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대 5대 명강의 남영 교수① “과목명에 일부러 ‘과학사’ 넣었어요”
한양대에 소문난 명강의가 있다. 한양대 창의융합교육원 남영 교수가 기획한 교양과목 ‘혁신과 잡종의 과학사’다. 2010년에 시작해 학생들에게 꾸준한 인기를 끌고 있다. 이 수업으로 남 교수는 2013, 2016년도 강의우수교수, 2015년도 베스트 티처로 선정됐다. 지난 해 8월 강의 내용을 담은 『태양을 멈춘 사람들』(남영 지음, 궁리 출판)을, 지난 달에는 학생들과의 질의응답을 다룬 『젊은 과학도를 위한 한 줄 질문』(남영 지음, 궁리 출판)을 펴냈다.
남 교수는 중고교 시절 “공대에 가면 밥 안 굶는다”는 말을 듣고 공대에 진학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6년간 프로그래머로 회사에 다녔다. 막연히 컴퓨터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하루에 열 세 시간씩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자니 고민이 들었다. 정말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한 끝에 ‘과학사’라는 답이 나왔다. 그 후 대학으로 돌아와 과학사를 공부하고 교단에 섰다. 그 과정에서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은 자신을 ‘이과형’이라고 규정했던 생각을 뒤집은 것이었다.
‘천리마는 언제나 있지만, 천리마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회와 자신이 천리마임을 모르는 천리마들이 있어 천리마가 나타나지 못할 뿐이다.’ 20대 후반에 과학사학자의 길을 택한 남 교수는 현재 과학자들의 인생을 들려주는 강의를 통해 학생들에게 이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TONG청소년기자들이 남영 교수를 만나 명강의의 비결과 젊은 과학도를 위한 조언을 들어 봤다.
– 제목으로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데요. ‘혁신과 잡종의 과학사'(이하 혁잡사)는 대체 무엇을 가르치는 수업인가요?
“대학에서 처음 강의를 시작했던 건 2004년이었어요. ‘혁잡사’는 2010년에 만들어졌으니까 나름대로 5~6년 동안 강의에 대해 고민한 결과가 담긴 수업이죠. 17세기 서양의 ‘과학 혁명’만 다루는 수업을 학부에서 만들어보자고 생각했어요.
과학의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가르쳐주자는 생각은 애초에 버렸어요. 과학사의 아주 일부분의 이야기에 집중해서 인물 위주로, 스토리텔링의 형태로 가르친 게 지금까지 오게 된 거예요. 결과론적으로는 학생들에게 반응이 좋았으니 소기의 성과를 이룬 셈이죠.”
-어떻게 ‘혁잡사’ 수업을 기획하게 되셨나요?
“시간 강사 시절 처음 강의를 시작했을 때는 표준적인 과학사의 리듬을 따라갔어요. 그러다 보니 너무 뻔한 거예요. 국사도 순서대로 가르치면 뻔하잖아요. 고조선부터 시작해서 위만, 삼한 등으로 이어지는 뻔한 단어들이 있죠. 과학사도 마찬가지로 항상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하거든요. 그렇게 순서대로 가르치다 보니 제가 대학 다닐 때 ‘저렇게 가르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그대로 가르치고 있는 거예요. 예를 들어, 초등학생 조카에게 삼국지를 가르친다고 해봐요. 삼국지가 처음에 어려운 게 사람이 정말 많이 나오거든요. 황건적의 난부터 시작해 삼국 정립기까지 읽으면 등장인물이 대략 90명 정도 나와요. 순서대로 배우면 90명의 등장인물 이름만 외우다가 끝나는 거예요. 과학사도 고대 그리스 시대의 소크라테스 같은 과학자만 외우다가 끝나는 거죠. 근데 이게 재밌을 리가 없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초등학생에게 삼국지를 가르칠 수 있을까요? 이게 제가 강의를 하면서 시도했던 도전과 같은 질문인 거죠.”
-그래서 어떤 방법을 찾으셨나요?
“제일 재밌는 부분을 뽑아서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삼국지에서 가장 하이라이트인 부분은 적벽대전인데요. 유비·관우·장비의 의리부터 시작해서 제갈공명의 천재성이 잘 버무려진 부분이에요. 적벽대전 이야기를 잘 해주고 앞·뒤 이야기는 궁금하면 한 번 찾아보라는 식으로 가르치는 게 한 학기 수업에서 과학사를 가르치는 동안 가장 적절한 전략이라고 생각했어요. 즉 과학사에서 삼국지의 적벽대전에 해당하는 부분은 ‘과학 혁명’이라고 할 수 있고, 이 이야기만 가지고 한 학기 내내 강의를 하게 된 거죠.”
– 학생들이 인정하는 명강의로 꼽힌 비결은요.
“처음에 재밌겠다고 기대하고 수업을 신청했는데 기대한대로 재밌다면, 평범한 수업인 거죠. ‘개그콘서트’ 같은 코미디 프로그램은 당연히 재밌을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별로 웃기지 않으면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하겠죠? 재미없을 줄 알고 수업에 들어 왔는데, 생각보다 재밌다는 게 제 수업의 반전인 거죠. 한 학생이 강의 평가에 그리스 로마 신화 같다는 말을 해줬는데요. 제우스 이야기처럼 뉴튼 이야기도 얼마든지 큰 차이 없이 재밌을 수 있다는 거죠.”
– 강의 제목은 진지한데요.
“출판 기념 강연회 때 오셨던 고등학교 화학 선생님이 ‘나름대로 많이 노력하는데 어떻게 하면 수업을 재밌게 가르칠 수 있냐’고 질문 하셨어요. 저는 그 분이 저보다 강의를 못할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고등학교 선생님은 화학을 싫어하는 모든 학생들을 포함해서 가르친다는 거죠. 교수들 사이에서 농담처럼 사(史)·론(論)·학(學)으로 과목명이 끝나면 그 수업은 폐강한다는 말이 있어요. 저는 일부러 ‘과학사’를 과목명에 넣었어요. 과학사를 공부하는 과목이니 듣고 싶은 사람만 들으라는 거죠. 그렇다면 당연히 제 수업에 들어오는 학생들은 최소한 ‘과학사’에 대해서 거부감이 없는 학생들이라는 거예요.”
– ‘과학’이라고 하면 막연히 어렵다는 생각이 먼저 들기는 해요.
“문·이과를 구분하는 교육과정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해요. 문과를 선택하는 순간 ‘드디어 나는 과학과는 상관없는 길로 가는 거야!’ 이런 생각을 하는 거죠. 그 후에는 과학이라는 게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저 멀리 있는 작은 단어가 돼요. 그런 분위기가 안타깝죠. 사실 과학은 충분히 즐길 만한 것이거든요. 그런데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죠.”
-과학을 즐기지 못하는 까닭은 뭘가요.
“과학이 ‘문화’로서 한국 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예요. 노벨상 수상자가 없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과학’이 전혀 자연스러운 게 아닌 거예요. 예를 들어, 이순신 장군 정도면 익숙하잖아요?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순신 장군도 굉장히 특이한 사람이에요. 현대로 치면 군인이잖아요. 하지만 전 국민 모두 자연스럽게 문화로서 이순신이라는 인물을 이해해요. 하지만 장영실은 그만큼은 아니죠. 결국 과학의 풀(pool)이 그만큼 좁고, 과학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도 적다는 방증이에요.”
-과학 교육의 영향도 클 것 같아요.
“대한민국의 수많은 학부모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 권의 과학책도 사지 않아요. 하지만 자녀들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과학책을 사주죠. ‘난 싫어하지만 넌 해.’ 이처럼 과학을 알면 도움이 되고 좋다는 걸 인정하면서, 동시에 모두가 하기 싫어하는 무엇이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 원인은 ‘스토리’로 과학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요. 과학에 괴리감을 느끼는 가장 큰 요인이라고 할 수 있죠. 제가 과학사를 강조하는 이유는 그래서예요. 세상 모든 일이 사람 이야기인데 과학을 배울 때 사람을 빼고 배운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 솔직히 미적분을 배워서 나중에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대체 문과생은 어떻게 과학을 배워야 할까요?
“‘나는 문과다’라는 강력한 인식이 유리 장벽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제가 이과 체질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똑같죠. 지금 생각해 보면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생각이거든요. 미적분 이야기가 나왔으니 예로 들어볼게요. 교수님들 의견을 들어보면 고등학생에게 미적분을 가르쳐야 하느냐에 대해 의견이 분분해요. ‘반드시 미적분을 가르쳐야 한다.’와 ‘그걸 가르쳐서 뭐하냐?’ 이렇게 의견이 나뉘는데, 그것조차 교수님이 문과인지 이과인지에 따라 반응이 나뉘어요.”
-어떻게 다른가요?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둘 다 말이 돼요. 일단 배울 필요가 없다는 측면에서는 20세기의 유명한 과학자 하이젠베르크도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미적분을 안 배웠어요. 당시 독일의 김나지움(독일의 중등교육기관)의 정규 수업 과정에는 미적분이 없었거든요. 그러니까 대학에 들어가서야 미적분을 배운 거예요. 물리학을 공부하는 데 필요해지니까 그때서야 한 거죠. 그렇다고 결코 독일의 과학 수준이 뒤쳐진 건 아니잖아요? 다 이렇게 시작했어요. ‘언제’ 미적분을 배우느냐는 제가 봤을 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지금 필요하면 그때 하면 된다는 거죠.”
![[자료사진=중앙포토]](http://tong.joins.com/wp-content/uploads/sites/3/2017/02/P002243113_.jpg)
-우리나라는요?
“우리나라의 경우 박사 과정에 들어갔는데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미적분을 해야 하면 대체로 포기해요. 왜냐면 한국은 고등학교 졸업 후에 미적분이 나타나면 내 인생과 상관없다고 생각하거든요. 다시는 만질 필요가 없는 거라고 말이죠. 그렇게 고등학교 때 미적분을 배우지 않은 사람은 평생 안 배우려고 해요. 그게 지금 대한민국의 문제예요. 나중에 얼마든지 배울 수 있는데, 나이가 들면 미적분은 못 배우는 거라고 생각한다는 거죠.”
-어르들은 공부엔 때가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지금 고등학생뿐만 아니라 모든 어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때 수학만 배우는 것도 아니고, 다양한 과목을 공부하는 사이에 미적분을 조금씩 배우는 거잖아요. 기껏해야 2~3개월 투자하면 배울 수 있는 개념이라는 거죠. 근데 아무도 그 2~3개월을 투자하지 않아요. 박사과정 3, 4년 동안 논문을 쓰면서도 말이죠. 그게 싫어서 논문을 포기하는 경우도 봤어요. 정말 아이러니한 거죠. 언제든지 미적분이라는 것을 시도할 수 있고, 공부할 수 있고, 시작할 수 있다는 믿음을 고등학교 졸업생들에게 주는 데 성공한다면, 저는 미적분은 안 가르쳐도 된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그렇지 않으니까 고교 수학에서 미적분은 필요한 걸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적분을 배워야 하는 이유는 공식을 외우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미적분은 직관적으로 답을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몰라요. 사회나 국사 문제는 봤을 때 문제의 답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 있잖아요. 그런데 미적분은 내가 이 문제를 풀 수 있을지 없을지를 자신도 모른다는 거죠. 상당히 놀라운 거예요. 그게 바로 연구거든요. 세 달쯤 시간을 투자하면 어떤 제품이 나올 거라고 추정하는 것이 ‘개발’이라면, 도대체 성공할지 실패할지, 내 인생 안에 끝날지 모르는 게 연구거든요. 답이 없는 걸 찾는 과정인데 미적분은 그 맛을 보게 해주는 거의 유일한 고등학교 교과과정이에요. 미적분을 공부하고 알고 있는 걸 종합하면 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풀어보면 몰라요. 그게 재밌는 점이라는 거죠. 한 가지 문제를 ‘연구’한다는 느낌을 5분, 10분이라도 가지게 해주는 거의 유일한 분야가 미적분이라는 거예요.”
-미적분을 배워도 쓸 데가 없다는 의견도 있어요.
“고등학교 시절까지 종합추론능력을 키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개념이기 때문에 배울 필요가 있다고 봐요. 따라서 문과생이기 때문에 미적분을 배울 기회를 박탈당한다면 상당히 아깝죠. 미적분을 배운다고 꼭 건축물을 지을 필요가 없을뿐더러, 그 과정에서 ‘연구’하는 훈련을 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해요. 정리하자면 꼭 고등학교 때 미적분을 배울 필요는 없지만, 기회가 된다면 한 번쯤 공부해 보는 걸 추천해요.”
남영 교수 인터뷰는 ②편으로로 이어집니다.
인터뷰=장단비·최상인 TONG청소년기자
글=김재영 프리랜서 기자 tong@joongang.co.kr
사진=장진영 기자 artjang@joongang.co.kr
한양대 5대 명강의 남영 교수② 고3처럼 하면 혁신은 없다
남영 교수의 ‘혁신과 잡종의 과학사’ 수업은 한양대 학생들 사이에서 명강의로 소문난 과목이다. ‘과학사’라는 생소한 분야를 다루지만 남 교수는 이 수업을 통해 베스트티처, 강의우수교수로 선정됐다. 지난 해 8월 강의 내용을 담은 『태양을 멈춘 사람들』(남영 지음, 궁리 출판)을, 지난 달에는 학생들과의 질의응답을 다룬 『젊은 과학도를 위한 한 줄 질문』(남영 지음, 궁리 출판)을 펴냈다. 인터뷰 ①편에 이어 TONG 청소년기자단이 남 교수를 만나 질문 받는 교수를 자처한 이유를 물어봤다.
[두근두근 인터뷰] 한양대 5대 명강의 남영 교수① “과목명에 일부러 ‘과학사’ 넣었어요”
-수업 중에 ‘한 줄 질문’이라는 특이한 행사가 있던데요.
“처음 강의를 개설했을 때 학교의 과학사 마니아들이 수강했나 봐요.(웃음) 거의 매주 상당히 어려운 수준의 질문이 e-메일로 날아들기 시작했죠. 알지 못하는 내용은 다른 교수님께 여쭤가며 나름대로 열심히 답변했어요. 그리고 아주 훌륭한 질문은 수업시간에 언급하며 다른 학생들과 공유했죠. 그러다보니 모든 학생들에게 질문을 받아보면 훨씬 풍요로운 수업이 이뤄지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질문은 어떻게 받나요?
“한국 학생들은 질문 하라고 하면 수줍어 하니까 써서 제출하라고 했어요. 즉문즉답은 저한테 어렵기도 하고요. 일단 질문을 받은 다음에 다음 주에 대답하는 형식이에요. 그러면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할 기회가 있으니 저한테도 좋죠. 막상 질문을 받으니 제가 더 고민하고 성장하게 되더라고요. ‘한 줄’이라고 정한 이유는 질문이 정말 쉬운 거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아무거나 괜찮으니 한 줄로 물으라는 거죠. ‘뭘 좋아하세요?’부터 ‘진리가 뭐예요?’까지 별별 질문이 다 나와요.”
-질문에 대한 부담은 없으신지.
“언제나 긴장되죠. 답할 수 없을 정도로 수준 높은 질문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얻는 게 더 많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질문 받는 시간이 기다려져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고민하게 만들 때도 있거든요. 아무래도 요즘 사회가 영어 공부를 자꾸 강조하는 시대여서 저까지 이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고체계가 전혀 다른 사람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 때문에 외국어를 공부해야한다고 생각해요. 질문도 마찬가지예요. 학생들의 질문을 통해 30, 40대와 전혀 다른 생각이나 다른 학문을 공부하는 전공자의 관점을 알 수 있다는 거죠. 그게 저로서는 당연히 ‘꿩 먹고 알 먹는’ 좋은 기회고, 그런 브레인스토밍 과정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하면 질문을 잘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영어를 잘 할 수 있는지와 똑같아요. 영어 공부할 때 듣고, 따라하는 거처럼 다른 사람이 어떻게 질문하는지 잘 듣고 따라하면 늘어요. 학기 중과 학기 말의 질문을 비교해보면 기말고사 전에 받은 질문의 수준이 월등히 높고 내용도 구체적이에요. 이전에 질문의 피드백을 들으면서 어떻게 해야 질문을 잘 할 수 있는지 알게 된 거죠. 한 마디로 좋은 질문의 샘플을 학습하니까 수준이 당연히 높아질 수밖에요. 내 질문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비교해보고, 깨달은 다음에 다시 질문하는 기회를 꾸준히 가져야 해요.”
-무조건 질문을 많이 한다고 왕도는 아닐 것 같은데요.
“당연하죠. 예를 들어 내가 피겨 선수인데 눈앞에 김연아가 나타나면 물을 게 당연히 많겠죠? 아는 분야이니까 그 분야에 대해 나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이나 전문가를 만나면 질문이 산더미 같아요. 질문을 못하는 건 아는 게 없어서일 수도 있어요.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알아야 질문할 수 있는 거잖아요.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질문은 관심이 있고, 직접 해봤던 분야에 한해서 잘 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내가 모르는 분야나 해보지 않은 작업에 대해서는 두루뭉술한 질문 밖에 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죠.”
-조금 더 팁을 주신다면.
“‘비판적 글 읽기’를 할 줄 알아야 해요. 한 권의 책을 읽더라도 저자에게 무조건 호의적인 관점을 갖기 보다, ‘삐딱하게’ 읽을 줄도 알아야 한다는 거죠. 그러면 반드시 질문할 거리가 나와요. 입시 위주의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는 한 가지 정답을 찾는 게 우선이었지만, 대학에서는 문제를 바라보는 다양한 방법을 익힐 필요가 있어요. 특히 이과생들이 주의해야 해요. 문과생들은 답이 다양할 수 있다는 훈련을 받지만, 이과생들은 대학에 와서도 수학 공식처럼 모든 문제의 답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어떻게 살아야 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그때마다 해줬던 답변은 ‘쥐었다, 풀었다 할 줄 알아야 한다’였죠. 긴장해야 할 때가 있는 것처럼 살면서는 ‘멍 때릴 때’도 필요하거든요. 웬만해선 그 균형을 맞추기가 쉽지 않죠. 그래서 더욱 긴장을 푸는 상황을 의도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고요.”
– 열심히 살아야 잘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열심히 하면 개량(改良)은 돼요. 나아질 수는 있다는 거죠. 하지만 혁신은 일어나지 않아요. 혁신은 풀어놔야 일어나거든요. 진공관을 예로 들면 연구원들을 몰아붙이고 밤 새워 일을 시키면 성능 좋은 진공관은 나올 수 있겠죠. 하지만 그보다 진보한 단계인 ‘트랜지스터’는 절대 나오지 않아요. 혁신이란 건 이전과 전혀 다르게 갈아엎지 않고는 불가능한 거잖아요. 마냥 열심히 한다고 나오는 게 아니지요.”
-하지만 어른들은 ‘노력’하라고 하는데요.
“지금 한국 사회는 개량이 잘 안 되고 있는 게 아니라 혁신이 잘 안 되고 있는 거예요. 고3들 입시 공부 하듯이 하면 혁신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아요. 하지만 ‘연구’는 혁신에 가까운 거거든요.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방법론을 분명히 바꿔야 한다는 거죠. 제 수업을 세 번 이나 수강한 학생이 있었어요. 첫 수강 때 B학점을 받았는데 A학점을 받을 때까지 재수강을 두 번이나 한 거죠. 똑같은 수업을 똑같은 사람한테 세 학기나 듣는다는 건 낭비예요. 제 수업이 그만큼 좋은 수업도 아니고요.(웃음) 근데 그 학생에게 중요했던 건 A학점을 받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었어요. 요즘은 학점 하나가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는 시대니까요.”
-그런 학생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
“이 시대의 단면이에요. 너무 안타깝죠. 혁신이 없다보니 계속 혁신이 없는 사회를 양산하는 거거든요. 요즘 학생들은 영어도 저보다 훨씬 잘하고 스펙도 좋고, 제가 대학 다닐 때보다 두 배 이상은 공부에 시간을 투자하는 거 같아요. 하지만 자신감은 이전 세대보다 훨씬 떨어져 있어요. ‘이렇게 해서 먹고 살 수 있을까?’ 모두 이 고민만 하고 있죠. 어쩌다 이렇게 움츠러들었는지 모르겠어요. 핵심은 사회가 여유를 주지 못한 거죠. 무엇을 하며 살지 고민할 여유 말이에요. 90년대까지만 해도 고민할 여유가 있었고, 그게 큰 자양분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오늘날에는 그런 기회가 다 박탈된 거죠.”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멍 때리는’ 시간이 결코 낭비가 아니고, 무엇을 하며 살지 한 번쯤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해요. 지금 안하면 30대든 40대든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하게 되니까요. 인생 삼모작이라는 말처럼 얼마든지 직업을 바꿀 수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 시대예요. 그러면 더 이상 고등학교에서 문과와 이과를 구분한다는 건 무의미한 거죠. 과학 혁명 당시에 괴테가 뉴튼을 공격하는 게 당연했던 것처럼 말이죠. 그 시대에는 문학가가 과학자를 비판하는 게 자연스러웠다는 거예요. 전혀 안 될 이유가 없어요. 하지만 지금 사회 분위기는 전공자가 아니면 ‘입 다물라’는 식이죠. 그러다보니 점점 틀에 갇히고 요즘은 그런 경향이 극단적으로 심해진 거 같아요.”
-‘잡종’과 같은 융합의 가치를 강조하시는 것도 비슷한 맥락인가요?
“먼저, ‘잡종’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신 분은 서울대 홍성욱 교수님이에요. ‘융합’은 최재천 교수님이 ‘통섭’의 가치를 강조하면서 유행하기 시작했죠. 한국적인 병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무언가 잘 나간다 싶으면 모두 몰려가서 그 가치를 떨어뜨리잖아요. 융합도 동네방네 외치니까 사회 도처에 융합 피로도가 너무 심해진 거예요. 특히 대학의 경우 억지로 융합하는 사례가 많은데 대체로 인기 없는 학과를 없애고 통폐합하는 과정에서 융합을 가져다 썼죠. 그러니까 학생들은 자꾸 오해하는 거예요. 그냥 두 가지를 같이 하는 게 융합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게 아니라 ‘필요하면 하는 것’이 융합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국문학을 하다가 미적분을 배울 필요가 있으면 하는 것, 이게 융합이라는 거죠. 이과라고 안하고 문과라고 못하고 그런 게 아니고요. 무엇보다 융합이란 건 언제나 존재했던 것이에요.”
-‘융합 학문’은 최근에 등장한 개념이 아닌가요?
“학문은 언제나 이합집산 해 왔어요. 18세기에는 동물학과 식물학만 있었죠. 근데 19세기에 현미경이 발전하면서 생물학이 등장한 거예요. 현미경으로 살펴보니 동물도 식물도 세포로 이루어졌으니 하나의 학문으로 다룰 필요가 생긴 거죠. 이렇게 자연스럽게 융합된 학문이 생물학인데 오늘날 아무도 생물학을 융합 학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죠. 즉 융합이란 언제나 존재해 왔고, 시대의 흐름 상 크게 일어나냐, 작게 일어나냐의 차이지 과도하게 받아들여선 안 된다는 거예요.”
-대학 진학을 앞둔 청소년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면.
“‘꿈이 뭐예요?’라고 물어보면 대체로 생명공학자, 기자 같은 ‘직업’을 말해요. 그 다음에 반드시 한 번 더 물어 봐야 해요. ‘왜 그 직업을 가지려고 하나요?’라고 말이죠. 수업을 통해 학생들에게 질문할 기회를 주는 이유도 ‘무엇’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왜’라고 질문함으로써 보다 깊고 다른 답을 얻을 수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거든요. 제 꿈은 사람들에게 과학 이야기를 재밌게 전달해 주는 거예요. 지금처럼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도 있지만, PD가 되어 과학 다큐멘터리를 만들거나 과학전문 기자가 됐어도 꿈을 이룰 수 있겠죠. 실제로 저는 30대 후반에 직업을 바꿨고, 외관상 프로그래머와 교수는 전혀 다르게 보이지만 연속성이 있어요. 지금 논문을 쓰는 데 프로그래머 시절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되고 있으니까요. 한마디로 꿈은 직업이 아니라 작업이나 작품으로 설정해야 해요. 그래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주 많고, 수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한 번 실패했다고 꿈을 버릴 필요가 전혀 없다는 걸 알게 되죠. 이 직업을 성취하지 못했으면 꿈을 이룰 수 있는 다른 직업을 선택하면 되니까요. 그래야 쉽게 절망하지 않고요. 대학의 전공과 나의 직업이 일대일로 대응할 필요가 전혀 없어요. 인생이란 어느 시점에 결정되어 끝나 버리는 게 결코 아니니까요. 제가 샘플이잖아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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