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다시 한국으로 안 갈래요”
영어 공부를 하러 외국으로 떠난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귀국하지 않겠다고 사정을 했다.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생활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여름방학을 이용해 캐나다로 영어 공부를 하러 떠났다. 한 달 정도 현지 초등학교에서 공부하다가 귀국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 아이가 한 달이 지났는데도 귀국을 하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그냥 캐나다에서 학교 다니게 해달라고 사정을 했단다. 부모가 이유를 물었더니 캐나다에는 학원이 없으니 학원을 가지 않아서 좋고, 컴퓨터를 잘하는 자기를 인정해줘서 학교생활이 신난다고 했다. 아이는 귀국하려고 생각하니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생활이 무엇보다 싫었단다. 자기가 잘하는 것이 있어도 교과 시험 점수만큼 인정받지 못하는 우리나라 학교생활이 재미없었던 것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학원이란 무엇일까? 얼마 전 대구시교육청이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1학년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조사 결과 응답 학생의 91.6%(초등학생 94%, 중학생 89.2%)가 부모의 권유로 학원에 다닌다고 답했다. 자신의 선택으로 학원에 다닌다고 답한 학생은 초등학생의 1.9%, 중학생의 2.1%에 불과했다. 충청북도교육청이 도내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보면, 부모 혹은 보호자에게 가장 바라는 것으로 초등학생의 36.3%가 ‘학원을 쉬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결과는 일부 시·도에 국한된 게 아니라 전국적인 실태라고 봐도 될 것 같다.
한 10년 전쯤으로 기억된다. 인천에 사는 초등학교 6학년 아이가 ‘학원을 조금만 다녔으면 좋겠다’며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물론 극단적인 사례겠지만, 간과해서는 안 될 문제다. 통계청이 2015년에 발표한 사회조사 보고서를 보면 20세 이상 성인은 자살 충동 이유로 ‘경제적 어려움(42.6%)’을 꼽았지만, 13∼19세 청소년은 ‘성적 및 진학 문제(39.2%)’를 주된 요인으로 꼽았다. 이 정도라면 우리 사회와 가정은 모두 아동학대 혐의가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동학대의 개념은 ‘보호자를 포함한 성인에 의하여 아동의 건강·복지를 해치거나 정상적인 발달을 저해할 수 있는 신체적·정신적·성적 폭력 또는 가혹행위 및 아동의 보호자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유기와 방임’이다. 학원 수강은 아이들에게 신체적·정신적 가혹행위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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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경 그림 |
한국인의 삶의 모습을 객관화할 수 있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지표가 많다. 초등생 관련 지표는 어떤지 몇 가지 살펴보겠다. 어린이 교통사고 사망률은 OECD 국가 중 최고(2006년),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는 최하위(2016년)를 차지한다. 보건복지부의 2013년 한국아동종합실태 조사 자료를 보면 어린이 삶의 만족도는 OECD 국가 중 꼴찌이고, 세끼 식사, 도서 보유, 취미활동 등의 결핍지수는 최고였다. 2013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보고서를 보면 2000~2010년 아동·청소년 자살률 증가는 OECD 국가 가운데 2위였다. 그러나 다른 나라는 이 기간에 자살률이 감소했다.
어린이 삶의 만족도 OECD에서 꼴찌
이렇게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내고 나서 맞이하는 우리 삶의 모습은 또 어떤가. 출산율은 OECD 국가 중 가장 낮고, 사회복지는 최하 수준이다. 연간 노동시간이나 산재사망률은 최고 수준이며 가계부채는 OECD 국가 중 최고이며 자살률도 최고로 나타났다. 노인 빈곤율과 노인 자살률도 OECD 최고였다. 이 정도 지표만 보더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척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이런 지표 말고도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것이 더 있다. 가장 낮은 최저임금, 대학교육 가계 부담, 실업률 증가, 저임금 노동자 비율, 사교육비 지출, 이혼 증가율 등이 그것이다.
우리 삶을 요약하면 초·중·고교 시절은 학원을 다니며 대학 진학 경쟁, 대학에 가서는 취업 경쟁, 취업 후에는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경쟁, 나중에 노인이 되어서는 빈곤과 외로움에 시달리는 일이다. 우리 아이들만이라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혼세 마왕'보다 '비판-성찰'이 힘이 세다
17일 대학수학능력평가시험이 치러졌다. 다수의 객관식 문항들로 구성된 시험 한 번으로 사람의 능력을 평가한다는 것이 어쩐지 찜찜하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이런 시험이 그나마 '공정한' 게임이라고 생각한다. 최소한 평가자의 자의적 판단이나 부당한 조작이 개입될 여지가 적기 때문이다.
최근의 굵직한 입시 부정 사건들을 떠올려보면 이러한 의심이 아주 터무니없는 것도 아니다. 자율형 사립고인 하나고등학교에서는 (무려 21세기에!) 남학생을 더 뽑으려고 서류 면접 성적을 바꿔치기했다. (☞관련 기사 : "하나고, 남학생 늘리려 입시 조작" 현직 교사 폭로) 면접이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로스쿨 선발 과정에서 면접 위원은 특정 지원자가 고위 법관이나 로펌 파트너의 자제라는 사실을 고지 받았다. (☞관련 기사 : "아버지가 판사" "로펌 파트너"…교육부 '불공정' 감싸기) 최근 월드 스타가 된 어떤 이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알리기 위해 아예 금메달을 목에 걸고 면접장에 들어갔다. (☞관련 기사 : "금메달 뽑아라"…정유라 메달만 반영)
하지만 객관식의 일회성 시험보다 다양한 자료를 검토하고 심층 인터뷰를 통해 지원자의 잠재력을 평가하는 것이 훨씬 좋은 방법임은 분명하다. 그래서 많은 학교와 기업들이 다면적 평가를 확대하면서 동시에 평가자들의 자의성을 최소화하고 타당한 평가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노력한다. 혼이 정상적인 기관이라면 말이다.
그런데 최근 <미국의학교육학회지>에 실린 논문은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이야기한다.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카퍼스 교수 팀은 객관적 평가 노력에서 한발 더 나아가, 선발 위원의 무의식적 편견이 입시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우려했다.
미국의 보건의료 전문직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하 흑인으로 표현)을 비롯한 소수 인종이 비율이 낮다. 보건의료 서비스에서 나타나는 인종 간 불평등이 보건의료 전문직의 인종 불평등과 관련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예컨대 환자의 인종에 따라 의사의 상담 태도나 치료 노력이 달라지고, 그로 인해 치료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카퍼스 교수 팀은 보건의료 전문직의 인종 불균형 문제가 의대 신입생 선발 과정부터 시작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신입생 선발에 참여하는 이들의 인종적 편견 수준을 조사한 것이다.
최소한의 염치와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놓고 인종 차별 성향을 드러내지 않는다. 더구나 의대 신입생 선발위원회에 속한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위선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고학력 중간 계급일수록 평등 지향, 자유주의적 성향이 강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통상적 설문 조사를 통해서 인종적 편견을 파악하는 경우, 편견 수준이 매우 낮은 것으로 나오는 것이 보통이다.
실제로 카퍼스 교수 팀이 선발 위원을 대상으로 흑인과 백인 (유럽계 미국인)에 대한 선호를 설문으로 평가한 결과, 여성과 남성, 학생과 교수 모두 특별한 인종적 편견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 팀은 이러한 규범적 설문 태도의 문제를 극복하고자 '암묵적 연관성 테스트(implicit association test)'를 시행했다. 이는 컴퓨터 화면에 나타난 흑인과 백인의 얼굴, 긍정적 단어들(예, 사랑스러운, 즐거운, 행복한, 사랑, 기쁨)과 부정적 단어들(예, 모욕하다, 끔찍한, 독, 이기적, 추잡한, 더러운)을 연계시키는 반응 속도를 측정하는 것이다.
다음 그림처럼, 처음에는 흑인 얼굴이나 긍정적 단어가 나오면 오른쪽 단추, 백인 얼굴이나 부정적 단어가 나오면 왼쪽 단추를 누르도록 정한 후 임의의 순서로 얼굴 사진과 단어를 번갈아가면서 보여준다. 일정 횟수가 지나면 이제 규칙을 바꾸어 흑인 얼굴이나 부정적 단어가 나오면 왼쪽 단추, 백인 얼굴이나 긍정적 단어가 나오면 오른쪽 단추를 누르도록 한 후, 다시 사진과 단어들을 번갈아 보여준다.

ⓒimplicitharvard.edu
이 때 사진이나 그림이 화면에 나타난 후 단추를 누르는 데 걸리는 반응 시간을 측정하여 그 차이를 평가한다. 백인-긍정적 단어를 연관 짓는 반응 속도가 더 빠른 경우 백인 편향의 선호가 존재한다고 판정한다. 이러한 테스트는 무의식적 편견을 잘 포착하며, 일반 설문 조사에 비해 차별적 행태를 더 정확하게 예측한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테스트를 해보면, '답변을 하겠다는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무작위로 화면에 나타나는 단어와 사진에 허둥거리며 단추를 누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가기 : Impliciti. 이 사이트에서 무료로 검사에 참여할 수 있다. 인종 편견 이외에도 성별, 연령, 장애, 비만 등에 대한 무의식적 편견 수준을 확인해볼 수 있다.)
이 연구에는 2012~13년도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의과 대학 신입생 선발위원회 140명이 익명으로 참여했고, 테스트 결과는 본인에게만 화면에 공지되었다. 연구진은 익명화된 자료를 이용하여 성별, 학생/교수 여부에 따라 비교했다. 연구 결과는 매우 간단하다. 남성과 여성, 학생과 교수진 모든 집단에서 유의한 수준으로 백인 선호 편향이 확인되었다. 특히 남성과 교수들에게서 인종 편향이 심하게 나타났다.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면접 과정에서 인종적 편향이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관련 자료 : Implicit Racial Bias in Medical School Admissions)
그렇다면 이러한 테스트는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평가 시행 후에 시행된 설문에서 대부분의 참여자들은 이러한 테스트가 자신을 돌아보고 편견을 줄이려 노력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응답했다. 절반 정도는 그 다음 해 면접 과정에서 자신의 테스트 결과를 염두에 두고 편견이 작동할 가능성을 경계했다고 진술했다. 말하자면, 나 스스로를 앎으로써 성찰하고 경계하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선행 연구들은 의사든 의사가 아니든 흑인에게서 인종적 편견이 적다고 보고했다. 연구진은 이러한 연구 결과, 또 이번 조사에서 나타난 것처럼 여성과 젊은 학생들일수록 무의식적 인종 편견이 적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신입생 선발위원회에 여성, 흑인, 학생을 많이 포함시키는 것이 보다 공정한 평가를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대부분의 인간은 사회의 지배적 문화와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젠더 불평등이라면 치를 떠는 필자도 조카에게 '남자애가 무슨 엄살이야' 하고 내뱉고 스스로 책망한 적이 있다. 심지어 이 글을 쓰기 위해 시험 삼아 해본 암묵적 연관성 테스트에서는 '중간 정도의 (moderately) 백인 선호'가 있다는 결과를 받았다. 건강 불평등 연구자인 내가, 인종 차별을 그렇게 비판하던 내가 이런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니….
하지만 논문이 이야기한 것처럼 무엇이 문제인지를 아는 것이야말로 문제 해결의 시작이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자신의 행동을 성찰하고 교정하는 데 의식적 노력을 기울일 수 있고, 제도적 차원에서는 균형 할당제나 입시/인사위원회의 인적 구성 다양화 등 실질적 대책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요즘 뉴스를 보고 있자면, 무의식적 편견 문제까지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 호사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이 대놓고 인종적, 성적 편견과 혐오를 드러내는 이가 제국의 대통령이 되었고, 한국의 '1+1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 노골적인 여성 혐오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혼세 마왕의 출현이나 대홍수를 기다리기보다는 비판과 성찰의 힘을 믿어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박근혜-최순실은 꼬리, 진짜 몸통은…"
내년이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출범 10년째다. 오로지 성장만 바라보던 이 나라에 복지국가 운동의 씨를 뿌린 단체가 복지국가소사이어티다. 이 단체를 만들기 위해 복지국가 전문가들이 모인 게 지난 2006년이다. 10년 간 벌인 활동, 그 중심에는 이상이 제주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있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그를 만났다.
지난 11일, 서울 마포구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꼬리 자르기'라는 표현을 여러 번 썼다.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외치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과제는 그 너머에 있다는 이야기다. 박 대통령 및 그의 측근들은 '꼬리'에 불과하다고 했다. 몸통은 재벌과 지배 엘리트다. 재벌은 약점 많은 박 대통령을 포획해서 잇속을 챙겼다. 몸통을 바꾸는 개혁이 없다면, '박 대통령 하야'는 그저 '꼬리 자르기'일 뿐이라는 것.
요컨대 그는 '정권 교체' 그 자체만으론 부족하다고 본다. 정권이 바뀌어도 양극화의 현실이 그대로라면, 뜨거운 마음으로 촛불을 든 시민들은 다시 좌절에 빠진다. 이는 결국 '사회 문제에 관심 가져봐야 헛일'이라는 식의 냉소주의만 부추긴다. 일단 나부터 살아남자는 '각자도생' 논리가 판을 치면, 공공성 축소는 필연이다. 이는 재벌이 바라는 바다.
정권이 바뀐다면, 새로운 정권은 재벌이 아닌 시민에게 포획돼야 한다. 아울러 박근혜 정부와는 전혀 다른 정책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그럼, 무엇부터 해야 할까. 이상이 대표는 내년 6월에 '복지국가 정책 패키지 청구서'를 발표하겠다고 했다. 박근혜 정부와는 다른 전망을 지닌 대선 후보라면, 꼭 받아들여야 할 정책들을 추려내겠다는 게다.
이 대표는 최근 출간한 <이상이의 복지국가 강의>에서 '행복을 추구할 권리'와 '행복할 권리'의 차이에 대해 설명했다. '행복을 추구할 권리'만 보장되는 사회에선, 극소수 '개천의 용'만 행복하다. 이제껏 우리는 이런 사회에서 살았다. 진짜 중요한 건, '행복할 권리'다. '개천의 용'이 될 수 없는 보통 사람들에게도 '행복할 권리'가 보장돼야 한다. 그게 보편적 복지다. 한국 사회가 무상급식 논쟁을 거치면서 느슨하게나마 합의했던 방향이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줄푸세'(세금과 정부 규모를 '줄'이고, 불필요한 규제를 '풀'고, 법질서를 '세'우자는 뜻) 구호를 내걸었던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012년 대선을 앞두고는 복지국가를 약속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 취임 이후 4년이 지나는 동안, 우리는 복지국가를 향해 품었던 꿈을 잊어버렸다. 그걸 다시 떠올릴 때가 됐다. 그렇지 않으면, '박근혜 하야'를 외치며 들었던 촛불은 깊은 냉소와 함께 꺼지기 십상이다. 이 대표와 나눈 복지국가 이야기를 간단히 정리했다.
차병원 사태, '나경원 1억 피부과 논란'처럼 끝내면 안 된다
프레시안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중요한 고리가 차병원 그룹이다. 최순실 씨와 그 주변 사람들,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이 차움병원(차움의원)을 이용했다. 차병원 그룹 계열 병원이다. 차병원 그룹은 의료 영리화에 적극적이었다. 박근혜 정부의 의료 정책이 차병원 그룹의 이해관계와 겹친다는 지적이 있다.
이상이 : 나경원 새누리당 의원이 지난 2011년 서울시장 선거에 나섰을 때 '1억 피부과' 논란이 일었었다. 그때는 '가십'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이번에도 비슷한 것 같다. 그럼 안 된다.
차병원 그룹, 가천대학교 길병원 등은 공통점이 있다. 작은 병원에서 출발해서 입지전적인 성공을 했다. 이들은 모두 정권 실세에게 끈을 대는데 익숙하다. 그렇게 해서 성장했다. 현 정부 들어, 차병원 그룹은 최순실 씨를 정치적으로 매수해서 이권을 챙겼다.
의료계에는 크게 두 갈래 흐름이 있다. 하나는 공공성을 중시하는 것이고, 나머지는 시장주의적인 흐름인데, 차병원 그룹 등은 후자다. 정권을 포획해서 시장주의 정책을 끌어내는데 성공한 셈이다.
박근혜-최순실은 꼬리일 뿐…몸통은 재벌
프레시안 : 차병원 그룹 사례는 현 정권과 자본 사이의 관계를 축약해서 보여준다. 재벌은 최순실 씨에게 돈을 뜯겼다며, 피해자인 척 한다. 하지만 그게 아니지 않나. 차병원 그룹은 최순실 씨와 박 대통령에게 약간의 혜택을 준 대신 더 큰 규모의 특혜를 누렸다. 재벌도 마찬가지다. 피해자라기보다는 거래 당사자였다.
이상이 :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이 <프레시안>에 "재벌이 입금하자, 박근혜-최순실이 움직였다"라는 글을 기고했다. 나는 이 글을 출력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보여준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그대로 담겨 있다.
종편이 주도하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 보도는 피상적인 사안만 다룬다. 그런 식으로는 본질이 감춰진다. 박 대통령과 최순실 씨 일가는 꼬리일 뿐이다. 몸통이 그대로라면, 꼬리를 잘라내도 소용없다. 새 꼬리가 곧 나온다. 새로운 박근혜, 더 세련된 박근혜가 나타난다. 몸통은 재벌과 권력 엘리트 집단이다. 그들이 정권을 포획했다. 그들이 과연 박 대통령과 최순실 씨 사이에 대해 몰랐겠나. 절대로 그럴 리 없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 박 대통령을 활용한 것이다. 재벌과 권력 엘리트 집단이 꼬리 자르기에 성공하는 걸로 지금 상황이 마무리될까봐 두렵다.
'신뢰의 정치인'이 무표정하게 공약 깨도 놀라지 않은 까닭
프레시안 : 역동적 복지국가를 내세우고 활동한 지 10년째다. 비록 한계가 있지만 성과도 컸다. 무상급식 도입을 계기로, 보편적 복지에 대한 인식도 확대됐다. 지난 대선에선 모든 후보가 복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상이 :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약속을 깼다. 충격적인 건, 자신이 제시한 공약을 파기할 때의 모습이었다. 예컨대 노무현 대통령도 대선 공약을 파기했었다. 그때는 괴로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박 대통령은 경제 민주화, 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 등에 대한 공약을 취임 첫 해에 파기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박 대통령뿐 아니라 정치권, 언론 등도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그게 충격적이었다.
결국 '어떤 가치에 뿌리를 뒀느냐'라는 문제다. 박 대통령 및 그와 손잡은 세력은 경제 민주화, 복지국가 등에 대한 철학 자체가 없었다. 그러니까 공약을 깨면서도 아무런 가책이 없었던 거다. 박 대통령은 '신뢰의 정치인'이라더니, 당선되자마자 공약을 저렇게 버리나. 이런 생각을 하면 놀랄 법도 한데, 다들 놀라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게다. 박 대통령의 공약은 그의 본질과 관계없었다는 걸 말이다.
2007년 경선과 2013년 취임 사이의 박근혜, 기만이었다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 2기일 뿐이다. 지난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박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이 치열하게 경쟁했다. 당시 이 전 대통령은 성장지상주의를 내세웠고, 규제 완화와 민영화를 약속했다. 박 대통령은 '줄푸세' 구호를 내걸었다. 둘은 결국 같은 이야기를 한 거다.
2년 뒤인 2009년 10월 26일, 박근혜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 추도식에서 "아버지의 궁극적인 꿈은 복지국가 건설이었다. 경제성장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대선 후보 경선 때와는 정반대 이야기를 한 것이다. 실제로 이듬해인 2010년 지방선거에서 무상급식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2012년 대선 당시 박 대통령은 '복지국가와 국민행복 시대'에 대해 이야기했다. 또 경제 민주화, 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 등을 공약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대통령 취임 첫 해인 2013년, 이런 공약들을 모두 폐기했다.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말이다.
지금 돌아보면, 박 대통령의 본심은 2007년 대선 후보 경선 당시 내걸었던 구호였다. 그때부터 대통령 취임 사이에 했던 말들은, 박 대통령의 생각과는 전혀 관계없던 것들이었다. 한마디로 국민을 기만했다.
결국 취임 이후에 박 대통령이 한 일은 뭐였나. 이명박 정부와 마찬가지로, 감세 기조였다. 민영화 정책을 계속 이어갔고, 규제를 풀었으며, 해고를 쉽게 했다. 재벌이 원하는 걸 그대로 한 것이다. 나는 몸통, 본질을 봐야 한다고 거듭 이야기했다. 몸통은 재벌이고, 그들이 원하는 건, 시장국가다. 의료 분야를 놓고 이야기하면, 현 정부는 삼성이 희망했던 원격의료 도입에 목을 맸다. 일차 의료 기관을 위축 시켰고, 공공 의료를 축소했다.
이런 사실을 보다 적극적으로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식코의 나라'가 되는 건 시간문제다.
박근혜 퇴진 이후 양극화는 그대로라면, 더 큰 절망 온다
지금 시민들이 거리에서 촛불을 들고 있다. 그들의 구호대로 박 대통령이 하야한다고 해서, 문제가 풀리는 건 아니다. 정권을 바꾸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들이 있다. 기존 꼬리 잘라내고, 새 꼬리가 돋아난다고 한들, 재벌과 소수 엘리트가 정권을 포획하는 구조가 그대로라면 소용없다.
정권이 바뀌었는데, 양극화는 여전하다면, 사회 안전망은 계속 부실하다면, 시민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또 기만당했다고 느낄 게다. 거리에 나서봤자, 결국 소용없는 거구나 싶어진다. 기대와 열정을 품어봤자, 부질없다 싶어진다. 그럼 어떻게 되나. 일단 나만 살아남자는 생각이 팽배한다. 각자도생이다. 그나마 있는 공공성마저 무너진다. 결국 재벌과 소수 엘리트만 이롭다.
그러자고 촛불 드는 건 아니지 않는가. 정권 교체를 넘어서는 과제가 있다. 재벌이 아닌, 시민이 정권을 포획하는 것이다. 소수 엘리트와 재벌에게 맞춰진 정책의 방향타를 시민의 힘으로 돌리는 것이다. 예컨대 의료 부문이라면, 재벌만 살찌우는 민간 의료 보험 대신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을 확대해야 한다.
'어떤 정권 교체'인가?
프레시안 : 각자도생 사회, 시장국가를 넘어 역동적 복지국가로 나가자는 평소 지론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게 참 어렵다. 역동적 복지국가는 한 가지 정책으로 이룰 수 없다. 조세, 재정, 노동, 복지, 교육, 금융, 산업 정책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에 대한 합의도 필요하다.
이상이 : 깨어 있는 시민 백만 명이 나서면 가능하다. 그저 정권 교체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어떤 정권 교체'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민들이 있다면 가능하다. 스웨덴 등 북유럽 복지국가가 앞서 갔던 길이다. 깨어 있는 시민들이 공부하고 토론하는 자리가 많아져야 한다.
전문가들은 자기 전공에만 갇히지 말고, '복지국가학'을 만들어 내야 한다. 역동적 복지국가가 가능하려면 다양한 정책들이 어떻게 맞물려야 하는지에 대해 연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내가 최근 <이상이의 복지국가 강의>(밈 펴냄)을 출간한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복지국가 운동을 하는 입장에서 사회과학 연구자들을 만나면 답답할 때가 많다. 역동적 복지국가를 만들려면, 경제학도, 사회복지학도 모두 필요하다. 그런데 이들 학문 사이에 교류가 없다. 한쪽이 다른 쪽을 무시하거나, 미워한다. 담론을 다루는 쪽과 정책을 설계하는 쪽 역시 등을 돌리고 있다. 이래서는 '복지국가학'이 불가능하다. 그 점에선 내가 다행스럽다. 나는 학부에서 의학을 전공했다. 공부의 출발점이 사회과학이 아니다보니, 오히려 기존 사회과학 분과 체계에 얽매이지 않고 정책 연구를 할 수 있었다.
아울러 언론과 학교의 역할도 중요하다. 복지국가를 둘러싼 다양한 쟁점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끔 하는 기반이 필요하다. 그러자면, 아무래도 길고 자세한 글을 읽어야 할 텐데, 최근 들어 언론이 단편적인 정보만 전달하는 경향이 더 심해졌다. 또 학생들도 취업이나 전공 공부에 도움이 안 되는 책은 읽을 여유를 내지 못한다. 이 점은 걱정스럽다. 어떤 식으로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본다.

▲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 ⓒ프레시안(성현석)
증세 반발, 복지국가 설득으로 돌파할 수 있다
프레시안 : 내년이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창립 10주년이 된다.
이상이 : 내년 6월에 복지국가 정책 패키지 청구서를 발표할 계획이다. 그걸 주요 대선 후보들에게 전달할 것이다. 말 그대로 시민이 정치인에게 정책을 청구하는 것이다. 주권자인 시민은 그럴 권리가 있다. 이런 활동을 통해, 어떤 후보가 당선되건 다양한 복지국가 정책이 국정에 스며들게끔 하는 게 목표다.
시장국가를 복지국가로 전환하는 과제, 그걸 해내려면 집권 초기가 대단히 중요하다. 그때 무엇이 필요한지를 정리해서 대선을 앞두고 발표하겠다는 게다. 그리고 시민은 이런 청구서를 대하는 후보들을 보고, 누가 복지국가에게 어울리는 대통령감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
역동적 복지국가 만들기, 결국 세금을 더 내야 한다. 반발이 있다. 그건 돌파해야 한다. 세금을 좀 더 내고, 복지국가를 만드는 게 다수 시민에게 훨씬 좋은 일이라는 걸 설득해야 한다. 그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1970~80년대엔 자본 투자를 늘리자는 식의 성장 우선주의가 나름의 설득력이 있었다. 지금은 아니다. 복지를 늘리지 않고서는 성장도 불가능하다. 성장과 분배는 같은 길을 함께 걷는 친구 같은 사이다. 깨어 있는 시민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다만 주변 시민들을 설득하는 무기가 필요할 뿐이다. 내년 6월에 발표할 복지국가 정책 패키지 청구서가 그 역할을 하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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