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0시 학교의 불빛이 나는 부끄럽다
야간 자율학습은 대다수 인문고에서 강제 운영되고 있다. 이 문제를 도외시한 채 진행되는 교육개혁은 모두 가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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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4호] 승인 2015.04.07 08:54:12 |
밤 10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아내가 뭐라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는 동물이 나오는 방송을 좋아한다. 아니나 다를까,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강아지 세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주인을 따라 동네 구석구석을 쏘다니고 있었다. 아내의 표정도 강아지들만큼이나 신나 보였다. “저 강아지들 처음에는 개집에서만 살았대. 전 주인이 목에다 1m도 안 되는 줄을 묶어놓았나 봐. 나중에는 버려져 유기견이 되었는데 다행히 좋은 새 주인을 만난 거야. 풀어주니까 저렇게 좋아하는데….”
아내는 갑자기 장모님 얘기를 꺼냈다. 작은 마당이 있는 주택에 사시는 장모님은 개 두 마리를 키우고 계신다. 처음에는 장모님도 개를 줄에 묶어서 키우셨단다. 그 바람에 개들은 몇 발짝을 뛰지도 못하고 개집을 빙빙 돌거나 제 몸을 꽈배기처럼 꼬는 일이 고작이었다. 장모님은 나중에야 줄을 풀어주셨는데 견공들이 너무도 좋아하자 그제야 후회가 밀려온 모양이었다. 그동안 왜 개를 묶어서만 키울 생각을 했는지.
아내의 얘기를 듣고 문득 이런 물음이 생겼다. 왜 장모님은 그런 생각을 처음부터 하지 못하신 걸까? 개도 인간처럼 고통을 느끼는 존재라는 것을. 최소한의 욕구나 갈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괴로움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을. 먼저 떠오른 답은 언어였다. 아무리 영리한 개라도 자신의 문제를 인간의 언어로 말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럼 만약 견공들이 인간의 언어로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하소연했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내 대답은 ‘글쎄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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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성 그림 |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보면 건물이 하나 보인다. 그 건물은 밤 10시가 훨씬 넘은 시간에도 불이 환하게 켜져 있다. 깜깜한 밤에 그 건물에서 유령처럼 쏟아져 나오는 존재들은 대한민국 청소년들이다. 그들은 버스에 실려 다시 학원으로 향하거나 귀가해 쪽잠을 자고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다시 그 건물로 들어온다. 지각을 하면 벌점 등 불이익을 받게 되므로 부랴부랴 교실로 뛰어 들어와서는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잔다.
“너 그러면 나중에 사회생활하기 힘들어져”
오래전에 교육방송(EBS)에서 본 일화다. 고등학교를 갓 입학한 한 여학생이 담임교사를 찾아간다. 학교 정규 수업이 끝나면 야간 자율학습을 하는 대신 곧바로 집으로 가서 손발을 씻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담임교사는 단호히 그 요청을 거부한다. 몇 번 더 인간의 언어로 간청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담임교사와는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자 평소 존경하던 교사를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하지만 그에게마저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된다. “너 그러면 나중에 사회생활하기 힘들어져.”
그 여학생은 그날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후에는 정신과 치료를 받는 처지까지 몰리게 된다. 나는 그날 방송을 시청하면서 죄스럽지만 일말의 희망 같은 것을 품고 있었다. 한 소녀의 값비싼 희생으로 비정상적으로 운영되는 강제 야간 자율학습이 없어지거나 완화되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대다수 인문고에서 강제 운영되는 야간 자율학습은 어린 청소년들의 정신적·육체적 건강과 행복권을 심대하게 해치고 있다. 이 문제를 도외시한 채 진행되는 교육개혁이나 인간교육은 모두 가짜라고 해도 과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말과 삶의 불일치가 보편화된 후진사회에서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 이 점을 상기하지 않는다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지금까지 애써서 한 말이 ‘견공의 변’에 지나지 않을 것을.
지금 생각하면, 장모님이 어느 날 홀연 관성의 마법에서 풀려나신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여, 나는 달걀 하나를 바위에 던지는 심정으로 이 글을 쓰고 있지만 언젠가는 이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본다. 왜 견공도 아닌 학생들을 묶어서만 키우려고 했는지, 어째서 인간이 인간의 입에서 발음된 고통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했는지 후회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을 믿는다. 그날이 오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깨닫고 행동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덜 부끄럽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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