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손이 아니고 입으로 푸는 거야
학생들의 수학 실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각종 실험을 해봤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말하기’였다. 그날 배운 것을 누군가에게 설명하도록 하는 방법이다. 교과서나 참고서 없이 자기가 이해한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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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5호] 승인 2015.06.25 08:33:07 |
‘수포자도 웃는 신나는 수학’ 강좌가 어느새 중반에 접어들었다. 첫 강좌(<시사IN> 제402호 ‘수학 못하면 시인 되기도 힘든 나라’ 기사 참조)에서 한국 수학교육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한 최수일 수학사교육포럼 대표가 네 번째 강좌에 다시 나왔다. 최 대표는 열악한 현실 속에서도 공교육만으로 ‘수학 완전학습’이 가능하다고 단언해 청중을 술렁이게 했다. 그가 말하는 수포자들의 자신감 회복 비결은 무엇일까? 6월2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진행된 강좌를 지상 중계한다.
제아무리 유명한 수학 강사를 붙여놔도 아이의 내적 역량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수학을 잘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내적 역량은 타고나는 것일까?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 국가대표로 뽑혀 나가는 아이들 정도면 타고난다고 볼 수 있겠다. 이를 위해 선발하는 예비 후보가 매년 30명 정도니까 이 정도면 대한민국 0.01%에 속하는 영재급이다. 그러나 그 밖의 평범한 아이들 또한 공교육을 통해 수학 완전학습이 가능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선천적으로 연산능력에 장애가 있는 5%가량을 제외한 나머지 95%는 제대로 된 교육환경, 교육과정, 교과서 등 여건만 갖춰지면 초·중·고교 공교육만으로도 수학을 좋아하고 또 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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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윤무영 최수일 수학사교육포럼 대표는 수학적 사고력을 강조하고 키우는 교육과정이 한국에도 빨리 도입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수학 공부의 기본 원칙은 개념과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다. 너무 흔하게 들은 얘기라고? 이게 결코 쉽지 않다. 내가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문제를 풀기 전에’ 개념이나 원리를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념이나 원리를 익히기 전에 문제 먼저 푸는 습관이 들어버리면 절대로 개념이 깊어지지 않는다. 중2 수학시간에 배우는 순환소수를 예로 들어보자. 단원 마지막에 나오는 정리는 다음과 같다. “유리수는 유한소수 또는 순환소수로 나타낼 수 있다.” 시험에서 이게 참인지 거짓인지 물으면 아이들이 답을 쉽게 맞힌다. 정리를 그냥 외웠으니까. 그런데 “17분의 1이 순환소수인가?”라고 물으면 헤매는 아이들이 속출한다. 반수 이상은 연필을 잡고 1을 17로 나누기 시작한다. 그렇게 소수점 이하 15자리까지 구하는 학생도 본 일이 있다. 녀석이 그러더라. “선생님, 소수점 아래 15자리까지 반복되는 수가 없으니 이건 순환소수가 아니에요”라고. 그런데 어쩌나. 아이가 나눗셈을 더 진행했다면 소수점 이하 17자리부터 또다시 반복되는 수가 나타난다는 걸 발견했을 것이다. 이건 막노동이지 수학이 아니다. 수학은 해보지 않고도 아는 것이다. 땅을 파보지 않고도 뭐가 있는지 알 수 있는 추상적 사고력을 길러주는 것이 수학이다. 이것이 수학 하는 기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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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신선영 경기도 신능중학교(혁신학교) 2학년 학생들이 수학 수업이 끝난 후 친구들과 함께 문제를 풀고 있다. |
오답 노트에 목숨 걸지 마세요
이는 내 경험과도 일치한다. 아이들의 수학 실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나도 수년간 교육청이나 교육방송 등과 온갖 실험을 벌여왔다. 전문가를 불러 학습법 강의도 해보고, 큰돈 들여 학교 도서관을 칸막이 형태 독서실로 개조하기도 했다. 그런데 별 효과가 없었다. 특히 골방에서 혼자 공부해 잘하는 아이는 상위 10% 정도에 그쳤다. 나머지한테는 골방에서 나와 말할 기회, 곧 그날 배운 것을 누군가에게 설명할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이 훨씬 효과가 컸다.
자신의 설명이 논리적으로 맞아떨어졌을 때 아이들이 느끼는 쾌감은 상상 이상이다. 운동을 하느라 학업에 소홀했던 고2 학생이 어느 날 나를 찾아왔다. 얘기를 나눠보니 중2 수학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더라. 이 아이와 문답식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풀이 과정마다 “왜 그 방식으로 풀었지?” 질문을 던졌다. 처음에는 버벅대던 아이가 어느 순간 자기가 생각해도 명쾌하게 맞아떨어지는 답변을 한 뒤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더라. 자기 생애에 수학책 한 페이지를 놓고 2시간 동안 대화해본 건 처음이라면서. 이 아이, 지금은 수학 교사가 되겠다고 해서 엄마와 나를 놀라게 한다(웃음). 수학이 너무 재미있어졌다는 거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기주도형 개념학습을 실천할까. 우선은 매일매일 그날 배운 걸 복습하는 게 중요하다. 지금까지 공부한 게 없어서 학습결손이 심각하다 싶더라도 일단은 현재 수업에 집중하시라. 보충은 방학 때로 미루고. 구체적으로는 귀가 후 아이가 부모 앞에서 오늘 배운 내용을 설명하게끔 하시라. 이때 아이가 교과서나 참고서를 손에 들고 있어서는 안 된다. 자기가 이해한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가 그날 수업 내용을 잘 모르더라도 화를 내서는 안 된다. 부모가 화를 내면 아이가 집에 들어서기 직전 교과서를 달달 외울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개념학습은 실패로 돌아간다. 부모가 바빠서 시간을 내기 어려울 수도 있다. 내 강의를 들은 중2 여학생이 강아지를 앞에 놓고 그날 공부한 내용을 설명하는 사진을 찍어 보냈더라. 퇴근하고 집에만 오면 꾸벅꾸벅 조는 엄마보다는 강아지가 낫다고(웃음). 아쉬운 대로 반려동물이나 인형도 좋은 청중이 될 수 있다.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학교에서 멘토-멘티를 맺는 것이다. 요즘은 굳이 대학생 멘토 없이 같은 고등학생끼리 학습을 돕는 데도 많다. 전북 순창고의 경우 학생 간 멘토-멘티 프로그램을 실시한 뒤 수학 성적 전반이 크게 향상됐다고 한다. 수원 산남중은 멘토를 자원한 학생 50여 명이 수학 하위권 학생들을 1대1로 가르쳐 하위권에서 탈출시키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요즘 고교 선택을 앞두고 고심하는 부모·학생들이 많던데 내가 제시하는 진학 기준은 간결하다. 멘토가 될 수 있는 학교에 가라는 거다. 특목고나 자사고에 진학해도 중하위권으로 처지면 대학 진학 시 ‘인(in)서울’조차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다. 그보다는 자기 수준에 맞는 학교에서 멘토 경험을 쌓는 편이 훨씬 낫다는 얘기다.
틀린 문제에 집착하지 말라는 팁도 꼭 전하고 싶다. ‘오답 노트’에 목숨 거는 학생들이 있는데, 그보다는 맞은 문제라 할지라도 이를 제대로 설명해 남에게 이해시키는 훈련을 하는 것이 수학 개념을 확립하는 데 훨씬 큰 도움이 된다. 개념은 나무의 뿌리나 마찬가지다. 모죽이라는 대나무는 땅 밖으로 죽순이 돋아난 직후부터 하루에 1m씩, 한 달에 30m까지 자란다고 한다. 그 비결은 뿌리다. 모죽을 심으면 5년간은 뿌리 상태로만 존재한다고 한다. 그 기간 강하고 넓게 뿌리를 내려두었기에 죽순이 땅 밖으로 돌출하는 순간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수학의 개념은 초·중·고 사이에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교육과정이 이를 짜임새 있게 뒷받침해주지 못해서 그렇지, 개념상으로는 그렇다. 이를테면 초등학교 3학년 때 배우는 분수가 5학년 때 비와 비율로, 중학교 때 삼각비로, 다시 고등학교 때 삼각함수와 미분계수로 이어지는 식이다. 그러니 초등 3학년 때 분수 개념을 확실히 이해해야 한다. ‘분모가 같을 때는 분자끼리 더해 분수의 합을 구한다’는 식으로 공식만 달달 외웠다가는 문제 푸는 요령만 남게 돼 나중에 삼각함수나 미분계수 개념을 이해할 때 어려움을 겪게 된다. 안타까운 건, 현행 수학 교과서가 개념 설명과 풀이 과정을 충실하게 담고 있으면서도 결론에 가서는 거의 공식 외우기로 끝난다는 사실이다. 곱셈도 본래의 개념은 사라진 채 구구셈만 남다 보니 고등학교 단계에 이르러 ‘합의 법칙’과 ‘곱의 법칙’을 제대로 이해하는 학생이 많지 않다.
특히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올라갈 때 아이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게 △, 대신 x, y가 나온다는 사실이다. 이는 연산에서 함수로 관심이 옮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함수는 곧 관계다. 둘 또는 셋 이상의 숫자 간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보는 것이 함수인 것이다. 그런데 ‘+3=5’라는 식의 연산에 익숙한 아이들은 무조건 값부터 구하려 든다. 중학교 진학해서도 ‘5x+6=36’ 같은 일차방정식 값을 구할 때는 이런 방식이 통한다. 그러나 ‘n×1/n=1, a(b+c)=ab+ac’ 같은 식에서는 n값을 구하는 게 아무 의미가 없다. 이는 단지 분배의 법칙을 설명하는 기호이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니 아이들이 기호를 보면 겁부터 낸다.
수학 선행학습이 불필요한 이유
그뿐인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올라갈 때는 학습 내용 또한 급증한다. 이 때문에 일찍부터 선행학습에 매달리는 학생들이 많은데, 학원에서 배운 문제풀이 기술로는 이들 내용을 제대로 소화하기 어렵다. 대학 수리논술에 대비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결국 고등학교 단계에서 필요한 것은 개념학습의 연결성에 기초해 문제 해결 전략과 수학적 사고력을 키우는 것이다. 3차원 문제를 2차원으로 바꿔 푼다거나, 귀납과 유추를 통해 숫자 사이의 규칙을 찾는다거나, 주어진 문제를 거꾸로 풀어보고 검산해보는 등 구체적인 실천 전략을 익혀나가야 한다. ①자릿값(진법) ②주기(패턴) ③합과 곱(산술, 기하평균) ④등주(等周) ⑤둘레와 넓이 ⑥등적(等積) 변형 ⑦비율과 기울기 ⑧독립과 종속 등 여덟 가지 수학적 사고력 또한 키워야 한다. 외국처럼 수학적 사고력을 강조하고 키우는 교육과정이 한국에도 빨리 도입돼야 한다고 몇 년 전부터 주장하고 있다. 교육부가 이를 반영하지 못하면 대안 교과서라도 만들어 이를 보급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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