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문화, 예술

나는 누군가에게 불편한 존재였다. 드라마 <송곳>에서 말하지 못한 이야기

일취월장7 2015. 12. 19. 12:42

 

나는 누군가에게 불편한 존재였다

[드라마 <송곳>에서 말하지 못한 이야기 ①]
허환주 기자 2015.11.23 15:42:49
여기 한 남자가 있습니다. 촌구석에서 태어나서 자랐습니다. 출세하고 싶었습니다. 군인이 잘나가던 시대였죠.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집안 형편 탓도 있었습니다. 자신이 일반 대학에 진학했다면 다른 형제들이 대학에 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군복은 그와 맞지 않았습니다. 반복되는 군 상부 비리를 눈감기엔 비위가 좋지 않았습니다. 미련 없이 5년 동안 입어온 군복을 벗었습니다. 군 말년병에서 사회 초년병으로 돌아간 셈입니다. 그러나 시기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가 처음 발 디딘 사회는 IMF를 겪고 있었습니다. 외국계 대형유통업체에 취직했습니다. 외국기업이라 잘릴 위험은 없겠다 싶었습니다. 밤낮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여전히 출세하고 싶었기 때문이죠. 회사도 그를 키우려 했습니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습니다. 새로 온 매장 지점장이 그에게 부하직원을 해고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 숫자가 협력업체 직원까지 15명이나 됐습니다. 쓸데없이 높은 연봉을 준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이를 거부했습니다. 군 시절 부하들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이후가 문제였습니다. 지점장은 노골적으로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참다못해 노조에 덜컥 가입했습니다. 노조는 직원을 보호해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노조의 '노'자도 모르는 그였습니다. 이후부터 그의 삶은 말 그대로 '좌충우돌'이 됐습니다. 드라마 <송곳> 이수인의 실제모델 김경욱 씨 이야기입니다. 

이랜드 파업의 주인공인 <송곳> 실제모델 김경욱

이야기를 건너 뛰어보겠습니다. <송곳>의 배경이 되는 대형마트 까르푸가 이랜드 그룹 홈에버로 매각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어집니다. 대규모 구조조정이 진행됐고, <송곳> 주인공 이수인은 여기서 또다시 싸웁니다.  

이랜드 사태는 파업 당시만 해도 노동계만이 아니라 사회적 이슈가 된 사안입니다. 2007년 6월 30일 이랜드 계열사 홈에버 월드컵점을 800명의 홈에버 직원들이 점거하면서 논란이 됐죠. 이랜드 그룹에서 진행되는 비정규직 대량해고가 주요이슈였습니다. 당시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비정규직법이 7월 1일자로 실행됐는데, 이와 맞물려 사회적 파장이 상당했숩나다. 

점거는 21일 만에 경찰병력의 진압으로 해산됐지만, 이후에도 홈에버 직원들은 매장 재점거에 나서는 등 지속해서 파업을 이어나갔습니다. 그 사이 홈에버는 삼성테스코에 매각됐죠. 매각의 효과였을까요? 길거리에서 500일 넘게 싸워오던 직원들은 2008년 11월, 회사와 합의하고 노조 집행부 9명을 제외한 전원이 매장에 복직했습니다. 당시 파업을 이끌고 삼성과의 교섭을 타결한 인물이 김경욱 씨입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이랜드 파업이 일반적인 파업 중 하나로 생각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기존 노동자 파업과는 다른 성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대규모 파업이 벌어진 일은 일찍이 한국 노동역사에 없었습니다. 대부분 대공장이 있는 경남 울산, 창원 등에서만 있어왔죠.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함께 파업에 참여했다는 점도 여타 파업 사업장과 다릅니다. 이슈도 비정규직 대량해고였습니다. 대부분 파업은 정규직 중심의, 정규직 이슈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현재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는 2009년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77일 옥쇄파업,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의 한진중공업 사태 해결을 위한 309일 크레인 고공농성 등은 모두 정규직 노동자의 구조조정이 이슈였습니다. 

이 파업에 참여한 사람들이 대부분 여성 주부였다는 점도 독특합니다.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여성이 파업에 참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전체 조합원의 90%를 차지하는 여성노동자들이 500일 넘게 파업에 참여했죠. 이는 영화 <카트>가 개봉하면서 다시금 회자됐습니다. 

▲ 김경욱 씨. ⓒ프레시안


가장 보수적인 조직인 군대 장교 출신이 노조 간부로 

이 파업을 주도한 <송곳> 이수인의 실제인물 김경욱 씨의 이력은 무척 독특합니다. 대규모 파업을 진행한 노조 간부라고 하면 특정 노동계 정치 파벌(정파)에 소속돼 있거나, 학생 출신 위장취업자가 상당수입니다. 하지만 김경욱 씨는 어느 정파에도 소속돼 있지 않았습니다. '학출'도 아니었습니다. 되레 한국의 가장 보수적인 조직인 군대, 그것도 장교 출신이었습니다. 

기자인 제가 그를 주목한 것은 이랜드 파업이 끝난 뒤였습니다. 그의 마지막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2008년 겨울이었습니다. 이랜드 파업 타결 뒤 가진 감사의 자리였습니다. 그간 이랜드 사태를 취재한 기자들을 불렀습니다. 장기 파업 사업장 노조가 파업을 타결하고 현업으로 복귀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타결한다 해도 기자까지 불러 감사를 표하는 예는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날 모인 기자들도 어리둥절해했죠. 

신촌 허름한 지하 술집이었습니다. 소주 석 잔도 마시지 못하는 그였지만 그날은 기분이 좋았나 봅니다. 기자들이 주는 축하주를 거부하지 않고 주는 족족 받아마셨죠. 새벽쯤 됐을까요? 파업 여독이 풀리지 않은 그의 얼굴은 이내 불콰해졌습니다. 이윽고 테이블 한 귀퉁이에 앉아 팔베개를 하고 누워버렸습니다. 그 모습이 아직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그는 무슨 생각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했을까

이랜드 사태 같은 대규모 파업을 벌인 노조위원장은 대부분 상급단체인 민주노총이나 진보정당으로 가는 게 비일비재합니다. 70일 넘게 옥쇄파업을 진행한 한상균 전 금속노조 쌍용자동차 지부장의 경우, 2015년 민주노총 위원장으로 당선됐죠. 그러한 예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또 다른 노동판에서 그를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한 이유입니다. 

하지만 그날 팔베개한 모습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이후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췄습니다. 파업 해고자를 받아줄 마땅한 곳도 없었습니다. 파업기간 동안 신용불량자가 됐다는 이야기도 들려왔습니다. 성공회대 인근 옥탑방에서 혼자 산다는 이야기도 들려왔습니다. 한 다리 건너 들려오는 그와 관련된 이야기는 '왜 노동자로 산다는 것은 이렇게 비루해야 하는가' 반문하게 했습니다.  

그런 그를 만난 것은 한참 뒤였습니다. 들어오던 이야기와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보통 평범한 '월급쟁이'였습니다. 그의 변신이 놀랍기도 하면서 궁금해졌습니다. 그와의 인터뷰는 이런 궁금증으로 시작됐습니다. 물론, 김경욱 씨가 인터뷰에 응한 이유는 저와는 달랐죠. 노조운동을 시작하는 이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인터뷰는 드라마 <송곳>의 배경이 되는 시기, 즉 자신이 노동조합에 가입하면서 생겨난 여러 이야기들이 주축을 이루게 됐습니다. 그는 무슨 생각으로 노동조합에 가입했을까요? 그리고 그는 부하직원들을 구조조정에서 구해낼 수 있었을까요? 관리자였던 그가 노동조합에 가입한 뒤, 불이익을 받지 않았을까요? 그와 나눈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합니다. 

 

 

<송곳> 구고신의 실제 인물은 누구일까

[드라마 <송곳>에서 말하지 못한 이야기 ②]
허환주 기자 2015.11.28 09:24:30
 
"나는 소재일 뿐이고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김경욱 씨가 지난 5월 열린 웹툰 <송곳> 출판 토크콘서트에서 한 말입니다. 실제 그의 말처럼 <송곳>이라는 작품은 오롯이 최규석 작가의 작품입니다.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수인, 구고신이라는 인물에 투영된 게 <송곳>이죠. <송곳>은 이들이 푸르미 마트, 즉 까르푸에서 노조를 만들고 파업을 벌여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부분이 사실이지는 않습니다. 하나하나 살펴볼까요? 우선 막노동꾼으로 나오는 <송곳> 이수인 아버지는 김경욱 씨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최규석 작가의 이야기로 알고 있습니다. 김경욱 씨 아버지는 평생 농부로 일했습니다. 지금도 정읍에서 농사를 짓고 있죠. 
나머지 가족 이야기 중 김경욱 씨의 사례는 어머니가 아파 누워 있는 모습을 보고 출세해야겠다고 마음먹는 장면입니다. 당시 TV에서 나오는 출세한 사람들이 대부분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것을 알고 육사에 가기로 결심했다는 부분이죠. 
 

ⓒJTBC


학창시절 반장을 했고 해코지 당하던 학생을 도와주던 정의로운 학생이었다는 부분도 사실과 다릅니다. 김경욱 씨는 학창시절에 반장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본인 말로는 "찌질한 학생"이었답니다.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평범하고 조용한 학생이었습니다. 
육사에서 군의 정치적 중립에 대해 발언할 때는 단상에 올라가서 한 게 아니라 그 밑에서 한 거고, 어른 운운하면서 이야기한 훈육관은 김경욱 씨가 입원한 병원을 찾아온 게 아니라 김경욱 씨가 육사를 졸업할 때 훈육관 집에서 한 이야기라고 합니다. 육사 병원에 입원한 것도 다리가 부러졌기 때문이 아니라 팔이 부러졌기 때문이었죠.  
이렇게 써놓고 보니 드라마 <송곳>의 진위여부 관련해서 '사실이다'. '사실이 아니다'라고 설명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김경욱 씨는 자신의 스토리를 통해 최규석 작가가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게 <송곳>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수인은 최규석의 세계관이 투영된 인물이라고 보는 게 맞겠죠. 나머지는 지엽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드라마 <송곳>의 또다른 주인공 구고신은 어떨까요? 구고신은 이수인이 노조를 만들고 회사와 싸울 때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는 인물입니다. 이수인의 실제 인물은 김경욱 씨라는 사실은 앞에서도 언급했습니다. 그렇다면 구고신이라는 인물은 누구일까요? 혹자들은 구고신을 두고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대학원장을 언급합니다. 
최규석 작가는 하종강 원장에게서 구고신 캐릭터의 영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구고신을 둘러싼 에피소드는 하종강 원장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김경욱 씨가 까르푸 노조활동을 할 당시 하종강 원장은 노동운동 계에서 '스타'였습니다. 김경욱 씨는 하종강 원장이 운영하는 '노동과 꿈' 사이트에서 노동 관련 자료를 찾아 공부하면서 하종강 원장을 알게 됐죠. 
하종강 원장을 처음 만난 건, 까르푸 파업이 끝난 한참 뒤였습니다. 까르푸노조 순천지부 노동강연자로 만났습니다. 그 뒤 지금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죠. 
그렇다면 구고신은 누구일가요? 김경욱 씨는 "여러 명의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서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냈다"고 설명했습니다. 최규석 작가도 자기가 만난 70년대 학번 사람들의 성격을 조합한 것이라고 구고신을 설명했습니다. 하나하나 짚어볼까요?

ⓒ프레시안

고신이 자신을 찾아온 이수인을 데리고 노조가 싸우는 현장을 돌아다닙니다. 교육 차원이라는 이유였습니다. 그 역할을 한 인물은 당시 민주노총 부천지역협의회 박양희 부의장과 이은영 조직국장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김경욱 씨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김경욱 씨는 <송곳>에서 나오는 것처럼 부하직원을 구하기 위해 노조에 가입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사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죠. 노조의 노자도 모르는 그였습니다. 무턱대고 부천지역협의회에 문을 두드렸습니다. 다짜고짜 자기네가 파업을 준비하고 있으니 활동가 한 명을 붙여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때는 노조 간부도 아니었습니다. 일개 조합원이었죠. 지역협의회 입장에서는 생면부지의, 그것도 갓 서른이 됐을까 싶은 젊은이의 요구에 어안이 벙벙해졌죠. 

내부에서 논의한 뒤,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고 며칠 뒤에 온 인물이 이은영 씨였습니다. 나중에 알았다고 합니다. 지역협의회라고 해서 활동가들이 수십 명은 있는 줄 알았답니다. 하지만 부천지역협의회의 활동가는 이은영 씨를 포함해 2명에 불과했습니다. 미리 알았다면 그런 ‘만행’은 저지르지 않았겠죠. 
이유야 어떻게 됐든 이는 김경욱 씨에게 호재로 작용했습니다. 아무런 실무도 알지 못하는 김경욱 씨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게 이은영 씨였습니다. 하지만 첫인상은 좋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무뚝뚝하고 말도 많이 안 했어요. 생각해보면 다짜고짜 전임자를 지정해달라고 했으니 얼마나 황당했겠어요? 어색했죠. 저 역시도 마뜩잖았어요. 그냥 어디 공장 같은 곳에서 일하다 온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많이 배운 것도 아니고 일 경험도 없는 거 같고… 이 사람이 얼마나 하겠나 싶었죠. 차라리 장교로 지휘 체계도 다 배운 내가 낫지 않겠나 싶었어요. 한마디로 '간지'가 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후 하나하나 일을 겪어나가면서 자신이 얼마나 사람을 건성으로 보았나 자책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추후 까르푸 파업 때 다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야기를 돌려 볼까요? 구고신이 옥상에서 마트 직원들을 대상으로 노동조합이란 무엇인가를 교육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노동조합이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이라는, 인간의 권리라는 이야기를 피력합니다. 이 강연을 하는 인물은 박양희 부의장입니다. 김경욱 씨가 지역협의회에 도움을 요청한 뒤, 까르푸노조 부천지부 조합원들의 교육을 담당했습니다. 김경욱 씨도 박양희 씨의 교육을 듣고는 노조란 무엇인지를 알게 됐죠. 
하지만 교육은 쉽지 않았습니다. 교육 받으러 오는 노동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죠. 

 

"교육을 오후 8시 쯤 잡아요. 그러면 오전반 근무조는 집에 가고, 오후반은 일하고 있으니 안 나와요. 그렇다 보니 휴무인 사람만 나와요. 몇 명이나 될까요? 한 2명 되나? 그런 상황에서도 박양희 씨는 열강을 했어요. 그러면 나도 사람이 없으니 미안해서 자리에 앉았죠."

 

일반 직원들이 노조에 관심이 없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죠. 그러나 박양희 씨는 한 번도 정해진 강연을 미루거나 펑크 낸 적이 없었습니다. 두 명이든 세 명이든 직원이 오면 교육을 했습니다. 더구나 김경욱 씨는 한 번도 박양희 씨에게 강연료를 준 적이 없었습니다. 보다 못한 김경욱 씨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답은 어땠을까요? 

 

"이렇게라도 교육해야 진짜 조합원이 되지 않겠어? 한 명이 오더라도 해야지. 교육 받으러 왔는데 그냥 돌려보내? 내 걱정 말고 몇 명이든 데려오기나 해."

 

너무도 당연하고, 그리고 원론적인 답변이었습니다. 김경욱 씨는 이은영 씨와 박양희 씨를 보며 강철 같은 사람들이라고 느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수인에게 노동상담을 해주는 구고신은 누구일까요? 그는 박양희 씨와 이은영 씨가 속해 있는 부천지역협의회 자문노무사 김재광 씨였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부천지역협의회 사무실에서 무료상담을 했었죠. 김경욱 씨가 부천지역협의회와 연을 맺은 뒤, 어느 날 가보니 낯선 남자가 회의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은영 씨에게 누구냐고 물었더니 무료로 노동상담을 해 주는 노무사라며 물어볼 게 있으면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당시 김경욱 씨는 파업을 한창 준비할 때였습니다. 당시 김경욱 씨는 노동법을 잘 알지 못할 때였습니다. 
다짜고짜 ‘나 좀 도와줘요’라고 요청했답니다. 그 뒤부터는 까르푸 지부 중동지부 고문노무사식으로 모든 법률자문을 맡아주었습니다. 임금문제부터, 근무시간외 시간에 유니폼을 갈아입는 문제, 초과근무수당 계산하는 법 등 궁금한 것은 이 사람에게 모두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까르푸 노조 중동지부에는 노조원이 거의 없었습니다. 자연히 노조는 돈이 없었겠죠. 법률자문은 모두 무료로 해줬습니다.  

ⓒ이랜드일반노조


김경욱 씨는 이들 때문에 노동조합 활동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알았답니다. 이은영 씨 한 달 월급이 80만 원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민주노총에 돈이 없어 여러 노조 활동가들이 돈을 걷어 월급을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김경욱 씨는 점장과 싸우기 위해 노조에 가입했습니다. 이들이 김경욱 씨를 의심하고 도움 요청을 거절했다면 김경욱 씨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만약 군대에서도 이런 사람들, 즉 '구고신'을 만날 수 있었다면 군대를 나오지 않고 싸웠을 거라고 말하더군요. 군대에서는 아무도 자기를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가 군대를 나온 이유입니다. 
김경욱 씨는 또다른 이름 모를 '구고신'이 전국에 수도 없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세상을 조금씩 좋은 세상으로 바꾸려 노력한다고 합니다. 가끔 그런 생각도 해봅다고 합니다. 자기가 '구고신'(이은영, 박양희, 김재광)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까르푸 투쟁과 이랜드 투쟁은 시작하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까르푸 싸움, 그리고 이랜드 싸움이 다 끝난 뒤, 김경욱 씨가 해고자 신분으로 홀로 지낼 때였습니다. 파업의 영향으로 실업자에다 신용불량자 신세가 됐죠.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생계가 막막했던 시절이었죠.
그때 갑자기 이은영 씨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부천 지역 단체에서 매년 노동자에게 후원하는 게 있는데, 이번에 김경욱 씨에게 돈을 주기로 했다고 알려왔습니다. 당시 김경욱 씨는 부천 지역에서 활동하는 노동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단체는 6개월 동안 40만 원씩 김경욱 씨에게 줬습니다. 그 돈이 당시 김경욱 씨에게 큰 힘이 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죠. 
물론, 이 돈은 김경욱 씨 나름대로 갚았습니다. 이후 취업한 뒤, 월급을 받기 시작하면서 부터였습니다. 힘들고 어렵게 노조 활동 하는 곳에 5년 동안 일정 금액을 후원했습니다. 그것이 많은 '구고신'들에게 받은 것을 돌려주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 <송곳>에 등장하는 이수인, 그리고 구고신의 실제 모델 이야기는 어느 정도 한 듯합니다. 그럼 다음 편부터는 <송곳> 이수인의 실제 모델 김경욱 씨가 노조를 만들고 회사와 싸우는 과정을 하나하나 살펴볼까요? 

 

 

<송곳> 이수인이 노동자가 되기까지

[드라마 <송곳>에서 말하지 못한 이야기 ③]
허환주 기자 2015.12.01 06:41:13
김경욱 씨는 1998년 육군 대위로 제대했다.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잘나가던 군 장교가 갑자기 군복을 벗고 사회에 뛰어들었다. 군대에서 벌어지는 비리를 눈감기 힘들었다. 자기도 비리에 동참해야 하는 상황까지 가게 됐다. 내부에서 싸울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가 군복을 벗은 이유다.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사회에서 말하는 출세라는 것도 하고 싶었다. IMF가 터진 1998년 프랑스계 대형마트 까르푸에 입사했다. 시기가 시기였던지라 고용불안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회사 공채 1기였다, 1기 중 상당수가 나가고 동기는 몇 사람만 남아 있었다. 까르푸 일산점, 분당점, 천안점, 가양점, 시흥점, 부천점 등 신규매장을 돌아다니며 매장 오픈하는 일을 주로 했다. 영어를 어느 정도  한다는 소문을 듣고 프랑스계 매장 점장과 부장의 통역을 맡기기도 했다. 회사에서 최고실적을 내기도 했다. 우수 사원이었다.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라는 메리트도 있었다. 회사에서 인정도 받았다.

하지만 사람의 일이라는 게 마음먹은 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당시 그가 일하던 까르푸 중동점에 새로 온 점장과 문제가 생겼다.(직원들 물갈이를 예고했다.) 까르푸 중동점장인 프랑스인 기수드릴 씨는 중동점 점장으로 와서는 회의시간에 "나의 목표는 인간청소"라고 말하기도 했다.
  
어느날 부장이 당시 과장이었던 김경욱 씨를 회의실로 부르더니 점장의 지시라며 직원들을 수단과 방법 가리지 말고 내보내라고 지시했다. 아무 잘못도 없는 직원들을 해고할 수는 없었다. 군대로 치자면 자기 직속 부하들 아닌가. 자기가 보호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김경욱 씨는 그 자리에서 불법이라며 해고 지시를 거부했다. 그 날 이후 점장이 직접 김경욱 씨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김경욱 씨는 고민했다. 따를까, 떠날까, 싸울까. 김경욱 씨는 싸우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 도망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싸우기로 결심하고 방도를 찾았다. 까르푸에 노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인터넷에서 까르푸 노조를 찾아 가입원서를 제출했다. 2002년 말이었다. 당시 작업현장은 매우 험악하게 변해갔다. 까르푸 중동점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려는 점장과 그의 수족인 부장, 그리고 그들에게 부당하게 징계 받거나 받게 될 직원들 간 감정의 골이 깊어져갔다. 일부 젊은 사람 중심으로 '우리가 이대로 있으면 안 된다. 뭉쳐서 싸워야 한다'는 목소리도 흘러나 나왔다. 

ⓒJTBC


자연히 작업환경은 험악해질 수밖에 없었다. 모두 점장의 눈치를 보는 구조가 됐다. 점장이 중동점에 부임한 지 1년 만에 많은 직원이 사직서를 쓰고 떠났다. 회사를 떠난 직원들 대부분은 본인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점장의 압력과 횡포, 그리고 수모를 견디지 못해 떠났다. 김경욱 씨가 노조에 가입할 때의 회사 분위기였다. 

이때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하도 중동점 분위기가 흉흉하니 관리자 직급인 과장(김경욱 씨)이 노조에 가입한 것을 두고 까르푸 노조에서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김경욱 씨가 프락치가 아닌지 의심했다. 

게다가 당시 까르푸 노조는 300일 넘는 파업 끝에 단체협약을 체결했는데, 회사에서 단협 조항에 '김경욱은 노조 위원장을 할 수 없다'는 문구를 넣으려 했다. 회사로서는 회사시스템을 잘 아는 김경욱 씨가 노조위원장이 되는 게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회사에서 미리 선수를 치려 한 셈이다. 물론, 이는 부당노동행위이기에 무산됐다. 하지만 노조에서는 그런 전후맥락을 알지 못했다. 까르푸 노조 간부들이 김경욱 씨의 정체가 궁금한 이유였다. 

도대체 김경욱이라는 사람이 누구야. 

까르푸 중앙노조 간부들이 김경욱 씨에게 연락했다. '한 번 봅시다', 까르푸 중앙노조 위원장, 사무국장, 교선국장이 중동점으로 김경욱 씨를 만나러 왔다. 그때를 생각하면 김경욱 씨는 아직도 아찔하다고 했다. 

지부가 설립돼 있지 않은 중동점에는 김경욱 씨보다 먼저 노조에 가입한 조합원이 3명 있었다. 그들은 비밀 조합원이었다. 물론, 그들도 자기 뒤로 누군가(김경욱 씨) 노조에 가입한 사실은 알았지만 그게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다. 지부가 만들어지기 전이라 까르푸 노조는 중동점 소속 조합원을 공개하지 않았다. 

노조 간부들을 만나는 자리였다. 김경욱 씨는 그때 중동점에서 자기보다 먼저 노조에 가입한 비밀조합원을 만났다. 그날이 첫 대면 자리였다. 테이블을 등지고 앉아 있는 아주머니 세 분이 보였다. 어디서 많이 본 뒷모습이었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하면서 "안녕하세요" 인사하고 고개를 드는 순간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다름아닌 김경욱 씨 부하직원들이었다. 노조 간부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아주머니들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완전히 기겁했다. 물론, 김경욱 씨 정도는 아니었다. 김경욱 씨는 순간 도망칠까 고민했다고 한다. 까르푸 노조 위원장이 "서로 잘 아는 사이죠?"라면서 앉으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앉았단다. 황당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었다. 그래서 대뜸 그들을 쏘아붙였다. 그들에게 정색을 하고 물었다.

"아니, 여기 왜 오신 거예요?"

나중에 그들이 노조에 가입한 이유를 들으니 더 황당했다. 새로 부임해온 김경욱 씨가 자신들을 괴롭혀 노조에 가입했다는 것. 김경욱 씨가 무척이나 싫었다고 했다. 김경욱 씨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물론, 자기가 부하직원들보다는 프로모션 즉, 협력업체 직원들 편을 많이 들기는 했다. 매장이라는 곳에도 나름 계층이 나눠진다. 관리직-정규직-비정규직-협력업체. 이런 도식이다. 자연히 협력업체 직원들은 그 곳에서 '을 중의 을'이었다. 정규직 직원들은 이들에게 자기 일을 비일비재하게 시켰다. 김경욱 씨는 그게 싫었다. 협력업체 직원에게 일시키는 일체 행위를 금지했다. 자기 일은 자기가 하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하니 아주머니들 직원들 입장에서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자기가 협력업체 직원들을 관리하는 '갑질'을 그동안 해왔는데, 새로 온 과장이 그것을 못하게 하니 열이 받을 수밖에. 그런 과장이 무섭기도 하고, 자기를 괴롭히는 것 같기도 해서 노조에 가입했단다. 한마디로 김경욱 씨에게 '엿'을 먹이려 가입한 셈이었다. 

이들이 노조에 가입한 뒤부터 김경욱 씨에 관해 안 좋은 이야기를 줄기차게 했는데, 정작 당사자가 노조에 가입하니 '이 사람 뭐지?' 싶었다. 프락치가 아닌지 의심한 이유다. 
 
그 자리에 모인 모두가 당황하고 충격 받았지만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김경욱 씨였다. 부하직원을 보호한다고 노조에 가입했는데, 거꾸로 부하직원은 새 관리자가 자신을 괴롭혀 '보이콧'한다고 노조에 가입하다니…. 그때 아주머니 중 한 명은 김경욱 씨가 얼마나 싫었는지 남편이 경찰 간부였는데도 노조에 가입했단다.

그렇게 김경욱 씨는 자신의 부하직원 3명과 함께 노조활동을 시작했다. 시작부터 순탄치 않은 노조활동이었다. 사실 노조에 가입할 때만 해도 김경욱 씨는 노조가 뭔지, 노동권이 뭔지도 몰랐다. 그저 노조란 '회사에 대항해 싸울 수 있는 조직' 정도로만 생각했다. 막상 노조를 가입하니 제대로 노조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공부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을 통해 노조를 배웠다.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가 운영하는 '노동과 꿈' 사이트에 들어가 교안, 자료 등을 모두 훑었다. 민주노총 홈페이지에서 성명서, 보도자료 등을 일일이 찾아 읽기도 했다. 문제는 읽어봐도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일단 읽었다. 그렇게 지내다 노조가 무엇인지, 노동권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계기가 있었다. 

ⓒ프레시안(허환주)

노조에 가입한 김경욱 씨가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중동점에 지부, 즉 조직을 만드는 일이었다. 김경욱 씨가 중동점에서 노조활동을 시작할 때만 해도 까르푸 노조에는 지부가 3~4개 밖에 없었다. 안타깝게도 중동점은 지부가 없었다. 

노동조합을 잘 알지 못하는 그가 지부를 세운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고민 끝에 민주노총 부천지구협의회 문을 두드렸다. 2003년 3월쯤이었다. 지구협의회 의장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이후 일사천리였다. 지부를 만드는데 도움을 줄 담당자를 소개받았다. 그리고 담당자를 통해 조합원 교육도 받을 수 있었다. 전편에서 이야기한 박양희 씨와 이은영 씨가 이런 일을 모두 했다. 

당시 노조에 가입한 사람과, 가입하려는 사람들을 민주노총 부천지구협의회 사무실에 놓고 교육을 진행했다. 하지만 시작은 미약했다. 첫 교육에는 김경욱 씨를 포함해 달랑 직원 3명만이 교육에 참여했다. 김경욱 씨는 그때 교육이 아직도 기억난다고 했다. 사람이 적어서가 아니었다. 그때 교육은 김경욱 씨의 편견을 깨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노동자란 무엇인가'라는 강연이었다. 노동자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게 주 내용이었다. 그런데 개념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실제 법조항 등을 이야기했다. 김경욱 씨는 규칙이나 법을 매우 중요시 생각했다. 여기에는 군 출신이라는 점이 상당히 작용했다. 그 강연에서 노동3권이 헌법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노동3권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회사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노동3권을 왜 헌법이 보장해주는지 등을 듣게 됐다. 그간 전혀 몰랐던 내용이었다. 

군인 출신인 김경욱 씨가 그동안 가지지 못했던 새로운 시각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노동을 바라보는 시각이 '지식'에 국한됐다면 이후부터는 노동을 바라보는 '관점'이 생겼다고 해야할까.  

"계급은 군대에서 말하는 대위, 소위 아닌가. 장교와 사병과의 관계가 계급에 의해 구분 지어진다. 장교는 사병의 영원한 적이다. 군대에서 병사들이 항상 하는 말이다. 그러나 병사와 장교는 함께 생활한다. 노동자도 마찬가지다. 사용자는 노동자의 영원한 적이다. 하지만 같은 공간에 있지 않나. 그리고 목적도 서로 동일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노동자의 관점이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군대에 비춰서 이해하는 습관이 있다.(웃음)"

김경욱 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처음 교회 가서 하나님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그는 기독교 신자다. 그전만 해도 사실 노조 활동이 불안했던 김경욱 씨였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다. 김경욱 씨가 노조를 가입할 때만 해도 노조란 회사랑 싸우기 위해 필요한 조직적 수단에 불과했다. 그런 노조가 '빨갱이 집단은 아닐까. 사회 분열과 혼란을 초래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과 고민이 있었다. 군대에서 주입된 개념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동3권이 헌법에 보장돼 있다고 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육군사관학교에서 헌법을 수호한다고 맹세했는데 그 맹세를 계속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헌법을 수호해야 하는 군인이 앞으로도 헌법을 수호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긴 셈이다. 이것이 교회를 다니는 김경욱 씨에게는 영접과 비슷한 경험이었다. 이후 김경욱 씨는 노조에 가입한 조합원들에게 늘 '노동권은 헌법에 보장돼 있다'고 말했다. 

ⓒJTBC


대형마트에서 일하는 직원은 대부분 아주머니다. 이들이 노조에 가입하는 이유는 자기가 잘릴 위기에 있거나, 관리자에게 '엿'을 먹이려는 목적이 대부분이다. 물론, 그렇게 필요에 의해 가입한 사람들은 노조활동을 거의 안 한다. 김경욱 씨는 그런 이들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전도'했다. 

"전도는 하나님 말씀으로 해야 한다. '교회 가면 떡 준다. 빵 준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 내게 하나님 말씀은 '노동3권은 헌법에 보장돼 있다'는 거였다.(웃음) 그것의 의미를 노조에 가입한 사람들에게, 내가 교육받은 내용보다 훨씬 더 쉽게 이해시키려 노력했다. 생각해보면 '노동자란 무엇인가' 강연 이후부터 노조 활동을 제대로 시작했던 듯하다." 

깨달음을 얻었으나 노조활동은 쉽지 않았다. 조합원 수가 적은 노조였다. 당시 까르푸 노조 총 조합원 수는 100명도 안 되었고 조합비를 내는 조합원은 60여명으로 전체 직원수로 보면 노조 조직률이 1%에 불과했다. 어떻게든 조합원 수를 늘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세상 싸움은 쪽수 싸움 아닌가. 

 

 

<송곳> 이수인은 어떻게 노조를 조직했나

[드라마 <송곳>에서 말하지 못한 이야기 ④]
허환주 기자 2015.12.05 09:52:51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할 수밖에 없었죠."

김경욱 씨는 까르푸 중동점에 자기를 포함해 4명의 조합원이, 그리고 그들 모두가 자기 부하직원임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후부터 본격적인 싸움을 준비해야 했다. 제일 처음으로 중동점 지부를 만드는 일에 집중했다. 

달랑 4명으로는 지부를 설립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노조원을 늘리는 게 급선무였다. 조직력이 있어야 노조에도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조원 조직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직원들이 김경욱 씨를 싫어하는 이유도 컸다. 부하직원이 노조에 가입할 정도로 김경욱 씨를 싫어했으니 말 다한 게 아닌가. 

상황도 좋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노조에 가입한다는 게 더 어려웠다. 조직력이 약한 노조에 가입하는 순간, 불이익을 받을 수 있고, 자칫 해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조합원을 모으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머리도 굴렸다. 하나하나 계기를 만들면서 사람들을 조합원으로 끌어들였다. 

ⓒJTBC


한 번은 수산과 주임 한 명이 회사 징계위원회에 회부하는 일이 발생했다.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해고하려 한 것. 김경욱 씨는 그 직원이 잘못은 했지만 그렇다고 해고는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그 직원은 김경욱 씨의 부하 직원인 이모 씨의 친동생이었다. 김경욱 씨는 이모 씨를 설득했다. 징계 자체가 부당하기 때문에 부당징계 구제신청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거기에 노조원을 징계하면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까지 할 수 있고 형사고소도 가능하다고 설득했다. 

무엇보다 징계 자체를 무산시킬 수 있는 단체 행동을 하려면 노조에 가입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비노조원이 단체 행동을 하면 불법이지만 노조원의 단체 행동은 정당한 노조활동이므로 해볼만 하다는 취지로 설득했다. 이모 씨가 노조에 가입하자 야채청과 남자 직원들과 수산과 남자 직원들이 대부분 노조에 가입했다.  

수산과 주임에 대한 징계는 이제 노조와 회사의 싸움으로 커졌다. 김경욱 씨와 이모 씨 등 조합원들은 '징계는 부당하다'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매장을 돌아다녔다. 까르푸 중동점에서의 최초 시위였다. 매장이 발칵 뒤집혔다. 매장 내 피켓 시위는 징계 저지를 위한 것이었지만 노조 홍보 효과도 컸다. 중동점에 노조가 생겼다는 사실을 그때 안 직원들이 많았다. 조합원들의 피켓 시위는 기대 이상의 효과를 가져왔다. 회사가 수산과 주임의 징계 수위를 '해고'에서 ‘경고’로 낮췄다. 노조의 작은 승리였다. 분노와 함께 사기가 오른 조합원들은 다른 직원들에게 노조 가입을 적극적으로 권유하면서 조직이 점차 커져갔다.  

수산과 주임에 대한 징계 저지 투쟁은 노조가 직원들을 보호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준 사건이었다. 이후부터는 '회사가 징계하려 해도 노조가 보호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노조를 조직했다. 

징계건 이후에도 노조원을 조직하기 위해 여러 일을 했다. 까르푸 사측은 직원들이 물건을 슬쩍 가져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퇴근하는 여성 직원 가방을 자주 검사했다. 그것의 부당함을 지적했다. 여성 가방에는 생리대 등 사적인 물건이 들어 있었다. 인권침해였다. 반면, 과장, 부장 등 관리자 남성 직원 가방은 검사하지 않았다. 차별이었다.  

'가방 검사를 하려면 다 해야 하는 게 아닌가. 말단 직원은 도둑이고, 부장은 아닌가. 부장, 과장 등이 경품 등을 가져간 것을 본 것만 한두 번이 아니다'

ⓒJTBC


그런 내용을 글로 쓴 뒤, 인쇄해서 직원들이 옷 갈아입는 곳, 직원휴게실, 식당 등에 두었다. 출근하는 직원들에게도 나눠줬다. 김경욱 씨는 노조가 노동자에게 도움을 주는 조직이라는 인식이 있어야 노조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게 통했다. 회사가 가방 검사를 안 하기로 결정했다. 노조의 두 번째 승리였다.

회사가 허술했다. 가방 검사를 안 하니 '이것 봐라, 변화가 있네' 이런 기류가 형성됐다. 그간 무뚝뚝하게 노조를 바라보던 직원들이 우호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김경욱 씨는 직원들에게 '과장'이 아니라 '노조원'으로 인식됐다. 그러면서 조합원들도 점차 늘기 시작했다. 

김경욱 씨는 사실 이후부터 우후죽순으로 노조 가입이 늘어날 줄 알았다. 하지만 여전히 노조 가입자는 크게 늘지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계속 사람을 만나고 다녔다. A4용지에 직접 쓴 가입서를 시도 때도 없이 돌렸다. 그런 김경욱 씨를 직원들은 떨떠름하게 바라봤다. 

가장 조직이 안 되는 곳이 계산대(케셔) 쪽이었다. 계산대 직원 중엔 아는 이가 없었다. '맨땅에 헤딩' 식으로 부딪쳤다 한 사람당 10번 이상씩 가입서를 들고 가서 설득했다. 밥 먹으러 식당에 가면 주문하기 전, 서 있을 때도 노조 가입을 부탁했다. 

'여사님, 노조 가입하세요' 이러면 '밥이나 드세요'라는 시니컬한 반응이 돌아왔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다음날 점심 때면 다시 가입서를 돌렸다. 그 다음날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하다보면 어느 순간에는 통했다. '주세요' 하고는 무표정하게 가입서를 작성해 돌려주는 이들이 심심찮게 있었다. 

김경욱 씨는 그렇게 ‘낱알 줍기'식으로 노조원을 조직했다. 재미있는 점은 그렇게 노조를 조직할 때는 중동지부도 안 세워졌을 때였다. 까르푸 중앙노조에서 이렇다 할 직함을 준 것도 아니었다. 그는 왜 이렇게 노조 가입, 즉 노조 조직화에 매달렸을까. 

"다른 이유는 없었다. 노조는 조합원수가 많아야 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노조에 가입한 이유는 직원들을 해고하려는 중동지점장과 싸우기 위해서였다. 중동지점장이 나에게 부하직원 해고를 지시하지 않았나. 이를 거부하자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나가든지, 그에게 굴복하든지, 아니면 싸우든지, 이 세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더는 나가기 싫었다. 군대도 그렇게 나왔었다. 그렇다고 굴복하기는 더 싫었다. 남는 건 싸우는 것밖에 없었다. 그런데 혼자 싸울 수는 없었다. 조직이 필요했다. 저쪽은 대기업 점장 아닌가, 노조에 가입한 뒤 노조에서 싸울 준비를 한 것이다. 싸울 준비라는 게 거창한 게 아니었다. 노조에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일이 내게는 싸움의 준비였다. 조직력 약한 노조가 회사와 싸우면 100% 진다고 생각했다."

ⓒ프레시안

주목할 점은 김경욱 씨는 이 과정에서, 즉 파업을 준비하면서 비정규직도 조직화했다는 점이다. 비정규직을 조직한 이유는 매우 우연한 계기였다. 김경욱 씨가 중동점에 지부를 세우고 파업을 준비할 때였다. 구내식당에서 조합원들과 파업을 어떻게 진행할지 논의하는 자리였다. 한창 논의 중인데 소리 없이 생선코너에서 일하는 여성 직원이 다가왔다.

김경욱 씨는 얼굴만 아는 분이었다. 그 여성 직원은 천천히 다가와서는 '저도 파업하면 안 돼요?' 하면서 파업에 참여하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비정규직이었다. 자기도 노조에 가입하고 싶다고 했다. 당시 중동지부는 설립됐지만 비정규직 가입은 허용되지 않을 때였다. 노조 규약에는 비정규직도 가입대상이었으나 단체협약에는 금지돼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경욱 씨는 비정규직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았다. 눈에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그녀가 하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당황했다. 

"여사님, 안 돼요. 노조 가입하면 계약해지 될 수 있어요. 그리고 파업하면 바로 잘립니다. 안 돼요. 우리가 해고를 책임지기 어려워요." 

거절했다. 김경욱 씨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 말이 무척 부끄럽다고 했다. 정규직 노조에서 비정규직 조합원을 받지 않는 이유를 똑같이 말했던 셈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뒤,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가 한 말이 김경욱 씨의 마음을 건드렸다.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똑같아요. 나도 내 목소리라도 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그렇게 하다가 잘려도 노조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나도 같이만 하게 해 주세요." 

자기도 말할 기회를 달라는 부탁이 김경욱 씨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아무 것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비정규직 직원이었다. 그런 그녀에게서 그런 말이 나오니 깜짝 놀랄 수밖에. 

'이 사람들도 기회와 공간만 열어주면 싸울 수 있는데 그 기회를 우리가 봉쇄하고 있는 게 아닌가'.   

욕심도 생겼다. 파업에 참여하는 숫자가 매우 적었다. 이 사람들을 받아들이면 숫자가 늘어나지 않을까. 가입시켜 파업 참여 인원을 늘리자고 생각했다. 김경욱 씨는 그녀의 제안을 받았다. 

"좋습니다. 노조 가입을 받겠습니다. 같이 파업합시다. 다른 약속은 못하지만 이 약속은 드리겠습니다. 만약 파업하다 해고된다면 우리 노조가 끝까지 책임지겠습니다. 복직시켜주겠다는 게 아닙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 싸우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약속하겠습니다." 

결코 저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자 그녀도 '그러겠다'고 했다. 

이후 그녀와 함께 비정규직 노동자 3명이 파업에 참여했다. 나머지 2명은 노조 가입도 하지 않고 파업에 참여했다. 그동안 당한 설움과 억울함을 풀어낼 자리가 필요했다. 정규직 관리자였던 김 위원장도 파업 전에는 몰랐다고 했다. 그 사람들의 비참함, 그리고 고단한 노동의 삶…. 

70일 파업 후 체결한 합의사항에 파업에 참여한 직원에게 인사상 불이익을 주지 않겠다고 명시했다. 그 비정규직 세 사람을 위해 노조가 요구한 사항이었다. 나중에 알았다. 이들을 파업에 참여시킨 게 이랜드 싸움의 첫 단추였다는 것을.  

 

 

<송곳> 이수인, 파업 준비 중 만난 미지의 세계

[드라마 <송곳>에서 말하지 못한 이야기 ⑤]
허환주 기자 2015.12.08 05:56:03
 
김경욱 씨가 하나하나 이삭줍기 식으로 모은 사람과 까르푸 중동지부를 세웠다. 2003년 4월 말이었다. 김경욱 씨는 자신이 노조원을 조직하고 지부를 세웠기에 당연히 자기가 중동지부장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투표 결과 부하 직원인 이모 씨가 지부장이 되었고 김경욱 씨는 사무장이 되었다. 꼭 지부장이 되기를 원한 건 아니었지만 막상 투표에서 떨어지자 씁쓸하고 창피했다. 인덕이 모자랐을까. 그래도 마음을 다잡았다. 

'뭐가 됐든 지점장만 날리면 되는 거 되는 거 아닌가'

지부를 만든 뒤 할 일은 파업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싸우려면 제대로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파업을 중동지부 홀로 할 수는 없었다. 조합원이 50명도 안되기 때문에 파업을 한다 해도 회사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을 게 뻔했다.  김경욱 씨가 까르푸 노조 중앙에 파업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며 지원을 요청한 이유다. 

당연히 도와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까르푸 노조 중앙에서는 난색을 표했다. 당시 까르푸 노조는 장기간 파업 끝에 단체협약을 맺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죽을 고생해서 단체협약을 체결하고 이제 겨우 노조 활동해보려 했는데, 또 다시 파업하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었다. 1997년 결성된 까르푸 노조는 그간 단체협약을 체결하지 못하다 2003년 4월 7일 단체협약을 겨우 체결했다. 노조는 이를 위해 320여 일 동안 파업을 진행했다.

무노동‧무임금 원칙에 따라 장기간 파업을 하면서 까르푸 노조 위원장은 심각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런 상황에서 다시 파업을 하자고 하니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만 해도 김경욱 씨는 노조 위원장 개인 사정은 알지 못했다. 사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노조는 싸우는 조직인 줄로만 알았다. 

‘지부에서 싸우겠다고 하면 중앙에서 지원해주고 같이 싸워줘야 하는 게 아닌가? 우리를 대상으로 조합원 교육할 때는 그렇게 이야기해놓고 정작 싸우자고 하니 꽁무니를 빼는 건가' 

ⓒJTBC


그러나 파업하기 싫다는 노조 위원장에게 지부 사무장이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없었다. 중동지부만이라도 파업을 할 수 있게 파업 찬반투표만이라도 해달라고 부탁했다. 싸움은 중동지부만 한다며 중앙과 다른 지부는 파업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러자 중앙에서도 당황했다. 지부가 강경하게 나오니,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중앙노조에서 고민하는 가운데 김경욱 씨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미래를여는노동자연대(미래연대)라는 운동조직이었다. 미래연대는 당시 까르푸 노조를 좌지우지하는 일종의 '비선' 조직이었다. 까르푸 노조 조직국장, 교선국장 등이 미래연대 활동가였다. 미래연대 활동가 중 한 사람이 위장취업으로 까르푸에 비정규직으로 들어와 투쟁하다 해고된 상태였다. 까르푸 노조 위원장은 민주노총 서비스연맹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미래연대에 많이 의존하고 있었다.  

그런 미래연대 대표가 중동지부 사무장, 즉 김경욱 씨와 중동지부장을 보고 싶어 한다고 연락했다. 당시 김경욱 씨는 노동계 내 정파를 전혀 알지 못했다. 미래연대 대표라고 하니 '어마어마한' 조직의 '어마어마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가슴이 설렜다. 

'대표가 우리를 보자고? 우리가 뭐라고…'

열일 제쳐놓고 만났다. 서울 구로에 있는 사무실이었다. 김경욱 씨는 그 사무실을 찾아갔을 때를 잊지 못한다고 했다. 하나하나 생생하게 기억했다. 훗날 김경욱 씨가 이랜드 사태 관련 책을 쓴다고 마음먹었을 때, 생각한 첫 문단은 미래연대 사무실 방문기였다고 한다. 

미래연대 사무실은 구로단지의 후미진 2층 건물에 있었다. 사무실 앞에는 '빈민~', '비정규직 재정사업장' 등 여러 푯말이 붙어 있었다. 그 푯말을 뒤로 하고 안으로 들어가니 더욱 음침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철거 투쟁' 조끼를 입은 몇몇 사람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시크한 표정의 20대 초반 여성은 의자에 쪼그려 앉은 자세로 담배를 입에 물고는 컴퓨터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김경욱 씨에게 이런 분위기는 익숙했다. 군대에서 전투사령부를 찾아갔을 때와 비슷했다. 그런데 거기가 미래연대 사무실이 아니었다. 그곳을 지나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음침한 분위기를 넘어 어두컴컴한 곳에 다다랐다. 거기서 미래연대 대표를 만났다. 

일제시대 때 독립운동 하는 투사의 은닉 장소가 이런 곳이 아닐까 싶었다. 그 곳에서 만난 미래연대 대표는 얼굴은 까맣고 눈빛은 반짝반짝 빛났다. 이전에 인터넷에서 봤던 일제시대 좌파 활동가 같은 느낌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단단하게 생긴 사람이 어두컴컴한 곳에 앉아 있었다. 거기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김경욱 씨가 초긴장 상태인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얼마를 이야기했을까. 한참을 이야기한 끝에 사무실을 나왔다. 시계를 보니 새벽 6시였다. 사무실에 저녁 때 갔으니 장장 10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나눈 셈이었다. 술은 한 잔도 마시지 않았다. 그 긴 시간 동안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김 위원장은 새벽 6시에 사무실을 나온 뒤, 담배를 한 대 피우면서 지부장에게 "우리 검증 받은 거죠?" 이렇게 물었던 게 기억이 난다고 했다. 

ⓒ프레시안


12시간 가까이 미래연대 대표가 질문하면 대답하고 질문하면 대답하고를 줄기차게 반복했다. 그가 던진 수십 가지 질문 중 수없이 반복된 내용은 하나였다. 

'파업 이후 투쟁이 어려우면 조합원을 버릴 것인가, 구속이 될 수도 있는데 감당 할 수 있겠는가'

때로는 우회적으로 묻기도 하고, 직접적으로 묻기도 했다. 당시엔 몰랐는데 나오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미래연대 대표는 자기의 사상을 검증하고자 했던 게 아닌가 싶었다. '그들'이 보기에 김경욱 씨는 관리자 출신이었다. 투쟁하다 배신하기도 쉬울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10시간은 김경욱 씨가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고, 검증하고, 그리고 다짐받는 시간이었던 셈이었다. 

나중에 알았다. 활동가의 그런 행동이 얼마나 '싸가지' 없는 짓이었는지. 정파 활동가가 현장 노조 간부를 소환하는 것도 모자라 사상검증까지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냥 다들 그렇게 하는 줄 알았다. 

어쨌든 그러한 '사상검증'을 받은 뒤, 미래연대는 전폭적으로 중동지부 파업을 지원하겠다고 결정했다. 까르푸 노조 위원장을 설득해 파업에 들어가게 했다. 이후 일사천리였다. 2003년 6월 파업을 시작했다. 실질적인 파업 목적은 직원들을 해고하려는 중동지점장과 부장을 다른 지점으로 내보내고 고용을 보장받는 것이었다. 하지만 명목상으로 내놓은 것은 임금인상이었다. 파업 목적이 임금 인상 같은 근로 조건이 아니라, 문제 있는 관리자 전보 같은 인사 문제면 불법파업으로 몰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경욱 씨는 파업에 들어가면 본격적으로 회사와 싸울 수 있고 또 이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돌이켜보면 파업 첫날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적은 내부에 있었다. 

 

 
 
 
<송곳> 실제 모델의 좌충우돌 파업 이야기
[드라마 <송곳>에서 말하지 못한 이야기 ⑥]
허환주 기자 2015.12.12 09:07:18
파업 첫날부터 문제가 생겼다. 파업에 들어가기 전날, 사전회의에서 파업 일정을 논의했다. 파업한다고 집에서 노는 게 아니었다. 파업 기간은 대부분 조합원 교육으로 채워졌다. 여러 논의 끝에 파업 첫 시간은 '선동교육'을 하기로 했다. 선동교육은 가볍게 노동가요 알려주고 집회 때 함께 할 율동을 가르쳐주는 것으로 결정했다. 노조에 가입한지 채 몇 달도 안 된 조합원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자칫 노조가 이상한 조직으로 비춰질까 우려했지만 우려는 현실이 됐다. 첫 교육부터 잘못됐다. 

전날 결정된 사항이니 알아서 잘 진행되겠다 싶었다. 김경욱 씨는 다른 일 때문에 교육장을 나와 있었다. 그런데 조합원 한 명이 김경욱 씨가 있는 곳으로 헐레벌떡 달려왔다. 첫 교육이 시작되자 마자였다. 

"사무장님, 교육이 이상해요. 빨리 와보세요."

급히 교육장으로 달려갔다. 교육장에는 30대 후반 여성이 교육 강사로 와 있었다. 문제는 분위기였다. 선전교육을 시킨다면서 팔뚝질을 가르치면서 구호를 따라하도록 했다. 

"전~~ 민중, 총~~ 단결로, 자본주의~~ 박살내자!!!" 

내용도 내용이지만 목소리가 얼마나 비장하던지… 팔뚝질하는 주먹을 부르르 떨면서 운율에 맞춰 하늘로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이런 모습을 처음 보는 아주머니 조합원들은 겁에 질려 있거나 실망스런 표정을 짓고 억지로 따라하고 있었다.

'민중? 단결? 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 저 사람은 누구야?'

조합원들은 자신의 목소리로 부당한 노동 조건을 개선하려고 파업에 참여했을 뿐이다. 자본주의를 박살내려고 파업한 게 아니었다. 그런 이들에게 ‘민중, 단결, 자본주의’ 이런 용어를 쓰는 모습에 김경욱 씨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곧바로 중앙노조 교선국장을 찾아가 따졌다. 교선국장은 김경욱 씨에게 사과했지만 이미 늦었다. 김경욱 씨는 이후 회의에서도 강하게 항의했다. 하지만 미래연대에서는 김경욱 씨 항의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되레 조합원을 강하게 키우기 위한 교육을 김경욱 씨 때문에 하지 못했다는 분위기였다. 

ⓒJTBC


문제는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는 점이었다. 매일 이런 상황이 반복됐다. 다음날 파업 일정을 두고 몇 시간을 싸워야 했다. 김경욱 씨는 이들을 믿고 파업을 진행해야 하나 의구심이 생겼다. 

파업이 힘든 게 아니라, 내부의 미래연대 활동가들, 그리고 중앙노조 간부들과 논쟁하는 게 더 힘들었다. 김경욱 씨가 '내일 이렇게 하자'고 하면 그것을 해야 하는 이유와 명분 등을 하나하나 설명하고 설득해야 했다. 교육내용이 결정되면 강사는 누구를 섭외해야 할지도 논의해야 했다. ‘부천의 어느 활동가가 좋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나오면 미래연대는 '그 사람보다는 이 사람이 낫다'는 식으로 대응했다. 

나중에 알게 됐다. 조직 이념을 조합원에게 설파하고 교화하기 위해 자기네 쪽 사람을 '굳이' 교육자로 섭외하려 했던 거였다. 그러니 끝까지 물고 늘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하지만 당장이 급했다. 이해는 뒤로 미뤄두고 매일매일 싸워나가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파업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교섭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애초 3일만 파업하기로 했는데, 보름 가까이 파업이 길어졌다. 조합원들이 힘들어졌다. 더는 못하겠다며 복귀하겠다고 지부장과 김경욱 씨를 압박했다. 파업이 길어지면 업무 복귀자가 늘어날 것 같았다. 파업을 중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파업 투쟁을 현장 투쟁으로 전환하고 대신 간부들은 매장 앞에서 천막농성을 이어나가기로 했다. 이를 조합원 찬반 투표를 통해 결정하기로 했다. 파업한 지 14일쯤 됐을 때였다. 

하지만 이를 두고 미래연대가 문제제기를 했다. 파업 중단을 위한 조합원 찬반 투표는 하면 안 된다고 했다.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에 좀 더 싸워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조합원이 다 떨어져 나가도 한 사람의 조합원이 남아 있다면 그의 의지를 묵살하거나 꺾어서는 안 된다. 싸우고자 하는 조합원 중심으로 가야 한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만의 논리였다. 미래연대에서 '지도'받은 파업 연대학생들도 가세했다. 김경욱 씨가 복도를 지나가는데 갑자기 학생 한 명이 와서는 '트로츠키가 후퇴하는 혁명에 대해 이야기했다'면서 비아냥거리는 듯 말했다. 가르치는 말투였다. 육사 출신인 김경욱 씨는 트로츠키가 누군지조차 몰랐기 때문에 뭐라 반박할 수도 없었다. 김경욱 씨는 무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기분이 몹시 상했다. 김경욱 씨가 교선부장에게 그 이야기를 하자 교선부장이 학생을 나무랐다. 

김경욱 씨는 트로츠키를 언급하며 '후퇴하는 싸움'을 하고 있다고 자기를 비판하는 미래연대와는 생각이 달랐다. 

'파업이 장기화돼서 결국, 조합원이 3명 남으면 그 3명만으로 회사와 싸워야 하나'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싸운다면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기기 위해서는 전략상 후퇴도 하고 전진도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가 현장복귀를 결정한 이유였다. 김경욱 씨도 이것만은 물러설 수 없었다. 미래연대와 상당시간 싸운 끝에 조합원 찬반 투표를 진행했다. 찬반 투표 결과는 당연히 현장복귀였다. 

미래연대가 불쾌해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미래연대와의 갈등은 그 뒤부터 본격화됐다. 

이후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현장에 복귀한 뒤에도 교섭이 이뤄지지 않았다. 김경욱 씨는 답답한 상황이 반복되자 지부장에게 까르푸 계산 지점장을 만나자고 제안했다. 이 지점장은 다른 지점장과는 달리 직원들 사이에서 매우 존경받는 인물이었고 김경욱 씨와 지부장의 직속 상사이기도 했다. 김경욱 씨는 지부장과 함께 그를 모처에서 만났다.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이었다. 회사와 교섭하도록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자기가 힘은 없지만 애써보겠다고 했다. 그 정도 답변이라도 감지덕지했다. 

▲ 김경욱 씨. ⓒ이랜드일반노조

물꼬가 트였다고 생각했다. 기쁜 마음에 이후 노조 쟁의대책위원회(이하 쟁대위) 회의에서 지점장을 만났고, 노력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말했다. 쟁대위에는 까르푸 노조 위원장과 사무국장. 미래연대 활동가 2~3명, 중동지부장과 사무장, 연대학생 2~3명, 민주노총 부천지구협 활동가 1명 등 10여 명 정도가 들어갔다. 상당수가 미래연대 쪽이었다. 

지점장을 만났다고 말하는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 알고 보니 김경욱 씨가 한 행동은 비밀 접촉 행위였다. 미래연대에서는 지부장과 사무장이 조합원과 상의 없이, 그리고 쟁대위 사전 승인 없이 사측 관리자를 만난 것 자체가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파업 중인 노조 간부가 몰래 사측 간부를 만날 경우, 모종의 거래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금지하고 있다고 했다. 민주노조 원칙에 크게 위배된다고 덧붙였다. 

그런 원칙이 있는지 김경욱 씨는 알지 못했다. 어떻게든 교섭을 시작해야 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노동부에 가서 집회를 하면서 '교섭 주선해달라'고 소리치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원칙은 원칙이었다. 원칙과 규정을 어겼다는데 더 할 말이 없었다. 다시는 안 그러기로 약속 했다. 하지만 마음이 불편했다. 

'나를 믿지 못하는 건가'  

문제는 이후였다. 김경욱 씨가 만난 지점장이 노력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지점장에게 전화가 왔다. '그냥 밥이나 한 번 먹자'는 전화였다. 지부장과 상의했다. 협상하는 것도 아니고 1년 전 직장 상사와 식사하는 것인데 무슨 일이 있겠나 싶었다. 사실 절박한 심정도 있었다. 무슨 말을 할까 기대하며 약속장소에 갔다. 미래연대에서 이를 두고 또 지적을 하면 그냥 욕먹고 말자는 생각이었다. 여전히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김경욱 등을 떠밀었다. 김경욱 씨는 회사 회유에 넘어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지점장을 만났다. 안양 어딘가에서 밥을 먹고 맥주 한 잔을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때였다. 누군가 가게 문을 열고 쓰윽 들어왔다. 까르푸 인사총괄 상무였다. 점장이 데려온 거였다. 비공식적으로 만나 대화를 해보라며 데려왔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사측 교섭대표를 만났다. 하지만 영양가 있는 이야기는 없었다. 서로 '간'만 보다 헤어졌다. 별 소득은 없었지만 알려야 된다고 생각했다. 사측 인사총괄 임원을 만났다고 이후 쟁의대책위원회 회의에서 이야기했다. 숨길 이유가 없었다. 

"점장을 만나러 갔는데, 갑자기 사측 인사총괄 임원이 들어왔다. 본의 아니게 사측 대표를 만나 죄송하다."

순간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사측 교섭대표를 만나고 왔다는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인민재판'이 진행됐다.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신랄한 공격이 들어왔다. 

"우리는 지도부를 믿고 투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난번에 약속을 해놓고 또 개별 접촉을 했다. 이 싸움이 앞으로 어떻게 갈지 모르겠다."

미래연대 사무장이 강도 높게 비판했다. 반박하지 못했다. 미리 말하지 않고 만난 것은 잘못된 행동이었다고 생각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비밀리에 사측 사람을 만난 게 아닌가. 신랄한 비판을 한참 들었다. 그래도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미래연대 사무장은 이런 사실을 조합원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열을 올렸다. 결국, 김경욱 씨가 책임을 지겠다고 했다. 

"어찌되었건 개별 접촉한 것은 사실이니 그 책임을 지겠다. 지금이라도 사무장에서 물러나라면 나겠지만 아직 파업 중이니 이 파업을 끝내고 물러나겠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조합원들에게 공개하는 것은 파업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파업이 끝날 때까지 조합원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건에 대해서는 여기서 충분히 비판 받고 지적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분위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미래연대 활동가들은 이 사실을 조합원들에게도 알려야 한다고 고집했다. 이런 중대한 사건을 조합원에게 숨기는 것 자체가 어용이라며 조합원 전원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김경욱 씨는 재차 이 건 관련 내용을 공개하는 게 파업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니 공개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많은 공방 끝에 비공개로 결정이 났다. 

그런데 그 날 저녁, 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지부장이었다. 노조 홈페이지를 보라고 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급히 컴퓨터를 켜고 노조 홈피를 들어갔다. 그런데 거기에는 기가 막히는 내용의 글이 올라와 있었다.

 

 

파업 끝낸 <송곳> 이수인, 하지만…

[드라마 <송곳>에서 말하지 못한 이야기 ⑦]
허환주 기자 2015.12.15 07:53:40
'약속을 지키지 않고 사측 대표를 만났다. 책임을 진다고 했지만 이것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김경욱의 행위는 어용들이 하는 짓이다. 조합원들도 김경욱의 행위가 왜 잘못인지 알아야 한다'

'김경욱 동지의 개별 접촉을 규탄한다'는 제목으로 그간 김경욱 씨와 지부장이 개별 접촉한 내용이 세세하게 올라와 있었다.  

조합원들에게 알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던 사실이 모두 공개된 셈이었다. 미래연대 사무장이 쓴 글이었다. 김경욱 씨는 분노했다. 그 글을 보고 더는 안 되겠다 싶었다. 파업 중인 노조 집행부를 공개적으로 흔드는 것은 사실상 집행부를 끌어내리겠다는 의도라고 판단했다. 사실상 선전포고라고 생각했다.

곧바로 반박하는 글을 올렸다. 

'회의에서 관련 내용을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해놓고 이렇게 공개하는 것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민주노조 원칙인가'

대놓고 미래연대를 비판했다. 수면 아래 있던 미래연대와의 갈등이 수면으로 부상하는 순간이었다.   

ⓒJTBC


이후 인터넷 게시판에서 매일 치고받고 싸웠다. 그쪽에서 글을 올리면 김경욱 씨가 비판하고, 김경욱 씨가 올린 글에는 그들이 비판했다. 김경욱 씨는 그 과정에서도 자기 생각이 조합원들에게 지지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주머니 조합원들은 인터넷을 하지 않았다. 꼼수를 부렸다. 자기가 글을 쓰고 난 뒤, 자신이 쓴 글을 옹호하는 댓글을 달았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했던가. 어느날 교선부장이 김경욱 씨를 불러 조심스럽게 물었다. 미래연대 정식 회원은 아니었지만 미래연대의 지도를 받고 있는 준회원쯤 되는 활동가였다.

"사무장님, 노조 홈피에 글 올리고 직접 댓글도 달지 않았나요?"

김경욱 씨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시인하면서 어떻게 알아냈는지 물었다. 교선부장은 김경욱 씨의 글 IP와 댓글의 IP가 같았다고 대답했다. 교선부장은 노조 간부가 그런 행위를 하는 건 옳지 않다고 말했다. 공개적으로 문제를 삼을 수 있다는 뉘앙스의 말도 덧붙여졌다. 하지만 한창 인터넷 싸움 중이 아니었던가. 마냥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순간 노조 집행부가 노조 홈페이지는 IP를 남기지 않는다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

"이 댓글을 누가 썼는지 조사한 것인가. 분명히 노조 홈페이지 IP는 남기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지금까지 조합원들에게 거짓말을 한 것인가? 노조 홈페이지에 올린 글들의 작성자가 누구인지 사찰한 것인가. 노조가 이런 짓을 해도 되는가."

곧바로 따졌다. 교선부장은 당황해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로 한 대씩 치고받은 셈이었다. 그래서 그 건은 서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서로 약점을 물어뜯는 일이 비일비재해졌다. 불편한 관계가 지속됐다. 인터넷상에서 싸운 뒤, 다음날에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회의를 해야 했다. 자연히 회의 안건은 뒷전이 됐다. '그런 내용을 왜 올렸느냐'며 고성으로 싸우기도 했다. 소모적인 싸움이었다. 파업 중인데 외부보다 내부와 싸우는 데 공력을 낭비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 문제부터 먼저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경욱 씨는 미래연대를 노조에서 몰아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때까지는 회사와의 싸움도 잠시 유보하기로 결정했다. 까르푸 노조, 즉 중앙노조 위원장의 파업 복귀 건을 문제 삼은 것은 그때부터였다.    
  
아까 말했듯이 까르푸 노조는 파업 복귀 찬반 투표에서 조합원은 현장으로 복귀하고 간부들은 파업을 유지한다고 결정했다. 하지만 간부인 까르푸 중앙노조 위원장은 이를 어기고 현장에 복귀했다. 김경욱 씨는 당시엔 이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나름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래연대를 몰아내겠다고 마음먹은 뒤부터는 달라졌다. 중앙노조 위원장의 현장복귀 건을 문제 삼았다. 

"조합원 총회에서 결정된 사항을 위원장이 지키지 않았다. 위원장이 파업 현장에 없으면 어떻게 앞으로 싸움을 이끌어 나갈 수 있겠나." 

미래연대 입장에서는 할 말이 없었다. 한 명의 조합원이라도 남았다면 그 조합원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며 파업을 계속 해야 한다던 그들이었다. 중앙노조 위원장이 파업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할 말이 없어졌다. 

김경욱 씨는 그 건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간부파업은 회의에서 결정한 사항임에도 위원장은 이를 따르지 않고 현장으로 복귀했다'. 위원장을 지적하는 글을 노조 게시판에 올렸다. 위원장이 현장으로 복귀한 건은 노조 방침을 어긴 행위기에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논리로 인터넷에서는 물론 회의에서도 몰아붙였다. 사퇴하라고 압박했다. 

하지만 위원장은 끝까지 버텼다. 사퇴하는 게 쉽지 않았다. 300일 넘게 싸워서 겨우 단체협약을 맺어 놓은 노조였다. 이제 노조활동 좀 해 볼만 하겠다 싶었는데 사퇴가 웬 말인가 싶었다. 하지만 김경욱 씨는 사정 봐주지 않고 지독하게 물고 늘어졌다. 사실 위원장을 그렇게 몰아붙인 것은 교섭권이 위원장에게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김경욱 씨는 현장에 복귀한 위원장에게 교섭권이 주어진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교섭권을 중동지부로 가져오려 했다. 

ⓒJTBC


시간 앞에 장사 없다고 했던가. 그렇게 버티던 위원장도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사퇴했다. 현장 조합원 대다수가 중동지부 편이었다. 버티지 못했던 큰 이유였다. 위원장 사퇴와 동시에 미래연대도 까르푸 노조에서 철수하기로 했다. 지난한 싸움 끝에 미래연대를 몰아내게 된 것이다. 

물론, '뒤끝'은 있었다. 철수하면서도 이들은 노조 게시판에 장문의 글을 남겼다. 미래연대 활동가가 1편, 미래연대가 지도하는 연대학생들이 1편 썼다. 김경욱 씨는 지금도 그 내용을 기억했다. 

'어용 관료가 투쟁을 망쳤다. 계속 후퇴하는 투쟁을 하고 있다. 김경욱이 연대를 배신했다'

자기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신랄하게 비판했다. 김경욱 씨도 답변했다. 그때 쓴 글은 이후 그의 노조활동에 기준이 됐다. 

'연대해줘서 고맙다. 그런데 연대를 배신했다는 말에 대해서는 유감이다. 내가 당신들이 말하는 연대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앞으로 내가 생각하는 연대를 보여 주겠다' 

그렇게 그들과 깨끗이 결별했다. 하지만 중앙노조, 그리고 함께 했던 연대학생들이 하루아침에 싹 나가버리자 덜렁 지부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이후부터는 오롯이 지부 혼자 힘으로 싸워야 했다. 

그래도 마음은 편했다. 그들이 빠진 뒤부터는 회의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를 그대로 실행했다. 위험한지 아닌지 모르지만 일단 진행하고 보자는 식이었다. 마음 가는 대로 전략을 짜고 회사와 싸웠다. '하면 안 된다', '투쟁의 의미가 퇴색된다' 등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사라지니 운신의 폭이 커졌다. 김경욱 씨는 그 시간동안 노조의 역량이 무척 커졌다고 자평했다. 

그렇게 싸워서 파업 70일 만에 파업을 마무리했다. 임금인상안도 이뤄냈고 본래 파업 목적이었던 중동지점장과 부장을 아웃(다른 매장으로 전출하는 것)시키기로 이면 합의했다. 본래 목적을 달성한 셈이었다. 

잠정합의안이 나오고 조합원 총회를 통해 최종 합의안을 확정하려 했다. 회사 옥상에서 70일 파업을 끝내는 조합원 찬반 투표를 진행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투표를 시작하려는 찰나, 그 자리에 두 달 가까이 안 보이던 연대학생 3~4명이 나타났다. 미래연대에서 지도받는 이들이었다. 학생들은 손에 들고 온 전단지를 조합원 총회장소에 들어와 조합원들에게 배포하기 시작했다.  

'잠정합안을 찬성하면 안 됩니다. 이 투쟁은 계속해야 합니다.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잠정합의안은 우리의 요구안에서 한참 후퇴한 안입니다. 노조가 승리한 게 아닙니다'

김경욱 씨 생각으로는 후퇴한 안이 아니었다. 하지만 미래연대의 생각은 달랐나보다. 싸우려는 단 한 명의 조합원이라도 남아 있다면 끝까지 싸워야 했을까. 김경욱 씨는 여전히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는 대다수 조합원들도 동의했다. 압도적 차이로 잠정합의안이 노조 총회를 통과됐다. 그렇게 중동지점 70일 파업은 막이 내렸다. 

▲ 김경욱 씨. ⓒ프레시안(허환주)


하지만 70일 파업 타결 뒤, 김경욱 씨는 중동점을 떠나야 했다. 까르푸 사측은 중동지점장을 다른 지점으로 보내는 조건으로 사무장인 김경욱 씨도 중동지점에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애초 파업 목적을 달성했기에 순순히 응했다. 인천 계양구에 있는 까르푸 연수원으로 발령났다. 

주목할 점은 발령 날 때, 김경욱 씨 신분은 중동점지부 사무장에서 까르푸 본조 노조 위원장으로 껑충 뛰었다. 70일 파업 중 까르푸 위원장이 위원장 자리를 사퇴했기 때문이었다. 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 자리를 김경욱 씨가 맡았다.

노조 위원장 신분으로 그곳에 갔지만 연수원이다보니 직원이 아무도 없었다. 가보니 부장, 과장 각각 1명이 연수실 사무실에 있었다. 거기에 김경욱 씨 책상이라고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책상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컴퓨터도. 나가라는 의미였다. 회사에서 일명 '찍힌' 직원에게 자주 쓰는 방법이었다. 조직할 직원도 없으니 노조 위원장 입장에서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김경욱 씨는 신경 쓰지 않았다. 출근한 뒤 컴퓨터가 없는 것을 본 뒤 곧바로 한 마디 했다. 

"컴퓨터 안 줘요?."

그렇게 직원연수원에서 다시 싸움을 시작했다. 

 

 

 

컴퓨터 한 대 받으려는 '찌질한' 싸움

[드라마 <송곳>에서 말하지 못한 이야기 ⑧]
허환주 기자 2015.12.19 09:18:04
새로운 싸움이 시작됐다. 그렇다고 파업과 같은 거창한 싸움은 아니었다. 컴퓨터를 주지 않는 회사에 컴퓨터를 달라고 요구하는 싸움이었다. 한마디로 '찌질한' 싸움이었다. 

컴퓨터는 몇 차례 요구에도 주지 않았다. 인사과에 문의했으나 '줄 의무는 없다'고 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70일 파업기간 동안 까르푸 프랑스 본사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까르푸가 여러 국제 기구와 체결해 놓은 협약이나 헌장 같은 자료들을 다운받아 한국어로 번역해 둔 적이 있었다. 혹시 파업할 때 도움이 될까 해서였다. 

국제 협약과 인권 헌장 등의 주요 골자는 노조 활동을 보장해야 하면 노조원은 물론이고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까르푸와 협약을 체결한 국제 상업 연맹(UNI)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노동 관련 담당자 이메일을 찾아내 그에게 메일을 보냈다. 내용은 간단했다. 

'나는 한국 까르푸 노조 위원장이다. ~~ 해서, ~~ 왔는데, (컴퓨터를 주지 않는) 차별을 받고 있다. 까르푸가 협약을 위반하고 있으니 조사해서 조치하기 바란다. (중략) ~' 

며칠 후 반응이 있었다. 메일을 보낸 며칠 후, 국제상업연맹 한국지사 담당자가 김경욱 씨에게 전화해서 만나자고 했다. 반가운 마음에 곧바로 서울 모처에서 만났다. 그쪽에서는 노조 위원장이 탄압받고 있다 길래 무척 큰 사단이 일어난 줄 알았다. 

한국지사 관계자가 '어떻게 탄압받고 있느냐'고 김경욱 씨에게 묻길래, '컴퓨터를 안 준다'고 답했다. 그러자 고작 그런 일로 이메일을 보냈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별다른 말없이 '알았다'는 답변을 들은 뒤 헤어졌다. 

그러나 그 뒤에도 컴퓨터는 지급돼지 않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김경욱 씨는 줄기차게 물고 늘어졌다. 까르푸가 국제상업연맹과 체결한 협약 내용을 노조 소식지에 넣어 뿌렸다. 

'프랑스에서는 노동인권을 이렇게 지키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안 지키고 있다. 이건 인종차별이다'

그러자 한국까르푸 본사에서 난리가 났다. 프랑스인에게 가장 민감한 게 인종차별이었다. 결국, 국제상업연맹 한국지사 담당자가 유럽 본사에 연락했고 그쪽에서 다시 한국 까르푸에 연락하는 과정 끝에 김경욱 씨는 컴퓨터를 받을 수 있었다. 지난한 과정이었다. 

ⓒJTBC


김경욱 씨에게 컴퓨터는 최첨단 무기나 다름없었다. 김경욱 씨는 컴퓨터를 이용해 노조 소식지를 제작했다. 노조위원장은 반전임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하루 4시간 동안 노조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근무시간인 오전에는 노조 홍보 소식지를 만들었다. 연수원에서 김경욱 씨에게 아무런 일도 주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자연히 아무도 뭐라 하는 이가 없었다. 그렇게 만든 소식지는 노조 활동하는 오후 시간에 뿌렸다. 

회사가 김경욱 씨를 연수원에 보낸 이유는 현장 노동자와 그를 고립시키기 위해서였다. 연수원에는 노동자를 교육하는 공간으로 평상시 일하는 노동자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사의 착각이었다. 연수원이 현장 노동자를 만나지 못하는 곳이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었다. 생각을 조금만 다르게 하면 매일 100명 넘는 전국 매니저들이 교육받으러 오는 곳이 연수원이었다. 김경욱 씨는 이들에게 매일 노조 홍보 소식지를 나눠줬다. 휴게실 테이블에도 노조 소식지를 올려놓았다. 밥 먹으러 갈 때도 소식지를 나눠줬고 식당 벽에도 소식지를 붙였다. 

연수원 이사는 미칠 노릇이었다. 교육시간에는 까르푸가 '좋은 회사‘라고 하는데 김경욱 씨가 뿌리는 소식지에는 '노동 착취하고 노조 탄압하는 나쁜 회사'라고 쓰여 있었다. 연수원 교육의 실효성이 문제가 됐다. 직원들이 회사 교육 받으러 왔다 되레 노조 교육을 받고 가는 식이었다. 한국까르푸 본사에서도 이를 모를리 없었다. 김경욱 씨 귀에도 한국까르푸 인사상무가 사장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인사상무가 이를 바득바득 간다는 소식도 들렸다. 

얼마 안 가 일이 터졌다. 김경욱 씨가 출근했는데 덩치 큰 보안요원이 사무실을 막았다. 그 옆에는 인사상무가 서 있었다. 그가 대뜸 김경욱 씨에게 '당신 대기발령이니 여기서 나가라'고 통보했다. 무슨 소리냐며 사무실로 들어가려 했지만 불가항력이었다. 보안요원이 몸으로 그를 막았다.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만은 없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었다. 김경욱 씨는 한국까르푸 인천 계산점 지부에 연락했다. 당시 연수원은 인천 계산점 매장 맨 윗 층에 있었다. 잠시 후 노조원 몇 명이 연수원으로 달려왔다. 이들은 노조 위원장이 사무실에 들어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는 곧바로 다른 노조원들에게도 전화했다. 곧바로 10여 명의 노조원들이 더 올라왔다. 

분위기가 반전됐다. 대치되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 사이 김경욱 씨는 인천지방노동사무소에 신고했다. 

"난 노조위원장인데 회사가 사무실에 들어자지 못하게 막고 있다. 부당노동행위 현장에 출동하여 조치를 취해달라“ 

뭐든 해야겠다고 생각해 전화했는데, 십여분 쯤 지나서 근로감독관이 달려왔다. 알고 보니 인천지방노동사무소가 회사 바로 앞에 있었다. 인천 북부지청이 연수원에서 두 블록 거리에 있었다. 근로감독관은 상황을 보자마자 인사상무를 불러 질타했다. 근로감독관이 김경욱 씨를 빨리 들여보내라고 했다. 그러자 바로 꼬리를 내리고 보안요원을 철수시켰다. 그러자 김경욱 씨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사무실로 들어갔고 노조원들은 박수를 치며 다시 매장으로 돌아갔다. 김경욱 씨는 자리에 앉자마자 다시 소식지를 만들었다.  

ⓒ프레시안


회사의 강제 인사 조치는 실패했다. 이로 인해 궁지에 몰린 인사상무는 김경욱 씨를 인천 계산점으로 정식 발령을 내버렸다. 재미있는 점은 김경욱 씨 반응이었다. 김경욱 씨는 못 가겠다고 버텼다. 사실 굳이 갈 이유가 없었다. 여기서도 충분히 노조활동을 할 수 있었다. 

김경욱 씨가 버티자 회사는 '인사명령을 거부하면 징계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징계가 쉽지 않았다. 단체협약에는 '노조 위원장 인사임명은 노사 간 충분한 협의 하에 결정한다'고 돼 있었다. 노조 위원장과 협의하지 않고 인사를 단행하는 것은 단협 위반이었다. 김경욱 씨는 그것을 물고 늘어졌다. 기 싸움을 벌인 셈이다. 

김경욱 씨는 느긋했다. 급한 건 회사였다. 김경욱 씨도 노조원들이 있는 점포로 발령내면 순순히 응할 줄로 알고 정식 발령을 냈는데, 김경욱 씨가 오히려 단협위반으로 고소하겠다며 인사 발령을 거부하니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인사 상무가 일을 매끄럽게 처리하지 못해서 김경욱 씨에게 반격당하는 형국이었다. 인사 상무가 김경욱 씨의 인사 발령에 대해 협의하자는 제안을 해 왔다. 회사는 형식적인 협의를 진행하려는 의도였지만 그는 협의 날짜를 최대한 늦게 잡았다가 다시 연기하는 방식으로 협의 절차를 지연시켰다. 첫 번째 협의하는 날 인사 상무는 회사의 인사 발령을 받아들이라고 종용했다. 김경욱 씨는 한번 만난 걸로 협의가 끝난게 아니라고 버텼다.

"단협을 자세히 봐라. '충분히' 협의하라고 하지 않았나. 한 번 협의하고 끝나는 것은 충분한 협의가 아니다." 

회사 관계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언제로 다음 잡을 까요' 하길래 '한 달 후에 합시다'라고 했다. 회사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일주일 후에 하자고 했다.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바쁘다는 게 이유였다. 그렇게 해서 한 달 뒤에 또다시 만났다. 회사 관계자는 죽을 맛이었다. 

"도대체 왜 그러느냐. 어떻게 하면 좋겠냐."

김경욱 씨는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김경욱 씨는 인천 계산점에 내려가는 조건으로 부천에 노조 사무실을 마련해 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한국까르푸 노조 사무실은 노원구 중계점에 있었다. 전임 위원장이 중계점 출신이어서 노조사무실을 중계점에 두었던 것이다. 인천에서 일하는 김경욱 씨는 노조 사무실에 거의 가 보질 못했다. 게다가 김경욱 씨는 부천 중동점에서 노조활동을 시작했다. 그곳에 노조원이 가장 많았으므로 노조 사무실은 부천에 있어야 했다. 당연히 회사에서는 펄쩍 뛰었다.  

 

 

 

기어코 한 번은 이기고 싶을 때

기업이 망해도, 매출이 떨어져도 노조 탓이다. 이게 말이 되나 싶은데 이 말이 통하는 게 한국이다. <송곳>은 이렇게 오랜 시간 누적된 노조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깨고 있다.

백상웅 (시인)  |  chanmool@sisain.co.kr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428호] 승인 2015.11.28  09:36:29

 

최규석의 <송곳>은 재미있다. 재미있기에 나는 이 만화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 <송곳>(사진)도 챙겨 보고 있다. 주말 밤 9시40분이 되면 (내용을 알고 있는데도) “이놈, 저놈, 아이고, 아싸” 하며 드라마를 시청한다. 드라마가 끝나면 만화책을 꺼내들어 방송한 분량의 내용을 복습하고 다음에 펼쳐질 이야기를 예습한다. 꼭 갑과 을의 대결, 노조 이야기 등 작품이 주는 메시지 때문에 다시 읽는 것은 아니다. <송곳>의 무시무시한 구성력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배경으로 보이는 인물을 빼도 작품이 무너질 것 같고, 에피소드마다 작은 위기와 사건의 해결을 반복하고, 곧장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게 하니, 빠져들밖에. 만화가 주호민은 이렇게 추천사를 썼다. “이런 소재로 이런 재미를 뽑아낼 수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한마디로 심각하게 재밌다.”

<송곳>이 재미있다는 사람도 있고, 불편하다는 사람도 있다. 지난해 방송된 <미생>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수많은 청춘들은 ‘장그래’와 신입사원들을 보며 우는 동안, 전국의 많은 과장님들은 자신을 ‘오 과장’이라고 생각했다. <미생>은 ‘을’ 위에 군림하던 ‘갑’도 결국은 누군가의 ‘을’이라는 것을 보여주며 ‘어쩔 수 없는 세상’을 풀어갔다. <송곳>도 ‘어쩔 수 없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어쩔 수 없는 세상에서 ‘불편’하게 살고 있는, 그래서 그것을 바꾸려는 사람들의 이야기. 우리가 <송곳>을 보며 불편한 건, 어쩌면 우리 대부분이 제 자신이 겪는 ‘불편’을 참는 사람이기 때문일 테다. 그냥 인정하면 속 편할 것 같다. 우리는 긴 시간 노동자였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너무 오랜 시간 침묵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조남진</font></div>  
ⓒ시사IN 조남진

 

정치권력은 잊을 만하면 ‘종북’을 외치며 빨간 펜을 들어 아무렇게나 채점을 한다. 아직까지 이런 멍청한 소리들이 선거에 큰 영향을 주는 나라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당신 좌파야?” 하면, “응, 나 좌파야” 하면 될 일인데, 일부 정치인들은 그렇게 불리길 꺼려한다. 이와 같은 수법으로 기업은 노동자를 체크한다. 기업은 툭하면 노조를 ‘귀족 노조’니 ‘강성 노조’니 몰아세우며 상식적이고 정당한 논의 자체를 거부한다. 기업이 망해도, 매출이 떨어져도 노조 탓이란다. 이게 말인가 싶은데, 이 말이 통하는 게 우리나라다. <송곳>은 이렇게 오랜 시간, 본의 아니게 우리 안에 유입된 노조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깨고 있다. 그것도 ‘심각하게 재밌는’ 그리고 세련된 이야기로.

마냥 주저앉아 우는 대신 기억해야 할 대사

우리는 “열심히 안 해서 그러는 거야” 하는 소리를 들어가며, 괜히 자책하며 살아왔다. 회사에서는 눈치를 보고 월급날에는 순식간에 비어가는 통장이 참 속상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면서 이겨본 기억이 별로 없고, 잘나가나 못 나가나 노동을 하며 먹고사는 사람이다. 그런데 살면서 한 번은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 기어코 한 번은 이기고 싶을 때, 그러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을 때…. ‘시시한 약자’인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나는 마냥 주저앉아 울고 있기는 싫다. 그때가 되면 <송곳>의 이 대사를 기억하고 싶다. “당장 가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회사로부터 퇴사 압박이나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노조를 찾아주십시오.”

다만, 드라마 <송곳>이 해결할 문제가 있다. 드라마 <송곳>은 배경음악 라이브러리 업체 ‘주식회사 로이’와 음악 공급 계약을 했다. 로이는 작곡가들에게 저작권을 영구히 양도하지 않으면 회사를 나가라고 했으며, 멀쩡히 존재하는 저작권자를 유령처럼 내몰고, 소액의 ‘창작지원금’을 주면서 저작권을 가지고 간다고 한다. 작곡가의 노동을 착취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름까지 지우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 <송곳>부터 먼저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싸웠으면 한다. 그렇지 않을 때는 ‘송곳’에 찔릴 수도 있으니까.

 

 

"박근혜, 6월 항쟁도 IS 테러에 빗댈 건가"

[기자의 눈] '복면 금지'에 앞서 '최루액 금지' 하라
성현석 기자 2015.11.27 15:42:01

박근혜 대통령은 투쟁에 나서면 끝장을 본다. 투쟁을 입으로 하지 않는다. 끝장을 보기 전엔, '립 서비스'로라도 '이제는 투쟁이 끝났다'라곤 하지 않는다.

박근혜의 거리 투쟁

10년 전에 알아봤다. 지난 2005년 말, 사립학교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사학 이사장의 전횡을 견제하자는 법안이었다. 박 대통령은 영남대 이사장 및 이사를 지냈다. 1980년대에 입시 부정 및 비리가 잇따라 불거지면서 영남대를 떠났었다. 박 대통령은 사학법 개정안에 대해 할 말이 많았을 게다. 박 대통령은 '사학 민주화'를 주장해 왔던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에 대해 '해충'이라고 불렀다.

법안 통과와 함께,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 대통령은 장외투쟁을 시작했다. 53일 동안 거리를 누빈 뒤에야 국회로 들어왔다. 그래도 투쟁을 접지 않았다. 사학 기득권을 공유하는 종교계와 연대 투쟁을 했다. 목사들이 승려처럼 삭발을 했다. 결국 사학법은 지난 2007년 7월 재개정됐다. 사학 이사장을 견제할 수 있는 조항은 대부분 삭제됐다. 사학 운영의 투명성을 보장하는 장치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당수 비리 사학은 잠깐 민주화의 봄을 맛볼 듯 했으나, 다시 '이사장 독재'의 겨울로 돌아갔다. 그리고 계속 한겨울이다.

10년 전, 비리 사학을 몇 곳 취재한 적이 있다. 당시는 노무현 정부 시절이었다. 세상이 꽤 민주화됐다고 믿었는데, 사학은 예외였다. 민주의 바다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섬들. 그게 사학이었다.

비리 사학, 역사부터 새로 쓴다

대부분 공통점이 있었다.

우선, 역사를 새로 쓴다. 친일파, 군부 독재의 말단 부역자, 비리 기업인, 세금이 싫었던 땅 부자였던 초대 이사장을 완전히 새 사람으로 둔갑시킨다. 역사 날조다. 그걸 학교 구성원에게 가르친다. 역사는 하나뿐이므로, 의문은 용납하지 않는다. 그 단계를 지나면, '신성화' 작업을 한다. 초대 이사장은 '반인반신'쯤 된다. 교사를 동원해 이사장 가족 묘소의 풀을 뽑게 하는 건 예사다. '반인반신'의 묘소에 난 풀을 뽑는 걸 오히려 영광으로 알라는 식이다.

그리고 학교 운영 정보를 꽁꽁 숨긴다. 그러니까 토론도 없다. 뭘 알아야 묻고 대답할 게 아닌가. 교무실엔 교장의 지시, 그리고 받아쓰기만 있다.

그래도 굳이 따져 묻는 사람들이 있다. 주로 전교조 소속 교사다. 이사장 측은 이들과 투쟁한다. 이념이 달라서 싸우는 게 아니다. 전교조 소속 교사들 가운데서도, 보수적인 이들이 꽤 있었다. 전교조 영향력이 컸던 노무현 정부 시절엔 더 그랬다. 이사장 측이 싫었던 건 이념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묻고 따지고,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게 싫었던 게다.

투쟁에 나서면 끝장을 본다. 방식도 대개 비슷하다. 첫 단계가 '왕따'다. 따져 묻는 교사를 고립시킨다. 다른 순수한 교사와 다른, 이상한 교사라는 낙인을 찍는다. 거기서 성공하면, 다음은 쉽다. 징계와 소송이 이어진다.

3년 전의 의문

지난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경제 민주화를 내걸었을 때, 사학법 재개정 투쟁이 생각났었다. 사학 민주화와 경제 민주화는 얼개가 거의 같다. 사학 이사장의 권한을 법에 따라 규제하자는 게 '사학 민주화'였다. 아울러 사학 운영에 다양한 학교 구성원이 참가하고, 관련 정보를 공개하자는 거였다. 같은 논리를 재벌 총수에게 적용한 게 '경제 민주화'다. 그런데 사학 민주화를 극력 저지했던 후보가 경제 민주화를 내건다? 이상했다. 그래서 박 후보 측이 경제 민주화의 상징으로 영입했던 김종인 박사에게 물었다. 당시 인터뷰 내용을 옮긴다. (☞관련 기사 : "내 나이가 몇인데, 누구 밑에서 심부름 하나")

"프레시안 : 경제 민주화도 결국 민주화 아닌가. 그러니까 다른 영역의 민주화와 동떨어진 건 아니라고 본다. 다른 부문에선 민주주의가 후퇴하는데 경제만 민주화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박 후보는 다른 정치, 사회 영역에선 민주화에 대한 관심이 낮아 보인다. 예컨대 사립학교법 문제를 보자. 이사장의 전횡을 막는 '사학 민주화'와 관계가 깊다. 하지만 박 후보는 사학 개혁에 몹시 강한 거부반응을 보였다. 박 후보는 사학 개혁을 '이념 투쟁'이라고 했는데, 실제론 그렇지 않다. 사립학교 교사, 학생들에겐 삶의 문제다. 사학 민주화는 반대하면서 경제 민주화만 하자는 논리가 과연 성립할까. 사학 개혁 등 다른 문제에선 기득권층을 옹호하던 사람이 재벌 문제에서만 반대 입장을 취한다는 게 가능하겠느냐는 말이다.

김종인 :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어차피 대선 후보가 모든 분야를 샅샅이 알 수는 없다. 영국의 처칠 수상이 지도자의 덕목으로 크게 두 가지를 꼽았다. 하나는 역사책을 많이 읽어서 국가의 흥망성쇠를 꿰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나라가 망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다른 하나는 사람을 보는 눈이 밝아야 한다는 것이다. 후보가 원칙을 갖고 사람을 잘 골라 쓰면 별 문제 없지 않을까 싶다."

안타깝게도, 당선 이후 박 대통령은 "원칙을 갖고 사람을 잘 골라" 쓰지 않았다. 임기 초반, 윤창중 청와대 대변인이 여대생을 성추행 했다. 그 뒤로도 온갖 인사 참극이 끊이지 않았다. '경제 민주화'는 이제 기억하는 사람도 드물다. 대선으로부터 고작 3년이 지났을 뿐인데, 그렇다.

박 대통령은 아직 끝장을 못 봤다

이젠 선명해졌다. 박 대통령은 이 나라가 족벌사학처럼 되길 원한다.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던 시절의 영남대처럼 되길 바란다. 10년 전, 사학법 개정에 반대하며 장외 투쟁에 나섰던 그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학교에 민주주의가 들어서면, 기업과 정부 역시 영향을 받는다. 그럼 민주주의의 흐름을 돌이킬 수 없다. 박 대통령의 아버지가 만든 세상은 민주의 물결에 영원히 떠내려간다. 그래서 10년 전, 박 대통령은 그토록 가열 차게 투쟁했던 게다.

박 대통령이 최근 긴급국무회의를 소집해 복면을 하고 시위에 참가한 시민들을 IS(이슬람 국가) 테러리스트에 빗대는 말을 했다. 여당은 복면금지법을 추진하고, 정부는 법 통과와 관계없이 처벌을 강화한다고 한다.

복면을 금지하면, 그걸로 끝날까.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투쟁에 나서면 끝장을 본다. 그 다음엔 시위 자체를 막으려고 들 것이다. 그 뒤엔 '다른 의견'을 찍어 누르고, 따지고 묻는 걸 죄악시 할 게다. 박 대통령이 10년 전에 거리투쟁으로 지켜냈던 비리 사학이 대개 그랬다.

복면 싫다면, 최루액부터 금지하길

▲ 1987년 6월항쟁 당시 연세대학교 앞에서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다. 최루탄 피격 직후 모습을 정태원 당시 <로이터> 기자가 촬영했다. 이한열 열사를 안고 있는 학생도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한열 열사 역시 다른 사진을 보면, 이날 집회에서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수건 혹은 마스크는 최루탄으로부터 호흡기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이었다. 그럼에도 최루탄으로 인한 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정태원

박 대통령이 영남대 이사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게 지난 1988년이다. 그보다 한 해 전엔, 영남대에서 대규모 부정입학 사건이 드러났다. 1987년 6월 항쟁을 계기로, 사회 곳곳의 민주 의식이 팽창한 결과였다. 당시 영남대에서도 학내 민주화 및 비리 척결을 요구하는 학생과 교수의 목소리가 들끓었다. 거리에서 이런 목소리를 내던 이들은 대개 마스크나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전문 시위꾼'이라서 자기 얼굴을 숨기려고? 아니다. 박 대통령과는 다른 방식으로 1980년대를 기억하는 이들은 답을 안다. 최루탄 냄새가 너무 독해서다. 그래서 얼굴을 가린다. 6월 항쟁 당시, 마스크를 쓰고 거리에 나섰던 시민과 학생 역시 박 대통령이 보기엔 IS 테러리스트 같았을까. 궁금하다.

지금도 마찬가지. 박 대통령이 나무랐던 지난 14일 집회에서 경찰은 종전 집회의 5배에 달하는 물을 사용했다. 그런데 최루액(PAVA, 파바)는 종전의 14배를 썼다. 최루액 농도가 훨씬 높았다는 뜻이다.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보건의료단체연합에 따르면, '파바'는 매우 위험한 물질이다. 눈에 닿거나 입으로 삼키면 '매우 유해'하다. 코나 입으로 호흡할 경우는 '유해'하다. '심각한 과량 노출'은 사망을 부를 수 있다. 그래서 시위 참가자들이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토록 복면이 싫다면, 최루액(파바) 사용부터 금지하겠다고 약속하는 게 순리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겠지. 박 대통령은 시위에 참가한 시민의 복면을 벗기는 걸로는 '끝장'을 봤다고 여기지 않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