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질문을 이어가야 한다
‘위안부’를 다루는 방식을 보면 한국 언론의 정신분열상이 읽힌다. 한국인들은 일본에 책임을 물을 수단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강제연행’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것이 패착이다.
2월24일,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영화 <귀향>이 개봉됐다. 제작비가 없어서 14년을 표류했던 이 영화는 간난 끝에 관객의 열렬한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한겨레> 2월25일자에 나온 조정래 감독과 남은주 기자의 인터뷰는 나란히 비판받아야 한다. 조 감독은 이 인터뷰에서 “수십만의 여성들이 끌려가 살아 돌아온 사람은 200명뿐이었다”라고 말했다. ‘위안부’의 숫자를 정확히 확정한 연구가 아직 없는 터에, 감독이라고 해서 “수십만”이라고 못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살아 돌아온 사람은 200명뿐이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영화사가 배포한 팸플릿에는 “20만명의 소녀들이 끌려갔고 238명만이 돌아왔다”라고 적혀 있으나, 거짓말이기는 마찬가지다.
저 숫자는 1990년 11월에 발족한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 위안부 신고 전화를 개설한 1991년 8월 이후, 대한민국 정부에 ‘등록’된 피해자 숫자에 불과하다. 당장 북한에만 해도 1998년 기준으로 260여 명의 위안부가 신고되어 있고, 일본과 중국에도 등록되지 않은 생존자가 있다. 238명이라는 숫자 속에는 1991년 이전에 국내외에서 작고했거나, 알고도 신고하지 않은 위안부가 빠져 있다. 조정래 감독이 <귀향>을 들고 전 세계 영화제를 다니며 저런 거짓말을 계속 하고 다닌 결과 일본 우익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면, 그 책임은 취재원의 삿된 허풍을 고스란히 받아 실으면서 아무런 반론도 피력하지 못한 기자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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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영 그림 | ||
<한겨레> 4월11일자 2면에 나온 ‘한겨레 그림판’(권철범 그림)과 12면에 실린 기사 “열일곱에 끌려간 위안부 할머니 ‘생의 마지막 귀향’”은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한국 언론의 정신분열상을 보여준다. 4월13일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12·28 합의를 심판하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한겨레 그림판’은 장총을 찬 일본군 헌병 둘에게 강제로 끌려가는 치마저고리의 소녀를 한쪽에 그려놓았다. 그러나 12면에 나오는 하상숙 할머니(88세. 중국에 살고 있는 한국 국적의 위안부 피해자)의 귀향 기사는 그림이 묘사한 것과 완전 딴판이다. “하 할머니의 고향은 충남 서산이다. 그는 열일곱의 나이에 돈을 벌게 해준다는 말에 속아 중국에 위안부로 끌려갔다.” 일본군 헌병에 의한 강제연행과 조선인 포주가 저지른 취업 사기로 찢긴 위안부 상(像)에 대한 <한겨레>의 견해는 무엇인가? 그대로 놔둬도 손해 볼 것이 없으니, 아무 상관없다는 식의 태도가 어떻게 언론의 사명이 될 수 있는가?
이타가키 류타와 김부자가 함께 엮은 <‘위안부’ 문제와 식민지 지배 책임>(삶창, 2016)이 출간되고 난 4월12일, <한겨레>는 김부자 도쿄 외국어대학 교수와 인터뷰를 했다. 한승동 기자와 김부자는 꽤 큰 지면이 주어졌던 이 인터뷰의 절반 분량을 박유하 교수가 <제국의 위안부>에서 주장했던 ‘위안부 평균연령 25세’설을 반박하는 데 허비했다. 박유하의 ‘25세’설은 위안부가 미군의 포로가 되었던 1945년 당시의 기준이며 피해자들이 연행당했던 때를 기준으로 하면 ‘평균 21.15세’가 맞고, 그 가운데 절반 이상이 10대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피해자가 속출한 당시의 한국 농촌에서 출생신고를 제때에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는 것은 양쪽 모두에게 고려되지 않았다. 이것보다 심각한 것은 박유하나 김부자나 조사 대상자가 고작 20~87명이었다는 것이다. 위안부는 무려 20만명이나 된다는데, 이런 표본 미달의 연구를 공들여 소개하는 것으로 위안부 문제의 얽힌 실타래가 풀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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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안부’ 문제와 식민지 지배 책임>이타가키 류타·김부자 엮음 배영미 외 옮김 삶창 펴냄 | ||
‘조선인 공권력’의 자리에 앉혀놓은 ‘포주’
김부자는 책에 실은 자신의 글에서 “‘위안부’ 제도가 일본군 장병의 성병 대책을 위한 정책”이었다고 주장한다. 김부자가 틀린 것도 옳은 것도 아닌 저런 주장을 앞세우는 이유는 뻔하다. 저 주장은 성병을 방지하고자 했기 때문에 성 경험이 전무한 조선인 10대 소녀가 과녁이 되었다는 결론으로 박유하를 재차 공박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군이 위안부 제도를 운영한 제1의 목적은 성병 방지가 아니다.
일본군은 중국 침략을 본격화한 1937년부터 점령지와 전선에 위안소를 설치했다. <한겨레>가 ‘위안부 문제의 최고 권위자’로 치켜세우는 요시미 요시아키가 쓴 <일본군 군대위안부>(소화, 1998)는 일본군이 위안소를 만들게 된 네 가지 이유 가운데 ①“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군 위안소 설치가 군인에 의한 강간 사건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명토 박았다. 나머지 세 가지는 ②성병 예방 ③병사에게 위안 제공 ④군의 기밀 유지와 보안 방지다. 일본군이 병사들의 강간을 방지하려고 했던 까닭은 현지 부녀자를 강간하면 아버지·오빠·남동생·아들이 죽기 살기로 저항군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점령지를 안정적으로 간수할 수 없다는 고민에서 나온 것이 위안소다.
요시미 요시아키의 논리대로라면, 일본군 헌병이 조선에서 위안부 강제연행을 저지르는 것은 중국에서 저지하고자 했던 현지인의 저항을 조선 땅에 옮겨 오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일본은 전선을 두 개 만드는 셈이 된다. 그럴 바에는 중국에서 하던 악행을 계속 하는 게 낫다. 일본인들은 아시아·태평양 전쟁을 자신의 힘으로 치른 것으로 오해하지만, 조선과 같이 든든한 병참기지가 없었다면 엄두도 못 냈을 일이다. 일본이 내선일체를 그토록 강조한 것은 그런 필요에서였고, 조선반도에는 총칼에 의한 위안부 강제연행이 필요 없을 만큼 강력한 총독부가 있었다. 박유하를 희화화하려는 사람들만이 도지사→군수→면장→이장으로 이어지는 ‘조선인 공권력’의 자리에 ‘조선인 포주’를 앉혀놓는다.
<귀향>보다 일주일 앞서 <동주>가 개봉되었다. 윤동주는 왜 헌병에게 끌려간 소녀를 시로 쓰지 않았나? 시인 한용운과 이상화는? 소설가 채만식과 염상섭은? 작품 발표는 못하더라도 일기나 비망록 정도는 남겨놓을 수 있었지 않는가? 이광수와 서정주는 적게는 2만~3만명, 많게는 20만명이나 되는 조선인 처녀들이 총칼에 끌려가는 것을 뻔히 알고서도 친일파가 되었더란 말인가? 해방 직후 아무도 이 좋은 주제와 소재를 취하지 않았던 진짜 원인은 대체 무엇일까? 이 화제가 인기 없다는 것을 안다. 나처럼 편향적이라면 더욱 외면받으리라는 것도 잘 안다. 질문이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아무도 하지 않는 질문을 해서 어떤 사태의 이해를 첨예하고 풍부히 할 수 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질문을 이어가야 한다. 한국인들은 일본을 압박하면서 책임을 물을 수단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강제연행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것이 패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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