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문화, 예술

“왕의 목을 쳐야 공화국이 된다” - 최장집의 '경제민주화 담론' 비판

일취월장7 2016. 12. 31. 10:41

“왕의 목을 쳐야 공화국이 된다”

엄기호 활동가(사진)는 청년의 무기력 뒤에 ‘싸그리 갈아엎고 싶다’는 적개심이 깔려 있다고 파악했다. 그것은 계통이나 구축의 언어가 없다. 그는 촛불집회에서 ‘리셋’ 너머로 나아가려는 희망을 보았다고 말했다.

이오성 기자 dodash@sisain.co.kr 2016년 12월 29일 목요일 제484호


1995년 일본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 주인공 신지는 “모두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희망 따위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고 지른 비명이었다. 많은 젊은이가 이 비명에 공명했다. 누구도 이들에게 차마 말을 걸지 못할 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원령공주>를 통해 답신을 보냈다. “살아라, 너는 아름다우니까.”

2016년 우리 사회의 청춘들은 “세상이 망해버려야 한다”라고 말한다. 흙수저로 태어나 헬조선을 견디다 못한 이들이 쏟아내는 절규다. ‘노오력’은 허망하고 세상은 요지부동이다. 사회학자 엄기호는 20여 년 전 미야자키 하야오처럼 이들에게 말을 건넨다. 최근 저작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를 통해서다.

교육 현장에서 만난 보통 사람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단속사회> 등을 펴낸 엄기호 인권연구소 창 활동가가 이번 책에서 주목한 키워드는 제목 그대로 ‘리셋(reset)’이다. ‘싸그리 갈아엎고 싶다’는 욕망이 우리 시대의 심연에 꿈틀대고 있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리셋은 혁명의 전조라기보다는 계통 없는 ‘과격화’에 가깝다.

이번 촛불집회에도 리셋에 대한 욕망은 깔려 있다. 물론 리셋 너머로 나아가려는 희망도 존재한다. 현실정치도 리셋과 희망 사이에서 소용돌이친다. 그는 한 호흡 멈추고 시선을 돌리자고 제안한다. “광장의 조증과 일상의 울증 사이에서 허우적거리지 말고 긴 시간감각으로 역사를 마주하자”라는 것이다. 이번 겨울 그는 촛불의 한복판에서 촛불 이후를 생각하고 있었다.



ⓒ시사IN 윤무영

왜 리셋이란 단어에 주목했나?



그동안 청년을 표현하는 키워드는 ‘무기력’이었다. 교육자나 정책 입안자들은 이 무기력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말해왔다. 나는 이 문제 설정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여러 청년과의 대화를 통해 무기력 뒤에 깔린 것이 적개심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아무리 ‘노오력’해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에 대한 적개심이 세상을 리셋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건 혁명으로서의 급진화와는 다르다. 과격화다.

적개심의 실체가 뭔가?

우리 사회가 구제불능이라는 인식이다. 좌파도 우파도 내 편이 아니다. 우파가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다면 좌파는 정의를 독점하고 있다. 그러니 이 세상을 싸그리 치워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에 대해 처음엔 내 주변에서도 과장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헬조선 신드롬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더라.

과거에도 혁명이 아니라 ‘전복’을 말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때와 무엇이 다른가?

과거엔 조상, 즉 계보가 있었다. 마르크스든 트로츠키든 어떤 조상이 있었다. 지금은 그런 게 없다. 그들은 스스로 ‘고아’라는 표현을 쓴다. 역사의 미아라는 것이다. 과거의 모든 역사를 망각하면서 시대의 첫 아이들이 되고 싶어 하지만, 그것이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리셋의 언어는 있지만 구축의 언어가 없다.


ⓒ연합뉴스
청년전략스페이스 대학생 기획단이 ‘청년, 살려야 한다’라는 주제로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왜 그런 적개심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몇 해 전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그것이 잘못된 문제 제기라고 봤다. 청년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충분히 분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분노하면 행동할 거라고 생각한다. 아니다. 분노해도 해결될 것 같지 않으면 그저 쌓아둔다. 이게 결국 헬조선으로 터졌다. 어쩌면 사람들이 분노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것에 대한 분노가 쌓여왔는지도 모른다.

리셋은 결국 어디로 향하게 될까?

여기엔 원한이 깔려 있다. 니체가 말한 ‘르상티망(Ressentiment:강자에 대한 약자의 원한)’ 같은 것이다. 이것은 결국 복수를 부른다. 각자 자기 삶을 이 꼴로 만든 원흉을 찾아 복수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이런 복수의 정념이 무서운 것은 복수를 위해 내가 파괴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정치적 영역에서든 사회적 영역에서든 우리 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이 꽤 있다.


ⓒ시사IN 이명익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에서는 서로를 동원의 대상이 아니라 동료로 여기기 시작했다.

리셋을 바라는 게 젊은이만은 아닐 텐데.



노인의 복수심도 상상 이상이다. 한국의 노인들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486’으로 대표되는 민주화 세력이 자신을 무시하고 모욕했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 생각이 맞다. 정치·문화적으로 우리는 계속 노인을 소외시켜왔다. 사례는 수두룩하다. 그 결과 지난 대선에서 그들이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는 것으로 복수한 거다.

어떤 식으로든 복수를 하면 해소가 될까?

안 된다. 그럼 어떻게 될까. 사회학자 이종영씨가 말한 ‘혁명의 흉내’를 내게 된다. 혁명이 실패한 후에도 그것이 계속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예컨대 마오쩌둥 시절의 문화대혁명이 그랬다. 우리가 소망하는 건 제도와 체제를 바꿔서 우리의 일상을 존엄하게 하는 건데 거꾸로 우리 일상을 전부 광장으로 옮겨버린다. 그러곤 하루 종일 앉아서 정치만 한다. 인터넷에서 논쟁하고 댓글 달고…. 이게 혁명의 흉내다. 문화대혁명이 사실 마오쩌둥의 권력을 지켜주었듯 이런 혁명의 흉내를 통해서 권력을 공고화하는 세력이 따로 있다.

촛불집회에도 그런 징후가 있나?


촛불이 기로에 서 있다. 지금 우리가 촛불집회에서 뭘 경험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200만이라는 숫자를 강조한다. 대중을 점으로 보면서 옆에 있는 사람을 동료 시민이 아니라 동원의 대상으로 여긴다. 이를 통해 누군가를 처단하는 선에서 멈추려 한다. 여기에서 머물고 말 것인가. 내가 이번 촛불집회에서 주목한 건 이런 거다. 집회 내용을 수화로 통역하고 차별과 혐오가 없는 집회를 열자고 주장했다. 우리가 서로를 동원의 대상이 아니라 동료 시민으로 여기기 시작했다는 방증이다. 중대한 변화다.

확실히 이번 촛불집회는 과거와 좀 다른 것 같다.


촛불집회 이전에 우리는 세월호를 말하지 못했다. 세월호 리본을 달고 있으면 언젯적 세월호냐며 시비 거는 사람도 있었다. 이제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사라졌다. 박근혜 정부의 실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운명공동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국가가 나를 보호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공유하게 되었다. 이번 집회에 나가는 보통 사람들을 보면서 많이 놀란다. 이들은 최순실이 싫어서 집회에 나가는 게 아니다. 이 사회가 지긋지긋한 것이다. 이번이 아니면 우리 사회를 바꾸지 못한다는 절실함이 있다. 집회 시작부터 끝까지 간절하게 촛불을 들고 서 있는 이들을 보면 다 보통 사람들이다. 이들이 새로운 결사체가 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본다.

왕의 머리를 잘라버리고 모든 정치적 부재의 책임을 지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말했는데, 사회가 혼란해지는 것 아닐까?

집회 끝나고 청소하는 것 봐라. 일부에서는 치안에 순응하는 것 아니냐고 비판하는데 자세히 보면 청소를 지나치게 열심히 하지 않나. 이건 하나의 퍼포먼스다. 우리에게 자치 능력이 있다는 시위를 하는 것이다. 이런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나라에서 왕의 목을 친다고 나라가 혼란해질까. 1980년 5월 광주를 보라. 그 시국에서도 도둑 한 명 나오지 않았다. 어찌 보면 지금 한국은 공화국이 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도 서 있다. 공화국이란 사실 ‘우리 모두가 왕의 살인자’라는 뜻이기도 하다.

‘촛불 이후’를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광장의 조증과 일상의 울증을 반복하고 있다. 이 간격이 커질수록 트럼프 같은 정치인이 대중의 인기를 끌게 된다. 그들은 검투사처럼 말하고 행동하며 대중을 흥분시킨다.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도 그런 정치인이 나타날 수 있다.

세월호 참사 유족과 백남기 농민 유족들이 아직 사람이 패배하지 않았음을 가르쳐주었다고 썼다.

한국 사회는 우리가 서로를 불신하고 이간질하게끔 만들었다. 그동안 국가에 맞서 죽은 이의 존엄을 지키려는 사람은 미치거나 범법자가 되었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 유족과 백남기 농민의 유족은 정신의 힘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미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권력의 마수에 걸려들지 않았다. 나는 이것이 (국가권력에 맞서) 인간이 패배하지 않았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장집의 '경제민주화 담론' 비판…"산업적 시민권을 요구하자"

[기고] 노동, 노동자, 그리고 '노사정주의'의 재정립
최장집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2016.12.29 15:38:07

박근혜 대통령이 터무니없는 국정 농단 사건의 주역으로 밝혀지면서, 박근혜 정권의 모든 정책은 전사회적으로 끊임없이 의심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은 한국의 정치, 사회, 경제적 적폐의 더께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계기로 작동했다. 세계의 정치, 경제 질서가 변화하는 '격동기'의 길목에서, 우리가 구축해 살아가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이제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처럼 절박한 상황에서 지난 5년 여간 한국 사회의 지배적 위치를 점했던 '경제민주화 담론'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우리는 그간 사회를 이루는 최소의 단위, 즉 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를 소홀히 했다. 노동 문제를 협소화시켰다. 물론 이는 자본과 정치권력을 독점해 온 기득권 계층의 '프레임 오염시키기'에 말려든 결과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누려야 마땅했을 '산업적 시민권'을 못 본 체했다. 노동 문제를 '그들의 것'으로 치부했고, '경제'를 위해 그것을 희생시키는 것이 마땅하다는 묵계에 의해 움직였다. 

노동이 빠진 경제민주화 담론을 비판하고, 노동 운동과 시민 운동이 변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한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글을, 필자의 동의를 얻어 싣는다. 이 글의 원제는 '노사관계의 민주화와 '산업적 시민권'의 실현을 향하여'이다. 편집
 
1. 경제민주화 담론의 문제
 
한국사회에서 노동자들만큼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되는 사회 집단은 없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부정적인 편견의 대상이 되는 사회 집단을 꼽으라면 노동자들과 노동자들의 조직체인 노조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 연장 선상에서 노동자, 노동운동은 정치적으로 배제 또는 억압되고, 노동자들은, 우리 사회의 성장 혜택으로부터 불공정한 배분의 대상이 된다. 여기에는 민주화 이후 보수적 정부들이나 진보적 정부들이나 큰 차이가 없다. 

혹자는 경제민주화를 시대정신이라고까지 말하지만, 이 말은 조직노동자들과 그들의 운동이 민주적 가치와 규범, 그리고 제도 속으로 포용 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담지 못한다. 경제민주화 담론의 중심 주제인 재벌개혁 이슈에서도 노동 문제는 그 중심 요소의 하나로 포함되지 못하고 있다. 사회 복지 정책을 운위할 때도 노동조합의 역할을 함께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노조의 역할 없는 사회 복지 체제의 확대는 분명 '복지관료행정체제'의 역할과 권한, 복지 전문가들의 역할을 확대하면서, 관료주의와 온정주의를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대기업, 중소하청기업 내에 노조가 허용된다면, 또 그것이 자율적이라면, 그리고 대재벌 기업의 사업장, 회사 내의 작업장이나 일터의 분위기는 훨씬 더 민주적이 되고, 일에 대한 윤리와 열성, 자유와 개인 이니시어티브를 더 확대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대졸자들의 직장체류기간이 왜 그렇게 짧은 것인지, 또는 노조가 허용되지 않는 중소기업에 왜 대졸자나 좋은 인력이 취업을 회피하는지에 대해 정책결정자들이나 기업들은 잘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정치인들과 정책결정자들은 중소기업에서의 인력 수요와 대졸자들의 인력공급 사이의 미스매치에 대해 말하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한 노조의 긍정적 역할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기업 내의 자체 혁신과 자발적 노동 윤리를 창출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그러한 기업 구조를 통해 세계시장에서 경쟁하는 것은 얼마나 효율적이고, 효과적일 수 있을까에 대해 회의적이다.  

2. 노동과 노동자들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노동과 노동운동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노동운동의 내용과 성격 역시 달라져야 한다. 노동자, 노동운동은 제조업 부문에서 우리가 보통 노동자, 노동조합이라고 말할 때의 의미보다는 훨씬 넓다고 할 수 있다. 노동자들을 직접 일하는 사람, 일을 통해 사회경제적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으로 정의하는 것이 더 좋고, 더 옳다. 노동자라는 말은 극히 넓은 의미를 가진다. 그러할 때 노동 문제는 모든 사회 구성의 중심에 위치한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동자라고 말할 때, 산업부문 가운데서 특히 제조업생산부문의 일하는 사람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것은 좁은 의미에서의 노동자를 말할 뿐이다. 그럼으로 일반적 의미에서 노동자는 생산직 노동자, 사무직 화이트칼라, 서비스 부문에서 일하는 사람들, 그리고 소(小)자영업자 등, 여러 다른 기능적 범주에서 일하는 사람 모두를 포함한다. 

우리가 보통 노동 문제라고 하면 노사 간 대립, 갈등이 일단 머리에 떠오르고, '불손하다', '성장의 발목을 잡는다', '국가의 중심적 가치와 목표를 실현하는데 장애물이다' 이런 인식이 강하다. 노동자 하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성원이라고 생각하고, 칼 마르크스의 계급 혁명과 연결시키게 되고, 나아가서는 북한 체제의 공식 이데올로기와 뭔가 관련된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것은 큰 오해가 아닐 수 없다.  

사실 계급 문제를 제일 먼저 말했던 사람은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정치 이론의 시작, 민주주의의 시작 단계에서부터 부자와 빈자 간의 계급 갈등은 그 중심 주제의 하나이다. 프랑스 혁명 때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 헌법을 이론적으로 설계해서 헌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미국 4대 대통령인 제임스 매디슨도 미국 연방국가의 제도적 원리를 구상하고 발전시킬 때 노동 문제로 발생하는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해 어떤 것보다 깊이 생각했다. 그 가운데서 마르크스는 계급갈등을 혁명이론으로 발전시켰던 대표적인 급진적인 사회이론가이자, 사상가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노동문제를 보는 관점, 그것을 이해하는 데는 여러 이론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요컨대 노동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3. '산업적 시민권'의 요구  

노동 문제를 배제하는 것은 일을 통해 먹고 사는 사람들의 인간됨, 인간의 자유와 평등함, 인격성과 자기존중, 이러한 인간적 삶의 핵심적 가치를 제약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인권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것은 가장 기초적인 면에서 시민권에 상응하는 말이다. 2차 대전 후 영국에서 사회복지체제의 발전과 당위성을 이론화한 사회학자 T.H. 마샬의 이론을 따르면, 보편적 인권을 기초로 시민권 개념이 출현한 18세기로부터 20세기 전반기에 이를 때까지 시민권은 진화하면서 확대돼 왔다. 19세기 중후반 이후 보통선거권의 확대를 뒷받침한 정치 참여의 권리로서 정치권으로,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그 사회가 경제 발전의 결과로 획득하게 되는 성과를 개인의 사회 경제적 생활을 위해 분배받을 수 있는 사회적(경제적) 권리로 확대 발전돼 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땅히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산업적 권리(industrial rights)에 대해서는 마샬이 그 중요성을 언급했다 하더라도, 이를 시민권, 정치권, 사회권을 중심으로 한 일반적 시민권(citizenship) 개념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 점에서 1980년대 초 사회학자 안소니 기든스가 산업적 권리가 시민권 개념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노동자들이 생산 부문의 작업 현장에서 그리고 노동 현장에서 사용자 측과 대화하고 교섭할 수 있는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말한다. 

무엇보다 결사체로서의 노조를 조직할 수 있는 권리, 경영 측과 평등하게 교섭할 수 있는 노동자/노조의 권리를 내용으로 한다. 그리고 기업과 작업현장에서 경영 측과 노조가 대화하고 교섭하듯이, 전국 수준에서도 노조가 상호 인정과 존중을 통해 사용자 단체와 교섭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한다. 또한 노동시장에서의 임금에 관한 단체교섭을 할 수 있는 권리 등을 포함한다. 물론 산업적 시민권은 노조가 노동자들의 권익과 의사를 대표하고 정부의 정책 결정 과정에도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4. 한국에서의 노사정 3자 협력기구는 유럽의 코포라티즘적 제도인가?

박근혜 정부의 노동 정책은 노사정위원회를 설치하고, 노사정합의를 통해 노동시장 구조개혁을 추진해온 것을 중심으로 한다. 여러 개혁 이슈들 가운데서도 노동자파견법 개정을 밀어붙이고, 노동자 평가를 강화하는 것을 통해 해고의 범위를 사실상 확대하고, 노동자들에게 불이익을 안겨줄 내용들이 이 기구에서 중심적인 쟁점으로 부각된 바 있었다. 

이 제도의 문제는 형식에 있어서는 합의적 측면을 가질 수 있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격렬한 노조의 반발을 불러오는 내용으로 합의를 강제한 억압적 성격이 강했다. 이를 억압적, 배제적 코포라티즘(Corporatism, 흔히 정부의 개입을 전제한 '노사정주의'로 번역된다. 편집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에서 하고 있는 것은, 공권력의 동원을 통해 노조로 하여금 합의하도록 강제하는 권위주의적이고 배제적인 '국가코포라티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에서의 코포라티즘은 70, 80년대를 통하여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에서 그 전성기를 누렸던 사회협력적인 '사회적 코포라티즘'은 아니다. 

이 시기 유럽에서의 코포라티즘은 노조가 자발적으로 노사정협력기구에 참여하여, 정부의 소득 정책을 추진하는데 협력했다. 스스로 임금을 억제하고, 노동 시간을 줄이면서, 기업 이익 창출에 협력하고 경제 성장 둔화에 대응하면서 재정 압박을 완화하는데 솔선하여 스스로 그들의 이익 실현을 자제했다.  

노조는 노동자들의 이익 실현에만 몰두하는, 자기 이익 실현을 위한 결사체만은 아니다. 노조는 기업의 이익 실현에 협력하고,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그리고 경제 불황기 사회 전체의 경제 성장을 위해 스스로의 이익 실현을 절제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칼럼은 <노동사회> 192호(2017년 1.2월호)와 한국노동사회연구소 홈페이지에도 실렸습니다. (바로가기) 


'경제 민주화' 담론을 비판한다
[윤효원의 '노동과 세계'] 노동자의 90%가 '87년 체제'의 혜택 못 누려
윤효원 인더스트리올 컨설턴트      
2016.12.30 14:28:08

노동의 관점에서 바라본 '87년 체제'의 한계는 헌법에 명시된 노동 3권인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충분히 보장하고 실현하지 못한 데 있다. 최장집 교수의 글을 빌리면, "산업적 권리(industrial rights)를 시민권, 정치권, 사회권을 중심으로 한 일반적 시민권(citizenship) 개념에 포함시키는"데 실패했던 것이다.

최 교수에 따르면, 산업적 시민권이란 "결사체로서의 노조를 조직할 수 있는 권리, 사용자와 평등하게 교섭할 수 있는 노동자·노조의 권리, 기업과 작업현장에서 사용자와 노조가 대화하고 교섭하듯 전국 수준에서도 노조가 상호 인정과 존중을 통해 사용자 단체와 교섭할 수 있는 권리, 노동시장의 임금에 관한 단체교섭을 할 수 있는 권리, 노조가 노동자들의 권익과 의사를 대표하고 정부의 정책 결정 과정에도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노동 3권이 부정된 '87년 체제' 

백낙청 교수는 현 정세의 특징을 "헌법 수호 운동"으로 규정하고, "현행 헌법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의미의 호헌이 아니라 헌법 제1조 등 민주공화국의 골격을 지켜내자는 것으로 앞으로 실현할 개헌과는 별도로 헌법이 안 지켜지던 나라를 헌법이 지켜지는 나라로 바꾸는 한층 본질적인 혁명"으로 분석했다.  

백 교수는 헌법이 지켜지지 않은 이유는 한국전쟁 이후 정전협정체제 아래 분단이 고착되면서 북한과 대치하는 특수한 상황을 감안하여 기본권 조항의 효력이 정지될 수 있다는 '관행'이 일종의 '이면 헌법'으로 존재해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제왕적 대통령제의 뿌리며 87년 체제의 태생적 한계로 남아 낡은 부패세력의 대대적 반격을 허용한 것"이다.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를 제한하거나 인정하지 아니할 수 있다"는 문구로 상징되는 '이면 헌법'의 대표적 사례가 노동 3권이다.  


노동자의 90%는 '결사의 자유' 못 누려
 

노동 3권에서 가장 기초적 권리는 단결권, 결사의 자유(freedom of association)다. 안타깝게도 민주주의의 시작인 결사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노동자가 너무 많다.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거나 못한 노동자 비율이 90%에 달한다. 입법부의 반노동 입법, 행정부의 반노동 정책, 사법부의 반노동 판결이 가장 큰 이유다. 노동자의 '산업적 시민권'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사용자의 전투성(militancy)도 문제다. 덧붙여 노동운동 자체의 부족함, 특히 자기 만족적인(complacent) 전략과 전술도 지적되어야 한다.  

노동자 권리와 이익의 헌장인 단체협약에서조차 결사의 자유를 부정하는 경우가 많다. 조합원 가입 범위 조항이 그것이다.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할 노동조합 스스로 노동자의 권리를 부정하는 수치스러운 조항을 없애기 위한 특단의 조치가 있어야 한다. 이 문제는 기업별 노조주의의 청산 및 산업별 노조 건설과 연결된다.

'기업별 노조주의', 대다수 노동자를 배제한 87년 체제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기존 노동조합에 가입하거나, 새로 노동조합을 결성할 권리가 충분히 실현될 때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 문제도 해결의 단초를 찾을 수 있다. 사업장 밖으로의 단체협약 효력 확장 제도가 유명무실한 우리나라에서 (기업별 단체협약의 사업장 내 구속력을 고려하더라도) 단체협약의 적용을 받는 노동자 비율은 많이 잡아야 12% 안팎이다.

노동조합이 조직되어 있더라도 단체협약을 짓밟는 사용자가 적지 않음을 고려하면, 단체협약 적용률은 노조 조직률 10%에 못 미칠 수도 있다. 이러한 한국적 상황에서 단체협약 적용률 제고는 노조 조직률 제고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단체협약의 양도 문제지만, 질도 문제다. 질의 문제는 단체교섭의 대상 및 수준과 관련되어 있다. 이익(interests) 사안은 교섭 대상이 되는데, 권리(rights) 사안은 교섭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이익 개선의 전제 조건으로서의 권리 보장을 부정하는 희한한 논리가 횡행하고 있다.
 
특히 노동조합을 통해 구현되는 노동자들의 집단적 권리(collective rights)에 대한 정부와 사용자의 합작 공세가 거세다. 단체교섭의 역사성, 즉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고 이익을 개선하기 위한 평화적 수단으로서의 단체협약이라는 현대 사회의 상식을 부정하는 목소리가 널리 퍼져 있다.
 
기업별 노조주의를 뛰어넘은 산업 수준의 교섭은 원천봉쇄당하고 있다. 산업 수준의 단체교섭을 가로막는 법률을 폐지해야 한다. 노동조합의 형태가 노동자들이 자주적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듯, 단체교섭의 형태도 노사가 자율적으로 결정할 문제다. 단체교섭의 의제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 기업과 산업 등 어느 수준에서 단체교섭을 할 것인가는 법률을 통한 개입 대상이 아니라 노사관계의 영역에서 자치적으로 결정할 문제다.  

노동 3권은 민주주의 지속가능성의 엔진 

갈기갈기 찢겨 걸레가 되어버린 단체행동권도 회복해야 한다. 헌법에 없는 사용자의 직장폐쇄권이 헌법상 권리인 단체행동권과 대등한 지위로 격상되어 무차별 행사되고 있다. 파업을 무력화시키는 대체근로가 횡행하고 있다. 공공부문의 단체행동권은 "필수유지업무"라는 반헌법적 제도로 인해 사실상 부정되고 있다. 무엇보다 파업의 절차와 진행에서 국가와 자본의 부당한 개입과 방해가 폭넓게 허용되고 있다. 단체행동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못하면 단체교섭권은 물론 단결권, 즉 결사의 자유도 제대로 설 수 없다.

노동 3권은 서로 유기적으로 교차하면서 꼭짓점을 이루며 노동자의 권리와 이익이라는 삼각형을 지탱하고 있다. 어느 하나에 문제가 생기면 삼각형 자체가 바로 설 수 없다. 노동 3권 없는 경제민주화는 내용 없는 형식에 지나지 않기에 경제민주화 자체의 지속가능성을 상실하게 된다. 이는 김대중-노무현 자유주의 정권 10년이 민주주의 강화로 이어지지 못하고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극우 파시즘 체제로 퇴행한 근본 이유다.

노동자의 90%가 '87년 체제'의 혜택 못 누려 

2017년.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30년이 흘렀다. '87년 체제'의 결정적 결함은 1987년 헌법에 보장된 노동 3권이 하위 법률에서 부정되면서 훼손, 변질, 왜곡된 데 있다. 그 결과, 90%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87년 체제'가 구축한 민주주의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결사체로 단결하여 단체로 교섭하고 행동하는 경험을 통해 민주주의를 신뢰하고 지지하는 계급(class)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개별화되고 파편화된 무기력하고 초라한 일개 '시민(citizen)'으로 전락했다.  

스스로를 지탱할 사회경제적 세력을 갖지 못한 민주주의는 지속가능할 수 없었다. 이것이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이 민주주의를 굳히는 데 실패한 이유다.

김누리 교수는 '촛불' 정세를 두고 "광장 민주주의가 현장 민주주의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평가하면서 "광장에서 위대한 민주주의 혁명을 이루었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지극히 비민주적인 일상을 살아가는" 현실을 지적했다.  

"광장 민주주의와 현장 민주주의가 비대칭적으로 여전히 괴리"되어 있는 상황에서 일터, 학교, 가정이라는 후방이 '촛불 시위'의 전방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한 민주주의의 현장이라는 것이다.  

노동 3권, 사회 통합과 경제 위기 극복의 출발점 

2017년 새해는 격변기가 될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진로를 둘러싼 사회 계급들의 투쟁이 한층 격렬해질 것이다. 경제 상황이 어려운 가운데 전개될 정치적 갈등은 사회적 통합과 안정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이럴수록 총체적 혼란을 극복할 실마리를 노동3권의 회복과 실현에서 찾아야 한다.  

이를 최장집 교수는 "조직노동자들과 그들의 운동을 민주적 가치와 규범, 그리고 제도 속으로 포용"하는 것으로 표현했다. 국민의 다수를 이루는 노동자가 민주주의의 수혜자가 되고, 이를 통해 경제민주화가 추진 동력을 얻게 될 때, 정치적 민주주의는 정상적 궤도에 올라 지속가능성을 보장받을 수 있다.  

노동 3권의 온전한 실현을 통한 '산업적 시민권'의 회복은 2017년 경제 위기 상황에서 사회 통합을 유지하면서 한국 사회의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가장 유력한 방안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