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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한국전쟁에 참여한 당사국이었다"

일취월장7 2016. 6. 25. 10:52

"일본은 한국전쟁에 참여한 당사국이었다"

2016.06.23 12:09:50


[인터뷰] 남기정 서울대학교 교수 <1> '기지국가' 일본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6년이 지났다. 남북은 여전히 극한 대치 중이고 당시 동아시아에 펼쳐졌던 국제 정세 역시 별로 변화된 부분은 없어 보인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미국과 중국은 여전히 동아시아를 두고 긴장 관계에 놓여있다.

그런데 미국과 중국 외에도 한국전쟁에 적극적으로 결합했던 국가가 있었다. 바로 이웃 나라 일본이다. 일반적으로 일본이 한국전쟁 특수로 단숨에 경제 부흥을 이뤘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일본은 전쟁 기간 중 기지 역할을 하며 전쟁에 참여했던 '당사국'이었다.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의 남기정 교수는 최근 펴낸 <기지국가의 탄생 : 일본이 치른 한국전쟁>(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펴냄)을 통해 한국전쟁 당시 일본이 미군의 핵심 거점 기지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남 교수에 따르면 한국전쟁 막바지인 1953년 1월 일본 내 미군기지는 무려 733개에 달했다. 이들 주일 미군 기지는 전쟁을 위한 전진기지, 병사 및 물자 수송의 역할을 하는 중계기지, 물자 보급과 훈련 및 병사 휴양을 위한 후방 기지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전쟁 기간 중 주일 미군 기지로부터 한반도로 약 100만 번 정도의 출격이 진행됐으며 투하된 폭탄은 70만 톤에 이르렀다. 인천 상륙 작전을 위한 병사 1만 명이 수송되기도 했으며, 원산 상륙을 위한 기뢰 제거(掃海) 및 미군 수송에 약 8000명의 일본인이 동원됐다. 이는 6.25에 참전한 미국 등 16개 국가 중 6위에 해당되는 규모였다.

남 교수는 일본이 한국전쟁에서 이같은 역할을 수행하면서 '기지국가'의 면모를 갖춰갔다고 밝혔다. 세계 2차대전 이후 일본은 평화헌법을 내세우며 스스로를 '평화국가'라고 자부해 왔지만, 그 실체는 '기지국가'였다는 것이 남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기지국가에는 평화헌법과 미일 동맹이라는 모순이 동거하고 있다"며 "일본의 좌파 진영은 미국의 일본 주둔을 미국에 의한 일본의 식민지화로 받아들이지만, 미군 기지는 일본 국민이 주체적으로 선택한 결과이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이러한 선택은 한국전쟁의 결과 얻어진 것이었다. 남 교수는 "일본이 전쟁에 관여한 방식 때문에 생긴 자장이 전후 국가의 형성과 운영에 어떠한 힘으로 작용했는지에 대해 고찰하지 않으면 전후 일본이 국가로서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주민들이 (기지 때문에) 고통을 감내하는 구조는 일본이라는 국가가 한국전쟁의 휴전체제 속에 편입된 현재의 구조를 깨지 못하는 한 지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서 결국 "1953년 이후 60여 년간 동북아를 규정하고 있는 휴전 체제를 깨지 않는 한 일본 기지국가 탈피도 불가능하다"고 내다봤다.  

인터뷰는 지난 20일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박인규 편집인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프레시안>은 남 교수의 인터뷰를 2회에 걸쳐 소개한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 남기정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6.25전쟁 66주년을 앞두고 <기지국가의 탄생 : 일본이 치른 한국전쟁>이라는 책을 펴내셨다. 한국전쟁과 일본의 상관관계에 대해 널리 알려진 사항은 막대한 전쟁 특수로 일본이 단숨에 경제 부흥을 이룰 수 있었다는 점이다. 2차 대전 패전으로 폐허가 된 일본 경제가 단숨에 일어나는 결정적 계기였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 보니 6.25가 일본에 미친 영향은 단순히 경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실상 일본은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을 뿐, 미국에 이은 제2의 전쟁 당사국이었던 것이다. 책에 따르면 6.25 막바지인 1953년 1월 현재 일본 내 미군기지가 무려 733개에 이르렀다. 이들 주일 미군 기지는 전쟁을 위한 출격기점으로서의 전진기지, 병사 및 물자 수송의 중계기지, 물자 보급과 훈련, 병사 휴양을 위한 후방기지 역할을 했다. 즉 주일 기지는 미국의 전쟁 수행을 위한 핵심 거점이었다. 

전쟁 기간 동안 주일 미군 기지로부터 한반도로의 출격은 약 1백만회, 투하된 폭탄은 70만톤에 이르렀다. 또한 원산 상륙을 위한 기뢰 제거(掃海) 및 미군 수송에 약 8천명의 일본인이 동원됐다. 사실상 전쟁 수행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이는 6.25에 참전한 미국 등 16개 국가 중 6위에 해당되는 규모였다. 이 때문에 초대 주일 미 대사였던 로버트 머피는 "일본이 없었다면 미국은 한국에서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이 책은 소개하고 있다. 

2차 대전 이후 일본은 평화헌법을 내세워 스스로를 '평화국가'라고 자부해 왔다. 하지만 이 책 <기지국가의 탄생>은 1945년 이후 일본의 실체를 '기지국가'라고 규정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문제의식이 눈에 띄었는데, 우선 기지국가라는 개념이 어떤 것인지 소개해주신다면? 

남기정 : 책에도 언급돼있지만, 제가 사용하는 '기지국가'의 개념은 '국방의 병력으로서 군대를 보유하지 않고 동맹국의 안보 요충에서 기지의 역할을 다함으로써 집단안전보장의 의무를 이행하고, 이로써 안전보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국가'를 의미한다.

여기서 '국방의 병력'이란 국방군을 보유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일본의 전후 국가가 평화헌법이 규정한 제약 하에 놓여있음을 뜻한다. '동맹국의 안전 요충 지역에서 기지의 역할'이라는 부분은 미일 안보조약의 의무에 충실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기지국가에는 평화헌법과 미일 동맹이라는 모순이 동거하고 있다. 나아가 기지국가라는 실체를 평화국가라는 외피가 덮어씌우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일본의 좌파진영은 미군의 일본 주둔을 미국에 의한 일본의 식민지화로 받아들인다. 식민지의 표상이 군사 기지라는 것이다. 실제 미군기지와 관련된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일본이 자주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고 기지 주변의 주민들은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구조 속에 있다.  

이는 주일미군 기지가 일본 국민 일반의 의사에 반하여 강요된 것으로, 일본과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이익을 관철하는 거점이 되고 있다는 생각에 기반한 주장인데, 이러한 측면이 '기지국가'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미군기지는 미국에 의해 강요된 것이기도 하지만 일본 국민이 주체적으로 선택한 결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택은 한국전쟁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한국전쟁은 여전히 휴전의 형태로 지속되고 있다. 따라서 주민들이 고통을 감내하는 구조는 일본이라는 국가가 휴전체제 속에 편입돼있다는 현재의 구조를 깨지 못하는 한 지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무턱대고 미군 기지는 일본을 떠나라고만 이야기할 수 없는 현실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1953년 이후 60여 년간 동북아를 규정하고 있는 휴전 체제를 깨지 않는 한 일본 기지국가 탈피도 불가능하다. 

저는 원래 석사 때부터 한국전쟁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한국전쟁이라고 하면 당사자는 남북한이고 여기에 미국, 중국이 참전했고 소련의 스탈린은 중국을 뒤에서 밀어줬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일본에 대한 인식은 빠져있다. 결과적으로만 일본이 가장 이득을 봤다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인식의 전부다.  

일본은 실제 한국전쟁 기간 동안 '기지'로서의 가치를 높이면서 독립을 이뤄냈다. 그런데 이러한 결과론적인 이야기만 나와 있지, 일본이 전쟁에 관여한 방식 때문에 생긴 자장이 전후 국가의 형성과 운영에 어떠한 힘으로 작용했는지에 대한 고찰은 없었다. 그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규명해내지 않으면, 전후 일본이 국가로서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일본을 평화국가라기보다는 기지국가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는 이 책의 논지는 2000년 도쿄대 박사학위 논문의 내용을 확대, 보완한 것이라고 들었는데, 당시 일본에서 논문이 나왔을 때 일본 학계의 반응은 어땠나?  

남기정 : 학위논문으로 발표됐기 때문에 일본 안에서는 별다른 반향은 없었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이 책의 내용을 약간 거북해한다. 특히 '기지국가'라는 단어는 평화 운동을 하는 쪽에서도 거북해하는 용어다. 이들은 스스로를 전후에 평화국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생각하고, 현실적으로도 평화국가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거기다 대고 제가 현실은 '기지'로 연명했던 국가라고 이야기하니까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측면이 있다.

프레시안 : 그런데 일본에서는 한반도 식민 지배에 대한 반성이 없는 것 같다. 1931년 군부의 독주로 시작된 만주사변이나 중일 전쟁은 잘못했다고 이야기하지만 그 이전의 한국과 대만에 대한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는 별로 그런 생각이나 입장이 없어 보인다. 소위 일본 지식인들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식민지 지배를 인정하거나 사죄하지 않고 있다. '기지국가'론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부분도 이러한 일본 지식인들의 사고와 연관이 있을 것 같은데? 

남기정 : 관련이 있다고 본다. 2차대전 이후 일본에서는 평화문제가 논의됐는데, 일본 사회과학계의 '천황'으로 불리는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真男) 등 일급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담화회'가 만들어졌다. 이후 여기에 포함된 지식인들은 당초 미국만이 아니라 소련과 중공 등을 포함하는 전면 강화(講和)와 외국의 군사 기지를 절대 반대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이것이 '평화문제담화회'에서 지난 1950년 1월 15일 발표한 '강화 문제에 대한 평화문제담화회 성명'의 내용인데, 여기서 마루야마 마사오, 우카이 노부시게(鵜飼信成), 아베 요시시게(安倍能成) 등 세 명의 지식인이 굉장히 큰 역할을 했다.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식민지 시기 조선에서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 <기지국가의 탄생 : 일본이 치른 한국전쟁>(남기정 지음,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펴냄)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우선 마루야마는 약관 26세에 도쿄대 조교수에 임용된(1940년) 소장학자로 당시 모든 실무를 담당했던 스타급 연구자다. 그는 식민지 시절 경성(현 서울)에서 군 복무를 했다. 이 때의 경험 때문에 반군국주의 사상을 갖게 됐다는 이야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병사 시절에 자기를 때렸던 상사가 있었다고 한다. 본인이 직접적으로 조선 민중을 접한 적은 없었지만, 조선의 식민지 지배가 무엇이냐는 생각은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어렸을 때 겪었던 관동 대지진 당시 조선 학살이 있었고 이에 대해 굉장히 마음 아파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또 아버지가 오사카 아사히 신문의 조선 특파원이어서 여러 접점 속에서 조선이 머릿속에 있었는데, 이를 완전히 지워버린 상황에서 평화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웠다.
 
아베 요시시게는 평화문제 담화회에서 원로급에 속했다. 당시 담화회를 두루두루 아우르는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그는 경성제국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한 바 있다.

우카이 노부시게도 마찬가지로 경성 제국대학에서 근무했던 경험이 있다. 그는 이후 도쿄대학교에 사회과학연구소가 만들어질 때 참여했던 교수 중 하나다.

실제 경성제국대학 교수였다가 도쿄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교수가 된 사람이 꽤 있다. 그런데 그들에게서 조선에 대한 인식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이들은 일본에 들어와서 조선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조선에서 자신이 열심히 노력했다는 일종의 '그리움' 차원에서 이야기를 하는 경우는 있지만, 조선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은 없다.

즉 이들은 굉장히 선의에 찬 제국주의자로서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잔혹한 식민지 지배자의 모습은 아니다. 이들은 조선 민중의 모습에 가슴 아파하기도 하고 조선 근대사에 대한 연민의 감정도 있다. 하지만 조선의 식민 지배에 대한 철저한 자기반성은 없다.  

그런 상황에서 한반도가 미소 냉전의 최전선이 되고, 이데올로기의 복잡한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전쟁까지 터지니까 평화를 제1의 가치로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조선이 굉장히 복잡한, 가치판단을 하기 싫은 대상이 돼버렸던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을 잠정적으로, 의식적으로 그만두고 자기 문제에 골똘하게 되는 현실이 벌어진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조선의 식민지 지배 문제에 너무 깊이 관여하면 이데올로기적인 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자신이 진흙탕 싸움에 빠져들기 때문에 평화문제를 논의하는 장을 만들기가 어려워지는 일본의 구조도 이들의 의식 행태에 영향을 미쳤다.

프레시안 : 이들이 조선에 대한 식민 지배를 생각하지 못한 측면이 있을 수는 있지만, 일종의 '자기 기만'도 있는 것 아닌가? 일본이 한국전쟁은 물론 베트남전쟁의 발진 기지 역할을 했음에도 평화를 이야기하고, 조선 지배에 대한 책임이 있으면서도 그 부분은 아예 제외시켰다는 것은, 다소 이해하기 힘들다.  

실제 일본의 진보적인 지식인들의 공론장이라고 하는 잡지 <세카이>에서 조선 문제를 다룬 것은 해방 직후인 1945년 말에 한 번 있었고 이후에는 10여 년이 지난 1956년에 거론될 정도라고 들었다. 1973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납치 사건, 그리고 한국 민주화 세력의 유신 반대 투쟁을 접하고 나서야 일본 지식인들이 그나마 한국에 관심을 가졌다고 하던데,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기본적으로 일본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른바 '평화 의식'이라는 것이 현실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던 것 아닌가? 

남기정 : 전쟁의 현실에서 몸을 빼면서 전쟁의 기원이랄까, 식민지 지배라는 전쟁의 기원에 대해서도 판단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을 기지국가로 만들어버린 한국 전쟁  

프레시안 : 이 책을 통해 한국을 비롯해서 미국, 일본, 중국, 대만 등의 관련 당사국들의 국가적 성격이 한국전쟁으로 인해 규정됐다고 밝히셨다. 그러면서 당시 일본 내에서도 기지국가와 관련한 두 가지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우익에서는 기지국가가 아닌 정상적인 군사국가가 되자는 것이었고, 좌익에서는 평화적인 국가를 만들기 위해 사회주의 혁명을 하자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흐름이 당시, 그리고 이후의 일본 정치에 어느 정도의 현실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보나?  

예를 들면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의 경우 경무장과 미일 동맹에 의존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 우익에서는 전쟁 이전의 군사력을 지닌 정상국가로 돌아가는 움직임이 있었고 좌익에서는 전면 강화와 군사기지 반대를 외쳤는데, 이것이 현재의 보통국가 논의와도 이어지는 측면이 있는 것인가?  

▲ 남기정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남기정 : 이어질 수 있다. 1950년대 초만 해도 요시다 시게루는 지금 우리가 보는 것처럼 이른바 '요시다 노선'을 정착시키고 안착시킬 수 있을 정도의 정치적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여러 보수적인 정치인 중에 한 명이었다. 그가 자신의 구상을 현실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한국 전쟁이 커다란 계기가 됐다고 본다.

만약 한국 전쟁이 없었다면 일본 안에서의 쟁투가 더 오래 갔을 수도 있다. 실제 1949년에는 일본 공산당이 유효하게 정세를 끌어가고 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한국 전쟁으로 인해 일본 좌익운동은 약화됐다. 실제 일본 공산당은 무력으로 한반도를 통일하려는 이승만 또는 김일성의 소음모와 북한의 남침을 빌미로 대륙의 마오쩌둥(毛澤東)까지 몰아내려는 맥아더의 대음모 때문에 일본 공산당이 당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는 좀 지나치게 정세를 읽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전후 이후부터 한국 전쟁이 벌어지기 전까지 좌익 쪽에서는 자기들이 하기 나름에 따라 요시다 정부도 타도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가지고 있었다. 요시다의 퇴진에 이어 혁명까지 밀어붙이지는 못하더라도, 조금 더 중도적 성향의 정치가로 세력을 바꿀 수 있을 정도까지는 갈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군부를 비롯한 우익도 만만치 않은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불과 5년 전에만 해도 힘을 가지고 있던 세력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대로 고꾸라질 사람들이 아니다'라면서 현실적인 구상을 가지고 재군비를 하려고 하기도 했다.  

그런데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 내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기지국가'로 모아지게 됐다. 실제 우익 내부만 보더라도 반미 우익보다는 친미 우익으로 정리되는 시기였다.

프레시안 : 일본 좌익을 좀 살펴보자면, 예를 들어 공산당 지도자인 노사카 산조(野坂参三)는 '미국 점령군은 해방군'이라면서 무장투쟁이 아닌 평화적 혁명 노선을 지향했다. 그랬다가 1950년 1월 6일 코민포름이 일본 공산당을 비판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일본 공산당의 의회주의 노선, 즉 평화 노선에 비판을 가한 것인데, 코민포름은 일본 공산당에 적극적인 대미 투쟁에 나설 것을 요구했고 무장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 배경에는 1949년 8월 소련의 핵실험 성공과 10월 마오쩌둥의 승리가 있었다. 

책에서는 일본 공산당에 대한 대미 무장 투쟁 요구로 소련이 얄타 체제를 파기했다고 밝혔는데, 얄타 체제는 2차 대전 직후 핵무기를 갖게 된 미국이 독일에 대한 소련의 전쟁 배상 요구를 거부하면서 이미 유럽에서 깨진 것 아닌가?  

남기정 : 그런데 당시 소련은 동아시아 내에서는 미국과 협력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부르주아 혁명이 먼저라는 생각으로 미국과 협력을 요구했고 소련은 일본 공산당의 그러한 평화 혁명 노선을 용인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김일성에게 전쟁을 승인하지 않았다. 이는 한국은 전쟁이 나지 않는 상태로 관리하면서, 일본에서 발언권을 얻고 싶어 했던 스탈린의 구도였다고 본다. 만주지역에서 기득권을 지키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 남기정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그런데 중국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이후 이러한 전략은 총체적인 변화에 직면했다. 특히 1949년 마오쩌둥이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담판을 지으면서 상황이 크게 요동쳤다. 여기서 스탈린을 결심을 내리고 김일성에게 전쟁을 해도 좋다는 사인을 보냈다. 일본 공산당에도 평화적인 방식이 아니라 무장투쟁으로 뒤흔들어 보라고 주문을 넣었다.

이에 같은 해 1월 12일 당시 미국 국무장관인 딘 애치슨은 미국신문기자협회(National Press Club)에서 연설을 통해 이에 대응했다. 그는 소련과 중국의 공산화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 태평양에서 미국의 방위선을 알류샨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으로 정한다는 '애치슨 선언'을 발표했다. 이른바 애치슨라인이 그것이다.

프레시안 : 그런데 애치슨은 왜 여기서 한국을 제외했을까?  

남기정 : 한반도를 제외했다기보다는, 일본을 통해 한반도를 확보하겠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보인다. 동아시아에서 방어 준비가 미처 되지 못한 상황에서 우선 유엔을 통해 정치적인 안전 보장을 하고 군사적으로는 오키나와를 통해 보호한다는 두 가지 전략을 가지고 한반도와 일본을 연계시킨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코민포름 비판이 나오니까 여기에 놀라서 일단 대응하자는 차원으로 나온 것이 '애치슨 선언'이라고 본다.

즉 한반도를 제외한 것이 아니라 방어하기 위해서 나온 선언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걸 후세가 방위선에서 빠지는 것으로 해석한 측면이 있다. 실제 김일성도 이 선언을 전쟁을 하기에 좋은 신호인 이른바 '그린 라이트'로 인식하지 않았다고 본다.

일본에서 훈련한 한국군  

프레시안 : 어쨌든 그 해에 한국 전쟁은 벌어졌고 이 기간 동안 한국군 8000명이 일본 간토 지방에서 인천 상륙작전에 대비한 훈련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책에는 미국 극동군 사령부에서 일본군 6개 사단을 육성해서 한국 전쟁에 투입하려고 했으나 1951년 3월 국무부의 반대로 무산됐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널리 알려진 사실인가?

남기정 : 새로운 내용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잘 드러내지 않았던 부분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공공연한 비밀처럼 이야기됐을 수 있지만 그 이후에 묻혀버린 역사가 된 것 같다.  

실제 해방 이후 전쟁 직전에 한국군이 일본에서 와서 훈련을 받기도 했다. 한국 전쟁 발발 전에 있었던 일로, 당시 신응균 대령을 단장으로 수십 명의 장교들이 일본 고텐바 기지를 비롯해 곳곳에서 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한국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도 훈련에 참여했다.

한국군 훈련을 위한 수송 현황을 보면 1950년 8월 19일부터 23일까지 총 17회, 73개 객차가 동원됐다. 객차의 수를 계산하면 나흘 동안 적어도 1만 명의 병사가 훈련 기지에 수송된 셈이다.  

이후 한국군 파견 수송이 같은 해 9월 7~8일에 걸쳐 각 훈련 캠프의 주둔지로부터 요코하마 항으로 모아지는 양상을 보였다. 이로 미루어보아 이들 부대는 당연히 인천상륙작전(9월 15일)에 투입됐던 것으로 관측된다.  

▲ 인천상륙작전 당시 모습 ⓒ미 해군


그럼 왜 일본에서 훈련을 진행해야만 했을까? 일단 한국군을 전쟁에 투입해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이들을 제대로 훈련시킬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일본은 과거에 마련해뒀던 시설도 있었고, 어떻게 훈련을 시키면 되는지에 대한 노하우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에는 일본에서 훈련을 받고 한반도로 투입한다는 인식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대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책에서도 언급했지만 '백단'(白團)이라고 하는, 대만으로 건너갔던 구 일본군 장교들이 있었다. '백단'을 조직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 가운데에는 중일전쟁 기간 전범 리스트 3위에 올랐던 오카무라 야스지(북지나방면 사령관 및 지나파견군 총사령관)와 같은 거물급도 있었다. 이들은 1950년 1월부터 타이완 장제스(蔣介石)의 '대륙반공'(大陸反攻)을 은밀히 돕고 있었다. 1969년 해산되기까지 ‘백단’의 일원으로 대만에 파견된 구 일본군 장교는 모두 83명이었으며 이들로부터 교육과 훈련을 받은 타이완 군인은 6000명에 이르렀다. 

결국 한국 전쟁 직전인 1949~1950년 일본 내에서는 이러한 흐름이 자연스럽게 여겨졌을 것으로 보인다. 남한과 대만이 초기에 군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이들을 훈련시키고 도와주는 역할을 일본이 해야 한다는, 이에 대해 특별히 고민할 것도 없이 '당연한' 역할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었을 것이다. 미국이 직접 이들을 도와주지 못한다고 했을 때 일본이 이를 대신해야 한다는 구조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반면 1950년 초부터 북한은 중국에 대해 국공내전에 참여했던 조선인 병사들을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했고, 이들 병사들은 1950년 4월, 6월 두 차례에 걸쳐 북한에 들어왔다. 그리고 6.25 남침의 핵심 병력이 된다. 미국의 역사가 브루스 커밍스가 6.25에 대해 1930년 만주에서 벌어진 공산혁명세력과 친일군사세력 간의 재대결이라고 부른 것이 전쟁 발발 초기 상황이라면, 전쟁이 미중전쟁으로 확대되는 배경에는 한국전쟁 발발 이전에 동아시아에서 재현되고 있던 중일전쟁의 구도가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보통국가화, 아베 문제가 아니다"

2016.06.25 05:31:36


[인터뷰] 남기정 서울대학교 교수 <2> '기지국가' 일본

             
한국전쟁 당시 '기지국가'로서의 면모를 다진 일본은 이후 급속한 경제 발전으로 세계적인 경제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여전히 '보통국가'가 아닌, 기지국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기지국가 일본을 만들었던 냉전체제와 한국전쟁의 휴전협정 체제가 동아시아 내에서는 아직도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 내에서 이를 벗어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8년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당시 총리는 김대중 대통령과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발표했고 2002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당시 총리가 북한을 방문해 국교정상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기지국가의 탄생 : 일본이 치른 한국전쟁>(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펴냄)의 저자인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남기정 교수는 1998년부터 2002년까지가 "동아시아에서 휴전협정 체제를 깨뜨릴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였다며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이 현실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때"였다고 평가했다.  

남 교수는 이 시기가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구상했던 동아시아 공동체와 한반도 안정화를 동시에 실현하는 커다란 전략이 완성되던 때였다고 진단했다. 그는 "동아시아 평화의 핵심 삼각형은 남북한과 일본이다. 이들 간 관계 개선은 냉전 체제에 녹아있는 식민지 문제를 해결하는, 즉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함으로써 동아시아의 평화를 일궈나가는 핵심적인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에 일정한 역할을 하라는 압력을 넣기도 했다. 김 대통령은 1998년 파트너십 체결 당시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사과와 반성을 끌어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일본이 전후 동아시아 평화에 기여했다는 점을 평가하면서, 이 메시지를 일본을 움직이는 레버리지로 활용했다.  

남 교수는 "일본이 앞으로도 동아시아와 한반도 문제에서 평화국가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는 뜻이었고, 이는 곧 대북정책에서 일정 부분 역할을 하라는 의미였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15년 여가 지난 현재 한일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특히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집권 이후 전범국가에서 보통국가로 탈바꿈하려는 일본의 움직임은 한국을 비롯한 중국에 상당한 경계심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한일 관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남 교수는 아베 정권의 이러한 움직임이 아베 총리 개인으로 인해 발생한 일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는 '기지국가'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국가로서의 불안정성에 기인한다고 봐야 한다. 일본이 이러한 국가 성격을 띠고 있는 한 아베 정부의 이러한 움직임은 다른 정부에서도 언제든 나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베의 안보정책 노선은 2000년대 이후 나왔던 군사적 '보통국가' 노선 위에 설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특별히 이상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전의 정권과 달리 그 변화의 폭과 깊이와 속도가 대담하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남 교수는 아베 정권의 안보 정책을 아베(Abe)와 안보(Security)를 합한 '아베큐리티'로 규정하며, △군사적 보통국가의 확립 △'적극적 평화주의'라는 이름의 능동적 대응 △미일 동맹의 격상과 강화 등을 기본 요소로 하고 있다고 정의했다.  

그는 "보통국가가 되려는 움직임은 기지국가로서 일본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질병인데, 이를 서서히 치유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한국이 공유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남 교수는 "일본이 이렇게 나가려는 것을 일탈적인 현상으로 보면서 내치려고 할수록, 일본은 계속 정식 군대를 가지려 할 것이고,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곳에서 이 문제 해결을 시도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우리는 한국전쟁의 휴전협정 체제에 남북한뿐만 아니라 일본도 편입돼 있다는 현재의 동북아 구조를 이해하고 일본과 함께 이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는, 커다란 의미에서의 파트너십을 가져야 한다"며 "한미일 동맹에서 북한이나 중국과 균형을 맞춘다는 의미에서의 일본과 파트너십을 맺는 것이 아니라, 현재 구조를 깨 나가는 파트너로서의 일본을 염두에 두고 일본을 정부가 추진하는 조치들을 바라봐야 한다"고 주문했다.

남 교수는 "일본이 기지국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휴전협정 체제를 깨려는 노력과 같이 가지 않으면 안된다. 기지국가에서 정상국가로의 변화는 휴전협정 체제의 평화협정 체제로의 전환과 동시에 진행돼야 하는 것"이라며 "이를 일본에도 설득시켜야 한다. 일본 내에도 이를 원하는 세력이 있고 우리가 설득시켜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베 총리 역시 설득하기 나름이지, 무조건 내칠 사람만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인터뷰는 지난 20일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박인규 편집인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 전편 보기 : 남기정 교수 인터뷰 ① "일본은 한국전쟁에 참여한 당사국이었다") 

▲ 남기정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6.25 이후 남북은 지금도 극단적인 대립을 하고 있고 일본도 기지국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 내에서 동아시아 냉전 체제를 깨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2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당시 총리가 북한을 방문해 국교정상화를 시도하기도 했고, 50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룬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당시 민주당 총리는 2009년 이른바 '동아시아 협력론'을 들고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허무하게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했을까?  

남기정 : 지난 1998년부터 2002년까지, 햇수로 5년이었던 이 시기가 동아시아에서 휴전협정 체제를 깨뜨릴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였다.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이 현실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때였다.  

1998년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당시 총리는 김대중 대통령과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발표한다. 이것이 한일 간 새로운 시대를 여는 시작이었다.

여기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가지고 있던 외교정책의 큰 구상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는데, 김 대통령은 양자주의와 다자주의를 결합시키는 외교를 펼쳤다.

이 선언이 발표된 이후 김 대통령은 베트남으로 향하는데, 그해 제2차 '아세안(ASEAN)+3(한국, 중국, 일본)' 회의에서 '동아시아 경제협력 비전그룹'의 창설을 제안한다. 여기서부터 그의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이 발원됐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동아시아 정상회의가 시작됐다.

이 때가 동아시아 국제정치에서 한국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거의 유일한 시기다. 김 대통령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동남아를 균형추로 삼아 한국이 주도권을 쥘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고 본다. 

다시 파트너십 선언으로 돌아가보면, 이 선언은 일본이 처음으로 한국을 특정해서 식민지 지배에 대해 사과와 반성을 표명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가 있다. 이것이 이 선언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동시에 김 대통령은 전후 일본이 평화주의 하에서 평화국가로 발전해오고, 동아시아의 평화에 기여했다는 것을 평가했다. 이게 일본 지식인들에게 감동을 줬고 이들을 움직인 결정적 요인이 됐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일본을 움직이는 레버리지로 작용했다. 일본이 앞으로도 동아시아와 한반도 문제에서 평화국가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는 뜻이었고, 이는 곧 대북정책에서 일정 부분 역할을 하라는 의미였다.  

▲ 1998년 10월 8일 김대중(왼쪽)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 총리가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래서 오부치 이후 총리 자리에 오른 모리 요시로(森喜朗)는 2000년 당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친서를 보냈고, 북일 양측은 물밑에서 접촉을 시작했다. 특히 일본 납북자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한 논의가 나온 것은 양측이 물밑에서 상당히 많이 움직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런데 모리 총리가 2000년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신의 나라"라고 말하며 논란을 일으켰다. 그후 고이즈미가 총리 자리에 올랐고 결국 북한 방문은 고이즈미 총리의 차지가 됐다. 모리 총리 시절 진전된 북일 관계의 성과를 고이즈미가 이어 받은 셈이다.

어쨌든 이 시기는 김대중 대통령이 구상했던 동아시아 공동체와 한반도 안정화를 동시에 실현하는 커다란 전략이 완성되던 때였다. 여기에서 동아시아 평화의 핵심 삼각형은 남북한과 일본이다. 이들 간 관계 개선은 냉전 체제에 녹아있는 식민지 문제를 해결하는, 즉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함으로써 동아시아의 평화를 일궈나가는 핵심적인 작업이다.

여기에 미국과 중국, 러시아는 배경 삼각형으로 작용한다. 한국은 자국이 가지고 있는 이니셔티브를 이용해 이 배경 삼각형과 핵심 삼각형을 잇는 여러 가지 삼각형을 운영하는 외교를 가져갔어야 했다. 실제 김대중 정부는 이를 실행에 옮겼다.

프레시안 : 1998~2002년 사이에 한일 간, 남북 간, 일본과 북한 간에 이러한 해빙 움직임이 있었는데 결국 이 흐름이 이후에도 이어지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나? 2002년 켈리 특사의 평양 방문에서 불거진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농축 문제가 발목을 잡은 걸까?

남기정 : 북핵 문제도 많이 얽혀 있긴 하지만, 그보다는 미일 동맹에서 일본이 이탈한다는 위기 의식이 일본 내에서 생겼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일본 내의 미일 동맹파와 그와 연계했던 미국 내 미일 동맹파가 이러한 흐름에 대해 반격을 가했다고 본다.

▲ <기지국가의 탄생 : 일본이 치른 한국전쟁>(남기정 지음,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펴냄)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우리가 이러한 움직임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있었지만 사려 깊게 조치하지 못한 측면도 있었다. 2003년 이후 한국에서는 독도 문제 등을 가지고 일본과 갈등을 빚었고 급기야 2005년에는 외교 전쟁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게 됐다. 한일 월드컵 이후 좋았던 양국의 분위기를 우리가 제대로 살리지 못한 셈이다.

여기에는 김대중 정부가 추진했던 동아시아 공동체론에서 우리가 철수한 것도 한몫했다. 김대중 정부에 이은 노무현 정부는 외교적인 측면에서 김대중 정부보다 시야가 좁았다는 생각이 든다. 좀 더 큰 관점에서 외교를 했어야 했는데, 동아시아 공동체에서 후퇴하고, 동남아시아를 빼고 동북아시아라는 좁은 곳으로 들어가 버렸다.

예를 들자면 납치 문제로 일본이 뒷걸음치고 있을 때 일본도 설득하면서 조금 더 큰 관점에서 외교 행위를 했어야 했다. 북한 문제도 납북자 사안이 있기 때문에 일본과 공유할 수 있는 부분도 있었다. 그래서 "보다 큰 평화를 구상해야 하지 않겠냐"는 식으로 일본을 설득하는 것이 필요했는데 오히려 일본을 자극하는 외교를 한 것이 문제였다고 본다.

프레시안 :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가 내걸었던 '동아시아 협력론'은 어떻게 보나?

남기정 : 일본 내 미일 동맹파가 상당히 놀랐을 것이다. 여기에는 하토야마의 미숙함과 성급함도 일조했다. 하토야마의 외교가 좀 아마추어적인 부분이 있었다. 그런 큰 구상을 가지고 실제 실행에 옮기려면 외무성을 설득했어야 했다. 그런데 일본도 외무성을 설득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 이 부분을 간과하고 너무 순진하게 접근한 것 아닌가 싶다.

하토야마의 구상이 발표됐을 때 일본 외무성은 발칵 뒤집혔다. 이후 완전히 하토야마에 등을 돌리게 됐다. 하토아먀는 오키나와현 미군기지의 현외 이전을 선언하면 끝인 줄 알았겠지만 정말 그런 구상을 실행에 옮기고 싶었다면 아주 치밀하게 전개했어야 했다. 국내 정치적인 문제부터 해결하는 방식으로.  

그런데 불행한 것은, 하토야마가 코너에 몰리면서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는데 쓰인 재료가 바로 2010년 3월 천안함 침몰이었다는 점이다. 하토야마는 한반도에 이러한 위기가 있고, 이에 일본의 기지가 굉장히 필요하다고 변명했다. 결국 휴전협정 체제가 존재하는 한 기지국가 일본의 가치는 유효하다는 것을 시인한 꼴이 돼버렸다.  

프레시안 : 실제 정책 실현에는 실패했지만, '동아시아 협력론'과 유사한 국제정치를 펼 수 있는 정치 세력이 다시 집권할 가능성이 있을까?  

남기정 :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커다란 구조를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 힘들다고 본다. 대전략을 가지고 치밀하게 접근해야 한다.  

아베가 문제가 아니다 

프레시안 : 탈냉전 이후 기지국가라는 일본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특히 1991년 걸프전에 무려 130억 달러나 되는 전쟁비용을 대고도 일본은 국제평화 공헌이 미흡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후 일본은 1999년 주변사태에 군사 대응할 수 있는 유사법제를 마련해 군사력 해외 진출의 길을 텄다.  

나아가 현재 일본 총리인 아베 신조(安倍晋三)는 2014년 각의 결정이라는 편의적 해석 개헌을 통해 집단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지난해 안보법제 제·개정을 통해 집단적 자위권 확대를 법적으로 보장했다. 이어 올해는 평화헌법의 개헌까지 노리고 있는데, 향후 아베 총리의 이러한 움직임은 계속될 것이라고 보나?

남기정 : 일단 짚어야 할 부분이 있다. 아베 정부의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아베 때문만은 아니다. 이는 '기지국가'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국가로서의 불안정성에 기인한다고 봐야 한다. 일본이 이러한 국가 성격을 띠고 있는 한 아베 정부의 이러한 움직임은 다른 정부에서도 언제든 나올 수 있다.  

▲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지난 2014년 5월 15일 도쿄의 총리관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집단 자위권 행사 용인의 당위성을 주장하며 헌법 해석 변경 의지를 밝히고 있다. 아베 정부는 결국 같은 해 7월 1일 내각에서 집단자위권 행사를 위한 결정, 즉 '해석 개헌'을 단행했다. ⓒAP=연합뉴스


아베노믹스가 아베의 트레이드 마크이긴 하지만 이것이 과거의 경제성장 노선을 답습하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독창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듯이 아베의 안보정책도 이미 그 노선은 2000년대 이후 나왔던 군사적 '보통국가' 노선 위에 설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특별히 이상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전의 정권과 달리 그 변화의 폭과 깊이와 속도가 대담하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포착하면 아베 내각에 들어서서 전개되는 안보 방위정책을 아베노믹스에 빗대어 '아베큐리티'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아베의 시큐리티(Security, 안보)라는 의미이다. 아베큐리티는 '개헌'을 최종 목표로 설정한 군사적 보통국가의 확립, '적극적 평화주의'라는 이름의 능동적 대응, '간단없는 동맹'으로서 미일 동맹의 격상과 강화를 세 가지 요소로 하고 있다. 이를 아베큐리티의 세 가지 화살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아베큐리티에서 주목할 점은 그 내용보다도 가파른 속도인데, 이것이 강권정치로 비치는 이유이다.

한편 보통국가가 되려는 움직임은 기지국가로서 일본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질병인데, 이를 서서히 치유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한국이 공유해야 한다. 일본이 이렇게 나가려는 것을 일탈적인 현상으로 보면서 내치려고 할수록, 일본은 계속 정식 군대를 가지려 할 것이고,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곳에서 이 문제 해결을 시도할 것이다.  

우리는 한국전쟁의 휴전협정 체제에 남북한뿐만 아니라 일본도 편입돼 있다는 현재의 동북아 구조를 이해하고 일본과 함께 이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는, 커다란 의미에서의 파트너십을 가져야 한다. 남북한 일본 모두가 휴전협정 체제의 포로라는, 한미일 동맹에서 북한이나 중국과 균형을 맞춘다는 의미에서의 일본과 파트너십을 맺는 것이 아니라, 현재 구조를 깨 나가는 파트너로서의 일본을 염두에 두고 일본을 정부가 추진하는 조치들을 바라봐야 한다. 이건 특히 한국의 이른바 '진보'라고 불리는 세력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다.

일본이 기지국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휴전협정 체제를 깨려는 노력과 같이 가지 않으면 안된다. 기지국가에서 정상국가로의 변화는 휴전협정 체제의 평화협정 체제로의 전환과 동시에 진행돼야 하는 것이다. 이를 일본에도 설득시켜야 한다. 일본 내에도 이를 원하는 세력이 있고 우리가 설득시켜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아베 총리 역시 설득하기 나름이지, 무조건 내칠 사람만은 아니다.  

좀 더 이야기하자면, 일본의 보수화와 우경화도 분리해서 봐야 한다. 정치적 현실주의에 입각해서 일본의 안보정책을 가지고 가려는 움직임은 분명히 있고, 이것이 일본의 정치 보수화라는 이름으로 표현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는 우경화와는 분명히 다른 의미다.

사사분면으로 표현하자면 호헌과 개헌이 나뉘고 미일 동맹 중시와 해소가 나뉜다. 여기서 호헌과 미일동맹 해소가 가장 사회민주적인 사람들이 추구하는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가장 반대 쪽에 우익이 자리한다. 헌법을 바꿔서 무장을 하고 이를 통해 독자적으로 일본을 정상국가로 만들면서 미일 동맹에서 빠져나오자는 논리다.

▲ 호헌/개헌과 자주/동맹에 따라 구분된 사사분면 개념도


이렇게 양 극단 외에 제가 쓰는 표현으로는 국제정치적인 의미에서 제도적 자유주의자들과 정치적 현실주의가 있는데, 아베는 기껏 해봐야 정치적 현실주의자다. 이것도 가지 못해서 안달인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정치적 현실주의로 가려고 해도, 즉 개헌을 하려고 해도 일본 국민들의 동의를 얻기가 힘들기 때문에, 우경화적인 논리를 가지고 오는 것이다. 즉 기지국가인 일본의 현실 속에서 해소되지 않는 국가주의를 자극해서 개헌을 이끌어내려는 것이다.

이는 정책적으로 보자면 그래봐야 정치적 현실주의다. 일본 사회에서의 우경화는 국가개조론자들이 가지고 가려는 사회 담론에서의 우경화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게 극단적으로 갔을 때 인종주의적인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 로 나타나긴 하지만 이들은 주변 세력에 불과하다. 아베 정부가 개헌을 추진하면 결국은 사라질 세력이다.

또 장기적으로 봤을 때 우리는 일본 정치 안에서 우경화 세력을 약화시키는 대전략을 구상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일본의 어떤 세력과 손을 잡을 것인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일본의 소위 '리버럴'까지 싸잡아서 내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일본 모두를 내치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실망감은 커지고,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우경화 논조에 동의해가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프레시안 : 이 책의 결론 부분에서 아베의 보통국가화가 동북아 전쟁 재발의 가능성을 높이는 방아쇠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반면 역사학자 김기협 선생 같은 분은 일본의 보통국가화를 막을 수 없다고 보고 있다. 군사력을 가지려 하는 것은 국가의 자연스러운 성향이라는 것이다. 물론 군사력을 정당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긴 하지만.

남기정 : 일본은 지난해 안보법제를 제‧개정 하면서 이미 내용적으로는 보통국가가 됐다.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겠다고도 했고. 남은 것은 형식의 문제다.

그렇다고 해서 군대로 탈바꿈한 일본의 자위대가 정말 '슈퍼파워'에 걸맞는 군대인지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 그런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슈퍼파워'가 되기도 어려울 것으로 본다. 일본이 형식적으로도 개헌을 통해 군대를 갖는다고 해도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여전히 '미들파워'에 머물러 있는 나라다.  

설혹 일본의 여론이 개헌을 인정하고 국민투표에서 이를 통과시킨다고 해도 일본 군대가 갑자기 대군이 돼서 중국이나 미국과 겨룰 수 있는 군대로 성장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일본의 군대를 그렇게 만들자는 여론도 없고, 그럴 실력도 없다.

일본은 중국과 대결하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고 있지 않다. 이는 일본 국민도 그렇고 정책 담당자들도 그렇다. 심지어 아베 총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프레시안 : 그럼 일본은 보통국가로 탈바꿈해서 대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남기정 : 외교적인 발언력을 키우겠다는 의도가 있다고 본다. 일본이 3류 국가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을 막겠다는 뜻이다. 일본이 확보할 수 있는 최소한의 국가적 이익을 확보하고 싶다는 정도다. 보통국가를 만들어서 이를 기반으로 과거와 같은 커다란 제국을 만들겠다는 의도는 아니라고 본다. 일본 국민들의 의식도 그렇지만 객관적인 지표들을 봤을 때도 이는 불가능하다.  

▲ 남기정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일단 재정 문제가 있다. 일본은 OECD 국가 중 GDP 대비 정부 부채 비중이 가장 높은 나라다. 2030년까지 재정 압박을 회복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지금 아베 정부는 재정을 건전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까지 포기하면서 무리해서 경기를 진작시키겠다는 노선을 펼치고 있는데 이는 국가 재정 건전화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두 번째는 인구 문제다. 이미 일본은 자위대를 유지할 수 있는 자위관 모집대상 연령인 18~26세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다. 여기에 구멍이 뻥 뚫려있다. 우리로 따지면 병을 모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일본의 국방력 개편의 방향은 어떻게 하면 군대를 간결하고 효과적으로 만들 수 있느냐, 어떻게 하면 기동성 있는 군대를 만들 수 있느냐는 고민에서 나오는 것이지, 군사 대국을 만들겠다는 욕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일본은 사병급 군사들을 감축하고 간부를 중심으로 주일미군과 일본 군대가 어떻게 연계할 것인지의 문제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일본이 독자적인 전투 태세를 갖출 수 있는 군사력을 확보하겠다는 의도는 없다. 일본은 미국과 함께하는 동아시아에서의 일본 역할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이것이 최대의 목표다. 그래서 미일 동맹을 중시하는 것이다.

프레시안 : 현재 아베 정권의 행보가 군부가 폭주했던 1930년대 일본의 행태와는 다르다는 것인가? 1931년 만주사변은 관동군의 독단적 결정으로 시작됐고 이는 1937년 중일전쟁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내각은 군부를 제어하지 못했다.

남기정 : 지금 아베 정권은 분명 1930년대 일본과는 다르다. 오히려 지금의 중국이 1930년대의 일본을 닮아 있다.  

프레시안 : 그런데 일반적으로 미국과 일본이 군사 동맹을 강화해서 중국과 전쟁까지 하려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많다.  

남기정 : 그건 가상적인 시나리오에 불과하다. 그런 가상적인 시나리오 때문에 파생되는 국력의 낭비도 생각해봐야 한다.  

프레시안 : 일본을 있는 그대로 보고 미일 동맹을 그렇게 무시무시한 것으로 보면 안된다는 뜻인가?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휴전협정 체제를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보자는?

남기정 : 우리가 미국과 일본을 너무 크게 보다 보니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운신의 폭을 스스로 좁히는 것 같다. 외교적 상상의 유연성을 잃어버린 셈이다.

더구나 북한을 "때려잡겠다"는 것도 문제인데, 이 정권이 지금은 이렇다고 하더라도 다음 정권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해봐야 한다. 어떻게 논의를 가져갈 것인지에 따라 분명 달라질 수 있다.  

기지국가 일본이 정상국가가 되려면, 휴전협정 체제가 극복돼야 한다. 거기서 이니셔티브를 쥘 수 있는 국가는 한국밖에 없다. 이러한 점을 잘 생각해서 차기 정권이 어떤 방향으로 대외 전략을 가져나갈지 치밀한 논의가 필요하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