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학교라 좋겠다고요? 눈물의 나날이랍니다
by 이아현·박세진
![[사진=브랭섬홀아시아]](http://tong.joins.com/wp-content/uploads/sites/3/2017/02/beulaengseomholasia_01_.jpg)
‘“금수저들은 좋겠다. 쟤들은 돈이 많아서 학교도 편하게 다닐거야.”
‘국제학교’라고 하면 항상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선입견이다. 하지만 이런 선입견과는 달리 국제학교에 재학중인 고학년 학생들은 여느 고교생과 같이 대입 문제로 꽤나 골머리를 앓고 있다.
제주도에 위치한 브랭섬홀 아시아 학교는 IB Diploma(이하 IB DP로 표기)라는 교육 과정을 수료해야만 고등학교 졸업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교육 과정을 거친다는 것은 마치 가시로 둘러싼 산을 오르는 것처럼 험난하다. IA(수행 평가), IOC(구술시험), Written task(글 쓰기), TOK(철학), Extended Essay(논문) 그리고 IB exam(아이비 시험)이라는 많은 과정들을 거쳐야만 한다. 국제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 하루 하루를 눈물로 버티는 11학년(고2) 학생 한명과 12학년(고3) 학생 두 명을 만나보았다.
권민아 (브랭섬홀 아시아, 11학년)
![[사진=브랭섬홀아시아]](http://tong.joins.com/wp-content/uploads/sites/3/2016/11/11403270_1087632287918345_8602643548432376124_n.jpg)
-이제 11학년이 된지 약 반년 정도 지났을 텐데요. 지금까지의 IB DP 생활은 어떤가요?
“처음 학교에 들어왔을 때는 걱정을 수도 없이 했던 것 같은데, 생각보다 잘 해내고 있는 것 같아 스스로가 대견스러워요. 외국에서 학교생활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지라, 즐겨보던 10대 영화처럼 친구들과 어울리고 파티하는 생활을 할 거라고 기대하는 부분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와보니 과제의 연속, 시험의 연속이라 파티는 졸업하기 전까진 물 건너간 듯 싶네요.”
-한국학교에서 전학 온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국제학교에 처음 들어왔을 때 느낀점은 뭔가요.
“일단 학생마다 수업 스케줄이 다르다는 점이 신선했어요. 대학에 한 단계 가까워진 느낌이랄까. 대학 강의처럼 매시간 이동수업을 하는 것도 한국 학교와 굉장히 비교되는 것 같아요. 한국 학교처럼 기말고사, 중간고사가 몰려있는 게 아니라 과목마다 진도에 따라 시험을 치는 것도 차이점 중 하나인 것 같아요. 또 학생들이 공부 외에도 교외활동을 성적 관리 만큼이나 잘해야 한다는 것도 충격적이었어요.”
-한국 학교와 국제학교에서의 삶이 많이 달라졌나요?
“한국 학교에서의 저는 뭐든 적당히 하는 학생이었어요. 하지만 여기서는 적당히 하게 되면 죽도 밥도 안 된다는 걸 깨달았어요. 학생 스스로 하도록 자율성을 준다는 것이 가장 인상 깊었어요. 사실 저는 한국 학교에서 공부했을 때는 성취감이라는 것을 느끼기 힘들었어요.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요시하는 느낌이었거든요. 하지만, 여기서는 제가 학기 중에 하는 모든 것들이 점수에 반영되기 때문에 과정을 인정해 주는 것 같아요. 특히 과정을 중요시하는 IB라 더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는 듯해요. 또 한국학교랑 비교되는 점은 학생들에게 생각할 기회를 준다는 점이에요. 국어 수행평가로 ‘성’을 주제로 한 소설을 쓴다거나, 미술 시간에 자신 표현해보라는 추상적인 주제는 만나볼 수 없었던 경험이었거든요. 수업시간에 몰래 그림을 그리거나 생각을 끄적일 때 쓸데없다고 평가되던 것들이 국제학교에서는 아이디어가 되고 제가 돋보일 기회가 되었다는 것이 가장 진귀한 경험이었어요.”
![[사진=브랭섬홀아시아]](http://tong.joins.com/wp-content/uploads/sites/3/2017/02/2013110600143002010011752_.jpg)
-가장 어려웠던 점과 적응하기 위해서 한 노력은?
“생각할 기회를 준다는 장점이 가끔 단점이 될 때가 있어요. 제가 적는 글자 하나하나, 아이디어 하나하나가 평가되다 보니 무엇 하나 대충 할 수가 없어 항상 힘들어요. 그리고 과제 외에도 처음 접해보는 EE나 TOK 등 할 게 너무 많아서 사실 좀 벅차기도 해요. 한국의 교육과정을 밟으면서 논문을 쓰거나 철학을 접할 일이 극히 드물잖아요? 사실 아직도 철학 수업시간에는 수업 내용의 절반을 이해하기 힘들어요. EE는 아직 시작하지 않았지만, 주제를 너무 구체적으로 잡아도 안 되고 포괄적으로 잡아도 안 되기 때문에 주제를 정하는 것부터 난관이에요. 또한, 과정이 중요시되는 만큼 작은 과제 하나까지도 신경을 써야 하니까, 과제가 많은 주에는 극도로 예민해져 있고 부담이 많아요. 매주 중간고사 혹은 기말고사를 보는 기분이에요.”
-어떻게 적응했나요.
“IB DP 커리큘럼에 적응하기 위해서 특별히 한 것은 없어요. 다만 모든 학교에서 하는 활동에 충실히 하려고 노력했어요. 심지어 기숙사의 조그마한 행사라도 빠지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구들도 사귀게 될 수 있었고 수업에도 더욱더 적극적으로 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또 충실하게 행동하다 보니 수업에 뒤처지는 경우도 없었고요. 그래서 저는 무엇이든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곧 IB DP에 입문하게 될 10학년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IB DP는 선행으로 될 수 있는 교과 과정이 아닌 것 같아요. 물론 마음이 조급하면 속에 들어있는 내용을 살짝 훑을 수야 있겠지만, 막상 부딪혀 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거든요. 일주일에 내신에 들어가는 시험이 2개가 있고, 과제가 서너 개 있는데 그걸 학원에서 준비해 줄 수 없으니까요.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방법을 연습해 오면 좋겠어요.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하고, 남는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한다는 말이에요. 공강 때 주어진 시간을 허투루 쓰면 그 하루가 망가지곤 해요. 매번 후회하기 때문에 꼭 말해주고 싶어요.”
박세린 (브랭섬홀 아시아, 12학년)
-올해 5월에 졸업을 앞두고 있는데요, 11학년부터의 IB DP 생활은 어땠나요.
“10학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들이 한 번에 쏟아지더라고요. 모든 학생이 시간표가 달라서 한 과목에서 그룹 과제가 주어지면 서로의 스케줄을 이해해주고 맞추는데도 많이 고생했고요. 이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고 싶은 대학을 정해야 하는 시기가 되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 받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하지만 DP 생활이 거의 끝나가고 있는 지금, 언제 시간이 이렇게 지났나 싶을 정도로 잊지 못할 추억이 생겼어요. 어쩌면 굉장히 새롭고 낯선 제주도라는 섬 안에서 가끔은 제주 라이프와 함께 선생님들 그리고 친구들과 어울려 IB DP 생활을 더 즐겁고 새롭게 보내고 잘 버텨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일반학교에 다니다가 이 학교에 10학년에 들어왔는데 국제학교에 처음 들어왔을 때 느낀점은?
“아무래도 낯설고 새로웠죠. 국어 수업 외에는 모두 영어로 이루어졌고, 시간표 자체도 일반 학교와는 달랐어요. 네 과목 정도가 끝나면 그 이후에는 거의 항상 방과 후 활동이 있었어요. 대부분의 학생은 하나 정도의 운동부에 가입되어 있었고요. 일반 학교에서는 모든 수업에 교과서가 필요했다면, 여기서는 노트북이 학생들과 한 몸이 되었고, 수필을 쓰거나 PPT를 만드는 것이 거의 일상이었죠. 각종 스포츠 대회, 승마, 학교 연극 준비, 국내 및 해외 봉사 등과 같이 일반고를 다니면 쉽게 하지 못할 활동도 있었죠. 약 5개월간 경험한 일반고 생활과는 비교했을 때 국제학교 생활은 적어도 80% 이상은 달랐다고 생각해요. 학교도 학교지만 처음 시작해본 기숙 생활 때문도 아닐까 싶네요.”
-적응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요?
“제일 먼저 한 것은 친구 만들기예요. 아무에게나 먼저 말을 걸어보고 친절하게 설명해준 친구 곁에 있으려고 노력했어요. 그러다 보니 그 친구가 함께 밥을 먹는 친구들과도 친해질 수 있었고, 그 친구의 룸메이트와도 친해지게 되었죠. 그러면서 학교생활이 점점 즐거워지기 시작했어요. 스포츠 아카데미에도 많이 들어갔어요. 운동하는 것을 워낙 좋아하기 때문에 학교에 적응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또, 친구 사귀기에도 일거양득이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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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P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요?
“한번에 여러 과제를 끝내는 게 정말 어려웠어요. 모든 과제가 대입에 반영되기 때문에 부담감이 어마어마했죠. 특히 12학년 첫 학기 때는 EE(논문) 와 TOK(철학)를 끝내기 시작하고, 모든 과목에서 IA를 끝내야 하고 게다가 대학 원서 작성까지. 그리고 제가 무엇을 전공하고 싶은지에 대한 확신도 없고, 선호하는 학교도 딱히 없는 상태였어요. 그래서 그땐 미래에 대한 꿈이 확실한 친구들이 제일 부러웠어요. 너무 답답해서 거의 날마다 혼자 울 정도로 정말 매우 힘들었어요. 이제는 IB 시험을 앞두고 있지만, 더 이상 대학 원서를 작성하지 않아도 되고 모든 IA가 다 끝난 상태라 훨씬 나아요.”
-IB DP 공부를 하기 위해서 특별히 다른 비결이 있다면.
“첫째, 친구들과 공부 시간을 정해서 함께 도서관이나 MS Pod(학교건물)에 다니기. 하기 싫어도 친구랑 가기로 했으니 갈 수밖에 없거든요. 둘째, 다이어리 이용하기. 확실히 다이어리에 그날 해야 할 일들과 과제 제출일, 선생님과의 미팅 시간, 학교 행사 등을 적어놓고 항상 가지고 다니면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었죠. 셋째, 즐거움의 시간 꼭 가지기. 친구들과 2주에 한 번씩은 저녁을 먹으러 외출을 하고, 요가실에서 한 시간 정도 노래방에 온 것처럼 노래를 틀고 신나게 놀았죠.”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열심히 공부하고, 필사적으로 놀 거리를 찾아라! 저는 너무 힘들고 바쁠 때 오히려 놀기 위해, 그리고 자기 위해 더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러다 보면 이루고 싶은 것도 성취하게 되고, 놀기도 재밌게 놀아 잊지 못할 추억거리들이 쌓이게 됐죠. 이렇게 지내다 보면 시간은 정말 빨리 지나가요. 또, 그때 하지 않으면 이후에는 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무언가를 해볼 기회가 찾아오면 꼭 해보길 바라요. DP가 정말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다 해낼 수 있어요. 그러니까 벌써 기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지인 (브랭섬홀 아시아, 12학년)
-5월 졸업을 앞두고 있는데요. 11학년부터의 IB DP 생활은 어땠나요?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를 만큼 공부해야 할 것이 많았어요. 모든 학생이 그렇듯 방학이나 주말 외에는 거의 쉴 틈 없이 과제와 시험공부에 몰두했어요. 미국 대학을 가기 위해선 SAT나 ACT(미국 수능 시험)도 준비해야 했기에 하루하루를 바쁘고 정신없이 보냈던 것 같아요. 그래도 논문 쓰기, 대학 레벨의 과목을 배우기 등은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되었던 것 같아요. IB 국제 학교는 IA(수행 평가)와 EE(논문)라는 글쓰기를 되게 많이 요구하는데요. 오랜 시간 동안 글쓰기를 많이 하다 보니 대학 원서를 보다 더 순조롭게 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DP를 지금까지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뭔가요?
“많은 것을 한꺼번에 병행하는 것이요. 수행 평가도 하면서 시험공부도 병행해야 하니 몸도 마음도 더 지치는 것 같아요. 한 가지 더 말하자면 CAS라는 교내 활동까지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하려다 보니 체력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아주 힘들었던 것 같아요.”
-IB DP 공부를 하는 특별한 비결이 있나요.
“저는 일단 flex time(자습 시간)을 잘 활용해 과목 선생님들한테 찾아가서 수업시간에 이해가 안 됐던 부분이나 어려웠던 부분들을 바로바로 질문하고 과제들이나 시험 성적에 대해 피드백을 받았어요. 끊임없이 과제가 쏟아지기 때문에 한 번 미루면 끝이 없거든요. 몸이 고단하고 피곤해도 그 날 정해진 양을 정해 마무리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또, 건강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서 저는 과제가 많아도 잠을 많이 자려고 했고, 밥은 꼭 챙겨 먹었어요.”
-후배들에게 해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일단 미국 대학을 목표로 한다면 SAT나 ACT 같은 학교 외에 필요한 시험은 모두 최대한 미리 끝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12학년 때는 대학 원서 쓰는데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적어도 11학년 말까지는 끝내놔야 마음이 편해요. CAS 활동 또한 150시간을 다 채우기 위해서는 11학년 초반부터 꾸준히 해야하고요. 대학 조사나 선호하는 대학 후보 리스트 작성 그리고 대학 원서를 쓰는 것도 늦어도 11학년 여름에는 시작해야 좋을 것 같아요. 때로는 마음도 몸도 쉴 수 있게 취미 활동을 하거나 친구들과 함께 제주도 맛집 탐방을 하며 스트레스를 풀어도 좋고요.”
글=이아현·박세진(제주 브랭섬홀아시아 11) TONG청소년기자 구억리지부
사진=박세진
단 한 명을 위한 ‘독서 주치의’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사적인 서점’은 예약제로 운영된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열리는 서점에서는 손님의 취향과 관심에 맞는 맞춤형 책을 처방한다.
매주 <시사IN> 편집국으로 들어오는 신간 수십 권을 검토하다 보면 종종 갈증이 느껴진다. 불특정 다수에게 소개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기준으로 합당한 책을 골라야 한다. ‘나’라는 개인의 취향과 선호를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우선순위가 될 수는 없다. 독서에는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남이 아닌 나를 위한 독서를 한 적이 언제였는지 가물거렸다. 자꾸만 가난해지는 마음이 문득 걱정됐다.
‘사적인 서점’의 책 처방 프로그램을 신청한 건 그 때문이었다. 신청서의 빈칸을 메우는 일은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이름과 연락처 등을 빠르게 메워나가다가 ‘좋아하는 책 세 권을 꼽아주세요’라는 문항 앞에서 오래 서성였다. 소설가 김경욱의 <위험한 독서>(문학동네, 2008)를 읽다가 그어둔 밑줄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당신의 독서 목록은 그 자체로 당신의 자서전이고 영혼의 연대기이다”라던. 내가 읽어온 책은 무엇보다 나라는 사람을 고스란히 비추는 거울이다. 약간의 수치심을 달래며 고심 끝에 세 권의 목록과 그 이유를 적어 제출했다. 몇 시간 뒤 메일로 방문 시간이 공지됐다.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사적인 서점은 한 사람만을 위한 예약제 서점이다. 오픈데이로 운영되는 토요일을 제외한 나머지 엿새 동안은 오직 한 명만을 위해 열린다. 건물 입구의 작은 입간판을 제외하곤 따로 간판을 달지 않았다. 일반 서점인 줄 알고 무작정 방문하는 손님을 사전에 거르기 위해서다. 사적인 서점의 주인 정지혜씨는 “이 공간을 이해하는 사람들과 천천히 가고 싶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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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윤무영 사적인 서점의 주인 정지혜씨(왼쪽)는 “책에 대해 질문하면서 다른 삶을 이해하게 된다”라고 말했다. |
사적인 서점의 아이디어는 덴마크의 ‘주치의 제도’에서 얻었다. 덴마크 국민은 모두 국가가 지정해준 주치의가 있다. 한번 정해지면 의사가 은퇴할 때까지 쭉 이어지다 보니 3대가 한 주치의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 보니 의사는 자연스럽게 건강뿐만이 아니라 삶과 일상까지 일정 부분 돌보게 된다. 편집자로, 또 서점 직원으로 일했던 정씨는 서점도 그런 역할을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책 처방 프로그램’을 사적인 서점의 콘셉트로 잡은 까닭이다. 베스트셀러나 권장 도서 대신, 대화를 통해 손님의 취향과 관심에 맞는 독서 차트를 만들고 맞춤형 책을 처방하면 어떨까. 삶을 책으로 풍요롭게 꾸려나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지 않을까.
책을 처방하는 과정은 질문을 선물하는 일
지난 4개월 동안 별다른 홍보 없이도 150명의 손님이 알음알음 찾아와 정씨에게 책을 처방받았다. 한 시간가량 진행되는 프로그램의 가격은 5만원이다. 언뜻 비싸게 느껴지지만 정씨가 들이는 품과 시간을 생각하면 비싼 가격은 아니다. 5만원에는 책값 및 배송비, 찻값, 정씨와 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는 이른바 상담 시간이 포함되어 있다.
정씨도 처음에는 고민이 깊었다. “책을 정가에 사는 것도 부담스러워하는데 이게 될까. 한 명도 예약 안 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많았다.” 한동안은 3만원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가격이 1만5000원 넘는 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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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윤무영 |
처방하기가 쉽지 않았다. 손님에게 처방하고 싶은 책이 비싸면 걱정이 앞섰다. 무엇보다 스스로 지치지 않으려면 지속가능성을 생각해야 했다. 3개월간 운영하면서 확신이 생겼다. 1월부터 이용료를 5만원으로 올렸다. 손님은 오히려 늘었다.
상담이 끝나면 대략 열흘 후 택배로 처방 책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책 복용법’도 동봉된다. 정씨는 손님과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떠오르는 책 네다섯 권을 차트에 메모한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그 책을 다시 읽는다. 읽지 않았지만 검토했던 책이 떠오르면 그 책도 찾아 읽는다. 그리고 편지를 쓴다. 왜 이 책을 골랐는지, 이 책을 손님이 어떻게 읽으면 좋을지 등이 주요 내용이다. 권하고 싶은 문장을 발췌하기도 하고 때로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곁들인다.
신청서의 질문이 그러했듯이, 독서 차트를 작성하기 위해 정씨가 던지는 질문도 간단치 않았다. 손이 자주 가는 분야의 책이나 피하게 되는 책, 책을 읽는 이유 등을 묻는 식이다. 정씨가 주로 하는 일은 책 처방이지만, 실은 질문을 선물하는 일이기도 했다. “저나 손님이나 서로에 대한 사전 지식이나 편견이 없으니까 더 말하기 좋은 거 같다. 이게 재밌는 지점인데 저는 책에 대해 질문하는데, 그 속에서 사람이 드러난다. 그렇게 다른 삶을 이해하게 되고 그런 경험을 또 다른 손님과 나눌 수 있다.”
정씨는 자신이 참여했던 한 독서모임에서 애거사 크리스티의 <봄에 나는 없었다>(포레, 2014)를 읽었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추리소설을 한 번도 읽어본 적 없었기 때문에 작가 이름 앞에서 망설였다. 1944년 영국에서 출판된 이 책은 추리 작가로 명망이 높았던 작가가 메리 웨스트미콧이라는 필명으로 썼던 심리소설이다. 50년 가까이 실제 저자인 애거사 크리스티의 이름은 비밀에 부쳐졌다. 책장을 넘기던 정씨는 이 책을 읽으며 자신의 편견을 마주할 수 있었다. “‘내가 이런 식으로 놓치고 있는 아까운 책이 얼마나 많을까’라고 생각하니 모든 책이 다시 보였다.” 독서 차트를 꼼꼼히 작성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손님이 어떤 책을 읽어왔는지, 또 어떤 책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파악해 되도록 의외의 책을 골라주고 싶다.
손님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사적인 서점을 찾는다. 원래 책을 많이 읽는 손님도 오지만 그보다 더 반가운 손님은 아직 책을 ‘즐겁게’ 경험하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책을 별로 안 읽었지만 관심은 있는 사람들, 뭘 읽어야 좋을지 모르는 사람에게 ‘입구’가 되고 싶다.” 정씨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책을 대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책에서 의미와 가치를 찾으려고 한다. 자못 엄격하다. 영화나 드라마 한 편을 보는 일에는 그러지 않으면서 책에서는 꼭 ‘무언가’ 얻어야 한다고 느낀다. 유명한 책이나 고전류를 읽지 못했다는 부채감도 다들 있었다. 정씨는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거나, 책 속에 길이 있다거나 같은 말들이 오히려 사람과 책을 멀어지게 만드는 건 아닐까 싶다”라고 말했다. 억지로 읽기보다 한 권이라도 재미있게 읽는 경험, 사적인 서점은 그 경험을 파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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