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한국학, 국내 지원이 필수적이죠"
이은정 박사는 지난 8월 말 독일에서 그 나라 헌법을 앞에 두고 공무원 선서를 했다(그의 국적은 한국이다). 베를린자유대학의 한국학과 교수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베를린자유대학은 오는 10월 첫 강의를 시작하는 한국학과의 문을 열면서 한국학 연구소 초대소장으로 이 박사를 선택했다.
"공무원이 되는 것이니 헌법 앞에서 선서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공무원으로서의 임무를 지키겠다는 내용인데, 기독교인이라면 '신이 나를 지켜주는 한 그렇게 하겠다'는 선서를 덧붙일수 있어요.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그 내용은 안하는 것이고요."
그는 별스럽지 않게 말하는데 갑자기 우리나라 공무원들의 도를 넘어선 종교편향적인 발언과 시각은 온전히 개인의 선택에 의한 것인지 새삼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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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대학으로부터 한국학과 교수로 초빙 받은 (독일에선 교수를 임용한다고 하지 않고 초빙한다고 한단다) 이박사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총장과 대면하여 협상에 사인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딜'? 신성한 상아탑 안에서 협상이라니?
"연구소를 이끌어가기 위해서 필요한 기금이나 인력지원 등 제반 조건들을 제가 제시하면 학교 측에서 어떻게 얼마만큼 수용할지 결정하는 것이지요. 이번 협상은 사실 한 두 달 만에 빨리 끝났어요."
학교 측은 이교수가 제시한 조건들- 연구원과 조교 강사 사무직원등 열 명 정도의 인력운영경비와 도서비 연구소 건물지원 등등-을 전적으로 들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기대 이상으로 많은 지원을 하기로 약속했다. 그건 이교수 조차도 놀란 일이다. 학교 측이 이렇게 나온 데에는 이유가 있다. 하루라도 빨리 한국학연구소가 가동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대학이 한국학과를 키우겠다는 의지가 아주 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너무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서 협상도 쉬웠지요. 6월 말에 시작되어 8월에 임명장이 나온 것은 엄청나게 빨리 진행된 것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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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상 분야에서 그 어려운 교수자격시험을 거쳐 2001년에 교수자격(하빌리타찌온)을 받은 이 교수는 자신이 좋은 조건으로 초빙 받은 것은 오로지 이러한 학교 분위기 덕분이란다. 그 배경은 이렇다.
독일이 통일되면서 베를린 시내에 대학이 2개가 되었다. 동베를린에 있던 훔볼트 대학과 서베를린의 자유대학이다. 두 대학 모두 그동안 각각 지역 연구센터가 강세를 이뤘는데 통일이 되었으니 지역학과를 특정지역으로 분산해서 키우는 게 더 나을 것이라는 데 합의를 봤다. 90년대 중반부터 훔볼트 대학은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이슬람을 맡고, 자유대학이 동아시아를 맡기로 했다. 베를린자유대학이 한국학과를 설치해야할 당위성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자유대학 동아시아 센터 내에서 중국학과 일본학연구소는 이미 활발한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학은 좀 뒤늦게 출발하는 셈이다.
현재 독일내 한국학 연구소가 있는 대학은 함부르크, 보훔, 베를린자유대학 등 세 곳이다. 튀빙겐이나 프랑크푸르트, 레겐스부르흐 대학에서도 한국어나 한국학을 배울 수 있지만 독일에서 말하는 '정교수'가 없으면 학생이 한국학을 전공으로 삼을 수 없다. 함부르크와 보훔대학 한국학과 교수들은 각각 18세기 한국문학과 불교전공자로 이름나 있다.
"제가 주제로 삼는 부분이 현대이니 그분들의 고전과 함께 호흡을 맞추면 좋겠지요." 그는 독일내 한국학 전공자들과 함께 한국학을 만개시킬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는 대학 3학년이던 1984년 서독으로 유학 갔다. 당시로서는 조기 유학생인 셈이다. 총명한 재원이었던 그는 이미 대학 1학년 때 막스베버 전기를 읽고 '나도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
괴팅겐대학에서 신입생으로 시작하여 정치사상사로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그는 원 없이 공부했던 것 같다. 공부하러 유학을 갔으니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냐면서, 그래도 공부만 했던 것은 아니라고 우긴다. 학교일에도 앞장섰고 학생회 활동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모른다며 공부벌레로 여겨질까 봐 질색을 한다. 그렇다면 활동적인 공부벌레 정도로 해두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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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독일에 갔을 때는 아직 '서독'이던 시절이었다. 그곳 사람들은 한국은 잘 모르지만 한국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나이 많은 분들은 하나같이 한국인은 참 친절한 사람이라고 칭찬했어요. 근면하고 성실하고 친절한 간호사가 그들이 생각하는 한국인이었어요."
1970년대 파독광부들과 간호사들이 심어놓은 한국의 이미지는 그 뒤 광주항쟁, 올림픽으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한국전쟁, 독일과 같은 분단국가의 이미지가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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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이미지를 다원화 시키는 일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이박사는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세대별로 다르다고 지적한다. 지금 독일 신세대에게 코리아는 삼성과 엘지, 현대와 대우… 자동차와 전자제품을 수출하는 기업의 이미지 위에 김기덕의 영화로 중첩된다. 또는 생산 쪽에서는 독일의 경쟁자로서 부각되기도 한다.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부분별로 다원화되고 있지만 아직도 독일 사람들은 현재 한국이 자동차를 만들어 수출하는 기업과 김기덕 같은 멋진 감독(독일의 작은 마을 비디오 가게에서도 그의 작품집이 따로 있을 정도로 김기덕의 독일 팬들이 많다.)이 나올 수 있는 사회적·문화적 기반을 잘 연결시키지 못한다. 여전히 독재국가라는 강한 이미지에 고정되어 있다. 그런 것을 교정하는 일이 한국학을 담당하는 이들의 과제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한국이 성장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지요."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막중함을 느낀다. 현대한국을 독일에 알리고 서로 이해시키는 일이 그의 몫으로 떨어진 것이다. 한국학과를 운영하는데 있어서 그는 한국 국내와의 관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학교뿐만 아니라 한국 내 모든 기관들과 협조관계를 잘 이뤄야한다고 믿습니다. 자주 오가며 한국에서의 연구결과뿐만 아니라 한국과 독일, 유럽간의 공동연구를 진행하고 싶어요. 독일에 있는 한국학 박사과정 친구들이 아주 유능해요. 더욱 잘 훈련시켜서 지성사, 문화사쪽에서 한국연구를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또 그는 자유대학 내에서는 중국학 일본학 한국학이 서로 긴밀한 협조를 이뤄 동아시아 내에서 한국을 이야기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는 이미 그 실험을 지난 5년간 해왔다. 유럽에 있는 동아시아 학자들과 아시아에 있는 한국·중국·일본 학자들과 연속해서 컨퍼런스를 개최하면서 '동아시아 내의 자기주장 '이라는 시리즈를 냈다.
"비슷하면서도 아주 다른 연구결과가 나오기도 합니다. 협력하면서 연구하는 게 중요해요. 그런 장을 많이 만들어 공동으로 연구하수 있는 틀을 만들 겁니다. 한국과 함께 프로젝트 팀을 만들어 중장기적인 연구를 추진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유럽사회 내 한국학 연구결과가 축적될 것이고 그런 게 교재로 사용될 뿐만 아니라 저널리스트, 기업가, 정치가들이 한국을 알고 싶어 할 때 학문적 검증을 통한 연구결과를 제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한국을 알리는 작업을 기초에서부터 차곡차곡 진행해 나가겠다는 각오가 그의 표정에서 읽힌다.
베를린 자유대학 한국학과는 한국에서의 지원은 전혀 없이 자유대학의 재원으로만 만들어 졌다. 외국대학에 생기는 한국학 연구소에 대한 국내의 지원은 물질적인 지원 이상이다. 앞으로 이 연구소에 대한 국내지원이 있다면 연구소는 더 크게 중심센터로 커나갈 수 있을 것 같다. 벌써 그는 큰 도움을 받고 있는 듯하다. 신영복 선생은 한국학 연구소 건물 정면에 걸릴 글씨를 흔쾌히 써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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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 도중에 이교수는 자주 서독, 동독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사실 그는 20여년 독일생활 동안 양쪽 독일을 모두 경험했다. 처음에 괴팅겐에서 공부하면서 서독을 알았고, 후에 할레대학에서 훔볼트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동독을 알았다. 서독에 살 때는 대학에 워낙 동화가 되어서인지 이질감을 전혀 못 느끼고 살았는데 할레에 처음 갔을 때는 겁을 먹었단다. 원래 화학공업이 성해 부자였던 할레는 보수적인 곳이었는데 그 당시는 경기침체로 분위기가 아주 안 좋았다.
" 혼자 걸어 다닐 수가 없었어요. 외국인이나 서독에서 온 사람들에 대한 혐오가 심했어요. 사람들이 "꺼져!"라고 소리치면서 몸을 막 부딪치며 지나가곤 했어요."
한참동안 오시(서독사람), 베시(동독사람)라고 하며 서로 구분해서 불렀다.
그는 살아보니 분위기는 다르지만 사람 사는 데는 다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그는 요즘 할레를 이야기할 때는 "우리 할레에서는…" 한다며 웃는다.
그의 마음에서 서독과 동독은 정말 하나가 되었다. 그는 독일이 통일되던 그날을 아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아마 토요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괴팅겐은 국경에서 50킬로였거든요. 매 주말 시내에서 장이 열렸어요. 그날은 동독 자동차 트라비가 막 행렬을 지어서 왔는데 서독사람들이 동독주민들이 오니까 박수를 치면서 바나나를 갖다 주는 거예요. 그때 동독에서는 바나나가 수입금지여서 최고급 음식이었거든요. 바나나를 주면서 서로 붙잡고 막 울어요. 독일 사람들이 그렇게 드러내놓고 우는 일은 없는데… 할아버지들이 바나나를 들고 우시는데… 저도 그 중간에 서서 울었지요. 누구든 울지 않을 수 없었어요."
지금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도 누구든 자신의 눈에 맺히는 눈물을 어쩌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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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이면 독일 통일이 20주년을 맞이한다. 독일통일은 우리의 이야기와 언제나 연결된다. 그들의 통일이야기는 우리의 것과 연결된다.
"많은 이들이 독일통일이 준비된 것이 아니었느냐, 그런 얘기를 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에요. 동독사람들이 체코 대사관으로 탈출하기 시작했을 때도 통일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지요. 동독에서 체제 개혁운동 하던 사람들도 체제 붕괴를 하려한 것은 아니었어요. "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89년 9월말에서 10월초에 매주 월요일마다 동독 주민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를 행진했지요. 라이프찌히에서 처음 촛불행진을 했어요. 그러고 보니 촛불의 시초가 그때였네요. 그때 동독사람들이 내건 슬로건이 처음엔 '우리가 주인이다.'였는데 그다음에 '우리는 한민족이다'로 변했어요. 그게 10월이었어요. 11월 장벽이 무너지기 바로 전이라고 보면 맞아요."
이 지구상에서 불쌍하게도 여전히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우리에게 독일의 통일은 하나의 교과서로서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에게 독일 통일이 어떤 레슨을 주고 있는지 물었다.
"통일정책은 선거공약과는 분명 달라야 해요. 89년 11월에 장벽이 무너지고 90년 3월에 동독에서 민주적인 의회선거가 있었고 곧장 서독에서도 선거가 있었어요. 통일 이후 문제에 대한 정책결정이 장기적인 국가비전으로 이뤄진 게 아니고 공약으로서 통일정책이 마련된 것이지요. 엄청난 실책이 범해진 것이지요. 지금 독일 연금이 위기에 빠져 있어요. 그건 콜정부가 사회보장 정책기금으로 통일비용을 부담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산업부분에서 1,2년 사이에 동독의 산업시설이 전부 올스톱 되고 말았어요. 그 붕괴과정을 좀 더 천천히 했었어야했는데 거기에는 서독에 있는 특정 기업들이 압력집단으로 큰 역할을 했지요. 동독의 농업생산만 해도 경쟁력이 있었는데 서독의 대규모 농업회사들이 압력을 가해서 협동농장을 전부 문 닫게 했잖아요. 선거 공약화되었기 때문에 통일정책에 실책이 범해진 것이지요.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 강행했던 점이 강해요."
그는 조심스러워하면서 우리의 통일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한반도를 생각해볼 때, 통일문제를 단기간의 문제가 아니라 장기적인 국가전략으로 다룬다면 충분히 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지금 모두 통일비용을 생각하면서, 독일도 잘 못했는데 우리가 잘 할 수 있을까, 하는데 독일이 잘 못했다고 해서 우리가 못하란 법은 없지요. 우리는 국가가주도하는 경제개발을 해본 경험이 있는 국가잖아요. 그 당시에는 권위주의적인 국가였지만 지금은 민주적인 정치체제하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는 게 사실이 아니란 것을 우리가 지금 너무 잘 보고 있잖아요? 통일문제도 우리는 절대 안 돼! 하고 도망갈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목소리는 나직한데 그의 표정이 여간 당차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그가 독일에서 보여줄 한국은 보다 다이내믹하고 건강하고 신세대적인 모습일 것 같다. 오랜 슬픔의 그늘을 벗어던진 활기찬 한국의 모습이 유럽 저 너머로 알려질 게 분명해 보인다.
'한국학'은 한국을 홍보하는 학과가 아닙니다
독일 브란덴부르크 아카데미는 지난해 11월 베를린 자유대학 한국학과의 이은정 교수를 정회원으로 선출했다. 1700년에 시작된 프로이센 왕립 아카데미의 후신으로 300년 역사를 가진 이 학술원에서 아시아 출신 학자의 이름이 호명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학자로서 가장 큰 영예를 안게 된 이은정 교수를 3월 초 서울에서 만났다.
축하 인사를 건네자 쑥스러워 하며, 혹시 소식을 알리는 게 자랑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조심스러워 한다. 그러나 이 교수의 아카데미 회원 선출 소식은 단순히 개인적인 기쁨을 넘어서는 의미가 있다. 독일 내 한국학의 현재 위상을 설명해주는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학술원은 이 교수를 선출한 이유로 두 가지를 거론했다. '독일 내에 새로운 차원의 한국학을 개설'한 공로와 학문적으로 '정치사상사에 새로운 분석틀을 도입하여 상호문화적인 연구를 개척'한 것을 높이 산다고 했다.
"저로서는 그동안 그냥 계속해온 일인데 그 점이 인정받았다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지요. 회원선출 심사를 오래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동안 제가 심사대상이란 것도 몰랐어요. 학술원 선발 과정이 드러내놓고 하는 게 아니라서요. 지난해 여름에 학술원 회장으로부터 회원선출을 수락하겠느냐고 묻는 편지를 받고서야 알게 되었지요. 11월 25일에 포츠담에서 아카데미 모든 회원과 관계자들이 모여서 행사를 가졌어요. 이번에 9명이 새로 선출되었는데 프랑스 생화학자, 미국의 역사학자, 그리고 저, 이렇게 3명이 모두 여성이었어요."

▲ 베를린자유대학 한국학과 이은정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아카데미가 밝힌 '독일 내에 새로운 차원의 한국학과 개설'은 베를린자유대학의 한국학과를 두고 하는 말이다. 베를린자유대학의 정교수로 임명된 이은정 교수가 학과장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10년 전에 창설한 학과이다.(2008년 <프레시안>에서 이와 관련하여 이 교수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렇게 10년이 지났고,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대로 베를린자유대학 한국학과는 많은 것을 이뤄냈다.
"시작 때는 정말 막막했었지요. 완전히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니까요. 학과의 틀을 짜고 언어교육 시스템을 만들고, 학부과정을 만들었죠. 그 다음에 석사와 박사과정, 특별대학원 설립, 그리고 연구프로젝트 진행과 행정업무에 여러 사회활동 등 동시다발로 온갖 일들을 한꺼 번에 진행하다 보니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였어요. 이제 돌아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그동안 숨 쉴 틈 없이 달려온 건 사실입니다."
학부 신입생 정원이 50~70명에 이르고 3년으로 이루어진 학부과정, 그리고 석·박사 과정에 40명이 있고, 그의 지도를 받는 연구생만 19명 등 다 합해서 330명 정도의 학생 규모인데다 교수진은 강의전담 교수까지 합해 12명에 이르는 규모의 큰 학과를 만들었다.
"2008년 시작할 때엔 일단 해 봐야지 하는 마음이었지요. 10월에 수업을 처음 시작할 때 그 막막함이 지금도 기억나요. 학생들은 한국어 언어 훈련이 전혀 안 되어 있었고, 한국학을 왜 하는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었지요.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랐지만,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은 분명 있었지요. 그때 여러분이 도와주셨어요. 특히 1년 동안 독일에 오셔서 강의를 해주신 조효제 교수님은 한국학과 강의의 기본 틀을 잡아주신 분이죠. 학생들에게 한국학을 이렇게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다고 가르쳐 주셨어요. 지금도 그때의 명성이 학생들 사이에 전해 내려올 정도예요. 독일의 제 지도교수님은 당신도 그때 통일 후 동독에 가셔서 새로 학과를 만드셨는데, 그걸 통해 몸소 제게 가르쳐 주셨어요. 학과를 만드는 일을 하려면 '네 삶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씀도 해주셨지요. 한국에서 저를 가르쳐 주셨던 교수님도 '학과를 만드는 일은 혼자서 하는 게 아니다, 누구와 같이할 수 있는지 주변을 살펴라'고 조언을 주셨어요. 제가 보쿰대학 한국학과와 협력할 수 있었고, 동아시아연구소를 만들면서 일본학 교수에게 협력을 먼저 제안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어른들의 조언에 따른 덕분이었어요."
그 10년의 과정을 지켜볼 기회가 있었던 필자에게도 당시의 뜨거웠던 분위기가 전해져 오는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의 한국학과를 이루기까지 제 옆에서 같이 일해 준 동료들이 참 고맙지요. 제가 일을 좀 많이 하는 편인데요, 다들 바람의 속도로 제가 일한다고 해요. 그러자니 제 옆에서 같이 일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한결같이 저를 지켜준 동료들입니다. 시작부터 지금까지 같이 해주었으니 이렇게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학과 설립 10년을 넘어서면서 이제서야 한숨을 돌리는 듯한 이 교수의 표정에서 자부심이 느껴졌다.
"베를린자유대학 한국학과는 사회과학적 방법론으로 한국을 연구하는 센터입니다. 그전에 독일에 없던 것으로 새롭게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남북한을 동시에 보는 시도를 했고 이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거라고 할 수 있지요. 그리고 독일에서 한국을 진지한 연구대상으로 보려는 태도가 사회과학 분야에서 이뤄진 거죠. 그간 한국학은 중국과 일본학 연구에서 비교대상 정도에 머물러 있었죠. 한국 자체에 포커스를 맞춘 연구는 거의 없었던 거죠."

▲ 권은정 전문 인터뷰어(왼쪽)와 이은정 교수(오른쪽). ⓒ프레시안(최형락)
그는 독일, 유럽 내에서의 지역학은 인문학적 전통이 아주 강한 학문이라고 덧붙여 설명하였다. 그런 가운데 사회과학적 성격의 자유대학 한국학과를 어떻게 키워낼 것인가? 그는 학과의 틀을 잡을 때 보쿰대학 한국학과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보쿰대학 한국학과는 18,9세기 한국 고전연구로 독일 내에서 독보적 존재입니다. 독일의 인문학적 전통을 바탕으로 한국학을 공부하는 학교로 보쿰 대학의 명성이 아주 높아요. 논문이나 연구 실적도 아주 대단한 학교입니다. 보쿰의 한국학과를 보면서 많이 배울 수 있었어요."
베를린자유대 한국학과와 보쿰대 한국학과는 별개의 대학이지만, 마치 하나의 학과처럼 긴밀하게 연계된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고 한다.
"저희 학과에는 사회과학적 연구를 한 젊은 연구자들이 주를 이루고 있고, 보쿰은 전통과 고전이 강하니 전통과 현대를 같이 합치면 연구할 수 있는 게 많겠다고 생각한 거죠. 예를 들어서 17세기 '한국의 감자도입에 관한 연구'가 오늘의 한국을 이해하는 바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죠. 2009년부터 우리 두 학과가 서로 교류하면서 양쪽 모두 시너지 효과를 본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현재 독일에는 베를린과 보쿰 외에도 튀빙겐, 함부르크, 프랑크푸르트, 본 등 6개 도시의 대학에서 한국학과가 독립적으로, 혹은 중국학과, 일본학과와 연계되어 운영되고 있다.
외국 학생들에게 한국학을 가르치는 일이 처음부터 만만한 일은 전혀 아니었다. 독일 학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일이 급선무였다. 학과 설립 초기에 서울에서 독일로 가는 이 교수의 짐가방에는 한글 쓰기 공책이 한가득 들어 있었을 정도였다. 이제는 한국학 연구소와 동아시아 연구소까지 운영하는 학과로 교육뿐만 아니라 학문연구에서도 성과를 내고 있다.
"한국학과가 교육만 하는 데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학문적 성과를 내놓아야 합니다. 독일이나 국제학계 내에서 한국학과의 위상을 세워야지요. 저희는 지난 10년간 체제 전환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해오고 있는데요. 독일 통일의 사례연구를 통해 체제전환의 지식을 다른 나라에 전달할 때 어떤 방법론이 적절한지 그런 것을 연구하고 있어요. 독일 통일의 지식을 분단국가에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지식체계를 찾아내는 거죠. 정책지식 전달의 적절한 방법론을 찾아내는 것, 그런 연구를 통해 학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은 그 전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높아졌다. 경제성장뿐만 아니라 케이팝(K-POP)을 필두로 하는 문화현상에 기인한 바가 클 것이다. 더불어 한국학과를 개설하는 외국대학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시기적으로도 최근 10여 년 사이에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미국과 유럽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동일한 현상입니다. 프랑스 파리의 경우 한국학 입학생만 몇백 명이고 전공생이 300명이 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보쿰에서도 학생 수가 늘어나고, 튀빙겐 대학에서도 입학생 수가 150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한국학 전공자 수가 늘고 있긴 한데, 그래도 독일 전체 대학 학생 수에 비하면 아주 소수인 거지요. 유럽을 통틀어서 보더라도 다른 학과 전공학생 수에 비하면 적은 숫자지요."
이 교수는 무엇보다 이제는 자발적으로 한국학을 공부하겠다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어서 참 기쁘다고 말한다.
"학생들에게 한국학이 하나의 선택 대상이 된 거죠. 그 전에는 일본학과에 밀려서 선택하게 되는 그런 경우였는데 이제는 일본학이나 중국학보다 우선적으로 한국학을 선택하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이제 한국학은 생소하고 이상한 학과가 전혀 아니에요. 학생들에게 중요한 고려대상이 되었어요. 한국학과가 하나의 일반학과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한 거죠!"
이 교수는 최근 몇 년간 독일 내에 한국학에 대한 변화의 조짐을 감지하는 아주 흥미로운 예를 들려준다. 2010년부터 독일 중등학교 사회과 교사 대상으로 매년 사흘 동안 계속되는 한국관련 워크숍을 개최하고 있는데, 그 이후 고교 수업시간에 배운 한국에 관심이 생겨서 대학에 왔다는 아이들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케이팝 영향이 아니고요. 졸업시험에 한국 관련 문제가 나온대요. 대학입시 설명회 행사에서 한국학 부스에 찾아오는 독일 학생들이 많다니까요. 그전에는 한국에 관한 지식은 한국전쟁이 전부였지요!"
한국학과를 지망하는 학생들의 분포를 보면, 대부분 독일 학생들이고 폴란드와 러시아 등 인근 동유럽에서 오는 학생들이다. 터키에서 오는 학생들이 더러 있고 베트남 학생들은 매년 끊이지 않고 1~2명씩 꼭 있다고 한다. 한국계 학생들은 더러 있다.

▲ 이은정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아직 졸업생들은 수적으로는 미미하다. 그러나 독일 사회 내에서 다양하게 활동을 시작하고 있다. 박사과정에 있는 연구자는 예외로 하더라도 외교관이 된 학생도 있는데, 현재 외무부 한국담당 과장이 1회 졸업생이라고 한다. 언론사 기자, 호텔 체인의 동아시아 담당자, 회사원, 번역가, 또 한국을 대상으로 회사를 차려 비즈니스를 하는 졸업생들도 있단다.
이 교수는 외국에서 한국학과 개설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발전이기는 하지만, 한국학과의 성격을 분명히 하면서 내실을 키워야 한다고 지적한다.
"흔히 한국학이라면 한국을 홍보하는 학과라고 쉽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건 한국학이 아닙니다. 그건 한국문화원이 하는 일이지요. 한국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홍보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한국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한국을 알게 하면서 더불어 학문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가르쳐주는 게 중요합니다. 문화인류학적 접근, 사회과학적 접근 등 여러 연구방법이 있지요. 또 연구자들도 설명 위주의 접근이 아니라 팩트를 가지고 학계에서 궁금해하는 접근 방법을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학생들에게 가르친 게 바로 이런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는 볼 수 있지요."
그는 외국에 있는 한국학과의 성격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사실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외국에서 진행되는 한국학을 보는 시각에 대한 문제라는 게, 한국에서 오시는 분들께 학생들 대상의 특강을 요청하면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인데요. '한국 사람들은 김치를 먹고 아리랑을 즐겨 부르는 민족'이라는 수준으로 강의하는 분들이 종종 있어요. 우리 학과 학생들은 수업을 한국어로 진행합니다. 언어뿐만 아니라 학생들 스스로 한국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분석할 줄 압니다. 한국에 대한 인식 수준이 아주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외국 학문을 공부하는 수준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 교수는 학생들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 보였다. 잘 키운 자식 자랑하는 부모의 모습 같았다. 한국학과 학생들은 1년간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오는 커리큘럼이 있다. 판문점을 방문하며 한국의 분단을 이해하고 서원을 방문하고, 또 통도사 같은 큰 절에서 템플스테이를 하면서 전통문화를 익힌다. 그런데 여전히 고민이 있다.
"한국에 온 학생들로 서울에서 수업하기가 힘들다고 해요. 교환학생 대상의 수업내용이 한국을 홍보하는 수준에 그친다는 거죠. 그래서 저는 가능하면 그런 수업은 피하라고 말합니다."
아울러 그는 해외 한국학이 발전하려면 국내의 시각도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제 우리는 수적인 성과에 만족할 단계는 지났다고 봅니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이렇게 말하죠. '우리가 유럽에서 학생 수가 제일 많다, 혹은 규모가 제일 크다' 등의 자랑을 내놓는데, 이제는 그런 이유로 한국학 발전을 가늠할 단계는 지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숫자나 규모 면으로 점수를 매기려고 한다면 중국학과나 일본학과에 비해서 정말 미미한 정도니까요. 이제는 질적인 도약을 모색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학문적으로 한국학을 정립해야 할 시기가 왔습니다."
국내에서 독일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통일을 이룬 나라, 유럽의 리더로서 독일,훌륭한 롤 모델이다. 이제는 파리나 뉴욕이 아니라 베를린으로 가방을 챙겨 떠나는 젊은이들도 많이 보인다.
"하지만 저로서는 한국에서 독일 사회를 이상화시키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한국에서 독일을 보는데 너무 단면으로만 보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가령 독일의 어떤 제도가 좋다고 할 경우, 그것만 따로 떼어서 보려고 하는데, 독일 사회 전체 맥락에서 봐야 하거든요. 전체 메커니즘이 잘 작동될 때 제도가 힘을 발휘하게 된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독일 통일 문제를 통일 비용 문제로만 보려는 관점이나, 메르켈 총리가 유럽의 리더로서 이뤄낸 부분만 이야기 하고 싶어 합니다. 독일발전에는 여러 단계의 변화가 있어왔는데 시간상의 역사성을 안에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은정 교수는 서울에 자주 온다. 이번 방문은 베를린자유대 총장을 수행하기 위해서다. 수행단으로 참가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한국-독일 외교자문 위원회의 독일 측 자문위원인 그는 독일 대통령 방한과 외무부 장관 방한 때도 독일 측 수행단으로 왔다. 독일에서 한국학을 하는 학자로서 떠안아야 할 책무라고 생각한다.
"우리 학과가 베를린에 있다는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저희가 정치사상 쪽이다 보니 한국 정치에 대한 문의를 많이 받지요. 그에 대한 코멘트를 해주는 일이 또한 저의 일입니다. 그래서 제가 한국과 독일 그 중간에 있다고 생각이 들어요. 그전에는 정치학자로서 한국을 평가하던 관점이, 이제는 독일 사회와 한국을 연결해서 보려는 관점으로 바뀐 거 같아요. 무엇보다 학자로서 양쪽 사회를 같이 볼 수 있다는 게 큰 이점이 됩니다. 새로운 연구 과제, 호기심 그런 것이지요."

▲ 권은정 전문 인터뷰어. ⓒ프레시안(최형락)
늘 바쁘게 움직이니 언제 연구할 시간이 있을까 보이지만, 이 교수는 '한국을 중심으로 한 서원연구'를 몇 년째 진행 중이다. 오는 5월에는 중국, 일본, 베트남 등 여러 나라 서원연구자를 베를린에 초청해 학술대회를 개최할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총 12년간 진행되는 것이다. 비교적 시간에 쫓기지 않고 연구할 수 있어서 좋다. 그런데 그가 이번에 아카데미 회원이 되면서 가장 기쁜 이유는 마음 놓고 연구에 매진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이다.
"학술원에서는 연구 프로젝트에 대한 지원에 시간적 제한이 없습니다. 라이프니츠 전집 같은 프로젝트는 지금도 100년 넘게 진행되고 있으니까요. 저는 북한에 남아있는 서원을 연구대상으로 해서 그곳에 남아있는 고문서 등 방대한 자료들을 디지털화하는 작업도 구상하고 있습니다."
이은정 교수는 언제나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그에게 부담된 과제도 많지만 무엇보다 그가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일이 많지만, 그래도 그전과 달라졌어요. 이제는 하고 싶은 것을 찾아서 갈 수 있는 여력이 생겼으니까요. 제가 하고 싶은 연구를 하면서 기운을 충전해요. 공부할 때가 제일 힘이 나요!"
이제 '일가를 이룬 학자'라고 불러도 될 만한 독일 학술원 정회원 이은정 교수에게서 이상하게 대학생에게 어울리는 '학구열'이 느껴진다. 그것도 아주 신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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