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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시계’ 거꾸로 갔다 부활한 ‘유신 망령’

일취월장7 2017. 1. 13. 10:03

‘박근혜 시계’ 거꾸로 갔다 부활한 ‘유신 망령’

3대 핵심 키워드로 분석한 유신 시대로의 회귀

유지만 기자 ㅣ redpill@sisapress.com | 승인 2017.01.11(수) 15:08:03 | 1421호


# “박근혜에게 한나라당은 ‘나의 당’이었다. 대한민국은 우리 아버지가 만든 ‘나의 나라’였다. 이 나라 국민은 아버지가 긍휼히 여긴 ‘나의 국민’이었다. 물론 청와대는 ‘나의 집’이었다. 그리고 대통령은 바로 ‘가업’이었다.” 전여옥 전 한나라당 의원이 2012년 1월 집필한 자신의 자서전에서 언급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평가다. 전 전 의원은 “박근혜에게 권력이란 매우 자연스럽고 몸에 맞는 맞춤옷 같은 것”이라고도 밝혔다.

 

# 경상북도 구미시에는 ‘박정희로’가 있다. ‘경북 구미시 박정희로 107’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태어난 생가의 도로명 주소다. 구미시는 200억원을 들여 ‘박정희 대통령 역사자료관’을 지을 예정이며, 2002년에는 구미체육관의 이름을 ‘박정희체육관’으로 바꾸기도 했다. 구미시는 올해 40억원을 들여 ‘박정희 대통령 100주년 탄신제’를 치를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 연합뉴스·시사저널 미술팀

© 연합뉴스·시사저널 미술팀


‘최순실 게이트’가 던져준 가장 큰 충격은 바로 ‘시스템 붕괴’다.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만들어진 ‘87년 체제’를 통해 대한민국은 현대적 민주주의 시스템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됐다. 때로 시스템의 부작용이 부각되기도 했지만, 국민의 손으로 만든 시스템은 조금씩 나아질 수 있었다. 하지만 비선실세로 꼽힌 최순실씨의 국정 농단 앞에서 시스템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최씨를 비롯한 몇몇의 사익을 위해 시스템이 악용 당했다는 사실 앞에 절망한 시민들은 87년 6월보다 더 큰 분노를 보이며 광장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시스템의 붕괴는 곧 ‘민주주의 퇴보’를 의미한다. 한 언론인은 “스마트한 시대에 알맞은 형식으로 유신이 부활한 것 같다”고 말했다. ‘유신의 흔적’은 사방에서 보인다. ‘유신의 핵심인사’인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문체부의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김영한 전 청와대 정무수석의 업무일지에서 드러난 언론 탄압 흔적 등이다. 시사저널은 국정 농단 사태를 구성하는 핵심 키워드를 통해 박근혜 정권에서 나타난 ‘유신의 흔적’을 분석해 봤다. 세월을 거스른 것은 박 대통령의 얼굴만이 아니었다.

 

 

‘유신의 핵심’ 김기춘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현재와 유신 시대를 엮는 ‘연결고리’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유신헌법의 기초를 닦았으며, 1972년 12월 내놓은 유신헌법 해설서를 통해 ‘유신헌법은 우리 현실에 가장 알맞은 민주주의 제도를 이 땅에 뿌리박아 토착화시키는 일대 유신적 개혁의 시발점이며 국민은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구국영단을 지지한다’고까지 밝혔다. ‘유신의 설계자’인 김 전 실장의 앞에는 출세 길이 열렸다. 1973년 중앙정보부장 특별보좌관에 임명된 이후 1974년 30대 나이에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으로 승진하게 된다. 이후 1979년 10·26 사태가 발발하기 전까지 정권에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7월18일 청와대에서 열린 신임 장관 임명장 수여식에 김기춘 비서실장과 함께 입장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7월18일 청와대에서 열린 신임 장관 임명장 수여식에 김기춘 비서실장과 함께 입장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박정희 정권의 몰락 후 한동안 권력에서 밀려난 듯했지만, 1988년 만 50세 나이에 검찰총장에 취임하면서 다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특히 1991년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을 진두지휘하면서 혼란했던 정국을 정권에 유리한 쪽으로 되돌리는 데 큰 공을 세운다. 이 사건은 24년 만인 2015년 재심 절차에서야 무죄 판결이 났다.

 

1992년에는 이른바 ‘초원복집 사건’을 일으킨다. 당시 여당인 민주자유당 측에 투신한 김 전 실장은 1992년 12월11일 부산 지역 기관장들을 모아 지역감정을 부추겨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파문이 일었다. 김 전 실장은 이 사건으로 재판에 넘겨지지만 자신이 당시 야인(野人) 신분이었다는 점을 이용해 대통령선거법을 위헌 제청 신청하는 묘수를 내놨다. 결국 헌재에서 대통령선거법의 해당 조항이 위헌으로 결정되면서 검찰의 공소가 취소됐다.

 

2004년 3선 국회의원에 오른 그는 국회 법사위원장 자리도 꿰찼다. 그리고 당시 정권을 잡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의결에 앞장섰다. 국회를 통과한 탄핵안은 결국 헌재에서 기각 결정이 내려지게 됐다. 그는 2013년 8월, 허태열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후임으로 대통령 비서실장 자리에 올랐다. 이후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자 의혹, 통합진보당 위헌정당해산 사건 등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으며 ‘기춘대원군’으로 불렸다. 결국 지난해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가 터지면서 드러난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업무일지를 통해 세월호 여론 조성, 언론 탄압, 문체부 블랙리스트 작성 등에 관여했다는 점이 드러났다. 또한 국정조사에 출석해 “최순실을 모른다”며 발뺌하던 중 최씨를 아는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박정희의 통치 방식 ‘언론 탄압’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자신의 통치 기간 동안 언론을 장악하기 위한 여러 시도를 했다. 1961년 정권을 잡은 이후 민족일보를 ‘북한의 활동을 고무하고 동조했다’는 이유로 강제 폐간하고, 조용수 당시 민족일보 사장을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이듬해인 1962년에는 ‘건전신문기업 육성’이라는 명분 아래 언론 기업들에 저금리 융자 특혜를 제공하기도 했다. 철권통치 아래 언론의 비판적 논조는 자연스럽게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유신 시절의 기조는 현 정권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시사저널은 제1414호 ‘되살아난 유신 망령, 박근혜 대통령 “시사저널에 본때 보여야”’ 기사를 통해 현 정권의 언론 탄압 실태를 고발한 바 있다.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업무일지를 통해 드러난 언론 탄압의 실상은 유신 시절의 그것과 너무 닮아 있었다. “VIP 관련 보도-각종 금전적 지원도 포상적 개념으로. 제재는 민정이” “시사저널, 일요신문 - 끝까지 밝혀내야 - 피할 수 없다는 본때를 보여야. 선제적으로 열성과 근성으로 발본색원” 등의 기록에서는 친(親)정권 언론에는 당근을, 비판하는 언론에는 채찍을 들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특히 ‘비서실장 지시사항’ 혹은 대통령을 의미하는 ‘領(령)’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언론에 대해 같은 인식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故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업무일지에 드러난 ‘언론 탄압’의 흔적 © TV조선 캡쳐

故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업무일지에 드러난 ‘언론 탄압’의 흔적 © TV조선 캡쳐


실제로 정권의 탄압은 유신 시절 못지않았다. 본지에 대한 연이은 고소·고발은 물론 국세청 세무조사 및 가판 판매망에 대한 경찰수사까지 단행됐다. 비선실세에 대한 보고서를 폭로한 세계일보 역시 청와대의 공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세계일보의 보도 3일 뒤 김 전 실장이 압수수색 장소로 세계일보사를 지목했다는 메모도 나왔다. 세계일보는 정윤회 문건 보도 이후 사장과 편집국장이 교체되는 내홍을 겪기도 했는데, 세계일보 내부에서도 청와대의 입김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2년 10월 유신을 선포한 이후 1970년대 중반 긴급조치를 통해 문화예술계를 통제했다. 모든 음반에 대한 검열이 미풍양속 보존, 퇴폐문화 추방이라는 명목으로 강화됐다. 검열제도로 인해 만화·애니메이션 등은 사회악으로 취급당했다. 일반 시민의 의복문화나 두발도 검열과 규제 대상에 올랐으며, 모든 음반에는 강제로 건전가요를 삽입해야만 했다. 금지곡 역시 정권의 입맛대로 결정됐다. 1975년을 문화예술계에서는 ‘가요대학살’이라 칭하기도 한다.

 

 

‘박정희 판박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이 같은 문화예술계에 대한 통제가 박근혜 정권에서 되살아났다. 2016년 10월12일 한국일보 보도로 문화예술인을 분류한 ‘블랙리스트’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이후 2016년 국정감사에서 도종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의해 존재가 확인됐다. 세월호 정부 시행령 폐기를 촉구하는 서명자 594명, 세월호 시국선언을 한 문학인 754명, 문재인 후보 지지선언을 한 문화인 6517명, 그리고 박원순 후보 지지선언을 한 문화인 1608명 등 총 9473명이 대상자에 오른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정부의 지원 대상에서 철저히 배제됐다.

 

블랙리스트 작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물은 김기춘 전 실장과 조윤선 문체부 장관, 김종 전 문체부 2차관 등이 꼽힌다. 조 장관은 블랙리스트가 작성된 시점인 2014년에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재임 중이었다. 조 장관은 국회에 출석한 자리에서 “블랙리스트 작성에 관여한 바가 전혀 없다”고 주장했지만, 최근 특검 수사에서 개입한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이와 함께 국정원 역시 이 리스트를 작성하는 데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박영수 특검팀 대변인 이규철 특검보는 1월6일 브리핑에서 “공식적인 명칭은 블랙리스트라고 하지 않고 ‘문화계 지원배제 명단’이라고 하는데, 존재하는 것은 맞다”며 “일부 명단을 확보해 살펴보고 있다”고 밝혔다. 특검팀은 이 문건에 이름이 올라간 인사들이 실제로 피해를 입었다고 보고 수사를 벌이는 중이다. 이 특검보는 “명단의 최종판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만들어졌고 관리됐는지, 실질적 조치가 행해졌는지 이런 부분에 대해 계속 수사 중”이라고 말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인사로 지목된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 시사저널 박은숙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인사로 지목된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 시사저널 박은숙


탄핵 정국에서 드러난 박근혜의 거짓말

 

2016년 10월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가 본격화된 후 박근혜 대통령은 세 번의 대국민담화와 한 번의 신년 기자간담회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혀왔다. 박 대통령은 담화를 통해 최순실과의 관계, 삼성 합병 개입 의혹 등을 적극 해명했지만 이후 진행된 특검 수사와 각종 언론 보도를 통해 거짓임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취임 후에도 일정 기간 동안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의) 의견을 들은 적 있으나 청와대 보좌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두었습니다.”(2016년 10월25일 박 대통령 1차 대국민담화)

 

“저는 이번 일의 진상과 책임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저 역시 검찰의 조사에 성실하게 임할 각오이며 특별검사에 의한 수사까지도 수용하겠습니다.”(2016년 11월4일 2차 대국민담화)

 

“‘선의’의 도움을 주셨던 기업인 여러분께도 큰 실망을 드려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국가 경제와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바람에서 추진된 일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특정 개인이 이권을 챙기고 여러 위법 행위까지 저질렀다 하니 너무나 안타깝고 참담한 심정입니다.”(2016년 11월4일 2차 대국민담화)

 

“저는 제 대통령직 임기 단축을 포함한 저의 진퇴 문제를 국회의 결정에 맡기겠습니다.”(2016년 11월29일 3차 대국민담화)

 

“(KD코퍼레이션) 그것도 그런 차원에서 기술력이 있다니까 여기도 큰 거대한 기업에 끼어서 제대로 명함 한번 못 내미는 것 아닌가, 알아보고 그런 실력이 있다고 하면 한번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 그런 차원이었어요.”(2017년 1월1일 신년 기자간담회)

 

“(삼성 합병 개입 의혹은) 완전히 (나를) 엮은 것입니다. … 그 누구를 봐줄 생각, 이것은 손톱만큼도 없었고 제 머릿속에 아예 없었어요.”(2017년 1월1일 신년 기자간담회) 


우리는 박근혜를 '국민소환'할 수 있어야 했다

[기고] 민주주의의 근본을 묻다
소준섭 국제관계학 박사    
2017.01.11 17:42:49


광화문 광장에 서서 왜 박근혜가 그리고 그들이 우리 위에 군림하면서 우리를 대표했으며, 왜 우리는 그들의 지배와 통치를 받아야 했던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조금 멀리 생각해보면, 왜 일제로부터 해방될 때 이승만이 돌아와 우리 위에 군림하였는가? 그리고 지금 어떤 이유로 우리 앞의 정당과 유력 주자들이 권력을 쥐어야 하고 우리 위에 군림하려는 것일까? 

이제 난마와도 같은 구체제의 혼돈을 정돈해나가면서 다른 한편으로 시민주권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개벽을 맞이하기 위하여 우리는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 차분하게 질문해야만 한다. 

참된 '공화'란 모든 국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하여 독립전쟁을 벌이던 무렵, '독립'이라는 말은 대역무도한 불온 언어였다. 이 불온한 '독립'이라는 말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고 자신감을 갖게 한 것은 다름 아닌 토마스 페인의 <상식>이라는 소책자였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도 "<상식>을 읽은 뒤 내 가슴 속에서는 독립과 자유의 정신이 들끓기 시작했다. 우리는 무릎을 꿇고 노예가 될 수 없으며, 누구도 우리를 압박하고 착취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토마스 페인은 원고료나 인세를 전혀 받지 않고 이 책을 저렴하게 인쇄해, 독립전쟁에 참전한 민병들은 주머니에 이 책을 넣고서 전투를 벌였다.

그런데 토마스 페인은 이 책에서 당시 국민들이 매우 우매하기 때문에 국민의 이익은 반드시 귀족이 대표해야 한다는 영국 헌법의 시각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이러한 주장이 완전히 사람을 속이는 거짓말이고 사기이며, 모든 사람이 국가의 정치에 참여해야 하며 그것이 곧 참된 공화(共和)라고 역설했다. 

대표는 선거민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논리는 완전한 거짓이며 사기

오늘날 대의정치의 근간이 되는 논리는 바로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표자(의원)는 선거민이 아니라 '추상적으로' 전체 국민을 위한 전체 이익을 추구해야 하며, 선거민에 책임을 지는 명령 위임을 배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의 관계에서 존재하는 것은 오직 국민이 대표자를 선출하는 행위와 대표자가 자기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행위뿐이다. 그리고 대표자의 이러한 행위는 "전체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그리하여 국민을 통제하게 된다.

다시 말해, 대의제에서의 대표자란 더 이상 선거민의 단순한 대변자가 아니며 대리인(Agent)이나 수임자(Kommissar)도 아니었다.  

영국에서 대의 제도는 17세기에 형성되었다. 당시 영국에서 의회란 '대자문회의(大諮問會議)'에서의 귀족들의 논의를 의미하였으며, 의원 1/3 이상이 귀족이거나 이에 준하는 계층으로서 의회는 사실상 상류층의 클럽이었다.  

선거권도 일정한 재력을 지닌 남성으로 한정되었고, 1866년까지 선거권을 지닌 사람은 불과 100만 명으로서 전체 인구의 3% 수준이었다. 이렇게 하여 당시의 의회는 국민의 대의 기관으로 기능하기보다 귀족과 부호들의 금권정치를 유지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대의제를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라고 비판하는 논거는 대의제가 지니는 이러한 발생사적 요인에 근거하고 있다.  

왜 대중은 '통치'의 권리가 없는가? 

18세기 영국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던 휘그주의(Whiggism)는 귀족적 과두제를 옹호했는데, 명예혁명 후 의회가 강력한 힘을 가지면서 영국에서 지배적인 정치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이 휘그주의를 철저하게 반영하여 이론화했던 버크(E. Burke)에 의하면, 의원이란 어디까지나 공적인 업무의 수행을 위하여 독자성을 지닌 공인(公人)으로 행동해야 했다. 그리하여 그는 특수이익을 추구하는 선거민의 대리인이어서는 안 되며 선거민에게 기속(羈束)되어서는 안 되었다. 이 논리는 이른바 선거민에게 책임을 지는 "명령적 위임(imperatives Mandat)'을 사실상 포기하고 있었다. 오직 통치란 이성에 맞게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미덕을 갖춘 자가 담당해야 하고, 국민은 이에 직접 개입하면 안 된다고 강조되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국민들은 오직 자신들을 뽑을 '권리' 혹은 '자유'가 있을 뿐 통치는 자신들처럼 탁월하고 고귀한 사람들만이 담당할 고유 영역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와 주장은 일찍이 미국 독립전쟁 당시 토마스 페인이 지적한 논리 그대로 대중을 오로지 개돼지로만 간주하는 거짓말이요 사기다.

누구를 위하여 정당은 존재하는가? 

현재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의 정치를 그리고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고 있는 정당이라는 존재도 사실 그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다.  

정당정치의 고향으로 칭해지는 영국의 정당사를 살펴보면 17세기 이후 19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정당이란 고작해야 사사로운 '그룹'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최초의 '그룹'인 원정당(圓頂黨; 1641년 영국 의회에서 국왕군의 병사와 의회파 지지자들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졌을 때, 의회파 지지자들이 머리를 짧게 깎았기 때문에 경멸의 뜻으로 불렀던 데에서 유래되었다) 라운즈헤즈(Roundheads)와 왕당파인 기사단 캐버리어즈(Cavaliers)는 각기 의회와 왕권을 배경으로 무력 대결을 벌였으며 마침내 청교도혁명에 이어졌다는 점에서 정당이라기보다 정치적 폭력단체라 할 수 있었다. 이후 의회에서의 대립은 소집파 대 반대파에 이어 휘그 대 토리로 이어졌고, 보수당인 토리당에서 '보수주의적'이라는 용어도 1830년에야 비로소 만들어졌다. 이렇게 하여 정당들이 그나마 오늘날과 같은 현대 정당의 모습은 20세기가 되고서야 비로소 갖춰졌다.  

이때 토리당은 영국국교주의와 지주계급을 대표했으며 휘그당은 귀족, 토지 소유 계층, 부유한 중산층의 이익을 대변했던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정당제도 역시 고스란히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을 보장하는 체제였을 뿐이다.  

선거제도의 개혁 없이 민주주의 없다 

민주주의의 성패란 쉽게 말해 대표를 어떻게 선출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나 현재의 선거제도는 진정한 대표의 선출을 가로 막고 민의를 왜곡하는 대표적인 구체제이다. 지금의 선거제도는 여야 양당의 철저한 독점과 그들의 적대적 공존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장치이다. 동시에 국민들의 선택권을 극도로 제한, 박탈하고 다양한 정치세력과 새로운 신진 세력의 원내 진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함으로써 민의의 반영을 철저하게 왜곡시킨다.

그리하여 현행 선거제도에 토대한 정당정치란 기껏 기득권 정객들이 군림하는 붕당정치의 영구적 재생산을 위한 확실한 보장이며, 이는 "무늬만 민주주의"인 봉건적 귀족정치의 현대판 투영일 뿐이다.  

오늘날 미국의 쇠락은 정치의 다원성과 민의의 반영을 크게 제약하는 독과점적 양당제도에 큰 요인이 있으며,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이 땅의 정치적 난맥상 역시 거대 정당의 독점만을 보장하는 현 선거제도가 그 주된 요인이다.  
완전한 직접민주주의의 시행이 어려운 지금, 최선의 방안은 다양한 소수의 의사(意思)도 원내에 진입할 수 있고, 그리하여 기성 정치권의 독과점을 견제할 수 있는 독일식 정당명부별 비례대표제의 시행이다. 그 길이 촛불 민의를 받들어 참된 민주주의로 가는 최소한의 장치이다.

민의에 배반하는 대표가 소환되는 것, 이것이 민주주의의 기본

권력이란 견제받지 않으면 스스로 무한정 확대 강화하는 자기 논리를 지니고 있다. 미국 건국사를 살펴보면, 초기 지도자들이 가장 집중했던 것은 바로 정부 권력에 대한 견제와 통제 장치의 마련이었다. 그들은 제한되지 않은 권력은 반드시 폭정의 도구로 변질한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이 땅에서는 일찍이 왕정이 무너지고 대의정치로 칭해지는 민주주의가 계승했지만, 그것은 왕정에 가깝거나 사실상 귀족정치에 다름없었다.  

이 땅에서 제왕적 대통령제가 여전히 이토록 위세를 떨치고 있는 것은 시민의식과 시민사회의 미숙한 발전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권력자를 나의 대표라는 동등한 관점에서 보지 않고 상위 위계에 군림하는 불가침의 권력자로 간주하는 사고방식이 아직 우리 사회에 강인하게 온존하고 있다는 반성도 필요한 시점이다.

이제 우리는 왜곡된 주종관계와 거짓된 위임 논리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내가 나를 대표해야 한다. 마을과 지역부터 주민의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대표를 만들어나가며, 노조처럼 노조 대표를 선출하고 그들이 일을 잘못 수행하게 되면 책임을 지고 퇴진하며 다시 새로운 대표를 선출하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대표를 선출하고, 선출된 대표는 반드시 우리의 통제와 감독을 받으며 그 업무 수행에 책임을 진다.  

이것이 곧 민주주의다. 현재 서구 대의제도의 심화되는 위기는 바로 선거민에 대한 대표의 책임을 부정하는 자유위임의 논리로부터 연유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국민소환제는 왜곡된 대의제를 바로잡고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첫걸음으로 기능한다. 대통령부터 국회의원 그리고 지자체장과 고위 공직자들은 국민들이 부여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 때 당연히 책임을 지고 소환되어야 한다.  



“아버지 땐 그나마 제대로 된 관료라도 키워냈지만…”

박정희 정권 때 만들어진 수출 산업 붕괴 위기…‘3개년 경제 개발’ ‘정경유착’ 등 유신 시대 잔재만 되살려

송창섭 기자 ㅣ realsong@sisapress.com | 승인 2017.01.13(금) 08:56:08 | 1421호


시간을 2012년 12월19일 대선일로 되돌려보자. 대선 결과가 나온 직후 외신의 종합적인 평가는 ‘긍정 반, 부정 반’이었다. “박근혜 당선인은 당선 이후에도 한국의 고도성장에 가려진 그늘과 그에 대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역할에 대한 논쟁과 싸워야 할 것”(뉴욕타임스), “박정희라는 유산은 박근혜 당선인에게 자산이자 약점이 될 것”(워싱턴포스트)이라는 등 외신의 반응은 ‘딸 박근혜가 박정희라는 아버지의 후광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에 맞춰져 있었다.

 

정부 출범 이후 펼쳐진 경제정책은 기본 골격부터 정책 추진 과정까지 여러 면에서 과거 박정희 정부를 연상케 한다. 핵심 지지층에게는 박정희 시대의 향수를 불러오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박정희식(式) 경제정책의 핵심은 ‘관(官) 주도의 추격형 경제모델’에 있다. 단기간 내 빠른 경제성장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투자의 우선순위와 자원의 배분을 중시할 수밖에 없었으며, 효율성을 높이는 차원에서 특정 기업에 일감을 몰아주는 특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생겨난 정경유착은 한국 경제의 망국병으로 자리 잡았다. 세계 경영학계가 한국형 경제모델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재벌’(Chaebol)이란 단어는 이런 정경유착의 부산물이다.

 

결과적으로 박정희 시대 경제는 비약적인 성장을 기록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박정희 정부의 18년을 가리켜 ‘한국 경제의 기적’이라고 평가했다. 이 기간 동안 5400만 달러였던 수출은 100억 달러 이상으로 200배, 1인당 국민소득은 82달러에서 1644달러로 20배 이상 늘어났다. 군부독재와 민주정치 억압이라는 비판 속에서도 박 전 대통령이 여전히 높은 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한국 경제를 굳건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왼쪽)이 1977년 9월7일 경북 구미 금성사(현 LG전자) TV 조립공장을 둘러보고 있다. © 연합뉴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왼쪽)이 1977년 9월7일 경북 구미 금성사(현 LG전자) TV 조립공장을 둘러보고 있다. © 연합뉴스


하지만 결과적으로 경제정책에 있어서 박근혜 정부는 박정희 시대를 뛰어넘지 못했다. 국내외 경제·산업 환경이 예전과 비교해 180도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프레임으로 경제를 들여다본 것이 가장 큰 실패요인이다. 대표적인 것이 2014년 1월 신년사에서 처음 언급된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이다. 이름마저 과거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유사하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제3공화국이 출범하기 직전인 1962년 처음 시작해 1997년까지 총 7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2014년 1월 신년사에서 박 대통령은 “기존 추격형 전략은 한계에 직면하고 비정상적인 관행, 수출 대기업 제조업 중심의 불균형 성장 등 구조적 과제들이 산적한 상황”이라면서 “향후 3~4년이 우리 경제의 향방을 좌우하는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박근혜식 3개년 개발정책은 아무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용두사미로 끝날 처지에 놓였다. 동시에 핵심 정책 과제인 창조경제도 정부와 운명을 같이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창조경제 논란은 박근혜 정부의 정책 난맥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박근혜 정부가 꿈꾼 창조경제는 과학기술과 연구·개발(R&D), IT(정보기술)와 과학기술의 융합, 창업과 신산업 창출 생태계 조성 등이 핵심이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창업·벤처가 활성화돼야 하며 그 과정에서 대·중소기업 상생은 선행됐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전국에 설립된 17개의 창조경제혁신센터는 철저히 대기업 중심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자생적인 생태계가 만들어지기란 애초부터 힘들었다고 봐야 한다.

 

이민화 카이스트(KAIST) 교수는 “창조경제혁신센터 역할은 창업이 아니라 인수·합병(M&A)을 포함한 벤처와 대기업의 개방협력 장이 됐어야 했다”면서 “이러한 창업 생태계가 이미 형성돼 있는데, 대기업이 주축이 되고 정부가 후견 역할을 하는 창업 목적의 조직이 옥상옥으로 또 만들어질 필요는 없었다”고 비판했다. 결국 박근혜식 창조경제는 보여주기식(式) 행정과 대기업 중심의 경제정책이 동시에 맞물리면서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5년 7월24일 청와대에서 열린 창조경제혁신센터장 및 지원기업 대표단 간담회를 마치고 대기업 총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박근혜 대통령이 2015년 7월24일 청와대에서 열린 창조경제혁신센터장 및 지원기업 대표단 간담회를 마치고 대기업 총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경제민주화를 좌파 정책으로 여긴 게 패착”

 

반면 대선 전 화제를 모았던 ‘경제민주화’ 정책은 정부 출범 직후 용도 폐기됐다. 대기업 중심의 친(親)기업 정책을 펴기에 경제민주화 정책은 걸림돌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면세점 사업 등을 매개로 일부 대기업에 선심성 혜택을 몰아준 것은 과거 1970~80년대에나 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신세돈 숙명여대 교수는 “재벌 중심 정책의 포기는 시장 지배력과 경제력 남용을 막는 길이며, 공공·민간 부문의 부정부패를 방지하는 길이자 동반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일이었는데, 이를 마치 좌파 정책으로 여긴 것이 패착”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정부가 ‘박정희 프레임’에 빠진 사이 대기업 집중도는 더욱 커지고 있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2015년 수출업 종사자 중 250명 이상 대기업은 전체 기업 중 2.1%지만, 수출액 비중으로는 무려 79.5%에 달했다. 그렇다고 대기업 업황 전체가 좋은 것도 아니다. 박정희 시대에 기초를 닦은 철강·화학·조선·해운업은 사상 최대 불황에 휩싸여 있다. 여기에 집값 급등으로 서민경제에 드리운 위기감은 갈수록 고조되고 있다. 이필상 서울대 겸임교수는 “펌프(산업)가 고장 났는데 마중물(부동산 규제 완화)만 퍼붓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겠느냐”면서 “아버지가 만든 지난 50년의 주력산업 업종은 사실상 붕괴되거나 수명이 다했는데 정작 대통령 본인은 4대 부문 개혁이나 창조경제와 같은 겉도는 이야기만 했다”고 비판했다.

 

정경유착이라는 한국 경제의 고질적인 병폐가 고스란히 드러난 것도 비판거리다. 비선실세인 최순실씨가 주도해 만든 K스포츠재단·미르재단에 성금을 내는 데 ‘전경련’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이 좋은 예다. 소수의 관료가 경제 시스템 전반을 컨트롤하는 방식도 ‘박정희 시대의 유산’이다. 물론 당시에는 경제 규모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았기에 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세계 10위권 경제 규모에서 소수의 엘리트 관료가 경제정책 전반을 이끌어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경제개혁연구소장)는 “내가 말하면 사회구성원 모두가 따를 거라는 생각 자체가 구시대적인 발상”이라고 꼬집었다. 이필상 교수도 “과거 박정희 정부 때는 그나마 제대로 된 관료라도 키워냈는데 지금은 공식보다는 비선라인을 통해 의사결정이 내려지면서 대한민국 공직 시스템 전체가 붕괴된 상태”라고 비판했다.



이러려고 개화했나 백성은 자괴감 들고

1896년 병신년, 아관파천을 단행했던 고종은 이듬해인 1897년 정유년에 경운궁으로 돌아온다. 이후 전제군주제 헌법인 ‘대한국 국제’를 선포한다. 2017년 정유년, 우리는 어떤 리더십을 보게 될까.

김형민 (PD)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1월 11일 수요일 제486호

조선 시대 말기 1896년 병신년, 백성들은 2016년의 한국인들만큼이나 ‘자괴감’에 시달리고 있었단다. 나라의 최고 권력자인 국왕과 세자가 ‘신변에 위협을 느껴’ 자기 궁궐을 버리고 외국 공사관에 몸을 의탁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지속됐으니까. 이러려고 우리가 개화(開化)를 했나 탄식했을 것이고,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의 ‘국정농단’에 어금니를 악물었을 거야. 해가 바뀌어 1897년 정유년, 고종은 벌써 재위 35년째를 맞고 있었어. 개화의 소용돌이에다 봉건 체제에 대한 백성들의 저항, 외국의 탐욕스러운 침탈까지 겹친 격동의 세월을 보낸 임금. 과연 고종은 어떤 군주였을까?

그는 열두 살 때 왕위에 올랐어. 그런데 정환덕이라는 이가 쓴 <남가몽>에 따르면 자신이 왕이 됐음을 인지한 열두 살 소년은 이런 명령을 내렸다고 해. “궁궐 문밖의 군밤 장수 아무개를 죽여라. 그놈은 나에게 단 한 번도 군밤을 공짜로 주지 않았느니라.” 야사(野史)의 기록이고 철이 덜 든 아이의 치기였겠지만 아빠는 이 일화에서 후일 고종이 보여준 통치 스타일의 단면을 엿볼 수도 있다고 생각해.

ⓒ연합뉴스
1897년 정유년 고종이 대한제국 제1대 황제(광무황제)로 등극했다.
1894년 봉기한 동학 농민군은 자신들의 봉기를 빌미로 외세가 개입하자 스스로 해산을 선택해. 그런데 이 사려 깊은 동학 농민군을 짓밟기 위해 고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외국 군대를 불러들였지. 이렇듯 고종은 그 재위 기간 내내 자신의 백성보다는 외국 군대를 더 믿었고, 다스리는 나라의 이익보다는 국왕 개인의 특권을 누리는 일에 더 큰 관심을 쏟았어. 임금으로서 책임감을 지니기보다는 군밤 장수에 대한 복수를 첫 명령으로 내렸던 소년 고종처럼 말이다.

백성들의 빗발치는 요구에 고종은 1년 동안 아관파천을 끝내고 1897년 2월 러시아 공사관을 나서게 돼. 개화파고 수구파고 국왕이 남의 나라 공사관에서 셋방살이하는 꼬락서니가 얼마나 한심했겠니. 그 뭉쳐진 굴욕감은 환궁을 계기로 칭제건원(稱帝建元), 즉 대내외적으로 제국을 선포하고 임금의 호칭도 황제로 격상시키자는 운동으로 승화돼. 왕국이건 제국이건 나라 형편은 똑같은 판에 칭제건원이란 요즘 말로 ‘정신승리’일 수도 있었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에 호응했고 마침내 정유년(1897년) 10월12일 대한제국이 수립돼. 이제는 정말 당당한 독립국, 근대국가로 우뚝 서자는 바람의 ‘황제 폐하 만세’ 소리가 드높았지만 고종 황제가 그 환호 앞에 내민 대한제국 헌법이라 할 ‘대한국 국제(國制)’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대한제국의 정치는 이전부터 오백년간 전래하시고 이후부터는 항만세(恒萬歲) 불변하오실 전제 정치이니라(제2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무한하온 군권을 향유하옵시느니 공법(公法)에 이르는바 자립 정체이니라(제3조). 대한국 신민이 대황제의 향유하옵시는 군권을 침손할 행위가 있으면 그 행위의 사전과 사후를 막론하고 신민의 도리를 잃어버린 자로 인정할지니라(제4조).” 그렇게 황제는 백성의 염원과 역사의 순리를 동시에 거부한다. 어떤 면에서 보면 대한국 국제 아래의 대한제국은 <경국대전>을 내세운 조선 왕조보다도 후퇴한 전제군주제였으니까. 1897년 정유년은 희망으로 부풀었으나 나라님은 희망이라는 풍선의 김을 빼버렸다.

1897년으로부터 1020년 전 정유년, 형편없이 기울어가던 신라의 변방, 송악이라 불리던 오늘날 개성 지역 호족 왕융의 집에 아들이 태어났어. 이름은 왕건. 후일의 고려 태조 왕건이다. 그가 살아가던 세상은 그야말로 난세였어.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뒤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이나마 한 국가의 울타리를 유지하며 살던 한반도 사람들은 다시 후삼국으로 갈라섰고, 서로 죽고 죽이는 혈투를 치렀지. 태봉의 궁예 같은 사람은 신라를 증오한 나머지 신라에서 항복해오는 사람들을 죽여버렸다고 했고, 후백제의 견훤은 신라의 수도 서라벌을 기습해 국왕을 자살하게 하고 그 왕비를 성폭행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는 사실은 너도 알고 있을 거야.

‘타도’하고 ‘근절’하고 ‘격멸’하지 않고도

왕건은 폭정을 일삼던 궁예를 내쫓고 왕이 되긴 했지만 견훤 같은 전쟁의 명수도 아니었고 미륵을 자처하던 궁예처럼 카리스마가 넘치지도 않았어. 그의 무기는 포용력이었단다. 왕건은 아무리 험악하게 싸우던 적수라 해도 일단 손을 잡으면 그 앞에서 서슴없이 먼저 고개를 숙일 줄 알았고 자신의 목숨을 위협한 사람에게도 먼저 손을 내밀 줄 아는 사람이었어. 고 김성한 선생이 쓴 <왕건>이라는 소설에는 이런 장면이 나와. 후백제군에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을 때 왕건의 부하인 신숭겸이 왕건의 의복을 갖춰 입고 왕건 대신 목숨을 버리는 장면이 나와. 그때 신숭겸은 몸을 피하는 왕건에게 다음과 같이 반말로 부르짖어. “네가 예뻐서가 아니다. 천하를 위해서 이러는 것이다.”

ⓒ연합뉴스
북한 개성시 서쪽 만수산 중턱에 자리 잡은 고려 태조 왕건릉.
오래전에 읽은 내용이지만 신숭겸은 정말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이 지겨운 난세를 한시라도 빨리 피를 덜 흘리고 종식시킬 수 있는 인물,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 목숨을 보전해야 하는 사람이었다는 뜻이니까. 아들에게 쫓겨난 후 견훤이 왕건에게 항복할 생각을 했다는 사실 자체로 신숭겸의 희생은 의미가 있었다고 본다. 왕건이 궁예 같은 사람이었다면 견훤이 항복할 생각을 했을까? 몇 번이나 왕건의 목숨을 위협하고 팔다리 같은 부하 장수들을 죽였던 견훤인데 말이야. 하지만 왕건은 견훤이 감격할 만큼의 예우로 그를 맞이해. “견훤을 일컬어 상부(尙父)라 하고 남궁을 관사로 주고 위(位)를 백관의 위에 차지하게 하며 양주를 사하여 식읍을 삼게 하고 겸하여 금백과 노비 각 40구와 구마 10필을 하사”한단다.

천하의 견훤이 이렇게 되자 신라 역시 천년 사직을 스스로 거둬버리게 돼. “나라의 운수가 이미 다하여 다시 기업을 보존할 가망이 없는지라 원컨대 신하의 예로서 뵙고자 합니다.” 썩어도 준치라고 천년을 이어온 신라였어. 마지막 마의태자처럼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이 결코 이상하지 않은 관록을 지닌 나라였지. 그러나 신라 사람들은 왕건에게 나라를 통째로 들어 바친다. 후삼국 최후의 대전이라 할 일리천 전투에서 견훤은 고려군의 선봉에서 말을 달렸고 후백제군 장수들은 옛 주인을 보고는 창을 던져버리고 견훤에게 달려와 엎드렸어. 후백제의 이름은 그것으로 끝나고 말았지.

여차하면 누구에게든 수그릴 줄 알았고, 강릉의 실력자 김순식처럼 자신에게 칼을 빼들고 반기를 들었던 사람도 기꺼이 끌어안았으며, 견훤처럼 자신의 목숨을 경각으로 몰아넣었던 원수에게도 ‘아버지’라 불렀던 통큰 남자, 정유년 닭띠 왕건은 자칫하면 세 낱으로 갈려 얼마든지 더 죽고 죽이며 원한과 악업을 쌓았을 한반도 사람들을 아우르는 왕조를 창건하게 됐어.

2017년 정유년이 밝았다. (음력설은 좀 남았다만) 올해는 우리가 새로운 지도자를 선택해야 하는 해야. 누가 이 나라의 지도자가 돼서 어떤 리더십을 발휘할지 모르겠지만 제발 바라는 일은, 우리가 2016년 병신년에 당했던 뼈아픈 배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1897년 정유년에 뒤통수를 쳤던 대한국 국제 같은 퇴보에 황망해하지 않으며, 증오와 불신으로 점철된 사회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키고 누가 누구를 ‘타도’하고 ‘근절’하고 ‘격멸’하지 않고 상식에 기반한 포용력으로 상처투성이가 된 한국 사회를 다듬을 왕건 같은 리더십과 마주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적어도 2016년 11월, 12월 우리 가족을 비롯해 광장에 나섰던 수많은 촛불들은 그에 합당한 지도자를 찾을 복 정도는 있을 거라고 아빠는 외쳐본다. 새해 복 많이 많이 받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