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시민들, 자국이 1%를 위한 나라임을 깨달았다"

오는 1월 20일 '미국 우선주의', '백인 우선주의'를 주창한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전 세계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불확실성의 시대로 접어든다는 의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은 앞으로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또 불확실성의 시대에 우리는 어떤 주체적 대응을 할 수 있는가?
<프레시안>은 대표적인 미국 전문가 이혜정 중앙대학교 정치국제학과 교수와 만나 트럼프 당선의 배경을 짚어보고, 트럼프 시대에 맞닥뜨리게 될 세계와 한반도의 미래를 전망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혜정 교수는 트럼프가 출현하게 된 구조적 배경에 주목한다. 이 교수는 "미국 국민들 사이에 그동안 정치·경제·사회·문화적인 불안정이 있었다. 이것이 트럼프라는 인물이 나올 환경을 만들었다"며 "그는 미국 내에서 온갖 문제가 다 불거진 다음에 나온 결과물"이라고 설명했다. 한마디로 "유권자의 입장에서 트럼프의 개인적 악덕보다 구조적 악덕이 더 싫었다는 결론"이라는 것이다.
우선 정치의 붕괴다. 이 교수는 "트럼프가 공화당 내부 경선에서 1등을 차지한 것 자체가 이미 미국 정치가 뒤집힌 증거"라고 했다. 냉전 종식 후 <역사의 종언>으로 미국 체제를 극찬했던 프랜시스 후쿠야마조차 정치제도를 비판할 정도로 미국 정치가 엉망이 됐다는 것이다.
이는 중산층 삶의 붕괴로 이어졌다. 이 교수는 "1980년대 이후 미국 내 가구소득은 전혀 늘어나지 않았다"며 "신자유주의는 경제적 불평등, 양극화를 극대화했고, 2007~2008년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중산층의 삶도 추락했다"고 했다.
이 교수는 특히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의 당락을 가른 쇠락한 공업지대 러스트 벨트(Lust Belt)에 주목하며 "러스트 벨트는 '마약 벨트'로 변하고 있다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며 "중하층들은 이민자들로 인해 자기들 일자리가 날아간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또한 세계화로 인해 국가별 차이가 줄어든 결과 "중국 중산층은 20~30년 전과 비교해 구매력 기준으로 80%가 향상된 반면, 미국 중산층은 20~30년 전 수준 그대로"라며 "이런 점 때문에 미국에서는 세계화의 결과가 대체 무엇이냐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보호무역주의를 천명하며 중국과 무역 갈등을 예고한 트럼프의 행보는 이런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 인종문제까지 결합되면서 미국 백인 중하층은 트럼프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이 교수는 "미국이 여기까지 오게 된 배경에는 정치‧경제와 사회, 문화적으로 중첩돼있던 문제들이 경제적으로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태로 치닫게 된 데에 있다"며 "'흑인 대통령 행정부의 경제 정책이 과연 무엇이었느냐'라는 인종주의적 반발도 있었다"고 꼬집었다.
이 교수는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가 돌아가면서 교육의 사다리를 올라가지 못하면 사회에서 성공할 수 없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여기에 제조업의 비중은 점점 줄어들기만 했다. 없는 집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먹고 살기 위해 군대를 택했다"며 사실상 계층 이동이 막힌 미국 사회의 단면을 꼬집기도 했다.
이 교수는 결국 "복지는 찾아보기 힘들어졌고, 사람들은 더 이상 미국이라는 환상만을 가지고 살아갈 수가 없게 됐다. 미국이 잘 사는 국가이긴 하지만 그 중에 어떤 미국인들이 잘 사느냐는 다른 문제가 돼버렸다"고 지적했다. 잘 사는 나라에서 발생한 못 사는 중하층 서민들의 분노와 반란, 그것이 트럼프를 만들어냈고 트럼프 시대의 미국이 당면한 '생얼'이라는 것이다.
이 교수와의 인터뷰는 지난 16일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2회에 걸쳐 게재한다.

▲ 중앙대학교 이혜정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가 미국 시간으로 20일 제45대 대통령에 정식으로 취임한다. 트럼프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린 셈인데, 누구도 트럼프의 당선을 쉽게 예측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이번 미국 대선도 그렇고 지난해 한국 총선,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선거(브렉시트) 모두 이른바 사회의 '지도층'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제대로 짚어내지 못했던 것 같다.
이혜정 : 개인적으로는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가 근소하게 이길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클린턴이 승리한다고 해도 미국의 국내 정치가 분열되고 몰락한 것만은 분명하다고 봤다. 트럼프가 공화당 내부 경선에서 1등을 차지한 것 자체가 이미 미국 정치가 뒤집힌 증거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미국 우선주의를 강조하고 나온 후보였다. 물론 미국은 언제나 미국 우선주의를 택해왔다. 다만 미국 자체의 이익과 세계 자본주의를 관리하는 책임 사이에서 조화를 추구해 왔는데, 트럼프는 이를 상호 배타적인 요소로 규정했다. 이 대목이 트럼프 당선을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다.
프레시안 : 트럼프 당선이 미국의 민낯을 생생하게 보여준 것으로 본다. 관련해서 트럼프를 당선시킨 요인으로 이 교수는 백인 우선주의, 미국 우선주의, 그리고 트럼프 우선주의 이렇게 세 가지 요소들이 작동했다고 분석했다. (☞관련 기사 : 도전받는 미국 패권, 무너지는 한미동맹)
이혜정 : 사실 트럼프 당선자는 기존에 우리가 알던 미국, 특히 '아름다운' 미국으로 인지되고 있는 한국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낯선 인물이지만 철저히 미국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가 갑자기 등장한 인물이 아니라는 데 있다.
미국 국민들 사이에서는 그동안 정치·경제·사회·문화적인 불안정이 있었다. 이것이 트럼프라는 인물이 나올 환경을 만들었다. 즉, 그는 미국 내에서 온갖 문제가 다 불거진 다음에 나온 결과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지난 2013년 10월 미국의 연방정부가 폐쇄됐다. 안 그래도 워싱턴 D.C에서 기성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불만을 가지고 있던 미국 국민들은 이 사태를 겪으면서, 좌우를 막론하고, 미국이 뭐가 얼마나 잘못됐기에 여기까지 왔느냐는 일종의 '자괴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러한 미국 내부의 문제는 외교에도 영향을 미쳤다. 존 케리 국무장관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아시아로의 귀환'(Pivot to Asia)에 중요한 한 해였던 2013년, 한국과 일본 등 아시아 국가를 순방했다. 그러나 케리에 이어 예정됐던 오바마 대통령의 아시아 국가들을 방문은 연방정부가 폐쇄되면서 취소됐다.
당시 존 케리는 이 상황을 두고 '다시는 이런 일이 있으면 안 되겠다. 아시아를 한 바퀴 돌고 왔는데 아시아 국가들이 모두 미국의 민주주의를 걱정하고 있더라. 이게 무슨 창피냐'라는 식으로 말했다. 동맹들이 미국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퀘스터(sequester, 미국 연방정부의 예산 자동 삭감 조치)는 미국 민주주의와 미국 정치가 얼마나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당시 국가 재정에 문제가 생긴 미국은 여야가 예산에 대해 합의를 보지 않으면 재정절벽으로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정말 다 같이 빠져 죽는 상황이 돼버렸다. 당시 미국의 신용등급이 떨어지는 일마저 발생했다.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려는 세력에는 자본주의를 유지해야 한다는 분파와 안보 국가로서의 미국이 중요하다면서 전 지구적으로 군사 개입을 해야 한다는 분파가 있다. 결정적일 때 항상 군사주의를 제어한 자본주의 분파 쪽이 우세했다. 미국은 베트남에 대한 개입을 계속하다가 어느 순간 달러가 위험하다는 판단이 들어 멈추기도 했다. 그랬던 미국에서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이다.
트럼프가 셀 수 없는 막말과 추행, 기행을 했음에도 정치 전면에 등장하고 대통령에까지 당선된 것은, 그가 이상하다기보다는 미국 정치가 갈 데까지 갔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학계에서도 이러한 평가는 꾸준히 제기돼왔다.
실제 이즈음 스탠퍼드 대학교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가 본인의 입장을 바꿔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비토크라시'(vetocracy, 거부권을 뜻하는 veto와 민주주의의 Democracy를 합해서 만든 합성어)라는 단어로 미국의 헌정 질서 자체가 잘못됐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현재 정치 제도에서 비토를 할 수 있는 지점이 너무 많다는 지적이었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에서 냉전이 종료된 이후 서구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넘어선 대안적인 사회 체제는 없다고 했다. 그가 주장한 실제 모델은 미국이었다. 그리고 이건 조지 W. 부시 독트린에 그대로 반영됐다. 그랬던 그가 정면으로 입장을 바꾼 것이다.
물론 미국의 초당파적인 외교가 수명을 다했다는 것은 트럼프가 등장하기 전 이미 학술적인 관심사였다. 오바마 등장 이전부터 초당파적인 합의는 깨졌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러한 평가가 적절한지 여부는 대통령이 행정 명령에 얼마나 의존하는지를 살펴보면 확인할 수 있다. 행정명령을 많이 사용했다는 것은 미국의 민주주의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증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오바마 대통령의 경우를 살펴보면 2008년 오바마 당선 당시 민주당은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행정명령을 너무 많이 실행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오바마의 재선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공화당과 2010년 출연한 티파티의 파상 공세에 밀린 오바마는 겨우 재선에 성공했고,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결국 오바마 대통령은 의회와 합의를 포기하고 2014년부터 본격적으로 행정명령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미국 환경이 어떻게 트럼프라는 불꽃으로 번지게 됐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하지만 위의 사례에서 보듯, 이미 기존 정치권은 망가져 버린 상태였다.
여기에 사회적으로 널리 퍼진 인종주의적인 요소도 트럼프를 만들어 낸 주요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10년마다 발표하는 인구센서스를 보면 1910년 전체 인구 대비 이민자 비율은 14.7%였다. 가장 적었을 때가 1970년에 4.7%를 기록했고, 2010년에는 이 비율이 12.9%로 올라갔다.
노동인구 대비 이민자 비율은 전체 인구 대비 이민자 비율보다 더 높다. 불법 이민자까지 포함하면 이 수치는 더 높아질 것이다. 트럼프가 이민자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 만한 사회적 환경이 만들어진 상황이었다.
공화당의 몰락과 트럼프 등장
프레시안 : 일단 트럼프 대통령을 탄생시킨 일차 관문은 공화당 대선 경선이었다. 공화당이 티파티에 휘둘린 채 민심을 제대로 담아내는 정당이 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혜정 : 트럼프 같은 말도 안 되는 후보가 왜 공화당에서 선두권으로 부상했을까에 대해 기존 언론인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는 출마 인원이 많아서 교통정리가 늦었고, 서로 치고받는 도중에 줄줄이 낙마하면서 주류가 원했던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나 마르코 루비오 상원의원을 내세울 상황이 되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 11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 트럼프타워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는 이 자리에서 본인과 관련한 음란한 내용의 루머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반발했다. ⓒAP=연합뉴스
이건 공화당의 주류, 기득권(Establishment) 세력이 무너진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강고한 기득권 세력이 돌파당한 지점은 공화당 경선이었다. 공화당 주류는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처럼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세력과 안보를 굳건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세력, 그리고 문화‧사회적으로 보수주의 색채를 가지고 있는 세력 등 크게 3가지 정도로 분류된다. 그런데 2010년 티파티가 대거 들어오면서 공화당이 극우화돼버렸다.
시퀘스터 문제만 해도 사실 안보를 중시하는 보수들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미국이 군사적으로 전 지구적인 개입을 하는 과정에서 군사 부문의 예산도 일률적으로 삭감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티파티는 그게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반응했다. 그렇게 공화당은 계속 우경화되고 존 베이너 하원의장마저 티파티의 압력으로 사퇴하면서 사실상 지도부의 부재 상태가 발생했다.
베이너의 뒤를 이은 폴 라이언 하원의장은 2012년 미트 롬니와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출마했던 인물이다. 그는 사실 2020년 대선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끌려 들어와서 하원의장을 맡게 됐다. 지도부를 대체할 준비가 돼 있지 않은 상태였다.
프레시안 : 공화당 지도부가 밀었던 후보가 경선을 통과하지 못한 것도 이러한 요인이 작용한 것인가?
이혜정 : 거기에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인종 문제다. 공화당 지도부는 부시 전 지사와 루비오 의원을 내세웠는데, 이 두 사람이 모두 히스패닉과 관련이 있다. 젭 부시 전 지사의 경우 부인이 히스패닉이고 루비오 의원은 본인이 쿠바 이민자 2세다. 그런데 공화당 예비경선에 참여한 열성 기층 공화당원(Republican base)들은 매우 인종주의적인 성향을 띄었다.
결국 티파티의 지지를 받은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만이 남았는데, 그는 노동 계층이나 경제적 문제에 대한 해법이 없었다. 결국 공화당에서 트럼프가 승리한 것은 경제적 요인과 인구 구성상의 요인 등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정치적 문제는 늘 있던 사안이었고.
프레시안 : 오바마 대통령이 들어오면서 미국 내에서 인종 문제가 더 불거진 것 같다.
이혜정 : 일단 오바마 입장에서는 이번 선거 결과가 상당히 짜증났을 것이다. 트럼프는 쇠락한 공업지대라고 불리는 '러스트 벨트(Lust Belt)'에서 승리하면서 대통령에 당선됐는데, 사실 이 지역을 경제적으로 구제하려 애쓴 사람은 오바마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2012년 공화당의 대선후보였던 미트 롬니 전 주지사의 경우 금융위기가 확산되던 2008년 "디트로이트를 파산하게 놔두라. 미국 자동차 업계에 작별 키스를 하라"고 주장했던 사람이다.
러스트 벨트 중하층 백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준 쪽은 자동차 산업 구제를 통해 러스트 벨트를 살리려 했고, 이에 더해 건강보험 개혁까지 추진한 오바마 정부였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작년 대선에서 러스트 벨트 유권자들이 민주당이 아닌 공화당 트럼프를 택했으니,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가 이해할 수 없는 결과라고 한탄하는 것이다.
지난 10일(현지 시각) 시카고에서 고별 연설을 가진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의 민주주의가 위협을 받고 있다면서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연대감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현재 미국에는 이 연대감을 깨뜨리는 여러 요인들이 있다는 것이 오바마의 주장이었다. 그 첫 번째가 경제적인 불평등인데 이건 트럼프가 이야기하는 미국 우선주의와 연관돼있다.
두 번째는 인종의 문제였다. 오바마 당선 이후 인종주의적 갈등을 극복하는 새로운 미국 정치가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오바마 집권 기간에는 인종 문제가 지나간 이슈가 돼버리는 '포스트 래디컬(Post racial)'이 아니라 인종 문제가 가장 심각해지는 '모스트 래디컬(most racial)'이 돼버렸다. 정치학자인 마이클 테슬라가 저서 <Post-Racial or Most-Racial?>에서 이를 잘 지적했다.
실제 오바마 대통령이 내놓은 건강보험개혁안(오바마 케어)에 대해 백인 중산층은 자기들이 벌어놓은 돈을 가지고 복지혜택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국가가 돈을 쓴다는 식으로 생각했다. 미국의 인종주의와 민주주의 고쳐지지 않는 핵심적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부분이다.
20세기 초에 등장했던 뉴딜 정책은 백인에 대한 복지를 늘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1960년대 중반부터 이른바 '뉴딜 연합(New Deal Coalition)'이 깨지기 시작했다. 흑인들이 주축이 된 민권운동이 일어났고 1965년에는 이민법이 개정됐다.
20세기 전반 미국의 성장, 특히 중산층의 성장은 이민을 통한 것이 아니었다.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은 이민 문호를 완전히 닫았다. 이민자가 많아졌을 때 문을 닫은 셈인데, 당시 미국은 기존의 인구 집단 분포를 보고 여기에 맞춰서 각 인종별로 쿼터를 주는 방식으로 이민자를 통제해왔다.
1929년 시작된 미국의 대공황 이후 이민자에게 문을 닫은 미국 내에서는 백인 중산층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후에는 인종적‧사회적‧문화적으로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1965년 이민법을 개정하면서 인종별로 쿼터를 없앴고, 가족 중에 이민자가 있으면 그 사람이 나머지 가족을 초청할 수 있는 이른바 '초청이민'이 시작됐다.
이때부터 라틴계와 아시아계가 미국 이민자의 주를 이루기 시작했다. 또 1964년~65년에 흑인민권법이 생기면서 흑인들이 정치 참여가 시작됐다. 이 때부터 민주당과 공화당의 거대한 '바꿔치기'가 일어나는데, 기존 민주당을 지지했던 지역이 공화당 지지로 바뀌게 된 것이다.
원래 민주당은 북부의 백인 노동자와 남부의 인종 차별주의적인 백인 인종주의자의 연합이었다. 그중에서도 남부 출신 의원들이 정치 경험이 많은 다선 의원들이었고 이 사람들이 의회를 장악하고 있었다. 인종 차별만 된다면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던 이들이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회적 변화가 일어나고, 이에 따라 복지에 대한 반발도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복지는 당연히 백인만 누리는 것이었다. 1965년 린든 존슨 당시 대통령이 의료보험제도를 만들 때 65세 이상과 빈곤층에 일정 부분 혜택이 있었다. 그런데 미국의 백인들은 빈곤층에 혜택을 주면, 이건 당연히 백인 외에 다른 인종들에게 간다고 생각했다. 이에 백인들이 '열심히 벌어서' 소수 인종들이 복지 혜택을 받는 상황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다.

▲ 중앙대학교 이혜정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트럼프 당선, 20년 동안 곪았던 상처가 터졌다
프레시안 : 결국 경제적 불평등이 미국 우선주의를 낳았고 인종 문제까지 퍼지면서 백인 우선주의가 등장했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미국 우선주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비롯한 자유무역을 하지 않겠다는 건데, 미국이 만들어놓고 미국 대통령이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도 사실 좀 황당하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국가 간 격차는 완화시켰지만, 국내 간 격차는 악화시켰고 이것이 미국 중산층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오는데, 미국 우선주의를 낳은 지난 30년 동안의 신자유주의의 성적표와 인종주의 문제점을 짚어본다면?
이혜정 : 신자유주의를 미국 패권의 측면에서 본다면 금태환을 중지한 것이 중요한 지점이다. 그 이전에는 1달러 당 금 35온스로 가치가 고정되어 있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미국과 나머지 국가의 경제적 격차가 워낙 컸기 때문이다.
미국을 제외한 다른 국가가 경제적으로 미국을 쫓아올 때 미국은 항상 '통상 라운드'를 가졌다. 상대 국가가 경제적으로 커졌으니까 미국이 이야기하는 이른바 '상호주의' 원칙에 따라 공평한 경쟁을 할 때가 됐다는 주장이다.
1971년 리처드 닉슨 당시 대통령이 달러의 금 태환을 중지하면서 이매뉴얼 월러스틴 같은 학자들은 이때 이미 미국의 패권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한편 다른 학자들은 금태환 중지 이후 '브래튼우즈 체제 시즌2' 에도 미국이 여전히 기축통화를 가지고 있다는 이점을 최대한 살려서 통화 패권을 지속했다고 본다.
이 입장에서 보면 미국은 사실 미국 우선주의를 하지 않은 적이 없다. 미국은 달러의 고정 환율을 포기하면서도, 플라자 합의처럼 다른 나라의 팔을 비틀어왔다는 것이다. 미국이 처음에는 일종의 시혜적인 패권의 모습을 보였다면 이후에는 자국이 가지고 있는 국제사회에서의 구조적 우위를 최대한 활용하는 약탈적인 패권 국가로 바뀌는 것이다.
그런데 국제사회에서 우위를 점한 상황에서도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 내 가구 소득은 전혀 늘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신자유주의에 대한 첫 번째 반발이 1992년 대선으로 나타난다. 당시 로스 페로 후보가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조지 H.W. 부시 현직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했다.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세력들도 바뀌기 시작했다. 1950~1960년대까지 미국의 노동조합은 민주당에 기울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자유무역을 지지했다. 그런데 1970년대부터 신자유주의적인 일종의 정치‧경제적 구조조정이 시작됐다. 이후 1990년대에 오면 노조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했지만, 이미 노조의 조직률과 정치적 힘은 떨어져 있었고 공화‧민주 양당이 신자유주의로 수렴하면서 노조의 경제적 이익이 정치 의제화될 수 있는 통로가 없어졌다.
이와 함께 1980, 90년대 미국에서 민주당과 공화당은 총기 규제나 낙태, 여성주의와 소수자 등 문화 및 가치의 문제를 가지고 '문화 전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립 양상을 보였다. 1960년대 민주당을 지지하던 남부의 백인들은 민주당이 복지를 중시하고 흑인 민권 운동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이자 대거 민주당을 이탈했다. 공화당은 이들을 받아들였는데, 지금은 공화당은 거의 90%가 백인이고 민주당은 50%가 좀 넘는 사람들만 백인이다.
인종적, 경제적인 것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요인도 섞여 있다. 시골에 사는 백인들에게는 사냥을 하는 '총기문화'가 있는데, 여기에 가장 큰 장애물이 총기 규제 문제다. 미국에서 총기 규제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예컨대 지난 대선 과정에서 유력 주자로 떠오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의 경우 힐러리 클린턴으로부터 총기 규제에 적극적이지 않다는 비판을 받았다. 샌더스가 소극적이었던 이유는 출신 지역인 버몬트 주가 총기 문화를 지닌 시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화 전쟁의 밑바닥에는 계급적인 이유가 깔려 있었지만, 이러한 문제들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으면서 계속 쌓여왔다. 1992년 빌 클린턴 민주당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미국이 일정 부분 경기를 부양하고 나니 구조적인 문제들이 정치 의제화되지 못하고 계속 곪아있었다. 트럼프는 바로 이 지점을 치고 들어왔다. 당신들과 같은 '잊혀진(forgotten)'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았다면서, '나는 당신들의 대변자가 되겠다(I'm your voice)'고 공약한 것이다.
20년이 넘게 곪아 왔던 상처들이 2012년~13년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시기부터 미국 중산층의 삶이 얼마나 무너졌는지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이는 가장 최근에 트럼프가 했던 기자회견에도 드러난다. 그는 이 기자회견에서 처방되는 마약류의 약품들이 문제라면서 제약회사들에 대한 협박을 하기도 했다.
트럼프가 이러한 발언을 하게 된 이유는 현재의 러스트 벨트 상황과 연관돼있다. 지금 러스트 벨트는 '마약 벨트'로 변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올 지경에 이르렀다. 알콜 중독, 자살, 마약 중독 등 '절망의 질병'이 러스트 벨트를 휩쓸고 있다. 이러한 절망의 질병이 높을수록 트럼프를 찍었다는 조사 지표가 나오기도 했다.
러스트 벨트를 포함해 중간 가구 소득을 기준으로 보면 80년대 이후 정체되어 있었다. 신자유주의는 경제적 불평등, 양극화를 극대화했고, 2007~2008년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중산층의 삶도 추락했다. 살던 집은 뺏기고 장기 실업에 상태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민자는 마구 들어오고 있었다. 물론 자본가의 입장에서 이민자는 인재를 들여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실제 실리콘 밸리에서는 인도나 중국의 인재들이 없으면 안 되는 상황이기도 하다. 따라서 자본가들 입장에서 이민을 허용하지 않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미국이 이민 때문에 먹고 사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미국의 제도가 전 세계의 인재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것도 이점이라면 이점일 수 있다.
그런데 미국의 중하층들은 이민자들로 인해 자기들 일자리가 날아가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사회의 중하층에 있는 사람들이 주로 접하는 이민자들은 저임금의 불법 이민자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공화당 지도부는 이민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둥 공화당 기층 중하층 백인들의 입장에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해댔다. 그런데 어느 순간 트럼프가 '짠'하고 나타나서 이민자들이 나쁜 사람들이고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쌓는다고 말했다. 러스트 벨트의 중하층 입장에서는 너무나 속이 시원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 디트로이트 인근에 위치한 폐쇄된 자동차 공장 ⓒ위키피디아
결국 미국이 여기까지 오게 된 배경에는 정치‧경제와 사회, 문화적으로 중첩돼있던 문제들이 경제적으로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태로 치닫게 된 데에 있다. 여기에 '흑인 대통령 행정부의 경제 정책이 과연 무엇이었느냐'라는 인종주의적 반발도 있었다.
2010년과 2015년 공화당 지도부가 무너지는 각각의 흐름이 이 세 부분에서 중첩됐던 문제들이 쌓여오다가 어느 순간 임계점을 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트럼프를 공화당 대선 후보로 밀어 올렸다.
그러면 트럼프는 본선에서 어떻게 이길 수 있었을까? 클린턴 진영은 트럼프의 개인적인 자질 공격에 집중했다. 트럼프는 여기에서 밀릴수록 주류, 기득권에 대한 공격으로 맞서면서 부패를 전면 청산하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유권자의 입장에서 트럼프의 개인적 악덕보다 구조적 악덕이 더 싫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트럼프가 가지고 있는 자질의 부족 문제가 너무 크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미 기득권 세력으로 규정된 클린턴은 선택할 수 없었던 것이다. 누가 변화를 가져올 것이냐는 질문에 미국 유권자들은 트럼프라고 답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번 선거를 통해 미국 사회가 지니고 있는 민낯이 그대로 드러난 건데, 미국은 민족주의‧민주주의‧자본주의 재건의 과제를 쥐고 있다.
민족이라는 문제는 역사‧문화적인 공동체를 의미하는데, 예전 미국은 이민의 문호도 막았고 백인 중산층이 기본이 되는 나라였기 때문에 인종주의와 미국 내 민족주의가 별문제 없이 진행됐다. 그런데 지금 추세라면 2060년이 되면 백인 구성이 전체 인구의 50% 이하로 줄어든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민 문호를 닫아야 했을 때처럼 해결을 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된 상황이다.
다음으로 미국은 인종주의 문제를 해결한 적이 없다. 오바마 대통령은 고별 연설에서 미국 민주주의의 두 번째 위험 요인은 인종주의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이 문제는 미국이 건국되면서부터 제기됐던 사안이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미국에는 항상 인종 문제가 잠재적으로 있었는데 이게 불거질 때마다 겨우 넘어갔었다. 냉전이 끝났을 때도 바로 튀어나온 사회적 현상이 LA 흑인 폭동이었다. 냉전 이겼다고 좋아했는데 이후 인종주의가 나온 것이다. 미국은 전쟁 등 통합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시기, 즉 10~15년 정도만 인종주의를 통제할 수 있다는 학계의 주장도 있다.
인종차별, 미국의 원죄
프레시안 : 인종문제는 미국의 원죄 같은 건데, 1960년대 이후에 민권 운동도 나오면서 어느 정도 풀린 것처럼 보였는데 21세기에 다시 불거졌다.
이혜정 : 인종주의는 항상 미국의 저변에 깔려있는 일종의 '지병'같은 것이다. 이걸 잘 관리하면 일정한 임계치를 넘어서지 않는데, 관리가 될 때가 있고 안 될 때가 있다.
미국식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전도사였던 미국 칼럼니스트 토마스 프리드만은 최근에 냉전이 끝나면서 미국이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소련이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관리됐던 것들이 다 날아갔다고 지적했다. 즉, 소련이 미국 체제를 공격할 수 있는 인종문제 같은 경우 냉전 시기 때는 잘 관리가 됐는데, 이제 소련이 없어지니까 이러한 관리를 하지 못하게 됐다는 분석이다.
앞서 말한대로 미국이 인종문제를 자제하고 통제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요인은 전쟁이었다. 전쟁을 하면 미국은 동원체제였기 때문에 인종문제를 억누를 수 있었다. 반대로 인종적 소수자가 미국인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전쟁에 나가서 싸워야 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자 국민들을 통합시켜야 한다는 의식이 떨어지고 경제가 조금씩 나빠지는 동시에,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정치권의 규율이 옅어지는 등의 일들이 겹쳐졌다. 이러면서 인종 문제가 발생했고, 결과적으로 현시점에서 가장 강하게 터졌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인종주의적으로 흑인들이 사는 곳이 범죄 소굴이라는 이야기도 하는데 사실 러스트 벨트가 현재 이런 상황에 놓여 있다. 티파티가 등장한 이후 미국 백인 중산층이 얼마나 많이 힘들어졌는지를 보는 학문적 접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확인해 보니 백인들 가정에 아버지는 없고 어머니는 마약 중독이고, 아이는 학교 적응을 못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이 발견됐다.
이에 오바마 대통령이 최근 고별연설에서 내세운 경제적 불평등 해소 방법의 첫 번째는 교육이었다. 미국 중산층이 망한 이유가 의료비와 교육비 때문인데, 세계화가 되면서 상당수의 공장들이 미국 밖으로 빠져나갔다. 전 지구적인 소득 분위로 보면 미국의 하위층은 실질 소득으로는 변화가 없지만, 중국과 인도의 실질 소득은 올라갔을 정도였다.
이렇게 미국 내에서 양극화가 심해지기 시작했다. 대학을 갈 수 있는 아이들은 실리콘 밸리와 워싱턴 D.C, 월스트리트에 진출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꿈도 꾸기 힘든 상황이 됐다. 미국 주립대학의 교육 예산도 줄어들면서 격차는 더 벌어졌다.
교육기회의 균등을 중시했던 오바마 대통령은 유치원부터 이렇게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미국은 이미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공교육이 완전히 무너진 상황이다. 처음부터 좋은 학교를 가지 않으면 상급학교 역시 좋은 곳으로 갈 수가 없다. 고등학교만 나와서 할 수 있는 것은 제조업에 취직하는 건데 제조업의 감축, 공장 이전 등으로 이들을 받아줄 일터가 없다. 그러니까 삶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중앙대학교 이혜정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러스트 벨트가 마약 벨트가 돼버리고 교육‧지역‧인종적으로 분열되면서 미국이 역사상 이렇게 분열된 적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오죽하면 집 주소를 보면 그 사람이 대충 어떤 일을 하는지, 어느 정도의 생활을 하는지 한눈에 다 알아볼 수 있을 정도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미국이 이미 갈 데까지 갔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프레시안 : 혹자는 미국의 국력이 역사상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가 1950년대였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냉전이 끝나면서 미국 정치 체제와 생활 방식이 전 세계적으로 퍼지면서 이겼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타락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것 중 하나가 신자유주의에 의한 백인 중산층의 몰락인데, 비백인 인종들이 늘어나면서 이에 대한 백인들의 인종주의적 반란이 있었고, 이를 통제해야 할 정당은 무너져 버렸다. 특히 공화당의 몰락이 매우 유의미해 보이는데 이렇게 되면 미국을 재건할 동력은 민주당에서 나올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민주당도 한계가 있었다. 인종적인 다양성을 중시하고 경제적 약자들에 대한 대책을 나름대로 세우려고도 했지만 미국 유권자들에게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혜정 : 그렇다. 대선 경선 과정에서 클린턴은 TPP를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중산층의 삶이 이렇게 피폐한데 자유무역을 통해 얻은 게 무엇이냐는 공격에 답하지 못하고 결국 TPP를 접겠다는 식으로 나온 것이다.
트리클 다운(Trickle-down, 낙수효과)에 대한 기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내가 이렇게 살기가 어려운데 미국이 패권 국가면 뭐하냐는 불만도 현재 미국 내에서 팽배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어느 나라 국민으로 태어나느냐에 따라 개인이 누릴 수 있는 경제적 혜택에 차이가 나는 것이 사실이다. 선진국 국민은 자신이 태어난 곳이 선진국이라는 이유로 다른 나라 국민들에 비해 상당한 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세계화가 되면 국가에 의한 통제가 완화되며 국가별 차이가 줄어든다. 지금 중국 중산층은 20~30년 전과 비교해 구매력 기준으로 80%가 향상된 반면, 미국 중산층은 20~30년 전 수준 그대로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미국에서는 세계화의 결과가 대체 무엇이냐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프레시안 : 이미 1990년대부터 미국 내에서는 경고음이 나오고 시작했다. 1960년대에는 고등학교만 졸업해서 공장에 취직하면 그 돈으로 아이들 학교까지 보냈는데 1980년대부터는 불가능하다는 하소연이었다.
그런데 클린턴에 이어 집권한 아들 부시 대통령은 네오콘과 함께 엄청난 돈을 전쟁에 쏟아부었다. 이 부분에 대해 미국은 별다른 반성이나 비판지점이 없는 것 같다. 자기들이 세계를 위해 희생했다고 생각하지, 세상에 대한 반성은 없어 보인다.
이혜정 : 오바마는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면서 전국적인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이라크 전후의 혼란, 모병의 어려움이 경제적 위기와 겹치면서 이라크 전쟁에 대한 미국 내 여론이 악화되기도 했었고, 트럼프의 경우에도 이라크 개입을 기성질서가 실패한 대표적인 원죄로 비판한다. 하지만 미국의 역할에 대한 본질적인, 비판적인 성찰은 여전히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 이건 미국만 그런 건 아니다. 한국에서도, 어느 나라에서도 나라의 치부를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기 마련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미국이 가지고 있는 위선의 한계가 드러났다는 부분이다. 아들 부시인 조지 W. 부시의 선거 구호 중 하나가 온정적인 보수주의였다. 그때는 빌 클린턴 집권 이후 무역 흑자 상태가 이어져서 이를 어떻게 쓸지 고민했던 때였다. 부시는 2000년 대선을 국내 이슈로 치렀다. 그때 이민법 개정, 의료비 문제 등의 이야기가 나왔다. 당시 나온 이민법은 미국의 교육이 워낙 엉망이니까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고용하려면 인도나 중국의 인재를 데려와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민법 개정이 요구됐다.
예를 들어 첨단무기에 의존하는 군사 분야의 경우, 그 기반은 과학기술인데 이는 이 분야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인력을 필요로 한다. 고급 인력을 받아들여야 군산복합체가 작동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급 인력은 이민자를 통해 수급받을 수밖에 없다. 러스트 벨트에서 고등학교만 나온 학생들은 이런 산업에 종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가 돌아가면서 교육의 사다리를 올라가지 못하면 사회에서 성공할 수 없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여기에 제조업의 비중은 점점 줄어들기만 했다. 자본주의 논리를 적용하면 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없는 집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신분상승의 유일한 통로는 대학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군대가 돼버렸다는 지적이 있다. 1970년대 베트남 전쟁 이후 가장 큰 군사적 효과는 모병제로 전환됐다는 점이다. 이라크 전쟁을 치르면서 미국은 모병제를 유지하기 위해 학력과 범죄 전력, 신체 기준 등을 낮췄다. 그리고 군대를 통해 시민권 장사를 하고 월급을 올렸다. 그러면서 재정이 더 악화됐고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도 군대를 가는 수요는 끊임없이 나왔다. 먹고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군대였기 때문이다.
상위 1%가 소득의 과실을 다 가져가면서 미국 사람들은 우리는 이 지경이 났는데 독일은, 유럽은 왜 그렇지 않은 것이냐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됐다. 이렇다 할 노조가 없는 미국에서 복지는 찾아보기 힘들었고, 사람들은 더 이상 미국이라는 환상만을 가지고 살아갈 수가 없게 됐다. 미국이 잘 사는 국가이긴 하지만 그 중에 어떤 미국인들이 잘 사느냐는 다른 문제가 돼버렸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트럼프 시대, 한미동맹 대차대조표 새로 짜라"
'트럼프 시대'가 열렸다. 지금껏 보아온 도널드 트럼프의 행보대로라면, 외교안보는 물론이고 정치, 경제 등 전 분야에서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시대의 개막이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은 곧 70년에 걸친 전후 질서를 뒤흔든 사건이자, 신자유주의 30년의 변곡점으로 기록될 사건이다. 트럼프 시대가 세계와 한반도에 몰고 올 파장을 이혜정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와 짚어봤다. (☞ 1부 인터뷰 보기 : "美 시민들, 자국이 1%를 위한 나라임을 깨달았다")
'미국 우선주의'를 표방하는 트럼프 정부의 최대 목표는 무너진 미국 중산층의 부활이다. 제조업 부활이 이를 위한 방법론. 그러나 이 교수는 "미국의 제조업 비중(미국 GDP 대비 약 10%)이 전체 산업에 비해 그렇게 크지 않기 때문에 제조업 부활로 중산층이 부활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했다. "결국 트럼프가 내세운 공약은 내실 없는 구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또 "트럼프 현상의 궁극적 본질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공존이 가능하냐는 문제"라며 "노동자들에게 중산층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사회적 유동성을 보여줘야 하는데 지금은 유동성을 보여줄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중국 및 멕시코 등과 일전을 벼르는 '무역 전쟁'이 답이 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도 이 교수는 "미국이 (보복 조치로) 겁을 줘서 상대방이 겁을 먹고 꼬리를 내리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 다음 카드는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비관적으로 봤다.
이 교수는 "사실 중국의 위안화가 지금 그렇게 인위적으로 저평가되어 있지도 않고, 중국이 미국의 일자리를 가져간 것은 2008년 이전에 있었던 일이라서 이미 옛날이야기 됐다는 주장이 있다"며 이 같이 말했다.
오히려 트럼프가 중국의 핵심 이익에 해당하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건드린 데 대해 "트럼프가 이걸 협상카드로 쓰면 북핵이나 다른 이슈들이 다 망가질 수 있다"면서 "아무도 말리지 못할 수도 있고, 트럼프는 이에 대한 가시적인 성과가 나올 때까지 중국을 흔들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이 교수는 "(중국 입장에서) '하나의 중국'은 흥정의 대상이 아니다. 중국은 경제적으로 약간의 손해를 감당할 수는 있지만, 하나의 중국을 흔드는 것은 용납하지 못한다"며 이 같이 말했다.
트럼프 시대의 군사안보적 변화는 유럽과 아시아에서 급속하게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는 이미 유럽연합(EU)와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에 대한 강한 불신과 동맹 재조정 방침을 밝혀 미국이 만든 전후 질서의 격변을 예고했다.
이 교수는 이에 대해 "미국 패권의 기존 주류 담론의 시각에서 보면 정말로 다 날려먹은 것"이라며 "주류 패권 세력이 그동안 작동시켜온 기존 안보질서에 타격이 클 것"이라고 전망했다.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앞세운 트럼프 정부의 동맹의 경제적 구조조정 방침은 한미동맹에도 적지 않은 파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보수층 일각에서 제기되는 동맹 약화에 대한 우려보다 "한미동맹의 신성화"를 비판했다.
그는 "미국 입장에서 보더라도 한국이 '냉전의 전초기지'로서 가지고 있던 프리미엄이 사라졌다"면서 "(한국은) 경제적으로 중국에 넘어가고 있는데 가치적인 측면에서는 미국의 동맹으로 전 세계로 나가려고 하기 때문이 문제가 생긴다"고 지적했다.
또한 "현재 한국은 미국에 '올인'한 상황이 돼버렸다. 미국의 민주주의‧경제‧군사 모두 파국으로 치달았는데도 한국은 미국만을 바라보고 있다"며 "한미동맹의 강화는 한반도 지역의 안보 딜레마를 강화해서 북한의 핵무장과 사드 논란을 초래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한미 양국의 정권교체기와 맞물려 최대 현안이 된 사드 배치 문제의 해법은 없을까? 이 교수는 외교안보의 큰 그림이 양국 대통령과 외교적 결정을 거치지 않고 "주한미군사령관이 사드 배치 이야기를 처음 꺼내면서 사안의 전개가 거꾸로 된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 뒤, "오바마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한미 FTA 재협상에 착수했다. (사드 배치도) 재협상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고 했다.
그는 "그러나 현재의 정치권에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촛불과 탄핵, 그리고 대선 정국을 어떻게 가져가느냐가 가장 큰 변수일 것으로 보인다"며 "이 힘을 추동해서 한국의 안보나 평화 위험 요인이 무엇이고 한미동맹에서 관성적인 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와 그렇지 않은 문제가 무엇인지를 따져봐야 한다. 한미 동맹의 '대차대조표'를 새로 짜봐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과 북한의 치킨게임 양상으로 치닫는 북한 핵문제도 앞으로의 상황 전개가 안개속이다. 이 교수는 "트럼프 진용을 보면 선제타격 이야기도 나오고 있는데, 북한이 사전에 핵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또는 북한이 핵을 사용할 경우 북한을 없애버리겠다는 생각도 있는 것 같다"면서 "선제 타격을 하든 사후 보복을 하든 공멸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한미동맹과 남북관계, 북핵 문제 등이 실타래처럼 꼬인 한반도 상황이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대망론의 밑바탕이 되고 있지만, 이 교수는 "최근의 반기문 신드롬은 이러한 남북관계나 아시아 지역 문제를 망각한 일종의 유체이탈을 배경으로 나온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 교수는 특히 10년 간 해외에서 유엔 사무총장을 지내 국내 사정에 어두운 반 전 총장의 대선 출마를 강하게 비판하는가 하면, '유엔 사무총장은 퇴임 직후 어떠한 정부직도 제공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권고한 유엔 결의를 상기시키며 "북한에게 유엔 결의안을 지키라고 강조한 전 사무총장 스스로가 유엔 결의안을 무시하는 중"이라고도 했다.
다음은 박인규 <프레시안> 협동조합 이사장이 진행한 이혜정 교수와의 인터뷰 전문.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P=연합뉴스
'예측불가능' 트럼프 시대, 어디로?
프레시안 :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는 선거를 치렀고 인수위원회를 거쳐 이제 공식 취임한다. 정치인 혹은 지도자로서 트럼프를 어떻게 평가하나?
이혜정 : 2015년 11월 트럼프는 본인이 쓴 <불구가 된 미국-어떻게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것인가>(Crippled America-How to Make Our Country Great Again)라는 제목의 책에서 본인이 성공한 이유를 명시했다. 그는 여러 이야기를 늘어놓았는데 그 중 대중들이 장벽과 이민 문제에 반응을 보여서 그 부분을 계속 건드렸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일단 던져 놓고 반응이 오면 그 이슈를 계속 가져가는 방식을 사용한다. 유세에 나온 열혈 청중들의 반응과 주류 미디어가 가장 민감해하는 부분을 계속 치는 전략이다. 그런 의미에서 트럼프는 TV쇼를 경험했기 때문에 순발력이 있는 사람이다. 주류가 미워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잘 활용한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냐가 문제인데,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트럼프는 정해진 포지션이 아무것도 없다는 데에 주목한다. 트럼프는 본인이 유명해지면 그걸로 되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가 이야기했던 모든 정책 중에 불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봐도 된다. 국무·국방 장관은 그나마 트럼프와 다른 이야기를 한다면서, 이 사람들이 트럼프를 잘 어르고 달래면 트럼프는 자기 입장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인물이라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반대로 트럼프에게 우선순위로 각인된 특정 이슈는 주류가 아무리 트럼프 생각을 바꾸려고 해도 불가능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하나의 중국'을 둘러싼 최근 트럼프와 중국의 갈등이 이런 경우라고 볼 수 있다.
트럼프는 미국과 중국이 상호 의존하고 있지만, 중국이 미국에 의존하는 바가 더 크기 때문에 판을 흔들어서 미국에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고 가면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미국이 쓸 수 있는 여러 가지 카드 중 하나가 '하나의 중국'이고 중국이 가장 아파하는 부분인데, 지금까지 왜 그걸 협상카드로 쓰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 트럼프의 생각일 것이다.
그런데 이걸 협상카드로 쓰면 북핵이나 다른 이슈들이 다 망가질 수 있다. 이건 아무도 말리지 못할 수도 있고, 트럼프는 이에 대한 가시적인 성과가 나올 때까지 중국을 흔들 수도 있다.
프레시안 : 월러스틴 같은 경우는 트럼프가 기존 질서와 일정하게 타협하거나 혹은 아예 깨지거나 둘 중 하나라고 예측했는데, 홀로 제도 정치권에 진입한 트럼프가 미국을 자신의 뜻대로 바꿔낼 수 있을까?
이혜정 : 앞서 언급했던 트럼프 우선주의, 백인 우선주의, 미국 우선주의라는 틀에서 접근해보자면, 트럼프 우선주의는 제도 정치권과 무관하게 본인이 알아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의미다. 당선 이후 각료 인선 역시 결국 트럼프 우선주의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는데, 트럼프는 우리로 치면 '듣도 보도 못한' 인물이기 때문에 내각을 구성할 수 있는 자기 사람이 없다.
심지어 몇몇 사람들은 절대로 트럼프를 도와주면 안 된다고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당선 이후에 조금 누그러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이건 트럼프 개인에 대한 믿음이라기보다는 미국 정치제도 하에서 계속 가져가야 할 대통령제를 존중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어쨌든 트럼프는 인재 풀이 없다. 워싱턴 싱크탱크 인사들을 전혀 활용하지 않았고 따라서 자신에게 충성을 보였던 몇몇 사람을 데리고 오는 식의 인선을 했다. 그러다 보니 대외정책 측면에서 여러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수 있는 인물이 아무도 오지 않았고, 군인이나 CEO 등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국내 정책 분야도 트럼프 측근들 위주로 채웠다.
물론 트럼프는 본인의 철학을 담은 어떤 정책적 옵션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우려들이 다소 희망적으로 바뀔 여지는 있다. 이런 낙관론이 있기는 하지만, 국무장관과 국방장관 내정자가 정신 차리고 일을 수행한다고 해도 백악관 수석전략가 겸 수석 고문인 스티브 배넌이 사고를 칠 것이라는 우려와 비관론이 강한 게 현실이다. 그가 인종주의자에 극우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정치적인 올바름'(Politically correctness)에 상반되고 기존의 모든 전통에 반대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물이 지근거리에서 트럼프의 귀를 잡아 버리면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전망이다.
트럼프의 가장 큰 과제는 제조업의 부활을 통한 중산층의 부활인데, 미국의 제조업 비중이 전체 산업에 비해 그렇게 크지 않기 때문에 과연 제조업 부활로 중산층이 부활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미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제조업 비중은 2010년에 10% 가량이다. 이는 고용 대비 비중으로 따지면 더 떨어지는데, OECD 기준으로 2009년 기준으로 10%가 채 되지 않는다. 즉, 제조업을 완전히 부활시켜도 전체 경제에는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결국 트럼프가 내세운 공약은 내실 없는 구호가 될 수 있다.

▲ 중앙대학교 이혜정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경제적인 부문만 보면 트럼프는 공화당의 감세와 탈규제 정책을 그대로 가져갈 것으로 보인다. 또 민주당의 전통적 정책인 인프라 투자도 부동산 재벌답게 자기 전공인 양 호언장담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기존 자유무역 협정의 재협상을 통해서 미국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상충될 수 있는 것들이다.
일단 트럼프가 이야기하는 감세는 사실 부자감세다. 이렇게 하면 그동안 공화당이 오바마 정부를 공격하던 재정적자 문제에 답이 없어지고 공화당이 표방하는 균형예산 정책과도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
폴 크루그먼 교수는 정부가 케인즈 식으로 투자를 해야 한다고 했을 당시에는 미국 경제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고, 지금은 완전 고용 상태에 진입했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이 상태에서 정부가 투자를 촉진하고 세금을 줄이면 정부와 민간의 투자금이 중첩돼서 정말로 정부가 예산 적자를 걱정해야 할 상황에 처할 수 있다. 크루그먼 교수는 바로 이 부분을 우려하고 있다.
인프라 구축은 효과가 분명 있겠지만, 이를 위한 재정지출이 이자율 상승과 민간부분 투자위축,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인프라 구축 투자와 함께 에너지 사업을 촉진하겠다는 것이 트럼프의 공약이다. 이는 미국 안의 석탄, 석유 등 자원 개발을 최대화하겠다는 것으로 기후변화에 대한 미국의 국제적 리더십에 반한다. 국내외적인 반대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실상 보호무역을 하겠다는 뜻을 밝힌 트럼프가 정말 무역 전쟁을 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미국이 겁을 줘서 상대방이 겁을 먹고 꼬리를 내리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 다음 카드는 무엇인지 모르겠다.
"트럼프, 미국에 자해적 결과 낳을 수도 있다"
프레시안 : 제조업을 미국으로 다시 들여온다고 해도 중산층 복원에는 큰 도움이 안 될 것이라는 예측인데?
이혜정 : 미국 사람들을 고용하고 미국산을 구매하라는 것인데, 이렇게 하면 제조업에서 좋은 일자리가 나온다는 뜻이다. 그런데 방금 이야기했듯이 제조업이 미국의 경제나 고용 비중의 10% 정도다. 큰 부분을 차지하는 사업이 아니다.
트럼프가 현재 미국 무역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일견 일리가 있다. TPP가 계속 문제가 됐던 것은, 미국이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로펌이나 제약회사가 TPP를 통해 해외에 진출해서 이득을 볼 수 있다는 논리인데, 이 영역에 있는 사람들은 이득을 보지만 나머지는 별로 그렇지 않다는 데 있다.
트럼프에 닥친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전 세계에서 저성장과 장기침체가 당연한 일이 돼버렸다는 점이다. 1990년대 이래 연평균 4%에 가깝던 세계경제 성장률이 2007~2008년 이후 1~2%로 주저앉았다. 이러한 저성장 국면이 상당히 오래 갈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 일본의 이른바 '잃어버린 20년'이 전 세계적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미 세계 경제의 총 규모보다 무역 규모가 줄었다는 통계치도 있다.
또 트럼프는 중국과 무역 전쟁에서 이기려고 하는데 사실 중국의 위안화가 지금 그렇게 인위적으로 저평가되어 있지도 않고, 중국이 미국의 일자리를 가져간 것은 2008년에 있었던 일이라서 이미 옛날이야기가 됐다는 주장도 있다. 오히려 지금은 중국에서 금융위기가 터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중국발 거품경제가 꺼지면 전 세계적인 경제 위기가 올 수 있다는 예측이다.
중국은 현재 내수 위주로 경제를 꾸려가면서 내수와 지역경제를 묶겠다는 '일대일로'(一帶一路, one belt, one road)를 구상하고 있다. 동남아와 서남아시아, 유럽까지 길을 잇겠다는 것인데, 이 때문에 트럼프가 중국의 팔을 비틀어서 무역 전쟁을 한들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인 시각도 나온다.
한편으로는 미국이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대한 대응 때부터 실수한 것 아니냐는 평가도 있다. 중국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갈 것이냐는 문제를 둘러싸고 정치‧경제적으로 싸워야 한다는 입장과 타협해야 한다는 입장이 있고, 군사적으로는 견제하더라도 경제적으로는 타협해야 한다는 절충론도 있다. 절충론에 입각해 보았을 때 당시 미국이 실수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이다.
처음에 중국이 AIIB를 만든다고 했을 때 미국은 다른 나라들에게 AIIB에 함께하면 미국의 궤도에 어긋나는 것처럼 선전해왔다. AIIB를 중국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면서, 마치 AIIB가 확장되면 미국 패권이 날아가 버리는 것처럼 인식했다. 하지만 영국이 AIIB 참여 선언을 한 이후 독일과 유럽 국가들에 이어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까지 참여 의사를 밝히면서 미국의 선전은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규범과 제도 부분에서 중국과 함께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국 내부에서 중국과 도저히 같이 갈 수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근거 중 하나가 바로 이 부분이다. 우리는 민주주의 체제를 택하고 그 안에서 규범과 제도가 만들어지지만 중국은 그렇지 않으며, 국제 정치경제에서 통용되는 규범과 제도를 중국이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중국의 상황이 불확실하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트럼프 시대의 미국은 중국보다 불확실성이 커질 가능성이 높다. 미국이 다수의 동맹국들과 함께 세계 질서를 주관해 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신뢰성이 중요하다. 그런데 트럼프는 'unpredictability', 즉 예측불가능성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협상을 할 때 상대가 불안함을 느껴야 그 협상에서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트럼프는 미국이 동맹국이기 때문에 한국과 일본, 독일을 항상 밀어준다고 약속해서 이들 국가가 미군 주둔 분담금을 올리지 않는다고 불만을 표시한다. 그래서 미군을 철수할 수 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면 동맹국들이 벌벌 떨면서 분담금을 올릴 것이라고 판단한다. 실제 한국의 장명진 방위사업청장은 분담금을 올려주겠다며 여기에 장단을 맞춰주기도 했다.
결국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가 됐을 때 이미 미국 민주주의나 미국 패권의 국내정치적 기반이 날아갔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이 트럼프 집권 이후에 잘 나갈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신뢰성은 상당히 소실됐다고 봐야 한다. 규범‧제도 경쟁 측면에서 미국이 가지고 있던 상대적 우위가 날아가 버린 것이다.
TPP 문제만 해도 그렇다. 미국은 TPP가 경제적 이익의 문제가 아니라고 선전해왔다. 사실 TPP는 아시아나 세계 경제에서 누가 미래의 규칙을 정할 것인가의 문제다. 그랬던 미국이 TPP를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신뢰성의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물론 종합 국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인류 역사상 미국을 능가할만한 국가는 나오기 힘들다. 앞으로도 미국을 따라올 만한 국가는 별로 없어 보인다. 실제 미국은 지금도 인구가 계속 늘어나고 있고 인구 연령이 낮으며 최근 전체 이민자 수는 감소 추세이지만, 트럼프 시대의 백인 우선주의에도 불구하고 이민자의 유입은 일정하게 유지될 것이다.
그러나 국가 단위로 미국이 1등이라는 것과 세계질서를 일정하게 운영하고 관리하는, 나머지 국가들의 존경과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국가라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국제적인 리더십 측면에서 보면 트럼프의 언행은 자해적인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높다.
민주주의, 자본주의, 세계 안보의 역진
프레시안 : 트럼프 당선자가 최근 유럽연합과 나토에 대한 강한 불신을 드러내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안보 전략의 주축이었던 대서양 동맹이 깨지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있다. 트럼프는 다른 한편으로 러시아와는 일관되게 밀월 행보를 보이고 있는데, 미국 대외 정책의 전통적 공식에서 벗어난 트럼프의 행보가 어떤 영향을 미치리라고 전망하나?
이혜정 : 트럼프의 그 언급은 테러 대응이 급한데 나토가 무슨 소용이냐는, 나토가 완전히 낡았다고 보는 트럼프의 반패권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발언이라고 본다.
패권의 기존 주류 담론의 시각에서 보면 정말로 다 날려먹은 것이다. 시진핑은 다보스에서 자유무역을 강조하는데, 트럼프는 유럽연합의 해체를 전망하고 메르켈의 난민 정책을 비판하고 대서양 동맹의 기반을 전면적으로 거부한 것이다. 그나마 자유주의적이라고 볼 수 있는 미국 패권의 기반을 완전히 부정하는 '미친 짓'이다. 주류 패권 세력이 그동안 작동시켜온 기존 안보질서에 타격이 클 것이다.
프레시안 : 월러스틴은 중국은 패권국가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을 하기도 했다.
이혜정 : 세계 자본주의의 성격 자체가 변했기 때문에 강대국이 순환해서 패권국가가 되는 시기는 끝났고, 새로운 사회체제를 만드는 투쟁의 시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1970년대 이래 월러스틴의 일관된 주장이다. 사회적인 움직임을 통해 새로운 자본주의를 만드는 데 각자가 열심히 투쟁하라는 의미로 읽힌다. 그걸 어떻게 할 것이냐는 본인이 있는 자리에서 열심히 고민하고 투쟁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이다.
1970년대 이후 미국의 레이건, 영국의 대처 이후로 계속돼왔던 신자유주의적인 대안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 세계화가 현실이고 세계화 이외의 대안은 없다는 주장은 저성장이 이른바 '뉴노멀'(New Normal)이 되면서 종료됐다.
트럼프 현상을 아주 궁극적‧본질적으로 보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공존이 가능하냐는 문제인데, 자본주의는 소수의 자본가가 다수의 노동 대중을 지배하는 시스템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표를 많이 가진 사람이 권력을 얻는 구조다. 따라서 표를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맑스 식으로 하면 허위의식을 갖게 만들든지, 아니면 이들에게 중산층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사회적 유동성을 보여줘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중산층이 붕괴되고 있어서 유동성을 보여줄 수 없는 상황이다. 만약에 국경을 허물고 물건들이 다 들어오는 상황이 되면 시진핑이 오히려 자유무역의 주창자가 될 수도 있다(실제로 17일 스위스 세계경제포럼 기조연설에서 시진핑 주석은 자유무역을 강하게 옹호했다).
트럼프가 중국과 무역 전쟁에서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자유무역체제를 관리해온 방식, 즉 초기에는 원조나 일방적 시장 개방을 하다가 이후에는 특혜를 축소하고 상호주의 원칙을 강조하는 방식 정도만 한다면 중국은 '그래 까짓 거 우리가 좀 손해 볼 수 있지'라고 하면서 '일대일로 통해서 유럽이랑 남아시아 쪽으로 가면 돼'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의 중국'을 흔드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건 흥정의 대상이 아니다. 즉, 중국은 경제적으로 약간의 손해를 감당할 수는 있지만, 하나의 중국을 흔드는 것은 용납하지 못한다.
프레시안 : 트럼프가 지금까지 미국이 세계를 경영해온 문법과 전혀 다른 문법을 들고 나올 수 있다는 것인가?
이혜정 : 그렇기도 하고 과거 현재의 상황도 전혀 다르다. '스트레스 테스트'라는 논문이 있는데, 미국이 기본적으로 깔고 있던 전제들이 모두 깨졌다는 분석이다. 즉 미국의 대전략이 전제했던 것이 있는데, 이게 과연 맞는 이야기인지를 따져보는 글이다.(Hals Brand and Peter Feaver, <Stressig Testing American Grand Strategy>)
논문에서 필자들은 전 지구적인 수준으로 보자면 여전히 미국의 군사력이 막강하지만 지역적인 수준에서는 점점 떨어진다고 분석한다. 그래서 미국은 우크라이나를 어떻게 하지 못했다. 또 미국과 중국 관계에서 힘의 균형을 이야기할 때, 미국은 동맹이 많고 중국은 동맹이 없기 때문에 미국이 전 세계적인 힘의 관계에서 우위에 있다고 흔히 이야기하는데, 브릭스(BRICs,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프리카공화국을 통칭) 등장 등으로 이러한 전제도 사라졌다고 지적한다.
미국이 중국을 견인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역시 쉽지 않을 것이고, 민주주의가 불가역적으로 진전된다는 전제 역시 현상적으로는 가역적으로 후퇴하고 있기 때문에 올바른 분석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밖에 경제적으로 신자유주의나 세계화가 지속될 수 있는가, 기술적인 진보가 미국에만 유리한가 등등의 질문이 나온다.
2015년 오바마 대통령이 국가안보전략을 내놨는데, 가치와 풍요와 안보가 같이 가는 것이 미국의 국가안보전략의 목표이고 핵심이라고 했다. 그런데 사실 이건 모든 나라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목표다.
이걸 후쿠야마 식의 3단 논법에 놓으면 풍요(경제)가, 즉 미국식 신자유주의가 전 지구적으로 진행되고 그게 민주주의를 확산시키고, 민주주의 확산이 평화를 가져오는 이른바 '민주평화론'으로 해석할 수 있다.
1990년대만 해도 이 세 가지가 다 같이 갈 것이라는 예측이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는 세 가지가 함께 진행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오히려 지금의 상황은 민주주의 가치, 세계 자본주의, 세계 안보가 각각의 영역에서 역진, 후퇴가 발생하고 각 영역들의 역진이 서로 얽히는 악순환이 발생하고 있다.
트럼프에 대한 비판도 이러한 지점에서 나온다. 트럼프가 각각 사안별로 이른바 '거래'를 해서 각각의 전투에서 이길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전쟁이라는 큰 판에서는 별로 의미가 없다. 전투에서 이기는 것이 미국의 종합적 국력이나 패권 이익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하는데 사안별로 연계가 되지 않기 때문에 전투 승리가 전쟁 승리로 이어지기 어렵다.
한국 상황으로 좁혀서 생각해보면 한국은 사드 도입이라는 안보 문제 때문에 경제 문제에 태클이 걸렸다. 가치나 역사 문제 때문에 통화 스와프에 제동이 걸렸다. 가치, 민주주의, 자본주의, 지정학, 평화가 각각 잘되고 선순환하는 것이 1990년대의 희망사항이었다면 지금은 각각의 층위가 후퇴하고 악화되고 악순환으로 물려있다.

▲ 중앙대학교 이혜정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한미동맹 대차대조표를 다시 검토해야"
프레시안 : 한미 관계를 살펴보면 한미 FTA, 주한미군 분담금, 사드 배치 등이 구체적 사안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더 근본적인 것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위상이 떨어지고 있는데 한국은 더 미국에 가까이 가려고 한다는 점이다. 특히 이명박 정부 집권 이후 이러한 양상이 강화되고 있다.
이혜정 : 지금 제기한 세 가지 사안에 각각 무엇이 걸려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한미동맹으로만 이야기하면 동맹에 대한 딜레마가 여러 가지 있다. 냉전시대 한국은 군사주권을 포기하는 대신 북한의 위협을 막기 위해 미국의 힘을 빌렸다. 한국의 국력이 상대적으로 북한에 비해 약했기 때문에 북한이 쳐들어올 때를 대비하기 위해 안보와 자주가 교환된 것이다.
동맹에는 또 다른 딜레마가 있다. '연루와 방기' 문제다. 냉전 때도 이런 문제 때문에 동맹 간에 갈등이 벌어지기도 했다. 예를 들어 박정희 집권 시절 북한의 특공대가 청와대 뒷산까지 침투한 1.21 사태(김신조 사건)이 발생했다. 박정희 입장에서 보면 보복을 해야 하지만, 미국 입장에선 한국이 북한을 칠 경우 끌려들어가는 상황이 전개된다. 이건 미국의 이익에 맞지 않았다. 남북문제에 연루될 경우 미국의 국익에 손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남한의 보복을 막은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한국은 냉전 내내 주한미군 철수, 즉 미국이 동맹인 한국을 방기할 위험을 우려했다.
냉전이 끝난 이후 한국은 새롭게 연루의 위험에 처했다. 이라크 전쟁이 그 예이다. 한국이 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병력을 파견할 것인가의 문제 역시 미국이 벌이고 있는 전쟁에 연루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논쟁을 일으켰다.
사드 문제의 경우 중국은 아주 일정한 톤으로, 하지만 분명한 어조로 '선'을 넘어오면 보복하겠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사드 배치는 주한미군사령관이 사드를 배치하겠다고 밝힌 것이 시작이었다. 사드 배치의 효용성 여부를 떠나 처음부터 형식‧절차가 잘못된 접근이었다.
외교나 안보는 큰 그림이 그려진 상태에서 양국의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 외무부 장관 혹은 외무‧국방 장관 회담인 '2+2 회담' 등에서 결정이 내려지고, 여기에 맞춰 군을 통제해야 한다.그런데 이번 사안의 경우 주한미군사령관이 사드 배치 이야기를 처음 꺼내면서 사안의 전개가 거꾸로 된 측면이 있다.
럼스펠드 식의 군사변환 시각에서는 한국에 미군을 붙박이로 둘 이유가 없다. 그런데 주한미군사령관 입장은 다르다. 한반도는 미군의 전선 중 하나인 곳이라, 정예 병력이 파견되고 별도의 수당도 받는다. 한미 동맹의 가장 제도화된 '군사 기술적인 유효성'이라는 판타지도 있지만 미군들에겐 일종의 직장, 철밥통이 돼버린 측면도 있다.
다시 사드 배치 문제로 돌아가서, 제도적으로 한미 동맹이 우리를 옭아매는 측면도 있지만 자산의 측면도 있으니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하는데, 지금 사드 국면은 주한미군사령관이 배치 발언을 시작하는 바람에 이러한 종합적 판단이 불가능해진 셈이다.
프레시안 : 정권이 바뀔 경우 사드 문제 재협상의 여지가 있다고 보나?
이혜정 : 어쨌든 합의한 거니까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는 게 맞다는 입장이 있다. 그런데 미국은 오바마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한미 FTA 재협상에 착수했다. 재협상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재의 정치권에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촛불과 탄핵, 그리고 대선 정국을 어떻게 가져가느냐가 가장 큰 변수일 것으로 보인다. 이 힘을 추동해서 한국의 안보나 평화 위험 요인이 무엇이고 한미동맹에서 관성적인 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와 그렇지 않은 문제가 무엇인지를 따져봐야 한다. 한미 동맹의 '대차대조표'를 새로 짜봐야 한다.
한미 FTA 협상 문제도 다시 검토해봐야 한다. 한국의 경제적 의존이 미국에서 중국으로 넘어가기 시작한 것이 2000년대 초반이다. 그 증거가 중국발(發) 마늘 파동이다. 이때부터 노무현 대통령의 고민이 시작됐다. 한미동맹의 관점에서 1960~70년대에는 한국이 미국 시장에 물건을 내다 팔고 원조를 받으면서 살았는데, 이제 미국에 소위 '몰빵'해서 한국 경제가 살아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 판명됐기 때문이다.
미국 입장에서 보더라도 한국이 '냉전의 전초기지'로 가지고 있던 프리미엄이 사라졌다. 1997년 한국이 겪은 외환위기가 미국이 한국을 각별하게 봐주지 않는다는 걸 드러낸 사례다. 과거와 비교해보면, 한국이 1983~84년에 외채 위기를 겪었을 때 일본에서 40억 달러가 긴급 공수됐다. 미국이 이러한 결정을 내린 이유는 한국이 전초기지였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한미 동맹에서 정상적인 양태라고 보였던 조치들이 1997년에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렇게 동맹의 상황이 변한 상태에서 한미 FTA를 재협상할 것이냐는 결국 우선순위의 문제인데, 트럼프가 미국 안에서 해놓은 이야기를 보면 일단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부터 처리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다음은 중국과 통상 문제가 될 것이다. 한미 FTA 재협상은 순위에서 밀릴 가능성이 크다.
취임을 코앞에 두고 트럼프는 상당히 많은 일들을 굉장히 빨리 처리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렇게 보더라도 한미 FTA 재협상은 우선순위가 아니라고 추정할 수 있다. 물론 한국에서 계속 미국만을 맹목적으로 쫓아가는 정권이 들어선다면 한국 정부가 제 발로 미국에 굴종할 가능성도 있다.
FTA 재협상을 위해 대차대조표도 다시 작성해봐야 하는데 이 계산이 쉬운 일은 아니다. FTA의 가장 큰 문제는 민간 기업이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할 수 있는 부분인데, FTA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논리도 미국 사기업의 이익을 위해 한국의 공익이 희생되는 것이 바람직하냐는 대목이었다. 이게 실제 실현된다면 한국 국가 경제의 이익과 신자유주의적인 이익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따져 봐야 한다.
한미동맹은 신성불가침인가?
프레시안 : 트럼프가 북핵 문제는 어떻게 다룰 것이라고 예상하나?
이혜정 : 냉전 때부터 미국은 이중 봉쇄를 했다. 남북이 서로를 때리지 못하게 봉쇄한 것인데, 일종의 안정자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런데 지금은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증강하면서 비대칭 위협을 높이고 있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는 문제가 아니라, 능력의 측면에서 어쨌든 막강한 한미 연합 전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은 막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지금 트럼프 진용을 보면 선제타격 이야기도 나오고 있는데, 북한이 사전에 핵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또는 북한이 핵을 사용할 경우 북한을 없애버리겠다는 생각도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군사적 억지 전략이 작용하면 한국은 끝이다. 북한에 핵과 미사일 개발을 저지할 수 없는 것이 냉전이 끝난 다음의 실상이고, 선제 타격을 하든 사후 보복을 하든 공멸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트럼프가 등장하기 직전,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으로 가기 직전, 한국의 보수는 두 가지 옵션을 내놓았다. 한 편으로 제재하고 한 편으로 대화하자는 투 트랙도 허용하지 않았던 강경론이었다. 구체적으로, 하나는 미국의 전략 핵 무기를 다시 갖다 놓자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핵무장을 하자는 주장이었다. 트럼프가 자기 방식대로 하면 미국이 전략 핵무기를 가져다 놓을 테니, 대신 한국이 돈을 내라고 할 가능성이 높다. 전략폭격기든 항공모함이든 미국의 자산이 움직여야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미국의 군사전략가들이나 국방부 입장에서는 한국 정부가 돈을 낸다고 군 자산을 함부로 뺄 수 있냐고 반발할 수도 있다. 항공모함 11개를 가지고 지구 특공대를 만드는 게 미군의 기본적인 임무인데 그중에 하나를 왜 한반도 인근에 가져다 놓느냐며, 한국 정부를 달래는 목적으로 항모나 전략폭격기가 잠깐 한반도 인근에 진출했다가 빠지면 되는 건데 왜 상시 배치를 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결국 트럼프든 미국 군부든, 미국 입장에서 전략 무기 배치는 선택하고 싶은 옵션이 아니다.
미국의 전략 무기들이 들어와서 북한의 미사일 공격을 막아낸다고 해도 문제는 발생한다. 이걸 실제로 쏘게 되는 상황이 되면 이미 그건 파국으로 접어드는 길이다. 지금 상황이 '굳건한 안보'만을 외쳐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프레시안 : 한국의 차기 대권 주자들은 대부분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관심이 있지, 외교나 안보 사안에서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 특히 한미 동맹과 동북아 정세에 대해서는 새로운 관점이나 별다른 언급이 없다.
이혜정 : 한국 사회 내에서 한미 동맹에 대한 신성화 작업이 너무 많이 진행된 결과다. 다만 이렇게까지 한미동맹이 중시되고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떠오른 시간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한국이 가지고 있는 지정학적인, 외교안보적인 정체성은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일본으로부터 독립했다는 탈식민 분단국가라는 정체성, 또 하나는 동아시아 또는 동북아의 지역 국가라는 정체성, 마지막으로 미국의 동맹이라는 정체성이다. 시기에 따라 특정 정체성이 더 강조됐는데, 미국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던 이승만 정부 시기에는 오히려 미국의 동맹이라는 정체성은 크지 않았다.
일례로 1958년 외무부가 펴낸 <외무행정의 십년> 이라는 책의 목차를 보면 미국보다 일본, 중국, 필리핀과의 관계 설명이 먼저 나온다. 미국과 관계는 그 뒤에 등장한다. 이는 1990년 노태우 정부 시절 외교부가 펴낸 <한국외교 40년>에서도 그대로 유지된다. 지역 외교 문제는 아시아부터 등장하고, 그 다음에 주변 4강 외교나 미국과의 외교로 넘어간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 집권 시기에 출간된 1998년 책에는 지역보다 미국과 동맹이 먼저 언급된다. 4강 외교라는 틀 안에서 한미관계부터 먼저 등장한다. 냉전이 끝나면서 한국이 여러 가지 종류의 세계화의 덫에 빠졌는데 경제적으로 신자유주의 덫에 빠지면서 미국 일변도가 횡행하게 됐다. 이러면서 한국은 동아시아 또는 동북아 지역 국가라는 정체성보다 미국과 동맹이라는 정체성이 앞서기 시작했다. 이후 2008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러한 흐름은 더욱 강화됐다.
1958년 책에는 미국이 한국을 배반했던 역사도 명시돼 있었지만, 2008년 이명박 집권 시기에는 이 역사가 싹 사라진다. 대신 미국이 한국을 살려줬다는 이야기가 먼저 나온다. 책의 순서 역시 미국과 동맹이 먼저 언급되고 지역 문제는 사라진다.
이를 통해 한국은 미국에 경제적‧정치적‧물질적으로 의존하던 때보다 그렇지 않을 때 오히려 정신적으로는 미국에 더 기대는 역설을 확인할 수 있다.
"반기문 대선 도전, 유엔과 한국 정치에 모두 불명예"
프레시안 : 1990년 탈냉전 환상에 빠진 것이 미국만은 아닌 것 같다. 한국도 피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이혜정 : 남한이 남북 체제 경쟁에서 이겼기 때문이다. 냉전 때 남한의 경제는 재벌 위주였지만 최소한의 복지는 했다. 북한이 '남한에는 판잣집이 있고 거지들도 있다'고 남한을 비난하는 선전을 해대니까 이를 무마하기 위해 오히려 복지를 더 챙긴 것이다.
그런데 북한과 체제 경쟁이 끝난 이후에 보수의 논리는 북한을 흡수 통일하는 것밖에 없다는 식으로 흘러갔다. 문제는 남북 간 힘의 격차는 한국에 유리하게 작동했지만 중국과 일본, 중국과 미국의 힘의 격차는 반대로 작동하고 있고, 한반도는 중국이 정전협정의 당사자인데서 잘 알 수 있듯이 미중 세력권의 경계이다.
지정학‧지경학적인 것과 가치나 제도의 교착‧착종이 작용하고 있는 셈인데, 여기서부터 헷갈리기 시작하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경제적으로 중국에 넘어가고 있는데 가치적인 측면에서는 미국의 동맹으로 전 세계로 나가려고 하기 때문이 문제가 생긴다.
그리고 어떻게 해도 남한은 북한을 독자적으로 흡수통일할 능력이 없다. 보수 입장에서는 통일대전을 벌여서 일주일 만에 북한을 쓸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러다 보니 통일 정책도, 지역 정책도 사라지고, 탈식민 분단국가라는 정체성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프레시안 : 한국 외교와 한미동맹의 문제 등과 관련해 외교관 출신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그런 프레임을 대표하는 것 같다.
이혜정 : 최근의 반기문 신드롬도 이러한 남북관계, 지역 문제를 망각한 일종의 유체이탈을 배경으로 나온 것 아닌가 한다. 반기문 전 총장이 어떻게 한국 문제를 알 수 있나? 이건 유엔이나 한국 정치에 있어서 모두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한국이 지금 이승만이나 김구가 와서 나라를 지켜줘야 하는 식민지 국가인가?
10년 간 세계은행 총재를 한 김용이 미국정계에 뛰어드는 가설적인 상황을 생각해보자. '미국의 문제는 경제이니 세계은행을 10년이나 관장한 내가 세계경제대통령이다' 이렇게 외치면서 미국 대선에 뛰어들면 미국인들이 반기겠는가?
반기문 전 총장은 1970년 외무부에 들어갔고 한국은 1991년 유엔에 가입했다. 그는 2006년부터 2016년까지 총장 자리에 있었다. 한국의 대통령이면 한국의 정치를 해야 하는데 한국의 바닥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정치에 끼어드나?
반 전 총장이 성공적인 유엔 사무총장이었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10년 동안 유엔을 책임졌던 사람이면 한국의 사정을 모른다는 게 문제다. 사실 10년 동안 사무총장 직책을 잘 수행했다면 한국의 현실에 대해 몰라야 맞다. 만약 잘 알고 있다면 이건 그만큼 사무총장 임무를 소홀히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한 1946년 유엔 총회에서는 "유엔 회원국은 사무총장의 퇴임 직후 어떠한 정부직도 제공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무총장 자신도 그러한 직책을 수락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4대 총장인 쿠르트 발트하임, 5대 총장인 하비에르 페레스 데 케야르는 이 결의안에 충실했고 각각 퇴임 4년 후에 대선에 도전했다. 반면, 반기문 전 총장은 퇴임 직후 대선에 나올 준비를 하는,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 북한에게 유엔 결의안을 지키라고 강조한 전 사무총장 스스로가 유엔 결의안을 무시하는 중이다. 보수의 다음 대표가 없다보니 벌어지는 일이라고 본다.
프레시안 : 미국이 세계 헤게모니를 잡아가는 과정에서 한국은 가장 긴밀하게 편입됐다. 그것도 전쟁까지 하면서 일종의 군사주의의 촉매가 돼버렸고, 정체성도 그렇게 만들어져버렸다. 그랬던 미국이 이제 '세계 경찰' 역할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트럼프의 당선이 가져온 미국의 변화, 세계 질서의 변화가 한국 위상에 대한 각성의 계기가 돼야하는데 전혀 그런 움직임이 없는 것 같다.
이혜정 : 트럼프에 대해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는 'unprecedented', 선례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갑자기 튀어나온 인물이 아니다. 그럴만한 환경이 조성됐었고, 따라서 트럼프 집권은 단순히 트럼프 한 사람이 집권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으로 봐야 한다.
반기문 전 총장 이야기를 더 하자면, 그가 유엔에 있던 10년 동안 세상이 바뀌었다. 그래서 한국의 정치를 하겠다는 반기문의 해법을 알 수도 없고, 한국 역시 지난해 10월부터 뒤집어지기 시작해서 그 선례를 찾아보기 힘든 국면으로 전개되고 있다. 우리가 딛고 있었던 기존의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신자유주의의 선도자인 로렌스 서머스는 최근 경제가 저성장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는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한다. 그는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복지를 늘리고 국가의 역할을 확대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서머스는 '책임있는 민족주의'라는 구호를 내놓았다. 서머스가 보더라도 신자유주의로는 더 이상 길이 없고 구체적인 경제 실적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시장주의자들은 분배를 먼저 하면 성장이 안 된다고 주장해왔지만, 지금은 시장에 맡겨두면 성장이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다.

▲ 중앙대학교 이혜정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1945년부터 시작된 미국 패권이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대외적으로 깨지기 시작했다. 이번에 트럼프 당선으로 미국 안에서 또 한 번 깨진 셈인데, 지금까지 미국이 이끌어 온 세계질서가 변화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이혜정 : 박정희 향수를 향수로만 볼 수 있느냐는 문제가 있는데, 박정희 식 전략은 폐해가 컸지만 이랬든 저랬든 경제 지표가 올라가고 나라 국부가 커진 것은 사실이다.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은 것도, 미국이 수출 시장을 열어준 것도 맞는 일이다.
그런데 그게 공짜였나? 노동자들의 희생, 민주주의의 희생이 수반됐고 베트남 전쟁에서 적지 않은 한국 국민들이 희생됐다. 또 이 때문에 제3세계를 상대로 하는 한국의 외교는 사실상 어려워졌다. 한국이 탈식민이라는 정체성과 미국의 동맹으로서의 정체성을 바꿔버린 것이다. 일본, 북한과 얽혀있던 문제들도 그냥 넘겨버리고 미국의 동맹국이라는 정체성으로 국제사회에 나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한계가 1997년에 왔다. 박정희 식 경제 모델이 지속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정치‧경제적인 리모델링이 필요했는데 이게 잘못된 방향으로 진행되면서 양극화가 더 커졌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는 남북관계와 지역 외교, 한미관계 등 포트폴리오를 다양하게 가져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현재 한국은 미국에 '올인'한 상황이 돼버렸다.
대학, 넓게는 지성계의 균형도 무너졌다. 1980년대만 해도 당시 대학가에는 미국, 한국, 일본, 유럽 등등에서 박사학위를 한 교수들이 많았다. 그런데 세계화 교육을 한다고 하면서 국제대학원을 만들었는데 전부 미국으로 가면서 오히려 지역 연구는 위축되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한국의 보수층은 가치적인 측면과 경제적 측면 모두 끝까지 미국과 함께 가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런데 이는 한국이 처해있는 경제적인 바탕과는 반대로 간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중국 경제의 자기장에 빨려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민은 중국 경제의 자기장에 빨려 들어가지 않으면서 어떻게 생존을 도모할 것이냐의 문제였다. 그래서 이에 대한 견제책으로 한미 FTA를 추진했다는 분석도 있는데, 보수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러한 고민조차 사라졌다. 오히려 보수정권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한미 동맹을 망가뜨렸기 때문에 이를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미국의 경제와 민주주의는 가라앉기 시작했다. 지난 10여 년 동안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 군사력의 한계가 드러났고, 대침체로 경제위기를 겪었고, 최근 트럼프로 정치의 위기마저 정점으로 치닫고 있다. 미국의 민주주의‧경제‧군사 모두 파국으로 치달았는데도 한국은 미국만을 바라보고 있다. 한국 사회 전체가 미국 중심의 세계화에 올인하면서, 지식이나 자기 정체성의 측면에서 지경학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한반도와 지역의 현실을 무시하는 유체이탈을 한 셈이다.
한미 동맹을 통해 한국은 냉전 시기 동안 안보적 측면을 강화했고 경제 발전을 이루기도 했다. 이걸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힘은 항상 일방주의적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미국과 한국은 양자동맹이었다. 미국이 이야기하는 유럽연합과 같은 자유주의적인 국제질서가 동북아에서도 이뤄졌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미국의 패권이 동아시아에서 지역의 안정자 역할을 했을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한반도에서는 북한의 남침과 남한의 북침을 동시에 막는 이중 봉쇄를 통해서 안정자 역할을 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베트남 전쟁의 경우에는 지역의 불안정과 미국의 분열, 미국패권의 위기를 초래했다. 커스와 같은 미국의 전략가들은 한국전쟁에서 북진 결정이나 베트남 전쟁 개입을 미국이 승리에 도취되어 군사적인 과대 팽창의 오류를 범한 사례로 들기도 한다.
미국이 일정한 안정자로서 중국을 견인하고 일본도 일정하게 누르고 있다는 환상을 1990년대까지는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것들이 하나씩 힘이 빠지고 2007년, 2008년 이후에 문제점들이 판도라의 상자처럼 하나하나씩 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국은 이런 흐름과 반대로 움직였다. 역사를 길게 보면 너무나 황당한 상황이다.
단순히 자주성만 잃었다면 괜찮다. 또 자주성을 잃고 안보를 얻었으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 미국이 냉전시대에 북한의 남침을 막는 것과 같은 안보를 제공해줄 수는 없다. 한미동맹의 강화는 한반도 지역의 안보 딜레마를 강화해서 북한의 핵무장과 사드 논란을 초래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이야기했던 미국과 공유하는 가치, 정치제도, 인권 등과 함께 경제, 안보를 같이 한다는 것도 어그러졌고 박근혜 정부가 언급한 '아시아 패러독스'도 이미 끝난 이야기가 돼버렸다.
아시아패러독스의 전제는 경제적으로는 상호 의존‧협력을 하지만 안보적인 측면에서 협력을 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런데 트럼프가 집권하면서 미국은 경제적으로 중국과 무역 전쟁을 불사하고 있는 상황이고 한미 FTA 역시 재협상을 할 의사를 보이고 있다. 한미 간 경제적으로 상호 의존이 깨지는 상황에 도래한 것이다. 결국 동맹이 상수가 아니라 거대한 변수가 돼버렸다.
동북아 평화구상을 통해 통일대박까지 가려면 한국의 경제력이 북한을 흡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한국은 그런 상황이 아니다. 지난 10월 국군의 날 기념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한국의 제도가 북한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북한 사람들에게 한국으로 넘어오라고 손짓 했는데, 체제의 우월성조차도 국정 농단으로 이미 다 까먹어버렸다.
물론 여기서 변혁을 할 수 있는 광장의 힘이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박근혜 정권이 스스로 먼저 무너진 것 역시 사실이다. 즉 지난해 10월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모든 정상상태의 전제가 다 깨져버린 것이다. 일종의 시스템이 혼돈에 빠진 상태인데, 이 구덩이가 깊으면 쉽게 빠져나오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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