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차단할 것이다 늘 그랬듯이…
최근 700만 회원을 가진 웹툰 사이트 레진코믹스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에 의해 잠시 차단돼 화제가 되었다. 방심위는 해당 만화의 음란성을 문제 삼았다. 심의 기준과 표현의 자유 문제가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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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8호] 승인 2015.05.02 11:48:56 |
3월25일은 월급날이었다. 오후 1시30분쯤 문의가 왔다. “사이트에 안 들어가져요.” 홈페이지 주소를 입력하니 ‘warning(경고)’이란 단어가 뜨며 접속이 되지 않았다. 차단 조치를 한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 측에 문의했지만 답변이 오지 않았다. 내부적으로 대응 방법을 모색하던 오후 5시쯤 다시 작동되는 걸 확인했다. 사전에 어떤 통보나 알림도 없었다. 왜 차단되었는지도 기사를 보고 알았다. 음란정보 유통으로 정보통신망법 제44조의 7 제1항 제1호를 위반했다고 했다. 700만 회원을 가진 웹툰 사이트 ‘레진코믹스’가 전하는 ‘사이트 폐쇄’의 전말이다.
해프닝으로 끝나는 듯했다. 방심위는 다음날 심의소위원회에서 사이트 차단 결정을 철회했다. 이후 박효종 방심위원장은 실무진이 레진코믹스를 해외 사이트로 착각해 의견 진술 기회 없이 차단 조치했다며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해 사과했다. 방심위가 홈페이지를 차단할 경우 절차상 상대에게 통지하거나 의견 진술의 기회를 부여해야 하지만 ‘음란물 등 불법성이 명백한 정보’의 경우는 예외로 두고 있다. 박 위원장은 사과와 함께 해당 만화의 음란성이 인정된다는 말을 덧붙였다. 콘텐츠를 심의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인 것이다. 레진코믹스는 4월28일 의견 진술을 앞두고 있다. 내용 중에는 문제가 되었던 <H 체험담>뿐만 아니라 일곱 편이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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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조남진 접속 차단 조치로 인해 실시간 검색어 1위를 기록한 레진코믹스는 그 기념으로 결제 회원을 대상으로 ‘보너스 코인’ 이벤트를 벌였다. |
미래부는 상 주고, 방심위는 차단하고
레진코믹스는 2013년 미래창조과학부가 주관한 ‘글로벌 K스타트업’ 행사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고, ‘2014 대한민국 인터넷 대상’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박근혜 대통령의 런던 순방에 함께했던 기업이기도 하다. 유승희 국회의원(새정치민주연합)은 ‘창조경제 코믹스’라 비꼬며 “방심위가 일부 콘텐츠에 음란성이 있다고 판단해 적법 절차를 무시하고 접속을 차단한 것은 명백한 위법이며, 국가 권력에 의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라고 지적했다. 접속 차단 조치로 인해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를 기록한 레진코믹스는 그 기념으로 이벤트를 벌였다. 결제 회원을 대상으로 ‘보너스 코인’을 지급한다는 내용이었다. 위기를 재치 있게 활용했다. 이성업 레진코믹스 이사는 “놀란 독자들에게 혜택을 돌려주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당황해서 가만히 있는 것보다 적극적으로 잘 대응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보수적인 방심위의 심의 기준이 또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성인물 콘텐츠에 대한 표현의 자유와도 얽힌 문제다. 음란물은 불법, 성인물은 합법이다. 방심위는 방송과 통신(인터넷)상 음란물과 성인물을 가르는 심의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 최근 몇 년간 방심위는 음란물 심의 및 제재 수위를 높여왔다. 올해 초 ‘인터넷 음란물 근절 태스크포스’를 출범시키기도 했다. 방심위의 연도별 통신심의 제재 의결 내역을 보면 ‘성매매 및 음란’과 관련된 분야가 2012년 심의 건수 1만5076건에서 2013년 3만4634건, 2014년 5만3985건으로 2년 사이에 3배 이상 늘었다. 특히 삭제, 이용 해지 등의 시정 요구 중 이번과 같은 ‘접속 차단’ 건은 2012년 5600건에서 2년 만에 3만7817건으로 늘어 7배에 가까웠다. 접속 차단의 오남용이 우려되는 부분이다. 김광진 국회의원(새정치민주연합)은 인터넷에서 이른바 ‘warning.or.kr’로 알려진 정부의 무분별한 접속 차단 권한을 제한하는 ‘방송통신위원회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등에 관한 일부개정 법률안을 지난 3월26일 대표 발의했다. 이 법안은 이번 사건 때문에 ‘레진코믹스법’이라 불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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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진코믹스에서 연재 중인 웹툰 <말할 수 없는 남매>의 한 장면. ‘부분 유료제’를 실시하는 이 사이트는 서비스 2년 만에 100억원 매출을 올렸다. |
방심위 관계자들에게도 음란물 단속은 쉽지 않다. 워낙 양이 방대하다. 한 심의위원은 인터넷과 관련된 심의 일을 “망망대해에서 쓰레기 몇 개 건지는 일”에 비유했다. “처음 소위에 들어가서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마약 유통 같은 불법행위가 계속 올라와 삭제해도 URL(인터넷 정보의 위치)만 다르게 해서 계속 올라왔다.” 음란물을 결정하는 주된 잣대는 앞서 말한 대로 성기다. 음란 동영상의 경우 모자이크를 하든 안 하든 똑같이 취급하지만 누드 사진의 경우에는 성기 노출을 판단 근거로 삼는다. 위원마다 생각이 달라 음란물 여부에 대한 생각이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의견이 갈릴 경우는 결국 다수결에 의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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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진코믹스 말고도 긴장하고 있는 업체들은 또 있다. 국내 웹하드와 P2P 업체들이다. 4월16일부터 시행된 전기통신사업법과 시행령의 개정안 때문이다. 항간에서 ‘딸통법’이라 불리는 법안이다. 개정안은 웹하드와 P2P 사업자에게 불법 음란물을 거르고 차단할 수 있는 ‘필터링’ 조치를 취하도록 했다. “음란물 검색과 송수신 제한, 음란물 전송자에 대한 경고문구 발송 등에 필요한 기술적 조처를 하고 그 운영·관리 기록을 2년 이상 보관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이를 위반하는 사업자에게 20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하도록 했다. 한마디로 사업자에게 음란물 유통 방지에 대한 책임을 부과한 것이다.
개정안 발표 후, 남성 중심 커뮤니티에서는 각종 루머가 돌았다. 이제부터 이른바 ‘야동’을 다운받거나 올릴 수 없다는 말에 외장하드를 구입해 음란물을 저장하며 이를 방공호나 ‘노아의 방주’라 부르는 등 4·16 대란에 대처하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다. 이들 사이에 회자되는 명언은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라는 <인터스텔라>의 대사다. 당장에 우려하던 대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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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통신심의위원회 제공 방심위는 올해 3월 초에 ‘인터넷 음란물 근절 태스크포스’를 출범시켰다. |
웹하드 업체가 소속된 디지털콘텐츠네트워크협회 측은 “법을 지키도록 노력하되, 면책 조항이 없고 제재 일변도인 시행령의 문제점을 피력하고 있다. 자율 규제도 논의 중이다”라고 밝혔다. 오픈넷의 남희석 변리사는 법적인 문제점을 지적한다. 기술적으로 실현 가능한 한도 내에서 책임을 지워야 하는데 지금 시행령은 그걸 넘어섰다는 설명이다. 음란물을 필터링하기 위해서는 해시값 등을 뽑아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야 한다. 웹하드 이용자가 해당 영상을 올리려고 할 때 데이터베이스의 값과 일치하는 게 있으면 자동 차단되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 동영상을 봐서 음란물이다 아니다를 판단하는 건 사람이다. 기술적 조치뿐만 아니라 인적 조치가 함께 가는 거다. 한도를 두기가 힘들다. 독일의 경우 아동 포르노를 주로 유통하는 사이트의 블랙리스트를 공유하는 데이터베이스 같은 게 있다.” 게다가 차단에 걸리지 않도록 우회하는 기술도 있다. 방송통신위원회 측은 “방심위가 심의한 음란물 20만 건이 최소 기준(데이터베이스)이 될 예정이다. 우회 기술로 빠져나갈 경우 사후 조치를 취하도록 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앞서 방심위원의 말처럼 정부가 인터넷이라는 망망대해에 성긴 그물을 던져넣고 있다. 합법적인 성인물까지 함께 건져 올리더라도 탓할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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