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일본경제의 혁신력이 저하되고 있는가?_경제현안
이번주 경제시평이 언제나 그러했지만 참 날카롭습니다.
"혁신력은 일본은행 등 중앙은행의 금융완화정책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 일례로 애플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가 금리가 3%였다면 아이폰을 개발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금리가 0%였기 때문에 아이폰을 개발했는가 하는 것이다. 일본경제는 IT산업의 경쟁력 하락에서 볼수 있듯이 1990년대 이후부터 혁신력이 지속적으로 저하되어 오고 있다. 왜 일본경제의 혁신력이 저하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과잉규제, 갈라파고스화된 폐쇄적 시장구조, 지지부진한 구조개혁 등 여러 가지 원인들이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일본경제의 혁신력이 저하되는 한 일본은행이 아무리 양적 질적 금융완화책을 확대해 마이너스금리를 유도하고 엔화 약세를 유도한다고 한들 일본경제가 디플레에서 벗어나기는 힘들다." 왜 일본은 1990년대 이후부터 혁신력이 지속적으로 저하되어 오고 있을까요? 먼저 일화를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삼성의 my my, LG의 A-Ha!가 있었죠. 학교에 가져가니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워 할수 없었고 당시 국산제품은 플레이 버튼 등이 기계식으로 된 플라스틱으로 돌출된 조악하기 그지 없는 것에 비해 일제는 전자식 버튼으로 아주 작고 세련되었죠 사실 국산은 일제와 비교자체가 불가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느낀 것은 한 20년 넘게 기술력이 차이나는 것으로 생각되었죠. 당시 삼성이 SONY를 따라 잡는다는 말을 누가 했다면 아마 100% 미친놈 취급을 받았을 겁니다. 이렇게 세계적인 제품을 히트를 시키고 미국의 부동산과 영화사 등을 사들이며 떵떵거리던 일본이 1990년대 초반 일본 버블경제 붕괴를 맞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이후로 일본을 잃어버린 20년의 경제로 회자가 많이 되는데요 여기 김광수 경제연구소에서는 부동산폭락으로 대표되는 버블경제의 파탄만으로는 일본의 20년간의 침체를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고 바로 1990년대 중반부터 경제활동가능인구 수의 하락이 부동산투기거품 하락보다 더 근원적인 원인이라고 설명을 하신적이 있지요. 추가로 낮은 노동생산성도 말씀하십니다. 이 내용은 YouTube에 "한계에 부딪히는 일본 아베노믹스와 환율" 편에서도 잘 설명되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즉 이번 시평에서 "혁신력은 일본은행 등 중앙은행의 금융완화정책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 말씀을 하셨듯이 그러면 이렇게 말을 바꾸어 봅시다. 일본의 부동산 폭락과 생산가능인구 수의 하락이 일본의 혁신력과 관계가 있을까요? 부동산 폭락이 되면 어떻게보면 돈 없는 젊은 창업가들이 낮은 부동산 비용으로 혁신적인 활동을 할 가능성이 더 높겠지요? 그리고 물론 경제활동가능인구 수가 하락하면 혁신력이 줄어든다라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일리가 있고 확률적으로도 영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원인이나 이유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과연 일본이 80년대까지 세계 경제 대국 2위로서 잘 나가다가 지금까지 정체된 근본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그리고 부동산 거품 붕괴와 생산활동인구의 감소로만 일본의 혁신력 하락을 설명하기에 충분할까요? 저는 그 근본원인이 딱 한가지로 줄인다면 바로 정치에 있다고 봅니다. |
지난 글에서 왜 일본경제의 혁신력이 저하되고 있는에 대해 시평에서 언급된 과잉규제, 갈라파고스화된 폐쇄적 시장구조, 지지부진한 구조개혁 등 그리고 부동산 거품 붕괴와 생산활동인구의 감소로만 일본의 혁신력 하락을 설명하기에 충분할까요? 라고 질문해보았습니다. 그리고 딱 한가지로 원인을 말하자면 정치라고 하였습니다.
그럼 이제 왜 정치 인지 한번 풀어보겠습니다.
먼저 일본의 역사에 대해 간략히 언급을 해볼까합니다.
고대까지 갈 필요는 없구요 임진왜란 이후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히데요시 추종세력(서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력(동군)이 패권을 두고 한판 전쟁을 벌인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의 승리로 끝난 후 일본의 권력 중심은 에도(현 도쿄)에 자리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즉 에도(도쿠가와)막부가 200년 이상 메이지 유신(1868)까지 이어집니다.
당시 서양은 대항해 시대가 이미 접어들은 상태로서 이미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전파된 조총을 들고 일본은 임진왜란에 들고왔을 정도로 일본은 서구와의 교류가 빨랐습니다.
그럼 왜 조선은 19세기 후반에 되어서야 병인양요 신미양요처럼 서양세력일 들어 왔을 까요?
그건 서양인들의 시각에 조선은 중국의 일부 또는 변방, 즉 중국땅 인줄 알았고 일본은 태평양 항로에 위치하고 조선보다 남쪽에 위치함으로써 서양인들에 의해 섬나라이니 중국과는 다른 나라로 인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Korea를 모르고 일본을 먼저 알게 되니 일본열도와 아시아 대륙사이의 동해 바다를 일본해로 알게 됩니다.
나가사키등 일부 제한된 구역에서만 서양세력(네덜란드)과 교류하던 일본은 한 사건으로 인해 나라전체가 큰 충격에 빠지게 됩니다 그건 흑선(쿠로후네) 미 함대 페리제독의 도쿄만 진입이었습니다(1854)
여기서 에도막부는 도저히 배의 크기나 증기선의 빠른 속도 그리고 무었보다도 도저히 상대가 안되는 함포의 크기와 사거리에 대해 상대가 안됨을 절감하고 미국에 문호를 개방하고 이후 각 유럽나라 영국, 프랑스, 독일과도 교류를 합니다.
처음에 서양제국들은 일본을 그냥 이때까지 식민지로 만들와 왔던 다른 아시아국가들과 비슷하게 보았는데 막상 일본을
식민지로 만들려고 한번에 다 잡아먹으려니 좀 힘든 부분이 있었습니다.
나라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도쿄의 에도막부하고만 협상을 하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일본은 지금으로 말하면 지방자치제가 확실한 나라였습니다.
즉 무역을 하려면 에도 막부하고만 협상을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각 지방 현과도 따로 따로 또 상대를 해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던 겁니다.
즉 나라를 대표하는 정치세력으로 에도 막부가 있었지만 조선처럼 중앙에서 지방으로 지방관을 파견하는 것이 아니라 에도막부에서 각 지방의 가장 큰 토호 세력을 영주(다이묘)로 임명하고 그 지방을 다스리게 하는 봉건제도였기 때문입니다.
봉건제도 에서 중앙집권과의 큰 차이점은 그 지방의 군사들은 중앙의 소속이 아니라 지방영주의 소속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귀족의 사병이고 가병인셈이죠. 즉 언제든지 수틀리면 중앙을 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래서 서양각국들은 각 지방 현(우리 같으면 도)과 별도로 거래하면서 이익을 취하고
일본 각 지방현들도 중앙의 에도막부의 눈치를 보면서도 어느정도 자율적으로 자신들의 현의 이익을 위해 서양세력과 별도로 교류를 합니다.
그러던 중 일본내부에서 서양세력과의 무역으로 재미를 보면서 점점 경제력과 군사력이 커진 일부 지방의 현들과 중앙의 에도막부간에 점점 갈등이 깊어갑니다.
그 중 쵸슈번(현 야마구치 현)과의 전쟁에 에도 막부는 당시 가장 서양세력과의 무역으로 경제력과 군사력이 강하던 사츠마번(현 가고시마 현)에게 전쟁에 참가하기를 강제합니다.
고민하던 사츠마번은 사카모토 료마라는 인물의 설득으로, 즉 막부가 막부에 반기를 드는 쵸슈번을 치고 나면 다음으로 막부에 위협이 되는 강성한 사츠마번을 칠텐데 과연 쵸슈번을 치는 전쟁에 앞장설텐가? 하면서 사츠마번을 설득해
삿쵸동맹(사츠마+쵸슈)를 이루고 그 연합된 힘이 에도막부를 능가함에 따라 결국엔 막부가 굴복하고 권력을 천황에게 돌려주는 대정봉환을 이루어 내게 됩니다.
그 이후 이 두 번이 중심이 되어 에도(도쿠가와)막부시대를 허물고
천왕 중심의 새 정권이 수립이 되니 이것이 메이지유신(1868)입니다.
현 아베총리도 쵸슈(현 야마구치 현) 출신입니다. 부산과 부관페리가 다니는 시모노세키시가 있는 지방입니다.
이 지방 출신으로 정한론으로 유명한 요시다 쇼인 그리고 우리가 그 이름을 익히 아는 안중근의사가 처단한 그 이름 쇼인의 제자 조선통감부 초대총감인 이토 히로부미도 이 지역 출신입니다.
이후 일본은 러일전쟁에 승리후 한국을 병합하고 중국을 넘보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미국에게 핵폭탄을 얻어맞고 패전을 합니다.
이후 잿더미 속에서 일본은 패전은 했지만 전쟁전 근대화를 이룬 경험이 있기에 특유의 근면성으로 80년대 경제대국 2위까지 오르게 됩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역사를 무리하게도 빈약한 실력으로 요약 기술해보았는데요.
이 역사에서 느끼는 점은 일본은 민, 즉 그러니까 서양에서 처럼 하층에서의 혁명. 세상이 뒤집어지는 경험을 한번도 하지 못했다라는 것을 느낌니다.
막부에서 천황으로 권력이 넘어가는 것을 경험을 했다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대의명분으로 천황을 내세운 것이지 실제 권력은 아래 사츠마와 쵸수번 출신들의 사무라이들이죠
즉 그러니까 우리나라 같으면 양반인 도쿠가와 세도가문에서 사츠마/쵸슈 세도가문으로 변경되어 계속 양반들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즉 귀족들이 계속적으로 정권을 잡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2차대전 패전이후 미국에 의해 민주주의가 본격적으로 실시가 되어도
일본의 특성, 단일된 나라보다 자기가 사는 지방 현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고 그리고
농민이 따로 있고 그 위에 사무라이(양반)이 존재한다는 계급사회의 뿌리가 지금도 완전히 소멸 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판단 됩니다.
그 예로 일본에서는 의원 세습이 있지요 고이즈미 전총리도 자신의 아들에게 지역구를 물려주었다고 하고요 아베 현총리도 비슷합니다. 지금이 무슨 음서제도가 있는 우리나라 고려시대도 아니고 국회의원직을 물려 받는다? 이게 현대 민주주의체제에서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이렇게 세습정치인이 많다보니 정치개혁이 그만큼 힘들겠지요 그리고 일본사회는 우리보다 더 혈연/지연/학연이 심한 것을 영화나 드라마에서 심심치 않게 볼수 있습니다.
저는 바로 이 경직된 사회체제가 일본이 2차세계대전 패전 이후 한국과 중국등 기타 다른 나라들이 따라오기 전까지 산업경제하에서는 품질좋고 낮은 가격의 가성비로써 일본이 압도적 아시아 1위로써 한때 세계경제대국에 올랐을지는 모르나 자율성과 도전적인 모험정신을 기반으로 지식과 창의력으로 이끌어가는 지식경제 산업으로 변화되는 90년대부터는 일본이 더 이상 치고 앞서나가지 못한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이 길어지네요 앞 글에서 일본의 경직된 사회체제가 일본의 침체 원인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그 예를 정치에서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일본은 왜? 한국은 어디로? : 홍익출판사> 발췌 내용입니다.
"세습 정치인들이 만연하다 보니, 일본사회에서 과거사 청산이란 매우 어렵고 복잡한 문제가 되었다. 일왕을 기점으로 전범
들이 그들의 친할아버지요. 친아버지인 독특한 사회구조 탓에 정치구조의 개혁은 말처럼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 일
본이 반세기 넘게 치르고 있는 유무형의 대가는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지경인지도 모른다.
의원직 세습은 또한 지역 이권과도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세습 의원들은 대부분 소속 지역의 명문가 출신이고, 형
제나 친인척들이 지역의 부를 장악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지역기업들도 대를 이어 이들 의원들의 후원 역할을 자처해왔고,
의원들은 이들의 바람막이가 되어왔다."
하나 더
<2014년 일본파산 : 저자 아사이 다카시> 책의 발췌입니다.
1980년대까지 일본의 국가부채는 GDP의 50~70%로 관리되고 있었으나, 부동산 버블붕괴와 장기불황이 겹치면서 국가경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일본 정부는 버블붕괴에 따른 경기부양책으로 감세정책과 더불어 1992년부터 3년간 무려 66.9조엔에 달하는 재정투입을 하였다. 하지만 또다시 경제위기가 발생함에 따라 1998년 2차 경제 위기 이후 다시 65조엔을 투입했으나 처참한 실패만을 남겼다. 일본의 경기부양 정책이 별다른 실효성을 보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당시 집권당인 자민당의 무리한 토건개발을 통한 내수경제를 활서화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말그대로 구체적 계획없이 도로를 건설하고 아무도 다니지 않는 곳에 다리를 세우는 등 퍼주기식의 토건개발사업을 남발했
다. 그러한 불도저식 사업의 이면에는 당시 집권당의 정치적인 고려가 많이 작용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도로족이라 불리는 여당의 여러 의원들이 자신들의 주요 정치적 기반인 토건업자의 이익을 위해 공공 토건사업에 계속 재
정을 지출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금액들이 정치인들과 지역 토호 세력의 호주머니로 들어갔다.
이 부분에서는 일본같지가 않고 우리나라 같지 않습니까?
바로 이명박 정부는 바로 이웃나라의 심각한 국가채무 문제를 반면교사로 삼기는 커녕 그들과 매우 유사한 방향으로 4대강
사업을 하였지요
2014년 KBS파노라마 신년대기획 <부국의 조건> 3편 "신국부론'(링크)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1990년 일본의 버를이 붕괴되고 나서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이라고도 할 만큼 오랫동안 장기경기침체를 겪고 있다. 일본이
장기침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유를 일본 정부의 부적절한 제도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말하는 부적절한 제도라
함은 일본정부는 불황에 대처하기위해 수출 대기업을 살리는 정책을 우선으로 쓴다. 정부가 기업에게 고용조건을 완화시켜
주자 기업은 정규직은 줄이고 비정규직은 늘린다. 반면 정부는 일반인에게 세금을 늘리고 사회보장은 줄여서 실질적인 국
민소득은 낮아져 빈부격차만 벌어지게 된다.(가네코 마사루 게이오대 경제학부 교수)
이것도 남의 나라 말 같지가 않치요?
그렇습니다. 우리나라가 경제개발을 시작한후 롤 모델은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이 하는대로 그대로 따라 온것이죠.
일본이 혁신을 하지 못하고 토건경제로 헛발질을 하는 것을 우리도 더 이상 롤 모델이 앞으로 치고 나가지 못하니 똑같이 헛발질을 합니다.
김광수경제연구소 소장님 유튜브에 올라온 동영상<한계에 부딪히는 아베노믹스>(링크) 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인구감소의 경제적 충격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은 것이 첫번째 정책 실패이고
두번째 정책적 실패는 노동생산성 향상 노력을 했어야 하는데 오히려 마른 수건 짜기 비용/원가절감에만 노력했다.
물론 이것이 노동생산성에 기여하는 부분은 있으나 생산성을 높혀서 부가가치를 높히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더 중요한데
정부나 기업이 정책적으로 소흘히 했다. 이 두가지가 20년 장기침체를 겪게되는 결정적 요인이다.
인구폭탄과 낮은 노동생산성이 장기 침체의 구조적 요인이다.
그럼 왜 일본이 게이오대학 교수 말처럼 수출 대기업만을 살리는 정책을 썼을까요?
그리고 소장님 말씀처럼 왜 기업들은 원가절감에만 노력을 했을까요?
그것은 혁신을 할 수 있는데 안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경직된 정치경제사회 체제하에서는 생각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거 밖에 없었다는 것이, 그리고 그것 말고는 할 줄 아는게 없었다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또한 그것이 기득권(정치인+재벌경제인)의 이익을 유지하는 방법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노동생산성이란 간단히 말하면 투입시간대비 돈을 많이 버는가 이죠
열심히 많이 노동시간을 투입한다고 해도 돈을 못벌어들이면 투입된 노동시간이 많을 수록 노동생산성이 떨어지지요.
혹시 90년대 이후 히트한 일본제품이 생각나시는지요? 뭐가 생각나십니까?
이전의 소니의 워크맨처럼 혹시 생각나시는 것있는지요? 90년대 이후로 세계적인 기업이 된 일본 회사는요? 유니클로 정도 인가요? 그럼 다른 나라 회사는요?
저는 떠오르는게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구글, 스타벅스 최근의 Tesla ,... 이 회사들이 어느 나라 회사들인가요?
아래 경제시평 발췌를 보시겠습니다.
<14년 2월 경제시평 삼성 및 현대차 그룹과 한국경제의 미래(4)>
애플을 포함한 미국 기업들은 경쟁력 있는 사업모델 노하우를 도대체 어떻게 확보하고 있을까? 우수인재, 표준화, 정보화,
연관산업 시너지효과, 경영자 능력, 혁신과 성과중시의 기업문화 풍도 등 여러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서부 개척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모험 정신과 기회균등의 문화 그리고 혁신적 벤쳐들의
성공 가능성을 높여주는 양질의 미국시장을 들 수 있다.
저는 여기서 가장 제 눈에 들어오는 단어는 "모험 정신과 기회균등의 문화"입니다.
우리와 일본이 미국보다 모험 정신과 기회균등의 문화가 더 있다고 말할 수 있나요?
이렇게 다시 묻겠습니다. 일본이 20년의 장기침체 저성장을 끝내고 과거처럼 혁신을 일으켜 다시 세계경제대국으로 올라설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한국이 지금의 상황에서 혁신을 일으켜 선진국으로 진입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치 않다고 생각하시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 혁신에 대해 김광수 소장님의 발언 함 보시겠습니다.
<김광수의 경제 한 방 시즌2 12회 일본 경제 동향> (링크)
아베노믹스 엔화약세로 수출기업들의 이익이 나면 혁신으로 연결시켜야 하는데 혁신이라는게 일시적 이익때문에 증가하
는 것은 아니다 경제 뿐만 아니라 그나라 모든 전체적인 가용자원이 총동원되고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될때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같다 교육이라든지, 제도/시스템이라든지 여러가지 환경, 사람들의 의욕, 기회, 양극화 문제 이런것들이 다 종합적
이고 얼키고 설켜가지고 순기능쪽으로 작용을 하기 시작할때 혁신이 일어나는 것 같다.
그렇치 않은 상태에서는 절대 혁신이 일어나지 않는다 일어난다고 해도 오래가지 못한다.
도쿄올림픽으로 다시 바람을 일으키겠다? 올림픽 하나로 되지는 않는다.
여기서 말씀하신 한 나라의 어떤 특정한 한 부문이 아니라 모든 부분에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순기능 쪽으로 시너지를 내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런 전체를 다루는 부분이 한 나라의 어느 부문일까요?
2014년 KBS파노라마 신년대기획 <부국의 조건> 3편 "신국부론'(링크)편에서
처음 도입부에 세계 석학들이 각자 부국의 조건을 이야기 하는 부분이 있는데요
여기서 제임스 로빈슨 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이런 말을 합니다.
"경제발전을 지속시키는 요인은 폭넓은 권력분배가 동반된 포용적 정치제도였습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부국 그러니까 경제를 이야기하는데 왜 정치제도를 이야기 할까요?
그래서 1편에서 정치가 원인이라 말씀드렸고 이제 그 해결방법도 정치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지난 편에서 "경제발전을 지속시키는 요인은 폭넓은 권력분배가 동반된 포용적 정치제도였습니다."
라고 마무리를 지었는데요
이번 편에서 바로 정치이야기를 다루려다가 그럼 “폭 넓은 권력분배가 동반된 포용적 정치제도에 의해 혁신이 발생하여 경제가 발전한 사례”를 찾아서 먼저 말씀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이번 편은 여기에 관한 사례를 들어보도록 하고 다음 편에서 정치에 관해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구분을 하자면
검은 일반 굴림체는 제가 작성한 글입니다.
밑줄은 다큐에서 등장한 인물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옮겨적은 것입니다.
약간 푸른색 글씨는 다큐에서 내레이터가 말하는 글입니다.
해서 오래 전에 2007년 정도 인가요 중국 CCTV에서 제작한
대국굴기 1편 작은나라 네덜란드 세계를 움직이다 편(링크)을 한 거의 10년 만에 다시 보았습니다.
여기서 발췌를 먼저 합니다.
스페인 포르투갈과 무역해서 유럽내륙에 다시 되팔아서 이익을 창출하는 네덜란드
유럽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초기 네덜란드의 주인은 귀족이었다.
도시는 항상 귀족이 소유한 영토 위에 만들어 졌기 때문이다.
귀족들은 소규모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명목상으로는 도시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무력을 동원해서 세금을 징수하기 위한 것이었다.
<요리스 포르후페르 네덜란드 국무의원>
상업과 도시의 발전은 자유경제에 대한 갈망을 부추겼습니다.
부유해진 시민들의 마지막 선택은 놀라웠다. 그들은 귀족들의 손에서 쇼핑을 하듯 도시의
자치권을 사들였다.
그 후 시민들은 자체적으로 법을 제정해 귀족들의 세금징수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들의 시민 자치제는 네덜란드 강력한 성장 에너지를 불어 넣었고 나중엔 거의 절반에 가까운
네덜란드 인구가 도시로 몰려왔다.
올해 6월에 방영되었던 EBS 다큐프라임 앙트레프레너(Entrepreneur) 2편(링크)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레오 루카센 네덜란드 레이덴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17세기 초기 암스테르담의 인구 10명 중 4명이 외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었죠.
당시 암스테르담을 다스렸던 책임자들은 암스테르담을 개방할 수 있는 한 개방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경쟁력 있는 상인들과 상인네트워크를 도시로 끌어들이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얀 포프는 독일 이민자로 청어 일꾼으로 시작해 암스테르담 최고의 거상이 된 신화적인 인물입니다.
그의 아들은 후에 암스테르담 시장이 되었습니다.
네덜란드는 막일꾼이 거상이 되고 그의 아들이 시장이 될 수 있는 그런 나라였습니다.
여기서 상업발전이 먼저 되었기에 정치적인 자유를 귀족으로부터 쟁취할 수 있었느냐?
아님 먼저 정치적인 자유를 먼저 쟁취했기에 상업발전을 이루었냐? 에서는 아무래도 전자로 보여집니다.
하지만 귀족으로부터 정치적 자유, 즉 자치권이 있었기에 상업발전에 큰 힘이 되고 가속화가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 이제 여기 정치적 자치권을 얻고 상업이 발전하던 네덜란드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후 위기가 닥치는데
그런데 오히려 여기서 혁신이 발생합니다.
국토, 자원, 인구로만 본다면 네덜란드는 한 국가로서 생존할 조건을 갖추지 못한 듯 했다.
건국초기 조직력이 약한 이 작은 국가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할 수 밖에 없었다.
독립이전 스페인과의 무역은 네덜란드의 가장 중요한 자금 원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독립 후 스페인국왕은 자국의 모든 항구를 봉쇄했고 네덜란드 선박의 스페인 정박을
금지했다. 경제의 생명선이 끊긴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신흥 공화국의 돌파구는 무엇이었을까?
네덜란드인들은 상거래의 예리한 직감력을 통해서 자신들만의 장점을 재빨리 찾아냈다.
네덜란드인은 스스로 영리한 중간 상인에서 이제 원양항해를 하는 투사로 역활을 바꾸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자신들만의 힘만으로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 항로를 개척한다.
그렇다면 먼바다를 항해할 막대한 자금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여기 중간상인에서 직접 원양항해를 해서 타 대륙과 직접 거래하겠다는 아이디어는 그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엄청난 혁신입니다. 그런데 이 혁신에서 또 다른 혁신이 꼬리를 물고 연쇄적으로 일어납니다.
<빌렘 판트모렌 레이덴 대학 사학과 교수>
그렇습니다. 그것은 최초의 주식회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금 융통을 위해 그들은 주식을 발행했습니다. 투자자는 자신의 출자금액을 장부에 정확히 기재하고
회사는 출자에 대한 이윤배당을 약속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동인도 회사의 자금 모집 방식이었죠.
동인도 회사는 사회구성원을 통한 자금모집방식으로 분산되었던 국민들의 돈을 세력확장을 위한 자금으로 모으는데 성공한다. 심지어 암스테르담 시장의 하녀의 쌈짓돈도 동인도 회사에 투자되었다 그리고 정부도 이 회사에 투자했다.
<로트베크 바날 암스테르담 역사박물관 관장>
초반 10년 동안 동인도회사는 수익을 전혀 남기지 못했습니다.
10년 동안 주주에게 수익금을 주지 못하는 이러한 회사가 대체 어떻게 투자자들에게 인정
을 받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네덜란드인들이 개발한 새로운 자금유통 체제 때문이었다
1609년 세계 최초 암스테르담 주식거래소 탄생 주주는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지 자신의 주식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서 현금으로 바꿀 수 있었다. 이 말은 동인도 회사 자본금의 감소 없이 주주는 주식을 전매하면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대량의 화폐가 전래 없던 속도로 유통되기 시작하자
과부하 걸린 네덜란드 경제 혈관이 막히기 시작함 그래서 원활한 자금흐름을 돕기 위해서
현대 경제의 핵심인 은행설립되었다.
사학자들에 의하면 그들은 현대경제의 창시자로 은행, 증권거래소, 주식회사를 상호연계
가능한 하나의 금융체제로 통일시켰고 그것이 폭발적인 자금증가를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어떻습니까 일반 시민계층이 정치적인 자유를 누리며 스스로 열심히 노력하면 잘 살 수 있고 거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의 네덜란드인, 조국을 세계 최고의 경제대국으로 변모시킵니다.
EBS 다큐프라임 앙트레프레너 2편(링크)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가를 다비즈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17세기 네덜란드는 다른 유럽국가들 보다 기회가 훨씬 많았습니다.
부자가 되어 집을 짓고, 자녀를 좋은 학교에 보낼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이 훨씬 더 많았다는 거죠.
네덜란드 사람들은 부자가 되는 방법을 고민했고 동인도 회사라는 주식회사를 만들었습니다.
거래와 투자를 통해 이윤을 추구하는 상업자본주의의 역사가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당신들 나라 역사 속 1600년대를 상상해 보십쇼?
지구상 어떤 나라가 서민들에게, 하녀에게 자본가가 될 기회를 주었는지?
이런 의문이 듭니다. 당시 대항해 시대를 먼저 풀어 젖힌 것은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가는 아시아 항로를 개척한 포르투갈과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하고 그 항로를 개척한 스페인이 먼저였고 그리고 당시 영국과 프랑스도 조선기술도 있었는데 왜 나라도 작고 인구도 작은 네덜란드가 해상상업무역으로 발전하여 경제강국 1위가 되었을까요?
세계를 통치하는 상업무역 공화국 네덜란드는 17세기 무역을 통해 거대한 재력을 쌓았지만 그 재물은 왕과 귀족의 호화로운 궁궐을 꾸미는데 낭비되지 않았고 중산층 상인들의 안락한 주택을 짓는데 쓰였다.(대국굴기)
<헹크 덴 하이어 네덜란드 라이덴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네덜란드는 일반인, 민간인들이 거래할 수 있었고 그들이 나라를 운영했습니다.
반면 프랑스, 스페인 등 다른 유럽국가들은 왕과 상류층이 아주 중요했죠
그래서 민간인은 어떤 것에도 투자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권리와 이윤이 왕이나 상류층에게 다 돌아갔으니까요.
그렇지만 네덜란드에선 민간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투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회적인 체제가 전제적이지 않고 일반 시민들이 정치적인 자유와 함께 경제적 이윤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도 역시 자유로웠기 때문입니다. 즉 활기차고 역동적인 사회체제였죠.
해서 초기에는 상업발전이 먼저 시작 되었기에 정치적인 자유를 귀족으로부터 쟁취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상업이 같이 발전한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볼 때 일반 시민 개개인이 왕이나 귀족들의 간섭 없이 자유로운 정치환경 속에서 이윤을 추구하다 보니, 전부 민이 주도한 아시아 항로 개척, 유한책임의 주식회사의 설립, 은행, 증권거래소를 만드는 혁신 들이 다른 나라보다 자연스럽게 먼저 일어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혁신은 왕이나 귀족 등의 기득권층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 한가지 더 사례를 들겠습니다. 네덜란드가 17세기의 최대강자였다면
18~19 두 세기 동안 세계를 호령한 나라는 영국이었습니다.
잠시 이해를 돕기 위해 영국역사를 간략히 말씀드리면
귀족들과 전제정권 존왕의 힘 겨루기가 결국 귀족의 승리로
1215년 존왕이 마그나카르타(대헌장)를 귀족들의 강압에 의해 승인합니다.
대헌장은 국민의 자유를 옹호하는 근대 헌법의 토대가 되었고
특히 제12조는 의회의 승인 없이 왕이 과세할 수 없다는 주장의 근거가 됩니다.
이후 청교도혁명(영국혁명)이 1640~1660년에 일어납니다. 이 혁명은 영국의 시민혁명으로
의회를 거치지 않고 상인에게 세금부과한 전제군주 찰스1세에 대항한 혁명입니다.
결국엔 의회군 크롬웰장군이 승리하고 찰스 1세는 1649년 단두대에서 처형당합니다.
이후 전제왕조가 몰락했으나 크롬웰이 군사독재를 합니다. 크롬웰 사망 후 다시 왕정복고가 이루어져 1685년 처형된 찰스 1세 아들, 제임스 2세 즉위합니다.
하지만 제임스 2세는 카톨릭을 옹호하고 그의 아버지처럼 전제정치를 합니다.
이에 의회는 1688년 제임스 2세를 폐위하고 딸인 메리와 그녀의 남편인 윌리엄 3세를 공동 왕으로 추대합니다. 제임스 2세가 망명하자 메리와 윌리엄 3세는 1689년 의회가 제정한 권리장전을 승인하고 왕위에 올랐는데 유혈사태 없이 정권 교체를 이룬 이 사건을 명예혁명이라 합니다.
이 명예혁명은 국왕이 의회에 의해 결정되는 전무후무한 사건으로 왕권은 신의 수여에서 백성의 수여로 바뀜.
1000년 이상 지속된 왕권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화된 사건이다.
즉 입헌군주제 수립해 나갔다.
<첸청단 베이징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명예혁명은 영국을 전제 통치에서 탈피하게 해주었으며 이는 전 세계에서 최초의 일입니다.
또한 유혈사태가 없는 방식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때부터 영국은 의회제도의 조직안에서 평화적이고 점진적으로 제도 걔혁을 진행히켰죠.
명예혁명 후 영국에는 상대에게 여유있고 자유롭게 대하는 사회 환경이 조성됐습니다.
1588 스페인 해전의 승리부터 1688 명예혁명까지 1세기 동안 영국은 내부조정을 해나가며 대외 확장을 계속해 나갔다. 백년의 시간을 저축한 후 인구가 대량으로 증가하기 시작했고 상업과 수공업이 신속히 발전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대외무역은 국가의 중요한 민생이 되었다.
이 당시 세계 환경은 프랑스는 전제군주의 전성시기, 러시아 표트르 전제군주 막 수립, 독일 이탈리아 사분오열 분열되어 백성들이 강력한 왕의 출현 기대함, 일본은 봉건 막부의 속박에, 중국은 이제 청나라 44년 지남,
이러한 시기에 프랑스 사상가 볼테르는 당시의 영국에 대해 이렇게 평가합니다.
“영국을 강대하게 변화시킨 것은 이것이다. 엘리자베스 시대부터 느껴왔던 상업의 중요성, 그리고 국왕을 단두대에 보냈던 그 국회가 해외무역에 분배하는 그 일에 바빠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시치미를 뗀 것이다. 찰스 1세의 선혈이 아직 낭자한데 국회는 항해법을 통과시켰다”.
영국은 3차례의 전쟁을 통해서 네덜란드에 강제로 항해법을 받아들이도록 한다. 영국 및 영국의 식민지에서 화물 수입할 때 반드시 영국선적 또는 수출국(영국 식민지) 선적을 이용하게 한다(즉 영국이 다해먹겠다는 말입니다). 이때부터 네덜란드 선적은 점차 퇴출되고 영국이 대륙의 규칙과 해상의 규칙을 정할 차례가 됩니다.
여기서 잠깐, 위에 소개했던 네덜란드에서 이제 그 경제의 권력이 영국으로 넘어가는데요
제가 볼 때는 그것은 네덜란드가 잘못했다기 보다는 영국이 네덜란드보다 국토가 크니 당연히 인구가 많고
인구가 많으니 군대를 더 키울 수 있고 또 무엇보다 인구가 더 많으니 수요가 네덜란드보다 많다는 것이,
즉 이 국력의 차이가 18세기에는 영국이 주도권을 쥐게 된 것으로 판단됩니다.
<해리 디킨스 영국 왕실 역사학회 부회장>
1688년 명예혁명 이후로 영국은 민주국가는 아니지만 활짝 개방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개방적인 사상은 많은 이들에게 폭넓게 퍼져 나갔습니다.
누구나 노력하기만 하면 경제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죠.
이야말로 영국이 세계 최초로 이뤄낸 위대한 업적입니다.
사실 제가 보기엔 “누구나 노력하기만 하면 경제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다는 것은
네덜란드가 먼저 한 것 같은데요 여하튼 이 양반, 자국 영국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대국굴기 영국 하편 – 공업화의 서막(링크) 편이 있는데요
여기서는 영국의 산업혁명이 일어난 배경과 과정을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산업혁명이야 말로 혁신 중의 혁신이죠. 중요한 사건은 아래와 같이.
1687 아이작 뉴턴의 프린키피아 발간: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1769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특허
1776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발간
어떻게 영국에서 산업혁명(혁신)이 일어 날 수 있었는가? 에 대해서 많은 주장들이 있다고 하는데요
저는 다큐에서 내레이터의 아래 말을 듣고는,
제일 먼저 방직업에서 수요가 나타났다. 상인이 공업생산자에서 빨리 대량생산 할 수 있도록 방법을 연구하라고 재촉함. 이 부분은 일반사람 생활방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었다.(옷이니까)
더욱 빠른 속도로 생산하기 위해 산업혁명 도화선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장들의 한계는 강의 하류에 세울 수 밖에 없었다. 동력원이 풍차와 수차밖에 없었기 때문에 생산을 제약했다. 즉 동력기계 만드는 나라가 경쟁에서 선점을 할 운명이었다.
동력기계에 대한 요구, 이것이 와트의 혁신적인 증기기관을 낳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럼 왜 동력기계에 대한 요구가 있었을 까요?
즉 수요였습니다 이 수요는 다수의 일반 시민계층의 수요였습니다.
원래 영국은 양털에서 나오는 양모에 경쟁력이 있었는데 인도에서 수입되는 모직은 처음 왕족이나 상류층 귀족들만 입는 옷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일반 시민들의 소득이 증가함에 따라 수요가 늘었고 이에 상인들과 공장생산자들이 먼저 빨리 많은 양을 공급해서 이윤을 보려고 한 것이 와트의 증기기관을 이끌어내는 동기가 되었던 것이죠.
제가 볼 때는 영국에서 산업혁명의 혁신이 먼저 일어난 것은 전제적인 왕권이 아니라 권력이 분배된 포용적인
정치제도하에서 일반시민들의 보다 자유로운 이윤추구 그 결과로 네덜란드보다 넓은 일반시민계층의 소득증대로 인한 수요의 증가 때문 이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네덜란드와 영국을 사례로 들고 마무리 하려다, 여기서 제 글 제목이 일본관련이니 대국굴기 일본편도 마저 다시 보았습니다. 여기서 관심이 가는 내용이 있더군요 그것은
일본은 독일의 정부주도 경제발전 방식을 따랐고 재벌이 양성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관료와 지역 토호들과의 결탁이 그때부터 있었던 것 같습니다.
1871년 백여 명의 구미사절단을 파견해 1년 10개월 동안 12개국을 방문했는데 시찰단은 일본을 발전시킬 모델을 독일에서 찾았다. 그것은 정부가 나서서 공업발전을 주도하는 방식이었다
이건 일본의 대단한 혁신입니다. 중국과 조선은 감히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후에 우리나라 조선은 발달된 일본을 보기 위해 고종이 몰래 조사시찰단을 보내죠(1881)
그건 이 일본의 구미사절단을 베낀 겁니다.(10년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 왜 조선은 시찰 이후로 발전을 하지 못하고 나중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는지 안타깝습니다.)
<나리타 세이이치 미쯔비시 경제연구소 상무이사>
일본정부는 이러한 사업을 민간 기업에게 맡겨 성장시켰습니다.
시작은 정부가, 성장은 민간기업이 책임지는 형식이었죠. 일본은 이런 방법을 통해 계속 성장했습니다.
미쯔비시뿐 아니라 미쯔이, 스미토모 같은 기업 역시 일본 정부로부터 국영기업을 사들여 성장한 기업입니다.
그러던 중
1878 유신정부의 개혁개방 강경파 권력자 오쿠보 토시미치가 도쿄 시미즈에서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것은 유신의 강경파 정부의 정책에 반발하는 세력이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내레이터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개혁이 가져온 불공평은 이미 존재하던 사회적 모순을 극대화시켰다
1881년 일본정부는 투자액의 1/30에도 미치지 못하는 싼 가격에 홋카이도의 정부사업을 개인에게 팔아 넘기고 만다. 이 일은 부패한 관리와 기업가의 결탁에 불만이 많았던 일본국민들을 자극하여 폭동직전까지 갔다가 천황이 직접 나서서 부패한 관리 파면함으로 진정되었다”.
물론 후발주자로서 기존의 공업국들을 따라가기에는 독일이 했던 정부주도 발전방식을 모델로 삼는 것은 수긍이 갑니다만 위에서 살펴보았던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느꼈던 민에 의한 뭔가 자율적인 분위기에서 나도 열심히 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시민들의 욕망, 권력이 개입되지 않은 상업이나 산업활동들의 산뜻한 느낌은 받질 못합니다.
왜냐하면 먼저 같은 정부주도 발전방식을 택했던 독일의 경우에는 이러한 정경유착의 폐해를 거의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물론 제가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개혁이 가져온 불공평은 이미 존재하던 사회적 모순을 극대화시켰다”
이게 무슨 말인가요? 내레이터가 이렇게만 말을 하고 넘어갈 것이 아니라 새로운 불공평과 이미 존재하던 사회적 모순이 무엇인지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설명이 있었으면 좋았을 건데 아쉬웠습니다.
해서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주제인 일본을 중국에서 제작한 대국굴기 다큐와 우리나라에서 제작한 앙트레프레너로 혁신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한번 살펴 보았습니다
물론 제가 말씀 드린 혁신의 사례에 동의 못 하실 수도 있으실 겁니다.
오늘 글은 상당히 길어졌네요
다음 글에서 현재 잃어버린 20년의 일본, 그리고 주요산업의 하락을 겪고 있으며,
일본의 전철을 밟고 있는 우리나라 한국. 어떻게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지, 과연 뭘 바꾸어야 되는지
결국 나라를 바꿀 수 있는 수단은 정책이기에 정책은 지도자와 정치집단에서 나옴으로,
다음 편에서는 정치와 관련하여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지난 (4)편까지 일본의 혁신력이 왜 저하되고 있는가? 를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지난 (3)편에서 "경제발전을 지속시키는 요인은 폭넓은 권력분배가 동반된 포용적 정치제도였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고요, (4)편에서는 권력분배가 동반된 포용적 정치제도에서 발전한 나라들의 사례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원래 정책과 그 정책을 내는 정치집단을 같이 이야기하려고 했으나 글이 또 길어질 것 같아,
먼저 정책을 말씀 드리고 다음 편에 정치집단을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의 제목이 일본이지만 일본과 비슷하게 따라온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혁신력을 상승시키기 위해 어떠한 정책을 펼쳐야 하는 지에 대해 저의 소견을 말씀 드려보겠습니다.
1. 신 성장동력
앞서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보았듯이 그들은 일단 해상무역에서 성장동력을 찾았습니다.
정치집단이 제일먼저 해야 할 일은 먼저 쓰러져 가는 기존 산업을 붙잡고 있을 것이 아니라 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해서라도 우리의 경쟁력 있는 미래 먹거리가 무엇인지를 먼저 찾아내고 그것이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것이고 국민들에게 가능하다라는 그래서 잘 살 수 있다는 공감과 비전을 제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디서 어떻게 돈을 벌건가를 먼저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는 선거에 이기기 위해 타당성 있는 세수 확보도 없이 한도 끝도 없는 복지를 공약 해서는 안됩니다. 기본소득 등의 복지정책보다는 일자리 창출을 해서 국민들이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최우선이고 그 다음이 복지라고 생각합니다.
자동차산업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일본의 경우 8/90년대 세계를 제패하던 IT업종이 몰락한 지금, 자동차 하나로 버티고 있는 실정이고,
우리나라도 자동차산업의 비중이 엄청납니다.
그리고 앞으로 전기자동차가 가솔린/디젤 승용차를 대체할 것이라는 데에서는 이견이 없으실 것으로 압니다.
먼저 질문하나 드리겠습니다.
앞으로 F1 이나 그 전세계에 수많은 자동차 랠리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자동차강국인 독일이 그 German Car의 이미지를 어디서 얻었는지요? 그런 혹독한 F1이나 랠리에서 적용된 신기술과 내구성을 통해 일반 상용차에 적용된 그런 이미지가 있지요.
현재 자동차의 심장은 엔진입니다. 그런데 전기 차에서 힘이 나오는 곳이 엔진이 아니라 배터리입니다.
제가 볼때는 테슬라의 등장으로 가장 괴로운 나라가 독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얼마 전 나온 2030년부터 가솔린/디젤 승용차 금지는 독일이 이 문제를 잘 파악하고 있고 문제의 심각성을
독일 정부도 잘 알고 있다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때까지 쌓아온 독일의 기술력이란 고성능, 고연비의 엔진이 핵심이었는데
이제 게임의 방식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사실 현기차는 테슬라를 보면서 여태까지 아무리 해도 중저가 브랜드 이미지를 벗어내기가 힘들었는데 이제 자동차의 개념이 바뀌면서 드디어 역전 시킬 수 있는 기회가 왔다며, 이 호기를 잘 살릴 방법을 모색하고 있어야 한다고 보는데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대통령과 집권당 그리고 관료, 국책연구기관 등도 이러한 자동차의 변화를 제대로 인지하고 환율만 올려줄 것이 아니고 기존업체에만 맡기거나 관련산업을 재벌대기업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국가적 영향이 큰 산업을 어떻게 미래에도 경쟁력을 유지 할 것인지에 대해 어떻게 국가적 역량을 모아서 검토하고 대비해야 합니다.
업체가 부동산에 10조를 써내면, 그럴 돈 있으면 기술개발 하라고 독려를 해도 모자랄 판에…… 이게 창조경제인가요?
2. 사람의 가격
<김광수의 경제 한 방 시즌2 5회 중국 제조업 위기와 한국 경제 1편> (링크)
“유럽, 미국, 일본 하고 우리나라와 중국의 교육하고는 약간 차이가 있다.
한국과 중국의 교육열이 높은 그 근원은 잘 살아보자는 욕망인데 이것은 쉽게 말해 내가 대학을 나와서 단순 노동자나 농민공처럼 살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내가 이거 받으려고 대학을 나왔느냐 하는 마음이 있다. 잘 살겠다는 그 수단이 교육이었다.
유럽, 미국, 일본의 경우에는 사양산업에서 실직되는 사람들 교육해서 재배치 일자리 창출 해야 하는 정부의 압력이 덜하다. 왜냐하면 단순노동이나 서비스직종의 사람 값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과 중국은 X값이다.
그간 한국과 중국은 경제성장을 하면서 범한 과오가 사람 값이 낮다는 것이다.
중국이 최저임금을 올리고 있는데 이거야 말로 서비스업의 고부가가치를 높이는 지름길이고 일자리의 폭을 넓히는 지름길 입니다.”
지금 청년실업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지요 그리고 많은 젊은이들이 취업준비를 하면서 부모에게 생활을 기대하기 어려워 다양한 서비스업종이나 노동에 아르바이트를 하지요
하지만 낮은 임금 때문에 기본적인 의식주에 지출을 하고 나면 저축할 돈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공무원시험이나 대기업에 목매달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만약 서비스업종에 근무해서도 어느 정도 생활이 되고 여유도 있어 저축을 할 수 있다면
그리고 결혼까지 할 수도 있다면 사회전체가 어떻게 바뀔까요?
우리가 어릴 때부터 잘 들었던 말 공부를 안 하면 부모님으로부터
나중 커서 뭐 될라고 그래! 라는 말씀이 왜 있었겠습니까?
공부 열심히 하여 좋은 대학을 나와서 좋은 직장을 못 구하면 제대로 못 산다는 말씀이지요?
서비스업종에 근무해도 사람답게 살 수 있다면 부모님들이 자녀교육에 지금처럼 사교육비를 지출할까요?
이 사람의 노동이 들어가는 업종이나 서비스업종의 임금상승은 여러 가지로 다른 부문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봅니다. 현재 괜찮은 대기업에 다니시는 분들도 명퇴나 희망퇴직의 두려움이 반감 될 것입니다.
물론 청년뿐만 아니라 서비스업종에 근무하시는 노령층의 소득증가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면 만약 서비스업종의 사람의 가격이 올라간다는 것은 임금이 올라간다는 이야기인데, 그럼 서비스업종 자영업자들의 종업원 임금부담이 증가되어 더욱 운영이 힘들거나 또는 종업원을 줄여야 하고 또한 서비스가격이 올라가면 그 것을 이용하는 일반 시민들의 지출부담이 커진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이게 말처럼 쉽게 될 수 있는 일인가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사실 저도 이것이 걱정되고 참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이 질문을 김광수 소장님께 꼭 한번 여쭈어볼 예정입니다.
중요한 것은 한국과 중국은 못했지만 현재 유럽과 미국 그리고 일본은 그렇지가 않다는 게 사실이고 현실이죠. 우리도 노력하기에 따라서 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지않겠는지요.
가장 많은 비율의 고용을 차지하고 있는 서비스업종에서의 사람의 가격을 제대로 쳐줄 수 있는 정책을
어떻게 제시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원만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가?
그렇게 하여 서비스업종에서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해 낼 수 있는가?
청년들이 서비스업종에서 근무를 하면서도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면서,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구현할 여유와 종자돈을 모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3. 부동산
< 20140601 특강 10년 후 인천 경제와 나의 삶> (링크)
“2006~7년 미국 거품투기 한창 비쌀 때 우리돈으로 2억5천~3억 이었다(미국 표준주택: 200평 3 beds)
이게 금융위기때 1억 5~7천으로 떨어졌다. 가격은 이제 올랐다 2억5천으로 6년만에 대신 거래가 없다.
집이 넘쳐난다. 가격은 끌어올렸지만 그 가격에 안 산다.
인천 30평 3~4억한다. 일본 동경 요코하마에 한국의 아파트급 해당되는 가격은?
맨션 중상위층이 사는 곳이다. 동경시내 30평형 맨션 가격은 3.5~4 억원합니다.
일본의 소득 한국의 2.5배입니다.
사업하시는 분 싸게 상품 만들어서 가격경쟁력이 있어야 하는데
집은 원가에 들어간다 집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다.
잠자는 곳에 5억 10억을 쓴다. 미국은 잠자는 곳에 망할때 집값이 2억5천이었다.
일본은 맨션이 3억5천 또는 4억이다, 그런데 한국은 10억이다.
경쟁력이 있겠느냐? 일자리가 나오겠느냐?
돈은 없는데 안줘도 될 바가지를 쓰면서 집을 산다. 이럼 나라 망하죠 망하는 길 가고 있어요.
건설사 비싸게 팔고, 정치인/관료 건설사에서 챙기고 빠지고, 건설사 망하는 것 세금으로 살려주고
이런 나라 절대 오래 갈 수 없습니다. 자식들이 정상적으로 일하고 결혼하고 애 놓고 못 키운다.
건물 다 빚이다 일본은 양반이다 일본정부는 빚이 많치만 일본시민들은 저축이 많다!
우리는 가계가 부채로 난리다."
부동산부양책을 쓰지 말고 시장원리가 작용 되도록 수요와 공급에 의래 적당한 가격이 형성되도록,
우리소득 수준에 맞는 가격이 정해지도록 놔두는 것이죠. 그리고 세계에서 유일한 선분양제도도 없애야 합니다. 위의 소장님 말씀처럼 집에서는 아무런 생산이 없습니다. 원가에 해당됩니다.
집값이 안정되고 부담되지 않아야 부동산에 돈이 몰리지 않고 다른 생산적인 부분에 쓰입니다.
혁신이 일어나기 위해서도 기본적인 의식주에 해당되는 비용이 낮아야 합니다.
4. 세대교체
<김광수의 경제 한 방 시즌2 8회 아베노믹스 전망> (링크)
“왜 일본의 혁신이 죽었는가?
명확하게 이야기 못한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건 데 세대문제인 것 같다. 고령화세대가 결정권 쥐고있다.
87~93 유학 당시 코미디언이 지금도 하더라 그 당시 40대인데 지금 70대인데 아직하더라 쇼크를 먹었다.
혁신이 일어나기 힘든 근본원인이다. 고령화사회에서 부모세대가 사회 모든 부문에서 결정권을 가지고 있고,
경제력도 가지고 있고 20~40대는 여전히 힘든 상태 그러다 보니 혁신이 없어져 버렸다.
제 한 몸 챙기기도 힘든데 무슨 벤처며 혁신적 아이디어를 낼 여유가 있겠느냐?
기득권 과거경험 사로잡혀 세상의 변화 싫어한다. 그 예로 일본 기업들은 처음에 스마트폰 반대했다.
안된다고 했다. NTT나 이런 데서 그런 것만 보아도 기존에 하고 있는 것 기존에 자기가 과거에 잘해왔던 것, 성공해왔던 것에 대해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와 비슷 똑같다. 혁신을 통해서 수출을 늘려야 하고 투자를 늘려서 수익을 내야 하는데 안되니까, 아베노믹스로 엔화약세만 유도한다.
유일한 돌파구는 세대교체이다!
틀에 갇힌 상황에서는 안된다 유일한 해결책은 물갈이 세대교체이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이 4번째 세대교체가 제가 제일 말씀 드리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이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정리하자면
혁신을 유도하기 위한 정책에는 상기의 말씀 드린 것 외에 교육, 기회의 평등, 재벌개혁, 사회구조 등 많은 것들이 있겠습니다만, 간략하게 4가지로 해보았습니다.
사실 혁신은 보다 고차원적인 이야기가 되어야 하는데 어떻게 보면 당연히 기본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만
이야기가 된 것 같네요 그 만큼 우리나라는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이죠.
결론은 양질의 직장을 구할 수 있어야 하며, 집값이 부담스럽지 않아야 하며, 자녀의 교육비도 부담스럽지 않은 즉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살수 있게 해야 합니다.
결혼할 수 있게 해야 하고 아기를 가질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아니면 공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최고의 빠른 속도로 고령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정부나 정치권에서 정말 이에 대해 정말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있어야 뭐라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그럼 우리나라 현실정치에서 어떠한 정당이 이런 정책을 과연 실시하고 현실화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래 김광수소장님의 인천 특강을 링크 해드렸습니다. 부모세대에게 전해드리는 소장님의 말씀입니다.
소개내용 제외하고 본 강연은 7분여 부터입니다. 한번 보시면 좋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경제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제민주화는 집토끼 놔두고 산토끼 잡는 격” (0) | 2016.12.02 |
---|---|
신규 창업 NO, ‘업사이클링’ 전략으로 대박 터뜨려 (0) | 2016.10.29 |
김종인 선생의 경제민주화에 대하여.. (0) | 2016.10.13 |
취업 못해서가 아니라 제대로 살고 싶어서…12인의 ‘탈조선’ 성공기 (0) | 2016.09.28 |
가계 부채, 은행 책임을 묻자 (0) | 2016.09.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