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교육의 자식들'이 촛불을 들었을 때
처음에 보면 지팡이로, 우산으로, 모자로 보인다. 개는 개로, 고양이는 고양이로 보인다. 그러나 조르주 쇠라가 그린 그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지팡이도 그 무엇도 아니고 단지 점들일 뿐이다. 2016년 일곱 차례 이어지고 있는 촛불 집회도 겉보기에는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 낸 '스마트한 시민들'의 평화 혁명이지만, 그 심층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다른 것을 목격하게 된다. 다른 것? 어떤 다른 것?
어떤 한 사람이 자신과 똑같이 행동하는 수많은 이들 사이에서, 묵묵히, 몇 음절 되지 않는 동일한 구호만을 십 분이 넘도록 반복해서 목청껏 외치는 단순 동물로 환원되는 일이 가능한가?
그와 같은 행동을 한 시간이 넘도록 추위에 떨며, 선 채로, 반복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는 분명 이성의 광기이지만, 그 광기 속에서 우리는 그것을 단 한 번도 광기로 느끼지 않았다. 그 광기는 광기의 주체들이 서로를 격려하며 재생산하는 온기의 광기이며, 그 주체들은 단일 대오의 목소리라는 주체로 결집된 비-주체들이었기 때문이다.
즉, 그 구호를 외치고 있을 때, 그 구호의 고음 속에서 조용히 우리를 감격시켰던 건, 우리가 너, 나의 대립적 주체로 서 있지 않고, 대립적 주체성의 소멸 속에서, 우리라는 주체를 함께 세운다는 단순한 사실 그 자체이다. 마치 쇠라의 그림에서 점들이 모여 형상을 이루는 것처럼, 우리는 역사의 그림을 완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우리라는 주체를 우리가 세우려는 데에는 다급성이 있다. 우리는 각자가 여왕과 시녀의 가내수공업식 밀실 통치 앞에서, 미륵(미르, K) 재단에 774억 원을 상납한 재벌의 상투적인 불의 앞에서 '쓸데없이' 약자였기 때문이다. 이 '쓸데없음'의 인지는 통분을 낳았지만, 실은 속고만 있었던 자기 자신의 무력감에 대한 분노도 거기에는 섞여 있었다. 2016년 촛불은 그러므로 자기 자신의 욕됨과 무력감을 설욕하려는 욕구를 포함한 약자들의 분노, 즉 르상티망(ressentiment)의 표현이다.
물론 이 2016년 버전의 르상티망은 다음 몇 가지 점에서 이전 버전들과 사뭇 다르다. 우선, 여왕과 시녀, 내시들의 작태가 '어처구니 없는' 정도여서, 우리의 뇌에서 분노와 허망, 웃음이 관계되는 호르몬들이 동시다발로 배출되었다는 것. 이 사태는 패러디 전문가들의 두뇌를 자극했고, 급기야 집회 현장은 웃음과 축제의 장, 평화 시위의 장이 되었다는 것.
둘째, 개별 시민, 친구, 가족 단위로 스스로 참여한 전 세대를 아우르는 시민-네티즌이 집회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로 활동했다는 것. 더욱 중요하게는, 탄핵 국면에서 비박계 새누리당 의원들에게 직접 압력을 가함으로써 간접 민주주의의 한계를 일시적으로나마 극복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2016년 겨울 한국의 시민들은 역사에 명예로운 족적을 남겼다.
그런데 우리가 눈을 씻고 다시 살펴봐야 할 점이 한 가지 있다. 각자도생의 좁은 삶 길만을 걷길 강요당해 온, 그리하여 넓은 삶의 지평을 볼 기회를 거세당했던 '무관심 세대'가 대거 거리로 뛰쳐나와 자발적 데모스가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번 촛불집회 참가자 중 최대 다수(45%) 참가자 집단이 바로 지하철에서 결코 자리를 양보할 도덕적 능력이 없는 '축소된 인간형'의 세대인 2030세대라는 점 말이다. 영화 <엑스 마키나(Ex Machina)>
이들의 공통점은 '짤방'을 공유하는 등 SNS를 잘 다룬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 임시직, 계약 노동, 저임금 노동 등 노동 현실이라는 거대한 몬스터에 대항할 힘이 거의 전무하다시피한 경제적 (잠재적, 실제적) 약자들이라는 점이다. 거리에 울려 퍼진 이들의 구호 뒤에는, 불안한 자신의 삶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정유라로 상징되는 경제 부정의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분노와 반감이 잠류하고 있다. 이것은 '내가 지금 이따위 땅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라는 근본적인 자문을 동반한 분노와 반감으로, 이들의 거리 나섬은 나섬 이전에 내몰림의 성격이 짙다. 거리를 가득 메운 건, 화가 나서 참을 수 없는 그들 자신의 삶, 그 살덩이였다.
내몰린 자는 반격해야 한다.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로 1단계 과업은 완수되었지만, 포스트 박근혜 시대를 제대로 만들어갈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의 일로, 또 과제로 남아 있다. 적폐청산·국가개혁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구시대의 적폐와 단절하여 새로운 제도와 기풍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에 백번 찬동하지만, 그것만큼 시급한 건 경제적 압박과 공포에 짓눌린 이들을 (이들은 10~30대만이 아니라 거의 전세대가 아닌가?) 구원해 그들을 도덕적 인간, 연대하는 인간으로 회복해내는 일이다.
좌파 기득권은 눈 감아도 되나?
대통령을 끄집어내린 위대한 한국인들
7주 동안 전국을 뒤덮은 국민들의 촛불집회는 거대한 해일과도 같이 정치권을 강타했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던 야당들도 그 기세에 눌려 탄핵 진영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절반 가량의 여당 의원들도 결국 표결에서 합세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치 생명이 끝날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박근혜 씨는 끝까지 권력을 내놓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잔머리를 굴렸으니, 결국 탄핵 심판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지난 3년 10개월에 걸친 박근혜의 집권 기간은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그는 처음부터 마치 전제군주와 같이 권위주의적인 태도로 국민들을 대했고, 어떤 대화나 소통도 거부했다. 심지어 장관들과도 대면하지 않으려 했다. 뜻에 맞지 않거나 자신에게 저항하는 사람들은 검찰총장이나 여당의 유력 간부라 할지라도 가리지 않고 그 자리에서 끌어냈다. 청와대 안보실장과 국정원장 자리에 군인 출신을 앉힌 다음 공안 몰이를 일삼았고, 뚜렷한 명분도 없이 통진당 해산을 무리하게 밀어붙였다.
세월호 참사를 납득할 수 없는 방식으로 처리하고 그 진상 규명을 막았으며, 개성공단 폐쇄로 남북관계를 파탄시키고, 일본과 위안부협정 및 한일군사보호협정을 제멋대로 체결했고, 사드 배치 결정으로 한국의 위치를 동아시아 국제 정치에서 매우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또 편파적인 노동법 개정을 추구하고, 국정 역사교과서 편찬을 시도하는 등 반동적 태도도 보였다. 언론에도 재갈을 물려 KBS 이사장에 '뉴라이트' 인물을 앉히는 등 신문과 방송을 거의 완전히 장악하고 걸핏하면 고소와 벌금 폭탄으로 국민들의 알 권리를 제한했다.
그런데 이 모든 정책에서 보인 독선적인 태도가 그의 것인 줄만 알았더니, 이제 알고 보니 최순실이라는 엉뚱한 인물이 뒷선에서 개입한 결과였다. 말하자면 공적 기구를 배제하고, 자격이 없는 사적 인맥들을 통해 거의 모든 정책을 처리함으로써 관료 기구를 능멸한 것이다. 국민들은 물론이지만, 보수 쪽에 속하는 콧대 높은 고위 관리들이나 장군들까지도 분개할만한 일이 벌어졌다. 부정과 부패는 그 필연적인 결과일 뿐이다.
이제 늦어도 몇 달 뒤면 헌법재판소에서 판결이 내려질 것이다. 만약 탄핵이 가결되면 법 규정에 따라 두 달 안에 대선이 치러지고, 새 정권이 들어서게 될 것이다. 나는 일부 사람들이 우려하듯 헌재가 국민의 뜻을 거스르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물론 보수 세력은 최대한 판결을 늦추려 할 것이므로, 어느 정도 늦어질 가능성도 있으나 거기에도 한계는 있을 것으로 본다. 여하튼 국민들이 헌법재판소를 계속 주시하며 필요하면 적절하게 압박을 가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프레시안(최형락)
믿을 수 없는 야당 세력들
탄핵 문제가 헌재로 넘어가자마자, 각 정당과 정치인은 다음 대선에서 이해득실을 따지며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재인 씨는 탄핵 이후에도 계속 박근혜 씨의 즉각 퇴진을 외치고 있는데, 빨리 선거를 치러야 가장 지지율이 높은 자신이 당선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반기문 씨도 이제 본격적으로 대선 출마를 저울질하는 것처럼 보인다. 탄핵 국면에서 급부상해 지지율 3위가 된 이재명 씨는 더불어민주당 내 여러 후보자와 공동팀을 만들자는 제안을 했는데, 뉘앙스로는 문재인 씨를 빼고 하는 이야기 같다. 물론 지금 상태라면 새누리당이 심각한 타격을 받은 상태라 야당 출신이 대통령이 당선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야당 대통령이 당선되면, 우리의 삶은 좀 나아질까?
나는 민주당이나 국민의당 같은 보수 야당들이 정권을 잡는다 해도 우리의 삶이 별로 개선될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 민주당은 박근혜 정부에 들어와 여당에 무기력하게 끌려다녔을 뿐 민생을 위해 투쟁한 일이 거의 없다. 심지어 지난 총선에서 여소야대 국면이 만들어진 다음에도 그렇다.
문재인 씨가 지난 11일 촛불 민심을 받들기 위해 청산하고 개혁해야 할 여섯 가지를 발표했다. 그러나 거기에도 잘못한 사람들을 처벌하고 제도를 바로 잡는다는 이야기뿐, 민생과 직접 관련한 이야기는 없다. 기껏 하나 들어간 것이 '정경유착을 엄중히 처벌하고 재벌개혁의 계기로 삼는다'는 두루뭉술한 이야기다. 이런 정도의 안목으로 어떻게 다음번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는 것인지 참으로 궁금하다.
무엇을 할 것인가
지금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일자리 부족과 저임금의 해소이다. 노동인구의 절반 이상이 실업과 반실업, 비정규직의 고통에 떨고 있다. 또 수백만 명은 일해 봤자 인건비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자영업에 종사하고 있다. 모두 하루하루 불안한 삶을 살고 있다. 반면, 최상층 10%에 속하는 소득계급은 터무니없이 높은 임금과 직업 안정성을 누리며 삶을 구가한다. IMF 외환위기 이후 20년도 안 되는 사이에 소득불평등이 크게 증가하여 미국 다음의 세계 2위가 되었다. 우리가 모두 신자유주의와, 삼성전자의 급성장에 넋을 잃고 있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나는 다음 정권이 최소한 임금 평준화만은 어느 정도 달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우파와 좌파의 강고한 기득권 체제를 분쇄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동일 노동·동일 임금'과 같이 한국에서 이루기 어려운 꿈을 말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같은 직종에서도 4~5배 정도 나는 임금 격차를 최소 2~3배 정도까지라도 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정도만 해도 매우 큰 성과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우파와 좌파의 기득권을 해체해야 한다고 본다.
페이스북에서 어떤 좌파 지식인이 기존 지배 구조를 깨기 위해 미국과 재벌 의존 심리, 그리고 '조중동'을 타파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는 것을 봤다. 나는 그런 주장에 반대한다. 미국-재벌-조중동과 결합하고 있는 것은 보수 우파 세력이다. 그러나 한국의 지배 구조를 이루는 것은 우파 세력만이 아니다. 진보 좌파 세력도 마찬가지이다.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 같은 조직된 노동 세력에 몸담는 대기업 노동자들, 공기업 직원, 공무원, 교사, 대학 교수 같은 사람들은 한국에서 차별적인 임금과 직업 안정성을 누리는 혜택 받는 소수 기득권에 속한다. 그럼에도 이들은 진보의 이름으로 재벌만을 비난하며 약자인 척 행동하는데 익숙하다. 나는 우리가 보다 평등한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이들의 위선적인 가면을 벗겨야 한다고 믿는다.
언젠가 잠이 일찍 깨어 새벽에 페이스북에 좌파 기득권에 대한 글을 실었더니, 곧바로 어떤 노동자가 기분이 나쁘다며 욕설을 퍼부었다. '왜 욕을 하느냐?'며 '당신은 정규직이라 괜찮을지 모르나 비정규직 생각은 해 봤느냐? 당신은 정규직이라도 당신 자식은 비정규직이 될 수도 있지 않느냐?'며 따져 물었더니, 나중에는 누그러져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자기는 택배기사인데 비정규직이고, 40세인데 아직 장가도 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의 욕설보다 그의 우울한 답변에 더욱 가슴이 막막했다.
이 사람이 왜 그런 태도를 보였을까? 한국의 노동 운동이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에서처럼 상층 노동자만을 위한 이기적인 노동 운동은 '노동 운동'의 이름을 붙일 자격이 없다고 본다. 단지 자신들의 이익만을 지키려는 반동적인 기득권 운동일 뿐이다. 나는 우리 국민들이 대선 국면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지속해야 할 촛불 혁명을 통해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좌파 기득권에 대한 인식을 바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사람들이 광장과 거리에서 이 문제를 계속 논의해야 한다고 믿는다. 벌써부터 여기저기서 촛불을 조직하려는 발걸음이 부산하다. 또 하나의 권력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다. 권력이 아니라,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에 집중하자.
민주주의는 생각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다._정치/외교/안보
87년 체제 벗고 민주주의 2.0으로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산하의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5년 ‘한국 민주주의 지수’는 세계 22위다. 2006년 첫 발표 이래로 한국은 순위가 꾸준히 올라 20위 언저리에서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놀랍게도 아시아에서는 일본을 제치고 1위다. 세계 순위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한국인들이지만 이 순위에 대해서는 자부심보다는 의구심이 더 클 것 같다. 역사적 경험 때문에 한국인의 신경세포는 ‘독재’에 민감하고 ‘민주주의’에 둔감하게 진화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한국은 선거를 통해 빠른 속도로 민주주의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이 나라 민주주의의 역사는 선거의 역사다. 선거는 한국 민주화 운동이 쟁취한 가장 강력한 성과다. 대한민국에서 선거는 다른 어느 영역보다 반칙이 적으며, 승패를 쉽게 예측할 수 없고, 실제로 승패를 주고받는 ‘공정한 전쟁’이 되었다. 선거는 한국 보수의 ‘약한 고리’다. 선거를 두려워한다. 대부분의 영역에서 보수가 압도적으로 힘의 우위를 점하는 데 비해 선거는 보수·진보 어느 쪽도 확실한 지배력을 갖지 못한 ‘평평한’ 운동장이 (거의) 되었다. 대통령 선거는 더욱 그렇다. 선거를 통해 달성해야 하는 민주주의 과제는 세 가지다. 평화적 정권교체(민주주의 1.0), 사회적 갈등관리(민주주의 2.0), 관료에 대한 문민 통제(민주주의 3.0)가 그것이다. 한국은 1987년 직선제 개헌을 통해 민주주의 1.0에 진입했다. 선거는 스포츠와 전쟁 중간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스포츠처럼 규칙을 정해놓고 전쟁처럼 싸운다. 전쟁으로 가까이 가면 ‘적’과 ‘동지’로 편을 갈라 증오하고, 스포츠로 가까이 가면 ‘여’와 ‘야’로 부르면서 평화적으로 경쟁한다. 19세기 이전의 정치적 투쟁은 (그것이 재판·전쟁·혁명의 어떤 것이든) 통치자와 피치자를 결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승리한 자는 패배한 자를 죽이는 것이 목표였다. ‘체제 안에서’ 싸운 것이 아니라 ‘체제를 둘러싸고’ 싸웠기 때문이다. 전쟁 같은 정치의 시대가 끝나자 민주주의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상대를 ‘죽일’ 적으로 보지 않고 ‘이길’ 경쟁자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승리하면 여당이 되고 패배하면 야당이 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아담 쉐보르스키가 민주주의를 정의한대로 ‘여당이 (평화적으로) 야당 될 가능성을 열어두는 체제’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긴 자가 진 자를 죽이는 ‘쿠데타’와 ‘혁명’을 동시에 폐기처분하고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교체’가 가능한 체제를 87년에 합의했다.이른바 ‘87년 체제’다. “신생 민주주의는 두 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통해 공고화 된다”는 새뮤얼 헌팅턴의 말을 상기해 볼 때, 2017년에 다시 한 번 야당으로 정권이 넘어간다면 한국의 민주주의도 더 공고하게 될 것이다. 적어도 국가정보원· 검찰· 경찰 같은 권력기관의 대선 개입은 (거의) 사라질 것이다.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는 새로운 과제를 요구받고 있다. 대통령 선거 지형은 평평한 운동장이 되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대통령의 힘은 고위 관료와 권력 기관의 인사권 정도로 약해지고 있다. 군인의 시대였던 1970~1980년대나 3김으로 상징되는 정치인의 시대였던 90년대까지 익숙했던 ‘개혁의 설계자’이자 ‘개혁의 리더’로서의 지도자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있다. 지금은 누가 대한민국을 이끌고 있는지 분명하지 않은 시대다. 대통령만 잘 뽑으면 되는 시대가 아니다. 2000년대 이후 대한민국의 파워그룹의 맨 위에는 관료·재벌·법조(법원·헌법재판소·검찰·로펌)가 자리 잡았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지배력은 점점 커지고 있다. ‘관피아’(관료+마피아)로 불리는 이 카르텔은 마이클 샌델이 통찰한대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돈으로 살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슬라보예 지젝이 통렬하게 비판한대로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와 이혼하려는’ 배후에도 이들이 있다. 경제가 정치를 지배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익은 사유화’하고 ‘손실은 사회화’하는 탐욕의 시대가 되었다. 반독재 시대에는 가장 힘이 센 사람, 가장 나쁜 사람, 가장 자주 보는 사람이 같았기 때문에 싸우기가 쉬웠지만 지금은 가장 힘이 센 사람, 가장 나쁜 사람, 가장 자주 보는 사람이 달라서 싸우기가 쉽지 않다. 적이 안 보이는 시대다. 모두가 다 포섭되었기 때문에 ‘어용’도 없고, ‘사쿠라’도 없다. 소수에게 부와 권력이 집중되자 세계 도처에서 혁명 전야 같은 분노가 폭발하고 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자기를 대변할 목소리를 갖지 못한 채 밀려난 사람들이 너무 많다. 정치가 이 분노를 담아내는 데 실패한다면 대한민국은 큰 위기에 빠질 것이다. 갈등을 관리할 새로운 민주주의를 상상할 시간이다. 정치는 ‘싸우는 것’이고 ‘갈등을 조직화’하는 것이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고,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말’로 싸우는 것이다. 그만 싸우라는 것은 민주주의를 그만하라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생각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다. 85년 2·12 총선의 신민당 돌풍을 만든 국민은 2년 뒤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는 직선제를 쟁취해 (평화적) 정권교체의 길을 열었다. 2016년 4·13 총선에서 양당 체제를 깨고 3당 체제를 만든 국민도 (사회적) 갈등 관리를 해낼 수 있는 다당제를 제도화함으로써 ‘민주주의 2.0’ 시대를 열 수 있을까. 한 선거구에서 적어도 4명을 뽑는 중·대선거구제(권역별 비례대표제를 전면적으로 확대하는 방안도 좋다)와 대통령 결선투표제가 도입된다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선거구당 4명 이상의 의원을 뽑아야 4당 체제가 될 수 있다. 지금이 좋은 기회다. 새누리당 복당보다 탈당이 더 중요해진 이유다. 87년 직선제 개헌과 88년 소선거구제 도입으로 ‘민주주의 1.0’ 시대를 열었다면 들어온 길로 나가는 것이 좋다. ‘민주주의 2.0(선거구제 개편)’으로 먼저 다당제 체제를 구축한 뒤, 정치가 관료를 통제할 수 있는 내각제를 통해 ‘민주주의 3.0(개헌)’ 시대를 여는 것이 옳은 순서로 보인다. |
[스크랩] 만약 SBS의 보도가 사실이라면..._정치/외교/안보
ⓒ 오마이뉴스 스모킹 건(Smoking Gun). 이는 범죄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나 단서를 말한다. 탐정추리소설의 대부인 코난 도일의 소설에서 유래한 '스모킹 건'이 새삼 화제다. 지난 9일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어 직무정지에 들어간 박근혜 대통령의 헌법·법률 위반 혐의를 구체적으로 밝혀줄 증거들에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탓이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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