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문화, 예술

끝났다 뉘 말하는가

일취월장7 2016. 1. 19. 12:32

 

끝났다 뉘 말하는가

일본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는 최소 8만명, 최대 20만명(중국은 41만명 주장)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정부에 등록된 피해자는 238명이며, 2016년 1월 기준 46명이 생존해 있다. <시사IN>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발간한 위안부 피해자 76명 증언집을 토대로 9명의 삶을 추렸다. 10대 소녀 시절부터 위안소 생활, 해방 이후의 삶, 일본에 사죄와 배상을 외치는 오늘까지를 일대기로 엮었다. 지금도 진행 중인 그들의 역사적 경험을 돌아본다.

  조회수 : 7,152  |  김연희·이상원 기자  |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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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5호] 승인 2016.01.18  23:59:10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신선영</font></div>‘12·28 위안부 합의’가 발표된 이후 대학생들이 소녀상을 지키기 위한 밤샘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12·28 위안부 합의’가 발표된 이후 대학생들이 소녀상을 지키기 위한 밤샘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끌려가다 / 학교 간다고 통통 뛰었는데

이옥선 할머니(89세·끌려갈 당시 15세)

1927년 음력 10월10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공부가 하고 싶어서 입학철이면 울면서 부모를 졸랐다. “한 날은 어머니가 ‘너 학교를 가지 못해 자꾸 그러는데 저기 어떤 집에서 자식이 없어 너를 수양딸로 데리고 가서 학교 보내 공부를 시켜주겠단다’ 그래 갖고 내가 얼마나 좋아요. 통통 뛰면서 학교 보내준다니 가겠다 했거든.”

그러나 할머니가 보내진 곳은 조그만 우동집이었다. 할머니는 꿈에 그리던 공부 대신 식모살이를 시작했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땋아주곤 했던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단발로 똑 잘라버렸다. 할머니는 아까워서 울었다고 했다. 열네 살 적 일이다. 손님 술상에 들여보내려는 걸 뿌리치니 울산에 있는 술집으로 팔아버렸다. 거기서도 허드렛일을 했다.

심부름을 다녀오는 길, 트럭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우리가 쪼끄만 게 남자들 힘을 감당해? 트럭에 들어 올려노니까 그저 그대로 가는 거지. 내려놔달라고 막 소리치며 야단하니까 입을 틀어막아. 위에 우리 같은 여자들 있는데 몇이나 됐는지도 몰라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트럭에 실려 기차역으로 갔다. 기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중국 길림성 도문(지린성 투먼)에 있는 비행장이었다. 일본군은 도망가지 못하도록 전깃줄을 쳐놓고 비행장 확장 공사를 시켰다.

얼마 뒤 일본군이 이동을 명령했다. “거기서 일본 놈들이 가자 그래. 이 사람들이 가자 하니까, 우리를 집에 보내주겠는가 보다 하고 좋다고 모두 나오는 거야. 나오니까 서쪽에 있다고 서시장이라고 그래. 커다란 집이 있는데, 양철집인데. 간판이 있어. 거 위안부로 데리고 갔잖아. 우리는 집에 간다고 데리고 가니까 좋다고 따라 나온 게….”

 

  <div align=right><font color=blue>ⓒREUTERS</font></div>‘위안부’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가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 집’에서 젊은 시절 사진을 들고 있다.  
ⓒREUTERS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가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 집’에서 젊은 시절 사진을 들고 있다.

 

김화자 할머니(가명·90세·당시 16세)

언니는 시집을 일찍 갔다. 일본 군인들에게 붙들려 간다는 소문이 돌자 서둘러 결혼을 시켰다. 7남매 중 김화자 할머니가 둘째였다. 밑으로는 남동생만 다섯이었다.

‘안경쟁이 김씨’ 하면 안강(경주시 안강읍)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일본 사람 앞잡이였다. 가마니를 짜고 있는데 안경쟁이 김씨가 일본 사람과 함께 왔다. “헤따이상(일본 군인) 옷 하는 데 미싱도 배우고 하면 돈벌이도 좋고, 가마이 짜는 것보다 낫다고 그카데. 돈으로는 부쳐주냐고 물었지. ‘돈 부쳐주지. 달달이 월급 받으면 집으로 부쳐준다’고 그라데.” 할머니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전장이 커지는데 여자들도 나서서 도와야 한다고 했다. “전부 일본 사람 권리이고, 조선 사람은 똥태 망태라.” 일본인이 조선인 한 명을 죽여도 말도 못하던 때였다. 안경쟁이 김씨를 따라 부산에 가서 ‘아사마마루’라는 배를 탔다. 아사마마루는 할머니를 미싱 공장 대신 타이완에 있는 위안소 ‘가게츠’로 실어 날랐다.

할머니는 어머니가 챙겨준 요깃거리를 기억했다. “봄이지 싶다, 갈 때가. 쌀도 없는데 공출 다 줘뿔고 없는데 백찜(백설기)을 요만큼하게 한 서너 덩어리 되지. 그래 쪄가지고 (엄마가) 가다가 배고프면 먹으라고. 또 까만 콩을 삶아가지고 설탕하고 섞어서 줬는데 이틀 밤 잤는가, 하룻밤 잤는가 묵을라카이 약간 쉬었더라. 이게 좀 쉬었다 싶더라. 그거는 생각나지.”

위안소 / 태워지는 처녀들

고 강무자 할머니(가명·당시 13세)

남태평양 팔라우 군도의 코롤 섬에서 할머니는 ‘마이코(舞子)’라고 불렸다. 원주민들은 입술이 빨갛고 눈만 반들반들했다. 여자들 7~8명과 같이 고사포 부대로 배정받았다. 1층짜리 야자나무 집에 방마다 커튼이 쳐져 있었다. 그 집을 ‘가네모토 빵빵가루(가창·街娼)’라고 불렀다. 가네모토는 관리자로 있었던 장교 이름이다.

혼자 누울 크기의 방에는 담요와 모기장, 경대와 세숫대야가 있었다. 가루분과 휴지, 연고, 삿쿠(콘돔)는 부대에서 배급해주었다. 옷을 홀딱 벗겨놓더니 장교들이 달려들었다. 군인들은 할머니가 죽거나 말거나 올라왔다. 반항을 하고 욕을 하면 심하게 때려서 이가 부러질 지경이었다. 귀국할 때는 이가 거의 없었다. 사이판에는 여자가 없어서 팔라우에 있는 위안부들이 10명씩 통통배를 타고 나갔다. 그곳에서는 나무 아래에 커튼을 치고 일을 치렀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정대협 제공</font></div>고 강무자 할머니는 남태평앙 팔라우 군도의 섬으로 끌려갔다. 위는 젊은 시절 사진.  
ⓒ정대협 제공
고 강무자 할머니는 남태평앙 팔라우 군도의 섬으로 끌려갔다. 위는 젊은 시절 사진.

 

군인들은 표를 가져왔다. 소속된 부대 이름이 적혀 있고 부대장 도장이 찍혀 있었다. 시간까지 찍혀 나왔다. 처음에는 1시간으로 나왔는데 전쟁이 나고는 30분으로 줄었다. 졸병이 오면 3분이면 끝났다. 손님이 많으면 팬티도 입지 못했다. 그렇지만 화대는 단 1엔도 받지 못했다.

일주일에 한 번, 10명씩 교대로 코롤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다. 군의관과 위생병은 있었지만 간호사는 없었다. 매독·임질 같은 성병을 예방하기 위해 한 달에 두 번 606호 주사(살바르산 주사)를 놓았다. 불임 주사도 놓았다. 가끔 아주 힘들다고 하면 잠 오는 약을 하나씩 주었다.

팔라우에는 징용된 조선인 군인도 있었다. 조선인 군인들은 밤새 얘기하며 울다가 갔다. 몸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삿쿠를 쓴 것처럼 비벼서 물에 담근 다음 쓰레기통에 넣었다. 연고약도 짜고 쓴 것처럼 해서 버렸다. 봉급을 타서 아스피린을 사줬다. 약을 먹으면 다리가 아픈 줄 모르고 아래가 터지는 줄도 몰랐다.

강일출 할머니(88세·당시 15세)

“장질부사(장티푸스)가 들렸어. 전염병이고, 옛날에 한국에서도 그 병이 나면 동네 사람이 한 솥 다 죽어요.” 위안부로 2년을 보낸 중국 목단(무단)강 위안소에 장티푸스가 돌았다. 열이 40℃까지 치솟았다. 일본군은 장티푸스에 걸린 위안부들을 산속으로 끌고 갔다. “구더기를 파고 장재기를 놓고, 휘발유를 넣고 막 타지 뭐. 나는 제일 늦게 던지께니 위에 있었지.” 할머니는 그때 일을 ‘태워지는 처녀들’이라는 제목의 그림으로 그렸다.

인근에 주둔해 있던 독립군의 도움으로 할머니는 불구덩이에서 탈출했다. 알고 보니 위안소에서 일하던 조선인 군인 김씨가 독립군이었다. 구출이 되고도 며칠을 앓았다. 정신을 차리고 물어보니 김씨는 백두산으로 갔다고 했다. “그 사람이 나를 영 생각했어. 해방되면 우리 사는 데 상주 와서 살겠다고. 근데 그다음에는 못 만나봤다고. 내 속으로는 언제라도 만날 것 같아.”

 

  <div align=right><font color=blue>ⓒ나눔의 집 제공</font></div>강일출 할머니가 자신의 경험을 담아 그린 그림 ‘태워지는 처녀들’.  
ⓒ나눔의 집 제공
강일출 할머니가 자신의 경험을 담아 그린 그림 ‘태워지는 처녀들’.

 

해방 / 끝나지 않는 고통

고 이옥분 할머니(가명·납치 당시 11세·위안소 감금 당시 16세)

타이완 위안소에서 해방을 맞은 이옥분(가명) 할머니는 한동안 숨어 지냈다. 흥분한 타이완 사람들이 일본인과 조선인을 가리지 않고 때려서다. 근처에 있는 굴속에서 며칠 지냈다. 버티다 못해 굴 반대편을 향해 60리 정도 걸었다. 굴 바깥은 바다였다. 기적처럼 배 한 척이 나타났다. 할머니는 윗옷을 벗어 흔들었다. 미군 포로들을 귀국시키는 배였다.

배 안에는 조선 사람이 많았다. 고향에 간다는 기쁨에 사람들은 노래 경연대회를 열었다. 할머니의 차례가 되었는데, 아는 노래라곤 일본 노래밖에 없어서 주저했다. 사람들이 “일본 노래도 괜찮다”라고 말하자 할머니는 ‘독고타이(특공대) 노래’를 불렀다. 일본 군인들이 술을 먹고 때리며 가르친 노래다. 다른 위안부들도 울면서 따라 불렀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고국에 도착해서는 일본 노래를 부르지 말라”고 말했다. 2004년 사망할 때까지 할머니는 강제로 배운 일본 군가 51곡을 기억했다.

고 오오목 할머니(당시 16세)

오오목 할머니는 해방 뒤 얼굴에 검정 칠을 해야 했다. 두려웠다. 러시아인들이 젊은 여자를 잡아간다는 소문이 돌았다. 할머니를 비롯한 중국 남경(난징) 위안소의 조선인들은 거지 행세를 하고 고향으로 향했다. 잠시 묵었던 신의주 여관에서 여자를 찾는 남자 소리가 들린 적이 있다. 그날은 밤새 장롱 안에 숨어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딸을 보고 어머니는 놀라서 기절했다. 9년 동안 중국에 있었기에 처음에 조선말도 잘 알아듣지 못했다. 33살에 아이 다섯 딸린 남자와 결혼했으나, 원만치 못했다. 위안부 피해 후유증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식모가 낳은 아기를 데리고 집을 나와 자식 삼았다. 누에 치는 일을 하며 하루 2500원 정도 벌었다. 딸은 국민학교(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우산 공장에 가서 일했다. 할머니는 여생을 생활보호대상자로 살았다. 집세 걱정하지 않고 사는 것이 소원이었다. 1999년 78세로 사망했다.

 

   
 

 

고 전금화 할머니(당시 16세)

전금화 할머니는 서른세 살까지 호적이 없었다. 이름도 없었다. 딸을 ‘갓난이’라고 부르던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다. 일곱 살에 식모살이하던 집에서 받은 ‘수미코’라는 이름을 중국 흑하(헤이허) 위안소에서도 썼다.

19살 많은 남편은 오랫동안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다. “1·4 후퇴 때 이북에 두고 온 첫 아내를 다시 만날 수도 있다”라는 이유였다. 남편은 목수였는데 벌이가 시원찮았다. 전금화 할머니는 행상을 해서 가족을 부양했다. 할머니는 남편에게 자주 맞았다. 맞을 때마다 할머니는 “부모 없고 갈 데 없다고 무시하지 마”라고 소리쳤다.

서른세 살에 호적을 만들면서 스스로 이름을 지었다. ‘금화’라는 이름은 ‘거만’에서 나왔다. 수줍고 내성적이던 할머니는 어린 시절 남자들과 말을 섞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런 할머니에게 무뚝뚝하고 거만하다고 곧잘 놀렸다. 이름을 지으며 그때를 떠올렸다.

남편과 자식들은 할머니가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몰랐다. 스스로도, 자신이 갔던 곳의 이름이 ‘위안소’였다는 것을 모른 채 살았다. 텔레비전에서 다른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정대협에 신고하게 됐다.

할머니는 딸 하나와 가끔 연락했고, 아들들은 왕래가 거의 없었다. 죽기 전에 외손자를 안아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1994년 3월12일 할머니는 어두운 방 안에서 혼자 숨진 채, 이웃에게 발견됐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1994년 3월 용산역 앞에서 열린 전금화 할머니 영결식(위)에서 김학순 할머니가 추도사를 읽었다.  
ⓒ연합뉴스
1994년 3월 용산역 앞에서 열린 전금화 할머니 영결식(위)에서 김학순 할머니가 추도사를 읽었다.

 

진상 규명 / 투사가 된 할머니들

김복동 할머니(90세·당시 14세)

김복동 할머니는 열네 살부터 5년 동안 위안부로 살았다. 광둥·홍콩·싱가포르·인도네시아 등지로 끌려 다녔다. 해방 뒤 만난 남편이 죽고,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혼자 가게를 했다. 후유증으로 아이는 낳을 수 없었다.

1992년 1월 텔레비전에 김문숙 부산 정대협 이사장이 나왔다. 거기서 ‘정신대 신고를 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언니에게 의논을 하자 “조카들을 생각해서 제발 하지 말라”고 말했다. 며칠을 고민하다 결국 신고를 했다. 그 뒤로 언니는 할머니에게 발길을 끊었다. TV에 출연하게 되면서 조카들(작은아버지의 손자들)도 할머니가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들 역시 더는 왕래하지 않았다. 신고의 대가는 외로움이었다.

할머니는 좌절하지 않고 정대협 활동에 매진했다. 세계 곳곳을 돌며 위안부 피해를 증언했다. 1993년에는 빈에서 열린 유엔 세계인권대회에 참석했다. 1995년에는 전후 50년을 맞아 개최된 일본 전국 증언집회에 가서 발언했다. 1998년에는 미국 의회에 출석해, 일본 정부의 ‘위안부 문제 공식 사죄와 배상을 위한 결의안’에 대해 증언했다.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에 원고로 참석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나비기금’의 공동 창설자이다. 나비기금은 2012년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창설된 기금으로, 전시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위해 쓰인다. 길원옥 할머니와 함께 언젠가 일본 정부에게서 받을 법적 배상금을 걸었다. 기금은 이들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의 기부로 조성된다. 2012년 정대협은 나비기금으로 콩고의 한 피해자 단체를 지원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해 12월10일 김복동 할머니에게 ‘2015 대한민국 인권상 국민훈장’을 수여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신선영</font></div>1월6일 이용수 할머니가 24주년 수요집회에 참석해 최근 위안부 합의에 대해 규탄했다.  
ⓒ시사IN 신선영
1월6일 이용수 할머니가 24주년 수요집회에 참석해 최근 위안부 합의에 대해 규탄했다.

 

이용수 할머니(88세·당시 17세)

이용수 할머니는 지금도 겁이 많다. 타이완 위안소에 끌려간 이후부터다. 당시 열일곱 살이었던 할머니는 군인을 받지 않으려고 저항했다. 위안소 주인은 욕설을 내뱉으며 전기고문을 했다.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니 온몸이 축축했다. 그 뒤로 할머니는 항상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해방 뒤에는 혼자 살다가 1989년 일흔다섯 살의 할아버지와 결혼을 했다. 남자가 무서워 일부러 나이 많은 할아버지와 인연을 맺었다.

겁 많던 할머니는 정대협에 신고한 뒤 ‘투사’가 됐다. 수요집회에 가장 활발히 참여하는 할머니 중 한 사람이다. 첫 수요 집회 때 60대였던 할머니는 이제 아흔을 바라본다. 이용수 할머니는 1월6일 24주년 수요집회에도 참석했다. 1991년 위안부 피해를 공식적으로 처음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의 석상 옆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에 내가 해결하지 않으면 또다시 어린 학생들, 후손들에게 (피해가) 돌아가니까 후손들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않기 위해 해결하겠습니다. 내 나이 여든아홉입니다. 운동하기 딱 좋은 나이입니다.”

참고 문헌:<증언집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1, 2, 3>(정대협, 한국정신대연구회, 한울), <증언집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4>(정대협, 풀빛), <증언집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5>(정대협, 한국정신대연구소, 풀빛), <역사를 만드는 이야기 증언집 6> (정대협 부설 전쟁과여성인권센터, 여성과인권>

 

 

경로 이탈한 ‘막가파’ 외교의 결과

‘12·28 위안부 합의’의 후폭풍이 거세다. 그야말로 일본 프레임에 말려들었다. 윤병세 외교팀은 도대체 어떤 정책을 편 걸까? 노태우 정부부터 박근혜 정부까지 위안부 정책을 통사적으로 살펴보면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일본 보수파 인사들이 한국 정부의 위안부 정책을 비판할 때 자주 쓰는 프레임이 있다. ‘골대 이동론’이다. 축구 경기에 빗대, 정권에 따라 골대(위안부 정책)가 움직인다는 것이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은 ‘12·28 위안부 합의’ 직후 언론에 “이번 합의로 한국이 골대를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라고 평가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도 “한국 외교장관이 TV 카메라 앞에서 불가역적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한국이 움직여온 골대를 고정시킨다는 의미다”라고 말한 것으로 일본 언론이 전했다. 이번 합의에 삽입된 ‘최종적이고 불가역적 해결’이라는 문구는 일본 쪽 골대 이동론 프레임이 강하게 작용한 것이다.

 

한국 정부가 어떤 정책과 노선을 밟아왔기에 골대 이동론 프레임에 말려든 것일까? 청와대와 윤병세 외교팀은 도대체 어떤 정책을 편 것일까? 노태우 정부부터 박근혜 정부까지 위안부 정책을 통사적으로 살펴보면,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1991년 8월 고 김학순 할머니(위)가 생존자 중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증언했다.  
ⓒ연합뉴스
1991년 8월 고 김학순 할머니(위)가 생존자 중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증언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1990년 1월4일 윤정옥 이화여대 교수가 <한겨레신문>에 ‘정신대 발자취 취재기’를 연재하면서 공론화했고, 이듬해 8월14일 고 김학순 할머니가 공개 증언에 나서면서 한·일 간 외교 현안으로 떠올랐다. 당시만 해도 일본 정부는 군의 관여를 부정했다. 노태우 정부는 진상 규명과 일본의 ‘성의 있는 조치’를 요구했다. 성의 있는 조치에는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도 포함되었다. 정부 차원에서 정신대 문제 실무대책반도 꾸렸다. 1992년 7월31일 ‘일제하 군대위안부 실태조사 보고서’를 발표했다.

하지만 일본은 군의 관여를 시인하면서도 모집 과정에서 강제성을 입증할 만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버텼다. 또 ‘보상’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나오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는 조항을 근거로 종결되었다고 밝혔다. 정부 차원 보상과는 별도로 기금을 조성하는 아이디어가 제시되었다. 1965년 한·일 협정을 방패막이로 삼은 일본은 위안부 문제 초기부터 지금까지 똑같은 논리로 ‘골대’를 철벽 수비하고 있다. 한·일 양국 정부 차원에서 ‘성의 있는’ 진전은 없었다.

김영삼 정부 들어서도 평행선을 달렸다. 진상 규명, 성의 있는 조치를 요구하는 한국 정부와 강제성을 인정하지 않고 보상은 종결되었다는 일본 정부의 입장이 팽팽히 맞섰다. 1993년 3월13일 김영삼 정부는 결단을 내렸다. ‘도덕적 우위에 입각한 자구조치’를 전격 발표했다. 일본 정부에 금전적인 보상이나 배상을 더 이상 요구하지 않고, 한국 정부가 직접 피해자를 지원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대신 일본 정부에는 진상 규명과 제대로 된 역사 교육을 하라고 요구했다. 위안부 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꾼 것이다.

외교부 동북아국장을 역임한 조세영 동서대 특임교수는 YS의 패러다임 전환을 ‘자주적 조치 노선’이라고 정의했다. 조 교수는 1984년 외교통상부에 들어간 뒤 10여 년을 주일 대사관에서 근무한 ‘일본통’이다. 김영삼-김대중 정부 때 대통령 일본어 통역을 담당하기도 했다. 외교부 동북아 국장을 끝으로 2013년 외교부를 떠났다. 현장에서 뛴 실무 경험을 토대로, 그는 역대 한국 정부의 위안부 정책을 두 갈래 개념으로 정의했다. 그는 지난해 발표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외교적 대응 경위와 향후 대처 방향>이라는 논문과 저서 <한·일 관계 50년, 갈등과 협력의 발자취>에서 우리 정부의 위안부 정책을 ‘외교적 협상 노선’과 ‘자주적 조치 노선’으로 구분했다. 한·일 당국자 교섭으로 위안부 현안을 해결하려 했던 노태우 정부의 정책을 외교적 협상 노선이라고 한다면, 김영삼 정부의 위안부 정책을 자주적 조치 노선으로 구분한 것이다(26~27쪽 표 참조). 조 교수는 “김영삼 정부의 자주적 조치 노선은 한·일 양국이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성의 있는 조치를 각자 하자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 정부가 양보한 것은 아니다. 돈 문제는 언급하지 않는 대신 법적 책임이 일본에 있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었다”라고 설명했다.

YS의 선제적인 자주적 조치 노선 발표는 일본을 움직였다. 일본은 5개월 뒤인 1993년 8월4일 고노 담화를 발표했다.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은 “위안소 설치와 관리에 일본군이 관여했으며 일본군 위안부 모집과 이송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 이뤄졌다”라고 밝혔다. 일본은 후속 조치로 아시아여성기금 사업을 민간 주도로 시작했다. 국민 모금으로 조성한 기금과 함께 일본 총리의 사과 편지를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보냈다.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와 위안부 피해자들은 반발했다. 첫째, 민간 차원에서 주도한 아시아여성기금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위안부 문제가 종결되어 법적 책임이 없다는 일본 정부의 입장을 전제했기 때문이다. 둘째, 일본 총리의 사과 편지에 ‘도의적 책임’이라고만 언급되어 법적 책임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반대하자, 한국 정부도 아시아여성기금 집행에 대해 공식 반대했다. 김대중 정부는 1998년 4월21일 아시아여성기금에 맞불 성격으로 피해자에 대한 2차 지원을 했다(아시아여성기금은 61명의 한국 피해자에게 ‘위로금’과 ‘의료복지 지원금’을 지원한 뒤 2002년 5월 종료했다). 김대중 정부 역시 김영삼 정부의 자주적 조치 노선을 유지한 것이다. 자주적 조치 노선은 이후 노무현-이명박 정부 때까지 지속되었다. 김영삼 정부 이후 골대는 움직이지 않은 셈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박정희 대통령이 1965년 청와대에서 한·일 청구권 협정문에 서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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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이 1965년 청와대에서 한·일 청구권 협정문에 서명하고 있다.

법적 변수가 불거졌다. 2005년 1월과 8월 노무현 정부는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교섭 관련 문서를 전면 공개했다. 노무현 정부는 당시 이해찬 국무총리와 이용훈 변호사(2005년 9월 대법원장에 취임)를 대표로 한·일 회담 문서공개 민관공동위원회를 꾸렸다. 위원회는 문서 검토 결과 일본군 위안부, 사할린 동포, 원폭 피해자 등은 1965년 청구권 협정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나온 ‘완전하고 최종적인’ 해결 조항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한국 정부가 처음으로 공식화한 것이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도 김영삼 정부의 자주적 조치 노선을 따라, 일본에 배상 문제를 외교 현안으로 제기하지는 않았다. 법적 책임은 일본에 남아 있다고 밝혔지만, 정부 차원에서 법적 책임을 따지지 않는 모순이 발생했다. 정대협과 피해자 할머니들이 모순 상황을 법적으로 문제 삼았다.

헌법재판소 판결이 만든 ‘법적 트랙’

이용수 할머니를 비롯한 피해자 할머니 109명은 2006년 7월5일 한국 정부(외교통상부 장관)를 상대로 헌법재판소에 위헌 청구 소송을 냈다. 청구 취지는 “한·일 협정 해석과 실시에 따른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행위를 하지 않은 정부의 부작위(不作爲)는 할머니들의 재산권, 행복추구권, 외교적 보호권 등을 침해한다”라는 것이다. 한·일 청구권 협정 제3조에 따르면, 협정의 해석이나 실시에 따른 분쟁은 외교상의 경로를 통해 해결(1항)하거나, 외교적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국제 중재위원회에 회부(2항)하게 되어 있다.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는 1965년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되었다고 주장했고, 노무현 정부는 해결되지 않았다고 밝혔으니 해석상 분쟁이 발생한 셈이다. 한·일 청구권 협정 제3조가 규정한 절차를 밟아달라는 것이 할머니들의 핵심 주장이었다.

5년 뒤인 2011년 8월30일 헌법재판소는 할머니들 손을 들어주었다. 한·일 양국 간 해석의 분쟁이 있는데도, 외교 경로를 밟거나 중재위에 회부하지 않는 부작위는 할머니들의 기본권 침해라고 판시했다. 헌재는 한국 정부가 그동안의 피해자 지원과 별개로, 분쟁 발생 시 한·일 청구권 협정 3조에 규정된 절차를 따라야 한다고 분명하게 명시했다. 헌재는 “(중재위에서) 일본 정부에 대한 배상 청구가 부인되는 결론이 나올 위험성도 감수하겠다고 하면 정부는 피해자들의 의사를 고려해야 한다”라고 명시했다. 외교적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피해자들의 견해를 존중해 중재위에 회부하라는 뜻이다. 조세영 교수는 “헌재 판결로 이명박 정부 때 ‘정치 외교적 트랙’에서 ‘법적 트랙’으로 변화가 불가피했다”라고 설명했다. 외교적 협상 노선이나 자주적 조치 노선이 ‘정치 외교적 트랙’에 속한다면, 헌재 판결로 ‘법적 트랙’이 생긴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헌재 결정 직후인 2011년 9월 외교부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태스크포스’를 구성했다. 헌재 결정 취지대로 일본에 한·일 청구권 협정 제3조 1항에 근거해 외교 협의를 요청했다. 11월에도 재차 요구했다. 이때 협의는 ‘정치 외교적 트랙’에 속한 외교적 협상 노선이 아닌, 헌재 취지대로 법적 트랙을 밟는 차원이었다. 일본은 청구권 협정 제3조에 따른 협의에는 응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법적 트랙에 따른다면 남은 카드는 한·일 청구권 협정 제3조 2항에 따라 국제 중재위에 회부해야 했다. 당시 외교부 당국자 사이에서 중재위 회부 카드를 두고 찬반이 엇갈렸다. 헌재 결정에 따라 중재위에 회부해야 한다는 ‘원칙론’과 한·일 관계 악화가 우려된다는 ‘현실론’이 맞섰다. 이명박 정부는 현실론으로 기울었다. 법적 트랙과 별개로 물밑에서 정치 외교적 트랙을 슬그머니 밟았다. 2012년 10월 이동관 전 청와대 홍보수석-사이토 쓰요시 관방 부장관 사이에 비공식 물밑 협상이 벌어졌다. 투 트랙을 구사한 것이다. 하지만 협상은 결실을 맺지 못한 채 박근혜 정부로 넘어갔다.

박근혜 정부의 최장수 장관인 윤병세 외교팀은 2014년 4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 국장급 회담을 시작했다. 이 회담은 한·일 청구권 협약 제3조 1항에 해당하지 않는, 조 교수의 개념을 빌리면 정치 외교적 트랙 차원이었다. 중재위 카드 등 법적 트랙을 밟을 경우, 한·일 관계가 악화된다는 현실적 판단에 따른 것이다. 게다가 국장급 회담을 진행하면서 한국 정부는 일본에 ‘성의 있는 조치’를 요구했다. 다름 아닌 돈 문제를 다시 꺼낸 것이다. 조세영 교수는 “1993년 김영삼 정부 이래 유지된 ‘자주적 조치 노선’을 이탈해 ‘외교적 협상 노선’을 추구한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015년 11월2일 청와대를 방문해 방명록에 서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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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015년 11월2일 청와대를 방문해 방명록에 서명하고 있다.

한국 정부의 경로 이탈의 대가는 컸다. 일본 보수파 사이에 퍼진 ‘골대가 움직인다’는 프레임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고, ‘최종적이고 불가역적’ 해결 문구를 삽입한 것으로 귀결되었다. 박근혜 정부는 피해자와 국익 차원에서 최선의 합의였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국익이 무엇인지 2011년 헌재는 그 해법까지 결정문에 담았다. ‘정부는 (중재위 회부를 통해) 분쟁 해결 조치를 취하면 한·일 외교 관계의 불편을 초래한다고 주장하지만, 외교 행위 특성을 고려해도 국익이라고 보기 힘들다. 일본 정부가 피해자에 대한 법적 책임을 다하도록 하는 것이 진정으로 중요한 국익에 부합한다.’

‘12·28 위안부 합의’ 뒤에도 법적 후폭풍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헌재 판결로 생긴 법적 트랙을 박근혜 정부가 한 발짝도 밟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일 당국자 설명을 들어보면, 이번 합의는 한·일 청구권 협정 제3조 1항에 따른 ‘해결’에 해당하지 않는다. 2011년 9월 이명박 정부 때처럼 한·일 청구권 협정에 근거한 협의를 요청하지 않았다. 형식뿐 아니라 내용상 분쟁도 여전하다. 아베 총리는 합의 뒤에도 위안부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끝났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한·일 청구권 협정 제3조에서 밝힌 해석상 분쟁이 지속되고 있는 셈이다. 김창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아베 총리 발언을 보면 한·일 청구권 협정에 규정한 해석의 분쟁이 지속되는데, 한국 정부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문제를 삼지 않는다고 한다. 헌재 판결문 취지대로라면 정부는 다시 위헌 상태로 진입했다”라고 말했다. 김동희 정신대문제책협의회 사무총장은 “법률 전문가와 협의를 거쳐 법적 문제를 다시 다투겠다”라고 말했다.

 

 

“돈을 내는 행위만으로 배상이라고 할 수 없다”

중국의 위안부 연구자 쑤즈량 소장에 따르면 중국 내 위안부 피해자의 수는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위안부 피해자만큼이나 많다. 중국에도 24명의 피해자가 생존해 있다. 그에게 이번 한·일 간 합의에 대해 물었다.

1932년 1월, 일본군은 중국 상하이의 일본식 클럽 네 곳을 ‘위안소’로 지정했다. 아시아 최초의 일본군 위안소였다. 일본군이 여성을 강간해 성병이 퍼질 우려가 생기자 위안소를 기획했다.

위안소 수는 늘어났다. 1937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이 점령한 중국 전 지역에 일반화되었다. 일부 지역에서 ‘위안부’와 일본군 비례는 1대29에 달했다. 쑤즈량(蘇智良) 중국 위안부문제연구센터 소장(상하이 사범대학 교수)은 중국인 피해자가 20만명에 달하고 상하이 지역에만 160곳 이상의 위안소가 설립됐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위안부 피해자보다 많은 수치다.

쑤즈량 소장은 중국인 위안부 문제를 연구한 최초의 연구자다. 현재까지도 최고 권위자로 통한다. 저서 <일본군 성 노예> <위안부 연구> 등을 냈다. 그는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주변 국가와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첫걸음이다”라고 말했다. 인터뷰는 이메일로 진행됐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지난해 9월 강일출 할머니(왼쪽에서 두 번째)가 상하이 사범대에서 위안부와 관련해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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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강일출 할머니(왼쪽에서 두 번째)가 상하이 사범대에서 위안부와 관련해 증언하고 있다.

‘12·28 위안부 합의’가 이전에 비해 진전이 된 결과라고 보나?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을 체결한 이후 배상 문제가 완전히 해결됐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번엔 일본 정부가 10억 엔을 제공한다고 하지만, 일본 정부는 법률적 관점에서 책임을 지지 않았다. 아베 총리가 “마음으로부터 사과하고 반성한다”라는 표현을 썼는데, 모호하다. 가해행위를 누가 어떻게 했는가를 가해국이 정확하게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고 나서 후속 조치가 수반될 때 진정한 사죄로 피해자가 받아들일 수 있다. 일부 매체에서는 직접적으로 ‘배상금’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표현은 경솔하다. 돈을 내는 행위만 두고 배상금이라고 볼 순 없다. 배상금이란 법률적 효과와 이익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이번 10억 엔은 공포된 문건에 따라 ‘배상금’ ‘보상금’ 또는 ‘위문금’으로 다르게 표현돼 있다.

이번 합의가 중국에 어떤 영향을 줄까?
지난 20여 년간 일본은, 오늘 머리를 조아리고 내일은 이를 부정하는 패턴을 반복해왔다. 이번 한국과의 ‘합의’에서도 그랬다. 중국이 일본 정부와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면, 배상이 아니라 전쟁범죄에 대한 법적 책임을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반드시 전 중국 위안부의 명예와 존엄 회복을 최우선적으로 명시해야 하며 정식으로 사과하고 정의의 원칙에 부합하는 배상, 전쟁 책임의 반성과 재발 방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한국 정부는 지난 20년간 일본에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했고 결국 성사시켰다. 위안부 생존자 연령을 감안해 중국 정부도 전면에서 협상을 벌일 필요가 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쑤즈량 중국 위안부문제연구센터 소장은 상하이에 160곳 이상의 위안소가 설립됐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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쑤즈량 중국 위안부문제연구센터 소장은 상하이에 160곳 이상의 위안소가 설립됐다고 주장한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중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무엇인가?
중국 정부는 지난 20년간 일본 정부가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직시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현재 중국에는 24명의 피해자가 생존해 있다(편집자 주:2013년 일본 <아사히 신문>은 1992년 2월19일자 외교 비밀문서를 공개했다. 문서에 따르면 중국과 일본은 위안부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기로 비공개 합의했다. 당시 일본은 “위안부 문제가 한국에서 중국으로 번져 골머리를 앓고 있다. 중·일 관계의 대세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위안부 문제를 거론하지 않도록 하고 싶다”라고 중국에 전했다. 이에 대해 중국은 “사안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라며 합의했다. 이후 ‘아시아여성기금’ 지급 대상에서 중국 위안부 피해자는 제외되었다. 중국과 일본 간 ‘뒷거래’가 있었다는 설이 나왔다).

일본군이 위안부를 동원하는 데 직접 관여한 공문서가 2014년 발굴되었다.
상하이 당안관(국가기록보관소)에 소장된 공문서 ‘시민(중국인) 양수이창(楊水長)이 푸상(浦上)로 6번지에 개설한 위안소 상황에 대한 안건’이 대표적이다. 1939년 2월25일 상하이 경찰국장이 상하이 시장에게 보고한 문서인데, 일본군 헌병대와 육군경비대에 위안소 개설을 행정적으로 허가한 내용이다. 일본군이 괴뢰정부를 이용해 위안소를 개설하고 관리하는 제도를 만들었다는 증거다. 이 밖에도 일본 위생국이 작성한 위안부 정기 신체검사 문서 등도 발굴되었다. 위안소는 1945년 8월 일본군이 항복할 때까지 존재했다.

그럼에도 1972년 중·일 공동성명에서 중국은 일본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파기했다.
분명히 중국 정부는 전쟁배상 요구를 포기했다. 다만 피해자 개인의 배상권을 포기한 게 아니라고 중국 정부는 해석하고 있다. 일본은 인도네시아·필리핀·소련 등과 평화조약을 체결하면서 청구권과 관련해 ‘국가 및 국민’이라고 명시했다. 정부와 국민의 권리를 분리시켰다. 1995년 중국 외무장관은 “중국 정부는 개인의 배상 청구를 저지하지 않는다”라고 공식 발표한 바 있다.

 

 

‘그 합의’에는 피해자들이 없다

전혜원 기자 

 

일본 진보지 <아사히 신문>은 “역사적인 진전”이라 평가했지만, ‘12·28 위안부 합의’에 비판적인 일본 지식인도 적지 않다. 한국에도 번역 출간된 <한·일 교섭-청구권 문제 연구>의 저자이자 ‘일·한 회담 문서 전면공개를 요구하는 모임’에서 활동하는 오타 오사무(太田修) 일본 도시샤 대학 글로벌학 연구과 교수(조선근현대사·한·일 관계사 전공)에게 이번 합의에 대해 물었다. 1월7일 오타 교수가 보내온 이메일 답변을 정리했다.

 
 

이번 합의를 어떻게 평가하나?
부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베 정권은 정권 발족 이래, 말로는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고 하면서 실제 행동에서는 일절 책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한 아베 정권이기에 이번 책임 인정은 ‘일보 전진’이긴 하다. 그러나 그것은 고노 담화의 수준에 겨우 이르렀다는 의미에서 일보 전진이며, 내용에 새로움은 없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2015년 6월20일 한·일 수교 50주년을 기념해 일본 도쿄에서 심포지엄이 열렸다. 오타 오사무(오른쪽에서 두 번째) 교수도 이 자리에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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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20일 한·일 수교 50주년을 기념해 일본 도쿄에서 심포지엄이 열렸다. 오타 오사무(오른쪽에서 두 번째) 교수도 이 자리에 참석했다.

이유가 무엇인가?
첫째, 이번 합의는 피해자 할머니들의 목소리나 그 지원운동과의 협의에 기초해 있지 않다. 무엇보다도 피해자 할머니들이나 그 지원운동이 납득해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일본 정부의 책임 인정이 불충분하다. ‘군의 관여’라는 한마디로 끝낼 게 아니라 △일본 정부 및 군이 군의 시설로서 ‘위안소’를 설치·관리·통제한 것 △할머니들이 위안소 등지에서 강제적인 상황에 놓인 것 △중대한 인권침해였던 것 등 구체적으로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
셋째,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된다’고 했지만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았다. 경제적인 보상에 대해서는, 만약 피해자가 받아들일 수 있다면 ‘최종적 및 불가역적 해결’이어도 될지 모른다. 그러나 △진실 규명(일본 정부가 보유한 자료 공개, 국내외 자료 조사, 피해자 청취 조사 등) △기억·추모(학교나 사회에서의 역사 교육, 추모사업) △재발 방지 조치(잘못된 역사 인식에 근거한 공인의 발언 금지, 그 밖의 잘못된 역사 인식에 대한 비판 등)는 앞으로도 계속 실천해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구체적인 조치를 표명하지 않은 채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된다’고 한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넷째, 한국 측이 재한 일본 대사관 앞의 소녀상에 대해 ‘적절한 형태로 해결되도록 노력한다’고 한 점이다. 일본 정부가 ‘소녀상’ 철거를 요청한 것에 대한 발언이라고 추측된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이를 조건으로 이번 합의를 주고받은 거라면 언어도단이다. 일본 정부의 진의가 피해의 해결을 목표로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소녀상 문제는) 기본적으로는 피해자 할머니나 지원운동 측에서 결정해야 할 일이다. 양 정부에 이론이 있으면 피해자 할머니나 지원운동 쪽과 직접, 충분히 협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일본 정부가 이론이 있는 것이라면, 한국 정부에 요청하는 게 아니라 할머니나 지원운동과 직접 대화해야 할 것이다.

이번 합의를 1965년 한·일 협정과 비교한다면?
1965년 협정과 비교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애초에 일·한 회담과 그 결과 체결된 일·한 조약(한·일 협정)은 식민지 지배나 전쟁 동원 피해를 불문에 부치는 것이었다. 피해자나 그 지원운동의 목소리를 받아들이는 일은 전혀 없었다.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다.
중요한 것은 1965년 일·한 재산청구권 협정으로 모든 게 해결됐다는 일본 정부의 주장과 이번 합의의 관계다. 일본 정부는 이제까지 그러한 주장을 계속해왔고, 이번에도 그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합의로 사실상 그 논리가 무너진 것이 한층 명백해졌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1965년의 청구권 협정으로는 해결되지 않았다는 바로 그 이유로 (1993년의) 고노 담화나 이번 합의가 필요해진 것이다. 일본 정부가 지금도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 종료’를 계속 주장하는 것 자체가 자가당착이다.
이번 합의로 만들어질 재단에 일본 정부 예산이 들어간다. 민간 모금이었던 아시아여성기금과는 다르다.
아시아여성기금의 최대 문제점은, 피해자 할머니나 지원운동의 의사를 무시하고 강행했다는 점이다. 이번에는 할머니나 지원운동의 의사를 비교적 의식했다고는 하지만, 최종 합의는 역시 피해자 할머니나 지원운동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결과가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2014년 6월2일 일본 도쿄 중의원 제2회관 앞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아시아 연대회의’ 소속 참가자들이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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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2일 일본 도쿄 중의원 제2회관 앞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아시아 연대회의’ 소속 참가자들이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일본 내 여론은 어떤가?
아베 정권은 이번 합의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것 같다. 올여름 참의원 선거 때 위안부 문제를 해결해 일·한 관계가 정상화됐다는 외교적 성과를 선전하려 하고 있다. 거대 미디어는 경제적 지원과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된다’는 두 가지 대목을 강조한다. 이제까지 아베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미디어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 같다.
피해자 할머니나 지원운동의 비판 또는 비판적인 목소리가 충분히 전해지고 있지 않은 것이 문제다. 어째서 이번 합의가 문제인지, 피해자 할머니나 지원운동의 비판적 목소리를 포함해 합의의 문제점이나 과제, 대안 등에 대해 일본 사회에 문제 제기를 해나갈 필요가 있다.

피해 당사자와 지원단체는 이번 합의가 ‘무효’라고 호소하고 있다. 앞으로 양국의 각 주체가 어떻게 대처해야 한다고 보나?
이번 합의의 잘못은 피해자나 지원운동과의 대화를 결여한 채 이뤄진 것이라는 점에 있다. 양국 정부, 특히 일본 정부는 피해자인 할머니나 지원운동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합의가 되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양국 정부는 피해자 할머니나 지원운동과 직접 대화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번 ‘합의’대로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2014년 6월 제12회 일본군 위안부 문제 아시아 연대회의가 낸 <일본 정부에 대한 제언-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아시아 지역의 피해자와 지원단체가 일본 정부에 제시한 해결책. △사실과 책임 인정 △공식 사죄 △배상 △진상 규명 △재발 방지 조치 등)가 피해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최저한의 내용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