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칼럼

김재규의 변호사, 최태민과 박근혜를 말하다 - 특혜받는 ‘찐따’보다 위대한 평민이 백배 낫다

일취월장7 2016. 11. 24. 10:06

김재규의 변호사, 최태민과 박근혜를 말하다

강신옥 변호사(사진)는 고 김수환 추기경의 부탁으로 김재규 중정 부장의 변호를 맡았다. 전두환 신군부는 최태민·박근혜 관계를 법정에 제출한 강 변호사를 박근혜 명예훼손 혐의로 처벌하려고도 했다.

정희상 기자 minju518@sisain.co.kr 2016년 11월 24일 목요일 제479호


‘최순실 게이트’의 뿌리는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순실씨의 아버지 최태민과 박근혜 영애와의 잘못된 만남 때문이다. 이 커넥션을 가장 잘 아는 이가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다. 당시 김재규 부장은 최태민과 박근혜의 ‘부적절한 관계’도 10·26 사건을 일으킨 한 원인이라고 꼽았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 부장은 그 자세한 내용을 변호인단에게 털어놓았다. 당시 인권변호사로 김재규 부장 변론을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80)를 만났다.


김재규 부장 입에서 최태민과 박근혜 관계가 어떻게 나왔는가?


사형당하기 4개월 전인 1980년 1월28일 김재규 부장을 면회 갔더니 최태민 얘기를 처음 꺼냈다. 박정희 대통령을 쏜 이유로 구국여성봉사단의 망국적 전횡도 작용했다면서 “나라의 앞날을 생각하면 최태민은 교통사고라도 내서 처치해야 할 놈이다”라고 분개했다. 구국여성봉사단 총재는 최태민이고 명예총재가 박근혜였다. 최태민이 이 단체에 운영위원 30명을 두고 기업을 갈취하고 여성 정치 지망생들을 성추행하니까 원성이 자자해 중앙정보부(중정)와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정밀 조사를 했다는 것이었다.


ⓒ시사IN 이명익

조사 내용이 뭐라고 하던가?



(강 변호사는 보관 중인 김재규 부장 면회 노트를 펼쳐 읽으며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김재규 부장은 당시 검사로 중정에 파견 나와 특명수사를 담당하는 6국장(안전국) 백광현에게 구국여성봉사단 조사를 지시했다. 백 검사는 최태민을 불러다 철저히 조사했다. 조사 결과 최태민은 자칭 ‘태자마마’ ‘도사’라고 하면서 꿈에 육영수 여사가 나타나 큰딸 박근혜를 잘 지켜달라고 당부해 박근혜에게 편지를 썼다고 했다. 최태민의 편지를 받은 박근혜도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도움을 주려는 사람이 찾아올 테니 도움 받으라고 했다고 화답하면서 비슷한 꿈을 꾸었다는 인연으로 두 사람이 가까워졌다. 그 뒤 박근혜는 최태민이 여성단체인 구국여성봉사단 총재가 되는 데도 개입하고, 최태민이 기업들로부터 양로병원을 짓는다는 명목으로 수억원대 돈을 뜯어내는 데도 관여했다. 박승규 청와대 민정수석도 별도로 최태민을 조사하니 영애를 등에 업고 기업체로부터 수십억원을 갈취한 사실이 적발돼 김재규 부장에게 어쩌면 좋겠느냐고 하소연했다고 하더라. 김재규 부장은 최태민이 여성 정치 지망생 6명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내용까지 조사되어 있다고 했다. 그는 이 정보를 취합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최태민과 구국여성봉사단을 정리하고 영애를 떼어놓아야 한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박근혜 말만 듣고 보고를 묵살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부장과 영애를 앉혀놓고 친국을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김재규 부장이 보고하니 박 대통령이 “내가 직접 근혜를 불러 친국하겠으니 기다리라”고 했다고 한다. 그 뒤 구국여성봉사단에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고 심지어 더 개악시키는 것을 지켜보고 김재규 부장은 절망했다고 한다. 친국을 거친 박정희 대통령은 어마어마한 비리를 알아내고서도 구국여성봉사단을 정리하기는커녕 최태민을 총재직에서 명예총재로 바꾸고 대신 박근혜에게 직접 총재직을 맡겼다는 것이다(구국여성봉사단은 1976년 4월 만들어졌다. 최태민은 총재를, 박근혜는 명예총재를 맡았다. 1977년 9월12일 친국을 하고, 구국여성봉사단은 1979년 5월 사단법인 새마음봉사단으로 바뀐다. 박근혜가 총재를, 최태민은 명예총재를 맡았다). 이런 조치를 보고 다시 김재규 부장이 박 대통령에게 “구국여성봉사단이 기업에서 돈을 받아 양로병원을 세운다는데 일본 등 외국 사례를 보더라도 그런 것은 적십자사에서 맡아야 할 일이지 영애가 간여해서는 절대로 안 될 일입니다”라고 재고를 건의했지만 묵살당했다고 한다. 김재규 부장은 이것도 10·26 거사의 동기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시사IN 자료
ⓒ시사IN 이명익
1979년 12월20일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 대법정에서 열린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공판에서 김재규 부장(맨위 왼쪽에서 두 번째)이 재판을 기다리는 모습. 김 부장은 재판 과정에서 강신옥 변호사에게 ‘장부한(丈夫恨)’이라는 한시를 직접 적어 주었다(위). 총 28자로 구성된 7언절구 형식이다.

김재규 부장 변론을 맡은 계기는?



김 부장이 나를 지명하기도 했지만 김수환 추기경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변호인을 맡았다.

김수환 추기경이 김재규 부장에게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이유는?


10·26 당시 김재규 부장에게 희생된 이들은 박 대통령, 차지철 경호실장과 경호실 직원 4명이었다. 생명의 가치는 다 소중하지만, 박정희 때문에 죽은 어마어마한 숫자에 비하면 그야말로 작은 희생으로 큰 혁명적 대의를 가져온 일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유신 독재로 민주주의가 신음하고 수많은 학생·노동자들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김 추기경은 김재규 부장의 10·26 거사가 더 큰 희생을 막은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인권변호사들에게 특별히 김재규 부장 변론을 당부하기도 했고, 재판 과정에서도 나를 불러 격려해주었다. 나중에 김재규 부장과 부하들 가족이 구명 탄원을 위해 추기경을 찾아갔을 때도 보듬고 위로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가족의 이야기를 한참 들은 뒤 “내가 힘이 못 미쳐 할 말이 없다”라고 슬퍼했다.

재판 과정에서 피고 김재규 부장과 전두환 합수부장 사이에 감정싸움이 있었다는데?

애국심을 기준으로 볼 때 전두환은 김재규 부장의 발가락 때만도 못한 수준이라는 게 그 당시나 지금이나 내 판단이다. 당시 전두환은 김재규 부장에게 ‘왜 거사 후 자결하지 않았느냐, 한자리 차지하려는 사심이 있었던 거 아니냐’고 힐난했다. 내가 이 내용을 면회 가서 전했더니 김재규 부장은 “쓰레기가 많아서 쓰레기를 치우고 자결하려 했다”고 말했다. 쓰레기는 부패한 공화당 정치인들과 최태민 같은 이들이었다. 또 그는 전두환을 상대로 “참새가 어찌 대붕의 뜻을 알리요”라고도 했다. 내가 나중에 국회의원이 된 뒤 1989년 5공 청문회장에서 장세동씨를 심문할 때 “전두환에게 가서 자결하라고 전하라. 김재규 부장에게 자결하라고 말할 자격이 있다면 그 뒤 온갖 못된 짓을 저지른 전두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맞다고 보지 않느냐”라고 질타했다.


ⓒ연합뉴스
1976년 박정희 대통령(왼쪽)이 대한구국선교단 야간진료센터를 방문해 박근혜 명예총재, 최태민 총재(오른쪽)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재규 부장 변론 과정에서 고충은 없었나?



대법원이 1980년 5월20일 김재규 부장에 대해 사형을 확정 판결했다. 이날 내가 대법원에 재심청구서를 접수하고 나왔다. 보안사 요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서빙고 분실로 끌고 갔다. 그 자리에서 보름 동안 모진 고초를 겪었다. 내란사범 김재규 부장 구명운동을 했다는 점과 최태민과 박근혜의 관계를 끄집어낸 것이 박근혜씨에 대한 명예훼손에 해당한다는 혐의였다. 변호인으로서 정당하게 수행한 변론활동이라고 맞서서 더 이상 처벌은 받지 않았다.

당시 혐의가 박근혜 명예훼손이었다면 신군부도 최태민과 박근혜를 보호하고 있었다는 뜻인가?

그렇다. 유신 시절 전두환은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받았다. 전두환이 청와대에 출입할 때 박근혜가 ‘오빠 오빠’ 부르며 따르던 사이였다고 한다. 김재규 부장 변론 과정에서 최태민과 박근혜 사이를 들춰내 법정에 제출하자, 신군부는 박근혜 명예훼손 혐의로 나를 처벌하려고 한 것이다. 김재규 부장은 사형당하기 전까지 나라의 암적 존재인 최태민을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 뒤 전두환 정권은 박근혜의 요청을 받고 최태민을 사실상 풀어줬다. 신군부는 최태민에 대해 낱낱이 조사하고도 한동안 강원도에 ‘유배’만 시켰다. 박근혜의 최태민 구명 호소를 전두환이 들어준 것으로 안다.

김재규 부장의 유언은?

자신의 죽음을 밑거름으로 민주 회복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자기만 죽이면 되지 왜 부하들을 사형시키느냐고 호소했으나 신군부는 전원 사형을 집행했다. 김재규 부장은 다섯 명 부하들과 한자리에 묻어달라고 유언했지만 이마저 신군부는 들어주지 않았다. 부하들의 유해는 보안사에 의해 동두천·파주·벽제 등에 흩어졌고 김재규 부장 재산도 몰수당했다. 이후 사형당한 가족들끼리는 서로 왕래하면서 상처를 어루만지고 명예가 회복될 한 가닥 희망 속에 지냈다. 김재규 부장의 부인은 다섯 부하들 자녀의 장학금을 지원했다.

김재규 부장은 부인에게 비구니가 되라고 했다는데?

김재규 부장은 생전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그래서 사형당하기 전 부인에게 비구니가 되라고 유언을 남겼다. 부인은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면서 천주교로 개종해 세례를 받았다. 남편의 유언을 못 지킨 셈이 됐다. 동생 김항규씨는 10·26 이후 재산을 몰수당하고 대한불교 불승종에 귀의했다. 형이 사형당한 뒤에는 경북 봉화에 있는 현불사에 들어가 수도 생활을 했다. 1985년 현불사에 위령탑이 들어서자 전두환 정권이 김재규 부장 위령탑으로 간주해 파괴해버렸다.

10·26 사건으로 사형당한 김재규 부장 부하 5명도 함께 변론했는데?


부하들도 의연했다. 사형당하는 순간까지 국민과 역사 앞에 한 점 부끄럼 없는 행동이라고 자부심을 표명했다. 특히 육사 18기 선두주자였던 박흥주 대령은 아주 순수하고 청렴한 참군인이었다. 현역 군인 신분이라 군사법정에서 단심제가 적용되었다. 김재규 부장 사형 판결이 나기도 전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중정 의전과장이었던 박선호씨는 사형 전에 “다시 같은 상황이 와도 부장님 지시에 따르겠다”라고 최후 진술을 했다. 해병대 출신인 이기주씨(중정 경비원)는 최후진술에서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다”라는 말로 김재규 부장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정보부 비서실 경비원이었던 김태원씨도 재판 과정 내내 보여준 의연한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1980년 3월4일 갑자기 김태원이 나에게 특별면회를 신청해 찾아갔더니 “변호사님, 와전옥쇄라는 말이 있던데 지금 제 심정이 그렇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집에 와서 사전을 찾아보니 ‘기왓장으로 온전하기보다는 깨어진 옥이 되겠다’는 뜻이었다.

2002년 대선 때 박근혜 대통령과 악연이 있었다는데?


당시 내가 정몽준 후보 캠프를 도왔는데, 정몽준 후보가 초등학교 동기생인 박근혜 의원의 도움을 받고 싶어 했다. 박근혜 의원이 “아버지를 죽인 김재규 부장을 변호한 강신옥 의원과 한 캠프에서 일하면서 어떻게 나에게 도와달라고 할 수 있느냐”며 나를 비판하더라고 했다. 정 후보는 박근혜 의원을 만날 때마다 그 얘기를 꺼내더라며 난감해했다.

그 무렵 박근혜 대통령과 테니스도 쳤다고 들었다.


당시 정몽준 후보가 박근혜 의원과 나 사이를 화해시키려고 셋이서 테니스를 친 일이 있었다. 그때 한 여성지 기자가 나에게 박정희의 여자 문제를 취재하러 왔기에 변호인 접견 때 정리한 내용을 보여준 적이 있다. 기사화 말라고 해서 안 쓴다고 해 잊어버리고 있는데 20여 일 뒤 신문에 광고가 났다. ‘강신옥 변호사가 20년 만에 박정희 여자관계 폭로했다.’ 그 기사를 보고 박근혜 의원이 정몽준 후보에게 불평했다. 정 후보가 나더러 박근혜 의원에게 사과하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왜 사과하느냐, (박정희의 여자관계) 내용 자체가 사실인데 왜 사과하느냐고 거절했다. 그랬더니 만날 때마다 다섯 차례나 사과하라고 해서 내가 정몽준과 결별하고 나왔다.

김재규 부장 재조명의 필요성은?


김재규의 10·26 정신은 박정희 대통령을 제거하지 않고는 유신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본 것, 대의를 위해서 소의를 희생한 것이다. 민족정기를 회복하자면 김재규 부장의 거사 정신은 바로 세워져야 한다. 아직은 김재규 부장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적고 단결도 안 되는 반면 박정희 지지자는 많고 또 단결도 잘되는 데다 그 딸이 대통령까지 됐으니 김재규 부장에 대한 재평가 분위기가 수그러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역적으로 몰린 조선시대 사육신도 재평가받고 인정받는 데 250년이 걸렸다. 언제라도 10·26 거사 정신이 제대로 밝혀지고 평가받을 날이 올 것이다.

한 보수 단체가 박정희 대통령 동상을 세종로에 세우겠다는데?

그건 말도 안 되는 짓이다. 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시점에 그런 동상 세운다는 것은 더더욱 말이 안 된다. 박정희 대통령의 존경받을 만한 면조차도 오히려 딸 때문에 망친 형국이다. 이 시점에 동상을 추진하는 것은 박근혜 지지 세력이 제대로 된 감각이 없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나.

최순실 게이트를 보며 느끼는 감회는?

박근혜 대통령이 최태민 일가와의 뿌리 깊은 인연과 도움으로 대통령까지 됐지만 결국 재임 중 최태민 일가로 인해 붕괴 상태에 이르렀다. 만일 김재규 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한 대로 최태민과 박근혜를 떼어내고, 최태민의 범죄를 엄벌했더라면 오늘과 같은 일도 없었을 것이다. 잘못된 역사의 업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최순실 게이트의 올바른 처리 방향은?

박근혜 대통령이 하야하는 수밖에 없다. 일각에서는 하야하면 헌정이 중단된다고 하는데 사실상 식물 대통령으로서 지금도 헌정 중단 사태인데 더 나빠질 일이 뭐가 있겠나. 민심이 하야라면 억지로 막을 수 없는 것이다.



“한국은 나쁜 나라입니다”

1894년 갑오개혁에서 고문, 연좌제 등 전근대적인 형벌이 폐지되었다. 그러나 고문자가 원하는 대답을 얻기 위해 사람을 망가뜨리는 이 행위는 120년 넘게 이어져왔다. 영화 <자백>은 그 명백한 증거다.

김형민 (PD) webmaster@sisain.co.kr 2016년 11월 24일 목요일 제479호


 드라마 <겨울연가>의 촬영지로 ‘욘사마’를 사모하는 일본 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는 남이섬 알지? 이 섬의 이름은 조선 예종 때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 남이 장군의 이름을 딴 거야. 남이의 묘지가 그 섬에 있다는 전설이 있긴 한데 진짜 같지는 않구나. 어쨌든 남이는 역모를 꾸몄다고 고발돼 예종 앞에서 온갖 고문을 당한 끝에 능지처참되고 말았지. 그런데 그 와중에 기이한 일이 벌어졌어. 처음에는 자신의 혐의를 필사적으로 부인하던 남이였지만 매 앞에 장사가 없어서 자신의 죄상을 순순히 밝히는데 그 와중에 한 명을 향해 손가락 총을 쏜다. “저 사람도 나와 함께 역모했소이다.” 나이 여든을 바라보는 전 영의정이자 무관으로서 남이의 대선배라 할 강순이었어.

강순은 “제가 나이 여든에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역모를 하겠습니까”라고 부르짖었지만 역모 앞에서는 용서가 없었지. 그는 꼼짝 못하고 형틀에 얽어매여 볼기를 까게 돼. 그 늙은 엉덩이와 허벅지에 인정사정없는 곤장질이 가해졌지. 그런데 몇 대 맞기도 전에 강순은 허무하게 항복하고 말아. “신이 어려서부터 곤장을 맞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참을 수 있겠습니까.”  

ⓒ뉴스타파 제공
영화 <자백>의 한 장면. 최승호 감독(왼쪽)과 원세훈 전 국정원장(오른쪽).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고 매도 맞아본 사람이 강한 법이야. 팔십평생 회초리도 제대로 맞은 기억이 없을 이 늙은 고위 관리는 곤장 몇 대에 혼이 나가버렸던 거야. 자기 몸이 토막 나서 죽는 건 당연하고 그 자식들까지도 연좌되고 집안의 여자들은 죄다 노비로 떨어지는 그런 어마어마한 자백을 강순은 매 몇 대와 바꾸고 만단다. 일단 자백을 한 이상 번복은 허용되지 않았고 강순은 그대로 역적으로 떨어졌지. 이제 남은 것은 남이가 강순을 불었듯 또다시 강순을 족쳐서 다른 역적들의 이름을 고구마 캐듯 캐내야 하는 일이었어. 예종 임금은 독기 어린 목소리로 외쳤지. “또 누구와 역모를 꾸몄느냐. 똑바로 대라. 여봐라 저놈을 매우 쳐라.” 이 말을 들은 강순은 다급하게 외친단다.

“신이 어찌 매질을 참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좌우의 신하를 다 불러서 제 패거리라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예종은 움찔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저런 식이라면 매 한 대에 사람 이름 서너 개씩은 주워섬길 판이라, 자칫하면 거기 도열해 있던 신하들 전부가 역적으로 몰릴 수도 있었으니까. 예종은 고문을 중지한다. 강순의 이 경고는 고문의 잔인한 특성 하나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어. 즉 고문이란 어떤 사안의 진실을 캐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문자가 원하는 대답을 얻기 위한 절차라는 거.

해를 달이라 부르게 만드는 고문

언젠가 만민공동회(1898년) 얘기를 해준 적이 있지? 아관파천이 끝나고 대한제국이 성립한 뒤, 외국의 이권 침탈에 저항하고 자주독립의 의기를 드높인 서울시민들의 대규모 시위이자 오늘날 촛불 시위의 원조라 할 역사적인 사건. 그런데 이 만민공동회의 주요 이슈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고문과 관련된 일이었단다.  

ⓒ국사편찬위원회
만민공동회의 주요 이슈 가운데 하나는 고문과 관련된 것이었다.

고종 황제는 커피를 매우 즐겼다고 해. 그런데 이익을 챙기다가 들통이 나서 흑산도까지 귀양갔던 김홍륙이라는 자가 이에 앙심을 품고 고종과 황태자가 마시는 커피에 아편을 넣어 고종 부자를 독살하려는 사건이 일어났어. 고종은 곧 뱉어냈지만 황태자는 많은 양을 들이켜는 바람에 후유증이 컸지. 왕을 독살하려 한 진짜 역적인 셈이야. 예전 같으면 당장 주리를 틀고 일당을 캐낸 뒤 사지를 찢어 죽이고 가족을 노비로 삼았겠지만 상황이 그렇지 못했어. 4년 전의 갑오개혁으로 고문과 연좌제, 즉 죄인의 가족들을 함께 처벌하는 제도가 폐지됐기 때문이야. 그런데 이 김홍륙 사건을 계기로 연좌제를 부활시키려는 움직임과 더불어 김홍륙 일당이 무지막지한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들고일어났던 거야. <독립신문> 기사를 볼까?      

“풍설에 들으니 죄인들을 악형으로 취조하여 사지를 상한 사람이 있다 하니 개화하려는 나라에서 어찌 이러한 야만의 법률을 쓸 수 있는가. 설혹 악형에 못 이겨 횡설수설로 거짓말을 한다면 애매한 사람만 상하고 임금의 호생하시는 성의를 어기는 것이요 설혹 진실을 말하더라도 잔혹한 형벌에 못 이겨서 하는 말을 개화한 사람은 믿지 않을 것이다. 만일 풍설과 같이 악형으로 취조했으면 각국 사람들이 대한 정부를 야만 정부라 할 터이니 이처럼 국체를 손상할 일을 우리 정부에서 행하지 않았을 것으로 믿는다(<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김정인 지음, 책과함께 펴냄).”

비록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만민공동회의 열기를 뜨겁게 지펴 올린 장작 가운데에는 ‘고문 금지’와 ‘연좌제 부활 반대’의 목소리가 선연히 끼어 있었단다. 그들도 알고 있었지. “잔혹한 형벌에 못 이겨서 하는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자백을 얻기 위해 사람을 망가뜨리는” 행위는 그 후로도 120년 동안 이어져왔음을 슬프게 얘기할 수밖에 없겠다. 얼마 전 함께 본 영화 <자백>은 그 명백한 증거이고 말이야.

매질이란, 고문이란 그런 거야. 해를 달이라고 부르게 만들 수도 있고, 아빠가 보지도 않은 사람들의 이름과 행각을 마치 그린 듯이 줄줄 읊도록 할 수도 있지. 영화 <자백> 속 불쌍한 간첩 용의자들 역시 국가권력에 고문을 당하고 자백을 강요받았어. 꼭 주리를 틀고 매를 때리는 것 외에도 고문은 많단다. 때를 알 수 없는 감금, 사기까지 감행하며 사람을 옭아맬 증거를 조작하는 국가의 압박, 가족을 틀어쥐고 들이미는 협박, 그 모두가 사람 잡는 고문이지. 원하는 대답을 강요하여 누구든 그 앞에서 무장해제돼 자신이 하지 않은 행동까지 뒤집어쓰게 만드는 짐승 같은 야만. 오빠를 간첩으로 고발하도록 몰고 도무지 견디다 못해 스스로 귀한 목숨 끊게 만드는 파렴치.  

영화 <자백>을 함께 보면서 아빠는 가끔 몸 둘 바를 몰라 어깨를 뒤척이곤 했단다. 특히 후일 무죄로 판명 난 그 많은 간첩 사건들의 장구한 스크롤을 보면서는 네게 미안해지기까지 하더구나. 아빠가 널 낳아 기르는 이 나라가 부끄럽고 그 역사가 수치스러워서 말이다. 지금 대통령의 아버지가 나라를 다스리던 시절, 그 하수인들이 자행한 인간 이하의 고문으로 조국에 공부하러 온 재일동포(재일 한국인) 청년의 몸과 마음이 부서졌다. 그 후 내내 폐인처럼 살았던 그가 수십 년 만에 꺼낸 한국말, “한국은 나쁜 나라입니다”는 날선 창처럼 느껴져 아빠 가슴을 찌르더구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한 사람을 잔인하게 망가뜨린 자들이 ‘나는 모르는 일이노라’ 잡아떼면서 던지는 미소는 굵은 소금이 되어 가슴의 상처 속을 헤집었고 말이야.  

영화를 보고 나서 며칠 뒤 아빠는 꿈을 꾸었다. 통쾌한 악몽이라고나 할까. 꿈속에서 아빠는 악마가 됐어. 김기춘이나 원세훈 등 고문을 지휘하고 자백을 짜낸 정보기관의 수장들을 고문하는 역할이었지. 꿈속에서 아빠는 그들을 무자비하게 때리고 밟고 주리를 틀었어. 그들은 곧 강순처럼 항복하더구나. “제가 맞은 적이 없어서… 저 간첩 맞아요 엉엉.” 한 번 더 몽둥이를 드니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을 왕초로 한 북한 간첩단 조직도를 순식간에 그리지 않겠니. 아빠는 꿈속에서 버럭 소리를 질렀단다. “너희도 이럴 줄 알았잖아. 똑같은 사람인 걸 알았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니, 응?” 아빠는 울고 있었다.  영화 <자백> 속 주인공이 되어서,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법정에서 항의하던 바로 그 간첩 용의자가 되어서 말이다.



특혜 받는 ‘찐따’보다 위대한 평민이 백배 낫다

아이의 일과를 떠먹여주듯 챙겨주면 엄마한테 묻지 않고는 아무것도 못하는 딱한 아이가 되고 만다.

김소희 (학부모·칼럼니스트) webmaster@sisain.co.kr 2016년 11월 24일 목요일 제479호


학예회 철이다. 학부모는 오지 말아달라는 완곡한 내용의 통신문이 왔다. ‘국·영·수’보다 ‘음·미·체’를 중시한 교장 선생님이 부임하시고 두어 해 동안 학부모 공개 학예회를 재미나게 본 터라 아쉬웠다.

하지만 수긍이 갔다. 아이들끼리 노래 부르고 발차기 뽐내고 손가락 마술쇼 하고 아이돌 춤을 추며 대미를 장식하면서 충분히 신나고 즐거울 때 유독 흐름을 끊는 무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녀 순서를 앞두고 교실 무대 가운데로 들어와 스태프처럼 활동하시는 분들 말이다. 심지어 앞의 아이가 피리를 다 불지도 않았는데 등받이 없는 의자에 날개만 한 리본이 달린 드레스를 입고 앉아 첼로 연주를 해야 한다는 분들, 영어 자작시 낭송 배경음악을 꼭 고성능 스피커를 연결해 틀어야 하는 분들. 통신문에는 “학부모께 부담을 드리지 않기로 했다”라고 나와 있지만, 한마디로 “설치지 말라”는 소리였다. 생큐 교장쌤!

학부모 부담만 던 것이 아니다. 교사들도 공개수업이나 참관수업을 앞두고는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다. 괜히 신경 쓰고 애들 잡을 일도 생긴다. 이해한다. 우리도 집에 손님 오면 그러니까. 현명한 교사는 적절히 준비하지만 그렇지 않은 교사도 있다. 그런 반이면 주로 임원인 아이의 학부모가 교실 청소와 미화, 수업 준비물 및 아이들 지도까지 ‘피박’을 써야 한다.

ⓒ김보경 그림

다문화를 주제로 한 공개수업을 앞두고 담임교사한테서 아이들이 입을 각국의 의상을 빌리거나 만들어오라는 ‘부탁’을 받은 어느 학부모는 자기 시간과 돈을 들여 옷을 구했다. 하지만 내 아이에게 어느 나라 옷을 입히느냐로 다른 학부모들의 불만과 원성이 나오자 스트레스로 원형 탈모증이 생겼다는 후문이다. 그 반 아이들은 몇 날 며칠 책걸상 밀어놓고 교실에서 ‘런웨이’ 연습을 해야 했고, 그 학부모는 빠지는 머리카락을 속절없이 흩뿌리며 그 수발을 다 들어야 했다. 이런 ‘선의의 도움’을 드린 뒤에는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우리 반 아무개 등등이 왜 이렇게 내 속을 썩이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러려고 교사 했나 자괴감이 든다’는 하소연을 참을성 있게 들어줘야 했다.

최근에 이런 학부모들과 교사들의 행동을 일컫는 적절한 표현을 찾았다. ‘순실한 행동.’ 그것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한마디로 ‘어이 순실’이다.

순실한 행동은 학부모 단톡방에도 이어진다. 초등학교 3·4학년 정도 되면 제 휴대전화가 있건 없건 전화하고 문자하는 정도는 누구나 한다. 그런데도 굳이 초저녁부터 알림장 내용을 단톡방에 묻거나 모둠별 준비물을 점검하는 학부모들이 있다. 부득이하게 학부모 손이 가는 준비물은 요새 거의 없거니와 설령 있다 해도 아이들끼리 일단 교신하고 해결할 일이다. 아이가 까먹고 잠든 뒤라거나 퇴근 후 뒤늦게 확인한 상황이 아닌 초저녁 시간에 이런 내용으로 단톡방 벨이 울리면 눈살이 찌푸려진다.

특혜받는 ‘찐따’보다 위대한 평민이 백배 낫다

아이의 일과를 이렇게 떠먹여주듯이 챙기다 보면 모둠 같은 데서 무언가를 정해야 할 때 “엄마한테 물어보지 않아서” 아무것도 못하는 딱한 아이가 된다. 빨간 펜 첨삭지도와 떠받들림으로 점철된 양육 환경이 대를 이어 어떤 ‘찐따’를 만드는지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유명 대학 신입생 학부모들의 단톡방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대체 그 방에서는 무엇을 얘기하느냐고 물으니 어느 수업을 수강하는 게 점수 받기 좋은지, 어느 교수는 스타일이 어떤지 따위의 학업 정보를 교환한다는 답변을 들었다. 아, 어이 순실!  

이 와중에도 아이들은 실속을 챙기는지라 학예회 연습을 핑계로 ‘합법적으로’ 만나서 논다. 방과 후 시간이 안 맞으니 매일 저녁 7시에 후딱 밥 먹고 만나거나 주말에 내리 만나거나 한다. 내 아이는 몇 주째 토요일 오후 아파트 분수대에서 약속을 잡는 눈치다. ‘민중총궐기’ 수준이다. 만나서 놀고, 놀고 또 논다. 공개 학예회가 아니므로 연습은 대충 해도 된다는 걸 안다. 바람보다 먼저 눈치 까고 바람보다 먼저 논다. 과열 양상이 심해져도 학예회를 포기하지 않는 교장쌤의 깊은 뜻이 혹시 이건가. 특혜받는 ‘찐따’보다 위대한 평민이 백배 낫다. 백배 잘 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