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칼럼

큰 꿈만 좇다간 작은 일도 못해요

일취월장7 2016. 6. 16. 10:32

큰 꿈만 좇다간 작은 일도 못해요

인공지능 시대가 열리더라도 인공지능은 그저 문제를 풀 뿐이다. 문제를 찾아내는 것은 결국 인간의 몫이다. 정답을 정해놓고 아이들을 매몰시키지 말자. 미래는 예측하고 따라가는 사람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가는 사람의 것이다.

  조회수 : 318  |  정지훈 (경희사이버대 IT디자인융합학부 교수)  |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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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6호] 승인 2016.06.15  14:04:52


<내 아이가 만날 미래>라는 책을 쓴 인연으로 오늘 강의에 선 듯하다. 이 책은 본래 친구 아내들 읽으라고 쓴 것이다(웃음).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게 2007년인데, 그 뒤로도 아내와 나 사이에는 교육 문제로 인한 갈등이 거의 없었다. 미국에 있는 동안 세상의 변화를 읽을 수 있었기에, 현행 교육으로는 아이의 미래에 대비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친구들, 특히 남자들은 좀 달랐다. 뭔가 엄청나게 바뀔 것이라는 예감은 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집에서는 입을 닫는다고 했다. 아내한테 얘기해봤자 “당신이 교육에 대해 뭘 알아?” 하는 잔소리만 듣는다는 것이다. 그 얘길 듣고 책에 쓰인 말이라면 귀를 좀 기울이지 않을까 싶었다(웃음).

그렇다면 내 아이가 만날 미래의 모습은 어떨까? 일단은 가까운 미래, 그러니까 2020~ 2030년이 중요할 것이다. 미래 대비는 교육의 본질적 기능 중 하나다. 미래에 대비하지 않으려면 굳이 교육할 필요도 없을 터이다. 그런데 교육의 또 다른 특질이 뿌리 깊은 보수성이다. 지금 교육체제는 엄마 아빠 세대가 살던 20~30년 전 방식과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 차이에서 본질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18세기 이전 중요한 학문은 정치학·수사학 등이었다. 영주나 자영농을 지켜주는 대가로 왕이 세금을 거둬들이던 시대였던 만큼 소수 상층부를 중심으로 정치를 공부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산업시대가 도래하면서 국·영·수 같은 언어·수학 관련 학문이 중요해진다. 인구의 40~45%가 제조업에 종사하게 된 만큼 작업 지시서를 읽고 작업 수량을 파악할 줄 아는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교육은 이처럼 늘 사회 변화의 후행 지표로 따라간다. 사회가 요구하니까 학교가 따라가는 것일 뿐 교육이 먼저 바뀌는 일은 없다는 얘기다. 부모들이 미래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이명익</font></div> 
ⓒ시사IN 이명익

그렇다면 미래를 예측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뭘까? 아시다시피 첫 번째는 인구구조의 변화다. 다른 한 가지는 기술의 변화다. 기술 발전에 따라 사람들의 인식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미국·일본의 조사를 보면, 자동차를 사겠다는 사람이 30대에 비해 20대는 절반밖에 안 된다고 한다. 심지어 이들 20대는 운전면허도 따지 않는 추세다. 단순히 돈이 없어서일까? 그렇지만은 않다. 인간이 상품을 소유하려는 데는 크게 네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의식주처럼 이것 없이는 생활을 영위하기가 곤란해서다. 둘째는 스마트폰처럼 새로운 가치 창출을 위해서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세 번째 접근권이다. 1년에 한 번 쓸까 말까 한 망치를 집집마다 구입하는 것은 대부분 번거로워서다. 망치를 빌리려면 어느 집에 망치가 있는지 알아보고(검색 비용), 빌린 망치를 되돌려줄 때면 하다못해 요구르트라도 사례로 들고 가야 한다(거래 비용). 이렇게 접근이 어렵다 보니 소유하려 드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아파트 각 층에 공구함이 있다면 이럴 필요가 없게 된다. 다만 우려되는 것이 누군가 망치를 빌려가서 돌려주지 않는 경우인데, 공구에 위치식별 장치가 부착돼 있다면 이런 문제도 사라진다. 곧 인터넷과 IT 기술이 거래 비용과 검색 비용을 0에 가깝게 떨어뜨리면서 공유경제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소유의 네 번째 이유는 남들한테 자랑하려는 것인데, 공유경제가 확산되면 이런 욕구도 감퇴한다. 기껏 값비싼 스포츠카를 샀는데 주변에서 “넌 지구를 생각하는 마음도 없냐?” “우버 택시 타면 훨씬 싼데 돈을 왜 그렇게 허투루 써?” 하면 김이 팍 샐 것이다. 이런 게 소유의 개념을 바꿔놓고 있다.

미래가 원하는 인재상은 무엇일까

인공지능이 미래를 어떻게 바꿔놓을지에 대해서는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을 통해 예감하셨을 테니 긴 설명은 하지 않겠다. 인간의 뇌가 작동하는 방식을 컴퓨터에 응용한 인공지능 신경망은 데이터가 쌓이면 쌓일수록 인간보다 학습을 더 잘 수행하게 돼 있다. 한 예로 구글과 페이스북의 얼굴 인식 능력은 이미 인간의 능력치를 크게 넘어섰다. 로봇 또한 인공지능 기술이 결합하면서 크게 달라지고 있다.

미래와 관련해 또 하나 알아둘 것은 새로운 영역에 진입할 때 위험비용이 크게 감소했다는 사실이다. 일단 많은 정보가 오픈소스로 풀리면서 과거에는 대기업에서나 만들던 하드웨어를 대학에서도 만들 수 있게 됐다. 3D 프린터 등의 상용화로 이 같은 오픈소스 하드웨어 운동에는 더 가속이 붙고 있다. 펀딩 구조도 바뀌었다. 그간 신생 기업(스타트업)이 사업자금을 마련하는 방식은 세 가지. 돈 많은 아버지한테 얻거나, 은행에서 빌리거나, 벤처캐피털에서 투자를 받는 것이다. 그런데 킥스타터 같은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이 생겨나면서 개발자들이 이를 통해 사업자금을 직접 조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진입 비용이 낮아지면서 전 세계적으로 마이크로 다국적 기업이 수천, 수만 개 생겨나는 중이다. 세계 곳곳에 지사를 세우고 수많은 사람을 고용하는 형태로 운영됐던 20세기 다국적 기업과는 다르다. 내 아들만 해도 캐나다·독일에 있는 친구들과 뭔가를 만들어 앱스토어에 올리곤 한다. 수많은 사람이 전문가가 되는 초전문가 시대도 함께 열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미래가 원하는 인재상은 무엇일까? 첫째, 통섭형 인재를 꼽는다. 인공지능 시대가 열리더라도 인공지능은 그저 문제를 풀 뿐이다. 뭔가 문제인지를 찾아내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그런 만큼 다양한 분야의 정보를 넓게 이해하고 이를 엮어내는 능력이 필요하다. 둘째, 나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모아 시너지를 발휘하는 협업형 인재다. 셋째, 사람과 사람, 지식과 지식을 연결하는 네트워크형 인재다.

이는 흥미로운 패러독스(역설)다. 현재 기술 발전은 이공계적 요소가 매우 강하다. 그런데 이에 대비하라고 요구받는 요소들은 오히려 과거부터 얘기하던 인간의 덕목과 비슷해져버렸다. 기계와 인공지능 수요가 증가할수록 제기되는 질문 또한 ‘그렇다면 인간이란 무엇이냐’ ‘우리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 하는 것들이다. 그런 만큼 인간 자체를 고민하는 노력이 많아져야 할 것이다.

사실 내가 인공지능 시대를 강의하면 뭔가 똑 부러진 정답을 내주기를 원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답은 없다는 것이 유일한 답이다(웃음). 다만 한 가지 핵심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화에 적응하고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아이에게 키워주시는 것이다. 조디 피코의 공식에 따르면 ‘행복=현실÷기대’다. 그러니 행복도를 높이는 방법은 두 가지다. 현실을 높이거나, 기대를 낮추거나. 어느 쪽이 쉬울까. 당연히 후자다. 내가 싫어하는 말이 호연지기다. 쓸데없이 큰 꿈을 꿀 일이 아니다. 그보다 현실적으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작게나마 일일목표(daily goal)를 잡고 매일같이 뭔가를 실행하는 근성이 있는 친구들은 뭐라도 해낸다.

이 같은 행복공식으로 세대 차이를 해석하는 분들도 있다. 현재의 베이비부머 세대는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한 만큼 기대 수준이 낮은 편이었다. 이에 비해 현실은 늘 기대치보다 좋았다. 급속한 성장의 시대를 살다 은퇴했다. 그러다 보니 이분들이 늘 ‘박정희 시대가 좋았는데’ 타령을 하곤 하는데, 너무 탓하지 마시라. 이는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 공통으로 관찰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반면 풍요한 환경에서 태어난 요즘 아이들은 처음부터 기대 수준이 높은 편인데, 정작 현실은 이를 충족해주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그 결과 우울·실망·슬픔 따위에 빠지는 것이다. 그런 만큼 아이들이 행복하려면 먼저 기대치를 낮추는 훈련부터 해야 할 것 같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신선영</font></div>지난 3월 알파고와 이세돌(왼쪽)의 대국은 인공지능이 바꿔놓을 미래에 대해 보여줬다. 
ⓒ시사IN 신선영
지난 3월 알파고와 이세돌(왼쪽)의 대국은 인공지능이 바꿔놓을 미래에 대해 보여줬다.

언젠가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초청하면서 비즈니스석 비행기 표를 보내온 일이 있다. 내 돈으로 비즈니스석 항공권을 사기는 힘든 만큼 기대를 잔뜩 하고 공항에 갔다. 그랬더니 비즈니스석이 다 찼다고 퍼스트클래스석을 주는 것이었다. 거길 타보니 별천지였다. 스튜어디스로부터 일대일로 호화 서비스를 받으며 여행을 즐겼다. 돌아오는 길에는 애초 정해졌던 대로 비즈니스석을 타게 됐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토록 기대했던 비즈니스석이 별 볼 일 없이 느껴졌다. 이 경험을 통해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 깨달았다. 그 뒤로는 평소 검소하게 살려고 노력 중이다. 그래야 어쩌다 기대치 이상의 것이 주어졌을 때 이게 얼마나 좋은지 알고 행복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늘 두 아이에게 강조하는 게 있다. 하나는 물려받을 유산이 없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너희가 굉장히 못살 수 있으며 따라서 가난하게 살 수도 있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마라’는 옛말이다. 앞으로 세상은 노동이 없이도 굴러간다. 어쩌면 가짜 노동을 해야 할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니 사회적으로 기본소득제 등 이런 미래에 대비할 시스템을 만들어가야 할 텐데, 한국은 아직 기초적인 사회보장제도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형편이다. 답답하고 알 수 없는 미래지만 어쨌거나 아이들은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 안온한 비닐하우스에서만 자란 아이들은 약간의 악천후만 만나도 꺾이지만 처음부터 잡초처럼 자란 아이들은 웬만한 역경을 만나도 이겨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미래를 살아갈 핵심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다

이와 더불어 무언가를 직접 시도하고 만들어보는 교육도 중요하다고 본다. 이를 위해 최근에는 ‘어썸스쿨(awesome school)’이라는 방과후 학교 과정을 만드는 데 참여하고 있다. 이 학교에 일주일에 세 시간씩 모이는 아이들은 먼저 자기를 알아가는 과정을 밟는다. 어찌 보면 자신을 가장 잘 모르는 것이 자신이다. 그런 만큼 나에 대해 직접 관찰하고 물어보지 않으면 나 자신을 파악하기 어렵다. 두 번째로는 세상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을 밟는다.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한다 해도 사회가 알아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을 테니까. 이렇게 내가 원하는 일과 사회를 매칭시킬 수 있게 되면 뭔가 길이 생겨난다. 아이들 각자 실행을 통해 이를 배우고 익히는 것이 세 번째 단계다.

이렇게 어썸스쿨을 운영하다 보면 많은 아이들이 자기 자신뿐 아니라 학교까지 변화시키는 모습을 보게 된다.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다. 직접 참여해 뭔가를 바꿔내는 일을 아이들은 기성세대보다 훨씬 잘해낸다. 내 경우 고등학교 1학년, 중학교 1학년인 아들·딸이 있는데 얼핏 보면 게임 중독자, 오타쿠에 가깝다. 그런데 게임을 하고 코믹월드(만화축제의 일종)를 쫓아다니면서 이들이 다른 아이들과 어떻게 상호작용(인터랙티브)을 하는지 살펴보면, 아이들이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러니 아이들을 우습게 여기지 마시라. 정답에 아이들을 매몰시키지도 마시라. 아이들을 관찰하면서 오히려 아이를 통해 배우시라. 결국 미래는 예측하고 따라가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사람의 것임을 기억하자.

정리·김은남 기자



청년 창업, 대기업 배만 불리는 이유는?

2016.06.16 11:48:41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창업, 청년 일자리 정책 만병통치약 아니다

             
청년 세대를 둘러싼 흙수저, 금수저 논쟁이 한창이다. 사회 구조의 변화로 더는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사실에 사람들이 공감하며 수저 논쟁이 일어났다. 하지만, 여전히 일부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하면 된다', '아직 살 만한 세상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접근은 사회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환해버리면서 문제의 해결을 어렵게 한다.

'부장 인턴'을 아시나요?

통계청이 발표한 청년 실업률은 지난 4월 10.9%였다. 이는 실업자 기준을 변경해 통계를 작성한 1996년 이후 가장 높은 수치이며, 외환 위기 때보다 높다. 올해는 3개월 연속 10%대를 유지해 청년들이 최악의 고용대란을 겪고 있다. 

청년 일자리 해결을 위해 정부는 처음에 대기업에 의존했다. 실업률을 낮출 수 있다면 인턴 형식으로라도 채용을 장려했다. 그 결과 기존에는 정규직 취업자에게 회사 현장 교육(OJT) 과정으로 충분했던 일들이 이젠 인턴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지고 있다. 이는 사회적으로 청년이 갈 수 있는 좋은 일자리가 점차 줄어들고 대신 3개월 내외 단기 알바가 늘어가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견습생(인턴) 경험이 취업에 도움이 될 것 이라는 것도 기대에 불과했다. '부장 인턴(정규직 채용에 거듭 실패하고 인턴만 전전하는 취업 준비생)'이란 신조어가 생겨날 정도로 일자리의 질만 떨어지는 폐해가 생겨났다. 인턴 채용은 결국 3개월이 지나면 쉽게 해고될 수 있는 잠재적 실업자만 양산했다. 결국, 정규직을 채용해야 할 자리에 인턴을 활용하고 이어 잠재적인 대량 해고를 묵인해 주는 특혜만 기업들에 베푼 꼴이다. 

정부는 그제야 기업에 의존하는 것만으로는 해결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대학으로 눈을 돌린다. '산업 연계 교육 활성화 선도 대학' 사업이라 불리는 프라임 사업을 추진했다. 사회와 산업의 수요에 맞게 정원을 조정하겠다며 대학에 2016년부터 3년간 총 6000억 원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이 사업의 지원을 받는 대학들은 인문·예체능계를 줄이고 이공계를 늘려야 한다. 이 과정에서 무리한 학과 개편으로 대학 교육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상아탑으로서의 대학의 기능은 마비되고 직업 훈련소가 된다는 비난을 받는 실정이다. 대입을 준비하는 수험생들마저 지망학과의 갑작스런 인원 축소 혹은 폐과로 큰 혼란을 겪고 있다. 

이외에도 정부는 '산학 협력 선도 대학 육성 사업'이라 불리는 LINC 사업(Leaders in Industry-university Cooperation)을 선보였다. 창업 및 구직 관련 교육을 강화하고 창업과 고용에 성과를 낼 수 있는 사업을 대학 교육 과정에 포함하는 대학에 지원금을 주는 제도이다. 하지만 이 사업도 열정페이의 온상으로 좋은 일자리 창출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관련 기사 : "연 2천억 쏟아부은 LINC…열정페이 온상 전락")

▲ 2014년 12월 18일 청와대에서 제6차 청년위원회 회의를 연 박근혜 대통령. ⓒ청와대


창업 지원 프로그램의 수혜자는 누구? 

일자리 어려움을 창업으로 극복하려는 창업 지원 프로그램 예산도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이다. 정부 기관도 고용노동부, 중소기업청, 문화체육관광부 등으로 확대되어 이제는 웬만한 정부의 부처들이 창업 관련 기금을 하나 이상씩 운영한다. 

이러한 창업 지원 프로그램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산업화 시대의 기업 성장을 장려하던 정책과 목적이 다르다. 대부분의 창업 교육들에서 출구전략으로 기업 상장보다는 대기업과 인수합병(M&A)을 추천한다. 많은 창업 지원 사업들을 보면 그 영역에서 사업을 벌이는 대기업과 공동으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식의 운영을 통해 대기업은 좋은 아이디어를 쉽게 발굴할 수 있다. 약간의 돈을 지원하고 사업이 기틀을 잡아 성공 가능성을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을 때, 기업을 사들인다. 지분 투자의 형식으로 경영권에 간섭하거나 M&A의 형식으로 아예 통째로 인수한 후 잠시 높은 직책을 주었다가 퇴사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하여 아이템만 취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사업의 리스크를 창업자에게 전가하면서 어느 정도 성장의 가능성이 확인된 아이템만 취하면 되기 때문에, 대기업의 입장에서는 기존에 진행하던 신규 사업을 시작하는 방식보다 더 업그레이드 된 투자와 리스크 상쇄 방식이다. 이는 새로운 성장 동력을 발견해가는 과정에서 수반되는 리스크를 개인에게 전가하는 방식인데도, 국가와 사회는 개인의 창업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다. 

또한 대부분의 경우, 지원금은 '최대'란 수식어를 붙여 공고되지만 실제는 대부분 공고 금액의 절반 정도만 지원된다. 결국 예상했던 금액의 절반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해야하고, 이마저도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대표자 (때로는 팀원까지) 급여로는 쓸 수 없다. 이는 사업 참여자의 생활비는 어딘가에서 현금을 끌어와 따로 조달해야 함을 의미한다. 창업 아이템과 생계 유지를 위한 알바 사이의 불안한 동거는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는 예쁜 포장지에 쌓여 현실의 부조리함을 외면하게 하는 희망 고문이 된다. 적게는 6개월에서 많게는 10년 이상을 사업에 전념해 성공할 경우 대부분은 다른 기업에 팔아넘기고, 실패할 경우 개인이 리스크를 떠안게 된다. 

흙수저 논쟁이든, 청년 창업의 문제이든 이는 사회 구조 변화로 생겨나는 문제들을 교묘히 개인의 문제로 둔갑시키는 효과가 있다. 이미 철 지난 산업화 시대의 '노력하면 누구에게나 기회가 오던 세상'의 이데올로기도 한 몫 한다. 청년 창업 역시 "네가 해보고 싶은 일을 남의 돈 써가며 할 수 있는 게 어디냐.", "성공만 하면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는 것에 남의 돈 써가면서 하니 좋은 거 아니냐."라는 말로 포장하며 성공의 문턱에 오른 몇몇의 사례로 그들이 만들어 놓은 논리에 정당성을 부여 한다. 

청년 일자리를 위한 전략이 필요하다 

물론 개인이 일자리를 구하는 데 국가와 사회가 관심을 가지고 지원하는 것은 권장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 소상공인의 90%가 3년 안에 문을 닫는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창업 장려가 결코 순수한 의도로만 읽히지 않는다. 우리는 언론을 통해 접하는 몇 개 사례의 성공을 부러워하거나 실패한 사례를 개인의 무능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지양해야 한다.

제조업에서 서비스업 중심으로 넘어가는 사회 구조의 변화로 일자리 현실은 더욱 어려워질 듯하다. 그렇다면 창업의 장밋빛 미래만을 홍보하며 너도 나도 불나방처럼 창업에 뛰어들게 하기 보다는, 실패를 경험하게 될 90%의 사람들이 사회적 낙오자가 되지 않도록 사회 안전망을 함께 구축하는 것도 필요하다. 

또한 현실적으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혁신적 사고와 기업가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창업이 청년 일자리 정책의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창업 교육을 활성화시키고, 우선 사업자 등록을 내고 보는 정책은 바람직하지 않다. 창업 의지와 역량에 대하여 꼼꼼한 점검을 거쳐 실제 창업에 적합한 사람들에게 지원이 제대로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기업가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장을 열 수 있고, 또한 청년 일자리의 미래 전략을 함께 개척하는 역할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이세희 내만복 운영위원은 주식회사 '문화공감공존' 대표입니다.)



이기심으로 헌혈을 설명할 수 있나

경제학은 인간의 이기심을 전제한다. 하지만 경제학자 최정규 교수(사진)는 인간이 남을 돕는 일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이타적인 종이라고 본다. 최근 관련 이론서 <협력하는 종>을 번역·출간하기도 했다.

천관율 기자  |  yul@sisain.co.kr   [456호] 승인 2016.06.14  22:31:13


현대 경제학은 인간의 이기심을 전제하지 않고는 첫 줄도 쓸 수 없는 학문이다. 인간은 이기적이기 때문에 인센티브에 반응하고, 가격 신호가 작동하며, 경제학은 그 원리를 이해하고 기술할 수 있다. 인간의 ‘선호’는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라고 경제학은 가정한다.

최정규 교수(경북대 경제통상학부)는 중요한 예외다. 그는 인간이 반드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지 않으며, 인간은 남을 돕는 일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이타적인 종이라고도 본다. 그는 이런 성향을 ‘타인을 고려하는 선호’라고 부른다. 최 교수의 무기는 낭만주의가 아니라 수학과 진화론과 게임 이론이다. 그는 왜 우리가 그저 경제적 동물(‘호모 이코노미쿠스’)만은 아닌지, 우리는 어떻게 해서 이타적인 종이 되었는지, 협력이라는 성취를 이뤄낸 동력이 무엇인지를 수학적 모델링과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증명한다.

그가 이 분야의 연구 결과를 대중 눈높이에 맞춰 쓴 <이타적 인간의 출현>은 10년 넘게 사랑받는 스테디셀러다. 지난 5월에는 스승인 새뮤얼 볼스와 허버트 긴티스의 본격 이론서 <협력하는 종>을 번역해 내놓았다. 이 분야에서 손꼽히는 석학인 볼스 교수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 책을 구성하는 학술적 내용 자체가 한국산이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나와 최정규 교수의 공동 작업으로 이뤄졌다”라고 썼다. 5월23일에 최정규 교수를 만났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조남진</font></div> 
ⓒ시사IN 조남진

인간이 협력하는 종이라는 게 왜 신기한가?
이기적인 사람과 이타적인 사람이 만나서 거래를 한다 치자. 당연히 이기적인 사람이 이득을 볼 것이다. 그런데 이타적인 사람은 손해를 보는데도 멸종하지 않았고 여전히 존재한다. 이유가 뭘까. 진화라는 압력 때문에 자기 이득을 극대화하는 개체가 더 많은 자손을 낳고 사회에 확산될 가능성이 더 클 텐데, 왜 남을 위하는 행동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걸까?

생물학이나 게임 이론에서는 그 이유를 설명하는 이론이 여럿 있던데.
맞다. 예를 들면 혈연끼리는 이타적 행동이 진화할 수 있다. 나와 유전자를 공유하는 친척을 돕는 것은 친척들이 자손을 퍼뜨릴 확률을 높인다. 이건 결과적으로 내 유전자의 일부를 퍼뜨리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기 때문에 진화의 압력을 통과할 수 있다. ‘반복상호성’이라는 것도 있다.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서 우리는 상대가 어떤 선택을 하든 배신(이기적 행동)이 최적 전략이다. 하지만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여러 번 반복한다면, 배신을 반복하느니 협력(이타적 행동)을 하는 게 서로 이득이라는 전략이 진화할 수 있다. 일상용어로 바꾸면, 앞으로 계속 봐야 할 사이라면 다음을 생각해서라도 이기적으로 구는 것보다는 협력하는 편이 나으니까, 이럴 땐 협력이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면 해명이 된 것 아닌가?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그런 이유가 다라면, 혈연관계가 없거나 다시 만날 가능성이 없는 사이에서는 협력이 아예 등장하지 않아야 한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헌혈을 예로 들자. 헌혈은 혈연관계도 아니고 아예 누군지도 모르는, 그래서 반복적으로 마주칠 수가 없는 사람을 돕는 행위다. 아니 뭐, 빵이나 영화표 받으려고, 아니면 헌혈증 받아서 필요한 가족에게 주려고 헌혈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겠지만, 보통 헌혈을 하는 데 이익을 추구하는 동기가 없다. 그냥 누군지도 모르는 남을 돕는 게 좋아서 하는 사람이 많다. 이런 건 혈연 선택이나 반복상호성으로 설명이 안 된다.

 최정규 교수가 쓰고 옮긴 <이타적 인간의 출현>과 <협력하는 종>. 
최정규 교수가 쓰고 옮긴 <이타적 인간의 출현>과 <협력하는 종>.

협력에도 종류가 있다는 말로 들린다.
가장 정확한 구분은 ‘타인을 고려하는 선호’와 ‘자신을 고려하는 선호’인 것 같다. 자신을 고려하는 선호란 협력이라는 게 결국 돌고 돌아 자기에게도 이득이 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타인을 고려하는 선호란 다른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 그 자체를 자기의 선호에 반영하는 것이다. 자기를 고려하는 선호만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실험이나 연구 결과가 속속 나왔다. 우리는 그저 ‘호모 이코노미쿠스’만은 아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돕는 종이다.

우리는 왜 그런 종으로 진화했나?
수학적으로 모델링을 해보면, 인류가 진화하던 환경에서 집단 간 경쟁이 대단히 강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집단 간 경쟁이 강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집단 내부에서 배신을 제어하고 협력을 잘 이루어낸 집단이 경쟁에서 더 많이 이겼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협력하는 성향이 살아남아 퍼지게 된다.

‘집단 선택’은 학계에서 논란이 많은 개념이다. 인간에게 가능했다고 보는 이유는?
우선 인간이 제일 잔인하다. 집단끼리 경쟁하면서 다른 집단을 말살시켜버리는 종은 인간이 사실상 유일하다. 이러면 집단 간 경쟁이 워낙 거세서 집단 내부의 경쟁 압력보다 강해질 수 있다. 인간만이 던지는 무기를 사용하는데, 이러면 힘센 개인보다 집단의 능력이 훨씬 커진다. 근접 전투 말고 1대 다수로 싸울 수가 있으니까. 또 우리는 언어를 사용한다. 언어는 집단 내의 이기적인 개인을 집단이 비난하고 처벌할 수 있도록 해준다. 어떻게 보면 인간이 유난히 잔인한 종이어서 유난히 협력하는 종이 된 셈이다.

이런 이타적인 협력자는 문화권을 가리지 않고 존재하나?
협력자는 어느 문화권에나 있다. 비율은 다르다. 예를 들어 고래사냥처럼 주요 경제활동이 커다란 협력이 요구되는 경우 협력자 비율도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두 번째로, 시장체제와 통합된 정도가 높을수록 더 협력적이다. 시장의 원리는 이기심이고 협력은 이타심이니 둘이 상극이라고 생각할 텐데, 사실 그렇지 않다. 시장이 잘 작동하려면 사람들 사이에 기본적인 덕성이 있어야 한다. 우리 사이에 신뢰가 전혀 없다고 해보자. 계약서가 대체 얼마나 두꺼워져야 할까? 하다못해 저 놈이 내 돈을 들고 튀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가 필요한 거다.

협력이 있어야 시장도 작동한다?
이런 논의의 가장 바닥에 깔려 있는 관점은, 시장이 근본적으로 인간 행동의 모든 영역을 계량하고 규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가격 신호로 규율할 수 있나? 불가능하다. 그 빈 공간을 메우는 것이 인간의 협력 행동이다. 예를 들어 기업 내에서 기업가와 노동자의 관계를 규정하는 노동계약이라는 것이 어설프기 그지없다. 8시간 노동하고, 시간당 얼마씩 주고 이런 것은 계약서에 나오는데, 내가 얼마만큼 열심히 할까와 같은 중요한 부분은 정작 계약을 할 수도 없다.

그 ‘빈 공간’은 시장화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곳인가, 기술적으로 아직 시장화하지 못했을 뿐 언젠가는 시장화할 수 있다는 건가?
나는 전자라고 본다. 후자라고 보는 분들도 있다. 노동계약 문제에서 20세기 초에 등장했던 테일러주의가 그렇다. 노동자의 노동을 아주 잘게 세분하고 시간 단위를 측정해서 과업을 쪼개어주면, ‘얼마나 열심히 일할 것인가’를 협력과 신뢰 없이도 해결할 수 있다는 접근법이다. 한때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결국 작동하지 않았다. 기술이 발달해 인간 행동을 남김없이 계량하고 인센티브를 더 촘촘하게 설계하면 결국은 ‘시장의 빈 공간’도 사라질 것이라 믿는 분들이 있는데, 그건 300년도 더 된 생각이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게 기술적 한계가 아니라 본질적 한계라고 보면서 300년씩 싸우고 있는 거고(웃음).

 <div align=right><font color=blue>ⓒ나무위키</font></div>테일러주의는 노동을 세분화하고 과업을 쪼개어주면 협력과 신뢰 없이도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접근법이었다. 위는 영화 <모던 타임스>의 한 장면. 
ⓒ나무위키
테일러주의는 노동을 세분화하고 과업을 쪼개어주면 협력과 신뢰 없이도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접근법이었다. 위는 영화 <모던 타임스>의 한 장면.

근본적으로 시장의 빈 공간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가?
예를 들어 기자의 연봉체계를 100% 성과급으로 한다고 하자. 그러면 성과지표에 잡히는 기사만 열심히 생산한다. 장기간 탐사하고 추적하는 취재는 인센티브가 없다. 교수의 성과를 평가할 때 논문 발표 숫자로 하니까 혁신적인 연구가 안 나온다. 논문 수를 채우려면 안전한 연구만 해야 하니까. 시장이 작동하지 않는 영역을 시장으로 움직이려 할수록 이런 이상한 결론들이 툭툭 나온다. 시장이 완전하지 않다는 건 ‘기능적으로 아직 완전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완전한 정보를 가질 수 없는 영역이 늘 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다.

인센티브를 더 촘촘히 설계하면 해결된다는 접근법은 착각이다?
더 큰 문제도 있다. 그런 식으로 인센티브를 집어넣으면, 그게 거꾸로 사람의 행동을 바꾼다. 이스라엘의 한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늦게 데려가는 부모에게 벌금을 물린 적이 있다. 그러자 늦게 데려가는 부모가 줄기는커녕 더 늘어났다. 벌금제 이전에는 지각이 미안하고 수치스러운 일이었던 반면, 벌금제가 생기자 돈을 내면 지각을 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 생각해버린다. 늦게 와도 미안해하지 않는다. 타인에 대한 관심·배려, 이른바 도덕 감정이라고 부르는 부분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오랫동안 공들이고 불확실성과 싸워서라도 해야 할 취재나 연구가 있는데, 그건 기자의 본분, 또 연구자의 본분에 해당하는 것인데 이런 본분의 영역에 인센티브를 집어넣으면 그때부터는 이들이 좋은 기사, 훌륭한 연구를 더 이상 추구하지 않는다. ‘협력하는 인간’을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대체해버린다. 모든 부분이 계량화될 수 있으며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문제인 것 같다.

정책 설계자의 관점에서, 이를테면 연구비를 누구에게 얼마만큼 지급해야 하는가를 결정하려면 계량화가 필요할 텐데?
지금 제도 설계는 말하자면 최고를 찾아내 지원하겠다는 얘긴데, 결정적으로 무엇이 최고인지 정보가 불완전하다. 예를 들어 창조경제가 국가 의제인데, 뭐가 진정한 혁신인지 그야말로 파괴적인 혁신일지 등장하기 전에 미리 알 수 있나? 혁신은 정의상 장기적·근본적 변화를 불러오는 것인데, 당장 몇 년간 계량이 되는 결과물로 평가하겠다는 게 난센스다. 애플도 아이폰을 내놓을 때까지 숱한 ‘삽질’을 했다.

계량에 의존하지 않을 대안이 있을까?
제도를 짠다고 하면 ‘미니멈 컨트롤’이 대안이 될 수 있다. 뭐가 최고일지는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면, 뭐가 나쁜 건지는 알 수 있지 않나? 최고의 기자가 어떤 건지는 미리 알 수 없지만, 1년 동안 하나도 안 썼다고 하면 적어도 그건 아니라고 알 수 있으니, 이런 식으로 최소한의 기준은 찾아낼 수 있다. 이건 인간의 협력 성향을 신뢰하는 접근법이자 겸손한 접근법이다. 인간이 미니멈 기준만 딱 채우고 멈추는 ‘수익 극대화 기계’가 아니라고 믿는 것이고, 뭐가 최고일지는 미리 알 수 없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고전적인 문제가 무임승차다. 최소 요구량만 충족하고 빠질 무임승차자는 어떻게 하나?
‘이타적 처벌’이라는 개념이 있다. 자기 비용을 들여서라도 무임승차자를 처벌하는 건데, 그게 생각보다 현실에서 많이 작동한다. 보통 약속에 늦는다고 벌금을 내거나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리는 시간을 지키려 한다. 상대가 한마디씩이라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미시적인 것도 일종의 처벌로 작동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단계, 아주 비공식적인 레벨이나 미시적인 차원에서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이타적 처벌이 작동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굴러가는 것이다. 노사관계에서도 누가 나를 보지 않으면 땡땡이치고, 전부 이런 식이라면 기업은 애초에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뢰와 협력을 바탕으로 한 비시장적인 거래가 기본으로 깔려 있지 않으면 시장도 굴러가지 않는다.

경제학의 대전제는 “인간은 인센티브에 반응한다”는 것이다. 협력 연구는 이 대전제를 보완하자는 건가, 아예 대체하자는 건가?
어려운 질문이다. 거래의 성격에 따라 다를 텐데, 컴퓨터를 산다고 하면 정보를 거의 완전하게 얻을 수 있다. 무게·성능·가격… 이 경우에는 정말 최소한의 신뢰만 있으면 되니까, 모든 거래가 이렇다면 최소한의 협력만으로도 세상은 굴러갈 수 있다. 정육점은 그거보다는 어렵다. 고기 거래에는 무게와 등급만으로 다 알 수 없는 정보가 필요하다. 그래서 좀 더 많은 신뢰가 필요하고 단골이 생긴다. 노동계약에서 ‘최선을 다한 1시간’은 ‘좋은 고기’보다 더 정보가 부족한 거래다. 노동자의 참여가 기업의 생산성에도 기여할 수 있는 이유다.

관련 연구를 진행 중인가?
인간을 ‘호모 이코노미쿠스’로 이해하는 관념이 어떤 식으로 형성되어 어떻게 근대 이론에서 중심 지위를 차지했는지 사상사적 검토를 해보고 있다. 이기심이라는 게 예전에는 부정되다가, 참을 수 있는 게 됐다가, 이제는 찬양받는 게 되어버리는, 이런 변화가 언제 왜 나타나는지를 추적하려는 논문도 꽤 있다. 근대적 인간의 한 전형으로 ‘호모 이코노미쿠스’와 시민적 덕성과 같은 관념은 접목될 수 있을까? 이런 것을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