서 싸우다가 죽어간 사람들의 이름이었어. 전태일부터 이한열까지 무려 26명. 광주의 희생처럼 우리 역사의 디딤돌이 된 이름들이었지. 문익환 목사의 절규에 실린 이름들을 들으며 사람들은 어린아이처럼 울었어. 역사의 깊은 잠을 일깨우기 위해 스스로 종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렸던 이들의 노래를 부르면서 사람들은 또 꺽꺽거리고 울었다. 너도 들어봤을 노래 ‘그날이 오면’은 문익환 목사가 처음으로 부른 이름, 노동자 전태일에게 바친 추모곡이었지. 그 후렴구다.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피맺힌 그 기다림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앞으로 문익환 목사님이 목 놓아 불렀던 이름 가운데 몇 분의 이야기를 전해주려 해. 잘 들어주기 바란다. 우리 역사의 심장 고동 소리로 남은 그분들의 이야기를.



역사의 부름 앞에 당당했던 그해 6월

1987년 6월, 거리에서는 500만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모여 ‘독재타도’를 외쳤다. <시사IN>은 6월항쟁 30주년을 맞아 역사의 한복판에 있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세 사람을 만났다.

이상원 기자 prodeo@sisain.co.kr 2017년 06월 27일 화요일 제510호


1987년 6월은 유난히 낮이 길었다. 이듬해 서울올림픽을 위해 전두환 정권이 5월부터 ‘서머타임’을 시행했다. 긴 낮 동안 벌어진 사건들이 한 시대를 끝냈다. 500만명에 달하는 시민이 거리로 나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다. 6·10 민주항쟁(6월항쟁)의 대미를 장식한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는 100만명이 참석했다. 건국 이래 최대인 이 기록은 지난해 11월 민중총궐기까지 29년간 깨지지 않았다.

그해 거리에 나선 500만명 중 김영삼·노무현·문재인은 대통령이 되었다(당시 김대중은 가택연금 상태여서 시위에 참여하지 못했다). 국회에 들어간 사람도 많았다. 더러는 그 과정에서 “변절했다”라며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6월항쟁 30주년을 맞아 역사의 한복판에 있었던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생생한 증언을 온전히 전하기 위해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87년 6월24일 서울 중구 소공동 한국은행 앞에서 ‘직선제 민주개헌을 실시하라’며 구호를 외치던 시민을 향해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했다.

박춘애

“내 인생은 시민들이 지켜줬다”


학교 축제가 끝나고 시험이 다가오는 1987년 6월 중순이었다. 반독재 운동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전남대 비상시국총회는 6월16일 총학생회장과 투쟁위원장의 삭발식을 결정했다. 총여학생회장이었던 내가 “그걸로는 좀 약하지 않아? 나도 같이해야 하는 거 아냐?”라고 했다. 모두가 말렸다. 머리카락을 깎아 시위한다는 게 흔치 않은 시절이었고, 특히 여학생은 더 그랬다. “이 마당에 안 될 게 뭐가 있어?”라고 대꾸했다. 그날 오후 2시 나는 중앙도서관 앞 5·18민주광장에 앉았다. 시위 때마다 입었던 옥색 저고리와 검정색 치마를 입었다.

의식의 힘이란 무섭다. 긴 생머리가 가위로 잘리자 분위기가 엄숙해졌다. 머리카락을 깎아준 예비역 후배들과 총여학생회 사람들은 내내 울었다. 머리카락이 다 잘리자 군중 속에서 20명 이상이 뛰쳐나와 이어서 삭발을 했다. 몇몇은 옷을 찢었고, 즉석에서 혈서를 쓰는 이도 있었다. 그 힘을 모아 교문 밖으로 나가 거리 시위를 벌였다. 그날 이후 광주 학생들의 시위 참여 인원은 크게 늘었다. 여대생 한 명이 머리를 깎아 광주의 6월에 불을 붙인 셈이 되었다.

사실 내가 총여학생회장이 된 계기를 돌아보면 조금 멋쩍다. 선배들의 권유로 출마했는데, 특별히 사명감이 투철하거나 운동권 주요 인물이어서는 아니었다. 학생회 임원으로 출마하려면 일정 수준 이상 학점을 받아야 했다. 학생회 안에는 그 ‘요건’을 갖춘 사람이 드물었다. 학생회 임원이 된다는 건 언제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갈지 모른다는 뜻이었다. 애인과 의논하자 고맙게도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인데 할 수밖에 없지”라고 말했다. 그가 지금의 남편이다.

ⓒ시사IN 이명익
전남대 총여학생회장이던 박춘애씨(아래)는 30년 전, 독재 반대를 주장하며 긴 생머리를 잘랐다. 전국 최초의 여대생 삭발이었다.

인터넷이나 SNS가 없던 시절이라 집회 시간과 장소를 알리기 어려웠다. “시민 여러분, 지금 여기로 모여주십시오! 집회합니다!”라고 소리치고 다녔다. 내가 사복 경찰에게 붙들리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사람들(사수조)도 따로 있었다. 경찰들이 나를 잡아가려 들면 옆에 있던 사수조 학생들이 대치하다가 대신 잡혀갔다. 나는 시위 당일 나를 보호하려는 사수조가 누구였는지 모른다. 훗날 “제가 그날 회장님을 보호했습니다”라고 말한 사람들이 여러 명 있었다. 진짜 6월항쟁의 주역이다.


6·29 선언 이후 수배가 해제됐다. 사범대 학생이었기에 1989년 졸업하고 바로 교사로 발령이 났다.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설립됐다. 조합원으로 가입했고, 발령 4개월 만에 해직됐다. 전국 최초 삭발 여대생에 이어, 전국 최연소 해직 전교조 교사가 되었다. 1994년 복직까지 5년간이 어땠는지 부모는 모른다. 휴직하고 다른 일을 한다고 둘러댔다. 더 상처를 줄 수 없었다.

2014년 세월호 참사가 터지고 ‘세월호 3년상을 치르는 광주시민상주모임’에 참여했다. 지난 4월16일까지 3년 동안 날마다 출근길에 피켓을 들고 거리 선전을 했다. 출근 시간보다 30분 일찍 나와서 길거리를 다녔다. 우리 학교 아이들은 종이학 1000마리를 접으면 소원이 이뤄진다며, 스스로 노란 배 1000척을 접었다. 전원 구조가 자기들 소원이라면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상처도 크지만, ‘광주’로 묶이는 자부심과 공감대가 있다. 학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 대학 학생처도 마찬가지였다. 총여학생회장이 된 뒤 학생처장이 해남 고향집에 찾아가 “당신 딸이 운동권 주모자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버지는 한마디만 했다고 한다. “우리 딸이 앞장서서 하는 일이 절대 나쁜 짓일 리 없다”라고. 학생처장은 나한테 “당신 아버지 정말 훌륭한 분이다”라고 말했다.

6월항쟁의 최대 수혜자는 나다. 내 인생은 시민들이 지켜줬다. 삭발할 때만 해도 ‘그래, 내가 이렇게 하다가 죽어도 어쩔 수 없네’라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내 뒤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울면서 머리카락을 자르던 학생회 후배들. 따라서 삭발을 하고 혈서를 쓰던 처음 보는 학우들. 나를 대신해 기꺼이 경찰에 잡혀간 이름 모를 학생들. 거리에 나와 함께 구호를 외친 광주 시민들. 전교조에 가입해 해직될 때도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나를 응원했고, 세월호 피켓을 들 때도 격려 받았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져서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

박근혜 정권하에서 6월항쟁 30주년을 맞았다면 얼마나 참담했을까. 우리 모두가 살아온 삶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하면서…. 촛불혁명 이후 30주년 기념식을 하게 되어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쁘다. 6월10일 광주·전남 6월항쟁 기념식 사회를 맡게 되었다. 30년 전에 입었던 옥색 저고리와 검정색 치마가 아직 몸에 맞았다. 1987년 그때처럼 나가서 떠들었다. 돌이켜보면 30년간 나는 늘 뭔가 해보려고 했다. 할 일이 자꾸 생긴다. 결정의 순간마다 정면 돌파해왔다. 피하지 않았고 잔머리 굴리지 않았다. 그렇게 살았다.



김학규

“30년 전 더 잘했어야 하는데…”


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대학에 갔는데, 들어가서 보니 세상이 내 생각과 좀 많이 달랐다. 군사정권이 광주에서 그렇게 사람을 많이 죽였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선배 하나가 이런 말을 했다. “역사는 붓으로만 쓰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쓰는 거야.” ‘한 10년 투자해서 세상부터 바꾸고 공부하자’고 생각했다. 계획이 틀어져 여기까지 왔다.

종철이와는 서울대 84학번 동기다. 종철이는 전공이 종교학이고, 나는 국사학과였다. 같은 인문대학 소속이라 운동조직 안에서 서로 연관된 일을 맡았다. 종철이는 ‘타이핑 팀’ 팀장이었다. 누구나 워드프로세서를 쓰던 시절이 아니었다. 유인물 하나 만드는 데에는 값비싼 타자기와 전문 인력이 필요했다. 종철이가 그 일을 총괄했다. 나 같은 사람은 몸으로 뛰었다. 타이핑 팀에서 쳐온 문건을 종철이가 전해주면 우리 팀 사람들은 밤새 등사기(서류를 복사하는 데 쓰인 일종의 간이 인쇄기)로 밀었다. 유인물을 많이 뽑아낸 새벽에는 그렇게 뿌듯할 수 없었다.

종철이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1986년 10월 하순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날도 종철이가 문건을 타이핑해서 국사학과 사무실에 주고 갔는데, 내가 무언가 할 말이 있어서 계단으로 내려가는 그 친구를 불렀다. 이야기하려던 게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 친구의 얼굴만은 평생 잊을 수 없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맑은 눈빛이 30년이 지난 지금도 눈에 선하다.

ⓒ시사IN 조남진
김학규씨(아래)는 ‘10년 정도 투자해서 세상부터 바꾸자’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박종철 열사의 눈을 떠올리면 ‘운동은 평생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다.

1986년 11월 초부터는 내가 수배를 당해 도피하느라 종철이를 만날 수 없었다. 1987년 1월15일 우연히 밖에 나가 석간신문을 샀다. 늘 그랬듯, 집회나 검거 소식이 실린 사회면을 먼저 펼쳤다. 그 신문에 내 친구 이름이 적혀 있었다. 죽었다고. 기사에는 ‘쇼크사’라고 쓰였는데, ‘고문받다가 죽었다’라고 읽혔다. 두 가지 감정이 떠올랐다. 하나는 친구를 앗아간 정권에 대한 분노, 다른 하나는 나도 당할 수 있다는 공포. 오랫동안 분노와 공포가 뒤섞인 이상한 감정이 내 몸을 지배했다.


다른 학생들과 만나서 종철이 이야기를 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사실 우리도 조금 이상했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너무나 큰 충격과 실의에 빠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사건을 당연시했다. 인권에 초점을 맞춰 정권을 규탄하기보다는 ‘하필 내 친구가 걸렸구나’ 하는 울분만 앞섰다. 비일비재하게 이런 일을 접해온 우리는 ‘고문사’ 소식 앞에 일반인들보다 담담했을 수 있다. ‘고문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라는 구호를, 우리가 더 일찍 외쳤더라면 6월항쟁을 앞당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1988년 5월 붙잡혀 감옥에서 6개월을 살다가 나왔다. 노태우 정권이 유화정책을 펴던 때라, 우습게도 감옥에서 나온 지 2주 만에 복권됐다. 1989년 학교에 복학을 신청했는데 학교 측이 “당신은 휴학이 아니라 제적됐다”라고 하더라. 1987년부터 학교에 아예 못 갔으니 미등록 제적 처리된 것이다. 시대 분위기가 운동권 학생들에게 친화적이라 복적 신청을 하니 바로 받아줬다. 한 학기 장학금도 받았다. 복적하고도 학교에는 거의 나가지 못했다. 노동청년운동을 했다. 이후 6월항쟁 10주년 기념사업 범국민추진위원회에서 사무국장 비슷한 직책을 맡았고, 20주년까지 이 일을 했다. 스무 살에 세운 10년짜리 계획은 이렇게 바뀌었다.

이번 촛불항쟁에 참여하면서 느낀 감정은 아쉬움이다. 30년 전 우리가 더 잘했어야 하는데…. 6·29 선언이라는 당황스러운 대응이 기만책이라는 문제 제기가 분명 있었지만, 돌파해내지 못했다. ‘87년 체제’라는 타협적 시스템하에 30년이 흘렀다. 군사정권을 완전히 몰아냈다면 아마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 이런 비용을 치르지 않고도 민주주의를 발전시키지 않았을까?

6월항쟁 30주년을 맞아,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서 나는 박종철이 갖는 상징적 의미를 고민한다. 좁게 말하면 타인과의 신의다. 물고문을 받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선배가 어디에 있는지 불지 않았다. 말할 수도 있었는데, 그랬으면 종철이는 살았을 수도 있는데. 의미를 더 확장하면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다. 종철이의 신의는, 단순히 한 선배가 아니라 전두환 군사정권에 맞선 운동조직을 향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박종철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2003년부터 해마다 박종철인권상을 시상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고 백남기씨, 올해는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가 수상했다.

종철이가 끌려간 남영동 대공분실은 경찰청 인권센터가 되었다. 그가 죽은 509호실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박종철 기념관도 여기 있다. 운영 주체가 경찰청이다 보니 불편한 점이 많다. 시민사회가 운영하면서, 민주화 희생자 모두를 추모하는 곳으로 바꾸면 좋겠다. 대공분실 건물 입구에는 한여름에도 바람이 쌩쌩 부는 공간이 있다. 고문을 끝낸 경찰들이 시원하게 쉬라고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종종 여기 앉아서 종철이의 눈을 떠올리면, ‘정말 운동은 평생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명준

“동장에서 대통령까지 우리들 손으로”


1947년에 태어나 박정희 정권 때부터 싸웠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느라 1년 늦게 졸업했다. 이후 중앙대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했다. 당시 우리 학과는 수십명 규모였는데 청강생이 많아 수업에는 수백명이 드나들었다. 그런데도 우리가 1969년 학내에서 박정희 3선 개헌 반대 운동을 하는 동안 학우들은 구경만 하더라. 일찌감치 제적당한 터라 그때가 몇 학년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시사IN 조남진
이명준씨(위)는 “6월항쟁의 교훈이 지난겨울 촛불집회에서도 발휘됐다”라고 말했다.

박정희 정권에서 고문은 예사였다. 나 역시 경찰에 잡혀가 기절할 때까지 물고문을 당하곤 했다. 고문이 아침에 시작됐는데, 깨어나 보면 창밖은 캄캄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지병인 천식이 악화됐고, 뇌출혈이 와서 2주간 의식불명으로 입원한 적도 있다. 아직도 매일 아침 약을 챙겨 먹는다. 종손이었던 내가 대학도 늦게 가고 그마저도 제적당하자 집안사람들은 “패가망신의 원흉”이라고 손가락질했다. 사면복권이 된 뒤인 1997년쯤에야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1974년 명동성당 이기정 수석보좌신부에게 천주교 세례를 받았다. 천주교와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해 지학순 주교가 구속당한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창립되고 활동이 어느 정도 겹쳤다. 바깥에서 운동권 사람들을 만나기 살벌한 시절이었다. 이기정 신부를 설득해 사제관에서 사람들과 모임을 가졌다. 전부터 사제관에 자주 드나들던 젊은 명동성당 신자들과 의기투합했다. 1975년 5·22 사건(김상진 열사 추모집회), 같은 해 명동성당 7인 위원회 사건,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도 연루됐다.

1986년 함세웅 신부를 따라 필리핀에 갔다. 때마침 터진 필리핀 6월 혁명을 현장에서 목격했다. 독재자 마르코스에 대항해 100만명 이상이 거리로 나왔는데도 미국은 군을 투입하지 않았다. ‘제3세계 민주화운동에 대해 군사력으로 누르지 않는다’는, 미국의 저강도 전쟁 정책을 알게 됐다. 이런 추세라면 우리도 민주화가 가능하다고 봤다.

예상대로 전두환의 1987년 4·13 호헌 선언 이후 한국에서도 민주화운동이 본격화됐다. 4월21일 천주교 광주대교구 사제들이 단식을 시작했다. 서울대교구, 안동교구에서도 동참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간사였던 나는 시민들이 스스로 ‘의식화’되는 모습을 목격했다. 신부들의 단식으로 주일 미사가 취소되자 신자들이 난리가 난 것이다. 명동성당을 둘러싼 신자들이 외친 ‘평범한’ 구호가 인상적이었다. “동장에서 대통령까지 우리들 손으로”였다.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 결성에 천주교 집행위원으로 참여했다. 좌우와 양김(김대중·김영삼)을 넘어, 사회 각 단위의 힘이 결합된 조직이 필요하다고 봤다. 개신교 쪽과 불교 쪽도 공식·비공식으로 꾸준히 만났다.

성유보·황인성·김도현과 함께 ‘6·10 국민대회 행동요강’을 작성했다. 우리는 비폭력을 누차 강조했다. ‘폭력을 사용하거나 기물 손괴 등을 자행하는 사람은 국민대회를 오도하려는 외부세력으로 규정한다’는 대목도 넣었다. 당일 명동성당 앞에서 화염병을 만드는 학생들에게 따로 당부하기도 했다. “여기는 경찰도 없는데 화염병을 어디에 던질 생각인가? 시위가 격렬해지면 시민들은 빠진다. 운동을 그렇게 하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필리핀의 사례를 보고 평화 집회여야 성공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6월항쟁의 교훈이 지난겨울 촛불집회에서도 발휘됐다고 생각한다. 촛불집회 초창기 원로회의에 나가 나는 이렇게 말했다. “박근혜는 탄핵돼야 한다. 그러나 그 방법은 여의도를 통해서다. 실탄을 맞으면서 권력자를 끌어내리는 혁명은 틀렸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운동은, 번번이 그런 식으로 실패해왔다.”



MBC에는 6월의 함성이 없다

1987년 6·10 민주항쟁 현장에서 사진을 찍었던 프리랜서 사진가 킴 뉴턴을 주인공으로 해서 촬영 중이던 MBC 다큐멘터리가 제작 중단되었다. 김장겸 사장 취임 직후의 일이다.

이오성 기자 dodash@sisain.co.kr 2017년 06월 27일 화요일 제510호

서울광장에서 열린 6·10 민주항쟁 30주년 기념식장에 60대의 미국인이 나타났다. 미국에서 대학교수로 일하는 킴 뉴턴 씨였다. 그는 30년 전인 1987년 6월에도 이곳에 서 있었다. <뉴욕타임스> <르피가로> <타임> 등에 사진을 보내는 프리랜서 사진가로서 뜨거웠던 그해 6월의 거리를 속속들이 카메라에 담았다. 지금도 가지고 있는 당시 관련 사진이 6000장이나 된다.

그중 하나가 이한열 열사와 관련한 사진이다. 그는 이한열 열사의 영정과 함께 선 두 학생을 찍었다. 영정을 든 이는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 태극기를 쥔 이는 총학생회 사회부장이었던 배우 우현씨다.

킴 뉴턴은 6·10 민주항쟁(6월항쟁) 기념식장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 이 사진을 선물했다. 아울러 그는 6월항쟁 30년의 소회를 담은 편지를 문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했다. 여러 언론이 이를 6월항쟁 기념식의 주요 장면으로 보도했다.

ⓒ연합뉴스
6·10 민주항쟁 기념식장에서 킴 뉴턴 미국 애리조나 대학 교수(왼쪽)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기념 액자를 건네고 있다.

킴 뉴턴 씨가 한국을 다시 찾은 건 꼭 30년 만이다. 6월항쟁이 있던 그해 군인 출신인 노태우씨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을 보고 이듬해 한국을 떠났다. 그리고 다시 한국을 찾을 일은 없었다. 모교인 애리조나 대학에서 2007년부터 저널리즘을 가르치며 평범한 교육자로 살았다.


‘30년 만의 한국 방문’에는 사연이 있었다. 그를 다시 한국으로 불러온 건 <MBC 스페셜> ‘6월항쟁 30주년’ 다큐멘터리 팀이었다. 다큐 팀은 이방인의 눈을 통해 30년 전 한국 사회와 현재를 관통하는 작품을 만들 생각이었다. 킴 뉴턴 씨는 탄핵 집회가 한창이던 지난 3월 다시 한국을 방문해 역사의 현장을 취재했다. 예정대로라면 그를 주인공으로 삼은 다큐멘터리가 6월10일을 전후해 MBC에서 방영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 이 다큐멘터리의 방영 여부는 불투명하다. 제작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1노조, 김연국 위원장) 등에 따르면 상황은 이렇다. 6월항쟁 다큐 촬영이 한창이던 2월28일 보도본부장 김장겸씨가 MBC 사장으로 취임한다. 그리고 바로 이날 회사 측은 6월항쟁 다큐의 제작 중단을 지시한다.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던 김만진 PD가 ‘윗선’의 승인을 받지 않고 제작을 진행했다는 이유다. 하지만 1노조 측의 설명은 전혀 다르다. 지난 1월 담당 부장이 작성한 <MBC 스페셜> 방송 순서 표에는 ‘6월항쟁 30주년’의 방송 예정일이 기록됐다고 1노조는 주장한다. 윗선의 제작 승인 없이 방송표 작성이 이뤄질 리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방송 중단 지시가 킴 뉴턴 씨의 방한을 겨우 며칠 앞두고 내려졌다는 점이다. 이미 촬영 일정 조율은 물론 항공권 구매까지 이뤄진 마당이었다. ‘30년 만의 약속’을 깰 수 없었던 담당 PD는 제작을 강행했다. 그리고 대선 이후인 5월19일 김만진 PD는 회사로부터 감봉 1개월의 중징계를 받았다. 제작 중단 지시를 따르지 않고 제작비를 임의로 집행했다는 이유였다. 김 PD는 현재 다큐멘터리 팀을 떠나 외주업체 관리 부서에서 일하고 있다.

김만진 PD가 징계를 받던 날 MBC에서는 또 다른 기자와 PD 6명에 대한 징계가 내려졌다. <시사매거진 2580> ‘세월호, 1073일 만의 인양’을 제작한 조의명 기자는 세월호 인양 지연을 비판하는 인터뷰를 삭제하라는 윗선의 지시에 저항한 이유로 ‘주의’ 징계를 받았다. 지난해 <뉴스데스크> 인터뷰 조작 의혹을 제기한 김희웅 기자는 ‘출근 정지’ 20일, 외부 매체와 인터뷰한 송일준 MBC PD협회장은 감봉 1개월 처분을 받았다. MBC 보도를 비판하는 영상을 만들어 온라인에 올린 전예지·곽동건·이덕영 등 막내 기수 기자들에게는 근신과 출근 정지 징계가 내려졌다. 이들 모두 자사의 보도 태도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징계를 받았다.

6월 들어서도 김장겸 사장의 퇴진을 주장하는 사내 게시판 글은 대거 삭제되었고, 사내에서 김장겸 사장 퇴진 구호를 외치며 페이스북 라이브 방송을 한 김민식 PD에게는 6월14일 대기발령 조치를 내렸다. 정치권에서 MBC 경영진 퇴진 주장이 나오자 ‘방송 독립성 위기’라며 뉴스 보도를 통해 강력 반발하고 있다.

김장겸 사장 퇴진 주장 게시판 글은 대거 삭제

ⓒ전국언론노조 MBC본부 제공
5월22일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 조합원들이 김장겸 사장의 부당 징계를 규탄하고 있다.

최근 MBC에서는 새로운 ‘사건’이 하나 더 불거졌다. 6월11일 <시사매거진 2580>은 미국에 있는 김경준씨 인터뷰를 바탕으로 ‘BBK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를 방송했다. 이 방송은 최근 MBC ‘기류’에 비춰볼 때 다소 의외여서 적잖은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해당 방송을 제작한 박종욱 기자는 며칠 뒤 사내 게시판에 ‘<시사매거진 2580>을 살려주십시오’라는 장문의 글을 올렸다. 


박 기자는 BBK 보도 제작 과정에서 윗선으로부터 적잖은 압박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해당 간부들은 “사기꾼의 말을 들어서 뭐 하느냐” “대법원 판결까지 받은 사람인데, 대한민국의 사법체계를 뒤흔들겠다는 것이냐” “김경준이 이야기하는 걸 우리가 왜 들어줘야 하냐. 억울하면 직접 해결하라고 해라”며 아이템 교체를 요구했다고 박 기자는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박 기자는 지난달 휴가까지 내고 자비로 미국에 건너가 김경준씨를 인터뷰했다. 물론 방송이 나간다는 보장은 없었다.

논쟁이 계속되던 중 돌연 5월 말 들어 방영 일정이 잡혔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었다. 최종적으로 보도된 방송은 김경준씨 인터뷰 내용이 상당 부분 사라지고, 취재 요청을 거부했던 이명박 전 대통령 측의 해명이 들어갔다. 박 기자는 해당 간부들을 향해 “2580이란 소중한 프로그램을 위해 전향적인 모습을 보여주시거나 결단을 내려주시기를 요청드린다”라며 글을 맺었다. 6월16일 현재 박 기자가 올린 글에 대해 회사 측은 어떤 대응도 하지 않고 있다.

미디어 비평 시민단체인 민주언론시민연합(민언련)은 6월9~10일 이틀 동안 7개 공중파와 종편의 뉴스 프로그램이 6월항쟁을 어떻게 다뤘는지 분석했다. 이에 따르면 모든 방송이 4~5건 관련 보도를 내보내는 동안 MBC는 6월항쟁 기념식 단 한 건만을 방송했다. 민언련은 MBC가 “군부독재를 타파한 민주주의 역사를 외면했다”라고 비판했다. MBC 한 관계자는 “새로운 경영진은 루비콘 강을 건넜고, 이를 지켜보는 구성원들은 안이해지거나 괴로움에 빠져 있다”라며 탄식했다.

6월10일 킴 뉴턴 씨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달한 편지의 내용은 이랬다. “3월부터 저는 이 다큐멘터리가 방영될 수 없게 한 ‘정치적 상황’에 대해 알게 됐고, 이 이야기가 대중에게 보이지 못하게 됐다는 것을 알고 슬픔에 빠졌습니다. (···) 언젠가 대한민국이 민주주의로 이르게 되는 길에 저의 이야기가 한국 사람들에게 공유되기를 희망합니다.”



참 괜찮은 아들이었다, 한열이는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씨는 지난 30년간 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를 이끌고 국가폭력에 저항하며 아들이 못 이룬 뜻을 이루기 위해 같은 길을 걸었다.

정희상 기자 minju518@sisain.co.kr 2017년 06월 27일 화요일 제510호

30주년을 맞은 1987년 6월항쟁의 도화선은 연세대 2학년 이한열의 죽음이었다. 그해 1월14일 서울대 3학년 박종철은 경찰의 물고문으로 숨졌다. 이한열은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6월10일)’를 앞두고 연세대에서 6월9일 열린 결의대회에 참여했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졌다. 스물두 살 아들을 떠나보낸 어머니 배은심씨의 삶도 달라졌다. 지난 30년간 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를 이끌며 국가폭력에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어머니’ 노릇을 해왔다. 6월항쟁 30주기를 맞아 서울 창신동에 있는 유가협 사무실에서 배은심씨를 만났다.


ⓒ시사IN 조남진
배은심 여사는 유가협을 이끈 이유에 대해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한열이를 좋아하고 한열이가 못 이룬 뜻을 이루려고 해서 나도 엄마로서 같은 길을 걸어왔다”라고 말했다.

6월항쟁 30주년이 곧 이한열 열사 30주기인데.


한열이가 떠난 지 30년이 되도록 좋은 것을 보아도 좋은 줄 몰랐다. 물론 좋지 않은 것, 불의는 더욱 선명하게 보이더라.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한열이를 좋아하고 한열이가 못 이룬 뜻을 이루려고 해서 나도 엄마로서 같은 길을 걸어왔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진기자 네이선 벤이 당시 모습을 담은 사진 두 점을 이한열기념사업회에 제공했다.

아들이 쓰러지던 상황을 짐작만 했지 그런 사진이 남아 있을 줄 몰랐다. 보고 싶은 마지막 모습이었고(배씨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최루탄에 맞아 막 쓰러지는 순간을 생생한 컬러 사진으로 보니까 좀 충격을 받았다.

당시 이한열은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에서 27일간 사경을 헤매다 떠났는데?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 앞에서 매일 있다 보니 휠체어 타고 다니는 환자들을 자주 봤다. 그럴 때마다 “한열이가 의식이 돌아오면 나도 저렇게라도 휠체어 밀고 다니며 살려내야지” 다짐도 하고 빌었다. 그렇게 되길 간절히 소망했지만 아들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박종철 열사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1987>에 이한열 열사도 나온다던데?

배우 강동원이 이한열 역을 맡아 특별출연한다고 광주 집으로 찾아왔다.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의지가 강하더라. 꼭 한번 이한열 역을 맡아 잘 해보고 싶다고 하더라. 몸조심하면서 열심히 촬영했으면 좋겠다.

당초 이한열의 장지가 광주 망월동이 아니었다는데?

그때 장례위원들이 장례를 어떻게 치렀으면 좋겠느냐고 의견을 물었다. 한열이 아버지가 “연세대 뒷산에 올라가면 4·19 때 돌아가신 분 묘지가 있으니 한열이를 거기 묻어놓고 가자. 교문 밖으로 이한열 운구가 나가면 전두환 독재정권이 또 학생들을 죽일 수도 있다. 이런 희생은 우리 한열 하나로 족하다”라고 했다. 내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도저히 안 될 말이었다. 한열이가 보고 싶으면 찾아가서 무덤의 떼라도 만져보고 싶은데 만약 연세대 뒷산에 묻으면 아들 무덤의 풀도 흙도 못 만져보겠다는 생각에 반대했다. 내가 우상호 연세대 총학생회장에게 “한열이를 망월동에 보내자. 광주에서 고등학교도 나왔으니 망월동에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그 이튿날 “광주로 보내달라. 당신들이 안 보내주면 내가 아들 관을 머리에 이고라도 가겠다. 나는 그렇게라도 해야 살지 여기다 놔두고 못 산다”라고 한 내 호소가 신문에 실렸다.

ⓒ우상호국회의원 홈페이지
1987년 이한열 열사 49재 행사에서 당시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이던 우상호 의원(가운데)이 영정사진을 들고 서 있다.

당시 우상호 의원과 배우 우현씨가 이한열 영정사진을 들고 함께 찍히기도 했다.


그 사진은 장례식이 아니라 연세대학교 안에서 연 49재 행사 때다. 총학생회장이던 우상호 의원이 한열이 영정을 들고 교문 밖으로 나가다 경찰에 연행됐다. 잡아갈 줄 알면서 독재에 그렇게 항거한 거다. 우현이도 총학생회에서 사회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배우 안내상도 연세대 동문인데 한열이가 그렇게 아프게 떠나니까 분노했던 것이지. 자주는 못 보고 우상호 의원 선거 기간에 사무실에 가서 두 배우를 만났다.

광주 망월동행에 대해 전두환 정권이 압박했을 것 같은데.


그때는 쉽게 망월동으로 갈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 부모가 아무리 데려가고 싶어도 마음대로 갈 수 없는 그런 세상이었다. 전두환 정권 자체가 광주에서 사람을 죽여놓고도 버티는데 한열이를 쉽게 망월동으로 보내줬겠나. 그때도 국민들이 망월동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장례식 때 서울시청 앞에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주었고, 또 광주까지 가는데 톨게이트마다 구름처럼 많은 사람이 나왔다. 광주 입구인 장성톨게이트부터 한열이 모교인 광주 진흥고등학교까지 광주 시민들이 거의 다 나와주었다. 한열이가 그나마 광주에 묻힐 수 있었던 건 국민 덕이었다.

한열이의 어릴 적 기억은?

아침에 등교할 때 자주 집에 뭘 놓고 갔다. 뒤늦게 필요하다고 전화하면 내가 택시 타고 학교에 갖다 주곤 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학생회장을 했다. 어려운 친구 준다며 도시락을 두 개 싸달라고 한 적도 있었다. 이런 아들을 보며 나는 마냥 좋았다. 책임감도 강하고 리더십도 좋고, 참 괜찮은 아들이었다.

남은 자녀들은 어떻게 지내나?


한열이랑 같이 자취했던 두 살 위 누나가 교사가 되었다. 누나가 한열이 옷에서 최루탄 냄새가 난다고 이야기해서 그때 한열이가 시위에 참가하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다. 그 누나가 동생을 그렇게 보내고 나서 안일하게 살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전교조 교사가 되어 해직됐다가 복직했다. 학교 다니면서도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일도 많은 거 같다.

아들을 떠나보낸 뒤 어머님의 인생도 바뀌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다른 세상을 살았다. 거리에서 살아온 세월이었다. 억울하고 분한 엄마가 나 혼자인 줄 알았는데 이 집(유가협 사무실)에 와서 저 많은 사진을 보면서, 한열이의 억울한 이야기를 다시는 안 해야겠다고 마음먹기도 했다(유가협 사무실 한편에는 열사들 사진이 걸려 있다).

유가협 회장을 맡기도 했다.


민주정부라면 민주화 과정에서 숨진 이들이나 군대 등에서 의문사한 이들의 명예 회복과 보상책을 내놔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유가협 회장일 때 1998년부터 422일간 국회 앞에서 농성을 벌여 ‘민주화운동 보상법’과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게 했다. 이제 우리들이 할 숙제는 죽어간 많은 사람들을 국가유공자, 민주유공자로 만드는 것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계속 반대를 일삼았는데 문재인 정부에 기대를 걸고 있다.

유가협을 이끌면서 가장 힘이 되었던 분은?

민주화운동의 대모이신 고 이소선 어머님이다. 내가 힘들 때 어찌 알았는지 이소선 어머니가 찾아와서 위로해주셨다. 돌아가셔서 답답하고 아쉬운 마음뿐이다.

ⓒ연합뉴스
제30주년 6·10민주항쟁 기념식에 참석한 고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씨(맨 왼쪽)가 문재인 대통령 내외와 함께 앉아 있다.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씨도 가끔 만나나?


박종철 아버지는 지금 부산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다. 허리를 다쳐 거동을 잘 못한다. 가서 보면 눈물이 나서 볼 수가 없더라. 촛불 항쟁으로 민주적인 대통령도 나오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데 6·10항쟁 기념행사에 같이 참석도 못하셨다.

지난겨울 촛불집회에 자주 나갔나?


서울에서 몇 번 나갔다. 예전 같으면 제일 앞에 앉았을 텐데 지금은 다리가 아파서 헤치고 나오기 힘들어 주변에서 지켜봤다. 처음 촛불시위 한다고 할 때는 백남기 농민 사건처럼 물대포가 나오면 어쩌나 걱정을 많이 했다. 촛불시위 자체가 평화적으로 치러지는 걸 보니 안심이 되었다. 한편으로 또 한열이 생각도 나더라. 최루탄이 없었으면 내 아들 한열이를 그렇게 안 보냈을 텐데. 촛불시위를 보며, 감사하고 여러 가지 희비가 엇갈리는 심정이었다. 그래도 대통령이 탄핵되고, 새 대통령이 뽑히는 등 촛불 승리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마음이 편하다.

문재인 대통령을 올해 5·18 기념식뿐 아니라 지난해 총선 때도 만난 것으로 아는데?  


문 대통령이 작년에 국회의원도 당 대표도 아닐 때 광주 망월동에 내려왔다. 그때 한열이 묘를 쳐다보며 문 대통령이 “어머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나한테 묻더라. 그래서 내가 “망월동 옛 묘역도 5·18 국립묘지같이 국가유공자로 만들어주시고 이 사람들도 좋은 자리 가게 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망월동 옛 묘역에는 이한열 열사처럼 5·18 당시 희생자 외 민주 열사들이 상당수 묻혀 있다). 그런 문 대통령이 5·18 기념식에 참석해 연설했다. 참 감동스러웠다. 여러 사람이 울었다. 나도 울었다. 그런 연설, 우리는 처음 봤다.

이한열 세대가 우리 사회 중추가 되었는데?

그 시절 책임감이 강한 사람들이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잘하고들 있으니까 내가 특별히 그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것도 없다. 다만 학생운동 했을 때의 순수한 그런 마음으로, 그런 초심으로 각자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좋지 않을까 싶다.





수형자 박근혜는 자신이 폭압한 '운동권' 덕을 보고 있다

[6월항쟁 30주년 특집 인터뷰 ①] 이석태 전 4.16세월호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
2017.04.20 09:37:57

6월민주항쟁 30년, 오늘날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과 ‘6월민주포럼’은 세대와 시대를 넘어 6월항쟁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인터뷰 기사를 매주 1회 연재한다. 인터뷰는 6월항쟁을 경험한 이들이 오늘날 청년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시대를 초월한 공통의 의미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사복을 입고 재판에 출석할까?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재판정에 사복을 입고 선다면, 그건 굳이 이야기하자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하 민변) 동료 변호사들의 덕이다. 이들이 한 일의 혜택을 박 전 대통령이 보게 됐다는 짓궂은 말에 이석태 변호사(전 4.16세월호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는 웃으며 답했다.

"처음 문제를 제기 한 지 시간이 꽤 지나기는 했지만, 민변 동료 변호사들이 재소자 인권 문제를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 온 것과 연관이 있어요. 서준식 선생이 1991년 발생한 강기훈 사건과 연관되어 다른 혐의로 성동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그때 미결수도 헌법상 무죄 추정이 적용되므로 사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 거죠. 기본권 침해를 이유로 헌법소원을 제기했습니다. 그 이후로 법무부에서 교정 규정을 바꾸어 지금처럼 재소자가 원하는 경우 사복 차림으로 공판정에 출석하게 된 거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지금 우리 사회에서 민변은, 민주주의 발전과 인권 옹호를 위하여 애쓰는 변호사들이 모인 법률가 단체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민변이 30년 전 6월 민주항쟁과 관련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문호를 활짝 연 6월항쟁, 그 이듬해인 1988년 5월 창립된 민변은 사법 제도 민주화를 위해 끊임없이 달려 왔다. 민변의 창립 멤버인 이석태 변호사는 사무국장, 회장직을 역임했다. 

▲ 이석태 전 위원장. ⓒ프레시안(서어리)


이석태 "6월항쟁은 내 삶의 큰 변화" 

때문에 이 변호사에게 6월항쟁은 "삶에 큰 변화를 가지고 온 사건"이다. 6월항쟁 직후 자연스럽게 민주주의 발전을 요구하는 사회적 흐름에 합류해 왔고, 민변과의 인연도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변호사는 1982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2년간의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1985년 변호사가 되었다. 연수원 시절부터 변호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그는, 연수원 시절 아르바이트를 하던 로펌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연수원 생활 외에 대부분의 시간을 거기에 가 있었어요. 선배 변호사들을 돕고 하다 보니 연수원 수료 후 그 사무실 변호사가 됐죠." 

이 변호사가 처음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던 로펌은 당시 국내외 큰 기업이 고객인 곳이었다. 대학생 시절 "학생 운동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대학신문> 기자였기 때문에 그 언저리에서 놀았"던 이 변호사에게는 어쩌면 맞지 않는 옷이었는지 모른다. 

"소송을 하면 대개 대리하는 당사자가 당시의 대기업일 수밖에 없는데, 제가 보기에는 법리적으로 노동자들의 주장이 옳은 경우가 많았어요. 제 생각이 사무실의 방향이랑 좀 어긋나 있던 거죠." 

이런 일 등으로 생각이 많던 때 6월항쟁이 터졌다. "당시 변호사들도 국민운동 본부 등에 직접 참여해 호헌 철폐 등을 주장하고 있었는데, 저는 보통의 변호사로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여했어요." 6.10 항쟁 당일에도 거리에 있었던 것 같다고 이 변호사는 기억을 더듬어 말했다. 

"제가 일하던 법률 사무소가 당시 남산 초입에 있는 도쿄호텔이라고 부르는 높은 건물 내에 있었어요. 그 건물 8층에 법률 사무소가 있었고, 그 사무소 내에 남대문 시장이 보이는 쪽으로 제 방이 있었죠. 거기서 보면 서울시청까지 보여요. 그 부근에서 매일 시위를 하니까 자연히 구경삼아 들락날락거리게 되고, 그러다가 광장으로 나가게 됐죠. 연세대에서 이한열 군 사망 사건이 터졌을 때(6월 9일 연세대 앞에서 최루탄에 피격돼, 7월 9일 사망)도 시위 대열에 합류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지금은 제가 넥타이를 거의 안 매고 살지만, 그때는 늘 넥타이에 정장하고 있을 때니까 다른 사람이 보면 넥타이 부대라고…. 아무튼 자주 나갔어요."

기업을 대리하는 로펌이라면 눈치를 주지는 않았을까. "굳이 누구에게 말하지 않고 나가는 거죠. 당시 그 로펌은 엄금까지는 아니지만, 변호사가 근무 시간에 사무실 밖으로 나가는 걸 바람직하다고 보기는 어려웠죠. 그래도 변호사는 좀 자유로우니까요." 6월항쟁의 한 복판에 섰던 이 변호사는 그해 가을, 로펌에서 나왔다.  

"변호사 생활의 상당 부분을 민변 업무와 연관 지어 보냈다"

같은 해 겨울, 이 변호사는 민변 전신인 청년변호사회(청변)에 우연히 관여하게 됐다. 대학 동기들이 청변과 이 변호사의 연결고리였다. 

그 무렵 태동한 시민사회 단체들이 대개 비슷했겠지만, 6월항쟁의 끝에 조직된 청변 또한 학생 운동권의 영향을 다소 받았던 것으로 이 변호사는 기억했다. 

"변호사로서 억울한 사람을 돕는다는 보편적인 측면 외에 변호사일 자체를 사회 운동으로 생각했던 경향이 있었습니다. 변호사 부문운동이라고나 할까요. 사회 발전 과정에서 변호사가 기여할 바를 정하고, 그런 일을 다른 부문과 연관 지으면서 해 나가는 거죠. 처음에는 스터디 그룹 유사하게 10여 명의 변호사가 소규모로 같이 공부하면서 여러 방면의 논의를 했어요."

제대로 된 조직을 구성하자는 쪽으로 논의가 진행되자, 당시 주요 시국 사건을 변호하는 선배 변호사들이 만든 단체인 '정의실천법조인회'(정법회)와 합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 "청변이 해소되고 민변이 됐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건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경험이 없는 젊은 변호사들이 선배들로부터 배우고, 또 그 열정을 바탕으로 조직에 활력이 생기게 된 거지요." 

그렇게 민변이 탄생했다. 민변이라는 이름은 조영래 변호사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고 한다. 

"베어스타운에서 창립모임을 가졌는데, 이름을 지어야 했습니다. 그때 50여 명 정도가 모였습니다. 무슨 협회라든가 하는 식으로 의론이 분분했죠. 대체로 좀 딱딱하고 경직된 이름이 많았는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하니까 뜻이 분명하고 부르기 쉽지 않습니까. 나중에 그 이름을 줄여서 민변으로 하게 된 거지요." 

지금 민변은 회원 수가 1000명이 넘지만, 출범 초기에는 51명에 불과했다. "그 중에 젊은 변호사들이 절반쯤 되려나. 당시에 제가 젊은 변호사 축에서는 나이가 좀 많은 편이어서 간사 역할을 했는데, 민변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커서 일이 많았어요. 그 후 차츰 민변 회원 수가 늘어나면서 일을 분담하게 되었지만, 제 사무실 동료들 또한 민변 회원이어서 이래저래 민변 업무와 관련된 일을 계속하게 됐지요. 그러다보니 민변 회장도 했고, 그 전에는 사무국장도 했어요." 그는 “변호사 생활의 상당 부분을 민변 업무와 연관 지어 보냈다고 하면 되겠다"고 설명했다. 
 
"박근혜, 운동권들의 혜택을 보고 있다" 

6월항쟁의 결과 탄생한 민변은 법률 전문성을 가지고 우리 사회에서 민주화된 영역을 꾸준히 넓혀왔다. 민변 변호사가 헌법 소원을 제기했던 미결수의 수의 착용 문제뿐만 아니라, 감옥에서의 인권 문제 역시 그런 노력의 결과물이다. 

"우리가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재판을 다수 할 때라 법정이나 감옥에서의 인권 문제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고, 재판 과정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개선을 요구하게 된 거지요. 그렇게 하다 보니 점차 여러 조건들이 나아지게 되었는데, 그 혜택을 우리가 변론한 사람들 외에 다른 피의자나 재소자들이 보게 된 거죠. 예를 들면 변호인 접견권의 보장, 텔레비전 시청이라든가 집필의 편이 등 모두 어느 날 거저 생긴 게 아니고, 일정한 투쟁을 통해 획득해 낸 거예요." 

박근혜 정부가 블랙리스트까지 만들어 배제시키고자 했던 이들, 이른바 '운동권'을 포함한 시민사회가 끝끝내 지켜낸 헌법적 가치가 오히려 이들을 단죄하려 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인권에 까지 이르러 이를 지켜내는 상황(헌법재판소는 탄핵 결정문에서 박 전 대통령에게서 "헌법 수호 의지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역설에서 6월항쟁 이후 지난 30년 동안 진척된 민주주의를 새삼 목격하게 된다. 

"불과 20년 전에는 피고인들이 재판정 가운데 서서 수갑이나 오랏줄에 묶여 재판을 받기도 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변호사와 피고인들의 노력으로 피고인들의 손이나 팔에서 수갑과 오랏줄을 풀게 하고, 자리에 앉히고, 그리고 변호사 옆에 앉게 된 거죠. 말하자면 이게 다 역사가 있는 겁니다. 6월항쟁의 성과가 모든 면에 미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변호사들이 법정에서 잘못된 구태를 지적하여 고치고, 형사소송법이 바뀌고 해서 지금처럼 어느 면에서는 미국 영화에서 보는 것과 큰 차이가 없는 모습이 됐습니다."

이 변호사는 "예전에는 수사 기관에서 피의자가 조사를 받을 때 변호사가 참여를 하지 못했어요. 접견 시에도 교도관 등이 옆에서 듣는데 하기도 했죠"라고 이야기를 이어 갔다. 이 변호사의 말에 박 전 대통령이 변호사와 함께 검찰 조사를 받고, 7시간 동안 조서를 검토했다는 뉴스가 곧바로 떠올랐다. 

"이런 잘못된 제도나 관행이 고쳐진지 불과 10년이 되지 않았어요. 조사가 끝난 후에야 변호사를 따로 만났고, 조사 때는 변호사가 입회를 할 수 없었어요. 조서의 도장도 본인이 혼자 내용을 보고 찍었습니다. 지금은 조사 자리에서 변호사가 다 보고 확인하지요."

이 변호사가 언급한 '변호인의 피의자 신문 참여권'은 지난 2007년 6월 형사소송법이 개정되면서 법률에 명시됐다. 지금은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는 이 권리가 법률에 보장된 지 만 10년도 채 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이 역시도 6월항쟁의 연장선상에 존재한다. 이 법률의 개정을 이끌어낸 대법원 판결(2003년, 송두율 교수 사건)을 담당한 김형태 변호사도 청변을 거쳐, 민변의 회원이다. 두 변호사는 함께 법무법인 덕수를 이끌고 있다.

▲ 이석태 전 위원장. ⓒ프레시안(최형락)


"강기훈 사건, 더 나은 변호사가 실무를 담당했더라면…"

이 변호사는 매향리 미공군 사격장 소음 피해 소송, 동성동본 금혼 폐지와 호주제 폐지 헌법소원, 일본군 '위안부' 헌법 소원 사건 등 각종 사회적 관심이 큰 재판에도 참여했다. 6월항쟁이 "사법부의 독립에도 좋은 영향을 줬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결과라고 이 변호사는 설명했다.  

1987년 이후 활발하게 전개된 시민사회운동과의 결합 또한 놓쳐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성과를 이야기하면서 이 변호사는 계속 "좋은 동료들과 해서 얻어낸 결과"라는 점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저희가 6월항쟁 이후에 민변을 만들었어요. 또 중요한 사회적 의미가 있는 소송들은 변호사 혼자 할 수 없어요. 시민사회단체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협력해야 하는데 그게 컸죠. 일례를 들면, 호주제 폐지문제는 초기에 변호사들이 기획했지만, 여성단체는 말할 것도 없고 계속 진행 해 나가면서 점점 더 많은 시민사회단체의 도움을 얻어서 된 거예요. 이들 시민사회 단체는 대개 6월항쟁의 산물이었죠." 

하지만 6월항쟁은 군사 독재 세력인 노태우 씨에게 대통령 자리를 또다시 내어 주며 미완의 혁명으로 종료됐다. 그 한계는 여기저기에 상흔으로 남았다. 이 변호사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30년의 변호사 활동에서 가장 아쉬운 점을 묻자, 그는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 사건'(1991년)을 꼽았다. 6월항쟁 이후에도 교체해내지 못한 군사 독재 정권의 연장, 노태우 정권에서 벌어진 비극이다. 

강기훈 씨가 누명을 벗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24년. 지난 2015년 열린 재심 공판에서 대법원은 강기훈 씨에게 최종 무죄를 선고했다. 이 변호사는 20여 년 동안 변호인단의 일부로 강 씨의 변호를 맡았다.  

"글쎄… 결국 본인은 늦게나마 무죄를 받아서 다행이긴 한데요, 비록 노태우 정권 하라고 해도, 제가 조금 더 경험이 있고 주도면밀했더라면 초기 재판 당시 무죄를 받지 않았을까, 강기훈씨의 억울함을 좀 더 일찍 덜어드리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물론 제 역할이 당시 변론을 이끈 작고한 김창국 변호사님과 박연철 변호사님을 도와 실무적인 일을 하는데 있었지만요." 

이 변호사와 강기훈 씨가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사이에도, 이 사건을 조작해 낸 이들은 승승장구했다. 주임검사였던 신상규 씨와 검사 안종택 씨는 모두 검사장을 지냈고,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김기춘 씨는 국회의원과 청와대 비서실장까지 요직을 두루 거쳤다.

당연히 누구도 처벌 받지 않았다. 국가와 당시 주임검사 신상규 씨, 강 씨의 필적을 감정한 김형영 씨 등을 대상으로 한 민사 소송만이 진행 중이다. 이 변호사는 "국가 책임, 김형영 씨 본인의 책임은 물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검사들 책임은 어떨지…"라고 말했다. 형사상 책임은 공소시효가 만료돼 묻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거짓을 만들어 내고, 책임지지 않는 김기춘과 같은 권력들은 그렇게 적폐로 쌓였다. 그리고 김기춘이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내던 2014년, 세월호에 과적된 적폐는 결국 참사로 이어졌다. 

지난해 9월 박근혜 정부에 의해 강제 종료된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이하 특조위) 위원장을 맡았던 이 변호사는 이 대형 비극을 어떻게 봤을까. 이 변호사는 일본에서 중고 배를 수입해온 때부터 해운 관련 규제 완화 그리고 구조 과정에 이르기까지 각종 문제들을 단계별로 지적했다. 그리고 참사 당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행실 문제를 지적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참사 당일 오전에 뭘 했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어요. 오후에는 머리를 하고, 세월호가 이미 다 가라앉은 뒤인 오후 5시에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갔습니다. 총체적으로 재난을 예방하고 참사 발생 시 구조해야 할 국가 재난 관련 기구가 부실한 겁니다. 사회적 신뢰가 무너진 거고요."  

세월호 참사를 말하는 이 변호사의 목소리가 잠시 흔들렸다.
  
다행히도 무너진 신뢰가 회복되는 모습이 보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촉구하는 촛불집회에서였다. "변호사로서 종종 시민사회 단체 활동가들과 협력해서 일을 해온 저는 대규모 집회 때는 사실 좀 걱정이 있어요. 저러다가 혹 폭행이나 폭력 사태가 발생하여 대의에 손상이 되지 않을까. 이번에도 보니 촛불집회 초기 시민들이 경찰 버스 위에 올라가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서로 자제하고, 오히려 차벽에 꽃이나 재미난 내용이 들어 있는 스티커를 붙여 평화적인 집회를 유도하더니, 나중에는 스티커 등을 떼 말끔하게 하는 등, 저 스스로 이번 촛불 집회는 참여 자체가 새로운 경험이고 공부가 됐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도 맨 앞에서 집회를 이끌었지요. 때문에 저는 이번 촛불 집회로 박근혜 정부 4년을 지나면서 어려움에 처했던 우리 사회의 민주적 시민 의식이 커다란 진전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이 변호사는 "만약 6월항쟁 같은 것이 없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 같다"고 현재 진행형인 6월항쟁의 의미를 설명했다. "더 이상 독재로 회귀하거나 국민들의 민주적 바람을 억눌러서는 안 된다는 게 지금까지 살아있는 거죠. 촛불은 보다 발전된 형태에요."

6월항쟁의 미래가 촛불집회로 나타났다면, 2017년 촛불집회는 어떤 모습으로 평가해야 할까. 촛불을 들고 나선 시민들이 지키고자 했던 가치를, 어떻게 이어나갈 수 있을까. 난해한 질문에 이 변호사는 웃었다. 

"우선 이명박, 박근혜 정부 10년을 겪으면서 기초가 손상된 사회 정의와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고 봅니다. 또 그것이 무엇이든 각자가 하고 있는 일을 민주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해나가야 하겠지요. 그리고 공화국 헌법 1조, 국민 자신이 주권자라는 것을 늘 자각하면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언제든지 정부가 잘못할 때에는 자기 스스로 먼저, 그리고 동료들과 연대해서 나서고 외쳐야 할 준비를 위해서 말이지요."

이 변호사의 답변은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모습과 무척 흡사해 보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연대를 강조한 이 변호사와 잘 어울리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그의 사무실 입구에 걸려 있는 액자에는 故 신영복 선생님께서 써 주신 문구 '함께 하는 삶'이 적혀 있었다.


"잘 늙어가는 충실한 시민적 삶을 살아야 한다"

[6월항쟁 30주년 특집 인터뷰 ②] 황인성 수원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사장
2017.04.27 08:39:05

"보통시민의 변화, 6월민주항쟁의 핵심" 

1987년 6월 10일. 그는 며칠 전부터 집을 나와 있었다고 한다. 경찰이 사전에 가택연금을 한다거나 연행을 하면 일을 그르칠 수 있으니. 당시 상임집행위원으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에 몸을 담고 있었던 황인성 수원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사장은 30년 전 일을 어제 일인 양 또렷이 기억했다.  
 
"오후 9시부터 10분간 텔레비전을 끄고 전등을 끄자고 했어요. 그게 얼마나 실천될까, 이게 아주 관심거리였어요. 그때 내가 이화동, 저쪽으로 내려가면 종로5가 사거린데, 이쪽쯤에 내가 서 있었어요. 이 근처에는 사무용 건물이 있었고, 저쪽 낙산에는 서민아파트들이 주욱 서 있었어요. 대개 못사는 사람들이 사는 서민아파트였는데, 내가 볼 때 여기저기 창문의 빛이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반 가까이가 꺼지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뭐라고 해야 하나. 등골에 찬 기운이 쫙 흐르는 거야… ." 당시 국본이 배포한 '6.10 국민대회 행동요강'의 4항에는 ‘전 국민은 오후 9시에서 9시 10분까지 10분간 소등하고, KBS, MBC 뉴스 시청을 거부함으로 국민적 합의를 깬 민정당의 6.10 전당대회에 항의하고 민주쟁취의 의지를 표시할 수 있는 기도, 묵상, 독경 등의 행동을 한다’고 되어 있었다. 

"엄청난 감격 같은 것이 느껴졌어요. 앞서 오후 6시 태극기 하강시간에 맞춰 시청 앞에서도 지나가는 택시나 버스가 일제히 경적을 울리고, 차안에 있는 사람들이 손뼉을 치고, 손수건이나 손을 흔드는 것을 보면서 '아, 이제 우리가 하나가 되고 있다. 숨죽이고 있던 국민들과 운동본부가...' 이런 걸 확인하면서 몸이 떨렸거든. 그런데 소등한다는 것은 몸이 거리에 있지 않고 집에 있지만 이런 큰 국민적 저항행동에 나도 함께 하고 있다고 하는 걸 보여주는 거잖아요, 그것도 한 가족 단위로.… ." 

87년의 재야, 종교, 야당 정치인 등의 민주인사들은 그간 비밀리에 준비해 온 국본을 5월 27일 결성대회를 통해 공개적으로 발족했다. 이 자리에서 6.10 국민대회를 전국적으로 개최하기로 선포했다. 그러나 이 대회이후의 계획은 뚜렷하게 세우지 못한 상태였다. 나중의 일이지만 한 달 만에 저 사람들이(독재 정권) 자신의 의지를 꺾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당시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은 국민의 호응이 있었고, 그럼으로 해서 국민적 분노와 전두환 정권에 대한 거부감이 얼마나 큰지 확인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 황인성 이사장. ⓒ바꿈


대대적인 국민의 호응도, 6.29선언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황 이사장의 말에 "그렇다면 예상하신 것은 무엇이냐"고 장난 섞인 질문을 던졌다.  

그해 초에 발생한 고(故) 박종철 열사 고문살인 사건 당시 개최된 국민추도대회(2.7.)와 평화대행진(3.3.) 때보다 대회 규모가 분명 커져 있었다. 4.13 호헌조치에 대한 국민적 반대가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는 징표였다. 참여한 시민들의 규모가 정부와 여당을 정치적으로 몰아붙이는 계기가 되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 대회를 기점으로 국민적 저항 행동이 지속적, 그리고 폭발적 양상으로 분출되어 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시위학생들을 연행하려는 경찰들에게 멀리서 야유를 보내는 식으로 시위를 응원하던 시민들이, 쫒기는 학생들을 자신의 가게에 숨겨주고, 결국에는 최루탄 자욱한 거리에 함께 서게 되는 변화를 보면서 뭔가 '일을 내겠다'는 색다른 느낌도 없지는 않았다고 한다. 

조직적으로 거리투쟁에 나선 학생이나 재야단체 회원들, 정당원들과 달리 말없이 숨죽여 살아오던 보통시민들이 국민행동요강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손수건 흔들기, 차량경적 울리기, 전등 끄기 등), 탄압에 대한 공포를 뚫고 한 사람 한 사람 시민의 작지만 분명한 결단이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 그가 느꼈던 희망과 세상이 변화하기 시작한다는 기분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80년 광주가 학생들로 하여금 뭔가 현실을 거부하고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게 하는 일종의 명령을 내리는 그런 것과 같은 거예요.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학생들은 광주의 죽음에 대한 빚진 마음, 이런 게 엄청 강했던 것이고, 그걸 침묵하고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모든 학생이 그렇지는 않지만,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어요."

계속되는 군사독재정권, 죽어가는 학생들, 고문, 최루탄, 그리고 5.18 광주항쟁. 자신의 집안에서 불을 끄는 일조차 무서웠을 시절에 그 수많은 사람이 쏟아져 나온 거리와 광장은 흡사 그에게 기적이 아니었을까. 

"가치가 중시되는 시대, 30년 간 깊어진 문제의식" 

2017년 촛불이 유난히도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은 것은 비폭력이라는 기조도 한 몫 했지만 사람 수 만큼이나 많은 구호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장애, 여성, 성소수자, 채식 등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구호들. 자신의 처지와 연결시키면서 민주주의를 외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2017년의 변화라고 하는 건 87년보다는 문제의식이 훨씬 깊고 넓죠. 왜냐. 87년은 눌려 있었으니 일차적 요구가 대통령직선제(정부선택권)와 민주헌법 쟁취로 모였잖아요, 그게 됐어요. 그대로 된 거야. 됐는데 이런 제도적 변화가 왔다고 민주주의가 완성되느냐, 아니에요.

87년에 우리가 직선제 개헌을 했다고는 하지만, 민주주의라는 게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잖아요. 계속 발전하고 구체적인 삶의 변화로 이어져야 하는데, 2017년의 변화라고 하는 것,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간 변화 또한 더 큰 변화를 위한 출발점일 수밖에 없다 하는 걸, 6월항쟁 이후 30년이 가르쳐 준 거라고 생각해요." 

아쉬움이 많았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직선제를 쟁취했지만 결국 당선자는 노태우 민주정의당 후보였다. 정치권은 분열됐고, 재야세력 내부에서도 상호불신이 커졌다. 대안이 되어야 할 재야운동에 내적으로 균열이 생겼고, 이후 정세에 통일적으로 대응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개헌 후 대선 날짜가 결정되자 국본 상집위원 내에서도 비판적 지지그룹, 백기완 후보 선거운동본부, 후보단일화 그룹 등이 순차적으로 빠져나갔다. 황 이사장의 표현에 따르면 ‘이래저래 정파적이지 못한’ 몇 사람만 국본에 남았고, '상처뿐인 국민운동본부'가 되어버렸다. 뿔뿔이 흩어진 대가는 컸다.  

사실상 군부정권의 연장이라는 참담한 대통령 선거결과였다. 그렇지만 투쟁의 성과인 국민기본권의 확대로 시민적 공간이 열리면서 새롭게 시민사회의 다양한 운동이 나타나고 성장하기 시작했다. 30년 전 쟁취한 현행 헌법의 틀 내에서 시민들은 멈춰있지 않고 가능한 틈새를 찾아 끊임없이 자기성장을 도모해 왔음을 이번 촛불광장에서 다시금 확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에 억압된 상황 속에서는 문제는 있지만 주요하게 부각되지 않은 ‘가치’, 가치가 중시되는 시대가 온 거에요. 여성이라고 하는 가치, 환경, 평화·통일, 그 다음에 경제정의와 같은 이런 시민단체들이 생기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는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었다. 그는 6월항쟁 이후 있었던 많은 문제들과 그것에 대항했던 시민들의 공동의 경험은 누적되었고, 우리는 그 크고 작은 승리의 경험을 학습하고 있다고 말했다. 1987년의 6월이, 2002년의 효순·미선이가, 2008년의 미국산 소고기 수입반대 촛불이, 2015년의 백남기가 없었다면 오늘의 촛불과 탄핵도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 황인성 이사장. ⓒ바꿈


"정치권의 미진한 결정들, 결국 변화는 시민들의 손으로"

동의가 어렵지 않았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세상을 바꾸는 것은 자각한 대중의 힘, 피플파워(people power)라는 것은 동서고금을 망라해 역사가 증명해 주는 사실이니 말이다. 다만 그에게 조금 더 듣고 싶었던 이야기는 1987년 6월을 바탕으로 성장된 시민의 힘으로 故김대중 전 대통령과 故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잡았는데, 우리는 왜 아직도 '이게 나라냐'를 외쳐야만 했느냐는 것이었다. DJ정권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사무국장이었고, 참여정부 당시 시민사회수석을 맡았던 그에게 역진한 민주주의에 대한 책임을 조금은 묻고 싶었다. 

"헌재에서 (故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가 기각되어 다시 국정에 복귀한 뒤 얼마 되지 않아서 노 대통령께서 몇몇 시민사회 단체인사들을 초치해 간담회를 가졌지요. 그날 저녁에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나는 우리사회의 개혁과 변화를 위해서는 시민사회가 중요하다는 말을 했어요. 왜냐. 제대로 된 변화는 정부, 관료나 국회의 힘만으로는 어렵다. '시민사회라고 하는 국민, 국민과 동맹을 해야 한다'고 했지요. 그게 뭔가 조금 통한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이 양반(故노무현)한테…."  

그때(참여정부) 왜 그러셨어요, 후회되는 것은 없으셨나요, 하는 다음 질문들을 마음 속에 담아뒀지만 결국 묻지는 못했다. '그(청와대) 안에 있는 것과 밖에서 보는 것과는 참 많이 다르더라'는 그의 말. '내가 지금까지 내려온 결정들이 모두 미진했던 것만은 분명한데 그게 과연 잘못된 선택이었기 때문일까 혹은 이 역사의 한계였을까'하는 그의 고민. 굳이 질문을 던지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통해 밝혀내야 하는 수많은 죽음들, 이미 자살로 종결되어 오로지 가해자의 무죄를 입증할 증거만 남아있거나 아예 관련 자료제출을 거부하는 국가기관의 현실, 상황이 잘 풀리지 않는 속에서 진상규명위원회의 진로를 두고 발생한 동료들 간의 다툼. 어느 가치에 설 것인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하는 순간들, 대통령이 국방부 장관이나 검찰총장을 바꿔도 전문성을 앞세운 관료조직의 관성과 이해관계가 변화를 은근히 가로막거나 정책을 변질시키는 경우도 많았다. 

"왜 그걸 못했어!, 못한 건 사실인데(웃음), 그럼 그때 어떻게 했어야 하지, 하고 생각해보면 참 답이 없는 것도 있어요." 

미진한 선택들이었다는 고백은, 결국 우리가 봐야 할 것은 결코 저 위의 권력자가 아닌 내 옆의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공고히 했다. 의미 있는 변화는 여의도(국회)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말과 함께 나라가 바로 서려면 국민이 바로 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계속 되는 항쟁의 결과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으로서 말이다.         

"그걸 이번에 뒤집어 놓은 건 누구냐, 투표라고 하는 종이 돌을 던져서 국민들이 바꿔놓은 거예요(지난 해 4.13총선). 이 보이지 않는 종이 돌이 가지고 있는 힘을 제대로 행사한 것도 흩어져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국민이었고, 삐뚤빼뚤 이래해야 하나 갈피를 못 잡는 국회의원들한테 퇴진은 말할 것도 없고 퇴진 안 한다고 하면 그 때는 할 수 없다, 탄핵이라는 합법적인 방법을 선택해야한다, 이렇게 만든 건 광장에 나선 국민들이었다고.."

▲ 황인성 이사장. ⓒ바꿈


"잘 늙어가는 충실한 시민적 삶"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바꿔나가는 세상. 말이야 낭만적이지만 그게 쉽나, 생각해보니 그의 인생이 궁금해졌다. 도대체 어떤 원동력을 갖고 있기에 30년, 40년의 세월 동안 그 자리를 지켰는지, 30차도 채 안 되는 주말의 촛불집회도 매 주 참가하기 버거운 삶인데 말이다.  

"일단은 이게 뒤에 쫄쫄 따라간다고 생각했는데(웃음) 어쩌다보니 내가 제일 가운데 있고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선배들은 다 잡혀가고 내가 젤 앞에 있는 거야(웃음)."
  
웃으며 말하는 그에게 다음 질문을 던지자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40년 전으로 돌아가더라도 현재와 같은 삶을 사실 것이냐 묻자, '지금처럼은 안 살 것 같다'는 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샤이'했던 고등학생 황인성은 기자나 외교관이 되고 싶었다. 외교관이 되면 그도 연미복을 입고 파티나 다니는 것이 일인 줄 알았다고. 외교학과에 가고 싶다고 하니 학교에서는 서울대에 안전하게 합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전혀 원치 않는 독어독문학과 원서를 써주셨다고 한다. 

대학에 들어갔을 때 어려운 집안사정 때문에 시위 같은 것과는 아예 담을 쌓고 지냈다. 그러나 존경할 만한 친구들이 하나둘 군대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 도시빈민 실태조사를 나갔다가 엄청난 빈부격차와 비인간적인 삶에 분노하면서 주저했던 마음도 잠시, 탁 하고 시작된 운동이었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지식인으로서의 관념적인 사명감이 아니라 분노라는 감정이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처음부터 목숨을 바치겠다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라고, 순간의 결단을 거쳐 어느새 여기에 와있는 것이라고. 매번 힘든 결단들을 해왔을 그의 젊은 날들이 고되게 느껴지는 찰나에 그가 해준 말에 그나마 위안을 받았다.

"청와대에서 나와서부터 인생관이 달라졌어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뭔가 해야 되는 사람, 뭔가 앞장서서 고민을 하고 남에게 보탬이 되는 일을 하거나 가르쳐야 하거나. 약간 엘리트 의식이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아. 그런 것들이 오히려 나를 옥죄어 왔다,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 생각. 어떤 뭔가 내가 보통사람들보다 조금 더 헌신적이고 좀 더 책임감을 가지고 이래야 한다는 거, 그건 조금 오만한 생각 같다, 이런 생각도 하게 되었어요.

아주 거대한 권력의 정점에 있다고 해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전체가 고루 발전해야 그 힘으로 뭐가 되는 거지. 어떤 특정 집단의 대단한 능력, 의지 이것 가지고 세상이 변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충실한 시민적 삶. 이런 것이 뭘까. 그런 걸 어떻게 할까. 그래서 우리가 21세기에 잘 늙어가는 사람이 되자(웃음), 시민으로서."

무려 4시간동안 나눈 이야기 속에서 무수한 말을 쏟아냈지만 결국 그의 메시지는 하나였다. '충실한 시민적 삶'. 독재정권의 부당함을 알릴 시간을 벌기위해 학생들이 건물옥상에 건 밧줄에 매달려 소리를 질렀던 시절부터 그의 표현대로 '삐까번쩍'한 2017년의 촛불집회까지, 지난 40년의 역사 속에서 고군분투한 그가 깨닫고 유지한 메시지였다.

1987년의 청년들이 6월민주항쟁으로 갚고자 했던 광주시민, 광주영령에 대한 빚. 지금의 청년이 용산에게, 세월호에게, 백남기 농민에게, 그리고 2017년 촛불에게 진 빚은 또 어떻게 갚아야 할까. 분명 그 답은 황 이사장의 삶처럼 돌고 돌더라도 결국은 ‘충실한 시민적 삶’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미완의 시대를 살고 있다"
[6월항쟁 30주년 특집 인터뷰 ③] 정대화 상지대학교 교수
2017.05.04 06:51:01

"6.10 국민규탄대회는 경찰의 강력한 저지로 봉쇄됐으나 …(중략)… 하오 9시쯤 퇴계로 일대에서 시위를 벌이던 학생 1천여 명이 명동성당 안에 집결, 철야시위 농성에 들어갔다. …(중략)… (11일) 낮 12시40분쯤에는 신부와 수녀들이 학생들에게 줄 빵과 음료수를 사가지고 후문으로 들어가다가 음료수 병은 화염병으로 이용될 위험이 크다는 이유로 병 음료수는 모두 경찰에 압수당했다."(6.10 집회 무산…3000여명 연행’/ <경향신문> 1987년 6월 11일자)

그날, 그곳에 정대화 교수(상지대 교양학부, 정치학)도 있었다. 화염병을 잘 던지고 데모 가서 구경하는 게 '주업무'였던 그는 서울시청 앞 행사가 무산되고 학생들이 명동으로 갔는데 그걸 멋모르고 따라들어 갔다가 명동성당에 며칠 있었다. 정 교수가 기억하는 30년 전은 당시 보도된 신문 기사 그대로였다. 

6월항쟁 당시 정 교수는 석사 과정을 마치고 석사논문을 쓸 생각도 없이 이리저리 놀러 다니던 30대 초반의 늦깎이 대학원생이었다. 하필이면 명동성당 근처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이 있는 정치학도였다. 

"명동성당 바로 맞은편에 로얄호텔이라고 있어요. 거기(나이트클럽)에 제가 아는 사람이 있었어요. 아르바이트 할 때 우리 부서 부장이라는 사람이 가자고 해서 몇 번 갔다가 우연히 어떤 사람을 알게 됐는데, 친한 건 아니었고요. 거기서 아는 사람 명함을 하나 빌렸어요. (아르바이트 그만 두고) 이미 한 3년 지나버렸는데 순전히 경찰 저지선 뚫으려고 가서 부탁을 했어요. 경찰이 포위하고 있는 구역 안에 로얄호텔이 있었거든요. 경찰들도 업무를 방해할 생각은 없는 거니까… 그리고 제가 일반 학생처럼은 안 보이게 굴었죠. 거기 갈 때는 직장인인 것처럼 흉내를 냈어요. 

경찰하고 얘기를 하고 (성당에) 들어가니까 처음에는 학생들이 탁 막더라고요. (대학원) 학생증을 보여줬죠. 사수대 아이들은 대체적으로 자기들끼리 조직이 돼 있기 때문에 한 두세 번 정도 하니까 '저분은 학번이 엄청 높은 선배님이시다. 저 분이 오시면 막지 마라' 그래서 왔다 갔다 했어요. 그렇게 끝날 때 까지 있었어요." 

다른 학생들과 달리 명동성당을 들락날락하는 게 가능했던 정 교수는, 경찰 포위망 안팎을 드나들며 인근에서 열리는 모든 집회에 다 갔다. 50%는 구경, 30%는 연구 목적의 참여 관찰을 위해서였다. 나머지 20%는? "형편이 되면 (뭐든) 던지기 위해서"라며 웃었다.

▲ 정대화 교수. ⓒ바꿈


"명동성당이 6월항쟁의 기폭제였다" 

정 교수는 명동성당에서의 농성이 "6월항쟁을 일으키는 원동력, 기폭제였다"고 설명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 전두환 정권의 폭압에도 불구하고 재야·운동권 수준에서 머물던 분노가, 명동성당을 계기로 폭발했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4.13호헌조치 직후에 야당은 당의 전열을 정비했어요(4/21 김영삼과 김대중의 통일민주당 창당). 그런데도 동력이 잘 안 붙었어요. 동력을 붙인 게 국가가 국민을 속였다는 것(5월 18일,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되었다는 내용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이었어요. 이렇게 되니까 파장이 커졌죠. 그 파장이 최초로 나타난 게 6.10 대회였는데, 이게 원천 봉쇄돼 버린 거예요.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명동성당에 농성을 탁 튼 거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거기로 모였어요. 각 대학 총학생회는 모든 전략을 거기에 다 걸었어요. 성당에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 포위된 명동 주변, 예를 들어 을지로나 퇴계로, 종로에서 집회를 했죠. 그 거리들은 항상 화염병으로, 최루탄으로 가득 찼는데, 학생들이 몰려들고 거기서 취재가 진행됐죠. 외신기자들은 성당으로 들어올 수가 있었어요. 그러니까 안에서 취재하고 그게 해외로 보도되고, 해외로 보도된 건 다시 명동성당까지 들어오고…." 

10일 밤부터 15일까지 엿새 간 이어진 명동성당 농성은 그렇게 일회적인 행사로 끝나서 좌절돼 버릴 듯 했던 '고문 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를 6월항쟁으로 키웠다. 야당 정치인들이 움직였고, 국본은 다음 투쟁을 준비‧진행했다. 성당 농성 해제 사흘 뒤인 18일 열린 ‘최루탄 추방대회’에 전국 150만 명이 참여했고, 26일 열린 '국민평화대행진'때에는 무려 180만여 명(전국)이 거리로 나섰다. 결국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했다.

지난 이야기를 하는 정 교수는 조금 신이 난 듯 보였다. 화염병 던지는 요령을 설명할 때의 표정에서는 '놀기 위해 데모에 나갔다'는 말이 그저 농담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때문일까. 정대화 교수의 연구실은 지금도 투쟁 현장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소송 관련 서류들과 검찰청에서 온 우편물 뭉텅이, 그리고 여러 장의 담요와 야전 침대가 연구실 곳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연구실 문에는 '김문기를 반대한다!'는 문구가 적힌 새빨간 피켓이 부적처럼 붙어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이 연구실에 놓인 건 김문기 전 상지대 총장 탓이다. 지난 2014년 8월 김문기는 상지대 총장으로 복귀했고, 같은 해 12월 정 교수를 파면했다. 정 교수는 이에 대응해 연구실을 점거(?)했다. 

"제가 여기서 안 나가고 6개월을 살았어요. 제가 여기서 사니까 총학생회장은 여기서 자고, 교수들은 이쪽에서 자고. 졸업생도 와서 잤어요. 야전침대까지 들어왔죠. 늘 사람들이 몇 명 있어서 (학교 측에서 방 빼기를) 포기했어요." 

▲ 각종 소송 자료. ⓒ바꿈


"김문기를 반대한다!" 

상지대에서 김문기 퇴진 운동이 다시 시작된 건 지난 2010년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사학분쟁조정위원회를 통해 김문기 측 구재단의 복귀를 결정했다. 그 후 상지대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87년 체제의 불완전성과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역행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단면을 고스란히 옮겨다 놓은 모양새였다. 블랙리스트라도 있는 양 김문기에 반대하는 교수와 직원들이 파면됐고, 김문기는 새로운 교수와 직원들을 뽑아 그를 옹호하는 ‘족벌체제’(어용 단체)’를 구축했다. 독재 정권을 옹호하는 내용으로 채워진 '국정 역사교과서' 류의 김문기 우상화 교재가 수업에 사용되기도 했다. 

"2005년부터 13년 동안 해온 인성교육이 있어요. 일주일에 한 번씩 교수와 학생이 아주 자연스럽고 다양한 방식으로 만나서 연애며, 집안일이며 살아가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소통이 목적인 수업이에요. 1학점짜리인데 반드시 이수를 해야 해요.

그런데 김문기가 총장이 다시 되고 나서 이걸 예비군 교육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500명, 1000 명씩 묶어놓고 자신이 뽑은 교수들한테 가르치라고 한 거예요. '김문기 선생님께서는 일찍이 어릴 때부터 신동의 끼가 있으셔서, 그 분은 항상 옳으셨다. 일찍이 가구 산업의 발전을 예측하셔서 40대에 거부를 이루시고, 사회봉사를 위해서 상지대를 설립하시고…' 이런 내용으로요." 

그 수업에 사용됐다는 책이 정 교수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김문기의 저서 <상지정신>. 책의 표지에 적힌 문구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인성 결여로 인한 도덕적 경시가 사회적 문제로 크게 대두되는 현시대, 젊은이들의 인성교육의 바탕으로 삼아야할 필독서'. 실소가 터졌다. 

"학생들 반응을 좀 받아봤는데, 이런 거예요. '우씨, 이게 대학이야? 나 안 다녀.'"

구재단이 복귀한 다른 사학들에 비해 상지대에서의 투쟁이 더 치열할 수 있었던 이유가 이처럼 학생들에게 직접 피해가 가기 때문이었을까. 정 교수는 "상지대가 왜 열심히 싸웠는지는 잘 모르겠다"면서 "여러 이유가 있지만, 역사적으로 보자면 1986년 상지대 용공조작 사건이라는 게 있다"고 이야기를 꺼냈다. 

상지대에서 김문기를 몰아내기 위한 투쟁은 유신시대인 지난 1975년 시작됐다. 학생들은 1985년 총학생회를 만들어 운동을 지속해 나갔다. 1986년 10월 14일 상지대 캠퍼스에서 '가자, 북의 낙원으로' 등 북한을 찬양하는 문구가 적힌 유인물이 발견됐다. 결국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학생 150명가량이 간첩으로 몰렸다. '상지대 용공조작 사건'이었다.

정 교수는 "총학생회의 농성을 깨트리기 위해 김문기가 한 것"이라고 말했다. 군부 독재 정권이 비판 세력의 입을 막기 위해 조작 간첩을 만들어냈던 것처럼, 상지대에서도 '용공'이 같은 목적으로 사용됐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30여년을 거슬러 올라간 지점에서 또다시 데칼코마니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정 교수는 그 사건이 "학생들에게는 그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지점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 상지대에 설치된 천막농성장. ⓒ바꿈


"재벌·언론·종교·사학·토호…진보를 가로막는 5대 적" 

하지만 궁금증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김문기가 돌아온 2010년 이래, 정 교수는 4차례의 단식과 삭발을 단행할 정도로 최전선에서 싸웠다. 대체 그에게 상지대는, 사학 민주화는 무슨 의미일까. 

"제가 짧게 취직도 해보고 국회 공무원도 해보고 이것저것 해봤어요. 하지만 내 평생 직업은 상지대 교수에요. 나는 상지대에 오자마자 1년도 안 돼서 법인 사무국장 맡아서 5년 동안 잘났다고 뛰어다니고, 그래서 상지대 민주화 초기에 기반을 구축하는 데 기여를 했어요. 2000년도 낙선운동도 그렇고, 국회를 가도 그렇고 상지대 교수로 갔어요. 상지대 교수가 본의 아니게 내 직업이 됐는데, 내 삶의 터전인 상지대가 무너지면 내가 무너지는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무리한 일반화를 해버렸어요. 상지대가 무너지면 나도 무너진다. 그렇게 정리해버렸죠." 

상지대와 운명공동체가 되어버렸다는 정 교수. 단지 그런 개인적인 이유뿐이라기에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사학이 우리 사회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 묻자 다른 차원에서의 설명이 쏟아졌다. 

"정치보다 훨씬 더 큰 힘을 행사하는 우리 사회의 거대한 지배구조. 예를 들어 재벌, 보수 기독교, 보수 언론, 사학, 그리고 지역 토호. 이게 한국 사 
회의 진보를 가로 막는 역사적 5적이에요. 이 힘이 거대해요.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의 기반이죠. 

사학에 대해서 발언하지 않아서 그렇지 사학이 정치에 미치는 영향이 굉장히 커요. 특히 우리나라 대학의 85% 이상이 사학이에요. 이 대학들이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서 정치에 굉장히 중요한 힘을 행사했어요. 돈도 많아요. 잘 뭉쳐져 있고요."

5적 가운데서도 정 교수는 특히 사학과 재벌을 강조했다. 단지 그가 사학 민주화를 위해 싸우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재벌도 반쪽, 사학도 반쪽이에요. 크기는 재벌이 크죠. 왜냐하면 이게 물질적 토대니까요. 그런데 민주화된 사학이 공룡 재벌과 같이 공존한다면 누가 바
뀔까요? 재벌이 바뀔 수밖에 없어요. 교육이 잘 되면 사람이 바뀌니까요. 반대로 재벌 구조가 해체됐다고 하더라도, 교육이 무너지면 해체됐던 재벌 구조가 다시 만들어질 거예요. 그러면 재벌도 안 무너지는 거죠. 

그리고 지금 재벌도 우리의 인적 동력에 의해서 움직이는 거잖아요. 이재용 삼성 부회장의 힘? 그게 원동력이 아니잖아요. 그러려면 사실은 교육이 살아야 하고, 교육이 살려면 사학이 우선 바뀌어야 해요." 

단 한 번도 청산된 적 없던 기득권의 끈을 끊기 위해 사학을 비롯한 5적을 개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정 교수의 주장이었다. 그것과 6월항쟁은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 

"6월항쟁이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아직 완성되지 못했고, 그 미완성의 상태가 지금의 상지대 사태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역사적 맥락에서 보자면 6월항쟁의 연장선상에서 상지대가 민주화되었는데 6월항쟁의 흐름이 끊기는 시점에서 다시 김문기 비리재단이 복귀하는 역사의 반동이 나타난 것이죠.  

이 상황을 보면서 저로서는 우리 사회의 아주 작은 부분이지만 역사적 반동의 시기에 개인적으로 상지대 민주화 하나라도 제대로 지키는 것이 6월항쟁의 정신을 이어받아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일이 되겠다고 생각하고 여기에 올인한 셈입니다. 내가 작은 힘이지만 상지대를 지키면 다른 사람들도 각자 자기가 서 있는 장소에서 자기 분야를 지키지 않겠냐, 이것이 민주주의를 위한 진지를 구축하는 하나의 방법론 아니겠냐. 이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바꿈


"선거에 문제가 생겨도 완전히 좌절하지 않아" 
 
상지대에서는 과연 사학비리의 질긴 끈을 끊어낼 수 있을까. 상지대 구성원들의 끈질긴 투쟁 결과, 김문기는 지난 2015년 7월 총장직에서 해임됐다. 2016년 10월에는 김문기가 선임한 구재단 이사들이 모두 물러나고 임시이사가 파견되었다. 하지만 인터뷰가 진행된 4월 초까지 상지대 구성원들은 김문기가 또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걱정을 놓지 못한 상태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핵시킨 이후에도 불안을 놓지 못하는 마음과 닮아 보였다. 

그래서 묻고 싶었다. 대선 이후에도 세상이 바뀌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 번 쫓아낸 김문기가 연어처럼 다시 상지대로 돌아왔듯, 또다시 과거가 돌아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좋아하는 책의 구절과 역사 속 장면들을 꺼내 들었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이라는 작품의 마지막에 이런 문구가 있어요. '기다려라, 그리고 희망을 가져라.' 나는 그걸 인생관으로 받아들였어요.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은 절대 없다. 안정과 변화가 동시에 가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변화에는 세월이 필요하다.

프랑스혁명은 100년 간 지속됐어요. 100년 동안 프랑스혁명이 지속되면서 프랑스를 바꾼 거예요. 혁명의 목표도 없고, 혁명의 결과도 없는 거예요. 

우리나라에는 대동법의 사례가 있어요. 모든 세금을 쌀로 바치자는 건데, 그렇게 세금을 걷으면 쉽잖아요. 그걸 도입하자고 율곡, 이황, 김육이 주장을 했어요. 당시 영의정들이 주장을 했는데도 완전히 도입하는 데까지 100년이 걸렸어요. 왜? 기득권의 저항 때문에요.

프랑스혁명과 대동법 도입 과정을 보면서, 절대로 서두르지 않고 변화를 바라는 자세로 계속해야 겠다. 또 여기는 사람 사는 곳이잖아요. 사람 사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는, 긴 세월을 보면서 긴 호흡으로. 나 혼자 하는 게 아니고 사회와 역사의 힘으로 이 과정을 만들어 나가는 게 필요하겠구나 싶어요." 

정 교수의 말을 듣고 있자니 2017년 촛불집회가 프랑스혁명이나 대동법 도입 과정처럼 6월항쟁의 연장선에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긍정하며 말을 이어갔다.

"6월항쟁이 그때는 완성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미완성이에요. 6월항쟁의 미완된 부분이 그 이후에 낙선 운동으로, 효순이·미선이 촛불,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로, 그리고 이번 촛불로 나타난 것이죠. 시기가 다르고 양식이 다르지만, 촛불은 사실은 똑같이 독재정권을 타도한 거예요. 

6월항쟁 직후 양김이 분열하는 바람에 노태우가 어부지리로 대통령에 당선됐어요. 그런 상황이 과거에 있었기 때문에 촛불 직후 대선에서 그런 게 또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는 거예요. 그런데 걱정할 건 없어요. 사회는 딱 있는 만큼만 해요. 지도자를 능가하는 국민도 없고, 국민을 능가하는 나라도 없어요. 촛불이 아직 꺼지지 않았기 때문에 혹 선거에 문제가 생긴다고 해서 완전히 좌절하지 않아요. 항쟁과 혁명의 기억은 안 지워져요."

1975년부터 지속된 저항을 기억하며 길게 지켜봐왔기 때문일까. 상지대 구성원들도 드디어 한 조각 시름을 덜 수 있게 되었다. 지난달 24일, 정권 교체 이전 열린 마지막 사학분쟁조정위원회 회의에서 상지대 관련 사안은 단 하나도 결정되지 않았다. "기다려라. 그리고 희망을 가져라." 


"여성 몫은 '옥바라지'? 지금은 2017년!"

[6월항쟁 30주년 특집 인터뷰 ④] 정연순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회장
2017.05.11 11:57:43

"청계인가 종로 3가인가. 아마 청계였을 거예요. 거기에서 중학교 때 친구를 만났어요. 최루탄 연기가 날리는 그 넓은 거리에서요. 그 친구는 대학에 가지 않았거든요. 80년대만 해도 여성의 대학진학률이 굉장히 낮았어요. 중학교 때 공부를 조금 잘한다는 친구들은 전부 상고를 갔어요. 그 친구도 여상을 갔었는데, 그 뒤에 한 번도 못 만난 거예요, 7년 동안. 그런데 87년에 그때, 6월에 딱 만났어요. 얘가 파이프를 들고 있었던가, 각목을 들고 있었던가(웃음)."

그게 6월 10일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정연순 변호사(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회장)는 아마 그 친구를 만나고 꽤 오래 뛰어다닌 걸로 봐서는 맞을 거라며 그날의 기억을 전했다. 지금이야 대단한 시위였던 것 같지만 20-30명 모여서 구호를 외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시대였기에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뛰어다녔다면 분명 6월 10일이었을 거라고. 우연도 참 기막힌 우연이다. 7년 만에 만난 친구를, 그것도 데모에서 최루탄을 맞아가며 서로를 알아봤다는 영화 같은 이야기를 듣자니 웃음이 절로 났다. 
  

▲ 정연순 회장. ⓒ바꿈


"이게 세상의 진실이다, 하는 깨달음" 

"대학교 입학 전의 세상과 입학하던 그 해 봄에 만난 세상은 정말 흑과 백처럼 달랐어요. 백이었던 세상이 흑으로 돌변하는 듯한 충격을 대학교 1학년 때 받았죠. 어떻게 이렇게 세상이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를까 하는 것이 굉장히 충격적이었어요."

그의 표현에 따르면 '서슬 퍼런' 독재체제였다. 서민 중의 서민이었던 부모님은 사회문제에 대해 입 한 번 뻥긋 하지 않으셨고, 어떤 데모가 있든 신문에 실려 있는 정보는 '서울대생 200명이 거리로 나가려고 했다'는 짧은 문장이 전부였다. 고등학생이 세상을 알기에는 현실의 벽이 너무 높았다. 지극히도 평범했던 그의 삶은 대학교에 들어가서 마주한 세상의 진실로 인해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김세진, 이재호 열사가 분신하고 그런 것 말고도 우리가 언제든 잡혀갈 수 있다는 생각, 그런 생각이 항상 있었죠. 잡혀가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고. 그 전에도 죽은 선배, 할복한 선배들 이야기라든지 그런 게 있었기 때문에… 왜 그렇게 비장했는지, 뭐 비장할 수밖에 없었지만. 

일상의 생활이라는 게  항상 선택의 문제였어요. 학교에 가면 시위가 있었고, 그러면 수업을 들어갈까, 시위를 함께 해야 할까부터 누군가 잡혀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건가. 학생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수업거부, 시험거부였는데 그러면 강의실에 앉아있을 것인가 말 것인가. 이런 하나하나 선택을 해야 하는 거죠."

말 그대로 선택인데, 다른 삶을 살 여지는 없었냐는 물음에 그의 답변은 뜻밖이었다. 오히려 ‘박정희의 아이들’로 훈육되어 자라났기에 다른 선택이 없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다'고 아침마다 외웠어요. 새벽종이 울리니 새 아침을 만들자고요. 그 어린 시절에 스스로를 세뇌를 시켰던 아이가, '백'의 세상에 살다가 갑자기 '흑'의 세상으로 넘어가서 세상을 진실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 사명감이 도탄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해야 하는 엄청난 역사적 사명으로 바뀌게 되는 거죠. 

물론 죄책감도 있었죠. 저 사람은 죽었는데 나는 살아남았다는,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이요. 비록 학생운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옆에서 지켜보던 학생들도 그 감정을 피하기는 어려웠어요. 그런 것들을 느꼈던 사람이 80년대에 다른 삶을 산다고 하는 건… 글쎄, 지금 돌아가도 다른 삶을 살 수 있겠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박정희의 아이들'이 군부독재 타도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니. 묘한 기분과 함께 참, 역사란 뭘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뭐 그렇게 비장한 듯해도 다들 매일 술 먹고, 연애도 하고…그 와중에(웃음)."

"성숙한 민주주의, 법률가의 역할" 

목숨을 건 선택은 아니었지만 23차까지 진행된 이번 촛불집회 역시도 선택의 연속이었다. 서있는 것도, 앉아있는 것도 힘든 추운 겨울날, 그것도 꿀 같은 주말에 나는 안방을 지킬 것인가 광장에 나갈 것인가. 100만 명이나 모였다는데 이때야 말로 '나 하나쯤은'을 실천할 때가 아닌가.  

유혹이야 있었겠지만 30년 전이든 지금이든 여전히 광장을 택한 사람은 많았다. 정 변호사는 이번 촛불을 보며 모노톤의 6월항쟁에 다양한 색깔을 입힌, 보다 성숙한 민주주의를 발견했다. 

"87년의 항쟁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단선적인 거잖아요. ‘호헌철폐, 독재타도’라고 해서 소위 통치구조라고 하는 측면에서 전두환 정권의 정권연장 야욕에 대한 저항. 그걸 통해 (독재를) 뚫어보려는 그 의지라고 하는 것이 ‘민주화’ 이렇게 세 글자 하나로 모여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단일한 색깔이라고 할까. 단일한 전선의 단일한 목소리였던 거죠.    

이번에는 거기서 더 나아가서 다양한 목소리, 다양한 요구가 촛불광장에서 나왔을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정권의 연장 야욕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헌법상의 책임과 권한을 가진 대통령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어떤 의무를 지고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주권자로서의 물음과 답변’이 있었던 것이죠. 이건 성숙한 민주주의로 가는 길 중의 하나거든요."

시민들이 성숙한 민주주의로 가는 길을 걸을 동안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하 민변) 역시 함께 했다. 회장으로서의 평가를 물으니 ‘저는 잘했다고 생각을 하고(웃음)’라며 말을 이어갔다. 민변은 국정농단 사건에 대처하기 위해 70여명으로 구성된 특별위원회를 신설했고, 넉 달 동안 꾸준히 성명과 논평을 냈다. 초기에 스캔들처럼 소비되었던 거대한 사건의 핵심을 정확히 짚어내는 법률가들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JTBC 최초 보도가 나간 후 3일 만에 50쪽 정도 분량의 의견서를 냈어요. ‘핵심은 뇌물죄다.’ 그게 무려 2시간 만에 조회 수가 1만 회를 달성했어요. 민변 홈페이지는 남들이 잘 안 찾아오는 섬과 같거든요(웃음). 회원들도 잘 안 읽어서 조회 수가 고작해야 2, 30회 정도에요. 그런데 그게 순식간에 1만 회가 넘더라고요. 2만7000회를 달성했어요, 거의 하루 만에."

치열한 프레임 싸움 속에서 본질은 무엇인지, 범죄행위, 헌정질서 위반이 무엇인지 밝히는 것이 법률가로서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었다.  

"이번 탄핵 정국은 여러 주체들이 이끌어 갔죠. 100만 촛불 시민이 있었고, 국회, 특검, 헌법재판소도 있었지만, 민변도 그 창립 정신을 살려서 인권과 민주주의의 수호라는 부분에서 적어도 못 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웃음)."
    
민변의 '창립정신 지키기'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인권과 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한 단체가 아니라 정치조직 아니냐는 숱한 오해도 있었다. 정치적, 사회적 이슈와 가까이 하다 보니 상당수 회원이 정치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민변은 87년 민주화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그 힘으로 88년에 창립되었거든요. 지금까지 30년 동안 회원들이 민변이 지켜야 하는 가치를 지켜오는데 머뭇거리지 않았고, 가치에 대한 훼절이라고 할까, 말을 바꾸거나 한 적은 없다고 자부합니다. 

민변이 가장 두드러지게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반민주적, 권위적 통치가 기승을 부릴 때지만, 예를 들면 참여정부 시기에도 이라크 파병, 한미 FTA, 제주강정해군기지 등 인권이나 평화, 어느 쪽으로든지 옳지 않다고 판단이 되는 부분에서는 비판을 하였던 태도가 있었기에 30년을 유지했다고 생각해요. 만약에 그렇지 않고 그때마다 편의에 따라서 활동을 해왔다면 국민들이 버렸겠죠.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게 30년을 유지한 힘이기도 하고요." 

▲ 정연순 회장. ⓒ바꿈


"여성, 변호사" 

민변이 지난 30년 동안 인권과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싸워온 역사만큼 정 변호사 역시 꾸준히 활동을 이어왔다. 1994년에 변호사가 된 후 가정법률상담소, 한국성폭력상담소, 위안부 문제, 여성단체연합, 여성영화인 모임 등 부르는 곳을 마다하지 않고 다닌 대가(?)는 컸다. 

열심히 활동해온 대가 중 가장 컸던 것이 '민변 최초의 여성 회장'이 아닐까. 정연순 변호사를 검색하면 최초의 여성 회장의 탄생을 알리는 기사가 빼곡하게 나온다. 

"변호사 단체에서 여성이 회장이 된 것은 처음이거든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이런 것이 아니라 혹은 제가 잘나서 회장이 됐다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의 법조계의 진출이 어느 정도 이르렀다고 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여성변호사들의 진출과 헌신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았다는 거예요. 

여성 법조인들 중에 최초 법무부 장관이신 강금실 변호사, 최초 대법관이었던 김영란 판사가 있어요. 다 훌륭하신 분들이죠. 그러나 그건 그 개인의 노력만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걸 밀어준 많은 여성들의, 여성변호사든 여성운동단체든 그런 여성들의 헌신과 노력이 쌓여서 한 사람을 수면 위로 밀어 올려 준 거거든요." 

지금까지의 업적이 최초의 여성회장으로 설명되는 것이 서운하지 않으시냐는 물음에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앞선 말을 전했다. 이것은 결코 자신의 업적, 자신의 능력을 증명한 일이 아니라 그동안 함께 해 온 여성 변호사들과 여성운동가들의 자랑이라는 것이다. 

여성의 진출과 헌신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상징을 가지고 있는 정 변호사도 돌이켜 보면 80년대가 항상 좋았고 자랑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지금의 영(young)페미니스트들이 들으면 기겁할 일이라고 할 거예요. 80년대는 그만큼 엄중하기도 했고, 또 아직 여성인권의 문제까지 눈을 돌리지는 못할 때였으니까…."

선배들이 보여줬던 권위적이며 가부장적인 문화조차 거스르기 어려웠던, 가두시위를 나갈 때 화장을 하고 치마를 입고 남성동지의 애인 역할을 수행하는 위장책을 맡거나 감옥에 있는 선배들이 '찍어서' 옥바라지를 맡기면 묵묵히 해내야 했던, 그런 일들이 여성들에게 부여되었다. 
   
"그때는 민주화라고 하는 대의에서, 그 대의의 전선에서 이야기 되는 것 말고 내부의 어떤 문제제기라고 하는 것은 허용이 안 되는 분위기였거든요.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뭘 하나라도, 그게 사소한 것이든, 다 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문제를 느낄 수가 없었죠.  

민주화가 되고 90년대로 넘어와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소위 X세대라고 하는 세대가 등장하면서 사회의 지형이 흔들리죠. 이렇게 살았던 게 맞나? 민주화의 대의에 눌려져 있었던 성차별, 성폭력 문제가 결국 여성들 스스로의 성찰 속에서 터져 나왔죠. 그게 소위 '100인위원회 사건', 진보운동권내의 성폭력 성차별 폭로사건으로 터졌어요. 저는 그때 변호사로 일하고 있어서 100인위 활동가들을 지원하는 일을 했었어요. 그 과정 속에서 80년대 민주화가 갖고 있는 한계를 목도하게 되었죠.  

80년대를 살아남은 여성들은 그 속에서 완전한 남성화를 이루던지, 아니면 페미니즘의 정신을 가지고 주류에 들어가기를 거부해야 하는 삶을 선택해야 했어요. 결혼이 '적과의 동침'인데, 일상의 하나하나를 문제제기하자면 도저히 그 사람과는 같이 살 수는 없는(웃음), 그 속에서 조금씩 타협해 가며 무언가를 이뤄내야 하는 쉽지 않은 삶을 살아 왔던 것 같아요."

▲ 정연순 회장. ⓒ바꿈


"다시 민주주의" 

희망적이게도 역사는 정 변호사가 목도한 80년대의 한계에 멈춰 있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00인위원회 활동을 비롯해 당시의 문제를 지금이라도 해결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었고 인식은 분명 나아지고 있다. 멈춰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더 많은 구호가 나오고, 더욱 다양해지는 것. 그가 이번 촛불에서 발견한 '성숙한 민주주의'의 일부가 아닐까.

"우리는 민주주의를 87년에 형식적으로 거쳤지만 사실 그것은 소위 87년 헌법이라고 하는, 기존의 헌법에서 통치구조만 조금 바꿨을 뿐이지 헌법에 적힌 ‘민주공화국’이라는 의미가 정말 뭔지, 기본권, 경제 질서, 지방자치, 교육자치라고 하는 것이 우리 일상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지도 못했어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우리는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누구나 평등할 권리를 가진다'고 하는 것을 사실은 그 전에 다 알고 쟁취한 게 아니었어요. 독재에 대한 저항으로 87년 헌법을 쟁취하고서 그 헌법에 세세하게 적힌 구절들이 무슨 의미가 있나. 30년 간 깨달아 온 거죠, 조금씩 전진 후퇴를 반복하면서. 87년에 우리가 무엇을 쟁취했지? 하는 인식이 저는 이번 촛불에서 분명하게 진전되었다고 생각하거든요. 아, 우리가 87년도에 쟁취한 것은 이거구나, 민주주의." 

오랜 기간이 걸린 깨달음이었다. 헌법에 그저 적혀진 문구를 외우는 것이 아닌, 몸으로 부딪혀 깨달음으로 얻은 민주주의. 그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 소수자와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87년 헌법은 이제야 국민들에게 헌법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과 함께 이제는 헌법에 있는 규정 하나하나의 의미를 새기는 것이 새로운 정부의 역할일 것이라고 전했다.  

"87년과 2017년의 간극. 그 사이에 일어났던 수많은 일들에 대해서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그 30년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그 다음 30년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런 태도를 가지고 시책을 펼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이렇게 (과거처럼) 퇴행적으로 돌아가지 않을, 그런 비가역적인 민주주의의 발전에 대한 청사진. 이런 것을 새로운 대통령이 제시해주면 좋겠다, 사실은 (그것이) 국민들을 굉장히 위로해주는 일이거든요."

정 변호사는 작년 봄, 2017년을 앞두고 마음이 비참했다고 한다. 이제 곧 6월 항쟁 30주년인데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은 87년이 아닌 77년인 것 같은 기분에 너무 후퇴했다는 공포가 압도했었다고. 그러나 이번 겨울을 지내면서 다시금 역사의 흐름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수 있어서 '그게 아니다, 우리는 한 단계가 나아갔다'라고 평가할 수 있어서 기뻤다는 그의 말을 통해 이미 그 청사진은 충분히 그려질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다음 정권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중에'가 아니라, 비록 하나하나의 촛불로만 기억되고 불리어질 것이나, 그 도도한 물결을 끝내 이루어낸 수많은 시민들에 의해 반드시 그려질 것이라고. 그것이 87년과 2017년을 잇는 힘이자 앞선 세대와 뒷 세대의 연대의 정신이라고.



"언론이 제대로면 나라가 함부로 되지 않는다"

[6월항쟁 30주년 특집 인터뷰 ⑤] 정상모 평화민족문화연구원 이사장
2017.05.17 10:10:16

'내란 수괴'로 잡혀갈 수 있다는 생각은 했다. 그래서 '안종범 수첩' 50여 권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사실을 입증한 핵심 증거가 된 것처럼, 한 장의 메모가 불러올 후폭풍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87년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의 상임집행위원 겸 편집실장을 맡았던 정상모 평화민족문화연구원 이사장의 이야기다.

"6월항쟁에 앞장선 사실은 내란 혐의에 해당되는 행위를 한 거라고 볼 수도 있죠. 실패했으면 수괴 혐의로 감옥에 가는 거죠. 고등학교 동창 중에 하나가 경찰 정보계통에 있었는데 나에 대한 정보보고가 계속 올라오더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어떤 친구는 살아남은 것도 다행이라고 그래요.  

최근의 이야기인데, '지금도 경찰이나 다른 수사기관에 내 파일(정보보고)이 있느냐'고 물어봤어요. 파일이 존재한다는 건 계속 감시한다는 것이거든요. 뭐라고 대답했을 것 같아요? '파일이 한 번 생기면 사라지지 않는다'고 그래요. 겁나겠죠?(웃음) 그래서 1980년대 그때에는 우리가 메모도 안 하고, 기록을 안 남겼어요. 그게 다 증거가 되고 문제가 생기는 거니까."

6월민주항쟁이 아직 오지 않은 시절이었다. 국가보안법은 서슬 퍼렜고, 옴짝만 해도 ‘내란 음모’였다. 사무실 앞에는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현 국가정보원)부터 경찰, 치안본부에 이르기까지 각 정보기관에서 나온 요원이 적어도 셋이었다. <말>지를 통해 독재 정권의 언론 통제 실상인 '보도 지침'을 폭로했던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주시민언론연합의 전신, 이하 언협)가 당시 정상모 이사장의 사무실이었다. 단행본으로 묶어낸 <보도지침>이 30여년이 흐른 지금도 그의 옆에 놓여 있었다.

▲ 정상모 평화민족문화연구원 이사장. ⓒ바꿈


책상 위에 여전한 보도지침 

정상모 이사장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직후 MBC에서 해고를 당한 해직 언론인이다. 정보기관은 그가 해직당한 이후부터 그의 동태를 살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보도지침' 보도 직후인 1986년 말, 언협의 사무국장을 맡았다. <말>지 발행 때문에 일주일가량 구류를 살고 나온 상황에서 그는 87년 3월 20일, 또 다른 기사를 통해 독재 정권의 폭압을 고발한다.

"80년대에는 학원에 정보 수사 기관원들이 수시로 드나들면서 사찰을 했어요. 학생들 동태를 감시하고 필요하면 잡아가고 그런 건데, 심지어 군 보안대원까지도 왔다 갔다 했어요. 많은 돈은 아니지만, 학교 측에서는 올 때마다 돈을 줬어요. 그냥 주면 교직원의 착복이 되잖아요. 근거를 남겨야 책임을 안 질 수가 있으니까 날짜별로 얼마를 누구한테 줬는지를 기록해 둔 거죠. 대학생들이 점거 농성을 하다가 그걸 발견해서 우리한테 들고 왔어요. 그대로 실어버렸죠. 사실대로 실었는데, 저쪽에서 발끈했어요. 보안대가 제일 발끈했어요. 감히 우리를? 

당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85년 구성된 재야 민주세력 결집체, 약칭 민통련)의 다른 사무실들은 다 폐쇄돼서 사무실도 없이 지내던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언협은 닫았던 사무실을 오히려 다시 열고, <말>지뿐만 아니라 <말 소식>지(재판 과정, 석방 운동 등의 소식을 담은 별지)까지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저쪽에서 완전히 뚜껑이 열린 거죠.

해당 호 <말>지를 넘긴 그날 경찰이 바로 집으로 들이닥쳤어요. 나 한 명 잡으려고 전경 버스 한 대와 형사 2명, 전경들이 왔어요. 내가 버티며 난리를 폈어요. 군중들이 몰려들고 해서, '정보과장을 불러라. 그와 함께 가겠다. 전경 버스 당장 돌려보내라'고 외쳤죠. 이렇게 버스를 보내고 형사 2명이랑 다방으로 들어가서 솔직하게 다 말했죠. '곧 언협 총회가 예정돼 있는데, 사무국장인 내가 잡혀 들어가면 총회를 못 치른다. 상부에는 때 되면 들어갈 테니, 지금은 못 들어간다고 보고하라' 그랬죠. 그러니까 형사가 '오늘부터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국가보안법으로 수배가 됐어요." 

당장 연행될 상황에서는 벗어났지만, 경찰은 그를 그냥 놓아두지 않았다.

"제가 도망을 갔더니 경찰이 밤 10시만 되면 제 집에 전화를 해요. 내가 거꾸로 새벽 1시에 담당 형사 집에 전화를 했어요. 그 다음부터는 전화를 못 걸더라고."

"국민이 앞장서니 정치권이 겨우 끌려왔다" 

▲ 언협의 정 이사장 석방 관련 논평.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런 내용을 실은 <말>지 10호(87년 3월 20일)가 발행된 뒤, 정 이사장은 요주 인물에서 국가보안법 위반한 수배자로 신분이 업그레이드 됐다. 하지만 그는 또다시 앞줄에 섰다. 국본에서 언론과 문화단체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상임집행위원을 맡은 것이다. 국본에 참여했던 정 이사장에게 가장 또렷하게 기억되는 장면은 무엇일까? 그는 가장 많은 시민이 운집했던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을 떠올렸다.

"당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였던 진관스님과 같이 최루탄을 맞으면서 시위를 하는데, 스님도 별 수 없더라고. 눈물 흘리고…."

눈물만 흘렸냐는 장난기 어린 질문에 정 이사장은 "콧물도 났죠"라고 웃으며 답했다. 그는 30년 전 그날, 서울만이 아니라 전국이 들썩였노라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말>지 특집호를 내려고 기자들을 전부 지방으로 출장을 보냈어요. 그래서 서울보다도 지방이 훨씬 역동적이고, 거의 혁명적인 상황이 전개됐다는 걸 알게 됐죠. 서울만 막으면 된다고 (판단)해서 전투경찰이 서울로 집결하는 바람에 지방에는 병력이 별로 없었어요. 대전도 그렇고, 천안도 그렇고, 진주에서도 경찰이 손을 못 썼어요. 6월10일이 수뇌부 운동가 중심이었다면, 6.26은 범국민적인 항쟁이었어요." 

범국민적 항쟁이라는 표현에서 2017년 촛불집회가 떠올랐다. 정 이사장은 30년 전이나, 이번에나 "말리는 쪽이 정치권이었다"면서 "이번에도 국민이 앞장서니까 정치권이 겨우 끌려왔다"고 지적했다. 

"87년 6월 18일에 최루탄추방대회가 대규모로, 격렬하게 벌어졌어요. 상당히 위협적인 시위였죠. 제 기억에는 다음날인 19일인데, 성공회성당에 여성단체연합 사무실이 있었어요. 거기에 제가 아침 일찍 갔어요. 국본 상임집행위원들과 대표들하고, 당시 대변인이었던 인명진 목사도 기억이 나요. 당시 군부대 투입설이 막 나돌고 흉흉할 때인데 그 자리에서 '군 투입되면 우리는 내란 혐의로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다. 그래도 이판사판 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러면서 6.26을 하기로 결정을 했어요. 

그런데 정치권이 반대를 했어요. 전두환을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겠다는 거죠. 24일에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가 전두환을 만났는데, 전두환이 '논의해 보자'고만 했어요. 논의해보자는 건 나중에 이유 하나 달아서 결렬시키면 되는 거예요. 사실상 결렬이죠.
  
그때 저는 국민운동신문 창간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굴레방다리 근처에 사무실을 빌려서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8면짜리 신문에 다른 기사는 다 만들어 놓고 1면 머리기사만 빼놓고 있었어요. 기사는 6.26이 결정된 것, 그리고 무산된 것 다 준비해 놓고요. 24일 밤 마리스타 수도원에서 6.26 대행진을 한다고 최종 결정이 돼서 바로 머리기사 집어넣고 제작‧배포했어요." 

"빈사상태 빠진 '보수', 정신 차리면 더 세진다" 

정 이사장은 6.29 선언 이후 김영삼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단일화에 실패한 데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하면서, 정치권에 대한 감시를 늦추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때의 노태우와 같은 인물이 지금은 없지 않느냐고 의문을 제기하자, 그는 단호하게 답했다.

"지금도 잘 보면 표 하나라도 더 얻으려고 야권은 보수 흉내를 내려고 하고, 반대쪽은 진보 흉내를 내려고 해요. 박근혜도 대선 후보 시절에 경제민주화 하겠다고 했어요. 표가 되면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들이에요. 정치적인 철학과 소신이 없이 표밖에 안 보이는 거예요. 거기서 바로 제2의 노태우가 나타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사드 배치 찬성하겠다고 떠드는 것처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표변하는 세력들을 주시하라는 그의 경고는, 자유한국당으로 대표되는 지금의 '말도 안 되는 보수' 세력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지난 9일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생시킨 자유한국당의 홍준표 후보가 24%라는 득표율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그의 이야기는 주목해야 할 지점이 있다.

"박근혜가 없어도 그런 사태는 또 생겨요. 제 2의 박근혜도 수두룩하게 많거든요. 또 다른 독재가 무수히 많고요. '보수' 세력이 지금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이라는 어마어마한 사태를 맞아서 빈사 상태에 빠진 것 같지만 이들이 정신을 차리면 오히려 단련 받은 셈이 돼서 더 강력한 '보수' 세력, 더 괴물인 '보수'가 나올 수가 있어요. 

선거법, 헌법, 제도 바꾼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사람의 문제에요. 저 '보수' 세력을 가만히 두면 또다시 제2, 3의 국정농단 사태가 생길 수 있어요. 아주 더 세련되게 나타날 거예요."

정 이사장이 말하는 '보수 세력'은, 정치 분야는 물론 학계, 군, 검찰, 언론 등을 포함해 ‘종북 척결’을 국시로 내세운 기득권층이다. 그는 "너도 나도 떠들지만, 잘 보면 자칭 '보수'일 뿐"이라면서 "제대로 된 '보수'를 세우거나, 최소한 분화시켜서 이들을 약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면서, '보수'의 집권 전략에 주목하라고 꼬집었다.

'이 자칭 '보수'들은 자신들이 계속 권력을 잡기 위해서 대항세력, 경쟁세력을 무조건 빨갱이라고 낙인찍어요. 그리고 이게 또 먹혀 들어가죠. 크게 보면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세뇌를 시킨 탓입니다." 

"언론이 제대로면 나라가 함부로 되지 않는다" 

너도 나도 '보수'를 참칭하는 세상에서, '보수' 언론들 역시 저들에게 보수라는 이름을 붙여주며 동조했다. 해직 언론인 출신인 정 이사장은 진짜 보수를 세우기 위해서는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실은 제일 중요한 게 언론이에요. 언론만 제대로 돼 있어도 나라가 절대 함부로 되지 않아요. 언론이 잘못 하는 거예요. 허위 보도를 하거나, 여론 조작을 하는 언론 때문에 나라가 힘들고 어려워지는 거죠. 언론의 위기는 나라와 민족의 위기라는 말이 그래서 나오는 거예요."

2017년 촛불 이후 언론개혁의 목소리가 높은 것처럼, 6월항쟁 직후에도 언론이 변해야 한다는 요구가 터져나왔다. 87년 말 MBC에서 노조가 구성됐고, 이듬해에는 KBS에서 노조가 출범했다. 국민주 모집을 통해 <한겨레신문>이 창간됐고, 89년에는 해직됐던 기자들이 MBC로 돌아갔다. 이때 정 이사장은 MBC로 돌아가지 않았다. <한겨레>를 통한 언론 내부의 민주화 작업을, 그는 짊어졌다. 

"당시 언론 민주화가 중요한 과제였어요. 언론 개혁이죠. 그래서 <한겨레>에 가자마자 제가 한 역할이 기자평의회를 만드는 거였어요. 언론민주화의 일환으로 편집권 독립을 부르짖으면서, 제도적 장치로 편집위원장 직선제를 내세웠죠. 일부에서 ‘저게 완전히 한겨레신문을 말아먹으려 하는 거 아니냐’는 오해와 갈등이 생겨났어요. '언론민주화와 편집권 독립’이라는 제도적인 장치의 노력을 하는 게 다른 언론사에 확산될 것'이라고 설득을 했더니, 결국 받아들여졌어요." 

▲ 한겨레 기자평의회 의결사항.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언론사 내부 민주화와 함께, 정치‧경제 권력과의 유착 관계도 끊어내기 위한 작업이 진행됐다.  촌지 거부 운동. 다른 언론사 기자들의 눈총이 쏟아졌다. 정 이사장은 "기자들의 얼이 뒷받침돼야 편집권 독립이든 뭐든 하지, 정신도 없는 사람이 뭘 하겠냐"고 웃으면서 그때를 회고했다.

"촌지 거부 운동을 벌였어요. 특히 한겨레는 창간된 지 얼마 안 됐고, 또 최초의 진보 언론이다 보니 주목도 받고 영향력도 굉장히 가지고 있어서, 명절이 되니까 선물이 오기 시작하는데… 어마어마하더라고요. 이만한 갈비 궤짝이 오고 선물이 막 들어와요. 집으로도 오고요.

우리가 윤리위원회랑 윤리강령을 만들었어요. 식사는 3만원까지, 선물 받은 건 전부 회사에 반납. 그걸 모아서 양로원이나 보육원에 가져다주고 기사를 썼어요. 선물 받은 건 무조건 윤리위원회에 신고하고, 반납 안 한 건 윤리규정에 따라 처벌을 받는 거죠. 

촌지의 경우에는, 대게 장관이나 이런 사람들이 무슨 행사를 앞두고, 보도자료 준답시고 프라자호텔 같은 데서 점심식사를 하자고 해요. 안 가도 보도자료는 보내줘요. 그러면 왜 가냐. 보도 자료를 각대봉투에 담아주는데, 그 안에 또 하나 봉투가 있어요. 20만 원 정도 될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다 그냥 가는데, 저는 여러 사람 있는 데서 그 작은 봉투를 끄집어내요. '우리는 윤리 규정상 못 받게 돼 있는 데요.' 딱 빼서 주는 거죠. 다른 기자들이 볼 때, 미운 오리 새끼가 되는 거예요. '너만 잘났냐?' 하는." 

6월항쟁 이후 언론 민주화는 그렇게 진척되는 듯 했다. 하지만 2017년의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역사의 퇴보가, 민주주의의 역행이 가장 여실히 드러난 분야가 언론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언론 윤리는 골방에 처박혔고, 기자는 '기레기'가 됐다.

그의 친정인 MBC는 단연 군계일학. 정 이사장은 30년 넘게 언론운동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로 MBC 이사회인 방송문화진흥회(이하 방문진)의 이사를 맡았던 시기(2009~2012년) 를 꼽았다. 방문진은 청와대와 여당이 각각 3인, 야당이 나머지 3인을 추천해 총 9명의 이사로 구성된다. 

"엄기영 사장이 있을 때(2010년)인데, 엄기영이 나중에 새누리당에 갈 정도로 굉장히 보수적인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를 쫓아내려고 여당 이사들끼리 만나서 별 모의를 다 한 거예요. 자기들이 추천한 이사를 받아주면, 사장 자리를 유지시켜준다는 둥 장난을 쳤는데 들통이 났어요. 

내가 이사회에서 문제를 제기했어요. ‘당신들끼리 밀실 야합해서 사장 허수아비로 만들고, 야합꾼이냐’, ‘나는 여기 왜 앉아있냐. 이사로서의 내 권한을 완전히 뺏어갔다!’ 이렇게 내가 소리를 치고 난리를 부렸어요. 하도 소리를 지르고 그러니까 다들 도망가 버리더라고요. 나라고 방법이 있겠어요? 그래서 나도 나왔죠. 

회의실 밖에 나오니까 <연합뉴스> 기자가 눈이 왜 그러냐고 물어요. 되물었더니 ‘눈이 빨개요, 피가 나요.’ 내가 깜짝 놀라서 화장실에 가서 보니까, 하도 소리를 질러서 눈에 실핏줄이 터져서 피가 고여 있는 거예요. 영화에서만 봤지 눈에서 피가 난 건 나도 처음이에요. 눈에서 피가 났으니 망정이지, 뇌가 터졌으면 큰 일 나는 거죠. 

그렇게 아무리 떠들어도 '우리(여당 이사)는 도장 찍어' 이러면 되니까… 폭력을 쓸 수도 없고, 방법이 없잖아요. 김재철(당시 MBC 사장)이 <뉴스타파>의 최승호, 박성제 등 굉장히 많은 후배들 모가지를 잘라 내는데, 나도 해직기자로서 눈 뜨고 못 보겠더라고요."

▲ 정상모 평화민족문화연구원 이사장. ⓒ바꿈


그렇게 MBC는 자꾸 뒤로만 갔다. 정 이사장은 현재 MBC의 상황은 80년대보다도 후퇴했다고 말했다. 

"제가 해직을 당한 80년만 해도 보도국에서 상당히 미안하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일부는 울고 그랬죠. 당시 MBC가 독재정권을 옹호하는 데 가장 앞장 선 언론이었는데, 제작거부를 두고 투표를 하니까 1표 차이로 지기는 했지만, 비슷비슷하게 나왔어요. 유신정권의 억압을 워낙 당했기 때문에 내부에서도 청산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막 일어난 거죠. 그런데 지금은 인적 구성이 더 악랄해졌어요. 리모델링이 아니라 재건축을 해야 해요."

정 이사장의 이야기는 초지일관이었다. '진짜 보수를 세워야 한다'. 앞서 그가 말한 대로 업그레이드 된 '보수'가 장악한 MBC를 보자니, 제2의 박근혜, 최순실이 언제든 나타날 수 있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빨갱이' 장사로 성공한 '가짜' 보수가 1/4의 표를 가져간, 동시에 광장 가득 타오른 촛불이 세 번째 민주정부를 출범시킨 2017년. 지금이 바로 그 ‘진짜 보수'를 찾을 적기가 아닐까. 


"내가 박근혜 선배입니다. 구속 선배"

[6월항쟁 30주년 특집 인터뷰 ⑥]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
2017.05.25 10:40:45

골목 깊숙이 들어있는 건물, ‘지난겨울, 그 광장의 촛불을 헛되이 말라!’라는 글귀가 써져있는 커다란 현수막.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상징인 전태일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설립된 전태일재단의 건물을 보니 마음 한 구석에서 뜨거운 기운이 올라왔다. 짐작도 못할 시대의 청년이었던 전태일은 무슨 심경으로 스스로에게 불을 지폈을까. 여전히 저 건물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또 누구일까.  
 
"이런 사진은 어디서(웃음)…민자당 분쇄!(웃음) 이게 89년에 지금 박근혜 있는 곳에, 내가 박근혜 선배잖아요(웃음). 구속 선배." 

이수호 이사장(전태일재단)에게 인터넷을 샅샅이 뒤져 찾은 예전 사진을 건네니 박근혜의 '구속 선배'라며 미소를 지었다. 민주화운동부터 전교조 결성, 민주노총 위원장, 민주노동당 최고위원 등의 활동을 이어온 스스로를 '좌파운동의 정통'이라고 표현하며 농담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 이수호 이사장. ⓒ바꿈


"이중적인 아픔의 87년" 

"(6월 10일 당시) 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있었죠. 신일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었고. 그 때 고3을 맡아서 가르치고 있었어요. 그 때 민주화가 이제 막 진척되던 그럴 때여서 87년에 전두환이 호헌발표를 하고 그 뒤에 계속해서 저항이 벌어지고 그래서 매일 매일이 뒤숭숭하기도 하고 힘들고 했는데.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들하고 명동이나 그 당시에 신세계 앞, 그 쪽에서 주로 시위를 많이 했어요. 

학생들을 그렇게 데리고 나갈 형편이 안됐죠. 교사가 나가는 것도 굉장히 힘들게, 몰래. 마음 맞는 선생님들이랑 했지. 그렇게 나서면 바로 학교에서 징계를 당하거나 교장한테 불려가서 혼이 나거나 그런 시대였기 때문에(웃음)."  

신일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는 이수호 이사장은 학교 이야기로 6월 항쟁의 기억을 시작했다. 한국전쟁이 비단 남북만의 책임이 아닌 외세의 개입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해직된 교사. '커밍아웃'하듯 시위에 참여했다는 교사. 오늘 날의 촛불처럼 대중화되어있던 시위가 아니었던 만큼 각자의 위치, 그 자체가 에너지가 되던 시절이었다.    

"학생들은, 특히 수업을 지루해 하는 학생들은 '쌤 얘기해주세요', '시사적인 문제, 요즘 뭐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하면 또 못 이기는 척 세상 돌아가는 얘기하고 그랬죠.(웃음) 그 당시에 주로 대학생들이 시위를 하고 그랬잖아요. 신일고등학교도 그런 전통이 또 있었어요. ‘전고협’, 전국고등학교협회 이런 식으로. 거기에 신일고등학교도 이제 관련이 있고. 그래서 고등학교 학생운동에 상당히 앞장서는 학생들도 있었고. 그래서 그런 학생들 보면 안타깝잖아요, 대학은 가야 되지 않겠니?(웃음) 하면 (학생들이) 지금 대학이 문제예요? 나라가 이런데?"

정작 본인은 학교에서 징계를 당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시위에 참여했지만 앞장서는 학생들에게 안타까움을 느꼈다니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생님은 하셨잖아요' 라는 조금은 도발적인 질문에 '이중적인 아픔'이라는 말로 답을 이어갔다.  

"(앞장섰던 학생 중에) 한 학생은 바로 노동현장으로 갔어요. 그냥 공장에 취직해서 일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그 노동운동, 운동의 삶으로, 운동의 정신으로 갔는데. 그 뒤에 다 헤어지고 나는 교육운동하느라 정신없고, 해직당하고 감옥 가고, 그 학생들은 나름대로 그랬는데 어느 날 자살을 했어요. 고등학교 제자죠. 그런 아픔도 있고.  

그때 같이 하던 다른 친구는 몇 년 그러다가 너무 힘드니까 그래서 공부해서 대학 가고. 그러면서도 뭔가 좀 사회를 위해서 노동자를 위해서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노무사 공부를 해서 힘든 노동자들 도와줘야 되겠다, 마음을 먹고. 지금도 노무사로서 노동자들을 도우면서 아주 잘 하고 있는 제자도 있죠. 그때는 같이 고등학생으로, 학생운동을 하다가 결과가 그렇게 되더라고요. 우리 삶이 다 그런 거죠.  

그런 개인, 개인의 삶이 전체적으로 합쳐지면 하나의 큰 흐름을 형성한다거나 그 시대를 반영하지만 그 속에서 하나하나의 삶은 또 각각 자기 삶에 있어서 힘들기도 하고 그런 거죠. 교사로서 굉장히 힘들었어요. 막 해서 정말, 뭐 (사회운동을) 할 수 있지만 그랬을 때 각자 한 사람 한 사람 다 귀한 자식이고 자기 삶을 해야 하는데 그걸 일치시키는 게 힘들잖아요. 참 힘들더라고 솔직히. 그래서 사실 비겁하게 아주 적극적으로 학생들한테 얘기를 못하는 그런 게 있죠. 그 당시도 이제 87년 그 무렵에 그런 이중적인 아픔이 있어요."

학생들을 보다 민주적인 환경에서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결코 학생들과 같이 시위에 나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던 시대에 대한 고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우리 삶이 다 그런 거죠"라고 담담히 말했지만 제자의 죽음, 운동가로서 녹록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제자를 지켜보는 선생의 마음을 안타깝지 않게 표현할 길은 없어보였다.   

"시대가 필요로 하는 교사" 

수업과 시위를 병행하며 87년 6월을 보낸 이수호 이사장은 이후 교사들과 함께 본격적인 교육운동을 이어갔다. 1987년 9월 27일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이하 전교협)를 창립한 후 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 창립까지 6월항쟁 이후 참교육 실현을 위한 교육계의 열망은 뜨거웠다.  

"우리가 처음 나서고 할 때는 교육문제, 학교의 심각한 문제. 학생들이 비교육적인 상황 속에서 당해야 하는 여러 가지 모순과 불합리, 이런 것들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하면서 한계에 부딪힌 거예요. 이런 것(교육적인 내용)만 가지고는 힘들다. 운동을 하는 주체, 운동을 하는 사람, 교사면 교사, 그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고민을 하고 그게 확실해야 운동이 지속되고 힘이 있다. 이러면서 교사의 문제로 자기 자신들을 되돌아보는 거죠. 

세상에 이런 저런 문제가 많은데 교육 문제만 달랑 해결이 안 되잖아요, 개혁이라는 것이 사회 전체가 각 분야가 동시에 움직여지는 거지, 다 썩어빠지는데 교육 하나만 이렇게 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사회 전체를 바꾸는데 어떤 관점이 필요한가 하는 토론이 벌어진 거죠. 그리고 그때(전교협)는 회원도 엄청나게 많았는데, 암만해도 교육법 하나를 못 고치는 거예요. 그래서 이건 아니구나, 이것보다 더 강력한 힘이 있는 조직, 단체가 필요하구나. 그리고 교섭이나 이런 것들이 법적으로 보장된 단체가 필요하다. 이런 것들이 노동조합이잖아요. 그래서 우리도 그러면 노동조합을 하자." 

전교조 결성 이후 1527명의 교사가 파면, 해임되는 등의 외부에 의한 억압도 있었지만 내부의 분쟁도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당시 노동조합, 노동자, 그리고 좌파라는 말에 대한 반감은 ‘빨갱이’에 대한 반감만큼이나 강력했다. 교사협의회에서 교직원노동조합으로 탈바꿈하자 탈퇴한 회원들도 많았다고.    

"요즘 좌파라는 말을 홍 뭐시기 대선후보가, 당신 우파요 좌파요, 하는데(웃음), 아 그걸 나한테 물어봐요, 나 좌파요! 뭐가 잘못 됐소?(웃음)" 

노동자로서 교사를 살피는 과정에서 그는 여러 사업장의 노동자들을 만났다. 이후 민주노총 위원장으로 활동할 만큼 누구보다 열심히 노조생활을 한 그의 역사를 보니 조금 의아한 지점도 있었다. 교육운동과 노동운동. 그 사이의 연결지점을 어디서 발견한 걸까. 

"나는 항상 전교조 위원장이든 민주노총 위원장이든 민주노동당 최고위원이든 내 교사로서의 한 역할이다, 이렇게 생각해요. 그 시대가 필요로 하는 교사. 교사는 스무 평 교실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고 본업이긴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역할을 폭도 넓혀야 된다는 거예요. 

스무 평 교실에서 열심히 수업하고 있는데 뒷문이 드르륵 열리면서 어떤 술 취한 남자가 들어와서 애들 수업을 방해한다고 하면 교사가 앞에서 수업하면서 '야 그거 신경쓰지말고 이거나 열심히 해 내 할 일은 가르치는 일이야' 하는 게 교사의 역할은 아니잖아요. 저것도 처리해야 되잖아. 그러면 잠시 분필을 놓고 당신 여기 왜 들어왔어, 하고 끌어내는 것도 교사의 역할이고 그것도 교육이다, 라고 느끼고. 나는 천상 교사잖아요. 그리고 한 번 교사는 영원한 교사고.  

지금 나이가 (정년을) 넘어서 학교에 근무는 못하지만(웃음) 뭐 특강이다, 교사 연수다 부르면 '아이 내가 뭐' 하면서도 속으로는 좋아서(웃음), 얼른 가서 애들 만나보기도 하고. 이런 식이죠." 

▲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수호 이사장. ⓒ전교조 홍보영상 캡쳐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 

교사 이수호는 참 여러 군데서 ‘수업을 방해하는 술 취한 사람’을 끌어냈다. 교육, 청소년, 장애, 이주노동자, 비정규직, 갈등해결 등 하는 일도 소속 단체도 다양하고 꾸준했다. 도대체 얼마나 열심히 사셨던 건가 싶을 만큼 이름을 올리고 있는 곳이 많았는데 그는 자신의 공사다망한 삶의 원인을 의외의 것에서 찾았다.     
 
"웬 늙은 선생이(웃음), 운동권도 아닌 사람이(웃음) 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고, 굉장히 성실하고 주변에 선망도 있는 사람이 같이 해주니까 얼마나 고마워요, 그러니까 그때부터 내 역할은 항상 나이 많은 그런 것 때문에(웃음), 부위원장, 무슨 위원장, 나이 때문에(웃음) 그래가지고 맨 그런 역할만(웃음), 온갖 그런 위원장 다 했다니까요(웃음)."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일찍이 교사생활을 시작한 이수호 이사장은 대학을 졸업하고 온 동료 교사들보다 10살 정도 많은 편이었다고 한다. 나이를 먹는 속도는 참으로 공평하여 처음부터 10살 많게 시작한 나이차는 결코 좁혀질 생각을 하지 않고, 결국 어딜 가도 나이 많은 사람, 이것저것 책임지는 사람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다.

그 중에 하나가 민주노총이었다. 신자유주의의 억압과 내부의 계파갈등으로 위기를 맞이한 노동운동을 살리기 위해 어떤 역할을 계속 맡아왔던 자신이 결국 또 나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 민주노총 위원장을 맡았던 그는 희망과 실망이 섞인 임기를 보냈다. 함께 운동했던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노동운동이 귀족화 ‧ 권력화 되어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며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우리나라 대표적 제조업이 조선업 이런 거잖아요. 조선업 대부분이 그 어마어마한 철판, 용접하는, 정교하고도 힘든 일이에요. 그걸 20~30년 한 사람이 연봉 6000~7000만 원  받는다고 그걸 무슨 귀족이고 어떻고 도둑놈처럼 (취급하는 건)그렇잖아요. 금융업이라든지 연구전문직이라든지 소위 말하는 전문직이라는 쪽은 연봉 1~2억 원 받아도 그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거는 이제 뭔가 이게 기준과 기본이 잘못된 거잖아요."

1987년은 6월항쟁이 있었던 해이기도 하지만 노동자대투쟁이 있었던 해이기도 하다. 2016년 겨울은 100만 명의 시민이 광장을 가득 메웠던 해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광장에는 언제나 노동자들이 있었다. 지난 30년 간 노동자들은 귀족노조, 종북, 빨갱이 등 여러 부당한 비난을 받으면서도 꾸준히 시위를 이어갔다.        

"사실은 작년 촛불의 어떻게 보면 강력한 밑받침이 되고 그렇게 됐던 에너지 중의 하나는 1년 전에 있었던 백남기 농민 돌아가신 민중총궐기, 그때는 얼마나 탄압을 받았어요. 경찰이고 뭐고. 물대포로 사람을 죽였으니까. 그러면서도 저항을 했잖아요. 모든 욕을 먹어가면서도. 그런 것들이 깔려 있는 거거든요.  

세월호, 백남기 등등의 사건들이 밑에 응축되어서 막 언젠가는 기회만 있으면 폭발하는 거잖아요. 그런 하나의 과정 밑에는 운동의 정신과 흐름, 희생이 담겨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 에너지는 욕 얻어먹어가면서 운동하고 있는 농민이나 노동운동이나 시민사회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사람들의 힘이 아닌가 싶어요." 

언제나 운동을 해왔던 사람들의 노고를 알아달라는 것이 아니라 작년 겨울의 광장을 우리가 다 같이 만들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는 그의 말을 들으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은 5월 10일을 문재인 대통령의 날로 기억하겠지만 누군가에게 5월 10일은 광화문에서 고공농성과 단식을 하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26일 만에 땅으로 내려온 날로 기억될 테니 말이다.  

거대한 파도가 지나간 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잔해들은 억압에 가장 깊숙이 박혀있는 이들이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억울하다고 푸념하는 나에게 이수호 이사장은 여기까지 온 것도 정말 대단하다고 말했다.     
    
"그만큼(정권이 교체된 만큼) 달라지겠죠. 난 그것도 대단하다고 봐요. 어쨌든 (정권)교체 자체도 의미가 있고. 헌법재판소 이정미 재판관이 그 차분하면서도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파면선고를 했지만 사실 촛불이, 촛불 시민들이 파면선고를 내린 거죠. 그 얼마나 대단해요. 그 자체도 정말 역사에 어마어마한 의미가 있고.  

촛불, 민중, 국민의 큰 승리로 기록되고 또 그만큼 지금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어졌잖아요. 다당제가 돼서 제일 위에서부터 안철수, 문재인, 심상정 그 옆에까지 가면 좌로 또 길어지고, 민중연합당도 있고. 이번에 출마를 못했지만 또 있고. 우로도 쭉 있고. 이렇게 스펙트럼이 넓어진 거예요. 우리가 그걸 인정해야 해요. 그걸 선악으로 해서는 안 되잖아요. 그것도 대단하다고 봐야죠." 

▲ 이수호 이사장. ⓒ바꿈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 의식" 

"사실 그 무렵 80년 광주민주화항쟁 이후에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이 막 일어난 그 사이에, 내가 그런(사회운동) 고민을 하면서 만났던 책이 <전태일 평전>이에요. 전태일하고 나하고 나이가 동갑이잖아요, 그러니까 더 절실히, 부채의식도 있고. 그 평전을 읽으면서 가슴이 뜨겁거나 울컥하거나 이런 수준을 넘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생각을 하게 되고. 이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나를 교육운동으로 이끄는 하나의 계기가 됐던 그런 거였는데. 그러면서 이제 늘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는 거죠. 같이 있는 거죠, 같이." 

영원한 젊은이가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그는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친구인 전태일을 진심으로 그리워하고 있었다. 본인도 얼마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차비를 모아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줬던 이야기, 국회도 찾아가고 시청도 찾아가고, 근로감독관도 찾아가고 심지어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는 이야기. 실패의 실패를 겪다 어렵사리 데모를 준비했지만 사전에 경찰에게 정보가 새어나가 결국 스스로를 불태우는 최후의 선택을 했다는 이야기.

당시 중간관리쯤이었던 미싱사로 일했던 전태일은 자기 밑에서 일하고 있던 13살, 14살의 어린 여공들의 삶을 보며 정말 마음 아파했었다고. 그의 삶을 이야기하는 이수호 이사장의 목소리에도 절절한 마음이 묻어있었다.  

"얘(전태일)가 마음이 아파가지고. 일기에도 쓰여 있지만 그걸 보면 마음이 아파서…그게 인간이잖아요. 뭔가 좀 힘든 일 보고 하면 마음이 아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거야. 

전태일은 자기 의식, 자기를 바라보면서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그런 생각을 굉장히 많이 했던 친구 같아요. 그러면서 나는 이 사회에서 어디 위치해야 하고 나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자기에 대한 책임이죠. 그리고 그렇게 인간으로서 자기를 바라보면 바로 남들이 보이잖아요. 관계 속에서의 자기. 그리고 연대의식, 함께 더불어 사는 공동체, 이런 것들이 이제 발전을 하게 되잖아요. 자기가 분명하지 않으면 그게 잘 안 돼요. 남들이 보이지도 않고. 그리고 항상 나보다 더 고통 받고 소외당하고 힘든 그런 약자를 생각하고, 이들과 끊임없는 소통과 연대. 이게 전태일이 아닌가 싶어요." 

나는 누구이고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 나를 중심으로 시작되는 관계와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전태일의 정신은 무엇인지에 대해 이수호 이사장은 이렇게 답변했다. 전태일이 여공들에게 풀빵을 건넸던 것처럼 아주 작은 일도 분명 의미가 있고 또 그 작은 일을 통해 사회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 사람은 결코 혼자 잘 살 수 없고, 또 혼자만 희생해 세상을 구할 수도 없다고. 나와 사회 간의 균형 잡기를 ‘전태일 정신’으로 풀어나갈 수 있다고 말하는 그의 말을 통해 참신한 교훈을 얻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30년 전으로 돌아가도 여전히 이 삶을 사시겠냐 물으니 후회는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시대에 맞는 교사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때 나에게 주어진 조건 속에서 내가 교사로서 그 시대 상황에 맞게 나는 판단했다고 봐요. 물론 갈등도 했죠. 그 현장, 현실, 아이들. 그 삶과 내 삶을 어떻게든지 좀 알차게, 아름답게 만들어 가야 되는데 그 시대적 상황이나 역사적인 문제라든지 이런 것들이 나를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이 만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 지금 30년 전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겠다 생각하고.  

또 내가 이 무지렁이가, 엄청 복을 받아가지고 아까 얘기한대로 내가 역할이 항상 무슨 회장, 사무처장, 위원장(웃음). 이런 게 아무나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한 명 밖에 없는데(웃음). 그러니까 내가 그런 식으로 보면 참 복이 많은 거죠. 나는 지금 입이 100개가 있어도 할 말 없고, 다만 내가 잘난 척 하면서 그런 역할을 했는데 세상이 뭐가 달라졌나. 그렇게 내가 해서 잘 해놓은 게 뭐냐 할 때 부끄럽고 그냥 그럴 따름이죠.  

이제는 책임지는 일이나 이런 거(대표) 안 해야겠다 생각하면서도, 굉장히 어렵게 싸우는 친구들이 밑에서 남을 도와주는 일을 '같이 좀 합시다, 도와주세요' 하면 외면할 수가 없어요. 와서 하자는데 어떻게, 해야지. 나는 빚이 있는데. 빚을 갚아야지(웃음). 전태일재단도 그렇고. 그래서 뭐 남은 기간, 남은 힘이 있으면 내가 그동안 살아왔던 삶에 대한 책임을 조금이라도 좀 지는 삶을 살 수 밖에 없고. 그런 점에서 아주 뭐 자랑스럽고 그럴 것도 없지만 크게 뭐 자신이 부끄럽거나 그럴 것도 없고. 아, 한 교사가 그 시대가 주는 그런 역할을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하면서 살았구나, 이런 생각으로 살고 있는 거죠." 

새로운 정권의 등장으로 매일 매일이 화제인 요즘. 촛불대선으로 세운 대통령의 행보가 많은 이들의 칭찬을 사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 한 구석 어딘가에는 투쟁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법 밖으로 밀려난 전교조는 여전하고, 땅으로 내려온 노동자들은 여전히 투쟁 중이다. 

이수호 이사장이 전 삶을 통틀어 지키고자 했던 시대가 필요로 하는 교사의 역할만큼 시대가 필요로 하는 시민의 역할도 선명해져 간다. 87년의 역사와 2017년의 역사로 쟁취한 힘에는 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이들의 것도 분명 포함되어 있고, 그러기에 우리는 민주주의를 꼭 나눠야 한다는 것. 이제 우리는 지난겨울 광장에서 외쳐왔던 ‘이게 나라냐’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지 않을까.  


"촛불집회, 이제 시민이 탄생했다"
[6월항쟁 30주년 특집 인터뷰 ⑦] 김인봉 안양군포의왕 친환경무상급식시민행동 상임대표

"여기 이 지점이 잊히지를 않아요. 화염병이 떨어지니까 이 방향으로 가는 차를 붙들고 휘발유 좀 달라고… 차 세워놓고 그 자리에서 빨대로 기름을 빼서 즉석으로 화염병을 만들기도 하고 그랬어요. 소주병도 구해오고." 

손가락 끝이 가리킨 곳은 6차선이 넘는 사거리의 한복판이었다. 놀라서 되물으니 "그러니까 여기"라며 김인봉 안양군포의왕 친환경급식시민행동 상임대표의 손끝에 힘이 실렸다.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시민들도 기꺼이 차에서 기름을 내어 줄만큼 "군부독재에 대한 사람들의 피로도가 굉장히 높았다"고 그는 1987년 6월의 분위기를 설명했다. 당시 집회가 열렸던 길을 김 대표를 따라 걸으며 30년 전을 그려보았다. 

"본백화점(현 본프라자)이 당시에 최고 좋은 건물이었어요. 여기가 제일 번화가였죠. 지금은 CGV인데 그때는 삼원극장이라는 유명한 극장이 있었어요. 바로 이쪽에 중앙시장이 있어서 사람이 지금도 많잖아요. 새로 지은 건물이 많지 않아서 거리 풍경이 당시와 다 비슷해요. 저기 높은 건물 옥상에서 유인물을 뿌렸죠. 그때 6월에는 여기에 2만 명가량이 모였어요. 완전 해방구가 된 거죠." 

87년 안양지역에서 가장 큰 시위가 열린 때는 6월 26일. 전국 각지에서 200만 명에 가까운 국민들이 시위에 나선 국민평화대행진 날이었다. 인파는 안양로 중앙사거리에서부터 우체국사거리까지 걸어서 10분 거리에 이르는 6차선 도로를 가득 채웠다. 김 대표는 청년 노동자를 비롯해 시위에 참여할 수 있는 주민들 대부분이 거리로 나섰다고 설명했다. 30년 전 그 길 위에 2017년 촛불집회의 풍경을 대입하며 한참을 더 걸었다. 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그때 사람들이 경찰서까지 가서 거의 점령할 뻔 했어요. 경찰들은 서울에 진압한다고 다 가서 거의 비어 있었죠. 경찰서 담을 허물고, 담장 일부를 불에 그슬리고…."

경찰서는 시위대 말미가 서 있던 우체국사거리에서도 1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다. 이만큼을 일부러 걸어올 만큼 6월항쟁의 열기와 독재정권을 향한 분노가 뜨거웠으리라 생각하던 순간, 커다란 벽이 찬물을 끼얹었다. 안양경찰서는 이미 자리를 옮겼고, 그 터에서는 재건축 공사가 한창이었다. 공사장을 가린 커다란 벽과 천막 틈새로 아직 들어내지 못한 흔적을 간신히 구경하고 자리를 떴다. 

▲ 김인봉 대표. ⓒ바꿈


"대중 전체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 

6월항쟁 이후 어느덧 30년. 그는 변한 것이 없다고 했지만 경찰서는 사라졌고, 단관 극장은 멀티플렉스가 되었다. 본프라자는 더 이상 지역 최대의 백화점이 아니다. 그 시간 속에서 김인봉 대표 역시 조금은 변했으리라. 

"대중과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마찬가지에요.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과 계속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어릴 때는 혼자서 모든 걸 결정하고 왔어요. 그런데 운동을 하면서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고 해야 많이 할 수도 있고 진리는 거기에 있는 것 같다… 물론 모든 게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게 그렇다고 생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중 전체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는 걸로 생각이 많이 바뀐 거죠."

혼자 결정하고 실행했다던 김인봉 대표. 처음 체포된 일 역시 혼자 결단한 일이었고, 그 일은 1980년 4월 16일자 <동아일보> 기사('군사교육 반대 유인물 배포 성대생 포고령 위반 검거')에 그대로 남았다. 대학에 입학한 지 겨우 한 달을 조금 넘긴 시점이었다.

"제가 되게 가난하게 살아서 고등학교도 못 갈 형편이었어요. 우리 엄마, 아버지가 일찍 이혼도 하고 어릴 때부터 혼자 살아서 대학 갈 생각도 못 했어요. 그런데 경북대에서 (1979년) 시위하는 걸 보면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대학교 가서 데모 한 번 하고 죽어야 겠다… 약자가 소리치는 건 정의라고 생각했어요." 

독재자 박정희가 죽은 이듬해, 계엄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데모 하려고 대학에 갔다'는 김 대표는 1980년대 계엄포고 위반 1호로 잡혀 들어갔다. 문제가 되었던 유인물에는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군사 집체 교육(교련)을 거부하자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고등학교 때도 교련을 받았는데, 고등학생이 받은 건 군대를 면제해주지 않아요. 그런데 대학생은 교련하면 군대를 2개월씩 감해줘요. 그때는 대학에 가는 사람이 전체 몇 퍼센트가 안 됐잖아요. 여학생들은 반에서 한두 명 밖에 대학에 못 갔고, 내가 다닌 학교는 공업고등학교였기 때문에 전교생 1천 몇 백 명 중에서 (대학 진학자가) 몇 십 명이 안 됐어요. 학생에게 군사 훈련을 시키는 게 군사 문화라는 점에서도 문제인데, 거기에다 대학생에게만 혜택을 주는 불평등이 있었죠." 

그런 김 대표가 노동운동에 뛰어든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을지 모른다. 그는 학업을 포기하고 84년 12월 말께 안산공단에 취업을 했다. 공업고등학교 출신, 용접이 특기였다. 하지만 자신의 삶만으로도 버거운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사회 문제에) 당연히 관심 없죠. 어쨌든 그때는 살기가 좀 좋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전두환 때에 3저 호황이 왔잖아요. 박정희 정권 말기의 경제 위기가 극복되어 가고 있던 시점이 있었으니까, 억압된 사회 문제가 있을지 모르지만 일반 사람들이 그렇게 관심을 갖기는 지금도 다수라고하기 어려운데, 당시엔 더 그랬겠죠?"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길이 가장 멀다' 

노동운동을 하던 당시 김 대표는 일은 안산에서, 거주는 안양에서 하고 있었다. 안양에는 직원이 댓 명에서 많아 봤자 스무 명 정도에 불과한 소규모 공장('마찌꼬바')들이 즐비했다.

"공장들이 수도권 규제 정책에 따라 이동해 나가는 때였어요.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이 인천에 많이 갔으니, 우리는 수도권 옆으로 가서 소위 서울 주변을 조직화하자는 관점으로 안양에 왔어요." 

노동자 속으로 들어가자고 했지만 '학출'(대학 출신)들은 자신들의 한계에 갇히기 일쑤였다. 대중을 상대로 공장 벽에 낙서를 하고, 유인물을 쓰면서도 '신식민지 예속 국가 독점 자본주의 타도하자!'나 '제헌 의회 소집하자'와 같은 일상 언어와는 거리가 먼, 사회과학적 용어들을 빼곡히 적어 넣었다. 

"저는 다른 애들에 비해서 정말 가난뱅이 출신이어서 상대적으로 대중 정서에 가까운 편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 게(어려운 어휘를 쓴 구호 등) 말이 안 된다는 주의였기 때문에, 그런 구호가 무슨 의미가 있나, 뭐가 중요한지를 모르는데…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해도 애들한테는 잘 안 통했죠. 제가 확산하지 못한 잘못도 있고요. 

이성중심주의가 강한 측면이 있어서 그랬던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는 (문제를) 알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는데, 신영복 선생께서 예전에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데가 길이 가장 멀다'고 하셨어요. 아는 게 행동으로 옮겨지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요. 옮겨지는 시간이 필요한 거잖아요?" 

안산과 안양을 넘다들며 노동자와 함께 하는 법을 고민하던 김 대표는, 아쉽게도 1년여 만에 공장 생활을 접어야 했다.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 허리디스크가 오는 등 몸이 많이 망가져 있었다. 경찰에 연행됐을 때 당한 폭력의 후유증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추측’이라고 단서를 달며 말했다. 

"5.18 나고 난 다음에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때 들어가자마자 밟더라고요. 군화발로 밟았어요. 한 30분 밟혔을 거예요. 아프지는 않았어요. 왜냐면 정신없이 맞았으니까. 그렇게 맞고 나니까 정신은 없었고, 몸이 쑤시는 거 밖에 없었는데 그때는 병이 안 났으니까…."

선택지가 없었다. 신체적으로 조금은 수월한 시민운동으로 방향을 틀어야 했다.

"한홍구 선생이 '청년학교'라고,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학교 같은 것을 서울에서 처음으로 했어요. 우리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하 민청련) 안양지부에서도 청년학교를 했어요. 대중 조직 방안으로 교육 사업을 한 건데, 한국사나 철학, 경제 등을 가르쳤어요."

글을 읽지 못하는 성인들을 위한 문해학교를 열고, 독거노인과 소년소녀가장 등 약자들을 위한 모금활동도 진행했다. ‘진짜’ 생활정치를 실현하려 92년과 94년 두 차례에 걸쳐 지방자치선거에도 출마했다. 엄청나게 달려왔지만 김 대표는 자신이 해온 일을 ‘실패’라고 말했다. 

"더 이상 할 힘을 못 만들어 냈어요. 지친 거지요. 조금만 더 힘을 냈으면 좋았겠지만, 온힘을 다해서 더 할 수 없었어요. 힘은 100을 다 내서 달리면 안 된다, 60으로 달리다가 열심히 할 때 80, 결정적일 때 100을 해야 한다. 120이나 200은 정말 죽을지 모를 때나 해야 한다는 게 이때 얻은 교훈이에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김 대표는, 조직 내부의 갈등과 분열 역시 못내 아쉬워했다. 

"책을 읽고, 세미나를 하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니까…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게 중요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상에 내가 보고 판단하는 기준이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수학에서 방정식을 연립으로 세워서 푸는 것처럼, 세상은 연립으로 푸는 것보다 더 많은 함수가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편견으로, 한 가지 고정관념으로 재단을 해요. 지금도 민주 대 반민주,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나는 반대를 해요. 통일 전선에 대해서는 존중을 하지만요. 

당시 민청련에는 좌파와 우파가 같이 있었어요. 그래서 계속 같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찢어졌어요. 대중 조직 중에서 좌우가 같이 있는 유일한 조직이었는데 찢어져 버려서 우리 때도 같이 하지 못했는데 뭘 할 수 있나…." 

"타인의 밥에 관심을…6월항쟁보다 더 감동" 

그렇다고 운동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도시락도 제대로 챙겨 다니지 못할 만큼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김 대표의 눈에 학교 급식 문제가 들어왔다. 2000년대 중반, 그는 '무상 급식' 운동을 시작했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최초로 타인의 밥에 대해서 투표를 던진 사건이라고 생각을 해요. 아이를 키우는 건 국가의 의무이고, 또 학부모들이 다른 아이들의 밥을 이야기했다는 점에서 공통체성에 굉장히 주목을 했어요. 

우리 아이가 학교에 다니면서는 제가 학부모 운영위원회 위원장을 했는데, 그때는 친환경 급식을 만들었어요. 이전과 같은 급식비로 친환경 급식률이 70~80%가 됐어요. 안양시장을 압박해서 안양시장이 결정을 한 건데, 그게 서울 성북구에서도 된 거죠. 이렇게 친환경 급식이 한 곳에서 물꼬를 트니까 모두가 그걸 따라하게 되는 거예요. 6월항쟁보다 더 감동을 받았어요. 하나의 불씨가 광야를 불사르는 경험을 한 거죠." 

김 대표는 "경기도 급식을 좋게 만드는 데 안양의 역할이 크다"고 자평하면서도,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한 게 아쉬움을 표했다. 친환경 무상 급식 도입, 무엇이 더 있을 수 있을까.

"그런 정책을 실행하는 것을 통해서 민주주의 훈련을 시키면 좋아요. 급식은 학교에서 사람을 가장 많이 모을 수 있어요. 학부모가 가장 예민한 문제니까요. 이걸 모티브로 해서 집에서도 먹어야 되는 게 있고, 학교 급식 만이 아니라 공공 급식의 영역을 확대해 나가야 되는 것도 있죠." 

식생활을 통해 민주주의를 교육하고, 그 영역을 확대시킬 수 있다는 김 대표의 말에서 생활 속 민주주의에 대한 짙은 고민이 묻어났다. 묻고 싶었다. 30년 전 6월항쟁은 왜 정치적‧형식적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데서 그쳤을까. 김 대표는 "시민이 여기까지 오는 과정까지 걸리는 시간"이라고 설명했다. 

"나부터도 시민 민주주의가 뭔지 몰랐어요. 활자로만 있었던 거예요. 민주주의, 주민, 주인이라는 게 그저 말인 거죠. 요새 보면 집을 짓는데 그 앞집에서 시끄럽다, 돈 내놔라, 보상하라고 그래요. 자기 집을 지었을 때 시끄러운 건 고려를 안 하는 거잖아요. 각자 도생의 시기에 자유와 민주는 그렇게 이해가 됐어요. 공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국가가 어떻게 돼야 한다는 생각이 비로소 생기고 있어요." 

▲ 화염병을 즉석 제조했던 곳을 가리키는 김인봉 대표. ⓒ바꿈


촛불집회, 비로소 시민이 태어났다 

민주주의와 주권이 글이 아니라 진정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건 6월로부터 30년 떨어진 지점에서 열린 촛불집회를 통해서였다. 김 대표는 이를 '시민의 탄생'이라고 칭했다.

"시민의 탄생이라고 계속 이야기를 해요. 그 전에는 시민이 없었어요. 주권이 있는 것에 대한 인식이 없는 사람이 무슨 시민이에요. 시민은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시민 사회라는 말의 시민이 그거잖아요.  

봉건국가가 아닌 민주주의 국가. 시민 민주주의(civil democracy)에 대한 이해는 바로 주권과 시민의 의무, 이런 데 대한 이해에요. 우리는 비로소 시민 주권에 대한 눈을 떴어요. 이제야 시민 혁명을 정치적으로 이행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어요. 그 전(1987년)에도 그렇게 돼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했는데 사람들이 동의가 안 된 거죠."

학생운동이 확보한 공간이 6월항쟁을 열었듯, 6월항쟁이 시민혁명을 탄생시켰다. 이름만 있었던 시민들은 민주주의에 드디어 눈을 뜨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오는데 필요했던 시간 30년.  역사는 삐걱거렸고, 때로는 되돌아갔다. 이제 막 태어난 시민이 좌충우돌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이행해 나가기 위해서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진짜 시민으로 한 걸음 더 전진시켜야 될 것 같아요. 아마 곧바로 되지는 않을 거예요. 우리가 촛불집회에서 시도를 해봤어요. 토론광장을 열었는데 대다수는 잘 안 됐어요. '각자 의견을 내봅시다'라고 했는데 그게 안 돼요. 집에서 촛불을 들어봅시다. 이런 게 안 되는 거예요. 

내가 이야기하는 시민은, 개개인의 멘탈이 강해져야 되는 거예요. 개별자로서 행동할 수 있어야 시민이죠. 촛불이 광장에서 모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해보자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됐어요. 그에 의존하지 않아야 민주주의가 되는 거죠. 조금 더 자유롭게, 각각의 영역에서 액션이 일어나야 되는 거지 모여야만 액션이 일어나면 안 되는 거예요."

나와 너의 운동이 별개로 존재하고 그걸 자신의 생활 속에서 행동하는, 그리고 그 운동을 서로 존중하며 공동체를 이룩하는 일. 김 대표는 2017 촛불의 남은 과제를 이렇게 설명했다. 

"누적된 걸 확인하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다" 

인터뷰의 말미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했던 질문이 있다. 우리는 왜 87년을 기억해야 하는가. 그는 4.19혁명에 대해 자신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노라며 조곤조곤 설명했다.

"4.19혁명이나 6월항쟁이 임진왜란 같은 이야기일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걸 타인을 통해서 (경험)한 적이 있는 것일 뿐이잖아요. 4.19나 5.18 때 사람들이 저항을 하고, 어떻게 전진해 왔는가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4.19를 다시 또 해야 할 거예요. 굳이 느낌이 안 오니까 (기억을) 안 해도 되겠냐고 말할 수는 있지만, 역사는 누적하지 않으면 전진이 안 돼요. 우리가 예전에 왜 이런 민주주의를 하게 됐는지, 전혀 이해가 없으니 민주주의가 안 되는 거죠. 누적된 걸 끊임없이 확인하지 않으면, 앞으로 그만큼 나가지를 못하는 거예요."

발돋움할 자리를 되돌아보며 기억하는 일. 촛불광장에서 6월항쟁을 돌아보는 이유는 지난겨울 광장의 정신을 잊지 않고, 출발점을 확인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내일이면 알게 되리 역사가 어디로 흐르는가를”

1987년 6월9일 ‘국민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 참석했던 경영학과 2학년 이한열이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다. 그의 죽음은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다.

김형민 (PD)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6월 02일 금요일 제506호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혁명을 꿈꾸는 앙졸라와 마리우스 그룹의 합창, 장발장과 딸 코제트의 이중창, 거기에 테나르디에 부부의 우스꽝스러운 양념송, 혁명을 막으려는 경관 자베르의 독창이 이어지다가 그 모두가 한목소리로 어우러지는 대합창. “Tomorrow we’ll discover(내일이면 우린 알게 되리라) What our God in Heaven has in store!(하느님께서 그 보고(寶庫)에 무엇을 두셨는지) one more dawn(새벽이 한 번 더 오면) one more day(내일이면) one day more!(내일이면!).” 혁명 전야에 펼쳐지는 결의와 비겁, 용기와 도피, 사랑의 뜨거움과 이별의 차가움의 파노라마에 더하여 각양각색 사람들의 처지와 생각이 얼키설키 뒤엉켰다가 “내일이면 알게 된다!”로 합쳐지는 의미심장한 장면이었지. 오늘은 우리 현대사에서 “One day more!”를 부르짖는 듯했던 하루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해.

아빠가 대학에 입학한 건 1988년. 그 전해에 일어난 6월 항쟁 비디오를 보는 건 학생회의 주요한 교육 프로그램 중 하나였지. 1987년 6월10일은 야당과 재야 운동단체가 총집결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개최하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열리는 날이었어. 마침내 D-1의 날이 왔단다. 정문 앞에 나붙은 ‘결전 1일 전’. 더 이상은 이 정권과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는 이들의 각오가 그 획 하나하나에 담긴 듯 글씨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지. 내일. 내일이면 알게 될 것이다.

다음 날 6월10일 행사가 열릴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는 경찰의 원천봉쇄에도 상당수 인사들이 잠입해 있었고 경찰이 성당에 군홧발을 들이밀지 않는 한 원천봉쇄 속에서도 그 깃발을 가냘프게나마 올릴 예정이었어. 허약함에 비해 이 행사를 맞이하는 전두환 정권은 막강했으나 그 이상으로 유치했다.

6만 경찰을 총동원한 것은 기본, 전국 대도시의 도심은 ‘안드로메다 군단’ 또는 로마 병정이라고 불리던 녹색 제복의 전경들로 홍수를 이뤘지. 당시 시위 지도부는 6월10일 당일, 시민들에게 국기 하강식에 맞춰 경적 시위를 해달라고 제안해두고 있었는데 이에 정부는 서울 시내버스와 택시 회사 전화로 득달같이 전화를 돌린다. “경적기를 다 제거하시오. 이유 없소 다 빼시오.” 일반 승용차들은 어떻게 막았냐고? 경적을 울리면 경범죄로 5만원을 물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 검사들을 일선 경찰서에 배치하고 심지어 시위 현장에 나가서 진압을 독려할 것을 지시했으며, 도심의 고층 빌딩들에는 ‘학생들의 점거와 투신’을 예비한 대책 수립을 독촉했고, 데모에 참가할 것 같은 재야인사 수백명은 아예 집에서 한 발짝도 못 나오게 막았어. 그런 살벌한 6월9일이었다. 다음 날은 그들에게도 매우 중대한 날이었어. 집권당인 민주정의당의 대통령 후보가 선출되는 날이었거든. 만반의 준비를 끝낸 그들은 자신만만하게 얘기하고 있었어. “내일은 문제없어.”

6월9일 전국적으로 각 대학에서 ‘출정식’이 열렸어. 당시 아빠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청소 도구를 사러 나왔다가 학교 근처의 대학교로 올라가는 언덕길 어귀에서 한 대학생이 목이 쉬어라 외치고 있는 걸 보았어. 학교 정문은 까마득히 먼 언덕 위에 있었고 경찰들도 심심찮게 출몰하던 곳이었지만, 웬일인지 그는 핸드마이크를 홀로 들고 서 있었어. 그의 한마디는 아빠의 기억에 선연히 남았다. “이건 전두환이 죽느냐 우리 모두가 죽느냐의 싸움입니다.” 그리고 누차 강조하던 내일. 그리고 내일.

“전두환이 죽느냐, 우리 모두가 죽느냐”


그리고 그날 서울의 대다수 대학에서도 6·10 대회 참가를 결의하고 기말고사를 거부하는 학생집회가 열렸어. 연세대학교에서도 그랬지. ‘국민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학생 2000여 명이 몰려들고 학내 집회가 끝난 후 교문으로 진출했어. 그들이 내건 플래카드의 내용은 이랬지. “4000만이 단결했다. 군부독재 각오하라.” 당연히 최루탄이 터졌고 학생들은 학교 안으로 후퇴했어. 그런데 그 와중에 한 학생이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말았지. 경영학과 2학년 이한열이었다.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이한열을 도서관학과 학생 이종창이 부축하면서 진압 경찰을 바라보던 순간을 잡은 사진기자가 있었어. 로이터 통신 정태원 기자였지. 그러나 그 사진이 한국 현대사에서 지대한 의미를 획득한 건 로이터보다는 국내 언론에서였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로이터 통신 정태원 기자가 찍은 이 사진을 <중앙일보>가 키워서 내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날 이창성 당시 <중앙일보> 사진부장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어. 자기 회사 기자들의 사진을 훑어봤는데 그다지 좋은 사진이 없었던 거지. 그는 로이터 통신에 사진 협조를 의뢰했고 표준 렌즈로 찍은 작은 사진 하나를 받게 돼. 바로 이종창이 이한열을 부축하는 그 사진이었지.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친구를 부여잡고 전경들을 응시하는 안타까운 젊은이의 눈빛과 복면에 가려진 (최루탄을 조금이나마 막아보기 위한) 입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을 응시하던 이창성 부장은 순간 역사적 결단을 내린단다. 정부에서 신문사에 보도지침을 내리고 어떤 건 빼고 어떤 건 넣고 기사 크기와 사진 게재 유무까지 결정하던 시기였지.

“이 사진을 키워서 낸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보안대에 끌려가도 내가 끌려간다.” 이렇게 중얼거리며 그가 책상을 쳤을 때, 이한열의 사진은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큰 언덕으로 솟아오르게 됐지.

‘최루탄을 맞은 연세대생이 사경을 헤매고 있다!’ 연세대학교는 학교 전체가 들고일어섰어. 공수부대, 해병대 출신을 선두로 한 예비역들이 군복을 입고 ‘전략적인’ 시위에 나섰고 여행 동아리, 종교 동아리 등 운동권과 별반 관계없던, 오히려 배타적이던 이들까지도 세브란스 병원에서 밤새워 이한열의 병상을 지키게 돼. 당시 세브란스 병원에 있었던 한 연세대 졸업생을 훗날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이런 말을 하더구나. “평생 처음으로 죽을 결심을 했어요. 그리고 전경이 들어오면 그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글거리는 잉걸불 같던 젊음들은 6월9일 밤과 6월10일 새벽을 두 눈 부릅뜨고 맞게 돼. “내일 두고 보자.”

6월9일 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사람 가운데에는 내무부 장관 고건도 있었다. 참여정부의 국무총리를 지내기도 했던 그는 치안 총책임자로서 6월9일 밤을 맞았지. 치안본부에서 밤을 새우며 상황을 주시하던 그에게도 당연히 이한열의 소식은 전달됐겠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87년 7월9일 서울시청 앞에서 치러진 이한열 열사의 노제에 시민 100만여 명이 운집했다.

그해 여름은 무척 더웠단다. 한낮의 뜨거운 기운은 밤이 되어도 수그러들지 않았어. 아니 되레 끓어오르고 있었지. 1987년 6월9일 대한민국에서 잠 못 이룬 사람들은 모두 역사의 무대에 올라 있었지. 그리고 목청 돋워 노래하다가 대합창을 하게 됐을 거야. 서로 다른 의미로. “내일이면 알게 되리 역사가 어디로 흐르는가를.” 다음 날 대통령 후보가 될 꿈에 부풀어 있던 노태우씨부터 성공회 성당에서 안절부절못하며 6월10일을 기다리던 사람들, 세브란스 병원에서 ‘한열아 한열아’ 부르짖던 연세대 그림패 동아리 학생들, 혹여 내일 보안대에 끌려가더라도 의연해야지 다짐했을 <중앙일보> 사진부장, 내무부 장관 고건, 그리고 내가 봤던 핸드마이크의 대학생까지. 그들 모두가 합창하고 있었어. “내일이면. 내일이면. one day more.”



"촛불광장에 페미니스트가 있었음을 기억하라"

[6월항쟁 30주년 특집 인터뷰 ⑧] 김금옥 여성미래센터 센터장
2017.06.08 08:14:42

인터뷰 전 날, 김금옥 센터장(여성미래센터)을 만났다. 어느 단체의 페미니즘 관련 행사, 그곳에서 촛불과 뉴페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계보가 되어주어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대학에 다닐 때는 눈 씻고 찾아봐도 잘 보이지 않던 ‘언니’들과의 만남이 참으로 즐겁다고. 하루가 채 지나지 않은 다음 날 오후 다시 만난 김금옥 센터장은 일단 차나 한 잔 마시자며 반겨주었다.  
 
집회를 함께 만들어 간, 집회에는 없는 사람들 
 
"6월 10일, 아마 거리에 있었는지, 지금 생각은 잘 안 나요. 아니면 학교에서 지금으로 하면 홍보물, 이거를 밀든지 뭘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6월 항쟁 때가 대학교 4학년 때였기 때문에 학생회 활동을 하고 있었어요. 전부 다 거리에, 가두시위가 있으면 나가고 하는데 우리는 또 다음날을 준비해야 하잖아요. 메시지 같은 걸. 그래서 아마 가두시위가 아니었으면 총학생회 사무실 어디선가 이벌식 타자기를 두드리고, 수동식 등사기를 밀고 (유인물을 찍고). 어떤 때는 그럴 시간이 없으면 철필로 써서 찍고 다음 날 거리에서 시민들한테 나눠줬거든요."
  
인터뷰 연재 초기에 만났던 황인성 이사장(수원민주화계승사업회)의 말들이 생각이 났다. 민주헌법쟁취운동본부(이하 국본)의 상임집행위원으로 6월항쟁에 참여했던 사람으로서 전 날부터 미리 나와 있었던 상황, ‘007작전’처럼 서로를 알아보고 암호를 전달하는 등의 행동들. 당시 대학교 4학년이었던 김금옥 센터장도 마찬가지였다. 6월민주항쟁의 주역이라 불렸던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전대협)1기로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이었다.
  
"그 환호하는 광장에 내가 있었나, 6.29때는 분명 있었는데, 환호하고 옆 사람 끌어안고. 6월 10일날은 잘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왜냐면 집회를 준비하고, 운영하는 사람들은 늘 광장에서 함께 할 수만은 없거든요. 준비를 하는 사람들은 그걸 못 보거든요. 
  
6월민주항쟁 때 학교에서 일을 하면서 전국에 비상상황, 그 때 계엄이 선포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잡혀가면 뭘 하고 옆에서 챙기는 역할이 있었기 때문에. 비상연락망 짜고 누가 다치면 병원가고, 누가 잡혀가면 변호사 연결해서 무료변론 해줘야 하잖아요. 이런 것들도 역할이 있었으니까 매번 광장에 거기 가서 있지는 못했어요. 우리는 막 그 광장에 가고 싶었죠."
  
매일 매일 거리에 있던 삶이었고 그렇기에 그 날, 6월 10일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에 순간 부끄러워졌다. 여전히 투쟁하는 삶을 살고 있는, 지난 30년 간 쉬지 않고 활동해온 그에게 적절치 못한 질문이었다는 생각이 스쳤다. 집회를 준비하느라 집회에 가지 못한 적도 있었다는 말, 기록되지 않은 역사 속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있었을 30년 전의 활동가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 김금옥 센터장. ⓒ바꿈


잡히지 않았다면 삼거리에 있는 공중전화박스, 거기에 달려있는 전화번호 책에 표시를 할 것. 그 표시를 확인하면 약속된 다음 단계로 넘어갈 것. 면회를 가는 이들에게 질문을 부탁하고 답변을 전달받고. 그저 일상의 대화인 줄 아는 내용, 결국은 암호를 번역하고. 첩보영화 저리가라는 내용을 준비하고 달달 외웠을 이들을 생각하니 마냥 즐겁진 않았겠다고 하는, 철저히 준비할 만큼 무섭고 두려운 느낌도 있었겠다고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지역보다 더 철저할 수밖에 없었다. 김금옥 센터장이 있었던 전라북도는 당시 불과 10년도 채 되지 않았던 광주의 기억을 어느 곳보다 절실히 간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웃 광주에서 계엄령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아직 그것을, 피해도 드러내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에 여전히 군부가 있었던 거예요. 억압했던 사람이 정권을 연장했는데, 거리에 수많은 사람이 나오니까 거의 막 세상이 뒤집힐 것 같은 분위기였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 그런 두려움이 있었던 거죠. 그런 소문도 돌았던 거예요, 계엄이 선포 될 거라고."
  
이번 촛불에서는 엉뚱한 집단이 계엄을 '요구'했지만 실제로 계엄의 공포를 느낀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87년의 성과이기도 하고, 우리나라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이기도 했다. 그러나 꼭 계엄령 때문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집회 속에 없는 집회를 만든 사람들은 존재했다. 
  
"여성단체에서 운동할 때도 3.8(세계여성의 날)때 우리 활동가들은 그걸(행사 전체를 ) 못 봐요. 활동가들은 죽어라 자기가 만들었던, 기획하고 준비하는 것이 구현된 모습을 자기는 모른단 말이에요. 뭐 일하고 무선하고, 현장에서 뛰어다니느라.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백조의 발들이잖아요. 또 활동가들이 일하는 사진은 아무도 안 찍어, 다 환호하는 사진만 찍잖아요. 그래서 몇 년 전부터는 후원의 밤이나 3.8행사 때는 활동가들 일하는 걸 쫓아다니면서 찍어서 보내주기도 했어요." 
 
아마 촛불집회에 참여한 사람들 역시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저 무대를 세우는 데 얼마가 들었을까, 누가 세웠을까, 곳곳에 있는 스피커는 누가 가져다놨을까. 매주 진행되는 집회에서 식순은 누가 정리했을까, 발언은 누가 수집했을까. 100만이 넘는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이는 행사에서 나타나는 질서정연함은 그저 시민의식의 발전 때문이었을까. 물론 그런 측면도 있겠지만 이 질문들의 답은 대부분 퇴진행동의 활동가들에게 있을 듯하다. 촛불이 더 높게, 더 활활 타오르도록 그 밑에서 열심히 뛰어다니는 활동가들과 수많은 자원봉사자들.
  
거리에 나가고 싶어 했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기에 지금은 행사 때 마다 활동가들의 사진을 꼭 꼭 찍어준다고 한다. 당신도 분명 이 역사 안에 있었고, 우리가 그것을 기억한다고. 
 
여성의 운동과 여성운동 
     
"학생운동을 하는 속에서 여학생들도 사회 진보적 의식화를 했는데 맨날 중요한 결정은 남학생들이 하고. 화염병 던질 때는 우리를 보호한다며 뒤로 빠져라, 돌멩이를 치마에 담아서 와라, 하는 식이고. 그리고 자연스럽게 성별 분업이 있는 거죠. 집에서 엄마가 하는 일은 여학생들이, 아빠가 하는 일은 남학생들이, 그런 게 아무도 어색하지 않은 거예요. 말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쫙 역할 분담이 되는 거야. 그러나 그 중에 그게 불편한 사람들이 있겠죠? 저 같은 사람들?" 
 
열심히 공부를 했다. 노동, 역사, 철학. 동기들과 스터디를 하고 ‘의식화’에 함께 뛰어들었다. 그러나 마주한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당시의 환경들은 사진에 찍히지 않는 활동가처럼 여성을 운동의 주체로 여기지 않고 줌-아웃(Zoom-Out)시키기 일쑤였다. 여성들은 분노했고, 목소리를 찾아 나섰다. 남학생회가 되어버린 총학생회 외에 총여학생회를 출범시켜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이다.  
 
"그러다가 우리도 여학생회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러니까 남학생회도 있냐, 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너희는 총학생회 자체가 남학생회니까 (라고 했어요). 여학생들의 권리만이 아니라 우리도 여기서 여성들이 주체로서 사회변혁의 학생운동을 참여하겠다, 하면서 여학생회 만드는 걸 한 거지." 
 
총여학생회를 만들고, 단과대별 여학생회까지 조직했다. 없는곳은  없는 대로, 있는 곳은 있는 대로  '선출범 후인식'으로 일단 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 가능한 단과대 별로 여학생회를 만들고 출범에 성공했다. 경쟁자 없는 단선의 선거였지만 여성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어떤 여학우는 와서 항의한 적도 있어요. 자기는 여성으로서 곱게 대학 졸업하고, 자기 집은 먹고 살만도 하고, 그냥 시집 잘 가서 자기 편하게 살았으면 되는데 왜 나한테 이런 걸 알려줘서, 여성이 차별받고 살고 있는 걸 알려줘서, 힘들게 살게 하냐고. 왜냐면 그 때는 주체로 선다는 건 그런 기득권을 포기한다는 뜻이었어요. 우리(운동권)는 또 달랐지만 그런 사람들, 소위 일반 학우들 생각에는 싫잖아요, 예전에는 편했는데, 이런 걸 직면하고 나서 갑자기 나의 삶이 불행하고. 그렇다고 이 세상이 금방 바뀔 것 같진 않고 너무 힘들어."
  
여성이 주체가 된다는 것이 모든 여성에게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그 중엔 빨간 약을 먹어버린 네오처럼 더 이상 되돌아갈 출구도 없는 곳으로 들어와 버린 이들도 있었고, 때문에 한탄도 있었다.  
 
"그러면 차라리 몰랐던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푸념도 했지만 결국 이미 알아차려버린 걸 어떻게 할 거야,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같이 그런 사람이 모여서 또 활동을 했죠."
  
재밌게도 푸념하는 사람들이 늘어갈수록 여학생회는 활기를 띠었고, 5개 단과대로 시작했던 여학생회가 전 단과대에 생길 정도로 발전을 거듭했었다. 물론 여성들의 움직임은 비단 학내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87년 6월항쟁을 겪기 전부터 개별 사건마다 여성들은 목소리를 내어왔다. 
 
"85년도에 25세 조기 정년제를 폐지하는 운동을 했어요. 너무 웃기죠, 놀랬죠. 25살 먹었으면 여자는 시집을 갈 나이기 때문에 퇴직하라는 거야. 그 사건으로 그 때 있었던 단체의 여성단위들이 모여서 대책위를 꾸려서 싸움을 했어요. 그러다가 87년도에 대통령 선거를 맞이하게 되고, 그 때 당시에 부정선거가 많으니까 공정선거 감시 운동을 한 거죠. 그래서 여성유권자 감시단, KBS시청거부 같은 것을 여성운동이 했었어요.  
 
선거가 끝나고 그 대책위(25세 조기정년투쟁)가 우리도 여성문제를 여성들이 상시적으로 제기하면서 사회를 변혁하는 운동조직을 만들자, 상설기구를. 그래서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여연)을 만들게 되요, 87년 2월에. 그래서 올해로 여연이 30년이 됐어요. 85년도 조기정년투쟁의 그 연대의 경험, 그리고 권인숙 성고문 사건 공동대응, 그리고 여성유권자공정선거감시운동 등의 운동의 경험들이 쌓여서 상설화된 게 여연의 역사에요."
  
그는 여연의 역사, 그리고 여성운동을 하는 단체를 만들게 된 이야기를 하던 중 최근 촛불광장의 '페미존(Femi-Zone)'의 발생과 조금은 유사한 지점이 있다고 말했다. 여성들이 자신의 생각 혹은 바른 말을 안전하게 하기 위한 구역설정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지금 젊은 세대가 말하는 안전공간이라는 또 다르겠지만, (지금 젊은 세대는) 자신들의 공간을 만들어서, 페미존이라고 해서, 구역을 조성하면서 목소리를 내잖아요. 용기와 바른 말을 아무데서나 하는 게 아니라. 왜냐하면 안전하지 않으니까, 공격당하니까. 그래서 그런 걸 만들어서 그 목소리를 규합하는 방식을 채택하는 것 같아요. 그걸 대비해서 생각해보면 우리도 여성단체연합, 여성운동하는 곳, 여학생회 등 어쩌면 우리가 용기를 내서 바른 말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것 같아요. 여성운동조직은 그런 공간인 거예요. 우리는 거기서 거리낌이 없었던 거지." 
 

▲ 김금옥 센터장. ⓒ바꿈


민주주의는 여성혐오와 함께 갈 수 없다 
 
더 이상 놀라고 강조하는 것도 무색하리만큼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은 현재의 뜨거운 키워드다. 그러나 또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운동을 30년 넘게 해온 김금옥 센터장에게도 마찬가지다. 그 오랜 시간 페미니스트로 살아온 그의 앞에 ‘신인류’가 등장한 것이다. 
  
김 센터장이 경험한 87년의 항쟁, 그 당시의 민주주의와 지금은 분명 다르다. 문제인식은 깊어졌고 사고의 폭은 넓어졌다. 그리고 그러한 성숙한 민주주의를 쟁취하려고 했던 주체들 중에는 일명 뉴 페미니스트(이하 뉴페미),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 메르스 갤러리의 탄생 이후 등장한 2030 페미니스트들도 있었다. 
 
"촛불 광장에 정권교체가 목표여서 나온 사람도 있고, 정말 이 시대를 바꿔야 된다, 가치를 바꿔야 한다, 세대를 교체해야 된다, 정말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야 된다, 더 근본적인 개혁을 말하는 사람도 있고. 천차만별이 나온 거예요. 어쨌든 정권교체까지는 동의를 하니까 연대를 했고, 그리고 진짜 우리가 이 사회를 새롭게 바꾼다는 것에 대해 동의가 됐어요, 그래서 새로운 민주주의로 내용이 바뀌고 확장해야 된다고, 직접민주주의를 더 확대해야 된다고, 이게 다 맞았어요.  
 
그런데 이 민주주의 내용에서 딱 걸린 거예요. 민주주의 안에는 성평등이라고 하는 것,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없는 그런 평등이 있어야 그게 우리가 바라는 민주주의인데. 이 다양한 정체성과 주체들이 다 주체로 서야 한다는 것을 말하니까 이제 불편해진 거잖아요. 그러니까 ‘나중에’ 하자 성평등 문제는, 일단 정권교체가 중요하지. 87년에는 그런 게 통했어요. 왜냐면 독재타도, 민주쟁취 그게 너무 큰 상황이라서 거기에 집중한 거예요. 그 안에 차이라든가, 어떤 다양성을 드러내가지고 그것이 가시화될 상황이 못 됐었어요. 물론 그 안에 그런 마음에 가지고, 그런 주체들이 분명히 있었지만 그게 들어날 수 있는 시대적, 사회 인식적, 주체들의 상황이나 정치적 맥락이 그랬던 것 같고. 
 
그런데 이번 2016년, 2017년 안에는 그게 안 되는 거예요. ‘나도 거기 갔어, 정권교체 외쳐, 소수자도 왔고 누구도 왔고 나도 깃발 들고 왔어, 나도 정권교체 세력이야.’ 그런데 갑자기 이제 성차별과 이런 것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니까 옛날 버릇이 나와서 또 지엽적인 말을 하지 말라, 그러면 또 이게 왜 지엽적이냐,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거죠."
  
문제제기를 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페미존이 넓어지는 만큼 여성운동단체도 활발했다. 촛불광장이라는 것은 시민의 힘으로, 시민이 만든 만큼 누구도 배제하는 공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확실히 했다. 집회에서 수화통역을 할 것을 제안한다거나 여성혐오적, 소수자혐오적 발언에 문제제기를 한다거나, 집회를 준비하는 소위 시니어그룹의 페미니스트들 역시 발맞춰 목소리를 낸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에 욕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헌정질서와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한 집회였지만 우습게도 논란은 한 가수의 공연여부에서 비롯되었다. 
 
"(DJ DOC 공연에 대해) '여성단체는 반대했다'. 다양한 이유를 들지 않더라도 이 노래를  무대에서 공연하지 않으면 안 오겠다는 사람은 없지만 이 노래가 불편해서 오고 싶지 않다는 사람이 있는데, 그냥 한다면 그 사람들은 오지 말라는 뜻이잖아요. 그 사람들이 그런 말을 안 했으면 모르겠지만 이미 했는데. 우리가 어떤 자격으로 그 사람들을 못 오게 하냐 이거예요. 퇴진행동이 그동안 합의 해왔던 것에 비추어서도 이런 상황이면 공연을 진행하기 어려운 거지요. 그런데 '일부여성단체들이 반대해서 공연이 취소 됐다'는 기사들로 인해 난리가 났지. ‘니들이 뭔데 못 하게 하냐’도 있고 ‘잘했다’도 있고." 
 
생각해보면 아주 단순한 일이었다. 그의 말처럼 그 노래 공연이 없으면 안 오는 사람은 없지만 진행하면 안 오는 사람이 있다. 사람들이 다 같이 있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하지 않으면 된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는 이 일은 ‘DOC 사건’ 쯤으로 불리며 이번 촛불시위에서 꽤 굵직한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오랜 기간 동안 여성운동을 하며 공격 받는 일은 흔했다고 한다. 이번 블랙리스트에 올라가지 못한(?) 사람들이 덜 비판적으로 산 것에 대해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고 하는 농담처럼 일베에서 소위 ‘신상 털리기’를 당하면 오히려 자랑스러울 때도 있었다고. 그러나 이번 공격은 당혹스러웠다. 일베가 아닌 '촛불집회 참가자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이들'이라는 사람들에게 '친박페미'라는 말을 듣는 것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찾아, 사과를 받기도 했었다. 
 
여성혐오와 민주주의를 함께 가져갈 수 있는 사람은 여전히 아주 많았던 것이다. 
  

▲ 김금옥 센터장. ⓒ바꿈


페미니스트 대통령, 선언하는 페미니스트 
 
여성혐오와 민주주의는 양립 할 수 없다는 인식이 확대 되었지만 여전히 함께 갈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꽤 많았던 이번 촛불이 탄생시킨 대통령은 다름 아닌 '페미니스트 대통령'이다. 성차별은 없애도록 노력하겠다, 소수자와 함께 하겠다는 선언도 아닌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한 문재인 대통령.  
 
물론 선언만 하면 자동으로 '페미니스트 자격증'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삐걱거림은 잦았다. ‘나중에’ 사건이라든지 동성애 반대 발언이라든지, 왜 굳이 페미니스트가 되겠다고 선언했을까, 그 진정성에 회의를 가질 수 있는 일들도 존재했다.   
  
"페미니스트, 그 개념을 하나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모든 차별에 반대하고 그런 차별을 만드는 구조를 바꿔내기 위해서 실천을 해야 되잖아요, 실천까지 포함하는 건데. 본인이 왜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했는지, 어떤 의미로 했는지, 대중에게 설명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또 우리는 계속 요구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겨서 그 선언도 고맙다고 생각해요. 난 (페미니스트가) 아니야, 그랬으며 어떻게 할 거야. 그런데 페미니스트 선언을 했으니까 '이렇게 해야 페미니스트야', 라고 요구할 수 있는 지점이 생긴 것은 긍정인 것 같아요."
  
인터뷰를 진행했던 날은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지 채 열흘도 되지 않았을 시기였다. 그러나 이미 여러 여성인사들이 내각구성 후보에 올랐고 그 중 가장 눈에 띠는 것은 국가보훈처 처장으로 지목된 피우진 중령이었다. 선거운동 기간의 불협화음과 달리 내각의 성비를 적절히 맞춰나가겠다는 공약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김금옥 센터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갈 길이 멀다는 말도 전했다. 피우진 중령이 보훈처장에 지목된 아주 기쁜 일이지만 한 편으로는 군대 내 동성애자 색출 작전이 있었고, 어느 대위에게는 징역 2년이 구형되었으니 말이다. 비슷한 시기에 상반된 일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은 페미니스트 선언을 한 문재인 대통령을 마냥 옹호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과, 촛불광장에서 그랬듯이 계속해서 우리의 목소리를 세상에 전해야한다는 목표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서 저는 이 정부가 스스로가 촛불정권이라고 하는 것을 잊으면 안 되고, 그 촛불광장에 페미니스트들이 있었다는 것, ‘87년체제’라고 하는 한계를 넘어  더 큰 민주주의, 확장된 민주주의를 열은 사람들은 페미니스트라는 것을 기억해야 된다고 말하고 싶어요. 이들의 목소리를 배제한다거나 후순위로 취급하는 것은 이 정권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각인시키면서 견인하는 책임을 같이 져야 하는 거예요." 

김금옥 센터장은 힘의 균형이 깨져 있는 사회에서 결국 우리는 연대를 통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은 전했다. 페미니스트들과 다른 운동과의 연대, 정부와 시민사회와의 연대, 제대로 된 젠더 거버넌스. 이게 나라냐는 물음에서 , 그러면 어떤 나라를 만들어 나갈 것인가에 대한 토론과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나가는 시대. 그 시대의 서막을 연 촛불광장은 '따로, 또 같이'를 실현할 수 있을까.  
 
* 김금옥 센터장은 인터뷰 이후, 청와대 사회혁신수석실 시민사회비서관으로 내정됐다.


"그날 이후 '개똥 치우기' 보고서가 사라졌다"

[6월항쟁 30주년 특집 인터뷰 ⑨] 박진도 지역재단 이사장
2017.06.15 02:09:43


"전두환 때는 반상회에 공무원들이 반드시 참여해서 보고서를 쓰게 돼 있었어요. 저는 국립대 교수였으니까 공무원이잖아요, 가야죠. 근데 반상회에 별거 없잖아, 보고서를 쓰는 데 쓸 게 없더라고요. 그래서 '반상회 오늘의 주제는 '개똥을 치우자 였다. 개똥을 아무 데나 버리지 맙시다'였다' 이렇게 써냈어요. 그 다음 달 반상회 때도 '이달에도 또 개똥을 치우자고 했다. 아직도 안 치워서 문제다’라고. 나는 만날 그렇게 개똥만…(웃음). 한 마디로 개~똥 같은 세상이었지요." 

박진도 지역재단 이사장(충남대 경제학과 명예교수)은 '개똥을 치우자'는 반상회 보고서를 "출석부 내듯이" 내도 "아무도 시비 거는 사람이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공무원을 동네 반상회에 참석시켜 주민들의 동향을 보고토록 했다는 일화는 소름을 돋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반응을 보이자, 박 이사장은 6월민주항쟁 이전에는 사회 전체가 그렇게 감시 체제로 돌아갔다며 또 다른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이번에는 학교 버전. 6개월간 학생과장을 맡았던 1983년도의 일이었다. 그는 "학교에 경찰들이 상주(이른바 '프락치')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교수가 프락치였다"라고 이야기를 열었다. 

"학교 출입하는 정보과 형사가 나한테 와서 '애들 뭐 하느냐, 어떻게 돼 가냐' 물어요. 처음에는 정보라는 게 없고, 그 사람도 직업이고 먹고 살아야 하니까 '애들 잘 지내고 있어요. 걱정 말고 가세요' 이런 형식적인 답을 했어요. 

그런데 자꾸 꼬치꼬치 물어보니까 화가 나잖아요. 해서 '아니, 내가 당신 정보원이야? 어디 교수한테 와서 애들 정보를 내놓으라고 그래?' 그랬더니만 이 경찰이 화를 내더라고. '전에는 안 그랬는데 왜 학생과장만 그러시냐'고. 그래서 내가 경찰서장한테 바로 전화를 했어요, 그 경찰을 앞에 앉혀놓고.(웃음) 그러니까 그 경찰이 놀라서 죄송하다고 하고는 다음부터는 내 근처에도 안 왔어요. 그렇게 전부가 다 통제 대상인거죠. 교수도 자기가 데리고 있는 정보원이고." 

▲ 박진도 이사장. ⓒ바꿈


'개똥 치우기' 보고서가 사라졌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던, 독재자 전두환의 기세가 등등했던 1983년. 박진도 이사장은 학생처장 임기를 마친 뒤,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박사 과정을 마치고 돌아온 때가 1987년 4월. 분위기는 4년 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일본에 갔다 온 후에는 이미 전두환 정권이 무너지기 시작할 무렵이었어요. 호헌 선언을 했다는 얘기는 이미 그 전에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그 이후로 사람들이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면서 여기저기에서 반대 선언 같은 걸 하잖아요. 교수들도 4월 말에 호헌 철폐 선언을 했어요." 

박 이사장은 새 학기가 시작하기까지 남은 기간을 서울의 길거리에서 살았다. "최루탄 가스를 많이 먹었다는 기억 밖에 없을 지경"이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날을 묻자 박 이사장은 6월이 아닌, 7월의 어떤 날을 상기했다. 

"이한열 열사가 죽고(7월 5일) 9일에 장례식을 했어요. 연세대에서 노제를 하고 서울시청 앞으로 오게 돼 있었는데, 장례 행렬이 연세대 신촌 로터리에서 시청 앞 로터리까지 꽉 찼어요. 100만 명은 넘을 거예요.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정치인이고 교수고, 내가 아는 사람은 다 나온 것 같아요.(웃음) 

그게 굉장히 큰 사건인데, 그때 시청 앞에서 되게 혼났던 것 같은 기억이 나요. 마지막에 시청 앞에서 경찰들하고 붙었는데, 본의 아니게 시위대의 맨 앞줄에 있었어요. 경찰은 (사람들을) 해산을 시켜야 할 거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최루탄이 지랄탄, 사과탄… 종류도 많았어요. 나도 그때 최루탄 피해서 다녔는데, 포위돼서 갇혀 있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까 가방도 없어지고, 안경도 없어지고…." 

"사회 구조 변화에 농촌이 대응을 못했다" 

6월항쟁 중에 사라진 박 이사장의 안경과 가방 다음으로 '개똥 보고서'가 자취를 감췄다. 박 이사장이 평생 연구‧활동을 해온 농업 분야에서도 사라진 것이 있었다. 농협 조합장 간선제. 6월항쟁의 성과로 농민들은 농협의 조합장을 다시 직접 뽑을 수 있게 되었다.

"농협 조합장 직선제가 1988년부터 시작됐어요. 그전에는 소위 '농협 임직원 임면에 관한 임시조치법', 보통 임시조치법이라고 하는데 그걸 박정희가 1962년에 했거든요. 임시조치법으로 농협 중앙회장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나머지 조합장들은 중앙회장이 임명하는, 위에서부터 쭉쭉 내려오는 임명제로 바뀌어 버렸어요. 

사실 농협은 협동조합이라서 대통령이나 중앙회장이 임명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선 지금 사회 안정을 위해서 급하니까, 임시로 한다'는 뜻으로 임시조치법이라는 말을 쓸 수밖에 없던 거죠. 그게 87년까지 갔으니까 25년이에요. 임시가 아니죠. 박정희보다 더 오래 간 거지."

조합장 직선제는 '100만인 서명운동'(1983년)을 하는 등 농민들이 치열하게 싸워 쟁취한 결과물이었다. 사실 농민들은 군사 독재의 엄혹한 시절 내내 투쟁을 계속해 왔다. 71년 가톨릭농민회(가농)가, 82년에는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기농)가 조직됐고, 85년에는 전국 20여개 군에서 2만여 농민들이 '소몰이 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농민운동이라는 게 굉장히 지역적이라 잘 조명되지 않아서 그렇지 농촌 현장에서의 대중운동이랄까 민주화운동의 동력은 다 농민운동이었어요. 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에서도 실제 조직을 구성할 때에 가농이나 기농의 활동가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맡기고 그랬어요. 농민운동 진영이 대도시의 청년학생 진영과 함께 시군 단위에서 6월항쟁의 거점 역량으로 역할을 한 거죠." 

87년이라는 시공간에서 실력과 위력을 발휘한 농민 운동은 이후로도 계속됐다. 89년 2월에는 2만여 명에 달하는 농민들이 상경 집회를 열었고, 그 직후인 3월에는 전국 단위의 농민 단체인 전국농민회총연맹이 결성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7년 이후 농촌의 상황은 계속 미끄러져 내렸다. 6월항쟁의 성과가 농촌만 빗겨간 걸까.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87년 이후에 한국 사회가 급속히 변했잖아요. 농업농촌이 그 이전보다 주변부로 밀려난 거죠. 87년의 성과를 떠나서 사회 구조가 그렇게 변했는데 그 변화에 농촌이 제대로 대응을 못했다고 봐야 해요."

농협은 농촌‧농민에 무관심하다? 

농업과 농촌이 사회구조 변화에 대응하는 데 실패한 원인은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한 농협의 책임은 빼놓기 어렵다. 박 이사장은 "농촌에서 농협이 굉장히 중요한 조직"이라면서 "농협이 제 역할을 하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농업협동조합법(농협법)에 보면, '농업생산성을 높이고, 생산된 농산물의 판로를 확대하고 잘 유통하고 가공하고 해서 경쟁력을 높이고, 또 농민의 사회적인 지위 향상 등을 위해 노력을 하라'는 게 농협의 설립 목적이에요. 신용사업은 그런 사업을 뒷받침을 하는 거고요.

박정희 전에는 농업협동조합과 농민은행이 따로 있었는데, 박정희가 이걸 합쳤어요. 그러니까 농민 입장에서 보면 농협은 농산물의 생산, 유통, 가공, 소비 같은 본연의 일을 잘 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관심이 없는 거예요. 못해요." 

과거 농협은 농민과 농촌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독재정권의 농업 정책을 현장에 시달하는 데 앞장섰다. 특히 통일벼 보급, 미곡 수매 등 쌀 농정에 집중했는데, 그 결과 "쌀 농정이 파탄났다"고 박 이사장은 평가했다. 농협 안팎의 구조적인 원인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우리나라 농협은 종합농협이라 농민 조합원의 구성이 매우 다양해요. 어떤 조합원은 쌀농사를 주로 하고, 어떤 농민은 소를 주로 키우고, 어떤 조합원은 비닐하우스 농사를 주로 하지요. 게다가 그 경영규모도 매우 달라요. 논이나 밭 300평 이상 농사를 짓거나, 소와 같은 대동물 1마리 이상 키우면 다 농민자격이 있어요. 논농사 300평 짓는 농민이나 10만평 짓는 농민, 소 1마리 키우는 농민이나 500마리 키우는 농민이 모두 함께 조합을 구성하고 있는 셈이죠. 따라서 조합원들의 경제적 이해가 다르기 때문에 협동조합으로서 기능하기가 어렵죠. 여기에 비농민 준조합원을 포함해서 돈장사를 해서 수익의 대부분을 버는 구조에요. 이미 농사에 별 관심이 없는 고령농민들이 조합원의 대부분이고요.  

이런 구조에서는 조합장 직선을 한다 해도, 진정으로 농민의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하는 제대로 된 사람보다는 그야말로 ‘정치꾼’, 조합장이 뽑히기 쉬운 거죠."

이런 상황에서 조합장 직선제가 농협의 운영 방식을 민주화시키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고질적인 부정부패 역시 그대로였다. 결국 이명박 정부는 이를 빌미로 약 20년 만(2009년)에 농협중앙회장 선거를 대의원 간선제로 바꿔 버렸다.

"농협중앙회장을 다시 조합장 직선으로 뽑아야 하는데, 직선제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어요. 제대로 된 조합장이 10%도 안 되기 때문에 그 사람들한테 맡겨봐야 사실은 큰 변화가 있을 게 없어요.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게 뭐냐면 '조합원의 총의가 반영된 조합장 직선제'라는 걸 하자. 지역 조합원들에게 지금 후보들 중에서 누구를 찍을지 묻는 미국의 선거인 제도처럼 그렇게 하자는 거예요." 

ⓒ연합뉴스


'굽은 소나무가 고향을 지킨다' 

이토록 많은 농협의 문제들을 왜 지금껏 잘 몰랐던 걸까. 무지와 무관심을 반성하자니 갑자기 호기심이 동했다. 지금은 낯설기만 한, 아니 인기 없는 분야인 '농업' 연구에 박 이사장은 왜 40여년을 몰두했을까. 그는 "그런 질문을 참 많이 받는다"고 답했다.

"내가 대학에 입학한 1970년에 우리나라는 농업의 비중이 국내총생산의 25%, 취업인구의 약 절반을 차지하던 농업 국가였습니다. 그래서 경제학을 공부한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농업경제에 관심이 있었죠. 그런데 그 후에 우리나라가 급속히 공업화하고 산업사회로 이행하면서 경제학자들의 관심도 급격히 국제경제, 금융, 노동 등으로 급속히 옮겨 가게 되었습니다.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 이농하듯이 경제학자들도 자연스럽게 이농을 한 거죠."

'자연스럽게 이농'해 간 다른 이들과는 달리 제자리를 지킨 이유가 따로 있어 보였다. 박 이사장은 "굽은 소나무가 고향을 지킨다는 말이 있다"면서 본인 역시 "두 어 차례 이농할 기회가 있었다"고 했다.  

"끝까지 버틴 이유는 고향(농업경제학)을 떠나지 못한 거죠. 굳이 따지자면 내가 시골출신이기도 하고, 친구들과 세상을 위해 각자 할 일을 나눌 때 내 몫으로 농업농촌분야가 주어진 것, 그리고 전봉준 장군을 존경한 것들이 이유가 되겠죠."

그는 결정적인 이유로 70년대 활동했던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의 활동을 꼽았다. 강원용 목사(경동교회)의 주도로 1965년 만들어진 크리스찬 아카데미는 당시 운동가 양성소로 꼽혔다. 

"크리스찬 아카데미는 중간집단이란 개념을 도입해서, 노동자, 농민, 여성, 교회 등의 현장 활동가들을 교육했는데, 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그 이후 우리사회의 각 분야에서 사회혁신과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로 성장했어요. 그때 교육을 담당하던 간사들이 노동 분야에서는 신일령 전 이대총장,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 농촌분야에서는 이우재 전 국회의원, 장상환 경상대 명예교수, 황한식 부산대 명예교수, 여성분야는 한명숙 전 총리가 큰 역할을 하셨죠.

나는 농촌분야의 자원봉사자로 간사들의 일을 도왔는데, 자원봉사라 해도 허드렛일만 한 건 아니고, 강의도 하고, 저 멀리 전남 보성까지 찾아가서 농촌현장지도를 하곤 했어요. 이때 농촌 중간집단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그 후 우리나라 농민운동의 지도자가 됐죠."

박 이사장은 이때 만나 농민운동 지도자가 된 이들이 "고생만 했지 아직도 좋은 세상을 보지 못하고 있어 미안하다"며 "그런 분들에게 진 빚을 갚는 마음으로 농촌 일을 계속하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만약 그때 우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소시민으로서 평범하고 행복한 생활을 했을 텐데, 운동의 지도자가 되어 감옥 가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삶을 산 것이 너무 미안해요. 정광훈이라고 해남의 전기기사이면서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던 분이 계셨는데, 우리 교육을 받고 나서 투사가 되셨어요. 낙천적이고 정말 사람 좋은 분이었는데, 여러 차례 감옥도 가시고 넘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어요. 그런 분들이 많아요." 

'지역을 바꿔서 세상을 바꾼다' 

이러한 고민 속에서 해나간 연구와 활동들이 결국, 농업농촌을 바꾸기 위한 새로운 방안을 모색케 했다. 정부 정책의 변화만으로는 현실을 바꾸기 난망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지난 2004년 지역재단의 문을 열었다. 

"93년도에 서울대에 있는 은사님이 농정연구포럼이라는 걸 만들었어요. 그걸 같이 도와드리다가 2000년 초에 다시 확대 개편해서 농정연구센터를 했어요. 중앙정부의 농정에 대한 연구를 주로 했는데… 틀렸네, 어쨌네, 이런 비판이죠. 그런데 농촌 현실이 바뀌지 않는 거예요. 왜 안 바뀔까 생각을 해보니 바뀔 이유가 없는 거죠. 중앙(정부)에서는 지금 좋은 데 바꿀 이유가 없잖아요. 지금 농민들을 잘 '다스리고' 있으니까요. 

농민들은 자기네 힘으로 바꿔야 된다고 하는데 힘이 없어요. 2004년 한‧칠레 FTA할 때만도 농민들이 10만 명 씩 (서울로) 올라와서 데모도 하고, 사람이 죽기도 했어요. 그런데 (협정 체결) 하잖아요. 설사 정부가 정책을 바꿨다 해도 현장에서 그게 제대로 잘 되느냐? 안 되죠.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뭔가 변화가 생기지 않으면, 중앙에서 변화가 생긴다 하더라도 효과가 없는 거죠." 

지역재단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지역을 바꿔서 세상을 바꾼다'는 '거창한' 문구를 창립 슬로건으로 걸고 출범했다. 해마다 '지역 리더'를 선정해 시상하고 있는데, 2000년대 초 만해도 생소하던 개념이 10여년이 지난 이제는 "상당히 전파가 됐다"고 박 이사장은 말했다.

"지역의 문제라는 건 경제 뿐 아니라, 교육도 있고, 노인, 환경 문제도 있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지역의 문제를 스스로 고민하고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나 조직을 '지역 리더'라고 명명한 거예요. 

농업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이 너무 많으니까, (모범 사례) 모델은 굉장히 다양한 형태로 있어요. 예를 들어 남원자활센터라는 게 있어요.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일자리 사업을 하는데, 사업 형태가 여러 가지에요. 영농 사업도 하고, 자원 재활용이라고 해서 음식물 쓰레기를 분리수거해서 돼지를 키우는 사업이라든지, 자기들이 만든 유기농 채소로 식당을 운영한다든지. 이게 여러 효과가 있는데 취약 계층에게 일자리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측면이 있고, 또 음식물 쓰레기 같은 것들은 일종의 환경 사업이죠." 

'지역 리더'들의 사례는 흥미로웠다. 그렇지만 지역재단의 초기 슬로건이 무슨 의미인지는 여전히 아리송했다. 농촌의 자원을 활용해 농촌다운 모습을 되찾는 것이 어째서 농촌뿐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일로 이어진다는 걸까. 

▲ 박진도 이사장. ⓒ바꿈


'성장주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자 

"성장주의라는 게 생산력 높이는 거잖아요. 농업 분야도 국제 경쟁력을 높여 수입농산물에 대항해야 한다(는 식이에요). 그런 경제 성장주의가 우리나라 사람들을 어렵게 만들었어요. 소득은 열 배씩 높아졌는데 80년대와 지금을 비교하더라도 엄청나게 사회가 망가져 있거든요. 

성장이 아니라 행복으로 가야 한다. 행복으로 간다는 이야기는 소득, 물질 뿐 아니라 문화나 환경, 공동체, 교육이 균형 있게 발전해야 한다는 얘기에요.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농촌이 망가져서다. 성장주의로 대도시에 사람들이 몰려 사니, 일자리도 없고, 교통문제, 주택문제, 환경문제, 교육문제가 심각할 수밖에 없지요.

우리는 그동안 농업농촌의 다원적 가치/역할을 너무 무시했지요. 그저 값싼 농산물이나 공급하면 된다고 생각한 거죠. 그렇지만 농업농촌은 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는 기능이 있어요. 건강한 먹거리, 지역사회의 균형발전과 일자리 창출, 전통문화의 계승과 발전, 환경 및 경관의 보전, 휴양 및 휴식 공간의 제공, 어린이를 위한 학습 공간 등은 국민행복을 위해서는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이에요." 

박 이사장은 농업과 농촌의 가치가 도시의 그것과 완전히 달라야 한다고 말했다. 생산량이 아닌 생태와 환경을 중시하는 농업으로, 아파트와 넓은 도로가 건설된 도시를 닮은 모습이 아닌 농촌의 풍광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 농촌 문제를 나와 무관하게 여기는 태도에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서울을 비롯한 광역시의 인구가 전체의 70% 가량 될 거예요. 광역시를 제외한 나머지가 30%인데, 이 지역은 농업 생산에 굉장히 의존하고 있는 지역이죠. 농업 생산에서부터 나와서 가게도 생기고, 농기계 상인도 생기고 다방도 술집도 병원도 생기는 거니까요.

더 큰 도시, 예를 들어 대전이나 광주, 대구 이런 지역들도 사실은 그 배후지(농촌)를 먹고 사는 거예요. 대전만 하더라도 그 주변 지역에 농업지역이 쇠퇴한다고 하면 같이 망하는 거예요. 농업이 GDP에서 2%도 안 되고, 농가 인구도 5%가 안 된다고 하지만 그것이 사회를 지탱하는 굉장히 중요한 뿌리에요." 

물질이 아닌 행복을 중시하는, 도시와는 다른 농촌농업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박 이사장의 이야기는 87년 체제의 한계 극복, 다시 말해 2017년 촛불광장이 열어준 새 시대의 과제와도 맞물렸다. 

"87년만 하더라도 사람들의 사고 중심이 경제에 있거나 소득에 있었을 거라 생각해요. 경제가 성장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죠. 그때만 해도 우리가 고도성장을 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97년말 IMF 외환위기로 우리 사회는 그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어요. IMF와 세계은행의 권고(강요?)를 받아들이면서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한국사회를 강타한 거죠. 재벌은 급성장하는데 일자리는 생기지 않고, 가계부채는 천문학적으로 늘고, 소득불평등과 양극화로 인해 서민 대중의 삶이 급격히 악화하기 시작했어요. 극심한 경쟁으로 나만 살면 된다는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팽배해졌지요. 청년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을 ‘헬’(지옥)이라고 욕하기 시작했어요. 살기 힘든데 국가든 가족이든 친구든 기될 곳이 없는 외톨이 사회는 지옥이나 다름없어요. 

지금 우리는 저성장 시대에 살고 있어요. 저성장 시대에 가장 큰 문제는 옛날이 파이를 나눠먹는 시기였다면, 지금은 있는 파이를 서로 뺏어먹는, 싸움이 더 치열한 시기죠. 사회적 갈등 관계가 복잡해지고, 첨예해지고 있어요. 지금 우리는 성장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심각한 격차사회에 살고 있어요. 그런 상황에서 박근혜의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면서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한 거지요." 

행복정책의 필요성, 국민은 이미 안다 

박진도 이사장은 국민들의 관심사가 '행복'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사실을 박근혜 씨 역시도 알고 있었다고 설명을 이어갔다.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은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후보가 국민행복시대를 공약으로 당선된 것이에요. 성장이 아니라 행복을. 그런데 실제로는 박정희식 성장주의를 답습했지요. 국민들이 사기당한 거지요.  

성장주의는 기본적으로 있는 사람을 더 행복하게 하고 그게 넘쳐나서 그 국물로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한다는 이른바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 이론에 기초한 거예요. 이게 이제는 전혀 작동하지 않아요. 반면 행복정책은 ‘아직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맞춤형 정책을 해야 성공할 수 있어요. 예를 들면, 일자리가 필요한 사람에게 일자리를 주고, 비정규직은 정규직이 되도록 하고, 아픈 사람은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도록 하고, 돈이 없어서 대학 못가는 사람이 없도록 하고, 좋은 먹거리와 환경으로 국민이 건강하도록 하는 게 국민행복정책이지요." 

박 이사장은 '농민이 불행하면, 국민이 불행하다'는 이야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국민 행복을 위해서는 농민이 행복해야 한다'는 말을 되새기자니 이번 19대 대선에서 농업‧농촌 문제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애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장에서 터져 나온 국민들의 목소리가 30년 전과는 달리 다양해졌다는 점은 꽤 긍정적인 신호로 읽힌다. 과제는 많고, 갈 길은 멀지만 말이다.


6월항쟁의 거름은 '민중문화 운동'

[6월항쟁 30주년 특집 인터뷰 ⑩]임진택 판소리 명창‧마당극 연출가
2017.06.19 17:00:59

지난 6월 8일 은평문화예술회관 숲속극장을 빼곡히 채운 400명 가량의 관중들, 마당극의 창시자이자 창작판소리의 독보적 존재인 임진택이 나오더니 이제 막 새로 짠 판소리 <다산 정약용>을 창해나갈 두 명창을 소개한다.  

"작품의 1부 '풍운 속으로'를 맡을 송재영 명창은 전주 대사습에서 장원해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명창이고, 2부 '유배지에서'를 맡을 이재영 명창은 보성소리축제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명창입니다. 두 재영 씨가 다 대통령상을 받았는디, 대통령상이라고 다 똑같은 것이 아녀. 상 받을 때 대통령이 누구였느냐 이것이 문제여."  

엉뚱한 발언에 관중석에서 미묘한 웃음이 번진다. 그러자 송재영 명창이 "나는 노무현 대통령 첫해에 받았소." 당당하게 밝히는데, 이재영 명창은 답을 못하고 쭈뼛쭈뼛한다. "거봐, 답을 못하고 딴전 피잖여. 아무리 대통령상이라도 맘에 안 드는 대통령이면 거부를 했어야지. 안 그려?" 관중석에서 "그렇지" 하는 추임새가 저절로 튀어나오면서 폭소가 뒤따른다. 

지난 해 말 위암 수술을 받은 뒤 몸무게가 10여킬로그램이나 빠진 임명창은 아쉽게도 이번 공연에서 직접 창을 하지는 못하고 해설과 아니리(판소리에서 말로 이야기해 나가는 대목)만 맡았다. 하지만 '광대' 임진택의 풍자와 기세, 재치와 해학은 전혀 기죽지 않은 모습이다. 송재영, 이재영 두 명창의 역량을 소개하면서 동시에 다산 정약용 얘기가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의 얘기임을 촌철살인(寸鐵殺人)으로 드러내며 대번에 판을 장악한다.    

▲ 임진택 명창. ⓒ바꿈


예술,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나게 하는 힘 

창작판소리 <다산 정약용>은 다산의 일대기를 통해 개혁정치와 애민정신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에 공감한 관객들의 연이은 추임새가 보여주듯, 이 작품은 200년 전 조선이 아닌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에 발을 딛고 있다. 

지난 2월 경기도 실학박물관에서의 초연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 공연'이 열린지 사흘 뒤, 여운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 임 명창을 만났다. 그는 "예술이 힘을 갖는 것은 현실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라며 예술의 본질에 대해 설명했다. 30년 전인 1987년에도 그랬노라며. 

"6월항쟁 때 민중문예운동집단이 얼마나 큰일을 했는지 사람들은 잘 모르는데, 엄청나게 큰 한열이의 걸개그림이 길을 꽉 메우고, 그 걸개그림 앞에 이애주 교수가 맨발로 춤을 추면서 나가죠. 만약 걸개그림 없이, 이애주 교수의 썽풀이춤(분노의 살풀이춤) 없이 행진했다고 생각을 해봐요. 6월항쟁의 모습이 눈에 잘 보이지 않죠. 그 보이지 않는 항쟁의 어떤 기운, 역동성, 상징과 의미, 역사성...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드러내어 보이게 하는 힘, 그게 예술이에요.  

87년 6월, 그동안 시위에 참가하지 않았던 시민들이 밖으로 다 나왔지요. 자기 안에 분노와 저항이 숨어있었더라도 자기도 몰랐고 밖으로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밖으로 뛰쳐나온 거지요. 그게 예술의 힘이에요. 예술적 충격으로, 잠재해있던 분노와 저항의 감성이 몸 밖으로 새어나오니까 자신도 모르게 거리로들 뛰쳐나온 거지요. 장르로서의 예술만이 아니라 한 마디의 구호, 표어, 한 마디의 외침과 한 번의 손짓, 몸짓, 무언의 표정과 눈빛까지도... 그런 데서 바라보고 있던 사람이 같이 동요하고, 옆에 있던 사람이 같이 동의하고 동참한단 말이에요. 그게 판이고 마당굿이지요." 

임 명창은 1987년 7월 9일 故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을 6월항쟁의 가장 상징적인, 절정의 순간으로 꼽았다. 하지만 정작 임 명창은 6월항쟁의 절정을 그 현장이 아닌 미국 땅에서 텔레비전 모니터를 통해 지켜봐야 했다. 광주 5.18민중항쟁의 마지막 수배자로 밀항 탈출, 망명한 윤한봉씨가 미국에서 한청련(재미한국청년연합)을 조직하여 활동하던 중, 87년 긴박한 정세에서 미국에서도 문화적 대중집회가 필요하다며 긴급히 협조를 요청해 왔기 때문이다. 

"서울대생 박종철의 고문치사 죽음에서 발단된 군부독재에 대한 항거가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연세대생 이한열의 죽음을 보고 폭발한 것이 6월항쟁이라고 볼 수 있지요. 6월 초까지만 해도 그렇게 터져서 우리가 승리하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어요. 그런데 한 달 전쯤 LA 윤한봉 형 쪽에서 연락이 오기를 '미주에서도 집회를 열고 사람을 모아야 하니 임형이 와서 공연을 해달라' 하더라고요.  

그 당시 내 창작판소리 <똥바다>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때니까… 사실 국내 상황이 급박한데 한국을 떠나도 되나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어요. 미국 비자 받기도 쉽지 않았고. 그런데 한청련 쪽에서 뉴욕 인근 스토니브룩(Stony Brook) 대학에 교섭해서 초청장이 온 거예요. 그 대학에 마침 한국학과가 신설되어 한국 전통예술에 대한 강연을 요청하는 형식이었지요. 묘한 것이, 내가 그 무렵 석계역(석관동·월계동 인접 전철역) 부근에 살고 있었는데, 석계(石溪)를 번역하면 Stony Brook이라, ‘거참, 내가 사는 동네에서 초청이 왔네’ 하고 미국으로 떠났지요.(웃음)" 
 
팟캐스트가 없던 시절, 광대가 그 역할을 했다 

정치·세태 비판이 자유롭지 못했던 군사독재 시절, 임 명창은 자신의 책무가 요즘으로 치면 김제동, 김어준, 정봉주 등 인기 팟캐스트가 하는 역할과 비슷했다고 한다. 당시 그의 인기를 가히 상상하기 어려웠다. 

"85년과 86년, 창작판소리 <똥바다>가 대학가를 휩쓸었어요. 80년대 초반 나보다 앞서 대학가를 휩쓸었던 공연은 공옥진 여사의 심청가 병신춤판으로, 학교 측 후원과 배려까지 곁들여져 인산인해를 이루었지요. 내가 그 공연을 보면서 절치부심해서 만든 작품이 바로 창작판소리 <똥바다>입니다.  

그때는 공연윤리위원회란 것이 있어서 정식 공연허가는 안 나왔고, 신촌 우리마당에서 초연하고 명동성당 마당에서 판을 키운 후 주로 전국의 대학 학생회 초청으로 순회공연을 했는데, 학교 측 후원과 배려는커녕 집안에 연금되거나 학교 경비원들로부터 출입금지 당하기도 해서 심지어는 담을 넘어 들어간 적도 있어요. 들어가 보면 학생들이 1천 명 넘게 모여 있는 데도 있고, 100명도 안 모인 곳도 있고, 빽빽거리는 마이크 스피커라도 준비된 곳이 있고 아무 음향도 준비 안 된 곳도 있는데, <똥바다> 공연을 시작하면 너무 재미있고 반응이 크니까 지나가던 학생들이 꾸역꾸역 모여들어서 끝날 때면 수백 명, 수천 명이 넘는 학생들이 둘러싸고 구경하고 있어요. 판소리가 좋은 점이 뭐냐면 북 고수 하나만 데리고 가면 되니까… 이동도 간편하고, 몰래 숨어 들어가기도 쉽고, 도망칠 때도 간단하고. 

전국의 대학교 안 간 곳이 없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의 공연입니다. 듬성하게 앉아도 수용인원 5천명이 넘는 그 큰 노천극장에 돗자리 대신 가마니 한 장 깔아놓고, 마이크 1대 겨우 세워놓고 <똥바다> 공연을 하는데, 나 자신이 무아지경이 돼서 공연을 끝내고 정신을 차려 본즉 그 야외 노천극장 산등성이까지 관중이 꽉 들어차 있는 거예요.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그 기록이 깨진 것이 87년 6월항쟁 직후 이애주 교수가 벌인 ‘바람맞이 춤판’입니다. 만 명도 넘는 관중이 빽빽하게 들어차서 이틀 동안 북적댔으니까요. 그 기록은 90년대초 민예총(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 기획하고 문호근 선배가 연출한 <자, 우리 손을 잡자>에서 다시 갱신됩니다." 
         
85년과 86년, 임 명창의 공연을 계기(?)로 모인 학생들은 곧장 집회를 하러 나가기 일쑤였다. “집회에 나갈 사람을 모으는 데 이용당한 게 아니냐”고 묻자, 임 명창은 “좋은 뜻으로 나를 활용한 것”이라고 정정하면서 장난기 서린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내 공연 끝나면, 학생회장이든 문화부장이든 나한테 정중하게 책정된 출연료를 내놓은 대학이 있는가하면, 학생들 시위가 바로 이어져서 학생회 간부들 모두 시위에 앞장서거나 자취를 감춰버리는 통에 출연료는커녕 나 자신도 피신하느라 바쁜 적이 여러 번 있었어요. 어느 대학이라고 이제 기억이 안 나지만 그 때 입 싹 씻은 학생회 간부들, 소위 386세대 다수가 지금 국회의원이고 청와대에 들어가 있는 거죠.(웃음) 그래서 내가 우스개소리로 이런 말을 합니다. ‘386세대는 80년대에 내 <똥바다> 거름을 먹고 자란 세대다.’(웃음)

이참에 민중문화운동협의회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요. 민예총의 전신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1985년 연극·미술·음악·춤·풍물·문학 등 예술장르만이  아니고 언론·출판 분야까지 합쳐서 만든 단체였지요. 황석영 선배가 바람 잡고, 동아투위 해직언론인 김종철 선배가 대표 역할을 맡아했는데, 6월항쟁의 씨앗이랄까 거름은 민중문화운동으로 뿌린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가 제일 열정적이었고 행복했어요."

▲ 임진택 명창. ⓒ바꿈


6월항쟁은 미주 교포 사회에서도 펼쳐졌다 

대학가에서 그랬던 것처럼 미주에서 ‘활용 당하기’ 위해 급히 갔던 미국에서 그는 두 달 가까운 기간을 머물렀다. 윤한봉이 앞장선 미국 땅에서도 그렇게 6월항쟁의 판이 열렸다.

"나는 서울서 6월 10일 집회(박종철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까지 보고 떠났어요. 그리고는 미국에서 로스앤젤레스를 시작으로 샌프란시스코, 뉴욕, 워싱턴DC, 보스톤, 시카고, 댈러스 등 10여개 도시를 순회하면서 교포들을 만났는데, 열기가 대단했지요. 지역마다 교포들이 수백 명씩 그렇게 많이 모인 건 몇 해 전 김대중 선생 망명 와서 연설한 이후 처음이라고 그러더라고요.  

이한열의 장례식 장면은 뉴욕에 있을 때 뉴스로 봤어요. 백만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대형 걸개그림 앞세우고 맨발의 이애주 교수가 썽풀이춤 추며 걸어 나오는 모습에 한청련 식구들 모두 감격하는데, 사실 나는 걱정도 좀 됐지요. 이애주 교수는 나에겐 처형(妻兄)이니까… 내가 국내에 있을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요.  

87년 이후 미주에서 교포들이 다시 수백 명 이상 운집한 사건은 87년 12월 ‘민중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백기완 선생을 몇 해 후 윤한봉 형이 초청해서 순회강연을 했을 때라고 들었어요. 그러던 윤한봉 형도 90년대에 귀국을 했으나 밀항탈출 이후의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2007년 저 세상으로 먼저 갔고, 그 후 한청련도 조직적으로 분해가 됐다고 하는데 또 요즘엔 정치적 관심이 많이 줄어들어, 절창의 가객 장사익 형이 가야 교포들이 운집한다고 하더군요.(웃음)" 

광주를 빼고는 6월을 얘기할 수 없다 

임 명창이 87년 미국까지 가서 윤한봉을 비롯한 재미교포들과 더불어 6월항쟁의 판을 키우게 된 계기는 단지 그의 명성과 인기뿐만이 아니었다. 그 역사와 유래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부터 5.18 광주민중항쟁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87년 6월항쟁을 얘기하려면 80년 광주민중항쟁을 먼저 얘기해야 합니다. 6월항쟁은 ‘광주항쟁의 진상을 규명하라, 학살자를 처벌하라’의 연장선상에 있는 거죠. 그리고 광주민중항쟁을 얘기하려면 1979년의 부마항쟁과 1974년의 민청학련 사건을 되돌아봐야 합니다.

80년대는 민주화운동가를 비롯한 지식인 대학생들에게는 광주에서의 학살과 민중항쟁에 대한 분노와 부채의식으로 점철된 시간이지요. 그런데 광주에서의 학살은 그 전해에 있은 부마항쟁과 긴밀한 관계에 있습니다. 79년 10월, YH무역 여공들의 신민당사 농성을 비호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의원직 박탈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자 대통령 박정희의 경호실장이던 차지철이 캄보디아(킬링필드) 사건을 예로 들며 집단학살을 감행하려는 기미를 보임에 이를 저지하려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차지철을 제압하고 박정희를 시해하는 거사를 일으킵니다.  

여기서 잠깐 덧붙이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김재규 씨에 대한 평가도 이제 역사적으로 점검될 필요가 있습니다. 김재규의 거사일이 1979년 10월 26일, 이 날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한 1909년 10월 26일로부터 꼭 70년이 되는 날이었지요. 그 상징성을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각설하고, 박정희의 후계를 자처한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정권을 탈취하려는 야욕으로 12.12 반란을 일으켜 군권을 장악하고, 80년 5월 17일 자정을 기해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친위쿠데타를 일으킵니다. 그리고는 반년 전 부산과 마산에서 자행하려던 집단학살의 표적을 전라남도 광주로 바꾸어 겨냥해서 무자비한 명령을 내려 공수단을 투입합니다. 광주에서 무조건 수 백명 아니 수천 명이라도 죽여서 본때를 보이면 아무도 겁나서 못 일어난다, 이게 전두환 생각이었겠지요. 하지만 사태는 전두환 생각대로 만만하게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광주에서 엄청난 항쟁이 일어난 거지요. 누구라 할 것 없이 시민들 모두 들고 일어나, 심지어는 총까지 들고 싸워 도청을 탈환하는 혁명적 시공간, 해방구가 열린 거지요. 

사실 광주에서 지도자급 재야인사와 청년운동권 선배급은 계엄 확대 직전에 진행된 예비검속에 걸려 먼저 붙잡히거나, 그 전에 모두 피신하거나 했어요. 광주 청년운동권의 대표적인 선배급이 현대문화연구소를 운영하던 윤한봉 형과 녹두서점을 운영하던 김상윤 형인데, 두 사람 모두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때 전남지역 대학생 책임자로 징역 15년~20년을 선고받고 옥살이하다 석방된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해야 할까 운명의 장난이라고 해야 할까, 예비검속 대상이 아니었던 후배 윤상원이 광주의 운명을 떠맡아 마지막 새벽까지 도청을 사수하다 산화하게 되지요.  

막강한 병력으로 도청을 진압한 계엄당국이 광주항쟁의 조직도와 수괴를 조작하려 하는데 예비검속에 걸린 김상윤 형은 체포되어 있었으므로 알리바이가 확실해서 조작이 어려웠지만, 윤한봉 형은 잡히면 수괴로 몰릴 가능성이 높고 북한 간첩과 연계시킨다든가 조작돼서 처형당할 위험이 높다고 봤지요. 그래서 본인도 피신을 안 할 수 없게 되었고 주변에서도 적극 피신을 도운 겁니다." 

故 윤한봉 선생은 항쟁이 열흘 만에 진압된 뒤 5.18광주항쟁의 마지막 수배자로 남아 1년 넘게 피신생활을 하다가, 지인들의 도움으로 화물선을 타고 미국으로 밀항하는 극적인 탈출을 감행한다. 임 명창은 자신을 미국으로 초청한 윤한봉 선생이 '당시 광주에서 죽음으로써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을 천추의 한으로 여겼다고 했다. 윤한봉 선생은 광주에 대한 빚을 갚기 위해 분골쇄신(粉骨碎身), 미국 땅에서 민족학교를 세우고 한청련을 조직하고, 재미한겨레동포연합을 결성하여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 재미동포의 권익을 위해 헌신했으며, 1989년에는 세계 각국의 민간단체와 협력하여 백두산에서 판문점까지 국제평화대행진을 추진해내고, 이어 타민족 활동가들과 '반전·반핵을 위한 국제연대'를 조직하여 세계평화에 힘을 쏟았다.    

마당극을 비롯한 문화운동으로 유신체제를 뒤엎다 

6월항쟁 때만이 아니라, 임진택 명창의 무대는 항상 그렇게 시대와 함께 호흡했다. 숨 막히는 70년대, 임진택이 창출한 마당극 공연과 창작판소리 <소리내력> 공연은 언제나 '역사의 현장'이자 '질곡의 타파'였다. 

"긴급조치 4호 민청학련 사건 때 현상금 걸린 주모자 3명 중 유인태 형을 숨겨줬어요. 은닉죄라나, 당시 주모자 현상금이 200만 원이었는데 간첩 신고를 하면 1백만 원이었죠. 큰누나 집에 숨겨줬다가 나중에 들통이 나서 잡혀 들어갔는데, 나는 그냥 잡혀만 있었을 뿐 군법회의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그렇게 몇 달을 지내고 구속취소로 풀려났는데, 나중에 보니까 선배들이 은닉사실 말고는 내 이름을 끝까지 숨겨줬더라고. 

박정희 정권이 민청학련을 공산주의로 몰아가려고 공작을 하는데 그 중 하나가 일본인 기자 두 명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연계시키는 거였어요. 내가 했던 일 중에 1973년 12월말, 박형규 목사님이 주재하시던 서울제일교회에서 <청산별곡>이라는 마당극 공연을 하던 날(이 작품이 우리 연극사에서 최초의 마당극이라 할 수 있음), 일본인 기자들이 찾아와 원작자인 김지하 시인과 학생운동 주요인물인 유인태, 이철 형을 만난 일이 있는데, 나중에 보니 내가 그 연락책이었더라고. 민청학련이란 것이 침소봉대(針小棒大) 부풀려서 조작한 사건이라, 그 일을 들켰더라면 적어도 무기징역은 받았을 거야.(웃음)" 

그의 공연은 그 자체만으로도 예술이고 운동이었지만, 그의 공연이 만들어낸 주변 상황까지가 예술을 넘어서는 또 다른 시공간을 창출하곤 했다. 때문에 임 명창의 이야기처럼 70년대 사회운동 세력들이 다 잡혀가고 씨가 말랐을 때 탈춤과 마당극, 문인들과 언론인, 종교인을 비롯한 문화운동 세력이 들고 일어나 유신을 뒤엎을 수 있지 않았을까? 부마항쟁(79년 10월 16~20일)에서 10.26 사태로 이어지는 그 짧은 기간에 펼쳐진 임진택의 마당극(마당굿) 역시 그런 힘을 발휘했다. 

"내 마당극 중 제일 기억나는 작품이 뭐냐면, 이화여대에서 공연한 <노비문서>가 있어요. 1979년 10월 이화여대 운동장에서 사흘 동안 공연을 했는데, 하루에 수천 명씩 한 1만 명은 넘게 왔어요. 관중이 스탠드에도 꽉 차고 운동장에도 꽉 차고 넘쳐서 끊임없이 흘러 다니는 느낌이었어요. 10.26 이전에 부마항쟁이 있었지만 서울에서는 일체의 집회가 안 됐는데, 이화여대가 일종의 성역이어서 유일하게 허가된 마당극에 사람들이 모인 거지요. 사흘 동안 집회를 대신 한 거죠. 교문 밖에는 수백 명 전경들이 투구를 쓰고 대기 중이고…

그리고 그게 10.26으로 이어져요. 그 광경을 목격한 어떤 선배 연출가 한 분이 하는 말이 '임형이 연출한 게 운동장 마당에서 펼쳐진 <노비문서> 뿐 아니라 밖에서 전경들이 탈을 쓰고 왔다갔다하는 것까지 연출한 거다' 하는 거예요(웃음). 과연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해봤죠. ‘전경들까지 탈을 쓰고 등장해 있는 이 상황 자체가 연극이다? 그렇다면 지금 벌어진 판을 마당극이라 말하기에는 개념 범위가 너무 좁다.  

그렇지, 이게 바로 마당굿이야. '마당굿'이란 용어는 백기완 선생님이 발굴해서 쓰신 표현인데, 누구를 보여주려고 만든 연극이 아니라 모인 사람들이 다 참가해서 일구어가는 판을 일컫는 개념이라, 바로 그런 마당굿판이 집회현장 · 시위현장에 맞물려 실현된 거지요."

촛불혁명! 임 명창은 박근혜를 탄핵시킨 촛불혁명 역시 그렇다고 말했다. 광장에 나온 모두가 참여하는 굿판! 임 명창은 “이명박 ‘쇠고기 파동’ 때는 사람들이 모였어도 좀 미진했지만, 이번 박근혜-최순실 타도 집회에서는 시민의 자율적 힘과 의지가 폭발적으로 모여 마당굿판이 성립된 것”이라 했다. 6월에서 광주로, 민청학련을 거쳐 촛불항쟁으로 역사 속을 종횡무진한 인터뷰는,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화제가 옮겨갔다. 

▲ 임진택 명창. ⓒ바꿈


정치권, 30년 전 실패에 '마지막 책임'을 다하라 

"촛불혁명을 두고 어떤 사람은 6월항쟁 이후 30년 만에 성공한 시민혁명이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4.19 이후 도래한 시민민주혁명이라 말합니다. 내 생각으로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전개되기 직전 삼례와 원평 보은 등지에서 있었던 동학교도들의 취회야말로 촛불집회의 원형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봅니다. 

각설하고, 최근 몇 달간 진행되어 왔던 촛불혁명과 그 결과로 이루어진 정권교체를 보면서 정말 기쁜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직 속이 다 풀리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87년 6월항쟁으로 다시 돌아가 생각해보면, 87년에 양김(김영삼, 김대중) 선생이 분열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이 기쁨이 30년 전에 누릴 기쁨이었다는 건 분명합니다. 

30년 전 그 때 6월항쟁의 열정으로 민주진영이 단합하여 정권을 교체했다면 친일세력, 분단세력, 군사독재세력, 재벌독점세력의 적폐가 이처럼 쌓이는 걸 미리 막았을 테고, 굳이 수구세력과 손잡고 정권을 획득함으로써 개혁의 걸림돌을 자초할 일도 없었을 테고, 그 오래 묵은 영호남 지역감정도 진즉에 깨끗이 씻어낼 수 있었을 테고, 엉뚱한 대통령이 나타나 우리 강과 땅을 다 망쳐놓는 일도 없었을 테고, 어처구니없는 대통령을 만나 민생과 민주주의를 이처럼 훼손하는 일도 없었을 터인데, 생각하면 참으로 아깝고 아쉬운 일이지요. 30년 앞설 수 있었던 적폐청산, 이제는 누가 책임지기도 어렵지만, 하지만 반성은 해야 한다고 봅니다. 해야 할 일이 좀 남아 있어요." 

임 명창은 '마지막 책임'이 남아 있다며, 이번 대선 득표율 이야기를 꺼냈다. 6월항쟁 직후 그 해 12월 진행된 대통령 선거 당시, 백기완 선생의 선거운동본부에 단 한명의 특보로 참여했던 임진택의 경험이 녹아 있는 조언이었다. 당시 백본은 양김의 단일화를 이끌어 내려 애썼지만 결국 실패하고 6월항쟁의 열매는 노태우가 가져갔고, 이는 광주 학살세력의 정권연장을 합규적으로 승인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번 대통령 선거 결과에서 홍준표가 24%, 2등을 했어요. 이 표결 결과를 선거공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자칫 87년도가 재현될 수도 있었던 거지요. 만약에 바른정당이 새누리당에서 갈라져 나오지 않았다면, 유승민이 가져간 8%가 여기(홍준표)에 붙을 수 있어요. 그럼 32%죠. 그런데 문재인과 안철수 둘이 받은 표를 합쳐 보니 62%더라고요. 만약에 문 · 안 두 후보가 끝까지 팽팽하게 표를 나눠 가져갔다면 홍준표가 당선될 수도 있었다는 거죠. 정의당 표를 몽땅 이쪽으로 가져오지 않는다면 말이죠." 

36(노태우):28(김영삼):27(김대중):8(김종필). 87년 대통령 선거 당시의 득표율이 19대 대선 결과와 묘하게 겹쳤다. 87년 때 자리 잡힌 정치체제가 박근혜가 탄핵된 지금도 여전히 공고하단 의미일 것이다. 임 명창은 “이번 대선에서 정권교체가 가장 시급한 과제였지만 이와 동시에 정치권의 개편이 이루어질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아쉽다”며,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을 향해 "큰 그림을 그리라"고 조언했다. 

"나 같은 사람이 보기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가지고 갈 표가 어차피 40%였다면 안철수가 30%, 유승민이 10%, 홍준표가 10%, 정의당이 10% 득표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결과이고, 정계 개편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고 봐요. 수구보수 세력은 그 이기적 성격으로 볼 때10%의 지지로는 유지되기가 어렵지요. 지금 의원 수가 아무리 많아도 3년 안에 저절로 문 닫게 될 겁니다. 반면 진보정당은 두 자릿수 지지율을 확보하면 장래가 촉망되지요. 그런데도 이번 대선의 결과가 이렇게 나온 것은 TV토론 등에서 안철수의 내공 부족이 드러난 이유도 있지만, 연대해야 할 이웃정당의 부각을 두려워하는 민주당의 전략선택 때문이기도 하지요. 그 결과 정책 중심의 바람직한 다당제의 실현은 멀어지고, 적대적 공생이라고까지야 이제 말할 수 없겠지만 상호 의존적인 양당체제로 도로 굳어지는 양상이 생겨난 겁니다.  

자,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다음 국회의원 선거까지 3년이 남았는데 그동안 어떻게든 협치를 해야지요. 그러면 협치의 대상을 어디까지로 하느냐? 내가 권하고 싶은 것은 자유한국당만 빼고 가능한 만큼 모든 당과 협치를 해 달라 이거예요. 바른정당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관점에 따라 평가가 다를 터인데, 박근혜 탄핵 시점으로 돌아가보면 굵은 선이 보입니다. 200명 넘는 국회의원들이 동의해서 박근혜를 탄핵시켰잖아요. 얼마나 큰 힘입니까? 

지금 당장 중요한 과제들부터, 과반수가 필요하면 과반수만큼, 2/3가 필요하면 2/3만큼 협치 범위를 신축성 있게 적용해서 바꿔나갈 것은 바꿔나가라 이 말입니다. 지금 문재인 대통령 국정운영에 대해 80% 넘는 지지율이 나오는데, 이렇게 힘이 있을 때 자신과 경쟁할 수 있는 세력을 두려워하지 말고 협치하라, 이렇게 권하고 싶습니다.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이 크는 것을 경계하지 말고 새누리당인지 자유한국당인지를 고사시키는 것을 전략으로 택하라. 그렇게 해서 온건하고 합리적인 우파 정당이 세를 확보해야 민주당은 중도의 정당이 되는 거고, 그래야 정의당이 좌파의 대열에 당당하게 설 수 있다고 봅니다. 앞으로 진보정당이 20%는 얻어야죠. 그렇게 되면 국민은 마음 놓고 정책에 따라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폭력적인 정치체제를 소멸시키는 것, 협치하고 연대하는 정치체제를 만들어서 정책에 따라 국민이 원하는 바가 정치에 반영되는 그런 나라를 만들어 달라는 거예요. 큰 그림을 그려 달라 이겁니다."

예술가의 예지, 시대감각을 믿어달라 

임 명창은 예술가는 정면만이 아닌 왼쪽 오른쪽 측면에서 또는 뒤에서 보는, 거리와 여유를 가지고 관찰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했다. 장기나 바둑을 둘 때 그 판에 몰두한 선수보다 훈수를 두는 이가 더 좋은 수를 잘 찾아내듯, 예술가의 역할 또한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공부하고 40년 넘게 민주화운동의 복판을 지킨 문화운동가이자, 광대를 자처하는 예술가인 임진택 명창! 3시간 가까이 진행된 그와의 인터뷰를, 그의 내력을 가만히 곱씹어보자니 한 문장이 잔상을 남겼다. 
 
"예술가의 예지랄까, 시대감각에 대해 존중하고 믿어 달라."

임 명창의 이 말이, 예술가를 정치적인 잣대로 재단해 돈으로 그 정신을 사려 했던 ‘문화계 블랙리스트’에서부터 박근혜 정부의 몰락이 시작됐다는 것처럼 읽혔기 때문이다.



아아, 사람들이여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

1986년 봄, 한 달 간격으로 서울대생 네 명이 독재에 항거하며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죽음을 지켜본 문익환 목사는 통곡하듯 이들의 이름을 불렀다.

김형민 (PD)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7월 06일 목요일 제511호

1980년대에 서울대학교에 입학한다는 건 개인의 영광이요 가문의 기쁨이었고 이웃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수많은 서울대생이 장밋빛 미래를 버리고 가시밭길을 택했으며 죽음으로 독재에 항거했다는 사실 또한 분명히 기억해주었으면 좋겠어. 1987년 7월 고 이한열 학생 장례식에서 문익환 목사가 목메어 부른 ‘열사’ 26명 가운데 서울대생이 아홉 명이나 되거든.

그 가운데 네 명은 1986년 봄, 한 달 간격으로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김세진·이재호·이동수 그리고 박혜정. 먼저 1986년 4월28일 전방 입소(전두환 정권 때는 대학생들을 의무적으로 군부대에 입소하여 ‘교육’을 시켰단다)에 반대하여 시위를 벌이던 도중 서울대학교 자연대 학생회장 김세진과 정치학과 83학번 이재호가 스스로 몸에 불을 댕겼어. 그런데 김세진의 경우 부모에게 이런 편지를 남겼어. “충격이 크시겠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아주 여유 있는 마음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주도하면서도 아주 열심히 싸울 것이고, 성실히 고민할 것입니다. 경찰에게는 지난 수요일부터 쭉 집에 들어가지 않은 것으로 얘기해주세요.” 즉 분신을 치밀하게 준비하고 결행한 건 아니었다는 것이지. 하지만 무슨 사연인지 두 젊은이는 친구들의 눈앞에서 불덩이가 되어 쓰러졌어. 이윽고 1980년대 내내 범상치 않았던 5월이 왔지.

ⓒ연합뉴스
1988년 4월 서울대 도서관 앞에서 서울대생 김세진·이재호 열사 2주기 추모식을 하고 있다.

1986년 5월20일 서울대 오월제에 문익환 목사가 찾아온다. ‘광주항쟁의 민족사적 재조명’이라는 강연을 하기 위해서였지. 김세진·이재호 학생에 대한 묵념 후 강연을 시작하려는데 학생회관 4층 옥상에서 날카로운 구호 소리가 들려왔어. 원예학과 83학번 이동수였지. 그는 연신 “폭력경찰 물러가라, 전두환을 처단하자” 외치고 있었지. 그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 중 상당수는 또 한 번의 분신 사태가 일어날 거라는 걸 직감했다고 해. 본능적으로 사람들이 “안 돼!” 외치는 가운데 이동수는 온몸이 불덩이가 돼 땅으로 떨어져 내렸어. 그는 운동권 활동을 제대로 한 적이 없는 학생이었어. 오히려 81학번 선배들한테 몰매까지 맞은 적이 있다고 했지. 삼수생으로 나이가 81학번 또래였던 그가 선배들에게 존댓말 쓰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야(<서울대저널> 제141호 중 인용). 이른바 운동권 조직의 일원도 아니었으나 뒤틀린 나라에 분노하고 정직하게 항거했던 한 청년은 스스로 생명을 거뒀다. 그의 유서 중 인상 깊은 한마디. “‘아니오’라고 할 수 없을 때 인간은 노예가 된다.”


눈앞에서 사람이 불타 떨어지는 걸 본 서울대 학생들은 걷잡을 수 없이 분노했어. 그때 도서관에는 한 학생이 뛰어 들어와 열람실 안의 학생들에게 이렇게 부르짖었다고 해. “사람 죽었다 이 자식들아. 나와서 싸우자. 안 싸우겠으면 나와서 구경이라도 해라.” 운동권이든 아니든 전두환 정권의 야만에 분노하고 있던 서울대생들은 도서관과 강의실을 박차고 나왔어. 돌을 던지고 경찰과 육박전을 벌이면서도 많은 학생들은 울고 있었다. 그 가운데 국문학과 83학번 박혜정도 있었어.

용기 없음을 자책하던 젊은이는…

박혜정의 아버지는 군인 출신이었다고 해. 공식적으로 연좌제가 폐지되긴 했으나 데모하는 자식을 둔 군인, 공무원 아버지는 그 자리를 지키기가 쉽지 않았어. 그래서 “네가 데모하면 우리 집안이 망한다”는 게 현실적 압박이던 때였지. 박혜정 역시 엄한 집안 분위기에서도 데모에 종종 참여했지만 본격적으로 운동에 뛰어들지는 않았다고 해. 가족과의 갈등이 엄청났을 것이고, 본인이 가꿔온 문학도로서의 꿈도 소중했을 테니까. 그녀는 동짓달 그믐밤같이 날선 독재 치하의 암흑과 제 몸을 불태워 발하는 순백 사이의 회색지대에 남아보려고 애썼어. 하지만 이동수가 불덩이가 되어 떨어지는 모습을 본 그녀 역시 울면서 돌을 들었다. 용기 없음을 스스로 질책하던 한 젊은이의 폭발이자 외면할 수 없는 전쟁에 참전하겠다는 선언이었지. 그날 그녀는 평생 처음 외박을 했고 이후 버스를 탔지만 집으로는 돌아가지 않았고 며칠 뒤 한강에서 시신으로 발견됐어. 그녀가 남긴 유서에는 헤아릴 수 없는 감정들이 버무려져 있었어.

ⓒ연합뉴스
1987년 7월8일 경남 진주교도소에서 가석방된 문익환 목사.

“떠남이 아름다운 모든 것들. 괴로운 척, 괴로워하는 척하지 말 것. 소주 몇 잔에 취한 척도 말고 사랑하는 척. 그래 이게 가장 위대한 기만이지. 사랑하는 척. 죽을 수 있는 척. 왜 죽을 수 없을까? 왜 죽지 않을까? 자살하지 못하는 건, 자살할 이유가 뚜렷한데 않는 건 비겁하지만 자살은 뭔가 파렴치하다. 함께 괴로워하다가 함께 절망하다가 혼자 빠져버리다니. 혼자 자살로 도피해버리다니.”


본인에게 던지는 불평 같기도 하고 김세진과 이재호와 이동수에게 던지는 비명 같기도 하지. 자살할 이유가 뚜렷한데 하지 않는 건 비겁하다고 규정하면서도 외려 그 죽음을 원망하고 있으니까. 차라리 당신은 죽어서 속 편하지 않으냐고, 당신은 이제 이 고통과 절망에서는 차라리 벗어나지 않았냐고 토로하는 것 같으니까. 그런데 그녀의 유서는 그 후 단호해져.

“반성하지 않는 삶. 반성하기 두려운 삶. 반성은 무섭다. 그래서 뻔뻔스럽다. 낯짝 두꺼워지는… 아파하면서 살아갈 용기 없는 자, 부끄럽게 죽을 것. 살아감의 아픔을 함께할 자신 없는 자. (중략) 이 땅의 없는 자 억눌린 자 부당하게 빼앗김의 방관, 덧보태어 함께 빼앗음의 죄. 더 이상 죄지음을 빚짐을 감당할 수 없다. 아름답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부끄럽다. 사랑하지 못했던 빚 갚음일 뿐이다.”

같은 학번이었던 이동수의 살이 타들어가는 냄새를 맡으면서 법전을 파고들고 토플 단어를 외우는 뻔뻔함을 가지지 못했고, 그 죽음에 아파하면서 몸 바쳐 살 용기는 한술 부족했던 청년, 숱한 사람들의 목숨을 속절없이 앗아가던 역사에 슬쩍 다리만 걸칠 깜냥도 없었을 뿐 아니라 그런 비겁함을 ‘함께 빼앗는 죄’로 규정했던 젊은 여학생의 발길은 결국 한강 다리로 향하고 말았어.

1986년 봄의 뼈아픈 죽음들 앞에서 가장 충격을 받았던 사람이 바로 문익환 목사였어. 이동수가 떨어져 죽던 바로 그날, 아들이 서울대 강연을 간다는 말을 들은 문 목사의 모친 김신묵 여사는 이렇게 애타게 호소했다고 해. “일제 때 독립운동하던 사람들이 단 한 사람도 그렇게 죽는 거 봤니. 네가 가서 꼭 부탁하거라. 제발 죽지 말고 싸우라고.” 그러나 그 말을 미처 하기도 전에 일은 벌어져 이동수가 죽고 박혜정이 스러졌다. 이후 문 목사는 스스로 체포되다시피 감옥으로 갔고, 1년 뒤 6월항쟁을 거쳐 정권의 항복 선언이 있은 후 7월8일 석방됐어. 그리고 바로 다음 날인 7월9일 이한열의 장례식에 달려가 부르지 못한 이름들을 통곡처럼, 비명처럼 불렀던 거야. 김세진·이재호·이동수·박혜정, 그 험난했던 1986년 서울대생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문익환 목사는 어떤 심경이었을까. 아빠는 상상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 아파오는 가슴을 쥐고 박혜정의 시를 노래로 만든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를 읊조릴 뿐이야 “아아 사람들이여.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

※ 제502호 ‘전두환 아저씨 나는 왜 죽었나요?’의 ‘전두환씨가 고향을 방문해서 모교 체육대회에 가면 그 앞에서 모교 학생들이 큰절을 올린다지요’와 관련해 전씨에게 절을 올린 이들은 대구공고 재학생이 아니라 일부 동문이라는 지적이 있어 이를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