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렇게 살기 싫은데 방법이 없다
‘노답’은 애초 타인을 향한 가벼운 혐오의 언어에서 삶 전체와 연관된 ‘셀프 디스’의 언어가 되었다. 단지 해결책의 부재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삶의 다음 단계가 보이지 않는 전망 부재의 상황 역시 노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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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2호] 승인 2015.12.31 09:02:47 |
외국계 컨설팅 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ㄱ씨(38·남)는 몇 년 전 대기업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10년차, 과장을 꽉 채운 시점에 그는 다시 회사를 옮겨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조금만 버티면 팀장도 달아줄 테지만 팀장이 되고 싶지 않다고 했다. 팀장이 되고 나면 임원이 되려고 팀원들을 엄청나게 쥐어짜면서 매일 야근해야 하고, 그런 식으로 일하지 않으면 무능한 놈으로 찍힐 터였다. 어떤 쪽이든 금세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질 게 뻔했다. ㄱ씨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만이 있었다. 팀원에게 ‘노오력’을 강요하면서 버티거나, 아니면 능력도 야망도 없는 사람이라는 모멸감을 받으면서 언제 잘릴까 전전긍긍하며 버티는 것. 누가 봐도 주어진 선택지 중에 답이 제대로 없는, ‘노답’ 상황이다.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지금보다 더 끔찍하다고 생각한 그는 지금 ‘탈직장’을 심각하게 고려 중이다.
‘노답’이라는 단어는, 애초에는 타인을 향한 가벼운 혐오의 언어였다. 주로 상식 밖의 행동을 하는 사람들의 에피소드나 사진을 보면서 ‘답이 없네, 답이 없어!’라고 반응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이 표현은 ‘노답 인생’이라는 맥락으로 변형되면서 삶 전체와 연관된 ‘셀프 디스’의 언어가 되었고 ‘노답 사회’로까지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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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원 그림 | ||
이른바 ‘지잡대(지방의 잡다한 대학을 뜻하는 은어)’를 나왔다든지, 고시 공부를 하다가 취업 시기를 놓쳤다든지, 부모 대신 갚아야 할 빚이 수억원이라든지 도저히 답이 안 나오는 인생은 주변에 널렸다. 기본적으로 노답이란, 해결 방법이 나오지 않는 사면초가의 상황을 뜻한다. 계급상승의 사다리를 걷어차인 채 학자금 대출을 등에 지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대다수 ‘흙수저’ 청춘들의 인생처럼 말이다. 그런데 노답이라는 말이 단지 ‘해결책의 부재’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다음 단계가 보이지 않는, ‘전망 부재’의 상황 역시 노답이다. 갖은 고초 끝에 대기업에 정규직으로 진출한 ‘엘리트’도 40대 중반이면 치킨집을 차릴까 편의점을 차릴까 고심하다 하우스푸어가 된다는 것은, 이제는 동네 꼬마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 사회에서는 답이 없다, 전망이 없다’는 확신은 최근 들어 청년들이 구체적 일상 속에서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강화되고 있다. 여러 인터뷰를 통해 수집한 자료들을 분석해보면, 청년들이 경험하는 노답 상황들은 ‘노답 조직·노답 경제·노답 어른’의 세 가지 축으로 정리할 수 있다.
먼저 ‘노답 조직’은, 2010년대를 사는 청년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후진적 조직 문화를 말한다. 고등학교까지의 감옥 같은 세월을 참아내고 성인이 된 후에도 부조리한 조직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꼰대 교사가 꼰대 선배나 교수, 팀장과 사장으로 교체되었을 뿐, 무시당하고 핍박받는 상황은 그대로 이어진다. 더 답답한 것은 다음 단계로 올라간다고 해서 이 부조리가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점점 심해진다는 점이다. 일터에서 노오력 끝에 일개 아르바이트생 신분을 벗어나 정식 직원이 되고 점장이 되면, 더 많은 비리와 부조리를 목격하게 된다.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가면, 더 적나라한 굴종과 착취가 이어진다. 기업에서 천신만고 끝에 중간 관리자가 되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면, 그 조직이 얼마나 비전이 없으며 실은 사회의 미래를 갉아먹고 있는지 명확히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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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12월5일 민중총궐기에 참여한 청년단체들이 주민등록증 모형을 부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 ||
물론 이러한 ‘노답 조직’들은 노답 경제를 이루는 일부분일 뿐이다. 개인에게 온갖 편법과 노력을 강요해서 피땀을 짜내고, 그 피를 뿌려 일궈낸 과실을 상위 1%에게만 돌려주는 ‘노답 경제’체제. 자신들이 그런 체제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청년은 거의 없다. 즉 개인의 노답 인생이 노답 사회에서 기인한다는 걸 간파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진짜 해결책은 제시하지 못한 채 가짜 답으로 돌려막기를 하는 ‘노답 어른’들이 조직과 국가를 운영하고 경제구조를 짜는 한 이 사회에 ‘답’은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청년들은 닮고 싶은 어른을 만나본 적이 없다. ㄱ씨가 팀장이 되기 싫었던 것은 그가 10년간 만나왔던 40세 전후의 팀장·임원들처럼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빠른 승진을 한 사람들 중에는 때 이른 암, 갑상선 이상, 불안장애나 대인기피증, 난임이나 자연유산 등 심각한 질병을 앓는 경우가 많았고, ‘돌싱(돌아온 싱글)’ 비율도 굉장히 높았다. 고혈압이나 당뇨 정도는 명함도 못 내밀 몸 상태로, 가정과 일을 병행할 수 없는 스케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들의 삶이 자신의 ‘다음 단계’가 아니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반응 아닐까.
이행 장애를 겪는 ‘어른들’의 급진적 퇴행
‘청년층이 이 사회에 답이 없다는 현실을 간파하기 시작했다’는 대목은 나름 희망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기성세대가 짜놓은 구조, 그들이 낸 시험문제에 연연해하지 않는다는 것은 변화의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한민국 청년들이 ‘헬조선 담론’을 만들고 유포시킨 2015년은 훗날 변화의 원년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식과 간파만으로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후기 근대 위험사회의 가장 큰 비극이다. 변화를 일으키기 위한 동기와 능력, 그리고 방향을 알려줄 수 있는 모델이 필요하고 사실상 그간에 길들여진 생각, 행동 습관, 성품에서 영혼까지 변해야 할 터인데, 태어나면서부터 입시체제에 길들여진 이들에게는 힘겨운 작업이다. 저 너머에 매력적인 무엇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자신 역시 변신의 가능성을 믿기 어렵다.
교육학이나 심리학에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을 ‘이행’이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직업 이행(취업)에 실패한 대학생들은 청년기에서 성인기로 넘어가는 이행 과정에서도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그런데 청년들의 직업 이행과 성인기 이행을 직간접으로 막고 있는 장년층 역시 노년으로의 이행에 큰 장애를 겪는다. 급격하게 연장된 수명 때문에 은퇴 후 40~50년을 준비해야 하니 불안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모두가 다음 단계로 이행하지 못한 채 어마어마한 불안감에 휩싸이면서, 우리 사회는 매우 급진적으로 퇴행하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이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산업화·인구정책·교육제도·조직문화 등에서 한국과 수없이 많은 유사성을 지닌 일본의 청년들 사이에서는, 일찌감치 사회가 노답임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사실 ‘헬조선’이라는 단어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일본 청년들이 자국을 비하하는 표현인 ‘중세 잽 랜드(中世ジャップランド)’에 상응하는 용어라 할 수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웃 나라 청년들은 이런 막막한 감정이 들자마자 ‘티 나게’ 문제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빡빡한 조직문화와 긴 노동시간이 싫다며 ‘프리타(free arbeiter)’나 니트(NEET:비구직 무업자)가 되기도 하고, 방 안에 틀어박힌 채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은 달랐다. 한국의 청년들은 뒤처지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에 답이 없는 상황에서도 각자 희망을 찾으려 엄청나게 노력을 해왔고, 문제의 심각성이 10여 년 동안 지속된 지금에 와서야 부글부글 분노로 들끓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일본 청년들에 비해 건강하고 힘이 있는 증거라며 다들 안심했지만, 그 반대의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겉으로 멀쩡했던 한국 청년들이 속으로는 보이지 않는 화병을 앓아왔다고 말이다.
화병에 걸린 사람은 어디로든 분노를 표출해야 한다. 한국 청년들이 절망과 분노를 해소하는 방법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다른 개인을 향해 푸는 것이다. 타인을 ‘벌레’라 지목하며 모멸감을 주는 행위를 통해 나의 존재에 상대적 안정감을 부여하는 행위 말이다. 두 번째는 충분히 ‘노오력’하지 않은 나 자신에게 분노를 투사하는 것, 즉 스스로 벌레가 되는 방법이다. 그런데 이것은 티가 나지 않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 자신도 모른 채 화가 내부에 쌓이다 보면, 단순히 자존감을 상실하는 수준을 넘어 중증 우울증, 분노조절장애, 가혹행위 등 심각한 마음의 병을 얻게 되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어쨌거나 양쪽 모두 문제의 본질이 아닌 엉뚱한 대상을 괴롭히는 것이니 분노를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자신의 성장 불가능성 앞에 화를 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일까. 청소년기에 월드컵과 촛불 시위를 겪은 세대가, 왜 자신들의 일과 관련해서는 광장으로 나서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노답이라는 말이 말해주듯 아무것도 답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는 것은 ‘노오력’뿐이다. ‘너의 인생은 네가 노오력한 시간들의 축적물’이며 ‘충분히 노오력하지 않은 자는 불평할 수 없다’라는, 신자유주의적이면서 동시에 전제 왕권 시대적인 계율로부터 벗어나기 힘든 것이다. 이 시대의 청년들은 그 계율의 바깥을 본 적도, 경험한 적도 없다.
쏟아져 나오는 청년정책이 성공하려면
소설가 김연수는 ‘어둠 속에 머물다가 단 한 번뿐이었다고 하더라도 빛에 노출되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평생 그 빛을 잊지 못하리라(<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2007)’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뒤집으면, 한 번도 희망에 노출되어보지 못한 사람은 희망을 상상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현대사회에서는 가상과 실재, 감정과 경제가 뒤섞인 채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IMF 경제위기 이후, 한국의 청년은 실존적 위기와 존재론적 위기를 동시에 겪고 있다. 따라서 청년들의 마음이 과격해진다는 것은 실제 폭동 이상으로 더 무서운 일일 수도 있다. 온라인에서 헬조선의 광풍이 부는 동안 광장에 나와 그 이야기를 하는 청년이 많지 않다고 해서 그것을 찻잔 속의 태풍이라고 폄훼할 수는 없다.
이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성급하게 결론을 내거나 답을 주려 하지 않는 것, 그리고 거짓 희망을 말하지 않는 것이다. 청년들의 곁에 앉아서 같이 고민하고 이해하려는 시도,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해보겠다는 의지가 중요하다. 답이 없는 사회에서는 어떤 메시지를 던질 수 있는지 궁리해야 한다. 지금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완성된 답이 아니라, 그 답을 향해 갈 수 있다는 메시지와 삶의 조건이다.
그 메시지의 첫 번째는 지금까지의 답이 이제는 답이 될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할 것이다. 지금까지와 같은 발전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만들어온 것이 ‘풍요로운 폐허’였음을 인정하고, 지금까지 하던 대로 해버리면 앞에 놓인 것은 ‘풍요’보다는 ‘폐허’뿐이라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많은 급진적 청년정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비록 아직 답은 없더라도 그 답을 같이 찾자는 기성세대의 ‘태도’ 변화가 필요하다. 그런 태도를 보여주는 메시지로서 정책이 제안되고, 이를 두고 해법을 찾고자 노력할 때 변화의 실마리가 보일 것이다. 다행히 한국 청년들은 세계 어느 곳의 청년들보다 상황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는 편이다. 모여서 변화를 이끌어낼 물질적·제도적 자원을 갖지 못했을 뿐이다. 미래의 주역인 그들이 여기가 내가 살 만한 도시이며, 이 도시에서 자신이 성장하고 기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 것은 정녕 불가능할까?
정주영이라는 거인이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이 태어난 지 100년 되는 해다. ‘정주영 찬가’를 부르며 빛만 볼 게 아니라, 그가 만든 어둠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정부는 수백만 노동자의 삶을 좌우할 문제를 노동 개혁이라는 이름하에 밀어붙이고 있다.
올해는 현대그룹의 창업주 고 정주영 회장이 태어난 지 100년 되는 해야. 1915년 11월25일생이거든. 아빠가 그분 생일을 기억하는 게 이상해 보이겠지만 어쩔 수 없구나. 10월 즈음부터 웬만한 매체에서는 다 ‘아산 정주영 탄신 100주년’을 외쳐댔으니까. 기본적으로 아빠는 정주영을 거인(巨人)으로 인정하는 편이야. 식민과 전쟁 그리고 가난이 지배했던 한국 현대사에 등장한 특출한 거인이었어. 전쟁으로 파괴된 한강대교 재건에서 경부고속도로·소양강댐·현대자동차·현대중공업 등등 그의 손길은 우리의 오늘 곳곳에 닿아 있단다.
그런데 정주영 회장이 “시련은 있지만 실패는 없다”라며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가능하게 만들 때, 그가 가장 의지한 건 누구였을까? 다름 아닌 현대그룹의 노동자였을 거야. 정주영 회장이 창발적인 아이디어와 황소 같은 뚝심으로 사업을 밀어붙일 때 그 지시를 받아 피와 땀을 흘리고, 전쟁 같은 노동으로 현대그룹이라는 금자탑을 쌓아올린 사람들 말이야.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정주영 찬가는 전국을 울리는데 노동자에 대한 감사의 소리는 동지섣달 모기 소리만큼도 들리지 않는 게 아빠는 참 이상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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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정주영닷컴 제공 1976년 정주영(맨 왼쪽) 현대그룹 창업주가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항만 공사 현장을 방문했다. | ||
정주영 회장의 위업 가운데 하나가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항만 공사야. 당시 대한민국 국가 예산의 30%쯤 되는 9억3000만 달러에 이르는 한국 최대, 아니 세계 최대의 공사라고 할 만했지. 정주영 회장은 특유의 뚝심과 기민한 행동으로 이 거대한 공사를 따냈어. 그리고 한국인 근로자 수천명이 ‘외국인 노동자’로서 사우디아라비아에 가게 돼. 그들은 낮기온이 40℃를 오르내리는 열사의 나라에서 변변찮은 의식주로 고통받으면서도 오로지 완공 기일을 앞당기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게 되지. 고국에 있는 가족들이 자신의 뼈와 살을 갈아 퍼부은 노동의 대가로 푸짐하게 먹고 곱게 입기를 바라면서 말이야.
그러나 1977년 3월13일 문제가 터져 나오게 돼. 당시 현대건설 노동자들은 중동에 진출해 있던 다른 한국 기업 노동자들에 비해 임금이 낮았어. 더하여 현장 노동자들은 관리직 직원들과의 차별을 감수해야 했지. 밥 먹는 식당과 잠자는 숙소의 질부터 달랐다니 더 말할 것이 없다. 너희 학교에서 급식할 때 전교 1등부터 10등까지는 따로 불고기를 해 먹이고 너희들은 된장국에 멸치만 준다고 상상해봐. 그것도 매일같이. 이에 덤프트럭 기사들이 좀 게으름을 피우며 항의의 뜻을 표했는데 어느 덜떨어진 관리직 직원 하나가 기사의 뺨을 올려붙이면서 화약고에 불을 붙이고 말아.
당시 현대건설 회사와 관리직 직원들은 현장 노동자들을 동격의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던 거야. 빼앗아도 그저 머리 숙이고, 한 대 얻어맞아도 뒤돌아서 돌 한번 툭 차고 마는 반편이들로 치부했던 거야. 그래도 되었으니까. 거기에 익숙했으니까. 그러나 노동자들은 분노할 줄 아는 ‘인간’이었어. 노동자들은 사무실을 때려부수고 관리직 직원들을 구타하고 현장을 장악해. 그런데 문제는 그곳이 사우디아라비아라는 점이었어.
사우디는 지금도 시위 등이 거의 허용되지 않는 봉건 왕정 국가야. 사우디는 한국 노동자들의 항의에 기함했고 군대를 동원해 진압할 생각을 한단다. 이를 필사적으로 가로막은 건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에 주재하던 유양수 대사였어. 그는 노동자들에게 총알 퍼부을 준비를 하던 사우디 관계자들을 가까스로 만류하고, 분노와 공포에 휩싸여 있던 노동자들 사이로 들어간단다. 그때 심경을 그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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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이명익 조계사에 피신해 있다 자진 출두한 12월10일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가운데)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
“처절하게 절규했던 근로자들이 전부 지치고 늘어져 있고 말이죠. 말은 산업전사라고 불러주고 국가 발전의 역군이라고 치켜세우고 그랬지만 본인들한테는 그런 말들이 사치스러울 뿐이라고요. 잘살아보겠다는 소망, 내일에 대한 꿈 그것 때문에 사랑하는 처자식 놔두고 이름도 생소했던 열사의 땅 사우디까지 온 것 아닙니까. 눈물이 나더라고요. 솔직히 정 회장이 옆에 있었으면 ‘당신 자식들이라면 저렇게 되도록 하겠느냐’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어요.”(2009년 2월6일 <중앙일보> 미주판 11면, “정주영의 현대건설 60년 영욕-40” 중에서)
노동자들의 요구 사항은 ‘두발 자유화’
‘조국 근대화’를 위해 피땀 흘린 노동자들이 정주영 회장에게 맞서 싸운 건 그게 처음도 마지막도 아니었어. 1987년 전국을 들끓게 한 ‘노동자 대투쟁’의 불길은 정주영 회장의 현대중공업에도 번졌는데 그때 노동자들이 제1항으로 요구한 게 뭐였는지 아니? 임금 인상도 아닌 ‘두발 자유화’였단다. 국내 유수의 회사 정문에서 관리직들이 바리캉을 들고 애 두셋 딸린 아저씨들을 상대로 머리카락 길이를 재고 있었다는 거야.
밝은 빛의 뒤쪽엔 그만큼 시커먼 그림자가 있고 산이 높으면 그만큼 골도 깊은 거란다. 역사의 교훈이란 그 간극을 좁히는 과정에서 익혀지는 것이고 빛과 어둠 양쪽을 보면서 빛을 넓히고 어둠을 줄이는 여정이 곧 역사의 발전이야. 정주영 회장 탄생 100주년을 찬미하는 만큼 그와 후계자들이 깔아놓았던 어둠을 인정하고 반복을 되풀이하지 말아야지. 하지만 2015년이 저무는 요즘 아빠는 서글프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자신들의 노동조건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상황에서 노동자가 침묵하는 경우는 없어. 하물며 이번에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 개혁’에는 지금껏 수많은 물의를 일으킨 ‘경영’ 문제의 개선은 거의 담겨 있지 않아. 좀 불려서 말하면 주베일 항만 사태 때 사우디아라비아의 군대 지휘관 같은 자세지. “(문제가 뭔지는 우리 알 바 아니고) 문제를 일으킨 노동자들을 일단 진압하겠다”라는 식의.
거리 시위에 경찰 수천명이 투입되는 스펙터클을 거쳐 민주노총 위원장이 구속됐어. 주베일 사태 때도 주동자로 꼽힌 이들은 ‘색출’돼 귀국 비행기를 타야 했지. 하지만 역사는 증명하고 있단다. 일순 잠잠해진 것 같지만 결코 끝난 게 아니라는 것을. 하나 더 기억해야 할 것은 기업이 노동자를 “때리면 맞고 소리치면 움츠러드는” 존재로 대할 때 결국 손해는 기업에도 돌아간다는 점일 거야. 주베일에서는 이후 한 번 더 소요 사태가 일어났고, 현대건설은 블랙리스트에 올라 오랫동안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사업을 수주할 수 없게 됐거든.
그래서 아빠는 더 궁금해진다. 미국 대통령은 “노조에 가입하라”고 대놓고 얘기하고, 이른바 선진국 사회 수업시간에는 노동과 자본의 교섭 과정을 실습으로 가르치는데 왜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할까? 왜 수백만 노동자의 삶을 좌우할 문제를 치열한 토론도 충분한 공유도 없이 밀실 ‘합의’를 내세워 밀어붙이려 할까. 2010년 프랑스에서는 정년을 연장한다는 정부 발표에 수백만이 파업을 일으키며 항의했지만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왜 한국에서는 파업이란 게 나라 망치는 일로만 치부되는 것일까.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을까? 이 질문에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들에게 아빠는 정주영 회장의 명언을 소개해주고 싶어. “이봐, 해봤어?” 왜 해보지도 않고 그렇게들 안 된다고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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