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제사의 비밀(제사의 진실,거짓) - 인간의 근원 (자식과 부모의 영적관계)

일취월장7 2016. 6. 11. 11:28

[스크랩] 제사의 비밀(제사의 진실,거짓)|          

삶 배우기 | 조회 300 |추천 0 |2016.06.10. 22:22 http://cafe.daum.net/kseriforum/9Q8k/31651 

출처 :어두운세상에길은있는가..책을 사랑하는 모임


제사의 비밀 계절은 어김없이 오고 또 다시 정월 초하루가 코앞에 다가와 고향을 찾는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될 것이다. 인륜을 중시하는 유교전통에 의해 우리 민족이 조상을 공경하는 마음은 세계 제일인 듯 하다. 명절날 고향으로 밀려가는 인파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이며 봉분을 비롯한 제사 등 장례문화는 엄중한 격식아래 큰 부담과 정성을 들여 이루어져 장엄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인륜을 공경하는 유교속에 숨어있는 어둠으로 인해

조상을 공경하고자 하는 제사(차례)가 조상을 복되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불행에 빠뜨리는 일이 벌어지고 있기에

제사속에 깃들어 있는 숨은 비밀들을 밝혀 내여

세상사람들의 삶을 밝게 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논어 선진편에 보면 제자가 공자에게 영혼 섬기는 법(제사)에 대해 묻는 구절이 나온다. 이에 대해 공자는

『산자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죽은 영혼을 섬길 수 있느냐?』하고

우회적으로 대답하였고 또 죽음에 대해 물었을 때

『삶을 다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 하고 반어적으로 대답하였다. 그는 단지 산자를 대하듯 망자에게 대해서도 정성스레 공경하는 것이 仁을 지닌 인간의 바른도리라고 하여 인간적이며 현실적인 시각으로 삶의 길에 접근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당시 사회에서는 망자를 바로 물건으로 취급해 내버리는 경우도 있었고 너무 슬픔에 잠겨 몇 달이 지나도 장사를 지내지 아니하고 같이 지내는 경우 등이 있어서 공자와 같은 지혜있는 자가 산자와 죽은자와의 관계를 분명히 정립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 필요에 의해 공자의 장례에 대한 의견제시가 있었고 제사의 형식도 그러한 인간적인 입장에서 정립되었던 것이다. 공자는 제사에 대해 그속에 숨은 비밀을 알면

세상의 모든 이치를 알게 된다고 이야기하였으나

스스로는 제사의 비밀에 대해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았다. 유교가 제사를 중시하고 있는 종교이면서 제사의 의미와 비밀에 대해서는 깊이있는 언급이 없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 바로 종교로서의 유교의 한계를 엿볼 수 있다. 이에 비해 성자의 깨달음에 의해

우주의 실상과 생명의 이치에 대한 분명한 고찰이 있는 불교와 기독교에서는

죽음의 문제에 대한 분명한 해석이 있었고

인간의 올바른 삶의 길에 대한 가르침도 제시되고 있다. 생명의 길은 모두 서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사후의 세상과 영적 현상을 알게 되면 제사의 의미도 알게 되고 참다운 제사의 방법과 효과에 대해서도 저절로 알게 된다.

그런 견지에서 제사의 진실에 대해 아는 것은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식이 아닐 수 없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제사는 죽은 영혼을 위로하는 위로연이며 크게 말하자면 죽은 영혼의 한을 풀어주고자 하는 산자의 살풀이인 것이다. 생명의 이치에서 볼 때 죽은자는 이승을 떠나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모든 생명은 이생을 다하면 더 나은 후생을 위해 자신의 영혼을 저승으로 떠나가도록 해야지 인연이 끝난 이생에 계속 머물러서는 안된다. 그러나 요즘같은 어두운 세상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욕망과 집착에 짓눌려 살기 때문에

한과 미련에 빠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죽은 뒤에도 평안하게 윤회하지 못하고

이승에서 계속 떠도는 유혼이 되는 경우가 많다. 올바른 삶을 통해 마음의 평안을 얻은 자는 죽는 즉시 깊은 잠에 빠져 윤회에 들거나 높은 신계로 올라가게 되므로 이승에 존재하지 않게 되어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게 된다.

부처와 예수가 제사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이유에는

바로 이런 깊은 뜻이 숨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숨은 진실을 모르고

단순한 현실적 효용과 인간적 논리에 의해서 생의 윤리를 전개한 유교에서는

죽은 자도 산자와 같이 공경하는 입장에서 제사를 지니게 되었고

그것이 점차 형식적으로 전개되어,

산자는 제사에 짓눌리고 죽은자는 불행속에 빠지게 하는 결과를 빚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와 같은 경우에는 제사가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생활방식이 됨으로 인해 사람들의 생명과 영혼에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왜냐하면 제사가 생활의 중요한 일부분이 됨으로서 죽은 자들은

이승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자신들이 살아있을 때 망자에게 제사를 지냈듯이

후손들의 곁에 머물면서 제사를 받아 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생명의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며 영혼 그 자신에게도 매우 불행한 일이다. 문제가 심각한 것은 영혼이 이승에 머무는 것이 단순한 머무는 정도가 아니라 죽은 영혼에게는 엄청난 고통과 불행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영혼들은 이미 몸을 가지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승의 환경이 너무나 가혹하게 다가오게 된다. 몸의 보호막이 없는 영혼들은 무제한의 의식의 자유속에 있기 때문에

그 불안한 의식체들은 자연환경의 변화에 의해 무제한의 환상과 고통을 받게 되며

또한 유계의 나름대로의 존재양식에 의해 갖가지 불안과 공포가 형상화되어

괴물과 공포와 고통에 휩싸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지옥도라고 하는 것으로 지옥이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떠나지 못하고 맴도는 영혼들이 이승속에서 겪게 되는 영적환상인 것이다.

그결과 지옥의 고통에 시달린 영혼들은 피폐하고 고갈되어 좋은 후생을

결코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영혼들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불행한 후생의 길로 가는 것은

진리를 찾지 아니하고 인간이 만든 무지와 관습에 따라 함부로 인생을 살아온

어리석은 중생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그러나 제사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제사는 죽은 자를 위로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억울하거나 한을 가진 사람들을 달래 주는데는 매우 요긴한 방법이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어둡고 한이 많고 고통스런 세상에서는 더욱 제사가 필요하며 우리나라와 같이 제사를 삶의 필수적인 것으로 여기는 관습이 있는 민족에게는 더 더욱 그러하다. 일단 이승을 떠도는 유혼이 된 영혼에게는 제사만큼 위안이 되는 것이 없다. 떠도는 유혼에게 제사를 지내면 고달팠던 고통의 상태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위안을 얻고 자신의 삶을 돌아 볼 기회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영혼들은 과거 자신이 좋아하던 음식을 차려놓으면 그 음식을 의식으로 접하는 것으로 먹은 것과 같은 효과를 가진다. 신이나 영혼들은 의식만으로 욕망을 충족하는 생존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좋은 제사는 좋은 음식이 아니라 바로

그들의 영혼을 달래주며 그들이 좋은 후생을 맞이하도록

바른 영혼의 길을 가르쳐 주는 것에 있다. 그리고 제사를 지내는데 있어서 전해져 내려오는 관습 중 하나가

제사가 끝나면 지방을 불사르는 것인데 만약 불붙은

지방이 허공으로 올라가면 영혼이 감응했다 하여 사람들은 지방이 허공으로 올라가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이한 현상은 나타나지 않는 것이 좋다. 영혼이 응답하는 것보다 응답하지 않는 것이 영혼에게 좋은 현상이기 때문이다. 영혼이 응답한다는 것은 곧 그 영혼이 이승을 떠돌아 다니고 있다는 증거이며 고통속을 헤메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제사가 생명의 이치에 맞지 않다고 해서 제사를 지내던 사람이

갑자기 제사를 지내지 않을 경우

그 이치를 모르는 영혼들은 매우 섭섭해 하며

산자에게 악감을 품고 이상한 현상을 일으킬 수가 있다. 이러한 경우 갑자기 제사를 치우면 안되며 마치 산자에게 이야기 하듯이

자연스러운 마음으로 제사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생명의 길을 일러주고

일정한 기간을 두면서 점차 줄이겠다고 말하고 제사를 점차 줄여 나가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나쁜 영과의 접촉이 있을 때 활용해도 된다. 영과의 접촉에 의해 집안에 우환이 생길 경우 영을 생각하면서 정성껏 젯상을 보아 이웃을 부르는 듯한 마음으로 영을 초빙하여 영이 오해하고 있는 일을 해명하고 생명의 길에 대해 말해 주어 더 이상 구천에 헤메지 않도록 설득해야 한다. 그리하여 영과의 화해가 이루어지면 자기 마음속에 그러한 느낌이 오게 되어 있다. 이리하여 영과의 화해가 이루어지면 제사가 효과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제사는 작은 영적 오해에서 비롯된 일들을 처리하는 것에만 효과있는 것으로 삶의 근본문제를 해결하거나 깊은 원한을 품은 영혼들을 달랠 수는 없다. 철천지 원수로 깊은 한을 품고 있는 원귀들은 달랜다고 해서 한을 풀지 않을 것이며

잘못된 삶으로 인해 영혼이 망쳐져 버린 유혼들을 제사를 지낸다고 해서

좋은 후생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은 평소에 좋은 삶으로 자신의 영혼을 가꾸어야 하며 남에게 한을 짓지 않도록 하고 스스로도 한을 품지 않도록 하여 마음을 맑고 가벼이 지니는 지혜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제사를 지내지 않으므로 생명의 이치에서 보면 유교보다 훨씬 합리적이다.

죽은 자는 신의 곁으로 가고자 의식하기 때문에

이승에 대한 집착을 보다 쉽게 잊어 버릴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에도 잘못된 가르침이 번져

이승을 떠도는 영혼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광신적인 믿음에 의해 죽어서도 기독교를 세상 끝까지 전해야 한다는 집착과 예수재림과 함께 이루어 진다는 부활의 의미에 대한 잘못된 교리 때문이다.

이러한 교리는 예수가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그제자들이 자기의 생각대로 지어낸 논리에 불과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영향은 너무 커서 오늘날 교회에 가면

이세상에서 부활하고자 하는 욕심을 지닌 영혼들이

계속 교회당에 머물러 있으면서 예수가 재림하여

자신을 육신 그대로 불러주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기독교를 세상에 퍼뜨리고자 하는 집착에 맺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고

기이한 심령현상 등을 일으키며 헤메고 있는 영혼들을 많이 볼수 있다.

참으로 어리석은 관념의 노예짓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죽은자는 이생에서 할 일을 다했으니

다음생을 기다리는,오고 가는 우주의 진리에 순응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생명현상에 대한 고찰이 가장 깊은 불교에서도

같은 취지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고 있으나

이 종교 또한 부처님의 정법이 아닌 인간적인 욕망에 의해 변질된 교리가

세상을 병들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천도제를 통해 영혼을 구원한다는 행위와 "나무관세음보살과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염불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교리이다. 삶의 길은 엄연한 우주의 이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평소 그사람이 살았던 행위의 결과가 그마음에 쌓여 영혼이 업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행위 이외에 그 사람의 업보를 좌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설혹 신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바꿀 수가 없다. 만약 기도나 제사를 통해 구원이 가능하다면 농사를 짓지 않고도 기도만 하면 풍년을 들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니 세상에 그런일이 벌어진다면 하루 아침에 세상은 망하고 말 것이다. 만약 천도제를 지내고 기도를 한다고 해서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돈많고 권력있는 자들은 모두 천당을 갈 수 있다는 결론이 된다. 절이나 교회에 헌금이나 시주를 많이 하고 좋은 장례에 멋있는 굿을 한다면 모두 천당에 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변의 엄중한 진리가 지배하는 이법의 세계에는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장례를 화장으로 하고 있는데

이것은 생명의 이치에서 보면 매우 좋은 방법이다.

화장을 통해 이승속에 자신이 머물곳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은

영혼에게 있어서 빨리 이승을 포기하고

후생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지름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즘 일어나고 있는 화장장려운동은 사회를 건강하게 하고

정신을 맑고 가벼이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출처 : 진실의 근원  



[스크랩] 인간의 근원 (자식과 부모의 영적관계)|【자유게시판】

삶 배우기 | 조회 186 |추천 0 |2016.06.16. 22:12 http://cafe.daum.net/kseriforum/9Q8k/31694 


 

인간의 근본

 

 

사람들은 아들을 낳고 좋아하고, 딸을 낳으면 아들을 꼭 갖고 싶어서 아들을 낳을때까지 계속 아이를 갖는다.

마치 사내아이가 자신의 대를 이어주는 것 같이 생각하고 아들이 있어야만 태어나 자신의 의무를 다한 것 같이 생각한다.

그러나 자식은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이며, 자신의 영혼속에서 오고 가는 것이지, 부모의 영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부모와 자식은 단지 현세의 인연으로 만났을 뿐이다.


어떤 사람이 성자에게 물었다.

『나의 근원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왔습니까? 』그러자 성자가 말하였다.

『그러면 대답하기 전에 먼저 그대에게 묻겠다. 콩은 어디서 나는가?』

『예! 콩은 콩씨에서 납니다.』

『그렇다. 콩은 콩에서 부터 나는 것이다. 그러나 콩에게 물으면 콩은 자신이 밭에서 났다고 대답할 것이다.

자신의 발을 밭에다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콩의 근원은 밭이 아니라 바로 과거의 콩이 자신의 근원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들도 자신의 근원이 부모인 줄 안다. 아니다.  

사람도 모든 생명있는 것들의 보편적 법칙에 의하여

자신의 씨앗인 과거의 영혼에 의해 현재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부모는 자신의 영혼이 뿌리박고 현생에 태어나기 위해 인연을 지은 밭인 것이다.

 

이것은 생명있는 것들의 피할 수 없는 법칙으로 이세상에는

갑자기 펑 나타났다 갑자기 사라지는 그러한 일이란 있을 수 없다. 인간의 생명도 마찬가지 원리인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식이 자기의 것이라고 애착하고 자식을 통해 자신의 한을 풀려고 한다.


자식은 자신의 생명의 굴레를 돌고 있는, 부모와 전혀 다른 별개의 귀한 우주주체들이다.

 

현세의 인연에 의해 부모와 자식으로 만났지만 전생에는 그애가 나의 부모였는지도 모른다.

모든 생명들은 끝없는 윤회와 인연을 통하여 자신의 생명을 완성하기 위하여 끝없이 돌고 있는 것이다.

 

똑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식들 모두가 다 다른 이유는

과거에 각자가 삶을 통하여 겪었던 경험과 품성과 욕망과 자질이 다 달랐기 때문이다.

 

좋은 품종이 좋은 열매를 낳듯이 올바른 이치에 따른 삶을 살았던 영혼은

이생에서도 정신이 맑아 좋은 인연을 얻고, 어둡고 욕망에 찌든 삶을 살았던 영혼은

이생에서도 인내하지 못하고 무지하며 욕망을 억제하지 못해 자신의 삶을 망치는 운명을 지니게 된다.

이것은 자연의 원리에 의해 수학의 공식처럼 설명될 수 있는 불변의 법칙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와 깊은 인연있는 자에게 정으로 아무리 잘해준다고 한들 그것은 잘 해 주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길은, 정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바른 삶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른 삶은, 자기 주변의 인연을 올바르게 만들고 자신이 짊어진 의무를 다하며

세상을 위하여 필요한 인간이 되어 자신과 세상에 가치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진정한 교육은 세상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올바른 인간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지

자식의 덕을 보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익을 보고자 키우는 자식은 바른 인간이 되지 못하고 세상을 위한 큰 인물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자식에게도 해가 된다.

 

좋은 인연을 짓고 바른 인간을 키우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행하여야 할 가장 소중한 일이기 때문에

남의 자식이라고 해서 소홀히 해서는 안되며 나의 자식이라고 정으로 지나치게 집착해서는 안된다.


세상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별다른 일을 발견하지 못한 자는

자식을 올바르게 키우는 일에 정성을 쏟는 일도 괜잖으나 자식을 올바르게 키우기 위해서는

나와 남 구별없이 올바른 이치로 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명심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세상을 위해 일해야 할 인연이 있는 자가

자기 가족이나 정에 얽메여 자신이 해야 할 도리나 의무를 못한다면

그것 또한 바른 이치에 맞지 아니하며 자신과 세상에 대하여 죄를 짓는 일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인생을 통하여 각자가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다.

 

직업을 통하여 가족을 통하여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면서

각자의 업을 짓고 자신의 영혼을 정화시켜가면서 자기인생의 농사를 지어가는 과정이다.

 

아무도 자신의 영혼을 대신 농사지어 줄 수가 없다.

그것은 부모도 할 수 없고 자식도 할 수 없고 부부간에도 서로 해 줄 수가 없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거나, '진리에 의지하고 자신에 의지하라'고 하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족이나 인연이 깊은 자를 자신의 삶의 일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상대가 자신의 삶을 대신 살아줄 것처럼 생각하고 집착한다.

 

하지만 각자의 인연에 따라 각자의 삶을 살아갈 뿐, 결코 상대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한생을 마치고 떠나갈 때는 결국 일생동안 자기자신이 지은 영혼을 자기 혼자 지고가야 하는 것이다.

 

올바른 삶의 길을 모르고, 정과 집착에 의해 인생을 산자는

상대에게 기대했던 보답을 받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원망스러워하며 인생을 마친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인연에 따른 자신의 도리와 밝은 이치를 다할 뿐, 더 이상 바라거나 집착해서는 안된다.  

이것만이 상대나 자기에게 큰 복이 되며, 스스로에게는 한과 원망을 남기지 않는 길이다.

 

세상의 밝음과 선업만을 위하여 살아간 자는 그의 마음이 항상 빛으로 가득 차 어둠과 구김살이 없으며,

하늘을 우러러 당당하고 생사를 넘어 두려움이 없는 대자유를 얻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삶을 통하여 지향해야 될 인간의 길이다.

 

출처 : 진실의 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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