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에게 욕을 하고 떠난 아이들
학생이 교사에게 폭언을 퍼부은 사건이 지난해에 유난히 많이 일어났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폭력에 대해 전문적인 정책 대안이 필요하다.
| [438호] 승인 2016.02.15 09:02:24 |
어느 날 한 남자 선생님이 상담실로 뛰어올라 와 다급하게 말했다.
“선생님, 좀 어떻게 해주세요!”
는 멋대로 수업시간에 늦게 들어가거나 학교 규칙을 아랑곳하지 않고 행동해 교내 상담실에서 심리상담 중인 학생이었다. 그날도 아이는 종 치고 나서 한참 있다가 수업시간에 늦게 들어갔다. 담당교사가 아이를 복도에 잠시 세워놓았다가 늦은 이유를 물으려 나가 보니 이번에는 자기 맘대로 또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화가 난 교사가 아이를 야단치는 중에 급기야 학생이 교사에게 욕을 하고 덤볐다. 교무실 근처에서 교사와 학생이 거의 ‘맞짱’을 뜨다시피 한 상황이 벌어지자 말리던 교사 중 한 분이 달려온 것이다.
학교 규정에는 교직원에게 불손하게 대한 학생에 대해 최대 ‘사회봉사’까지의 벌을 내릴 수 있게 되어 있지만 는 이미 그전에도 많은 사건·사고로 징계를 받았고 또다시 선도위원회가 열리면 받을 수 있는 벌이 ‘권고 전학’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담당교사도 그런 극단적인 상황으로 아이를 몰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결국 ‘용서하겠다’고 묻어버렸다. 하지만 이후에도 아이는 복장 불량을 지적한 또 다른 남교사한테 대들면서 “선생님이 먼저 내 멱살을 잡았으니 경찰에 신고할 테다”라고 고함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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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성 그림 |
뿐 아니다. 무단결석을 해놓고는 가짜 약봉지를 가지고 와서 거짓말을 하다가 담임교사에게 야단을 맞자 교사에게 욕을 한 또 다른 아이도 있었다. 학생이 교사에게 욕설이나 폭언을 퍼부은 사건이 지난해에 유난히 많이 일어났다.
사실 이전에는 언론에서 교사와 학생 사이의 드잡이가 일어났다는 기사를 읽으면 교사가 학생을 함부로 대한 건 아닐까, 생각했음을 고백한다. 우리 학교가 비교적 평화로웠던 것은 대체로 교사들이 학생들을 존중하는 가운데 서로 다정다감한 분위기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라고, 지나치게 자만했던 것은 아닌지 스스로 반성도 한다.
현재 규정 안에서 학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학교를 휘저은 아이에 대해 학교는 어떤 조처를 취할 수 있을까? 교사에게 욕설을 하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교내 상담실에서 그림책 읽기 및 미술치료 상담, 외부 기관 연계 상담을 해왔고 교장·교감이 학부모를 대상으로 상담 및 인성교육 연수를 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취해왔던 아이들이다. 사안에 따라서는 교내 봉사 등의 징계도 받았던지라 현재의 규정 안에서 학교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는 상황이다. 이에 교사들은 이들을 전학 보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교육청이 나서서 전학을 설득했지만 학부모들은 되레 언성을 높이면서 절대 전학을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방학 직전 마지못해 두 아이가 전학을 가고 나서야 일단락되었지만 수업시간에 그들의 빈자리를 보면 마음이 씁쓸하다. 못난 짓을 하고 나서 조금 지나면 자기 행동을 후회하던 녀석들의 숙인 고개도 떠오르고 아이들의 손을 잡아주던 여러 선생님들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다. 하지만 다른 학생들이 “쟤들은 아무리 심한 행동을 해도 어차피 잘리지도 않는 거 아니냐”라고 수군거리던 모습도 같이 떠오른다.
혹자는 부모가 집에서 인성교육을 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회구조적 원인으로 인해 많은 가정들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데 학부모나 학생 개인의 인성에만 호소해서 해결할 수 있을까. 그러면 누군가는 학교는 도대체 무엇을 하는 거냐고 일갈하지만 학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일반적인 수준의 상담 혹은 외부 상담기관과 연계해주는 일밖에 없다. 전학도 피해를 입은 이를 위한 미봉책에 불과할 뿐이다. 교사에 대해서든 같은 학생끼리든, 학교에서 일어나는 폭력에 대해서 이제는 좀 더 전문적이고 정책적인 대안을 내놓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무서운 예측이지만 이런 일은 앞으로 점점 더 많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지난해가 답답한 게 아니라 앞으로가 암담하다.
송곳 같은 인간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이름도, 빛도 없이 나선 사람들 덕분에 세계는 인간의 자유를 넓히고 불평등을 줄여나가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이름과 행적을 기억하는 것으로 역사는 새싹을 틔운다.
인간 사회가, 다스리는 자와 그 통치를 받는 사람들로 나뉜 이래 양자 간에 갈등이 없던 시기는 찾아보기 어려울 거야. 역사 속에서 어질고 현명한 통치자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현저히 적었고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람들은 불만을 표출했지.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면 무기를 들고 일어서서 지배자들에게 맞서기도 했어. 국사나 세계사 교과서에 수도 없이 적혀 있는 ‘의 난’이 바로 그것들이야.
그런데 난이란 것이 사람들의 불만이 크다고 자동적으로 일어나지는 않아. 반드시 누군가 먼저 부당한 상황을 깨치고 ‘이렇게 살 수는 없다’ ‘내가 앞설 테니 따르시오’라고 외쳐야 해. 난이 끝나면 자신은 물론 가족까지도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던 이른바 ‘주동자’들이지. 누가 자청해서 그런 위험한 일을 할까 싶지만 인류 역사의 기이한 점은 “가장 앞에서, 가장 날카로웠다가 가장 먼저 부서져버리고 마는 송곳 같은 인간”(웹툰 <송곳> 중에서)들이 끊임없이 나타난다는 사실이란다.
목포 앞바다의 많은 섬 가운데 암태도라는 곳이 있어. 목포에서 25㎞ 정도 떨어져 있는데, 토지가 비옥해서 인구가 한때 1만명을 넘었다는 큰 섬이야. 일제강점기에 한때 “사람다운 사람은 다 암태에 산다”라는 말이 돌 만큼, 이 섬 주민들의 ‘사람됨’을 높이 평가해준 적이 있었다. 암태 사람들이 ‘사람다운 사람’으로 일컬어진 유래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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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1924년 ‘암태도 소작 쟁의’ 사건이 벌어졌다. |
1923~1924년에 진행된 ‘암태도 소작 쟁의’ 사건이야. 암태도에도 지주들은 어김없이 있었고 대표적인 이는 문재철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암태도에만 약 140정보(1정보=3000평)의 농지를 보유했고 저 멀리 강원도 철원과 충청도 당진에도 토지를 가진 대지주였어. 문재철은 농민들이 생산한 소출의 70~80%를 소작료로 거둬들이고 있었다. 그래도 암태 사람들은 참아야 했지. 왜? 지주 어른이 무서우니까. 혹시 눈 밖에 나서 그나마 부쳐 먹던 땅을 빼앗기면, 오도 가도 못하고 굶어 죽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암태도 사람들 사이에서도 송곳 같은 사람이 나타났다. 서태석이라는 사람이지.
서태석은 20대의 이른 나이에 8년 동안이나 암태면장을 했다. 그러나 일제의 앞잡이 노릇에 열성이던 여느 ‘면서기’가 아니었어. 1920년 3·1운동 1주년 행사를 준비하다가 감옥에 가기도 했으니까. 1년 동안의 옥살이를 한 뒤 돌아온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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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작농들을 이끈 이는 암태면장 서태석. |
향은 그에게 또 다른 저항의 마당이 된다. 지주와 마름(지주의 앞잡이이자 하수인을 이르는 말이야)의 횡포가 도저히 참아줄 수 없을 만큼 심했던 거야. 서태석은 자기 소유의 땅이 있던 자작농이었다. 그러나 결국 자신보다 못한 처지인, 지주의 땅을 부쳐 먹던 소작농들을 위해 선봉에 나서게 된단다. “소작료는 4할(40%)로! 소작료 쌀 운반비는 지주가 내라!”
섬사람들은 1924년 3월27일 암태면 동와촌리에서 ‘지주 규탄 면민대회’를 연다. 지주와 정면으로 맞서게 된 거지. “분쟁이 생기면 소작료를 내지 않고 파작해버립시다! 결의를 어기는 사람하고는 모든 것을 끊어버립시다!” 그 와중에 면민들은 지주 문재철 부친의 덕을 기린다는 송덕비를 부숴버려. 이 문제로 소작민과 지주 측 청년들이 충돌하면서, 결국 소작인 13명이 목포로 끌려가 감옥에 갇힌단다.
차라리 법원 앞마당에서 굶어 죽겠다
그러자 온 섬이 들고일어났어. 청년회고 부인회고 할 것 없이 1000명 이상의 섬사람들이 뭍으로 나와 ‘아사동맹’(단식농성)에 들어간 거야. 이때 불렀다는 소작인의 노래. “뭉치어라 작인들아, 뭉치어라 우리의 부르짖음 하늘이 안다. 뼈 빠지게 일하여도 살 수가 없거든, 놀고먹는 지주들은 누구의 덕인가.”
암태도 사람들은 간부를 석방하지 않으면 그대로 법정 안에서 또는 법원 앞마당에서 굶어 죽자는 결의를 보였어. 남녀노소가 정말로 밥 한 술 넘기지 않고 “대지를 요로 삼고 창공을 이불 삼아” 버텼다. 그 중심에 서태석이 있었다.
일제 경찰도 혼비백산했다. 암태도 도민들의 의로운 투쟁에 식민지 조선 전국이 들썩였어.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이 되는 김병로를 비롯한 시국 사건 전문 변호사들이 다투어 변호를 자청했고 나라 밖에서도 성금이 쏟아졌다. 일이 심상찮다고 생각한 일본 경찰이 부랴부랴 중재에 나서 소작회와 문재철은 다음과 같은 합의에 서명하게 돼. “소작료는 4할로 인하하고, 구속자는 쌍방이 고소를 취하하며, 지주 아버지의 송덕비석은 소작회 부담으로 복구한다.” 암태도 사람들, 즉 ‘사람다운 사람들’의 승리였다. 서태석의 승리이기도 했고.
그러나 서태석은 이후 일본 경찰로부터 집중적 감시를 받는다. 결국 농민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당한 끝에 몸과 정신이 다 망가져버려. 정신분열증까지 얻었고 대소변을 동네 꼬마에게 부탁해 내가게 했다니,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겠지. 1943년 광복을 두 해 앞둔 어느 날, 그는 논두렁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소작료 인하를 부르짖으며 소작농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던 그날의 기억을 잊지 못해서였을까? 벼 포기를 굳게 움켜쥐고 있었다. 자기 땅을 가진 농민이었지만 남의 땅 부쳐 먹는 사람들의 권리를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은 그렇게 슬프게 생을 마쳤어.
며칠 전 아빠랑 동갑내기 정도인 한 아저씨가 고시텔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는 뉴스가 있었다. 그분은 창원 롯데백화점에서 시설 관리를 맡았던 용역업체 노동조합의 지회장이었어. 그분은 회사의 부당한 해고에 맞서 백화점 앞에서 넉 달 동안 천막을 치고 농성하며 싸웠고 해고자 10명 중 8명을 순차적으로 복직시킨다는 합의에 도달해. 그런데 지회장의 이름은 복직자 명단에서 빠져 있었지. “언제 끝날지 모르는 투쟁을 계속해 조합원들 고통이 계속되는 것보다는 노사가 조금씩 양보하는 것이 낫다”라면서 다른 사람의 복직을 조건으로 자신은 회사를 떠나기로 한 거야.
가장 날카롭게 튀어나와 회사의 두터운 고집에 구멍을 냈던 송곳 같은 지회장 아저씨가 회사를 떠나 막노동으로 삶을 이어가다가 고시텔 방에서 외롭게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아저씨의 희생으로 직장을 다시 얻은 사람들은 그 죽음을 알았을까? 슬퍼해주었을까? 벌써 잊지는 않았을까? 그러지 않았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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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도민일보 창원 롯데백화점 비정규직 지회 이상구 지회장(오른쪽)은 다른 사람의 복직을 조건으로 회사를 떠났다. 이씨는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다가 외롭게 세상을 떠났다. |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세계 역사에서 인간의 자유를 넓히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불평등을 줄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것이 어진 임금의 선정(善政)이나 인자한 귀족들의 양보라고 하기는 어려워. 자신의 몸이 부서져가며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남을 위해 나설 줄 알았던 사람들이야말로 그런 존재였다. 솔직히 아빠는 너에게 그런 삶을 살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기억하라는 당부는 꼭 하고 싶어. 그들의 이름과 행적을 기억하는 것으로 역사는 새싹을 틔우는 법이니까.
기억해라, 암태도의 서태석, 롯데백화점 창원점 비정규직 노조 이상구 지회장. 암태도 소작쟁의 당시 서태석이 불렀고 지금은 이상구 지회장도 함께 부르고 있을지도 모를 노래 가사 한 자락을 들려줄게. “오냐 동무야 가자 가자 또 가보자. 무쇠 팔뚝 돌 팔뚝에 풀린 힘을 다시 넣어 칼산 넘고 칼물 건너 쉬지 말고 또 가보자. 이 팔과 다리 부서져 일점육일지골 다 없어질 때까지.”(장안대학교 박천우 교수의 ‘100년 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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