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복지 칼럼

이제 다시 '복지 국가'를 말하자

일취월장7 2016. 11. 1. 11:31

지난 20년 동안의 일을 우리는 알고 있다

2016.11.01 10:06:56


[복지국가SOCIETY] 이제 다시 '복지 국가'를 말하자

             

이 칼럼의 주요 내용과 핵심 논리는 복지 국가소사이어티가 기획 출간한 신간 <이상이의 복지 국가 강의>(밈 펴냄)에서 인용하거나 일부 수정한 것임을 밝혀둔다. (필자)

우리나라는 1996년 10월 25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협정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1996년 12월 12일 OECD에 29번째 정회원국으로 가입했다. 선진국 클럽인 OECD에 가입한 지 올해로 20년이 지났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진짜 선진국이 되었는가? 우리 국민은 선진국 국민의 삶을 살고 있는가? 우리는 그 대답을 잘 알고 있다. 대한민국은 선진국이 아니며 우리 국민은 선진국의 '국민 행복 시대'가 아니라 민생 불안과 불평등의 고통 속에서 미래가 불안한 삶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행복 지수는 OECD 최하위에 머문다.

자살률이 3배나 늘었다. 20년 전의 자살률은 OECD 평균 수준이었으나, 지금은 OECD 평균의 3배나 된다. 지난 20년 사이에 출산율도 크게 낮아졌다. 그때는 지금의 OECD 평균 합계 출산율 1.7에 근접했었으나 지금은 1.2를 맴돌고 있다. 지난 20년 사이에 소득 격차와 불평등도 매우 심해졌다. 상대적 빈곤율은 8%에서 15%로 2배나 늘어났다. 우리나라는 소득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48%를 차지해 미국의 48.2%에 이어 주요 국가들 중에서 2위를 차지했다. 20년 전에는 '소득 상위 10%의 소득 점유율'이 32%로 유럽 수준이었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는 지난 20년 사이에 유럽 수준에서 미국에 버금가는 불평등한 국가로 전락한 것이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얼굴 

20년 전에는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노인 인구의 비율이 6.14%였다. 지금은 13.2%이다. 20년 만에 2배 이상 증가했다. 세계 최고의 증가 속도이다. 이대로 가면 2017년에는 노인 인구가 14%로 고령 사회, 그리고 2026년이면 노인 인구 비율 20%로 초고령 사회가 된다. 이렇게 되면 심각한 저출산 추세와 겹쳐 우리나라는 경제적·사회적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다. 지금도 65세 이상 노인의 절대적 빈곤율은 26%나 되고, 상대적 빈곤율은 48.6%나 된다. 우리나라의 노인 빈곤율은 OECD 국가들 중에서 압도적으로 부동의 1위이며, OECD 평균 노인 빈곤율 12.4%에 비하면 4배나 된다. 

▲ 쪽방촌에 사는 노인. ⓒ프레시안(최형락)


더 큰 문제는 우리나라의 노인 빈곤율 상승 속도가 OECD 회원국들 가운데 가장 빠르다는 것이다. 2015년 OECD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노인 빈곤율은 2007년 44.6%에서 2011년 48.6%로 4년 만에 4%포인트나 상승했다. 반면에 유럽 복지 국가들에서는 다른 연령층보다 오히려 노인의 상대적 빈곤율이 더 낮다. 상대적 빈곤율을 연령대별로 비교해보면 노인층에서 가장 낮게 나타난다. 유럽 대부분의 복지 국가들은 무상 의료뿐만 아니라 공적 연금 혜택도 넉넉하다. 한낮의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들고 신문을 읽으며 행복한 웃음을 짓는 유럽 노인들의 삶은 바로 이런 공적 노후 보장 덕분이다. 

그런데 노인이 행복한 이런 사회가 우리에게는 너무나 멀리 있다. 수위실에서 24시간 경비를 서거나 폐지를 줍고, 그렇게 기를 쓰며 스스로 빈곤의 장벽을 넘어서라고 가난한 노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의 80세 이상 노인 자살률은 유럽 주요 국가들의 5배에 이른다. 후기 고령자 자살률이 이렇게 높은 것은 더 이상 경비를 설 수도 폐지를 주울 수도 없는 '가난하고 병들고 외로운' 노인들이 어쩔 수 없이 자살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공적 노후 보장이 제도적으로 부실한 나라에서 많은 노인들이 '잉여'가 되어 스스로 생을 마감할 결심을 하는 나라,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우리나라는 2012년도부터 '20-50' 클럽에 속해 있다. 일각에서는 잘만 하면 우리나라가 곧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에 들어설 것이며, 일본도 우리의 경쟁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도 한다. 가히 '한강의 기적'이라고 해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기적을 일으킨 나라 대한민국의 곳곳에서 보통 사람들이 호소하는 불안과 고통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간다. 중산층의 비중은 줄어만 가고, 소수의 고소득층이 나라 전체의 소득과 부를 독점하는 정도는 점점 더 심해진다. 노인 인구는 늘어만 가는 데도 노인층의 빈곤 문제는 도무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급기야 '노인 자살 공화국'의 오명까지 떠안았다.

젊은이들의 실업과 좌절, 여성들의 경력 단절, 날로 늘어가는 비정규직 문제, 그리고 이런 모든 것들이 끊임없이 우리 사회를 더 뾰족한 피라미드로 만들면서 그 피라미드를 올라가려고 발버둥치는 아이들의 끔찍한 입시 경쟁 문제는 더 이상 우리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다. 모두가 시장 경쟁에 맨몸으로 던져진 채 살아남기 위해 각자도생의 전투를 벌이고 있다. 그야말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이다. 이것을 입증하는 지표가 있다. 바로 'GDP 대비 공공 사회 복지 지출'의 비율이다. 우리나라는 2015년 현재 GDP의 10.5%에 불과하다. OECD 국가들의 평균은 21.6%이고, 유럽의 선진 복지 국가들은 30%를 넘나든다.

결국 우리나라는 공공 사회 복지 지출의 규모가 OECD 평균의 절반, 선진 복지 국가들의 3분의1 수준에도 못 미치는 복지 후진국이다. 우리나라에서 자녀의 양육과 교육, 주거, 의료와 요양, 각종 노후 보장 등 보통 사람들의 삶의 단계 단계에서 꼭 필요한 안전 장치를 마련하는 데 투입되는 공적 지출의 크기가 OECD 평균의 절반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국민의 행복 지수는 OECD 34개 국가 중에서 언제나 거의 꼴등에 가깝다. 또 통계청의 2015년 사회 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 국민의 44.6%는 자신의 사회 경제적 지위를 하층민이라고 답변했다. 이것이 바로 불안하고 불행한 보통 사람들의 삶, 우리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20년 동안 진행된 신자유주의 시장 국가의 구조화 

박정희 정권에서 추진된 국가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은 성공을 거두었고, 그 성과는 1980년대의 군사 정권에서 도드라지게 나타났다. 그러나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관치 경제를 의미하는 국가 자본주의적 발전 국가 모델은 더 이상 작동하기 어려워졌다. 이미 덩치가 커진 재벌 대기업들도 규제 완화와 시장의 자유를 요구했고, 국제적으로도 신자유주의가 크게 확산되고 있었다. 기존의 낡은 체계가 더는 작동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김영삼 정부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물결에 올라타기로 결정했다. 집권 초반기에 이미 선진국 클럽인 OECD 가입을 준비했고, 신자유주의의 세계적 기준에 우리의 경제와 사회 분야를 맞추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 노력의 성과가 1996년의 OECD 가입이라면, 준비 없는 자본시장의 급진적 개방 등이 초래한 부작용이 바로 1997년의 외환 위기이다. 외환 위기 이후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막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했다. 이때 IMF와 미국은 신자유주의 개혁을 구제 금융 제공의 조건으로 걸었다. 바로 '워싱턴 컨센서스'였는데, 그것의 핵심 기조는 "큰 시장 작은 정부"였다. 각종 규제가 철폐 또는 완화되었고 감세가 추진되었다. 김영삼 정부가 세계화 기조에 맞춘다며 어설프게 추진하던 노동, 환경, 보건 의료 등의 규제 완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특히 노동권 규제의 완화는 보통 사람들의 삶에 직격탄을 날렸다. 

외환 위기 이후 모든 것이 변했다. 많은 기업들이 도산했지만, 살아남은 재벌 대기업들은 덩치를 더 키웠다. 외국 자본의 비중은 커졌고, 주주 자본주의 양상은 더 강화되었다. 기업들은 단기적 이익을 올리는 데 혈안이 되었다. 과거에는 하청 기업이나 중소 기업들과 함께 성장하던 재벌 대기업들이 태도를 바꾸었다. 시장의 약탈자처럼 행동했다. 하청 단가를 후려치거나 기술을 약탈하는 데 더해서 대기업 계열사 등에 일감을 몰아주면서 시장 질서를 교란했다. 재벌 대기업들은 고용 없는 성장을 이어갔다. 정규직 대신 비정규직을 고용하고, 사실상 하청기업 노동자의 임금을 정체시키고 그들의 일자리를 불안정하게끔 몰아갔다.

외환 위기 이전에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수도 많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들에 대한 처우도 나쁘지 않았고, 쉽게 해고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외환 위기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문제는 이런 추세가 외환 위기가 극복된 이후에도 계속 심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정부의 공식 통계에서는 비정규직 비율이 2016년 현재 32%로 나와 있지만, 여기에는 사내 하도급 노동자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노동계는 이들을 포함해서 겉으로는 정규직 노동자 또는 사업주이지만 실제로는 비정규직인 노동자들까지 모두 비정규직으로 간주한다. 노동계가 이렇게 계산한 우리나라의 비정규직 비율은 전체 임금 근로자의 50%에 이른다.

ⓒ프레시안(최형락)


노동 시장의 양극화가 심각해진 것이다. 이처럼 많은 수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존재하고, 그 수는 날로 늘어갔다. 2015년 현재 비정규직의 월 평균 임금은 정규직의 54.4% 수준이며 복지 혜택은 거의 없다. 비정규직은 사회 보험 가입률도 30~40%에 불과하다. 이런 차별들이 두 집단 간의 엄청난 수준의 삶의 질 격차를 초래한다. 그래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면 비록 취업은 되었어도 경제적 고통에서 자유로워지기가 쉽지 않다. 또 차별적인 대우와 부당한 업무 지시 등의 문제도 심각하다. 하지만 이에 대한 문제 제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다가 잘못되면 돌아오는 것이 해고 통지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년 사이에 노동 시장의 양극화와 함께 고착화된 또 다른 문제는 '낮은 여성 고용율과 어려운 일.가정 양립'이다. 우리나라의 고용률은 65.7%로 OECD 평균인 66.3%에 비해 조금 낮은 편이다. 우리나라의 남성 고용률은 75.7%로 OECD 평균 남성 고용률 74.2%보다 조금 높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여성 고용율이 55.7%로 낮아 OECD 34개 회원국 중 28위이며, OECD 평균인 58.6%보다 낮다. 이런 낮은 여성 고용률은 낮은 출산율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반대로 북유럽은 여성 고용률이 높고 행복 지수와 출산율이 모두 높다. 또 이들 나라에서는 여성들의 경제 활동 참가가 왕성하기 때문에 1인당 국민 소득도 높다.

양극화된 노동 시장에서 사람들은 모두 전체 일자리의 5.5% 남짓의 공무원 일자리와 4.5%밖에 안 되는 삼성이나 현대 같은 재벌 대기업의 일자리를 향해 몰려든다. 외환 위기 이후 이런 추세는 해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데, 모든 구직자들이 전체 일자리의 10%에 불과한 좋은 일자리를 놓고 끔찍한 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노동 시장은 '10 대 90'으로 분리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전체 일자리 중에서 공무원이나 재벌 대기업과 같은 좋은 일자리는 10%에 불과하고, 나머지 90%의 일자리는 중소기업(62%)과 자영업(28%) 분야에 존재한다. 그래서 홉스의 '자연 상태'처럼 지금 이 나라에서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 상태이다. 

결국 계층 피라미드의 위쪽으로 올라간 사람들은 기뻐하겠지만, 대다수 패배자들에게 남은 길은 임금과 복지가 형편없는 중소기업으로 향하거나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는 길뿐이다. 우리나라는 임금 문제도 심각하다. 2015년 OECD 통계에 의하면, 중위 임금의 3분의2 미만을 버는 '저임금 노동자'의 비중이 23.7%나 된다. 덴마크의 7.9%나 핀란드의 8.4%에 비할 바가 못 되며, OECD 평균인 16.8%에 비해서도 크게 높다. 그래서 승자독식의 세상에서 학교는 치열한 경쟁의 공간이며, 사교육 열풍은 멈출 줄을 모른다. 외환 위기 이후의 신자유주의 양극화는 노동 시장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우리 아이들의 행복할 권리까지 가로막았던 것이다. 

승자 독식의 시장 국가에서 역동적 복지 국가로 

역사에서 어떤 가정은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만약에 김영삼 정권이 군사 정권 시대의 국가 자본주의적 관치 경제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시장의 자유화를 강조하는 미국식 시장 만능주의가 아니라 시장의 민주화와 조정된 시장 경제라는 북유럽식의 역동적 복지 국가를 추구했다면 우리나라는 지금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 확실히 다를 것이다. 김영삼 정권이 초래한 외환 위기를 극복했고 관치 경제를 상당 부분 해결한 공로는 있지만, 김대중 정권은 경제·사회의 신자유주의적 구조화라는 오류를 범했다. 노무현 정부도 복지 국가 시대의 문을 여는 것 대신에 절차적 민주주의의 완성에 머물렀다. 이후의 신자유주의 정부는 시대 정신을 역행했다. 그렇게 우리는 20년을 보냈다.

▲ <이상이의 복지 국가 강의>(이상이 지음, 밈 펴냄). 복지 국가 시대를 살아가야 할 우리 모두를 위한 안내서. 경제학과 복지학을 넘나드는 복지 국가 교과서이자 안내서. 또 왜 복지 국가일까? 어떤 복지 국가여야 할까? 어떻게 복지 국가를 만들 수 있을까? ⓒ밈

우리는 지난 20년을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지난 20년 동안 일어난 모든 일들을 꼼꼼하게 따져봐야 한다. 이런 성찰과 반성 위에서 우리가 가야할 국민 행복의 새로운 길을 안내할 새 지도를 그려내야 한다. 바로 역동적 복지 국가가 그것이다. 대선이 1년 남짓 남았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시기는 앞으로 6개월이다. 이 기간 동안 '깨어 있는' 국민의 자발성을 모아 역동적 복지 국가의 길로 가자는 내용으로 의기투합해야 한다. '깨어 있는' 국민이 '국민건강보험 하나로'를 요구해야 한다. 이들이 아이들이 행복한 나라와 청년 고용 소득 보장을 요구해야 한다. 노동 시장의 양극화 해소와 공적 노후 보장의 완비를 요구해야 한다.

지금 이대로라면 내년(2017년) 대선은 인신 공격과 더러운 정쟁으로 치러질 공산이 크다. 우리는 미국의 대선에서 정책 경쟁 없는 저열하고 지저분한 선거를 목격하고 있는 바, 이런 미국의 모습이 아니라 '정치가 꽃보다 아름다운' 북유럽 국가들의 '정책 경쟁' 선거를 희망해야 한다. 한 나라의 정치와 선거는 그 나라 국민과 제도의 수준을 반영한다. 우리는 북유럽 복지 국가들처럼 '깨어 있는' 국민을 더 크게 규합해야 한다. '깨어 있는' 국민이 복지 국가 담론과 정책 패키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정치적 수용을 요구하는 큰 흐름을 만들어낼 때라야 내년 대선이 민생 불안의 해결 방안을 놓고 '정책 경쟁'을 벌이는 좋은 선거가 될 수 있다. 어떤 정권 교체인가,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 결국 우리 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