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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김제동, 헌법을 논하다 - '재벌 변호인'들이 장관 되는 세상부터 바꾸자

일취월장7 2017. 1. 3. 10:01

시민 김제동, 헌법을 논하다

김동인 기자 astoria@sisain.co.kr 2017년 01월 02일 월요일 제485호

기이한 풍경이었다. 목소리를 높이려 광장을 찾은 사람들은 조용히 둘러앉아 한 사람을 지켜봤다. 텔레비전에서 자주 보던 얼굴, 요즘 들어 텔레비전에서 보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사람들 사이 홀로 우뚝 선 그는 차례차례 시민들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어떤 사람은 욕을 뱉어냈고, 어떤 이들은 자신이 광장에 왜 나왔는지 조곤조곤 설명했다. 한 청년이 말했다. “썸도 타야 하는데 썸 탈 시간이 없어요. 토요일이 없어서. 광장 다녀오면 주말이 없어요.” 한탄하는 청년을 보며 그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크흑, 아이고.” 한 초등학생이 나와 박근혜 대통령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이렇게 말했다. “이 시간에 <메이플 스토리>를 하면 렙업(레벨 업)이 되는데, 시간이 너무 아깝습니다.” 그가 답했다. “저는 지금 이 시간부로 여덟 살이 되면 대통령 투표권을 주자고 제안합니다.”

그의 감탄사에, 그의 코멘트에 광장에 몸을 기댄 사람들은 다 같이 웃었다. 다 같이 느꼈다. 웃기고, 슬프고, 괴롭고, 허탈한 이 감정이 옆에 앉은 낯선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시대가 옭아맨 이미지가 있다. 방송인 김제동씨를 둘러싼 ‘투사’ 이미지가 그렇다. 진영 논리에서 김제동은 단편적으로 소비된다. ‘탄압받는 연예인’이라는 이미지는 그가 정부를 거칠게 공격하기를 기대하게 만든다. 하지만 경북 성주에서, 서울대병원에서, 광화문광장 촛불집회에서 그는 거친 말이 아닌 정제된 말로 공감을 이끌어냈다.

2016년 광장의 시민들은 권력자들이 휘두르는 힘에 가장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무기로 헌법을 택했다. 김제동씨는 광장에 밀려나온 분노를 헌법으로 엮어내며 모두의 감정을 대변했다. “여러분은 지금 헌법적 권리를 행사 중입니다. 함께 비를 맞읍시다.” 김제동씨는 광장에서 헌법을 가장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전문 강사였다. 학자와 언론이 거창한 말로 언급하던 헌법을 김제동씨는 대중의 언어로 풀어서 설명했다.

ⓒ시사IN 조남진

“우리는 주권자이며(제1조), 인간다운 삶과(제34조) 쾌적한 생활(제35조)을 할 권리가 있다. 그런데 대통령이 특수계급을 만들어(제11조 2항 위반) 나라를 혼란하게 만들었으니(제84조 위반), 그를 쫓아낼 권리(제65조)가 있다.”

그는 헌법 구절을 차근차근 읊었다. “헌법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지니고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그런데 그 국가가 국민이 행복할 권리를 추구하지 못하게 했다면 헌법 제10조 위반이고 저는 그것이 내란이라고 생각합니다” “청와대는 박근혜 대통령을 석방하라” “내가 나라 걱정 때문에 장가도 아직 못 가고 이 자리에 서 있다. 헌법 제36조(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한다) 위반이다”. 시민들은 절규 대신 환호와 웃음으로 ‘김제동식 헌법 풀이’를 즐겼다.

“우리가 일개 시민 아니라 그들이 일개 권력”

촛불이 거리를 밝힌 두 달간, 대중 언어로 바꾼 헌법의 다른 의미는 곧 ‘상식’이었다. 이 기간에 김제동씨는 전국을 누볐다. 서울·대전·창원·광주·대구 등지에서 텔레비전 속 자신이 즐겨 쓰는 방식으로 ‘촛불 토크’를 진행했다. 조연을 자처하는 김제동식 공감형 토크에서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당신이 정당하다는 것을 대중 언어로 전달했다.

광장에서 한 시민이 말했다. “저는 일개 시민에 불과합니다만….” 김제동씨는 말을 가로막고 바로 되물었다. “왜 시민이 ‘일개’입니까? 시민인 당신이 진짜 권력자입니다. 대통령이 일개 권력자에 불과합니다.” 거리에 울려 퍼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노래가사처럼, 김씨는 헌법으로 광장의 시민을 하나로 뭉치게 했다. 거리에서, 주권자라는 인식보다 더 굳건한 자존감은 없었다.

김제동씨는 투사가 아니다. 큰 목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얼마나 비상식적인지를 꼬집으며 권력자의 위선을 풍자해왔을 뿐이다. 그에게 싸움을 거는 사람들은 많지만, 싸움 앞에서도 무엇이 비정상인지를 짚어내는 것이 촛불에서도, 촛불 이전에도 그가 취한 태도였다.

경북 성주에서 그는 “성주에 주민등록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외부 세력이라면 대통령도, 국무총리도, 국방부 장관도 주민등록이 되어 있지 않으니 성주의 일에 대해 이야기할 자격이 없다”라고 말했다. 자신이 예전에 남긴 발언(군대에서 4성 장군 부인에게 ‘아주머니’라고 말했다가 영창 생활을 했다는 발언)을 문제 삼은 새누리당 국회의원에게 “국정감사에서는 내 얘기가 아니고, 국방의 얘기를 해야 한다. 세금 받고 일하는 국방위 공무원은 세금 주는 국민들의 안위에 대해 얘기해야 상식적으로 맞는 것”이라고 응수했다.

거리에서도 웃음을 잃지 말자는 그의 말과 행동은 사실 이번 촛불 국면을 가장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모습이다. 분노하고 저항하되 겁먹지 말고 상식의 힘을 믿는다. <시사IN>이 올해의 인물로 그를 꼽은 것은, ‘방송인 김제동’이 아닌 ‘시민 김제동’이 다른 시민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었기 때문이다. 그를 텔레비전에서 쉽게 볼 수는 없어도, 텔레비전에서 보는 것만으로는 느낄 수 없는 자신감을 우리는 광장에서 그와 함께 경험했다.



'재벌 변호인'들이 장관 되는 세상부터 바꾸자

[김윤태 칼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자유시장 만능주의가 진짜 문제
김윤태 고려대학교 교수     
2017.01.03 08:45:26



2016년 한국을 뒤흔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비선 실세 최순실의 민낯뿐 아니라, 더 중요하게도 청와대-국민연금-재벌을 연결하는 거대한 부패의 커넥션을 보여주었다. 창조 경제 센터도 재벌과 권력의 부정한 야합으로 전락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은 관치 경제와 정경 유착을 만든 박정희 모델과 단절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들은 마치 자유 시장과 정경 분리가 궁극적인 해결책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과연 박근혜가 박정희의 딸이듯이 박근혜 게이트는 박정희 모델의 산물일까?

죽은 박정희 때리기 

한국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박정희 모델의 죽음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관치 경제와 정경 유착이 격렬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서양 학자의 용어를 빌어 '정실 자본주의'(crony capitalism)이라는 용어가 널리 퍼졌다. 하지만 관치 경제에 대한 비난의 시작은 더 시간을 거슬러 가야 한다. 1980년 전두환이 '경제 대통령'이라고 불렀던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의 경제 자유화 조치 이후 김영삼의 '세계화'에 이르기까지 박정희 모델은 서서히 죽어갔다. 


외환위기로 한국 경제가 무너지면서 국가가 경제를 지도하는 박정희 모델은 지구화 시대에 걸맞지 않은 낡은 유물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김대중 정부에서 노무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자유 시장'이 지배적 담론이 되면서 박정희 모델은 개발 독재의 산물로 혹평을 받았다. '우리에게 대안이 없다'는 주장은 자유 시장 만능주의를 합리화하고 박정희 모델은 '죽은 개'가 되었다. 지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박정희 모델의 후과라고 보는 주장은 사실상 죽은 개를 두들겨 패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비극 

1990년대 후반 한국 경제가 신자유주의의 논리에 따라서 급속하게 재구성되면서 경제의 금융화와 지구화가 가속화되었다. 그 결과는 저성장과 양극화이었다. 특히 유연 노동 시장의 출현으로 저임금 비정규직이 전체 노동자의 절반으로 급증하면서 사람들은 불안의 늪으로 빠졌다. 실직, 은퇴, 질병의 사회적 위험에 대비하는 사회 안전망이 취약하기 때문에 빈곤의 덫에 걸린 사람의 삶은 끝없이 추락했다. 교육과 의료의 시장화는 국내 총생산을 높일 수는 있지만 높아지는 교육비와 의료비는 사람들의 행복감을 떨어뜨렸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말한 대로 "동물들은 더 풍요로워지지 않는데 농장만 배를 불려가는 것 같았다". 한국 사회를 '헬조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자유 시장의 논리가 사회를 지배하면서 빈부 격차와 사회적 배제가 증가했다. 상위 1퍼센트의 소득과 재산은 급속하게 상승하지만 중산층은 몰락하고 있다. '마태 효과'처럼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빈부 격차는 더욱 커졌다. 빈곤 노인, 비정규직, 청년 실업자, 한부모 가정, 장애인 등 주변화된 집단은 사회에서 배제되었다. 자살, 안전사고, 고독, 우울증이 그들을 사로잡았다. 이는 공공 영역의 시장화와 사회 문제의 개인화가 만든 끔찍한 비극이다. 대기업의 지배와 공공 영역의 쇠퇴는 곧 민주주의의 후퇴를 의미한다. 시장 독재는 박정희 모델이 만든 것이 아니다. "모든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고 말한 정치권의 실패와 무능이 만든 결과이다. 정치가 사회에서 사라지면 곧 기업이 사회를 지배한다.  

왜 신자유주의는 죽지 않는가? 

2007년 세계를 흔든 금융 위기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는 여전히 건재하다. 1980년대 이후 30년간 세계를 지배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효과적으로 자유 시장이 경제 성장을 위한 최상의 수단이라고 설득한다. 규제되지 않은 금융시장이 전 세계를 지배할수록 경제 불안이 커지고 위기가 심화하지만 모두 입을 다물고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등장하면서 탈규제, 공기업의 사유화, 노동 유연화는 더욱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고삐 풀린 대기업은 강력한 힘을 유지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위기를 겪으면서 사망하기보다 정반대로 더 커다란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정부가 경제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고 주장하던 대기업은 위기에 부딪히면 곧바로 정부가 막대한 구제 금융을 지원하라고 요구한다. 거대 기업과 거대 은행은 너무나 커서 실패하지 않는다는 신화를 가지고 있다. 반면에 경제 위기가 심화될수록 정부의 재정을 삭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빈곤층을 위한 복지 지출이 경제에 부담이 된다고 반대한다. 불평등을 줄이려는 사회정의와 민주주의의 논리는 대중영합주의와 표퓰리즘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한국 민주주의가 신자유주의의 제물이 되었다.  


우리는 지난 30년 동안 신자유주의화가 진행되는 동안 신자유주의가 자유시장에 그다지 충실하지 않다는 사실을 목격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국가는 노골적으로 자유시장을 무시하고 대기업에 특혜를 제공했다. 국가는 기업이 사회를 지배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 시장과 국가의 대결을 조정하는 정치의 역할은 사라지고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았다. 영국 사회학자 콜린 크라우치가 <포스트민주주의>에서 묘사한 대로 형식적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글로벌 기업이 가장 강력한 정치적 행위자가 되었다. 대기업은 정치에서 강력한 압력을 행사할 뿐 아니라 중요한 내부 행위자가 되었다. 대기업의 지나친 지배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현실이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시장 독재에 맞선 민주주의가 중요 

신자유주의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거나 옹호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장 큰 책임을 가지고 있다. 2016년 촛불집회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나 대통령은 탄핵 청구가 이루어졌지만, 공범자인 재벌 대기업은 모든 책임을 부정하였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재벌은 전경련 탈퇴를 선언했지만, 그들의 힘이 근본적으로 약화한 것은 아니다. 광화문 광장에서 '재벌 총수 구속 수사'를 외치지만 국회 청문회는 아무것도 밝히지 못한 채 끝났다. 검찰 특별수사본부도 빈손으로 간판을 내렸다. 재벌을 최대 고객으로 모시는 로펌 김앤장에 검찰, 법원 간부들이 퇴임 후 줄지어 들어가면서 재벌은 초법적 존재가 되었다. 재벌 비리 해결사 김앤장 출신 변호사가 국회의원과 장관이 되는 세상이다. 박정희 시대의 군부 독재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시장 독재로 대체되었다.

촛불 집회에 모인 시민들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분노뿐 아니라 삶의 고통에 대한 자신의 불만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모였다. 노동 악법, 농가 파탄, 청년 실업, 비정규직, 자영업 몰락, 보육 대란, 전세 대란, 가계 부채의 고단한 현실이 촛불을 든 1000만 시민을 광화문으로 이끌었다. 2016년 시민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박근혜 퇴진뿐 아니라 반드시 사회 경제적 민주화를 이루어야 한다.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재벌-언론-검찰의 삼각동맹을 깨뜨리는 민주적 개혁이 시급하다. 국가가 보통 사람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구체제를 바꾸기 위해 혁명적 변화가 필요하다. 지금 한국 사회에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제 민주화, 복지 국가, 산업 민주주의 등 다양한 대안이 등장하고 있다. 2017년 대선의 시대 정신은 기업의 지배와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자유시장 만능주의를 넘어야 한다.



'시민혁명'이 탯줄 된 강력한 정당 정치 만들어야

[김민웅의 인문정신] 촛불 시민혁명, 정치의 몸을 만들다
김민웅 경희대학교 교수      
2017.01.03 08:29:00


정치적 단두대로 올라가는 층계

폭풍우를 가둘 수 있다고 믿었던 자들은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확신은 너무도 강해 심판의 날이 자신들의 목덜미 가까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이들이 몰랐던 것은 그 밖에도 허다하다.지금까지 열심히 남을 짓밟고 올라가던 계단이 정치적 단두대로 가는 길목이었다는 것을 몰랐고, 옥문을 자기 마음대로 열고 잠그던 과거가 그들의 지울 수 없는 죄목이 될 줄도 몰랐다.  

몽테 크리스토 백작으로 변신한 에드몽 당테스의 유명한 대사, "너를 찌르는 것은 이 검이 아니라, 너의 과거다"가 그대로 이뤄지고 있는 역사 앞에서 영원한 거인 타이탄으로 살아갈 줄 알았던 자들은 난쟁이들의 반란에 점차 속수무책이 되고 있다. 마녀는 일곱 난쟁이가 있는 곳을 찾아내 일망타진할 줄 알았지, 이들의 손에 들린 촛불이 자신을 태울 불길로 번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몸과 머리가 분리된 시각은 이들의 숨이 멎고, 민중들이 비로소 숨을 쉴 수 있게 된 사건의 시작이었다. 저들이 호흡하는 날은 민중들이 질식해온 세월이었다. 혁명은 이처럼 악귀의 숨통을 단숨에 끊고 이들로 말미암아 죽어가고 있던 이들의 목숨을 되살리는 경건한 의술이자, 제의이며, 역사적 선고이다. 그래서 윤리적이며 종교적이자 근거가 분명한 과학인데다 법의 정신이기도 하다.  

역사의 반동을 꿈꾸는가 

역사의 반동을 갈망하는 자들이 반격을 기도하겠지만, 근대의 복장을 착용한 봉건왕조의 수명은 종료되고 있다. 파시스트의 후예들이 장악해온 권력은 '비상계엄'을 요구하고 "군대여, 일어나라"고 외치고 있으나, 그야말로 이미 사멸한 껍데기 앞에서 얼이 빠진 자들이 중얼거리는 효력이 떨어진 주술일 뿐이다. 이 음산하기 짝이 없는 주술정치는 막을 내렸다. 애초의 의도와는 다르게 마침내 차르의 목을 비틀고야 만 괴승 라스푸틴의 저주는 이 땅에서도 반복되었고, 둘 다 묘비명도 없는 먼지로 사라진 것처럼 여기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아직 마음을 놓기는 이르다. 귀족들이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왕을 공격했다가 자신들의 특권을 지켜내고 있었던 왕정체제를 위기에 빠뜨렸던 것처럼, 지배세력 내부의 정치적 내전은 이들의 예상과는 달리 촛불 시민혁명의 길을 내었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왕의 몰락은 귀족들의 몰락과 같은 단어임을 알게 되자, '이만하면 된 거 아니냐'고 윽박지르기도 하고 설득하기도 하고 새로운 거짓말을 지어내고 있기도 하다.

이들의 목적은 단 하나, '시민혁명의 한계를 정하라'다. 혁명이되, 혁명이 아니게 하는 방법을 고안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말은 촛불 시민혁명이라고 추켜세우면서 의회의 문을 시민에게 열지는 않고 봉쇄해버린 제도권 정치에도 이들 귀족 패거리들과 한통속인 자들이 적지 않다. 근대국가의 간판 아래 유지된 봉건왕조의 하수 세력인 검찰관들과 비밀경찰인 국정원의 혁파를 입에 올리지 않으면서 개헌을 주장하고 있는 자들도 자기들의 권세를 이 기회에 크게 길러 나갈 요량에만 골몰하고 있다.  

촛불 시민혁명은 자칫, 왕은 고꾸라지고 귀족들의 지배는 도리어 강화되는 현실과 맞닥뜨릴 수 있다. 시민들이 법의 주체가 되고 혁명의 중심에 서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들은 이제 촛불을 내려놓고 시민들은 귀가하고 정치는 자기들에게 맡기라고 훈계하려들 것이다. 촛불집회의 장기화는 경제를 위기에 빠뜨리고 제도적 안정의 길을 막을 뿐만 아니라, 선동가의 대중적 유혹에 정치가 넘어갈 수 있게 한다고 경고하려 들 것이다. '혁명'이라는 말은 '위험'과 동일시되고 '일상으로의 복귀'가 답이라고 여기저기서 구식군대의 행진곡처럼 군가를 틀듯 떠들어 댈 것이다.  

게다가 난데없이 나타나 자기가 구세주라고 내세우는 자들도 출몰해, 시민혁명의 기세에 눌려 목숨을 구걸하던 자들을 이리저리 모아 정치는 난잡하게 만들고 시민들의 힘을 갈라치기 하려 들 것이다. 사람들은 또다시 절망하고 지쳐갈 것이며 대권의 깃발을 든 자들을 중심으로 흩어진 채 지금까지의 연대를 지난 시절의 희미한 옛 사랑으로 여기고, 매일 짜증 나는 난투극에 몰입할지도 모른다. 몰락을 두려워하고 있는 귀족들이 노리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 2016년 12월 31일 '박근혜 퇴진 10차 촛불집회'까지 총 1000만 명의 시민이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들었다. ⓒ프레시안(최형락)


삼위일체의 정치신학
 

어떻게 할 것인가? 적어도 세 가지를 삼위일체로 만드는 정치신학의 발견과 확립이 필요하다.  

촛불 시민 광장에는 지도부가 없다. 그러나 그 판을 깔아 모두가 주인공이 되게 한 이들이 있다. 이들을 우리의 뇌리에서 삭제해서는 결코 아니 된다. 이들은 바로 시민혁명의 역량이 태어나게 한 우리 모두의 힘이다. 폭풍우를 가두려 했던 자들과 맞서 행진로를 설계하고, 경찰과 법의 잣대가 봉쇄망이 되지 않게 하며 한 사람의 목소리에 천만의 무게가 실리도록 한 이들의 노고는 거듭거듭 각인되고 찬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들의 조력이 있기에 우리는 광장의 한복판에 역사의 새로운 무대를 세우는 것과 함께 감옥의 열쇠를 우리 손에 되찾아오는 함성을 지를 수 있었다. 모든 깃발이 존중되고, 모든 구호가 연대의 힘을 만들어냈다.
 
결국, 혁명의 단계가 진화하면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힘과 시민혁명의 운동역량을 광장에 담아낸 힘이 하나가 되는 지점을 확보해야 한다. '전국 도처에 시민혁명의 거점마련과 함께 새로운 지도중심을 만드는 시민혁명 역량의 조직화'는 시민 권력의 주권적 지배를 위해 반드시 이루어내야 할 과제이다. 적폐청산과 개혁입법 그리고 정권교체에 이르는, 아직 누구도 작성해보지 못했던 이른바 해도(海圖)없는 항로를 뚫어내기 위해 요청되는 우리 모두의 역사적 의무가 여기에 있다.

책을 읽는 시민혁명과 새로운 정당정치 

두 번째로 우리는 시민혁명의 사상적 회로를 꾸려야 나가야 할 것이다. 이제 어찌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탄식으로 변모해서는 아니 될 것은 물론이다. 그래서 지난 역사의 창고에서 우리가 쓸 수 있는 고서들을 골라내고 미래의 나침반으로 사용할 수 있는 치열한 성찰과 논쟁이 시민혁명의 정치교육으로 자리 잡도록 해야 할 것이다. 책을 읽지 않는 혁명은 혁명의 깊이를 만들어 낼 수 없고 허튼수작과의 댓 거리로 시간을 허비하는 어리석음을 정치적 격변의 임무처럼 여기도록 우리를 오도할 수 있다.  

함께 알아가야 할 바가 얼마나 많은가? 세계 도처의 혁명의 경험, 법의 정신, 제헌의회의 경험, 경제와 외교의 역사 속에서 찾아내야 할 지혜, 문학과 예술의 힘에 대한 깨우침, 사상과 의식으로서 일상화된 혁명을 위해 함께 읽고 토론하고 나누어야 할 집단적 의지는 무한한 진화를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한낮에도 꾸는 꿈이며, 칠흑 같은 밤에도 선명하게 보이는 산길이며 우리 손에 쥐어진 삭지 않는 도낏자루다.  

그래서 이 모든 힘은 최종적으로, 강력하게 민주적이며 진보적인 정당을 혁명의 주된 동력으로 만들어가는 토대가 되도록 해야 한다. 직접민주주의의 요람인 시민 권력과 그대로 탯줄이 이어진 정당이 아니고서는 촛불 시민혁명의 역사를 감당할 수 없다. 권력은 언제나 배신의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기만의 습관을 버리지 못한다. 이 오랜 질병을 퇴치하기 위해 저질러야 할 사건은 귀족정치의 허위를 끊임없이 폭로하고 누가 진정한 민중의 벗인지를 밝혀내는 일이다.  

허위에 대한 적나라한 질문과 공세 없이 진실의 정치는 불가능하다. 왕당파들은 평민의 복장으로 갈아입고 위장하고 있거나 파르티잔들이 지나는 숲길에 매복 중이며, 공화파 속에는 왕당파들의 스파이가 들끓고 있기도 하다. 상대의 정체를 묻는 일은 따라서 이 시기,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고 출신이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의 역할과 진정성이 우선이다. 전향한 왕당파는 자신의 귀족신분을 내세우면서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면 말만 공화파인 자들보다 나을 수 있다.  

폭군의 목, 그리고 우리의 자유 

1894년 동학으로부터 100년을 넘는 역사가 촛불 시민혁명에 담겨 있다. 민중의 삶과 민족의 미래를 지켜내려는 역사의 의지가 세계사의 파도와 합류하고자 한다. 격류가 틀림없다. 폭풍이 불 것이다. 그러나 두렵지 않다. 우리 자신이 곧 그 맹렬한 바람이기에.

난폭한 정치는 무너지고 야만의 세월은 조종(弔鐘)을 울릴 것이다. 2017년은 앞으로 100년의 시간을 좌우하는 결정적 순간이 된다. 먼저 폭군의 목이 잘리는 것을 보고 싶다. 포악한 왕을 베지 않고 완성되는 혁명은 없다. 그 머리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는 지금까지 그가 매단 목숨이 끊어졌던 것보다 더 큰 소리로 세상에 지진을 일으킬 것이다. 그것은 그 머리의 힘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자른 힘 때문이다.  

자유는 그로부터 일상의 현실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