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통일 문제

“북한은 위기 극복 위한 위기 만들 것이다” - “미국을 믿지 마라 그들이 먼저다”

일취월장7 2016. 11. 1. 10:47

“북한은 위기 극복 위한 위기 만들 것이다”

6공화국 시절 ‘북방외교’의 기수였던 박철언 전 정무장관(사진)은 북한을 궁지로 모는 현 정부의 전략이 아주 위험한 발상이라고 말한다. 그는 북한에 살길을 열어주고 중국에도 활로를 터주면서 미국을 설득하는 고도의 외교술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정희상 기자 minju518@sisain.co.kr 2016년 10월 31일 월요일 제475호


박철언 전 정무장관은 제5공화국과 제6공화국에 걸쳐 대북 특사였다. 1985년부터 1991년까지 북한과 42차례나 접촉했다. 김일성 주석, 허담 대남담당비서, 한시해 수석대표 등을 만났다. 1991년 ‘남북 기본합의서’와 ‘남북 비핵화 공동선언’의 기초를 다진 주역이다. 특히 6공화국 당시 ‘황태자’로 불린 그는, 탈냉전 ‘북방외교’의 기수였다.

그는 대통령 정무·법률비서관(1980~ 1985), 안기부장 특별보좌관(1985~1988), 정무장관(1989~1990), 체육청소년부 장관(1990~1991)을 거쳐 13·14·15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이후 공직에서 물러난 그는 일본 도카이 대학과 미국 보스턴 대학에서 객원교수를 지냈다. 현재 한반도통일복지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북방외교의 주역이었던 박 전 장관을 만나 북핵 위기 해법을 들었다.



ⓒ시사IN 조남진

박근혜 정부 대북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박 대통령은 처음에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와 이른바 드레스덴 구상을 내놓았다. 남북 쌍방이 국제적 규범에 맞는 행동을 해서 서로 신뢰가 쌓이면 남북 관계도 더 진전이 된다는 ‘원칙론’을 강조했다. 당연하고 원론적인 이야기만 했을 뿐 구체적인 내용도 성과도 없었다. 지금은 신뢰 프로세스와 정반대로 초강경 모드로 나가 북한 붕괴론을 꺼내들었다.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박근혜 정부의 대북 압박 정책이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는 데 효과가 있을까?

북한은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에게 핵은 세습 체제의 핵심이자 대미·대남 전략의 근간이다. 북한은, 고난의 행군을 몇 년만 더 하면 핵무기 보유국인 인도나 파키스탄처럼 국제사회에서 핵 보유국으로 인정받을 것이라 믿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에 대한 일방적인 제재나 인권 문제만 제기하는 것은 답이 될 수 없다.

박 대통령은 북한의 체제 붕괴 가능성을 언급하는데?

북한은 한반도의 반쪽을 실효적으로 70년간 지배하고 있는, 하나의 현실적 권력 주체다. 서방 전문가도 북한이 스무 개 안팎의 핵무기와 미사일 1000여 기에 100개 이상 이동발사대를 가지고 있고, 화생방 무기도 보유하고 있다고 본다. 그런 북한이 우리가 압박한다고 호락호락 붕괴되겠는가.


ⓒ연합뉴스
박 전 장관은 노태우 정부 시절 정무장관과 체육청소년부 장관을 지내며 대북 밀사로도 활동했다.

중국 변수도 무시할 수 없는데?



북한의 가장 강력한 맹방인 중국이 자국 안보상 친미 정권으로 통일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터이다. 이미 김정일 시대에 북한 경제가 피폐해져서 주요 항만이나 광물 자원은 중국에 장기 임대를 했다. 만일 남쪽과 미국의 압박으로 북한에 변고가 발생하면, 중국은 국제법상으로도 그 기득권 보호를 위해 진주할 것이고, 북한에 친중국 정권 비슷한 것을 세우려 할 것이다. 통일을 위해서는 한·미 관계뿐 아니라 한·중 관계도 중요하다.

중국은 사드 배치에도 극력 반발한다.


박근혜 정부가 처음부터 우리 안보를 지키기 위해서는 사드를 배치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밝혔으면 중국의 극한 반발은 없었을 것이다. 줄곧 ‘3무 정책’이라 해서 사드 배치 제의도 안 받았고, 검토도 없고, 결정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배치한다고 하니 중국의 반발이 커졌다. 친중국 외교를 펼쳐도 우리 안보가 전제되어야 하므로 애당초 사드 문제에 대해서는 박근혜 정부가 단호했어야 한다.


ⓒ박철언 제공
1985년 평양에서 김일성 북한 주석(왼쪽)을 만난 박 전 장관(오른쪽).

북한에게 중국의 위상은 어떤가?



현재 북한은 원유의 90%, 식량 부족분의 20%를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또 북한 대외 무역량의 90%가 중국이다. 중국이 마음만 먹으면 북한을 압박할 수 있는데, 왜 하지 않느냐? 중국 처지에서는 미국의 MD 전략에 대응해 북한을 전략적 자산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2009년 5월 북한의 2차 핵실험 직후 중국 공산당 중앙 외사공작영도소조 회의에서 그 원칙을 천명한 바 있다(외사공작영도소조는 외교 컨트롤타워 구실을 하는데 국무원·공산당·국방부·외교부·상무부·대외연락부 등 10여 개 유관 부처 관계자들이 참여한다). “북한은 중국의 전략적 자산이다. 북핵 문제와 북한 문제는 분리 대응한다”라는, 즉 북핵 문제는 북·미 관계 등 근본 원인 모두를 함께 해결할 때 효과를 거둔다는 ‘표본겸치(標本兼治)’ 외교 원칙을 세웠다. 아직까지 그 원칙에는 변화가 없다.

정부가 북한 붕괴 정책을 쓰면 한·중 관계도 필연적으로 악화된다는 뜻인가?

그렇다. 이런 국제 권력정치 속에서, 노태우 정권 초기에 북한을 압박했다면 붕괴해서 흡수통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나, 현재 박근혜 정부 식의 강경 모드로 몰아가면 북한이 붕괴되고 남북통일이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는 현 정부 외교안보 수뇌부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일 뿐 아니라 아주 위험한 발상이다. 북한으로서는 너무 궁지에 몰리면 붕괴하기 직전에 ‘위기 극복을 위한 위기 조성 전략’을 쓸 수 있다.

북한의 위기 조성 전략이란, 전쟁을 의미하나?

남한을 향해서 미사일 몇 방 쏘고 “남조선이 미 제국주의와 결탁해서 전쟁을 일으켰다”고 오히려 우리에게 덮어씌우며 결사 항전해야 한다는 식으로 북한 내부를 결속시키려 할 것이다. 미국의 지원을 받아 우리가 전쟁에서 승리한다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한반도는 초토화될 것이다.

박 대통령은 북핵 위기 원인을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햇볕정책으로 돌리고 있는데?

남북 관계가 최악에 이르게 된 책임은 노태우 정권 이후 20여 년의 역대 정권 모두에게 있다. 북한 김일성 주석이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한 때는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5년 12월이었다. 그때부터 남북 간의 물밑 대화가 이뤄져 노태우 정권 때인 1991년 12월에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됐다. 또 비핵화 공동선언까지 채택해, 비핵 평화 공존의 방향을 향해서 착실히 나아갔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 때인 1993년 3월12일 북한이 NPT를 전격 탈퇴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흘렀으니, 북한 핵을 못 막은 것은 김영삼 정권 이래 현 정권까지 잘못 풀어온 책임이 고루 있다는 것이다.

북핵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전쟁을 예방하면서 북한이 핵을 가지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북한에 새로운 활로를 열어줘야 한다. 활로는 3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김정은 체제를 인정해야 한다. 체제를 인정한다는 건 내정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미국과 일본이 북한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도록 적극 지원해야 한다. 다음으로 남한과 서방세계에서 북한에 대폭적인 경제적 지원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안을 제시해야 한다. 남북기본합의서가 아직 살아 있지 않은가. 거기에 남북이 서로 내정간섭을 하지 않고 체제를 존중하기로 합의가 돼 있다. 또한 우리의 통일방안 기조인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라는 것은 남북이 국가 연합으로 서로 평화 공존 단계를 거쳐서 장차 평화통일로 나아간다는 거다. 북한의 연방제와 우리의 국가연합을 서로 합의해서 느슨한 단계의 연방제와 국가연합을 결부시켜서 남북이 당분간은 평화로이 공존한 다음 서로 평화적으로 통일하는 길을 논의해야 한다.

미국과 중국이 그런 대북정책을 받아들일까?

위에서 말한 세 가지를 포함하는 포괄적 안을 내놓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정부는 중국과도 담판하고, 미국하고도 담판해야 한다. 중국에게는 “당신들이 북한 핵미사일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면 사드 배치는 물론이고 미국 전술핵을 들여와야겠다. 또 우리 자체적으로 핵 개발을 할 수밖에 없다”라고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대신에 중국이 포괄적 해결 방안에 협력해주면, 미국에 대해서도 한국이 중국의 이익을 위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약속해야 한다. 미국으로 하여금 중국을 동아시아에서 지도 국가(리딩 컨트리)로서 인정해주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현 정부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을 듯한데?

정부가 왜 자꾸, 북한을 압박하면 붕괴되고 붕괴되면 우리한테로 통일이 된다는 그런 위험하고 순진한 발상을 하는지 모르겠다. 북한이 붕괴되면 중국이 가만히 있겠는가. 박근혜 대통령이 드레스덴 구상이니 동·서독 통일 모델을 거론하는데, 그것은 북한에게 ‘너희들 붕괴시켜 우리가 흡수하겠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외교안보 참모진이 대통령에게 그런 말을 하게 보좌하고 말씀 자료를 그렇게 써주니까 대통령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 아닌가.

현 정부 외교안보 참모진이 문제다?

박 대통령 주변의 참모진이 극우·친미 일변도로 꾸려진 게 문제다. 대통령의 외교안보 핵심 참모진은 균형 감각을 가지고, 미국만이 아니라 중국과도 좀 통하는 그런 사람들이어야 한다. 또 남북 문제에 있어서도 좀 더 민족의 현실과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식견을 가진 사람이어야 하는데 지금은 극우·친미 일변도다. 이들이 대통령에게 초강경책을 조언해 북한이 붕괴되면 흡수시켜서 통일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참으로 어리석은 망상을 하고 있으니 걱정스럽고 위험하다.

남북한이 극한 대치 속에서도 물밑 핫라인을 유지했지만 요즘 북핵 대치 국면에서는 그마저 단절된 것 같다.

크게 우려할 만한 일이다. 전쟁 중에도 평화와 정전을 위해서 물밑 대화와 협상을 한다. 비밀 접촉이나 비밀회담은 관계가 나쁠수록 해야만 한다. 과거 냉전 시대에 남북한의 극한 충돌 국면에조차 서로 물밑 대화를 했다.

구체적 사례를 든다면?  


전두환 정권 때는 1983년 10월9일 버마(현 미얀마) 아웅산 폭탄테러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전 대통령은 자기를 죽이려고 한 북한을 상대로 대결하다가, 안보나 군사를 앞세우다 보니 역시 외국인 투자와 관광객이 줄고 군사적으로도 역량 낭비가 엄청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우리 측에서 먼저 북한에 비밀 접촉을 하자고 제의해 그 비밀회담 수석대표로 내가 1985년 평양에 들어간 것이다.

당시 북한과 어떻게 만났나?  

1985년부터 1991년까지 군사분계선을 넘나들며 42차례 만났다. 철저히 상호주의를 관철해서 우리가 한 번 가면 북에서 한 번 오는 방식이었다. 북쪽에서 20차례, 남쪽에서 21차례, 제3국인 싱가포르에서 1차례 접촉했다. 물론 나는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측 지역 판문각이라든지 개성, 평양 김일성 주석궁, 백두산의 김일성 주석 별장 그런 곳을 방문하고 김일성 주석을 비롯해 허담 대남담당비서, 한시해 수석대표와 만났다. 짧으면 첫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길면 3박4일을 머물며 북한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 북한 요인들도 비밀리에 서울로 데려와 평화의집, 신라호텔, 남산타워, 동대문시장, 음식점인 삼청각, 제주도 한라산까지 남측의 구석구석을 안내하고 보여주며 서로가 서로의 실상을 알아가며 대화를 했다.

회담 과정이 순탄치 않았을 텐데?

처음에는 장소부터 옥신각신했다. 북측은 안전 문제를 들어 비밀회담 대표들이 서울과 평양을 오갈 것이 아니라 ‘만경봉호’에서 계속 만나자고 나왔다. 그래서 “나는 물에 약해서 수영도 못하고 어지러워 배에서는 도저히 못한다. 만경봉호에서 회담하려면 하지 말자”라고 고수했더니 받아들여져, 6년여간 북한 구석구석을 다니게 됐다.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단과 예술단 상호교환도 북한은 처음에는 금강산에서 철조망 쳐놓고 만나자고 나왔다. 내가 “그게 무슨 고향 방문이고 이산가족 상봉이냐. 당장 고향까지는 어렵다면 장차 가더라도 우선 서울과 평양은 가야 한다. 그거 안 할 거면 하지 말자”라고 세게 나갔다. 북측에서 회담 도중에 자꾸 엉뚱한 소리를 하면 안 한다고 돌아왔다. 서로 답답해지니까 ‘핫라인’을 만들기로 했다. 남측 수석대표인 나와 북측 수석대표 한시해 사이에 24시간 가동되는 핫라인이 개설돼 6년 동안 사전에 전화로 상의하고, 그다음 수차례 만나 서로 이견을 좁혔다.

그런 비밀회담 끝에 얻어낸 성과는?

이산가족 고향방문단과 예술단 교차 방문이 이뤄지고 남북한 축구 단일팀도 만들었다.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축구경기를 시작한 뒤 제6회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20세 이하)에서 남북 단일팀을 구성해 8강까지 올랐다. 현정화 선수와 리분희 선수가 한 팀을 이룬, 남북 여자탁구 단일팀이 일본에 가서 세계를 재패하기도 했다. 그런 대화와 교류로 신뢰가 축적되어서 마침내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 선언이 나왔던 것이다. 형식은 공개회담을 통했지만 그런 물밑 접촉으로 조율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이견을 줄여 결실을 볼 수 있었겠나.

북한이 끝내 핵을 보유하면 어떻게 대응해야 한다고 보나?

이대로 가다가는 결국 북한이 1~2년 안에 실질적 핵 보유국이 될 것이다. 그러면 일본과 타이완도 뒤따라 핵을 가질 것이고, 우리도 가져야만 하는 상황이 온다. 미국도 중·장기적 시각에서 나쁠 게 별로 없다고 볼 것이다. 중국의 태평양 진출 억지를 가장 큰 전략 목표로 잡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북한 핵 보유를 계기로 동북아가 공포의 핵 경쟁 시대, 군비 경쟁 시대로 돌입하면 중국의 꿈이 자연히 뒤로 미뤄질 수밖에 없다고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도 끝내 북한 핵 용인 후 동북아 핵 경쟁을 받아들일 것이다?

미국은 처음에는 전략적 인내라고 북핵 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처하다가 최근에는 선제타격론까지 들고나왔다. 나는 미국이 북한에 지상군을 투입한다든지 미국 대통령 선거를 전후한 시점에 북한을 선제 폭격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본다. 결국 미국은 북한을 상대로 해보는 데까지 해보지만 그래도 안 되면 핵 보유는 용인하되 핵을 관리하는 선으로 후퇴하리라 본다. 그러면 동북아 전체에 핵 도미노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일본과 미국으로서는 크게 나쁠 것이 없지만 이 과정에서 제일 골병드는 게 한국과 중국이다. 그런 측면에서 한국 정부는 북한에 살길을 열어주고 중국에도 활로를 터주면서 미국과 북한으로 하여금 일괄 타결할 수 있는 안을 선택하도록 만드는 고도의 외교술을 구사해야 한다. 복잡해 보이지만 원론적으로 생각하면 간명하다. 한국이 앞으로 21세기 아·태 시대의 주역으로 등장하기 위해서는, 남북한이 화해 공존을 통한 통일을 이뤄서, 동북아 3국 연대의 조정자 구실을 해야 한다.



“미국을 믿지 마라 그들이 먼저다”

미국 워싱턴 정가에서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론이 나오고 있다. 미국이 북한 핵을 쿠바 미사일 위기만큼 현실적인 위협으로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이인석 전 인천대 석좌교수는 북·미 간 북핵 협상이 임박했다고 분석한다.

남문희 기자 bulgot@sisain.co.kr 2016년 10월 31일 월요일 제475호


미국은 과연 북한을 선제공격할 것인가. 사드가 불러온 국익과 동맹의 충돌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냉전 시절 서독의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서독도 국익과 동맹의 충돌을 경험한 바 있다.

이인석 전 인천대 석좌교수는 1993년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동베를린 무역관장 시절부터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DJ에게 대북정책과 관련한 숨은 조언자 노릇도 했다. 그에게 진단과 해법을 들었다.



ⓒ시사IN 조남진
이인석
서울대 독어독문과.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동베를린·프랑크푸르트 무역관장. 청와대 건설교통비서관. 인천발전연구원장. 인천대학교 석좌교수 역임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론이 워싱턴발로 나오고 있다.


최근 눈에 띄는 게 미국 언론의 여론조사다. 북한 핵을 위협으로 느끼는 비율이 60%에 이르렀다고 한다. 지난해와 비교해 5% 상승했다. 매년 위협 인식이 높아지고 있다. 미국이 북한 핵의 실체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보다 더 심각하게 보는 건가?

북핵은 이미 미국의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평양이든 어디든 미국 본토로부터 1만5000㎞ 떨어진 곳에서 북한의 핵미사일이 날아올 수 있다는 점을 가상하고 있다. 바다 건너로부터 미국 본토가 침공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미국인들이 느끼는 두 번째 위기감이다.

첫 번째 위기는 언제였나?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가 첫 번째다. 1962년 10월16일부터 28일까지 13일간 사태가 전개됐는데 일촉즉발 위기 상황에서 미소가 극적 타결을 했다. 미국 최대의 위기였고 전 세계를 핵전쟁의 공포로 몰아넣었다. 미국인들은 이 쿠바 위기를 잊지 않고 있을 것이다. 또 1970년대 후반 옛 소련이 동유럽에 배치했던 중거리 미사일을 핵미사일로 교체하면서 유럽 전체 위기가 고조되었는데, 당시 미국 본토는 공격 대상이 아니었다. 대신 유럽이 전장이었고, 독일이 당사자였다. 반면 이번 북한 핵은 미국이 당사자다.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미국이 북한을 선제공격할 수 있을까?

국제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고 한다. 상대방의 핵미사일 사용이 임박할 경우 자위권적 차원에서 허용이 된다. 동맹과 사전 협의가 필요 없다는 점이 우리에게는 걸린다. 선제공격은 작전 수행상의 문제이지 협의 대상이 아니라고 한다.

한·미 동맹은 대북 억지를 통한 한국 보호를 명분으로 하는 것 아닌가?

지금까지는 그렇다. 주한미군 주둔도 그렇고 사드 배치 명분도 그렇다. 선제공격론이 나오면서 미국 본토가 더 중요하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자국 보호를 우선으로 하는 미국의 본심이 드러난 것이다.

동맹인데 일방적으로 선제공격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도 있는데?

안보 문제와 관련한 미국의 일방주의는 백번 경계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금까지 우방들이 제일 불만인 게 그 점이다. 미국은 안보만은 철저하게 일방주의이다. 유럽도 겪었고 아시아에서도 겪었고, 현재 우리도 겪고 있다.

결국 한국의 국익과 동맹의 이익이 늘 같지는 않다는 사실로 귀결하는 듯하다.

사드 문제에서도 드러났지만 워싱턴발 선제공격론에서도 국익과 동맹의 이익이 충돌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안보와 경제 번영, 분단 극복(통일)을 국익의 3대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세 가지 국익이 모두 미국과 중국에 의존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비대칭적이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분단 극복과 통일은 미국·중국, 이런 식이다.

그렇다 보니 국익 간에 충돌도 벌어지는 것 같다.

미국과 안보동맹이 강화될수록 통일은 멀어진다. 또 경제와 부딪친다. 동맹의 패러독스다. 국내에서는 미국 중심의 동맹을 강화하면 통일이 될 것이라고 여기지만 대북정책에서는 분단을 심화시킨다. 이런 점이 사드 논쟁에서도 아주 여과 없이 드러났다.


ⓒAP Photo
1961년 케네디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빈에서 핵실험 정지 협상을 했다.

사드 배치 과정에서 나타난 국익과 동맹 이익 간 충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선제공격론과 마찬가지로, 한국은 미국을 방어만 하고, 안전은 미국이 우선이다. 즉 생각은 미국이 하고 한국은 손발 노릇만 한다는 점이 드러났다. 동맹 내 균열이 일어나기에 충분하다. 이 점은 미국도 미처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할까?

북한과 미국이 정면충돌하고 중국이 한국과 대립하게 된 것은 북핵과 그에 대응한 사드 배치 때문이다. 북핵과 사드가 한국의 운명을 결정한다. 결국 이 문제들이 풀려나가는 과정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선제공격론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미국은 진짜 선제공격으로 북핵을 해결하겠다는 생각일까?

선제공격론에 다른 측면이 있다는 것인가?

1994년 클린턴 정부 때와 지금은 많이 다르다. 그때는 북핵이 개발되기 전이다. 지금은 북한이 미국 본토에 대응 보복이 가능한 수준이다. 이런 상태에서 미국이 과연 선제공격을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북한에 대해 선제공격론이 나오는 이유는 돌파구를 만들기 위한 사전 작업일 것이다. 미국 내 강경론을 진압하기 위한 측면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상황을 너무 낙관적으로 보는 것 아닌가?

미국은 핵 위기관리 능력이 뛰어난 나라다. 1960년대 쿠바 미사일 위기, 1970년대 후반 유럽 미사일 위기, 그리고 최근의 이란 핵 위기까지 다양한 핵 위기를 경험했다. 핵 위기는 미국한테는 생소한 일이 아니다. 핵 위기를 겪으면서 평화 쪽으로 한 걸음씩 나아갔다. 쿠바 위기를 통해 핵무기 감축 협정이 시작되어 1963년 부분적 핵실험 금지조약인 모스크바 조약을 체결했다. 유럽 미사일 위기는 1987년 워싱턴에서 중거리 핵미사일 폐기 조약(INF) 체결로 막을 내렸다. 그런 지혜를 이번에도 분명히 짜낼 것이라고 본다.


ⓒAP Photo
1987년 백악관에서 레이건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핵미사일 폐기 조약에 서명했다.

지난 20여 년간 북핵 협상을 보면 미국이 한마디로 성의가 없었다. 이번에는 다를까?


과거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북한 핵은 이미 현실이 됐기 때문이다. 즉 현실을 인정한 전제 위에서 협상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북한이 동의할 수 있는 안을 내야 한다. 힘으로 밀어붙이면 안 된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케네디 대통령이 했던 방식을 참고할 수도 있다. 당시도 군은 선제공격 등 강경론을 주장했다. 하지만 케네디 대통령은 봉쇄하면서 퇴로를 열어줬다. 그때 케네디 대통령은 공산주의가 동의할 수 있는 협상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지 않는 대신 미국은 소련의 요구를 받아들여 터키에 있는 미국 미사일 기지를 철수했다. 북한에 대해서도 지금 제재와 선제공격 두 가지 옵션이 나와 있다. 제재는 퇴로를 찾는 과정이다. 지금 워싱턴과 베이징, 평양 삼자 간에도 끊임없이 뭔가가 오가고 있을 것이다.

북·미 간 물밑 접촉 얘기가 들리긴 한다. 조만간 미국 측에서 특사가 움직일 것이란 말도 나온다.

북한 위협론과 선제공격론 같은 것을 언론에 흘리는 것은 미국 국무부나 백악관이 퇴로를 찾는 과정일 수 있다. 출구를 찾는 것이다. 자칫하면 우리가 굉장히 곤란한 상황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 몇 차례의 핵 협상에서 미국은 모두 상대가 동의할 수 있는 조건으로 협상했다. 이란 협상도 그렇고 소련과 두 차례 한 것도 그렇다.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밟게 될까?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억지력 증강과 군축이 동시에 가는 것이다. 다른 길은 없다.

현재 상황에 접목하면?

요즘 대북 제재의 강도를 아주 높이고 있다. 거기에는 분명 출구가 있을 것이다. 두 가지에서 찾을 수 있다. 북한과 직접 접촉하는 경우와 중국을 포함시키는 경우다.

대북 제재가 강화되거나 긴장이 고조되면 협상의 순간이 다가온 것으로 볼 수 있나?

그렇다. 딱 조일 만큼 조이고 그만큼 협상 카드를 유리하게 끌고 가는 것이다. 마지막은 협상에서 극대화한다. 결국 핵무기 동결이냐 폐기냐로 끝낼 것이다. 이미 동결 얘기는 나오고 있다. 물론 군사력 증강과 협상에는 시차가 있다. 어느 시점까지는 무력 증강으로 쭉 간다. 그때는 앞이 잘 안 보인다. 실제로는 우리만 그렇고 미국 안에서 많은 일이 벌어진다. 핫라인이 움직인다든가 특사들이 오가고 물밑 접촉이 이뤄지면서 제안과 역제안을 주고받는 일들이 계속 나타난다. 위기가 절정기에 달하면 해소 단계로 넘어간다. 위기의 확대·유지·축소·해결이 국제 관계의 기본 원칙이다. 지금 북한에 유엔 제재, 미국 제재, 개별 국가 제재 등 세 가지가 행해지는데 제재에만 몰두하면 대세를 놓칠 위험이 있다. 나라마다 제각각 출구전략을 생각하면서 자국 중심의 기회를 어떻게 활용할 건가 고심하고 있을 것이다.


ⓒ시사IN 조남진
10월11일 원불교 성주성지수호 비상대책위원회가 서울에서 사드 기지 배치 철회 집회를 열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까지 대북정책에 관한 한 박근혜 정부는 힘을 내세운 단편적인 정책이었다. 군사력 일변도였다. 그러다 보니 협상의 선로가 없다. 협상이란 대결을 종식시키고 평화로 갈 수 있는 길을 개척하는 것이다. 냉전 시대가 남긴 귀중한 유산은 긴장 완화였다. 이것을 우리가 준비해야 한다. 사드와 북핵 위기에서 한국에 주어진 역사적 과제를 얘기한다면 바로 한반도형 긴장 완화(데탕트)를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미 간 북핵 협상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는 뜻인가?

그렇다. 미국과 북한, 또는 미국과 중국·북한 사이에 북핵 협상이 시작되면 한국이 과연 초대받을 수 있을지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 휴전협정 당사자가 아닌 데다 북한이 방해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리 씨를 뿌려야 한다. 여러 형태가 있을 것이다. 동북아의 비핵국가만을 모아서 동북아 비핵국가 안보회의를 추진해볼 수 있을 것이다. 또 6자회담은 북핵을 넘어 지역 집단 안보회의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궁극적으로 비핵 안보회의와 6자회담을 한데 묶어 안보협력체제를 구축하는 길로 나아가야 될 것이다. 어떤 형태든 한국이 평화의 메시지를 아시아와 세계를 향해 계속 발신해야 한다. 독일은 1970년대 빌리 브란트가 협상 선로를 놓은 것이다. 독일도 처음에는 미국이 다 해줄 줄 알았다. 그런데 1961년 8월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날 공사 개시 몇 시간 후 미군 패트롤 차 한 대가 나타나 항의도 못하고 가버렸다. 빌리 브란트가 당시 서베를린 시장이었는데 그때 ‘국익에는 동맹이 없다. 우리 스스로 해야 되는 거구나’ 깨달았다고 한다.

미·중의 양극 구도에서 벗어날 길은 없을까?

갈등 구조를 다변화하고 다극화해야 된다. 한국 국익이 미·중에 묶여 있는 양극 체제 탈피가 급선무다. 나아가서는 더 이상 강대국들의 손발 노릇 하는 것을 그쳐야 한다. 강대국들과의 세력균형이 필요하다. 앞에서 언급한 동북아 비핵국가 안보회의 같은 것을 한국이 주도하자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먼저 남북한을 양자 체제에서 해방시키고 유럽처럼 아시아판 안보협력회의를 만들 필요가 있다. 아울러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국력이 무엇인지도 확인해봐야 한다. 우리는 강대국처럼 정치력이나 군사력은 쓸 수 없다. 경제력 카드를 찾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미국과의 분업은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과거 서독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비핵국가로서 동북아 평화의 발신지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남북관계는 어떻게 해야 할까?

현재로서는 서울에서 평양으로 바로 가는 길이 막혀 있다. 남북관계가 절연된 상태이다. 남북이 서로 대화할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먼저 말을 건네야 한다. 남북관계 개선의 열쇠는 베이징이나 워싱턴이 갖고 있다. 그래서 경제협력과 안보 동맹의 어느 한쪽도 저버려서는 안 된다. 통일에는 지름길도 없고 왕도도 없다. 이제 우리는 한국의 국익뿐 아니라 한반도의 이익까지 생각해야 한다. 분단과 대결·대립을 통한 남한만의 협소한 이익이 아니라 분단 극복과 통일에 대비해 지금의 비정상적 한반도 상태를 정상화해야 한다. 북한 사회는 지금 여러 분야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시장의 형성, 엘리트들의 의식 변화, 주민들의 자유의식 고양 등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 같은 변화를 직시하면서 공존을 통한 분단 극복이 대북정책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 힘으로, 군사력으로 북한을 제압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