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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아닌게 있었나? '4차 산업혁명'의 허상 - 대선주자 누구도 '노동'을 말하지 않는다

일취월장7 2017. 2. 14. 11:56

'혁명' 아닌게 있었나? '4차 산업혁명'의 허상

[서리풀 논평] 4차 산업혁명은 정치일 뿐, 누가 '말'을 만들어내나?
시민건강증진연구소      
2017.02.13 11:51:24


1. 제4차 산업혁명은 정치다

대선 주자 몇 사람이 (이른바) 제4차 산업혁명을 둘러싸고 티격태격했다. (☞관련 기사 : 4차 산업혁명 놓고 문재인 "정부 주도" 안철수 "민간 주도")


그 말싸움의 자초지종을 따질 생각은 없다. 누구 말이 맞는지, 누가 더 열심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대통령 선거에 나서는 사람들이 그 말을 입에 올리고 논쟁을 벌였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제4차 산업혁명이 이미 한국 정치로 진입했다는 증거.

경과와 내용, 우열을 따질 수 없는 것이, 처음부터 뜬구름 같은 말과 개념이다. 누구한테 물어도 어지럽고 모호하다. 인공지능처럼 그래도 어느 정도 실체가 있는 말이 아니라, 여러 가지를 뒤섞어 말과 개념을 '만들어내는' 중이어서다. 

이 개념을 만들고 전도사 노릇을 한다는 클라우스 슈밥의 말을 들어도 희미하기는 마찬가지다. 청와대에서 버티기를 하는 그분도 읽었다는 <제4차 산업혁명>(송경진 옮김, 새로운현재 펴냄)을 봐도 그렇다.  

그는 제4차 산업혁명이 진행 중이라는 근거로 다음 세 가지를 들었다.

속도: 제1~3차 산업혁명과는 달리, 제4차 산업혁명은 선형적 속도가 아닌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전개 중이다.  

범위와 깊이: 제4차 산업혁명은 디지털 혁명을 기반으로 다양한 과학기술을 융합해 개개인뿐 아니라 경제, 기업, 사회를 유례없는 패러다임 전환으로 유도한다.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의 문제뿐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도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시스템 충격: 제4차 산업혁명은 국가 간, 기업 간, 산업 간 그리고 사회 전체 시스템의 변화를 수반한다.  

우리는 기억한다. 인터넷을 비롯한 정보통신 기술이 막 발흥할 때도 '혁명'이 등장했고, 휴먼 지놈 프로젝트가 진행될 때도 마찬가지였다. 속도, 범위와 깊이, 시스템 충격으로 요약된다는 4차 산업혁명의 특징은 고유하거나 독점적인 특징이라 보기 어렵다. 최근 몇십 년간 늘 '혁명'이 되풀이되었고 늘 '유례'가 없었다.  

그 때문에 의심을 넘어 확신한다. 과거가 아니라 현재나 미래를 혁명으로 표현하고 개념화하는 행위는 늘 정치적이다. 정치는 어떤 일정한 방향으로 권력을 행사하려는, 그리하여 특정한 미래를 만들고 구성하려는 의도적 행동을 포함한다. 지금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바람이 바로 그렇다.  

특히 한국에서 제4차 산업혁명은 '성장의 정치'를 벗어나지 못한다. 신성장동력, 새로운 먹거리, 국제경쟁력 등 지겹도록 익숙한 정치, 경제적 '주술'의 전통을 계승하려 한다. 더 구체적으로는 지난 정권이 내세웠던,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허상인, 녹색성장과 창조경제를 이어받을 유력한 후보다. 장담하지만, 지금 이대로 가면 모든 대선 후보가 제4차 산업혁명의 전도사로 나설 것이다.  

2. 제4차 산업혁명은 정치화된 경제다 

'제4차 산업혁명'은 (사회학자 밥 제섭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의 '경제적 상상물(economic imaginary)' 또는 가상의 경제적 실체다. 가상이지만 경제적 실체(또는 실재)라고 하는 이유는 단순한 개념과 이론을 벗어나 실재하는 경제, 그리고 다양한 비경제적 활동과도 연관되기 때문이다.  

한 가지 예를 든다. 보건의료에서 제4차 산업혁명의 실례로 자주 거론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인공지능 의사('왓슨')다. 인공지능을 진단과 치료에 활용하는 것은 애초 과학과 지식의 영역이었지만, 경제적 가상으로 바뀌는 순간 수많은 사람과 돈, 시간을 '투자'할 대상으로 전환한다. 왓슨은 의료 '시장'에 진입했고 환자들은 새로운 첨단 의학기술을 '구매'한다.(☞관련 기사 : 부산대병원 'AI 의사' 왓슨 도입) 가상의 경제적 실체는 실재하는 경제 활동으로 진화했다. 

범위를 넓혀도 경제적 가상에 기대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2015년 세계경제포럼이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에는 미국 최초의 로봇 약사가 등장하고 3D 프린터로 제작된 간이 최초로 이식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바로 가기 : Deep Shift: Technology Tipping Points and Societal Impact(앞서 인용한 클라우스 슈밥의 책에도 내용 일부가 실려 있다). 


이런 가상을 만난 한국의 정부, 기업, 대학과 연구소는 어디로 움직이고 어떤 실천을 할까?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경제적 가상은 새로운 경제를 만들고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것이다.

경제적 가상에는 다양한 담론적 실천들이 뒤따른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얼마 전까지 지식기반경제에는 인적자원론, 혁신, 학습체계, 지식경영 등이 따랐지만, 제4차 산업혁명에는 (비슷한 차원에서) 빅데이터, 학습, 창의성, 기술 혁신 등이 빠지지 않는다. 흐트러지지 않고 되풀이하는 전통적 담론도 있으니, 투자, 시장 선점, 경쟁력, 교육 혁신, 규제 완화, 고용 유연화 등이 그렇다.  

3. 제4차 산업혁명은 다시 정치다 

한국에서 제4차 산업혁명은 흔히 '주어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메가트렌드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 또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묻는다. 주체는 숨고 중립과 객관을 가장한 폭력적인 질문의 배후에는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도사리고 있다.

불평등은 일차적으로 '누구'의 문제다. 클라우스 슈밥은 제4차 산업혁명이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도" 변화를 일으킨다고 했지만, 우리는 조금 비틀어, 더 능동적으로 누구인가를 물어야 할 것 같다. 누가 제4차 산업혁명을 주창, 옹호, 전파, 강요하며, 그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질문부터 권력이 크고 작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하루가 멀다고 언론과 정부가 제4차 산업혁명을 말하지만, '누구'라는 질문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그 배후에 있는 권력관계는 단순하고 명확하다.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알지 못하고 묻지 못하는 자, 그가 바로 권력을 갖지 못한 자이다.  

여기서 제4차 산업혁명은 어떤 혁명인가 하는 출발 지점으로 되돌아간다. 그토록 혁신(혁명)적인 디지털 기술과 바이오 기술은 난치성 결핵 환자 치료에 활용될 수 있지만 미용 성형에도 쓰일 수 있다. 개발도상국 어린이의 설사병 예방에 적용될 수 있는가 하면, '맞춤형'이라는 이름으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싼 신약을 개발하는 일에 집중할지도 모른다.

제4차 산업혁명의 정치와 경제를 생각하면, 여러 길 가운데에 필시 돈과 이익으로 기울어질 공산이 크다. 그런 결과가 현실이 되면 혁명이란 무엇인가? 혁명은 혁명이되, 자본과 기업, 일부 계층의 이익 혁명에 지나지 않는다면?  

치우친 길을 가서 치우친 결과를 내면, 유리한 자가 더 유리해지는 길이면, 그것은 진보가 아니라 사회적 퇴행이다. 기우뚱한 이익은 상호관계 없이 성립하지 않는다. 일부에게만 유리한 혁명인 한, 그 혁명은 당연히 새로운 불평등, 새로운 양극화의 역(逆) 혁명이다.

완고한 구조를 생각하면, 모든 사람의 보편적 이익에 기여하는 산업혁명이 가능한지 낙관하기 힘들다. 다만, 우리는 정치와 사회가 어떻게 개입하는가에 따라 얼마간 동요하고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이 때 정치(현실 정치가 아니라, 보편적 인간 활동으로서의 정치를 가리킨다)는 그나마 가용한 유일한 수단이다.  

모든 대선은 사회적 합의와 정치적 동의를 만드는 개입 기회다. 이번 대선에서 모두가 제4차 산업혁명을 '선동'할 것이 명확하다면, 어떤 혁명, 그리고 누구를 위한 혁명인지를 함께 밝히라고 요구해야 한다. 뭉뚱그려 그냥 제4차 산업혁명에 멈춘다면, 그 지루한 경제성장주의의 또 다른 판본에 지나지 않는다. 



대선주자 누구도 '노동'을 말하지 않는다

[좋은나라 이슈페이퍼] 경제민주화, 재벌개혁을 넘어 노동으로
박태주 고려대학교 노동문제연구소 연구교수     
2017.02.13 14:35:14


경제민주화라는 이름을 빈 재벌개혁 논의가 한창이다. 5년마다 한 번씩 주기적으로 도지는 바람이랄까 병이랄까 그런 것. 그런데 경제민주화 논의에 ‘노동’이 빠져있다. 그렇다면 뭐가 경제민주화이고 누구를 위한 경제민주화인지, 그리고 누가 경제민주화의 주체인지를 물어야 한다. 경제민주화가 경제적 의사결정과정에 이해당사자가 참가하는 것이라면 노동은 핵심적인 이해당사자다. 노동의 참가를 통해 경제민주화는 비로소 개념을 획득하고 이를 목적 및 수단과 통합시킨다. 

경제민주화의 과정에서 재벌개혁은 우회할 수 없는 외나무다리지만 경제민주화가 거기서 멈추지는 않는다. 노동의 참가를 말할 때 노동은 ‘조직된 노동’으로서 산별노조를 의미한다. 산별노조를 발판으로 성립하는 사회적 대화와 산별교섭, 그리고 경영참가(노동이사제)가 참가의 중요한 통로를 이룬다. 최근 공감대를 넓혀가는 소득주도성장론도 노동시장에서 연대임금('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이 추진되지 않으면 연료 없는 자동차가 되고 만다. 결국 경제민주화가 재벌개혁이나 소득주도성장론까지 포괄한다면 이는 위로부터의 개혁과 아래로부터의 연대가 결합될 때 추진동력을 얻는다. 노동 없는 경제민주화는 그야말로 형용모순이다. (필자) 

'노동'이 빠진 경제민주화 논의  

나는 '재벌개혁 = 경제민주화'라는 시각이 불편하다. 왜 그래야 하는지 논리적 설명도 없이 그렇게 알아들어라는 듯이 우격다짐으로 강요한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재벌개혁이 경제민주화인 것은 맞지만 경제민주화가 재벌개혁에 갇히지는 않는다. 개는 동물이지만 동물이 개가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재벌개혁은 경제민주화의 일부분이고 경제민주화가 거기에 멈춰서도 안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경제민주화의 주체이자 대상인 노동이 빠져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란 실질적인 의미와 절차적인 의미 모두를 포괄한다. 한국 민주주의의 일차적 과제는 실질적 민주주의의 확대가 아니라 최소한의 필요조건만이라도 갖춘 절차적 민주주의를 심화·발전시키는데 있다. 달(Robert Dahl)에 따르면 절차적 민주주의는 공동체의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 모든 사회성원이 그들의 선호와 이해관계를 표출할 수 있도록 '동등하고 효과적인' 참여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것이 실질적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지렛대다. 노동자들은 의사결정과정이라는 절차적 측면에서 배제됨으로써 경제성장의 과실로부터도 배제되어 왔다.

그간 경제력을 독점한 재벌대기업이 경제적 의사결정권까지 독점했다면 이제 그 권한을 해방시켜 노동자에게도 나눠줘야 한다. 기업이나 산업차원에서는 물론 거시적인 정책결정차원에서도 노동이 참여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야 한다. 경제민주화 논의가 재벌개혁에서 멈출 것이 아니라 노동에 가닿아야 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노동의 관점에서, 그리고 오늘날의 맥락에서 경제민주화는 어떤 모습을 띨까. 경제적인 의사결정과정에서 노동이 주체로 서야 한다면 그 구체적인 수단은 뭐며 노동은 그럴 준비나 능력은 갖추고 있을까. 이 과정에서 재벌개혁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이 글은 이런 질문들에 대한 시론적 대답이다.  

ⓒ정기훈


산별체제가 경제민주화와 신성장전략의 주체  

새로운 성장 패러다임이 광범위하게 논의되고 있다.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지만 결국은 소득주도성장(income-led growth) 전략이나 포용적 성장(inclusive growth)으로 되돌아간다. 내가 이해하는 요지는 이렇다. 소득(임금)을 늘려 내수를 키우고 그것을 성장의 엔진으로 삼자는 것이다. 고용이 상품이나 서비스 생산의 파생수요라면 이는 일자리를 만드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소득(유효수요)을 늘리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노동소득 분배율을 높이는 방법이 있고 임금격차를 줄이는 방법(흔히 연대임금이라고 한다.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이 바탕이다), 그리고 기본소득을 포함하여 복지지출을 늘리는 방법이 그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연대임금이다. 연대임금은 노동소득 분배율의 제고를 포함하며 연대임금(1차 분배)이 이뤄져야 복지사회(2차 분배)도 제자리를 잡는다.  

문제는 이런 성장전략을 밀고 가는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것이다. 개혁적인 정권이 들어서면 고속도로가 뚫리듯 소득주도성장전략도 뻗어나갈 것인가. 위로부터의 개혁이 충분조건까지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래로부터 지지되고 동원되어야 한다. 정치적 민주화가 혁명을 필요로 했다면 정치적 민주주의의 시대에 진행되는 경제민주화는 아래로부터의 참여를 필요로 한다. 위로부터의 개혁은 언제든 철회될 수도, 내용이 왜곡될 수도 있다(노무현 정권의 좌절을 보라).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해소하고 연대임금을 실현하는 핵심이 단체교섭이라면 그것은 정부출입금지구역이다.  

노동을 새로운 성장패러다임을 지원하는 주체로 세운다면 그것은 조직된 노동, 즉 노동조합을 통하는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의미를 갖는 게 바로 산별체제다. 산별체제는 기업을 뛰어넘어 산업별 차원에서 노동자 전체의 이해를 대변하는 시스템이다. 참가를 위한 제도적인 장치로는 거시(및 산업)차원의 사회적 대화체제와  산업차원의 교섭체제, 그리고 기업차원의 경영참가(공동결정제도)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산별노조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산별체제라고 부른다.  

산별노조의 정신을 이루는 것이 연대다. 그것이 조합 내부로는 연대임금으로 나타난다면 외부적으로는 사회개혁으로 나타난다(보건의료노조의 의료공공성이나 언론노조의 언론민주화투쟁이 그것이다). 유럽의 경우를 보더라도 산별노조를 만드는 목적은 임금의 극대화가 아니라 임금의 평준화다. 이를 통해 노조는 자본과 권력에 대항하여 투쟁할 수 있는 단결의 물적인 토대를 마련해 왔다.  

노동의 동원 없이 재벌개혁이 가능한가 

산별체제만 형성되면 연대임금이, 그리고 복지사회가 구축되고 새로운 성장패러다임이 작동하는가. 이 과정에서 재벌개혁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먼저 오늘날 노동이 부딪히는 문제의 중심에서 재벌을 뺄 수는 없다는 사실부터 확인해야 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심각한 임금격차의 이면에는 체급이 다른 기업 간의 불공정거래나 수직계열화, 나아가 문어발 경영에다 골목상권까지 파고드는 재벌의 탐욕이 존재한다. 고용유연화가 진행되면서 정규직-비정규직 사이의 임금격차도 확대되고 있다(여기서 재벌소속 노동자의 이야기를 일반화시킬 필요는 없다). 중소기업이 몰락하고 위축되면서 나타나는 또 다른 문제는 청년실업이다. 재벌은 자동화·외주화·모듈화에 더해 해외생산을 통해 스스로의 일자리를 줄이는데다 중소기업마저 위기로 몰면서 경제의 고용창출능력을 갉아먹는다. 

노사관계에 미치는 재벌의 영향도 간과하긴 어렵다. 재벌이 주도한 수출 중심의 성장에는 노조탄압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요소비용을 줄여 경쟁력을 높이기엔 만만한 게 노동이었다. 임금인상률을 낮추고 비정규직을 늘리고 자기의 고용은 줄였다. 그들의 눈에 비친 노조는 파업과 임금인상으로 국민경제를 갉아먹고 온통 제 앞가림에만 급급한 집단이기주의자들의 집단이었다(노조로서는 '뺏기고 욕먹는' 재주 하나는 타고났다). 재벌의 탐욕 앞에서 중소기업이나 노동자, 소비자, 심지어 정부까지 하나같이 빨대꽂이였다. 한 마디로 "재벌? 깡패나 다름없죠"였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경제정책은 물론 산업이나 기업차원에서 각종 의사결정권을 재벌이 독점함으로써 노동조합은 배제되었다는 사실이다. 재벌은 집중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경유착과 시장지배, 그리고 황제경영을 실현했다. 그렇다면 재벌에게 독점된 의사결정권을 제한하지 않고서는 노동이 참여할 공간은 열리지 않는다. 정경유착과 시장지배, 그리고 황제경영의 자리에 사회적 대화와 산별교섭, 그리고 노동자의 경영참가(노동이사제 및 사업장협의회)를 배치해야 한다. 재벌의 의사결정권을 노동이 견제하고 상쇄해나가는 구조다. 노동이 재벌체제에서 임금격차와 실업이라는 멍에를 짊어졌다면 그것을 해결하는 방안은 산별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참여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처럼 노동의 관점에서도, 재벌개혁의 관점에서도 경제민주화가 노동의 참가를 외면하기란 어렵다.  

경제민주화에 이르는 길목의 곳곳에 재벌이 지뢰처럼 도사리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재벌을 개혁하는 권력자원에 노동이 추가되어야 한다는 점도 지적해야 한다. 재벌개혁의 수단으로서는 흔히 재벌개혁법의 제개정과 공정거래위원회나 사법부의 엄정한 법집행을 꼽는다. 이런 의지와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는 묻지 않는다. 몰라서 못 바꾼 것이 아니라 힘이 없어 바꾸지 못했다. 재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윗분’들에게 재벌개혁을 맡긴다는 건 재벌개혁을 포기하는 거나 진배없다. 아래로부터의 권력자원을 동원할 필요가 있다면 조직된 노동, 즉 노동조합이 중시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재벌개혁은 노동조합은 아래로부터 정부를 독려하면서 정부와 함께 주체로 서야 한다.  

정부의 선도적인 개혁이 노정동맹의 고리를 형성한다  

다음 질문은 산별체제는 어떻게 하면 형성할 수 있는가다. 정부가 과연 노동을 필요로 하고 노동과 함께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으며 노조 또한 연대를 내면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기가 십상이다’이다. 
 
새 정부가 노동'개혁'을 실현할 의지나 밀어붙일 힘이 있을 지부터가 의문이다. 핵심은 노동을 대하는 권력의 태도다. 이제는 상식으로 굳어버린 '노동배제의 정치'(politics of labor exclusion)를 '노동포용의 정치'(politics of labor inclusion)로 바꾸는 게 말과 같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안팎으로 엄청난 저항에 부딪힐 것이기 때문이다. 재벌에 포섭된 관료나 정치가들의 저항도 만만찮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산별체제를 수용하고 노동을 재벌개혁, 나아가 경제민주화의 파트너로 삼을 지는 솔직히 말해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간 개혁을 표방한 정치가 예외 없이 노동과의 거리를 정치공학적으로 계산해 온 것이 저간의 사정이었다면 새 정권이 노동을 전면적으로 껴안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정부의 개혁의지나 능력이 모자랄 수 있다는 문제의 맞은편에는 "그럼 노조는 연대를 내면화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이 도사리고 있다. 가령 임금격차의 핵심은 기업규모 간 임금격차고 고용형태별 임금격차다. 그렇다면 대기업노동자가 하청기업 노동자를 '같은 산별노조의 조합원'으로 끌어안을 수 있을까. 국가나 기업으로부터는 배제되는 비정규직을 노조는 '자기 살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일자리만 해도 그렇다. '적게 일하면서 모두가 일하는' 방법은 노동시간을 줄이는 길이다. 그럼 임금이 깎이더라도 노조는 노동시간의 단축을 수용할까. 이는 요컨대 노동조합이 연대의 가치를 내면화시키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소득주도성장론을 정착시키고 경제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충분히 개혁적인 정부와 연대를 내면화시킬 수 있는 노동조합의 동맹을 필요로 한다. 이 둘의 조합을 기대한다는 건 잔디밭에서 바늘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그렇다면 가장 그럴듯한 시나리오는 새정부가 출범하면서 노동개혁이 교착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정부와 국회가 재벌의 눈치를 보는 가운데 노동개혁 입법은 장관의 책상이나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길을 읽고 정부와 노동 사이에는 때 이른 긴장관계가 형성된다. 노동은 개혁 없는 개혁정부를 비판하고 정부는 노조의 제몫 챙기기 파업을 법을 내세워 탄압한다(노동계는 개혁을 큰 틀 속에서 바라보면서 단기적이고 경제적인 이해갈등을 제어할 리더십이 없다). 이 꼬라지 보려고 우리가 개혁정부를 만들었는가에 대한 자괴감이 노동계에 퍼져가며 강경파가 힘을 얻는다. 데자뷰처럼 익숙한 풍경이다. 

농담이 아니다. 정권교체를 예견(희망)하면서도 새 정권의 성공을 예견(확신)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이 실패는 누구의 탓일까. 노동을 전면적으로 껴안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개혁적이지 못했던 개혁정부의 탓일까 아니면 노동시장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스스로의 이익을 절제할 수 없었던 노조의 탓일까. 정부의 개혁과 노조의 연대가 공명하지 않는다면 그 둘 가운데 어느 것이 우선되어야 할까. 

만일 예견된 실패가 현실화된다면 일차적인 책임은 정부가 져야 한다. 둘 가운데 한쪽이 먼저 변화될 필요가 있다면 그 역시 정부다. 힘이 있는 쪽이 큰 책임을 져야하고 먼저 변해야 한다. 상대방에게 배신을 당하더라도 힘 있는 쪽은 그 상처가 크지 않을 뿐더러 여차하면 되로 받은 걸 말로 갚을 수도 있다. 노동이 바뀌지 않은 것을 핑계로 개혁을 거부한다면 그야말로 그건 핑계이거나 좀스런 짓일 뿐이다. 개혁적인 정권이라면 개혁을 하면서 노동으로부터 배신당할 각오도 해야 한다. 노동의 변화는 동학적으로 봐야한다. 지금의 노조가 정태적으로 연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정부의 개혁에 노동이 신뢰를 보낼 수 있다면 노동도 변화를 준비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더딜 수는 있어도 노동조합의 바탕이 연대인 한 그것은 봄이 오듯이 반드시 오고야만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정부의 노력에는 최저임금의 인상이나 비정규직의 보호와 같은 의제 이외에도 산별체제를  세우겠다는 노력도 포함된다. '노동조합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물론 사회적 대화나 산별교섭체제, 그리고 경영참가를 담대하게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또 하나는 조직률을 높이려는 노조의 노력을 정부가 지원하고 판을 까는 일이다. 노조의 힘은 조직률에서 나온다. 노동기본권을 보장하고 정부가 공공부문에서 모범사용자로 행세하고 노동교육을 강화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우리는 노조를 필요로 하는 정부를 필요로 한다. "노조가 힘이 없으면 개혁은커녕 어용노릇도 못한다".  

물론 노조도 우리 사회의 책임 있는 주체로서 우리 사회가 제기하는 질문, 저성장과 양극화에 대해 책임 있게 답변해야 한다. 노조가 언제까지 스스로를 사회적 약자로 코스프레하면서 ‘해 달라’고 요구만 할 것인가도 의문이다. 이제 노조의 언어와 문법도 바뀌어야 한다. 스스로의 사회적 위상을 확인하면서 ‘하겠다’고 책임 있게 말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 새 부대만 필요한 게 아니라 새 술도 필요하다.  

다시 '노동있는 경제민주화'를 향해 

경제민주화를 말하려면 “무엇이 경제민주화인가”라는 질문을 넘어 "누구를 위한 경제민주화인가", "누구에 의한 경제민주화인가"도 물어야 한다. 경제민주화가 재벌개혁을 넘어 노동에 가닿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질문에 담겨있다. 경제민주화는 경제적인 이해당사자가 의사결정과정에서는 물론 그 성과의 배분과정에서도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경제민주화가 재벌개혁을 우회할 수 없다면 직접적인 피해자인 노동이 그 개혁의 권력자원이 되어야 한다. 

이때의 노동은 산별노조를 가리킨다. 산별노조를 기반으로 사회적 대화와 산별교섭, 그리고 경영참가를 배열한 것을 산별체제라고 불렀다. 그것을 이끄는 이념적 노선은 연대다(거창하게 말하면 사회운동 노조주의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의 연대는 일자리의 창출은 물론 비정규직 문제 등 임금격차의 해소, 나아가 복지국가 발전 과정에서 관건이 된다. 소득주도성장론이라는 게, 그리고 경제민주화가 이 정도라고 나는 그렇게 편협하게 이해한다. 

노동개혁, 소득주도성장, 그리고 경제민주화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재벌개혁 논의와 맞닥뜨린다. 바꾸어 말해 새로운 성장담론은 재벌의 자리에 노동을 놓는 것, 국가-재벌의 유착(담합)을 국가-노동의 동맹으로 바꿔놓는 것을 지향한다. 그리하여 경제민주화는 재벌개혁을 넘어 노동에 가닿는다. 노동은 권리가 아니라 권력을 요구한다. 촛불 이전의 논의가 촛불 이후의 논의와 같을 수는 없다. 그것은 노동개혁이나 경제민주화에서도 담대한 사회학적 상상력을 요구한다. 노동 없는 경제민주화는 그 자체로 형용모순이다. 


"월 200만 달러 법니다" 공항에 억류될 뻔한 사연
백수 기자 박상규, 파산 변호사 박준영의 <지연된 정의> 북콘서트
허환주 기자     
2017.02.14 08:27:10


백수 기자와 파산 변호사가 처음 만난 건 2년 전이다. 서로 의기투합해서 형사사건 피해자를 찾아다녔다. 전국 곳곳을 누볐다. 노력한 만큼 돌아오는 걸까. 완도 무기수 김신혜 사건,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 삼례 나라슈퍼 3인조 강도치사 사건 등을 세상에 알렸다. 이들 사건 모두를 재심으로 이끈 것은 그들의 공이 크다. <오마이뉴스> 출신 박상규 기자와 고졸 출신 박준영 변호사 이야기다. 

이들이 맡은 사건 중 익산 택시기사 살인사건은 영화로도 개봉한다. 배우 정우와 강하늘이 주연을 맡은 <재심>이 그것이다. 오는 15일에 개봉한다. 이들의 활동은 지난해 12월 <지연된 정의>(후마니타스 펴냄)로도 발간됐다.  

이들이 다룬 사건의 주인공들은 지적장애가 있거나 배움이 미천했다. 경찰과 검찰은 그런 그들의 '약점'을 이용해 누명을 씌었고 적게는 10년, 길게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아야만 했다. 파산 변호사와 백수 기자는 왜 이들 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걸까. 지난 11일 언론협동조합 프레시안에서는 조합원 교육으로 박상규 기자와 박준영 변호사를 초청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아래 전문.  

그들은 왜 말을 하지 않는가 - 박상규 기자 

과거 기자생활을 하던 때였다, 언론재단에서 미국으로 기자들을 연수 보내주었는데 그 기자들 중에는 나도 포함돼 있었다. 보름 정도의 기간이었다. 한겨레, KBS 등의 매체 기자가 참여했다. 당시 미국 연수에서 나의 고민은 입국심사를 어떻게 통과할까 였다. 나는 영어를 못한다. 부담이 컸다. 해외에 나간 분은 알겠지만 입국심사를 하기 위해 줄을 선다. 그때 나는 백인이 아닌 히스패닉계가 심사해주길 바랐다. 소수민이 소수민의 마음을 이해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백인이 나를 심사했다. 당시가 2007년이었다. 2001년에 발생한 9.11 테러 때문에 미국 입국심사가 무척 까다롭던 시기였다. 그 백인이 내게 물었다. 

"너 얼마 버냐?" 

영어를 잘 못하기에 바짝 마음을 졸였는데, 마침 그 영어는 귀에 들어왔다. 당시 내가 다니던 언론사는 돈을 많이 주는 회사가 아니었다. 한 달에 200만 원 정도 받았다. 그래서 손가락 두 개를 치켜들며 이렇게 말했다.  

"투 밀리언 달러" 

그러자 그 백인 눈이 커지더라. "와우"라는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면서 직업이 뭐냐고 물었다. "저널리스트"라고 하니 또다시 "와우"라고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너무 많이 받는 거 아니냐고 하더라. 그러면서 진짜 '투 밀리언 달러'를 버는 게 맞느냐고 재차 물었다. 착각했었다. 원(won)을 이야기한다는 게 그만 긴장해서 달러(dollar)를 이야기했다. 그런데 정작 그런 사실을 나만 알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되는 질문에 나는 한국에서 200만 달러는 큰돈도 아니라고 했다. 백인은 연신 "와우"를 연발하며 "너 거짓말 하는 거 아니냐, 믿지 못하겠다. 너 지금 수중에 얼마 있냐"는 질문이 이어졌다.  

▲ 박상규 기자. ⓒ프레시안(허환주)


그때 내 수중에는 서울에서 가져온 돈 100만 원이 있었다. 그래서 '원 밀리언 달러'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자 다시 "와우"를 더 큰 목소리로 연발하며 '너는 거짓말쟁이다. 옆으로 빠져 있어라'며 나를 입국심사대에서 나와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조금 있다 동양인으로 보이는 입국심사 직원이 나에게 다가왔다. 지금이야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그때는 등에 식은땀이 났다.  

동양인을 보고서야 내가 무언가 잘못 말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후에도 몇 차례 버벅거린 뒤에야, 그리고 동료 기자들의 도움을 얻고나서야 겨우 입국심사를 통과했다. 이후 미국에 있는 동안에도 나는 헤맬 수밖에 없었다.  

그때 든 생각이 미국에서 내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나 스스로 경찰 등에 사정을 설명할 수 있을까였다. 불안감, 그리고 위축감 때문에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게 외국에서만 적용될까.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이 곳에 있는 프레시안 조합원이라면 우리 사회의 지식인이다. 판을 읽을 줄 안다. 잘못된 것을 두고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닌, 못 배우거나, 가난한 사람, 장애인을 생각해보자. 그 사람들은 과연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을까. 

우리도 그렇지만 말을 제대로 못하고 살았다. 학교에서는 누가 가장 많이 말을 하나. 교장, 그리고 담임선생이다, 교실에서는 공부 잘하는 애가 말을 잘 한다. 그게 아니면 싸움 잘하는 아이다. 공부를 못하거나 싸움을 못하는 아이들은 교실 안에서 위축되어 살아간다. 

사회에 나오면 어떤가. 회사에서는 사장이 제일 말을 많이 한다. 그 밑으로 부장, 과장, 팀장순이다. 이들은 말을 안 시킨다. 회의를 한다고 생각해봐라. 누가 말을 많이 하나. 팀장이 제일 많이 한다. 밑에 있는 직원들은 말을 거의 안 한다. 한다 해도 윗사람 심경이 불편하지 않은 선에서 말한다. 대통령이 탄핵됐는데 이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기자들을 불러 기자회견을 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대통령 혼자만 말하지 않았나. 기자들은 모두 가만히 있었다. 

소통의 답답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불통은 미국 공항에서만 겪는 일이 아니다. 우리 일상에서도 말하는 것에 대한 장벽을 느낀다. 위계에 의한 위화감이다. 그런데 내가 취재했던 삼례 나리슈퍼, 익산 택시 살인 사건을 예로 들어보자. 이 사건에서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들은 대부분 초등학교만 졸업했고 한 명만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나마도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다. 게다가 본인이 장애인이거나 부모 중에 장애가 있었다.  

우리가 한 번 생각해보자. 여러분들이 참여하는 모임이 있다면 이 모임에서 장애인에게 마이크 준 적이 있나.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 사람이 지적장애인이면 더 안 준다. 불편하기 때문이다.  

더 큰 틀에서 이야기해보면, 우리 사회는 못 배운 사람에게 마이크를 주지 않는다. 글을 쓰고 책을 쓰는 것은 한국에서는 권력이다. 대다수는 자기 처지에 대해 말을 잘 못한다. 글은 더욱 그렇다. 

내가 놀랐던 점은 내가 취재한 삼례 나라슈퍼에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간 3명에 대한 재심이 결정된 날이었다. 많은 취재기자들이 그들의 입만 바라보았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들에게 뭐라도 말을 해보라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아마 속으로 그랬을 거다.  

'염병, 언제 말을 시켜봤어?'  

살아온 세월이, 우리 사회가 그들을 그렇게 만든 거다. 우리는 모임에서 그런 분이 오면 왕따를 시킨다. '저 사람이 내게 말 시키면 어쩌지?' 이러면서 불안해 한다. 하물며 우리도 그렇게 대하는데 그런 사람이 경찰에 갔을 때, 검찰에 불려갔을 때는 어떻겠나. 긴 설명이 필요 없다.  

그들에게 씐 누명과 관련해서 재판관은 묻는다. 왜 검찰에서 말하지 않았느냐고. 하지만 그들은 말을 안 한 게 아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말을 했다. 그들은 검찰 진술조서에서 '삼례에 가 본적 있느냐'는 질문에 '이 사건 터지고 가봤다'고 진술한다. 경찰의 현장조사 때 가본 것을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어쨌든 그 사람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검찰은 이들에게 '어딘가 좀 모자란 듯 횡설수설하다'고 평가한다. 이들은 최대한 자신의 말을 했으나 안 받아들인 셈이다.  

이들이 국선 변호사를 만났을 때, 변호사에게도 말한다. 자기들이 아니라고... 그러자 변호사가 이렇게 말한다.  

"이러시면 곤란해요. 그냥 인정하고 빨리 갔다 오세요." 

그들의 말을 모두 차단한 셈이다. 사회의 강자 입장에서, 그리고 배운 사람 입장에서 그들의 말을 재단한 것이다. 곧 개봉하는 영화 <재심>의 실제사건인 익산 택시기사 사건도 마찬가지다. 누명을 쓴 최 씨는 15살에 교도소에 갔다. 답답했다. 내가 이 친구를 만난 첫인상은 답답함이었다. 말을 안 했다. 죄도 안 짓고 10년이나 복역한 심정이 어떠냐고 물으면 보통 '죽을 뻔했다'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처음 몇 년은 힘들었는데 지나니 살 만해요."  

사실 그게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다. 따지지도 않는다. 왜 못 따지냐고 하는 건 우리의 시각이다. 그 사람은 계속 살인을 부인하다 1심에서 15년형을 받았다. 국선 변호사가 그러지 말고 선처를 요구하라고 해서 2심에서 '제가 그랬다. 봐달라' 해서 5년을 깎아 10년형을 받았다.  
 
이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가 법원이 재심을 열지 말지를 결정하는 날이었다. 누명을 쓰고 10년 동안 교도소에서 지낸 그였다. 그런데 재심에는 검사가 나오지도 않았다. 판결 판사는 세 명이 나와야 하는데 한 명만 나왔다. 그러면서 한가하게 '이 재판을 해야 하느냐'고 박준영 변호사에게 묻더라. 재판관이 아직 기록을 보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속에서 부아가 치밀었다. 재심 신청을 한 지 2년이 지난 때였다. 그런데 아직 기록도 보지 않았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 재판관이 최 씨에게 질문했다.  

"아니, 사람을 죽이지 않았는데, 어떻게 사람을 죽였다고 허위자백을 했나요?"
"경찰이 때려서 그렇게 자백했습니다." 
"아니 아무리 때려도 그렇지 살인죄가 얼마나 무거운데 허위자백을 합니까?"
"....." 

그러자 최 씨는 대답을 못 했다. 이 친구가 나중에 한마디 했다. "지가 한 번 맞아보지..." 사회의 약자는 그렇게 무시되기 일쑤다. 배운 사람의 잣대로 약자를 판단하고 재단한다. 

문제는 삼례나 익산처럼 누명을 쓴 사법피해자들은 판사나 검사, 변호사, 검찰 등의 실수, 그리고 악의적 조작으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약자를 무시하는 사회에서 이런 누명은 태어나는 듯하다.   

나도 똑같다. 과거 <오마이뉴스> 기자로 일하던 시절에 억울해서 언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많이 접했다. 언론사까지 찾아오는 사람은 이미 법원, 검찰, 변호사는 이미 가보고 만나본 사람들이다. 밀리고 밀려서 온 사람들이다. 보자기 하나 분량의 사건 기록을 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 기자들이 잘 들어주리라 생각하나? 전혀 아니다. 10분 듣다가 '저희가 못 할 거 같다'고 한다. 그러면 '기자님 이것만 읽어주세요'. 그러면서 자료를 두고 간다. 읽지 않는다. 

생각해보라. 밀리고 밀려 여기까지 찾아온 사람들인데, 그마저도 상대를 안 한다. 요즘 종이신문 거의 안 보지만, 펼쳐보라. 대부분이 정치 이야기, 기업 이야기, 시장, 구청장 이야기다. 힘 있는 강자 이야기가 끊임없이 반복된다. 약자의 이야기는 다루지 않는다.  

언론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 즉 혼자 말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해 말해야 하는데. 지금의 언론 대부분은 굳이 말 안 해줘도 되는 이들을 위해 말하고 있다. 그러니 약자들은 밀리고 무시당한다.  

남을 욕하는 건 굉장히 쉽다. 입으로만 떠들면 된다. 힘든 것은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것이다. '나는 과연 차별하지 않았나'. 누명은 우리 사회의 차별 문화가 만든 피해라고 생각한다. <지연된 정의>를 통해 우리 스스로 돌아보는 게 사회를 욕하는 것보다 더 의미 있고 중요한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박준영 변호사를 모신다. 

▲ 영화 <재심>의 한 장면.


"본질을 안 보는 사람들의 의식이 문제" - 박준영 변호사

요즘 도움을 요청하는 메일을 자주 받는다. 그러면 도와드릴 수 없다고 메일을 보낸다. 실제 그렇기도 하다. 이미 올해 1년 동안 해야 하는 일들이 밀려있다. 그러면 이해한다는 이가 있는 반면, 계속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이가 있다. 오늘은 극단적인 분이었다. 

"당신을 위한 후원금도 들어오는데, 안 도와주고 뭐하는 거냐, 인터뷰하고 방송활동하는 시간은 있으면 도와줄 시간은 없다는 이야기인가. 당신 얼굴에 침을 뱉고 싶다." 

그런 메시지 받으면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침체된다. 비난에 초점을 맞춰버리면 나도 힘들고 그분도 힘들다. 그러면서도 생각해본다. 그런 분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내가 생각하는 이해의 방법은 그들이 형사사고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회적 불이익을 받은 사람이란 말이다. 반면, 나는 사회적 혜택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일을 했다고 부각되면서 좋은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그렇기에 사회적 불이익당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피해자 입장에서는 매우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아이를 돌보는 시간도 거의 없고, 강연하거나 인터뷰하는 것 말고는 다른 일도 하지 않는다. 일하는 것에 집중한다. 그런데도 잔인한 비판 받을 때면 자괴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오늘 강연이 끝나면 울산에 간다. 목격자로 증언해줄 분을 찾으러 간다. 쉽지 않다. (목격자 소유의) 임차인이 사는 집만 안다. 더구나 약속을 잡은 것도 아니다. 임차인에게 (목격자의) 주소를 물어서, 그리고 다시 그 주소를 찾아가야 한다. 목격자가 나를 만나줄지, 안 만나줄지도 기약도 없다.  

가끔 이런 일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회의할 때도 있다. 그러다가도 세상을 바꾸는 건  혼자의 힘이 아니라 작고 힘없는 사람들의 연대라고 생각한다. 촛불이 그것을 보여준다. 잘난 사람들은 굉장히 큰 힘이 있기에 그 개인으로도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어느 선까지 가면 어렵다. 잘난 사람들 간에 연결된 게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미있는 결단을 못 한다. 하지만 시민은 고려해야 할 관계가 없다. 그래서 의미 있는 결단을 내린다. 
 
아버지를 죽였다는 죄로 무기징역을 받은 김신혜 씨의 경우, 재심을 받을 수 있었던 힘에는 연대가 있었다. 김신혜 씨가 조사를 받고 나오면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던 점, 자기가 조사를 받으러 갈 때, 갑작스럽게 상황이 멈췄고 김 씨가 고개를 떨구고 앉아 있었다는 점 등을 증언한 유치장 동료. 김신혜 씨와 억울한 누명을 쓸 뻔 했던 당시 남자친구의 증인. 현장 검증 과정에서 강압적인 행동이 있었다고 증언한 의경 등. 이런 여러 가지가 모여 재심이 결정됐다.  

삼례 나라슈퍼 살인사건은 당시 현장 검증 영상을 유가족이 촬영하지 않았다면, 위법 사실을 입증하기 어려웠다. 원래 현장 검증은 촬영을 못한다. 그런데 범행장소가 집이다 보니 그 집에 사는 유족이 촬영하는 것을 경찰이 제지하지 못했다. 그게 17년 지난 후까지도 남아있었고, 그것을 근거로 재심을 청구했다. 당시를 찍은 영상 테이프는 다른 테이프와 함께 보관됐는데, 그 영상 테이프만 곰팡이가 안 피고 원형으로 보존됐다. 17년 동안 보존했던 유족의 노력도 의미가 있었고, 거기에만 곰팡이가 안 피워지도록 도와준 미생물의 연대 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웃음) 돌아가신 분이 진실 밝히라고 도와준 게 아닌지 모르겠다. 

진범까지 도와줬다. 만약 진범 나타나지 않았다면 재심 이렇게 빨리 안 됐다. 진범이 나타나니 모든 게 종결됐다. 모든 이의 연대로 재심이 내려진 것이지, 어떤 능력 있고, 힘 있는 사람의 힘으로 된 게 아니다.  

요즘 여기저기에서 강연을 하지만 말하는 게 힘들다. 오늘도 쉽지 않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늘 고민이다. 사실 프레시안은 잘 몰랐다. 오마이뉴스는 좌파라고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그나마 한겨레신문이 합리적 진보라고 생각했다. 프레시안은 솔직히 몰랐다. 하지만 이후 제대로 된 정론이고 의미 있는 가치를 이야기하는 곳이라고 알게 되면서 힘을 보태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프레시안 조합원들은 세상에 대한 고민을 하는 분들 아닌가. 나도 그 고민에 하나 보탤까 한다.  

사람들은 내게 형사사고 피해회복이나 형사사고 피해자를 위해서 무슨 제도를 만들어야 하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나는 우리 사회에 제도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제도가 운영이 안 되는 게 문제라고 생각한다. 왜 그럴까. 아마도 사람들 인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 발언하는 박준영 변호사. ⓒ프레시안(허환주)


얼마 전 피의자의 진술거부 관련, 민변 변호사와 진보 학자와 토론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진술거부권은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민변 변호사와 학자들은 반박했다. 진술거부권은 피고인·피의자의 권리이니 당연히 행사해야 한다고 했다. 진술거부권은 실제 헌법에 피의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나와 있다. 하지만 실제는 어떨까? 지적장애인이나 노숙자들이 수사 과정에서 진술을 거부하나? 안 한다. 요즘 최순실이 하는 게 진술거부다. 약자에게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제도다. 하지만 도움이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약자들이 진술을 거부할 경우, 재판에서 안 좋게 받아들여진다. 반면, 최순실은 진술거부로 사실을 왜곡한다. 최근 최순실이 특검 조사를 받으러 가면서도 정작 진술을 거부했다. 조사 참여 이유는 간단하다. 검사가 물어보는 질문을 통해 수사 방향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게 진술거부권의 현실이다. 그런데 이것이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권으로 이야기된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국선변호사 제도도 이야기해보자. 1년에 100억 넘는 예산이 들어간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떻게 운영되나.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무능하고 필요 없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누구도 이 제도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국민참여재판은 어떤가. 우리 사회에 맞는 재판인가. 배심원에게 기록이 제공되는 게 아니다. 필기구만 제공된다. 재판 과정에서 검사와 변호인이 이야기하는 것만 보고 판단해야 한다. 그나마 기록은 재판 과정에서 PPT로 보는 게 전부다. 이것만으로 어떻게 남의 인생을 결론 내릴 수 있나. 때로는 법리를 따져야 하는데, 제반 조건도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도를 만들고 운용하고 있다. 제도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셈이다. 

국민참여재판이 청소년 재판에도 도입됐는데, 이들 재판의 배심원으로 누구를 뽑는지 아는가. 같은 청소년이다. 법원이 배심원으로 참석할 아이들을 1~2명 보내달라고 각 학교에 요청한다. 그러면 학교에서는 누구를 보내겠나. 전교 1,2등하는 애들을 보낸다. 이들을 배심원으로 놓고 재판을 하는데, 어떨 것 같나. 사고 쳐서 재판을 받는 아이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법으로 배심원이 된 아이들은 엄마 아빠와 함께 영화보기, 놀러가기 등을 이야기한다. 사고 친 아이들의 가정환경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을 해법으로 내놓는다. 그리고 사고를 친 아이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라. 자기 또래에게 재판을 받는다면 어떻겠나.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우리 사회 문제를 두고 무조건 비난하는 문화도 많다. 반면, 진지하게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부족하다. 보이는 부분 이외에 본질적인 부분을 살펴보는 문화가 생겨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